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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1화 (151/284)

151화

45. 안과 밖(3)

아마 세련된 침묵으로써 표시하는 듯한 주석의 전폭적인 지지는 남공철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주석의 신뢰를 등에 업고 힘차게 외쳤다.

“적기를 올려라!”

“오오!”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자 산 곳곳에서 말 그대로 귀신의 통곡 같은 괴성이 화답하듯 골짜기를 따라 메아리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정방산성의 관민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천지가 뒤집혔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붉은 깃발이요, 성 남문 코앞 화살 닿을 거리 바로 바깥에는 이미 그 혁명군인지 뭔지 하는 역적의 도당이 백여 명이나 집결해 있었다.

엄밀히 말해 이들은 혁명군의 정규 편제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정규 혁명군은 이미 거의 다 먼저 출발했으며, 남은 군대도 주석이 있는 본영을 지키는 데 집중되었다.

이들은 양계 사람이 아니라, 이 황해도의 백성이었다.

과거 한성 부민 이공의 가솔을 사로잡는 데에 일조하였던 곡산 사람들이, 3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혁명의 불꽃에 제련된 정금과 같이 되어 다시 고향 땅에 돌아왔다.

“반동 놈들은 혁명의 붉은 깃발 앞에 속히 항복하라!”

그들은 도저히 백 명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피맺힌 고함을 내질렀다. 지난날의 전설적 훈련대장 이완 장군의 요새 정방산성이 남루한 백성들의 외침에 떨고 있었다.

***

곡산은 애초에 인구가 많은 고을이 아니다. 민란 때도 가담자 수십 명을 다 죽이면 고을이 텅텅 빈다며 신하들이 처형을 반대했을 정도다(하지만 원래 역사의 순조는 그래도 다 처형했다).

당시 곡산 사람들은 왕대비와 왕비 등을 사로잡고 혁명막부에 합류하였으나, 시준은 그때 바로 황해도를 합병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곡산 부민들은 처지가 애매해졌다. 고향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그들은 시준의 배려로 평안도에 정착했다.

땅까지 나눠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우선권을 받아 상조농장에 들거나 혁명군 훈련을 받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길리 말 배워서 출세해 보겠다며 혁명해군에 들어간 자도 있었다.

한두 해 지나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곡산에 남겨 두었던 가솔들까지 조금씩 평안도로 건너오게 했다. 곡산 고을은 정말로 텅 비게 되었다.

행정력의 소모가 극심했던 김조순 정부는 흉년과 내전으로 흔하게 발생하던 유민 정도로만 파악했고, 곡산에 새 수령을 파견하지도 않았다. 다스릴 사람이랄 게 없으니까.

대충 옆 동네 수안군(遂安郡)에서 명목상 아울러 업무를 보는 처지였다. 하긴 원래 역사의 곡산 민란에서도 곡산 사람들이 부사 박종신의 인수를 빼앗아서 가져다 바친 곳이 옆 고을 수안군이기는 했다.

어쨌든 의도치 않게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이들은 따로 평안도에 부락을 이루어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혁명군의 남진 소식이 퍼지자마자 그들은 다시 혁명의 전위가 되었다. 곡산 부민은 늙은이건 젊은이건 모두가 달려와 자신들도 부디 출진시켜 달라며 애원했다.

고향 땅은 하루 세끼와 누울 곳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죽기 전에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시준 또한 황해도 현지 선무작전(宣撫作戰)에 도움이 될까 하여 곡산 부민들을 채용했다.

이제 혁명의 대의뿐만 아니라, 고향의 수복이라는 큰 명분까지 하나 업고 출진한 곡산 부민의 의기는 드높았다.

그들은 예전 왕비를 사로잡는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던 그들의 옛 지도자 심낙화의 이름을 쓴 붉은 깃발을 앞세웠다.

그 깃발을 만들 당시,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은 잠시 생각하다 진중하게 말했다.

“심낙화 동지의 묘는 평안도에 있소. 나중에는 곡산으로 옮겨 주어야 하겠으나, 일단 우리가 먼저 관곽 위에 풀과 뗏장[艹]을 얹어 장사지내 주었으니 마땅히 깃발에는 그 이름을 더하여야 하겠소.”

정약전이 하는 일이니만큼 당연히 꿍꿍이가 있는 수작이었으나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방해할 리가 없고, 모르는 사람은 너무나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감동할 만도 했다. 정약전은 그의 본래 이름 낙화(洛化)에 초두머리를 붙여 낙화(落花)로 바꾸어 썼다. 동생에 뒤지지 않는 멋진 필치였다.

“이로써 심낙화 동지는 장절하게 떨어져간[落] 혁명의 한 떨기 붉은 꽃[花]이 되었다!”

그 선언의 순간 곡산 부민의 애통한 오열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온 평양이 눈물을 흘렸다고 할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었다(조제프 푸셰는 자기가 한문을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떠올릴 수 있었던 생각이라며 한동안 시무룩했다).

그리고 시준은 다시 한번 단임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무서운 조선 인간들과 권력이라는 링에 같이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연을 거쳐 혁명군 곡산 특별방대는 자랑스럽게 출진했던 것이다.

***

그런 만큼, 혁명군의 모든 병사가 그들의 적기를 사랑하였으나 곡산 부민들의 깃발에 대한 애착은 특히 높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래서 남공철은 주저 없이 그들에게 명할 수 있었다.

“저 반동 놈들에게 붉은 깃발의 노래를 들려주어라!”

성문 앞에 모여 있던 곡산 특별방대원 또한 주저 없이 화답했다.

이제 귀신에서 사람으로 복귀한 프랑스 병사들이 연주하는 독일 캐럴 <오, 전나무여(O Tannenbaum)>에 맞추어서, 그 멜로디로 제창된 모든 노래 중 아마 두 번째쯤으로 유명할 노래가 정방산성 앞에 메아리쳤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기를 지키리라!”

그들만이 아니었다. 산성 안에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주위 산등성이며 골짜기에 흩어져 병사가 마치 많은 것처럼 깃발을 올리고 있던 대원들도 공명을 이루어 합창했다.

“원수와의 혈전에서! 붉은기를 버린 놈이 누구냐!”

“돈과 벼슬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네놈들이다!”

여기에서 그 열기에 휩쓸리지 않은 자는 주석 정시준 하나뿐이었다.

그는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강변하듯이 우두커니 돌아서서 뒷짐 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는 게 참 힘들었다.

‘지유야, 보고 싶다.’

굳이 시준을 위해 변명하자면, 전생의 시준이 청년이었던 시절에는 이 노래가 사상과 관계없이 대학생의 교양 비슷한 물건이었던 탓이 크다.

시준이야 일찌감치 공무원 소시민으로 진로를 바꿨으므로 희미한 기억만 남아 있지만, 동년배 친구들 중에서는 이 노래쯤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멜로디도 익숙한 캐럴풍 동요이고 말이다.

가사와 일부 가락만 간신히 알고 있던 시준에게 좀 과도한 도움을 준 것은 영국인들이었다.

시준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어쩌고 하며 흥얼거린 멜로디를 듣자마자 유럽인들은 그게 300년 전부터 내려오던 독일 캐럴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 프랑스 수병이나 영국 해군 중에서는 그것쯤 악보 없이도 쉽사리 연주할 수 있는 자들이 많았다. 단지 시준이 그게 유럽 노래인 줄을 몰랐을 뿐이다.

시준은 원래 수십 년 뒤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어야 할 적기가(赤旗歌)가 조선에서 타임 패러독스적 복원으로 탄생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선전용 노래를 고민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그 붉은색을 완벽히 재구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시준은 잠깐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당시의 시준은 이미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소한 타락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어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 노래는 폐기되지 않고 혁명군에 채택되었다.

영국 해군도 좋은 노래라며 영어로 개사해 갔다. 영국 수병도 어차피 수부 되기 전에는 악랄한 부유층과 자본가에게 시달리던 도시 노동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지라 그들의 감성에도 호응한 모양이었다.

지금 그것은 억압된 자들이 악쓰는 소리로 바꿔 내뿜는 정신적 반향이었다. 정방산성은 성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받고 있었다.

내용 때문은 아니다. 정방산성 주둔군과 홍우섭은 거리상 그 가사를 똑똑히 알아듣기도 힘들었거니와, 들었다고 하더라도 적기가의 가사는 혁명군이 아닌 사람을 감동시키기 좋은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성 앞으로 걸어오면서 – 아무도 총이나 활을 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조선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행위인 ‘합창’으로 자신을 두른 채 그것이 화살과 총알을 막아 주리라 확신하는 태도로 발을 내딛는 곡산 부민들의 행렬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시준은 원래 보수적인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 작전에 과도한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으며, 이것으로 정방산성의 기세를 내리누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혁명군이 충분히 진격하여 다른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만 홍우섭을 묶어 두면 작전은 성공이다.

그러나 혁명의 모든 부분이 그렇듯이, 결과는 시준의 예상마저 뛰어넘었다.

성문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서 뭔가 드잡이질이 나는 것 같다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성문이 열렸다.

그 순간 시준은 긴장했다. 홍우섭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해서 군대를 결집시켜 곡산방대를 전멸시키러 뛰쳐나오는 줄 알아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준다운 비관적 예측이었다.

뛰쳐나온 백성과 군인들은 뭉그러지듯이 달아났다. 혁명군을 피해서 측면으로 도망치는 자도 있고, 혁명군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는 자도 있었다.

손에 무기를 들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건 그저 손이 허전해서, 혹은 내던질 시점을 놓쳐서 그냥 잡고 있는 것쯤으로 보였다. 그 무기는 단 한 자루도 혁명군에게 겨누어지지 않았다.

뒤늦게야 자신이 그런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닥닥 놀라 총과 칼을 내버리고 뛰는 자도 꽤 많이 보였다. 혁명군에게 초입부터 큰 방해가 될 수 있었을 정방산성 주둔군은 그대로 붕괴했다.

남공철은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때를 놓치지 않은 그의 명이 곡산방대를 전진시켰다.

“나아가라! 성문은 혁명의 열의로써 열렸다! 이제 저 성은 인민의 것이다!”

“우오오오!”

주석 수발들어야 한다며 따라왔던 기랑의 전사적 감각에도 승기는 명백했다. 그녀는 시준을 보고 물었다.

“나도 갈까?”

“……아니, 너는 그냥 여기 있어도 될 것 같다.”

그 말은 옳았다. 기랑과 비슷한 생각을 한 남공철은 주석의 곁을 지키고 있던 1영대까지 모조리 성 안으로 쓸어 넣었으며, 정방산성 안에서의 저항은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남공철이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서야 곡산방대가 홍우섭을 잡아 죽이기 직전에 간신히 말릴 수 있었을 정도였다.

시준은 홍우섭을 통해 정찰총국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군량고나 무기고에 대한 정보를 뽑아냈다. 홍우섭은 완전히 망연한 채로 다른 포로들과 같이 묶여 평양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혁명군은 첫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는 함성을 내지르며 성벽에 붉은 기를 걸었다. 모두가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불러대는 광란의 잔치판이었다.

***

황해도의 상황이 잔치판이라면, 한양에 있는 김조순의 상황은 초상집이었다.

김조순은 아직도 자기가 화낼 기운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변사에서 언제 그런 명을 내렸더냐! 너희들이 진정 모두 효수되고 싶어서 군율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것이냐!”

김조순도 자기 전력은 파악할 줄 알았다. 그에게 있는 부대 중 핵심이자 전부는 훈련도감과, 관대하게 쳐 주면 훈련별대다.

남조선혁명당 진압을 위해 급히 정비되어 경기도에 나눠 투입된 한 줌의 강화도 수비군을 제외하면, 조선 수도 방위전력의 나머지는 차라리 얌전히 시체나 되는 게 낫다. 시체는 밥을 먹지 않는다는 훌륭한 장점이 있으니까.

그래서 김조순은 시준의 남침을 인지하자마자 도성 주변의 가용한 무기와 물자를 전부 한양으로 집중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는 도움도 안 되는 경기도 잔존 속오군 따위, 곡식을 날라 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역군으로 신분 전환해 버릴 생각이었다(해산하면 혁명당에 가담할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 임무를 맡을 부대 중 적지 않은 수가 멀쩡한 얼굴로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첫째 공자께서 병조의 인수와 부절을 들고 와서 모일까지 모처에 쌀과 화약, 옷이며 궁시를 쌓아 두라 하기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조순이 급하게 알아보았을 때는 이미 그 ‘쌓아둔 물자’ 따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김조순은 요 몇 년 사이 조선군의 수준이 이토록 떨어졌다는 것에 경악했다.

싸움은 잘 못해도 문서 절차 하나는 칼같이 지키던 게 조선군인데, 그저 병조의 부절이나 그것을 들고 온 자가 김조순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자 있는 문서에 넘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병조가 언제부터 군의 진퇴를 저 혼자 결단할 수 있었더냐! 이것들이 다 제정신인가!”

허나 그건 김조순이 스스로 불러온 일이었다.

강철군주의 도주 이후 김조순은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거기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지방관이며 각지 감영, 거진의 군 지휘관 역시 김조순에게 절대복종하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는 특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 결과로 김조순은 한양에서 흔들림 없는 권력을 움켜잡았다. 이품이 아직까지 감히 김조순을 치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조치는 당연히 반작용도 불러왔다.

김조순이 풀어놓은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백성들이 남조선혁명당에 대거 참여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관헌들은 김조순의 분부라면 절차고 법이고 다 무시하고 엎드려 따름으로써 지금과 같은 환장할 결과를 발생시킨 것이다.

“내 아들놈이 평양에 갇혀 있는 것은 도성에 모르는 자가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모자걸이밖에 안 되는 대가리라면 내 당장 베어내어 주겠다!”

김조순은 그렇게 펄펄 뛰었지만 담당자들은 진땀을 흘리며 변명할 뿐이었다.

“그, 공자를 뵌 적이 있는 이속이며 군관들이 한목소리로 틀림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공자께서도 이미 평양에서 달아나 영중추부사를 뵙고 명을 받았다 하셔서…….”

이것은 실제적 손해 이상의 큰일이다. 김조순의 아들이 그렇게 사고 치며 다녔다는 소식이 퍼지면 호시탐탐 김조순 실각을 노리는 이품은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김조순을 쳐내면 이품은 혁명군을 어찌할 것이냐는 질문은 이품의 폭발적인 자신감 아래 가려진다.

이품은 혁명군이 내세우는 구호를 이미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 들어갔으며, 인민의 수평은 그저 ‘자신 아래의 수평’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양반 계층에 대한 적대쯤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혁명군이 바라는 대로 김조순과 노론을 다 쳐 죽이라고 내준 다음에, 상놈들이 피에 취해 있는 동안 능란한 정치군주인 자기가 권력을 잡으면 된다.

한마디로 이품은 혁명군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조순은 걱정을 해야 했다. 김조순은 그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훈련도감을 이끌고 궁에 쳐들어가 왕을 도륙 낸 다음 자기가 혼자 정시준을 상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직의 유일한 충신’이 되어버린 경상도의 김회연이 쾌락에 부들부들 떨 정도로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김조순은 간신히 자신을 억제했다. 그는 우선 당장 할 수 있는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내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놈이 나타나거든, 묶어서 끌고…… 아니, 그럴 것도 없다. 그 자리에서 선 채로 목을 쳐서 그 모가지만 갖고 오도록 해라!”

그러고 나자 김조순은 자신을 납득시킬 시간을 얻었다. 김조순도 어쨌든 그 사칭범이 김유근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구국의 결단이라는 면에서 그는 지금 영조와 동격이 되었다. 유교국가의 공의를 위해 오륜의 첫째인 부자유친을 파괴하는 결단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아들을 죽였는데 더 못 할 일이 무엇인가. 김조순은 도덕의 선을 넘나드는 아스라한 고양감마저 느끼며 생각을 정돈했다.

‘김회연을 막고 있는 경상도 쪽 군세는 뺄 수 없다. 좋아. 하지만 나는 그 군세가 반드시 필요해. 왜 그들을 뺄 수 없지?’

그것은 왕이 이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품이 더 이상 왕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김회연이 바라는 대로 내 외손자를 왕으로 세운다고 약속한다면?’

왕 바꾸는 짓거리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이제 김조순은 한계가 없는 인간이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명분을 잃게 되고, 김조순은 그쪽 방면의 군사뿐 아니라 잘만 하면 김회연까지 복속시켜 정시준을 상대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김조순은 아까의 폭력적 충동을 다시 떠올렸다. 훈련도감을 끌고 창덕궁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편전의 문을 부수고 왕을 끌어내어…….

김조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미 강아지나 다름없는 사족들의 지지를 잃을까 봐서는 아니다. 만약 김조순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이품의 목을 쳐버리고 외손자를 추대한다면, 그건 김회연의 요구를 들어주는 꼴이며 동시에 김회연에게 항복한다는 의미도 된다.

‘간신 김조순이 뉘우치고 종통을 바로세우는 데에 동참하려 하니, 팔도순무경차관의 직임으로써 마땅히 용서하겠노라.’

김회연의 선언이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아 김조순은 속이 뒤틀렸다.

한마디로 개소리에 불과하지만, 그 개소리는 아직 마음속에서만 김조순 반대파일 사람들을 김회연에게 붙게 하는 명분이 된다.

이품은 어디까지나 ‘예기치 못하게’ 사라져야 했다. 김조순은 이 순간만큼은 혁명군이나 남조선혁명당마저 잊어버린 채로 열심히 생각했다. 어쩌면 안팎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것도 같았다.

원래의 김조순이라면, 필요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왕을 갈아치우겠다는 발상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과 이품은 김조순이라는 노론 학자가 가진 마음의 빗장을 차츰 벗겨 주었다.

사대부의 모범이어야 할 왕조차 도덕이고 의리고 다 벗어젖힌 세상. 왕도 아닌 몸으로서 무엇을 거리끼겠는가.

김조순이 본래 가진 지성은 인습의 구속을 뚫고 비상했다. 그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 날, 비변사의 이름으로 ‘이 변고를 일거에 없애기 위한’ 상주문이 올라갔다.

시준과 혁명군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9진 방어선을 유유히 뚫고 봉산을 지나 서흥부(瑞興府)까지 들이닥쳤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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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고 심낙화 씨 오랜만에 등장했군요. 예전 곡산에서 일으킨 민란을 주도하고, 시준에게 합류하러 가다가 얼결에 왕비와 왕대비 등 순조 가족을 사로잡는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전사했지요. 당시 설명되었지만 심낙화는 원 역사 곡산 민란의 지도자 중 하나이며, 이름 한자도 실제 역사와 같습니다.

2. 적기가의 가락은, 반주나 변주의 분위기가 달라서 체감이 잘 안 오지만 그 캐럴 '오, 소나무(전나무)야' 가 맞습니다. 본래는 공산주의와 밀접한 노래라기보다는 저항 그 자체의 노래였고... 영국에서 만들어진 게 19세기 후반이지요.

북한스러운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남한의 우파 단체에서도 많이 불렸습니다. 어디까지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서 작중 캐럴이 나온 것이므로 제 사상에는 한 점 의혹이 없습니다.(혹시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면 제가 잡혀간 겁니다.)

3. 황주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봉산, 봉산에서 남으로는 서흥, 서흥에서 남으로는 평산이며 여기서 더 남쪽으로 가면 경기도에 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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