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2화 (152/284)

152화

46. 국왕 친정(1)

김조순의 생각과 달리 이품이 혁명군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품 역시 다 계획이 있었다.

현재의 상황으로 봐서 그 소위 혁명군을 깨뜨릴 부대는, 아니, 도성에 군부대라고 할 만한 유일한 집단은 훈련도감뿐이다.

결국 혁명군과 싸운다면 훈련도감이 출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품의 생각에 그 혁명군이라는 무리는 훈련도감을 이길 수 없었다.

김조순이 직접 관리한 훈련도감은 조선군의 전통적 특성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다. 혁명군에게 승산 비슷한 것이라도 있으려면 숫자가 지금의 열 배는 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므로 혁명군이 훈련도감에 엉망으로 깨지기 시작하는 그때 자신은 행동을 개시한다.

독재 체제의 단점은 독재자가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문간에서 철퇴로 때려죽이든 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조순 하나만 없앤 뒤에, 지원이 끊기고 혼란에 빠진 훈련도감을 뒤에서 협격하여 와해시킨다.

계유정난이 증명했듯이, 이런 엉망진창으로 충동적인 계획이 또 의외로 막기는 어렵다.

전주이가의 독문병기 철퇴는 예로부터 많은 사대부가 두려워하는 바였다(활은 왕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특기다). 이미 김조순의 딸 김씨와는 안에서 호응하기로 협의를 마쳤다.

그런 다음 왕의 은혜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혁명군을 휘하에 넣는다.

평안도에 ‘세객’으로 간 남공철이 계속해서 보내오는 ‘밀서’에 적힌 평안도의 근왕 민심에 따르면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품은 남공철이 자신에게 밀서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미 혁명군은 왕의 은혜에 목메어 (이공이 가지고 있던) 종묘의 위패와 옥새를 갖추고 근왕을 위해 진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꼼꼼한 군주 이품은 비범하게도 그것만 믿지 않고 더 확실한 은혜를 못 박고자 했다.

그건 혁명군을 사용할 데가 있기 때문이다. 왕이 돼갖고 무슨 검계 깡패무리처럼 중신을 패 죽였다는 비난은 이 혁명군이 막아 준다.

미쳐 날뛰는 혁명군이 김조순의 주구 노론 일파를 다 학살하고 나면, 이품은 그 두령인 정시준과 핵심 인물들에게 살인죄를 씌워 제거한 뒤 온전한 왕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노도처럼 쾌감이 밀려드는 완벽한 공작이다. 그래서 이품은 느긋하게 훈련도감의 출동만 기다렸다. 김조순이 속이 타서 어쩔 줄 모를 거라고 믿으며 말이다.

그리고 김조순은 그런 이품의 기대를 정면으로 깔아뭉갰다.

이품은 비변사의 상언을 받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가에서 쓰던 말투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나보고…… 전장에 나가라고?”

***

비변사가 국왕 이품에게 아뢴 내용은 가히 이례적이었다.

조사의의 난 당시 태종 이방원에 이은 400년 만의 ‘국왕 친정(親征)’을 건의한 것이다.

하긴 전왕 때부터 이미 왕실이 수치심을 팽개쳤으니 신하들이라고 하여 계속 상식인의 위치에서 고통만 받아야 할 까닭은 전혀 없었다.

관점을 바꿔 보면 꼭 그렇게 놀랍기만 한 일은 아니다.

생각보다 조선 왕의 출진은 꽤 자주 있었다. 이긴 전쟁이 아니라서 자랑스럽게 회자되지 않는 것뿐이다.

후퇴나 도주도 전략전술의 하나이며, 승리와 패배 모두 전쟁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누락은 불공정하다.

최속군주 선조의 곽거병마저 경탄할 북방 전격전, 강화도에 번쩍 남한산성에 번쩍하며 육해전을 통달해 아우른 전쟁군주 인조의 사적, 그리고 최근 고구려와 프로이센의 기상을 깨우쳤던 강철군주 이공의 평양 정벌도 엄연히 친정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조선의 열성조는 필요하다면 이렇게 궁궐을 자주 비웠다. 이건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현 국왕 이품의 증손자인 고종 황제도 때가 왔다고 느끼자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진격을 결단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따라서 비변사의 붓놀림도 거침이 없었다. 전례가 있으니까.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 지금 성조(聖朝)의 종묘와 사직이 바야흐로 달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이 위태로우니[累卵之危],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때라 할 만합니다. 이제 적도가 서로(西路)를 파멸시킨 것도 모자라 해도(海道, 황해도)의 폐간(肺肝)을 가르며 쳐내려오는데 전복(甸服, 수도권)의 위험이 바로 눈앞입니다.

……

소위 혁명당이라 하는 비적 떼의 기세가 임진년의 왜구나 병자년의 호족(胡族)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도참(圖讖)의 미혹하는 말만 듣고 수괴 정시준을 높여 진인이라 부르며 따르는 형국이라, 옛 황건(黃巾)‧오두미도(五斗米道)의 무리가 꼭 이와 같았습니다.

……

이럴 때는 전례에 구애될 수 없으므로 반드시 큰 위엄을 친히 보여서 사민을 깨우쳐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천 년도 더 전부터 삼국(三國)이 다투던 요충이었고, 근세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이 산세와 성채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왜적을 막아낸 사적이 있는데, 어찌 영웅이 한번 위엄을 떨쳐 천하를 평정할 곳이라 아니하겠습니까?

……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태종대왕께서 원중포(元中浦)에 나아가셨던 일을 거울삼아 용맹한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진격하셔서 적도를 깨뜨려, 흉패한 역적을 일벌백계하심으로써 만방의 난리를 일거에 평정하도록 하소서.>

이품은 즉위 이후 최대의 위기를 느꼈다.

당연하지만 이품은 그 어떤 군사적 경험도 없다. 행주산성에 간다고 해서 무슨 권율의 영령을 받아 특별히 빛나는 재능이 개화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품은 병조 판서 남공철의 궐석을 그제야 후회했다. 그는 신하들의 뜻을 가늠하기 위해 별 의미 없는 하문을 던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양장(良將)의 군사 부리는 법으로는 움직이지 않을 때 산과 같고[不動如山], 움직일 때는 벼락과 같다[動如雷震] 하였는데 군주가 경솔히 도성을 비우는 것이 가한가? 다른 방도가 없다면 도성에서 적을 막아 보는 것은 어떤가?”

그 정도야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비변사 당상들은 즉각 답했다.

“한양도성은 무비(武備)나 용병(用兵)이 아니라 밖으로 교화를 널리 펼치고 안으로 뚜렷한 질서를 세우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서 큰 도적 떼를 막을 성은 못 됩니다. 병법의 지리(地利)를 중히 여기는 뜻으로 보면 행주산성만한 곳이 없고, 천시(天時)를 받드는 뜻으로 보면 지금이야말로 어찌 군왕이 나설 때라 아니하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충신이라면 어찌 감히 왕을 전장에 내보내려 하겠는가!’ 따위의 소리는 전혀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쯤 이품도 알았다.

이품은 김조순이 혹시 미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지금 도성에 기능하는 부대는 훈련도감뿐인데, 만약 이품이 그 지휘권을 넘겨받으면 왕의 이름으로 발할 최초의 군사 행위는 혁명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도성의 계엄과 김조순의 처형일 것이다.

물론 김조순은 미칠 것 같은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을 뿐이지 미치지는 않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리 외람된 일을 상언하며 어찌 신하된 자들이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주가 근심하면 신하는 수고로워야 한다[君憂臣勞, 『국어(國語)』]고 하였으니, 마땅히 신이 주상 전하를 보좌하여 앞에서 시석을 대신 맞고 뒤에서 등짐을 져 나르겠습니다.”

김조순도 같이 출진한다. 따라서 이품은 사실상 훈련도감의 병졸 하나도 오라 가라 할 수 없다.

이품은 본래 왕족 출신이 아니라 여항에 살던 군주다. 그래서 백성들의 실생활을 잘 아는 애민군주 이품은 그 순간 어디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깡패들이 아닌 척하고 슬금슬금 와서 어깨동무하거나 소매 잡으며, ‘장형. 이거 오랜만이오. 잠깐 나랑 저어기 골목으로 가시지요.’ 하는 꼴과 비슷했다.

‘선비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찬역을 하려는 것이로구나!’

간단히 말해 김조순과 그 사병들이 왕을 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품은 급히 풍양 조문의 ‘측근’들을 불러들였다.

***

조선 왕은 신하를 사관이나 승지 등의 입직 없이 함부로 독대할 수 없다. 이것은 꽤나 강력한 견제 장치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 가장 신의 있는 법[君子愼其獨也, 『중용(中庸)』이라 하지만 군자라면 왕 노릇 따위 할 리가 없다. 그것을 잘 아는 정도전의 후예들은 아예 왕이 혼자 있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품은 조만영을 승지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 조인영(趙寅永)을 규장각에 어거지로 들여놓았다. 물론 규장각의 6품 이하 관원이 기사관을 겸임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 끝에 세 사람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조만영이 분개하여 말했다.

“김조순의 역심은 길을 가는 사람도 모두 압니다. 그냥 거가(車駕)를 옮기시면 필시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조만영의 분노는 어느 정도는 방어적 성격이 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풍양 조문이 적절하게 끊어 줬어야 했다.

비변사가 출진 건의를 올린 순간 폭풍처럼 간하여 그따위 불충한 소리를 한 놈들을 다 효수하라고 외치는 게 정상이다.

조만영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변명하기 위한 분노 표출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우선 풍양 조문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했던 조진관(趙鎭寬, 조만영의 부친)은 조영수호통상장정이 맺어질 때쯤 해서 이미 타계했다.

사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풍양 조문이 이품에게 베팅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조선의 관리들은 가문과 더불어 입직 경로에 매우 민감하다. 현대 한국의 재무 부처에서도 특정 학교의 특정 학과 출신, 더하여 재경직(財經職) 고시 통과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지지 않으면 커피 타임에도 안 끼워주는 풍조와 비슷하다.

현대 한국인 대부분이 이름을 아는 연암 박지원조차 과거 합격 못 하고 은사로서 관직에 나갔다는 이유로 생전에는 말직이나 전전했다. 조씨 형제는 가문이야 부러울 게 없었으나 이 ‘고시 패스’가 문제였다.

왕이 특채한 두 사람은 대놓고 조정에서 멸시당했다. 보통 이러면 더러워서 현직 유지한 채 과거 보는 사람이 많은데, 조만영과 인영 형제는 멍청한 왕 뒤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 그러기도 어려웠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일천한 둘은 뒤늦게 놀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친정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고식책이라도 필요하다. 동생 조인영이 그것을 내놓았다.

“우선 급한 대로 금군이 있어야 합니다. 폐주가 파멸시킨 금위영은 아직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얼마 안 되는 훈련도감 군세를 거가를 시종하는 데에까지 돌릴 수 없다 하시고, 순라군과 남은 포뢰, 방화군(소방대)까지 모두 모아서 협련군(挾輦軍,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는 군사)을 꾸리도록 하소서.”

백성 무리에 불과한 도적 떼가 상대라는 공식적 이유와, 군량이 없다는 비공식적 이유로 훈련도감은 3천 명 정도만 출진할 예정이다.

따라서 그 반 정도만 모아도 훈련도감은 이품을 잡아 묶거나 하기 전에 재고해 볼 것이다. 이품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맡기겠다. 선전관과 환관까지 차출하여도 좋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수도와 궁궐의 무차별 징발권을 개뼈다귀처럼 던져 준 이품은 조만영을 돌아보았다.

“만약 김조순이 나를 어찌하려 한다면, 그 뜻은 틀림없이 폐주의 아들을 새로 세우는 데에 있을 터. 김조순의 딸은 여전히 믿을 만한가?”

전 왕비 김씨로서는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면 김조순을 적대할 이유가 사라진다. 김씨와의 연락 담당이던 조만영은 잠시 숙고했다.

원래 역사라면 김씨는 그의 사돈이 되는 사람이다. 지금도 동맹이기는 하나, 그 관계는 크게 다르다. 그 간단한 차이는 조만영에게 글 읽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흉계를 떠올리게 했다.

조만영은 나직하게 말했다.

“어쩌면 일이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상의 윤음대로 이번 일이 지나면 더 쓸 수 없어질 터이니, 이번에 써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안 되면 김조순의 딸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겠지만……. 잘되면 이런 황당무계한 친정 논의는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품은 상세한 계획을 듣기도 전에 허락했다. 거는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라니, 이보다 더 좋은 도박은 있을 수 없었다.

***

지금은 적군과 아군 모두가 김조순의 자율신경을 헤집어 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가 여태까지 미치지 않은 요인은 철인 김조순의 강대한 의지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의지와 육체는 또 다른 문제라, 요즘은 김조순도 기력이 너무 쇠해 보약을 챙겨 먹는 중이었다.

보약은커녕 필수 영양소도 못 챙기는 조선 인민들이 보면 수평도가 간절하겠으나 어찌하랴. 그것이 태생부터 타고난 귀족의 품격이었다.

조선의 물류가 상당 부분 끊기는 바람에 김조순의 권세로 내의원에서 강탈해 온 약재라는 사실은 그 품격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인들이 부엌에서 약을 달이고 있을 때였다.

방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던 김씨가 나타났다.

“아버님께서 편치 않으신데 여태 방에 들어앉아 있었다니 어찌 이런 불효를 저지르겠는가. 이제라도 내가 손수 하겠다.”

“저, 마님. 그런데…….”

김조순은 김씨의 효도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딸에게 바라는 것은 침묵과 순종뿐이다.

그 하인들은 김조순이 자기의 약을 맡길 만큼 오래되고 신뢰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정치적 이유로 유폐되어 있던 김씨의 처지도 대충 알았다.

그들은 서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김씨는 그런 하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희는 이천 선생(伊川先生,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頤)를 말한다)의 말을 못 들었느냐. ‘병상에 드러누워 있을 때 되잖은 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부자(不慈)하고 불효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반가의 여식인 내가 너희 따위보다 약재를 모를 것으로 여기느냐?”

“그, 그런 게 아니오라…….”

하인들은 풍양 조문과 김씨의 결탁을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지식 내에서 이 현상을 꿰맞추었다.

‘손수 약을 달이는 효도의 모범을 행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잘 보여 지금의 찬밥 신세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서까지 안 가고 삼강행실도만 보아도 전례가 넘쳐나는 일이다. 하인들은 김씨의 효성을 응원하기로 결심했다.

딱히 강경한 김씨가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들은 유교국가 조선의 신민이기 때문이다.

하인들이 떠나자 김씨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풍양 조문은 신속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김씨가 아무리 영민하다 한들 유폐된 처지에서 제한된 정보만 받는다면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다.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은 조만영의 서신은 그 점을 예리하게 찔렀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강 다음과 같았다.

<비변사가 전하께 감히 친정을 건의하며 전쟁 나가라고 내몰았으며, 이 극언에 삼사의 관원들마저 김조순에게 돌아서서 맹공을 퍼붓고 있습니다. 당장에야 훈련도감이 있으나, 이들이 소위 혁명군을 치러 나가면 김조순을 보호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둥지가 깨어지면 어찌 새알이 남아나겠습니까?>

조만영의 허풍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조정이 멀쩡하던 시절에도 김조순의 영역이었던 삼사는 지금의 독재 체제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 김조순이 어전에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왕의 뺨을 시원하게 올려붙인다 하더라도 사헌부는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시선에는 위기가 목전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

조만영이 의도적으로 취사선택해 흘린 여러 정보는 그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지금 행동에 나서야 아버지가 패배할 시에 자기와 아들은 살릴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김씨가 아버지의 약에 비상을 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단지 가문이 멸문당하기 전에 탈출하자는 생각에서만은 아니었다.

일전 김조순에게 절하면서 떠올렸듯,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김씨가 자신의 생존권을 찾으려면 김조순을 죽여야 했다.

그 이유는 지유가 그녀의 오라비 김유근을 부담 없이 속여 버린 이유와 비슷하다.

김조순은 그녀의 생살여탈을 쥐고 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예컨대 김조순이 이 상황을 뒤집고 승리한다 해도 김씨의 목숨은 여전히 김조순의 손안에 있다.

지유는 김유근이 자신의 생살여탈을 쥐려 하는 사실에 분노했고 김씨는 김조순이 이미 그러하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비상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조선이 워낙 약재의 대국이다 보니 흔한 약이기도 하고, 나인 현완의 적극적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탕기에 종이 약포를 가져다 대었다.

부친 살해[patricide].

유서 깊은 신화적 범죄는 김씨의 손을 떨리게 했다. 그 요동을 따라 검은 가루가 멈칫멈칫 떨어져 약에 섞여 들어갔다.

탕약 냄새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시야는 극도로 축소되었다.

김씨는 맥박에 따라 그녀의 손끝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느낌마저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상태는 명정의 안온함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갑자기 김씨의 시야가 넓어졌다.

김씨는 바뀐 세계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숨이 멎을 뻔했다.

부엌 문설주에 열예닐곱 살쯤 된 사내아이가 비스듬히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씨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김조순의 셋째아들이자, 후일 전 조선을 한 손에 쥐고 흔들 미래 장동 김문의 영수 김좌근은 꼭 제 아비를 닮은 칼날 같은 시선을 누이에게 꽂았다.

“누님, 지금 무엇 하시는 거요?”

========================

작가의 말

1. 풍양 조씨 형제만이 아니라, 김조순의 아들들도 사실 젊었을 때는 고시 패스를 못했습니다. 이 두 가문이 조선 말기를 좌지우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때 이미 조선의 전통적 관료제는 무너지고 있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김유근도 직부전시 거의 아버지 빽으로 받은 거고... 오늘 끝에 나온 김좌근은 김조순 회갑기념;;으로 특채를 받긴 했으나 세간의 시선이 부끄러워 관리 안 하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관직에 나아가지요. 물론 그 후로는 영의정도 3번이나 하고... 조선 선비들이 대과 합격 못한 관리를 따돌리고 승진 못하게 했다지만 그것도 큰 권세 앞에서는 발휘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