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45. 안과 밖(1)
혁명군이 막 황주군 경계를 넘은 그 순간, 서울에 있던 김조순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조순이 그 지위에 어울리는 초능력을 가졌다거나 조선군이 갑작스럽게 전화의 이치를 깨달아서는 아니다.
혁명군의 침공은 도(道)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준만 아는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입체적’이었다.
***
김조순은 그의 성명절기를 발휘했다.
특례로 영중추부사를 대면하는 것이 허락된 중림 찰방 성석귀의 귓가를 묵직한 돌벼루가 스치고 지나갔다.
콰지직! 김조순 집 마당에 과거의 시준처럼 엎드려 있던 성석귀의 뒤에서 벼루가 부딪치며 박살 났다.
차라리 시준처럼 닭이라도 튀겨 왔다면 김조순에게도 다른 던질 물건이 있었으련만, 성석귀의 처지상 그런 치밀한 준비까지는 조금 힘들었다.
성석귀는 벌벌 떨면서도 벼루에 정통으로 맞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도가 겸 무협지 작가인 김조순의 투척술이 겨우 그 정도는 아니다.
김조순은 지금 일부러 빗맞힌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할 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혼자만 살아 도망쳐 온 주제에 적도의 사세나 동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소리렷다?”
그 미쳐버린 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성석귀는 가솔들을 방패로 앞세우고 혼자만 잽싸게 도망쳤다. 역시 잘 사는 분들은 괜히 잘 사는 게 아닌 셈이다.
천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석귀의 영민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파라는 게 거의 없어진 현재의 조선 조정에서 붙잡을 동아줄의 선택은 손쉬웠다. 성석귀는 권세가 김조순의 집으로 직행했다.
자신의 적을 김조순의 적으로 만들어 확고한 보호와 자신의 결백을 모두 얻겠다는 그 판단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허나 성석귀가 움켜쥐려 했던 동아줄은 지금 추상같은 질책이 되어 성석귀를 후려치고 있었다.
만약 김조순이 바라는 대로 그때의 배후며 상황을 전부 세세히 알아 오려 했다면, 성석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으니 억울한 노릇이기는 하다.
그러나 김조순은 무능한 버러지의 억울함까지 일일이 헤아려 줄 여유가 전혀 없었다.
성석귀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소, 소관은 오로지 시급히 변고를 알리고자 하는 충심 하나로…….”
“네가 조정의 녹을 처먹는 관원으로서 그 임무가 무엇이냐. 수천의 역졸을 거느리고도 몇십 명의 도적 하나 막지 못하고, 게다가 그들의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않다면 필연코 역참을 끊을 것일진대 서쪽의 혈맥인 중림도(重林道, 중림역이 관할하는 도로)를 그대로 내팽개쳤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김조순으로서도 정말 많이 참은 것이다.
처음 성석귀가 긴히 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들었을 때,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김조순은 그가 혹시 정말 ‘긴히 고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짧은 대화 끝에 김조순은 성석귀가 적의 정보는커녕 아군의 정보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쉽게 깨달았다.
성석귀는 자기가 관할하는 역졸이나 도로의 중요성 및 규모는 떠올려본 적도 없었다. 그 돼지 한 마리 가치도 없는 목숨을 살리려 황급히 도망쳤을 뿐이다.
그걸 확인한 그 순간 김조순은 벼루를 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석귀의 명줄은 아직 조금 남은 모양이다. 때마침 하인이 들어와 한성 판윤 김이익이 급히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용건을 뻔히 짐작한 김조순은 일단 성석귀를 치워버리기로 했다.
“저자를 끌어가 가두어라!”
끌려가는 성석귀의 억울하다는 고함이 잦아들 때쯤, 김이익은 김조순을 대면했다.
김이익은 평소에도 딱딱한 그 얼굴을 아예 쇠처럼 굳히며 말했다.
“변란이 일어났네. 그저 지금까지처럼 환곡, 군포 때문에 못 살겠다며 창고 터는 시시껄렁한 화적은 아닌 모양이야.”
김조순은 한숨을 쉬었다.
“들었소이다. 남양도호부에서 들고 일어났다지요?”
김이익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뭔가 헷갈린 것 아닌가? 내가 들은 바는 간민들이 합세하여 용인현의 치소를 파하였다는 것인데.”
“용인이라고요?”
“그래. 어처구니없지만 이건 그저 백성들이 홧김에 난리 친 것이 아닐세. 용인의 향사(鄕士)인 서파(西陂, 유희)라 하는 자가 앙심을 품고 지도한 모양이야. 끔찍하게도 현령의 모가지를 말에 묶어 한나절을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고 하네! 예전에 장원급제하고도 벼슬에 안 나왔다고만 들었는데 이토록 흉패한 뜻을 품었을 줄이야!”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였다. 그래서 김조순은 도저히 김이익이 용인과 남양을 혼동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김조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예도 잊은 채 김이익의 앞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즉각 도성 주위의 모든 도로를 따라 파발을 보내라고 외쳤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조선의 지방관이며 군관, 찰방이 전부 성석귀처럼 무능하지는 않다. 김조순이 허둥대는 동안 이미 속속 보고는 도착했다.
남조선혁명당이 정찰총국처럼 전문적 조직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는 봉기 후 진압당하거나 일이 누설된 곳도 있었고, 쾌속 고문 끝에 그 배후 역시 어느 정도는 더듬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밝혀내 봐야 늦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반나절 뒤, 평생 겪어 보지 않았던 숨막힐 듯한 고통 속에서 자료를 취합한 김조순의 코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간 억눌러 왔던 심화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김조순은 피를 흩뿌리면서 서안을 뒤집어엎었다.
관 얹고 나서는 두 번 다시 쓰지 않았던 쌍욕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시준, 이 애비 셋 가진 종놈의 새끼! 네가 감히 나를 배신했다는 거냐!”
김조순은 사실상 경기도 전역이 적군이 되어버렸다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경상도 근왕군과 양계의 혁명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나 역시 김조순은 반동분자의 수장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근왕군과 혁명군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김조순은 현재 시점에서 ‘외부의 군대’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김조순의 계획이 다 어그러진 가장 큰 이유이자, 조선 정부의 급소이며 가장 중대한 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조선의 분노한 천만 민중 그 자체다. 김조순은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
경기도 내, 그것도 확인되는 곳만 세어 스물여덟 군데에서 변란이 터졌으며, 그중 태반은 이미 수령이 유교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방법으로 척살되었다.
군대는 대체 뭘 했느냐는 김조순의 절규는, 조선군 속오군 대다수가 그냥 백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난리가 나고 나면, 병영에 주둔하는 한 줌 상비군을 중심으로 백성을 소집하여 군을 꾸려 나가는 것이 조선의 방식인데 이번에는 백성이 정부를 침공한 상황이니 그 체계가 작동할 리 없다.
각 고을 병방이 거느린 나장이며 포리는 숫자가 너무 적어서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예 향임마저 (살기 위해) 합세하여 반군에게 수령의 모가지를 들어다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용인 혁명당의 정신적 지주 사주당 이씨의 예측은 정확했다.
경기도만 해도 42개에 달하는 혁명당 지부는, 남양도호부에서의 쾌거를 전해 듣고 일제히 봉기했다. 광란적인 기세가 ‘남조선’ 전체를 휩쓸었다.
그들의 혁명 양상은 평안도와는 약간 달랐다.
시준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답게 혁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이 진행했던 평안도에서의 사업은, 이 시대에서 말하는 진짜 혁명과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본래 혁명은 그렇게 부드럽지 않다.
조제프 푸셰 같은 사람에게 익숙한 ‘진짜 혁명’은 남쪽에서 실현되었다.
***
남조선혁명당의 아버지 조제프 푸셰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명하다 함은 자기 지식만 많다는 뜻이 아니다.
푸셰는 자신과 남의 입장을 유연하게 바꿔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조선 사람들에게 무리한 계몽론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근래 가장 주목할 만한 철학자인 프로이센 사람 칸트의 날카로운 이성은, 뭐, 본인은 부정할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볼테르와 혁명 철학당에 상당 부분 근거하지요.
또 그들은 그 전의 스피노자와 에라스무스를 공부한 자이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일조한 그 토대 밑에는 다시 교부철학과 그 주춧돌이 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소.
허나 조선 민중에게는 그러한 바닥이며 기둥과 서까래가 없지. 사상교육이랍시고 화려한 지붕부터 얹어 봐야 집은 무너질 뿐이외다.”
시준이 없는 자리에서 푸셰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시준이 출진하면서 준 푸셰 감시의 임무 이전에, 동방 예악문물의 대표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정약용이 즉각 반박했다.
“동지께서는 어찌하여 동방의 학예를 깔보는 것이 이리 심하시오? 어디 한번 들어보시오. 주석이 들여온 영길리의 책은 나도 읽어보았지만, 소위 말하는 희랍(希臘, 그리스)의 학자들보다 천 년도 전에 주(周)가 문명을 세우고 예악을 정립하였으며 이후에 백 갈래 학문의 경쟁[百家爭鳴]이 있었소.
다시 예가 바로잡힌 한나라 때에는 마융과 정현이 이름을 떨쳤고 기자가 조선에 학식을 전했지. 송나라 구양 문충공(구양수)의 대에 이르러서는…….”
푸셰는 손을 내저었다. 곧이어서 고려와 조선에서 펼쳐질 화려한 유학자의 계보를 자랑할 생각이었던 정약용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외사통호국장 동지만큼은 아니라도 나 역시 대강은 아오. 그러나 내가 본 바로, 당신들의 철학은 지나치게 실리적이야. 민중으로 하여금 ‘충효(忠孝)’로써 통치에 순응하게 하고 통치자는 ‘인애(仁愛)’로써 선량하게 보이는 덕목을 갖도록 하지. 그것은 당신들이 ‘예(禮)’라고 부르는 정치 규약의 집약체로 대표되오.
그러나 그건 차갑게 계산된 기술[la technologie]에 지나지 않소. 뜨겁게 폭발하는 열정이 아니란 말씀이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게 필요하고!”
피상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조제프 푸셰는 어느 면에서 다른 유럽 사람이 할 수 없는 관점으로 동양 철학을 파악했다.
실제로 유학은 황당한 신비주의나 근거 없는 도덕론에서 가장 먼 학문이다.
유교는 국가 정치의 정규 시스템으로써 예학을 제시했고, 고속 정보통신이 미비한 시대의 가장 효과적인 국민 통제법으로 삼강과 오륜이라는 알기 쉬운 구호를 만들어내었다.
지배층을 구성하기 위한 착안점에는 육예(六藝)가 있고 문화를 손에 쥐려면 시문과 음악이 있다. 투쟁은 대부분의 경우 낭비와 멸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덕(德) 또한 사회 단결의 명확한 비전이었지 결코 허망한 윤리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공자가 ‘살아 있을 때의 일도 모르는데 귀신 섬기는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무신론이나 이신론이 아니다. 그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긴 정치학 강좌라고.’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유학은 그런 정신을 토대로 모든 학문을 철저하게 실용의 기치하에 예속시켰다. 천문학은 농업 생산에, 수학은 국가와 군사 경영에, 기하학은 토지 측량에, 화학은 의술과 약학에 활용되었으며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탐구는 ‘비실용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심도 있게 연구될 만큼 존중되지 못했으며, 이는 유럽인들과는 크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
‘실용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분수로 나눠떨어지지 않는 무리수라는 사실이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그러나 그 학문에 불필요한 종교적 열정으로 몰두했던 유럽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가장 실용적인 것들을 만들어내었고, 이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전근대 동양인이 ‘비실용적’이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찰, 즉 유럽인에게 지나치게 실리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들은 동양 사람이 보일 만한 흥미로운 반응은 시준에게조차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정약용이야 통탄하겠지만 시준은 동양 철학이든 서양 철학이든 둘 다 잘 모른다.
정약용 역시 얼떨떨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동지는 남조선혁명당을 어떻게 훈육하여 ‘뜨겁게 폭발’시켰다는 거요?”
“간단하오. 이건 주석 동지에게도 말했던 건데, 어차피 프랑스 혁명 때도 민중은 볼테르니 베이컨이니 그런 건 몰랐다는 말씀이야. 나는 사람들이 가장 불러일으키기 쉬운 것만을 골라 내주었소.”
“그게 무엇이오?”
푸셰는 대답을 약간 미루고 찻잔을 들었다. 요즘은 중국을 오가는 평안도 상인들에 의해 홍차도 수입되어 푸셰는 만족할 만한 티타임을 즐길 수 있었다.
푸셰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탐욕, 분노, 숭배[avidité, colère, adoration].”
***
남조선혁명당은 토지 겸병으로 소작농을 겹겹이 착취하는 아전과 지주, 관리가 왜 타파되어야 하는지 연설하지 않았다.
끝을 불에 구워 단단하고 날카로워진 목창이 바로 그들의 연설이었다.
그들은 평안도에서 시준이 했던 것처럼 사족과 농민 사이의 조심스러운 타협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물리도록 봐 온 부패 관리가 아니고서야, 세상에 강도와 흥정하는 관헌이 있던가?
또 그들은 평안도에서처럼 우연과 세심한 계산이 겹쳐진 노비의 신분 상승 같은 정치적 곡예를 부리지 않았다.
당장 칼 든 놈이 높으신 분이요, 총 든 놈은 더욱 높으신 분이다.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반동’을 너른 마당에 끌어낸 쪽이 원님이고 판관이었다.
남조선 천지에 울리는 고함은 한 가지였다.
“내놔라! 내놔라!”
드디어 사람들은 깨달았다.
창고에 있는 곡식, 양반놈들이 휘감아 걸치고 있는 비단, 그리고 모리배들이 끌어안고 있는 돈꿰미는 사실은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들었으나 협잡과 폭력으로 빼앗긴 것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다. 빼앗긴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니, 가능하다면 환곡처럼 이자까지 두둑이 쳐서 말이다.
“내놔라! 내놔라!”
“지, 진정들 하시오! 창고를 열 테니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그러나 목숨만은……!”
그것도 어림없는 소리였다. 복공의 격문처럼, 그들은 얻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탈환해야 했다.
탐욕에 덧붙여서 자리한 분노가 몸을 일으켰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우리가 비렁뱅이인 줄 아느냐!”
그들이 굽실거려야 했던 지주가 거꾸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 지주가 서리들과 농간하여 땅문서를 조작한 덕에 삽시간에 땅 뺏기고 작인이 되어, 혹독한 굶주림 끝에 자기와 가솔을 노비로 팔아야 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섰다.
애당초 그들의 재산 모두를 돌려준다 하는 것은 협상이 될 수 없다. 그건 장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놓아야 하고, 이제는 죄에 대한 처벌을 받을 차례였다.
가장 난폭한 노비가 큰 박도를 휘둘러 단숨에 지주의 머리를 깨버렸다. 혁명당원들은 괴성을 지르며 시체에다 창을 내질렀다. 그들은 ‘반동패거리’의 몸을 창에 꿰어 상여처럼 둘러메고 행진했다.
“죽여라! 죽여라!”
“부자 놈들과 작당한 저 아전과 수령도 죽여라!”
본래 조선 수령은 학정의 죄를 ‘탐욕스런’ 좌수와 나장이며 육방에게만 밀어놓고, 자기는 자못 덕 있는 척하기 좋아했다(사실 왕도 그랬다).
그래서 이전까지의 민란은 직접적 수탈자인 향임이나 색리 계층을 주로 목표했다. 수령의 경우는 대개 모자, 관인 등 권위를 빼앗거나 추방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것이 동방예의지국의 반란이었다.
허나 정 진인이 깨우쳐준 바에 따르면 모두가 속임수. 그러한 수탈을 뒤에서 조종하고 묵인한 흉수는 수령이다. 혁명당원이라면 이미 모두 사상교육을 이수했으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지 알았다.
무지막지한 고문과 혹형이 경쟁적으로 가해졌다. 천민들은 원래 자신만 누릴 수 있었던 불법 가혹행위를 수평도에 따라 기꺼이 양반에게도 나눠주었다. 인민은 수평하니까.
수령의 혀가 뽑히고 아전의 팔목이 잘려나갔다. 말할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게 된 지배자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무기를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한 탐욕과 분노는 인민이 보증했다. 인민 모두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가소로운 질문에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인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위대한 주석 정시준 동지께서 곧 오신다!”
“해도정출한 정 진인께서 승리의 땅 남조선에 강림하시리라!”
홍경래가 일찍이 가산에서 궁구했던 정감록의 이치는 정확했다. 혁명은 북쪽에서 일어났지만, 정감록의 십승지는 사실 전부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와야 하는 자라면 그자는 북쪽에 있는 자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후대에 최남선(崔南善) 역시 분석한 바 있지만, 조선 민간의 여러 종교결사가 가진 공통분모인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은 바로 이러한 명제에 기초한다.
약속은 지켜졌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주석 동지께서 승리를 위해 남진하신다!”
‘남조선’ 사람들은 푸셰의 말마따나 숭배의 대상을 확실히 손에 움켜쥐었으며, 이제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숭배의 대상은 그들의 죄마저 전부 가져갈 것이기 때문에.
***
시준 역시 그러한 책임을 이제 와서 사양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혁명군이 황주 읍성을 무혈 함락하고, 그 바로 뒤쪽의 방어 거점인 정방산성(正方山城) 앞까지 다다랐을 때도 시준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
작가의 말
1. 육예는 선비가 갖춰야 할(지배층이 갖춰야 할) 여섯 가지 소양을 말합니다. 공자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유교가 만든 건 아니지만, 유학은 고대의 '이상적' 정치를 표준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작중처럼 표현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현대어로 하자면 정치(예), 문화(악), 군사(사, 어), 문해와 지식(서), 수학 능력(수)이라는 상당히 합리적인 평가 기준이지요.
2. 남조선신앙이라는 말은 실제로 있는 용어이며, 조선의 전통 체계를 '개화기'에 맞추어 많이 번역하고 정립했던 최남선(그 친일파 최남선 맞습니다)이 썼던 말입니다. 현대에도 연구되어 관련 논문도 적지 않게 있지요. 작중 나오는 남조선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어느 공화국의 선전책동이 아니고) 대개 그러한 정감록적 맥락에서 쓰였습니다.
3. 작중 조선군의 안 좋은 점이 꽤 부각되었지만, 조선군도 없는 살림에 국방 유지하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황주 읍성과 정방산성의 위치 및 그 남쪽의 방어체계도 양란 이후 상당한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물입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편에 약간 나오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