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44. 개전 전야(1)
혁명군의 최고사령관이자 평서대원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시준의 전공은 전쟁이 아니다.
똑같이 혁명군의 최고 지휘자이면서 강철의 대원수였던 어떤 사람도 괜히 비전문가가 나서다가 나라 말아먹을 뻔했으니 꽤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시준이 해야 할 일은 내부 조율과 후방 안정이었다. 혁명군의 사기 문제 때문에 그도 출진하기는 하지만, 전방에 나서는 일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정치국 회의를 개최하기 전 혁명무력국 부국장 남공철을 불렀다.
아무리 병조 판서라도 원로공신 차형기보다 높은 서열에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중요한 전쟁 전야의 마지막 회의에 현재 막부 최고의 전쟁 전문가인 남공철을 불러내어 좌중을 압도하게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이 아니다.
혁명 세력은 내부에서 단결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조선 정부와 달리 그들에게는 전통의 구속이 없다. 다소 불공정해 보여도 능력보다는 충성을 우선해야 했다.
남공철도 그런 사정은 헤아릴 만한 사람이었다. 남공철은 주석이 정치국의 일보다 한 단계 아래인 실무적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는 태도를 취했다.
시준 역시 현재 정치국의 최고 기밀을 부국장에 불과한 남공철에게 성의껏 설명하여 그를 존중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병귀신속이지요.”
여유 재정을 전부 군에 투입한 막부 혁명무력국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다른 곳은 훔쳐보지도 말고 의주대로를 따라서 쳐 내려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서울을 함락한다. 어차피 보급 문제 때문에 다른 전략은 선택하기도 힘들었다.
아직 복잡한 경로의 기동전을 수행할 만큼 혁명군의 전투 역량이 성숙되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경험 많은 야전 사령관이 각 부대마다 붙어 있거나 무선 전화기가 있어야 하는데 둘 다 무리다.
기밀이라기엔 가짜 정보가 아닌가 의심될 만큼 영양가가 없었다. 남공철은 장황하게 설명하는 시준의 침공 경로를 단 한 마디로 요약했다.
“결국 사행길이라는 말씀이군요. 주석 동지.”
그러고는 부끄러워하는 시준 앞에서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 하여도 이치에는 맞소이다.”
이제 막부의 관료가 다 된 듯한 남공철이 건조하게 말했다.
“훈련도감은 5천 명 정도 되는데, 도성 주변에 빈발하는 명화적 떼를 진압하느라 항시 머무르는 병사는 3천 명 정도일 것이오이다. 김조순이 최후까지 훈련도감을 쥐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국왕 때문입니다. 훈련도감이 자리를 비우면 왕이 장사들을 모아 김조순의 목을 칠 테니까요. 그러므로 행주산성이라든가 임진강에 무엇이 있을 걱정은 없습니다. 역시 연행로를 신속히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올시다.”
시준은 그 역시 직접 보고 들은 조선 왕실의 독문무공에 대해 물었다.
“얼마나 빨리 내려가야 왕이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소?”
“도주? 아마 못할 겁니다. 그 두 성은 김조순이 돌이킬 수 없이 파멸시켰습니다. 간다면 강화도인데……. 그러라지요.”
여차하면 비장의 카드인 혁명해군을 과감히 출진시킨다는 안을 내어 남공철을 놀라게 할 생각이었던 시준은 거꾸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남공철이 느긋하게 설명했다.
“굳이 혁명해군을 무리하게 써서 강화도의 돈대와 맞서 희생을 낼 필요도 없소이다. 강화도 몽진은 달단이나 여진처럼 본거지가 멀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는 외구(外寇)에게 통할 수작입니다. 만약 왕이 그리로 이어한다면 우리는 손쉽게 뒤를 튼튼히 하면서 군주 없는 도성을 떨어뜨리면 되오이다.”
시준은 단순명쾌한 해결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혁명막부에게 있어 조선은 외국이 아니다. 왕이 강화도로 도망간다면 물길을 틀어막고 – 군대도 필요 없다. 경강 상인이면 충분하다 – 나머지 전 지역을 장악하면 그만이다.
시준의 기대대로 남공철은 현재 조선군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전략을 제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직도 아니고 ‘현직’ 병조판서니까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가치는 지금처럼 상투적인 전략 분석 정도가 아니다.
아직 남공철의 배반은 조선 조정에 입수되지 않았다. 아직 불충분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시준이 최대한 개전 시기를 앞당긴 이유 중 하나다.
남공철은 곧 자신의 진짜 쓸모를 제시했다.
“저는 서울을 나올 때 병조 판서의 인수와 부절도 모조리 갖고 나왔소이다. 물론 조정의 관인과 문서도 갖추어져야 하므로 오래 속이기는 어렵겠으나, 많은 군세가 혼란을 일으킬 것은 분명하지요. 훈련도감은 어려워도 황해도 관군 잔당과 경기도 속오군에게는 통할 것입니다.”
조선이 워낙 동방예의지국인지라 조선군도 거의 군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자로가 칼날 앞에서도 의관을 정제하였듯이 군자는 태산처럼 체모를 지키는 법이다.
따라서 남공철의 수작으로 명령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자리를 엄수할’ 것이다. 안 싸워도 되는 핑계를 발견해서가 절대로 아니다.
잘만 되면 일부 부대의 투항도 노려 볼 수 있다. 훈련도감 하나만으로도 긴장해야 하는 혁명군으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도움이다.
남공철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뭔가 어려운 말을 할 듯한 분위기였다.
“계속 말씀해 보십시오. 부국장 동지.”
“……여러 장수들을 몰래 설득하고 또 안에서 호응하도록 하려면 김조순이 믿는 한 사람을 남쪽에 파견하여 흔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를 보내 주시기는 어렵겠지요?”
시준은 난처하게 웃었다. 아직 남공철은 혁명군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배신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솔을 인질로 잡았다 해도, 최악의 경우 남공철은 김조순에게 가서 여기서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할 수도 있다.
같은 배신자인 정약용이나 서유구 같은 경우는 돌아갈 상대인 강철군주가 이미 사라졌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까지 막부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기에 의심받지 않는 것이다.
시준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소.”
“그러시리라 생각했소이다. 그러면 아쉬운 대로 문서나 만들어 보도록 하지요.”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남공철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잠깐. 부국장 동지는 어렵더라도, 그 계책에서 취할 것은 있소. 김조순이 믿을 만한 자가 한 사람 있소이다.”
남공철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현재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중 김조순이 자신보다 더 믿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게 누굽니까?”
시준은 만상 시절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륜의 으뜸은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바로 그의 아들이오.”
***
남공철은 시준의 지모를 크게 칭찬하고 돌아갔다. 어련히 생각이 있어서 김유근 이야기를 꺼냈으려니 하는 짐작도 있었거니와 그의 위치에서 주석에게 구체적 계획이 뭐냐고 따져 묻기도 어려워서였다.
남공철의 처신은 틀리지 않았다. 굳이 틀린 것이 있다면 시준의 허세 쪽이었다.
생각해 보니 김유근이 자기 말을 듣고 아버지를 배신하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준은 밥이라도 좀 잘 챙겨 줄 걸 하며 후회했다(감옥에 처박은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시준은 혁명군과 출정식 정도만 같이 할 계획이어서 당장 출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룻밤 정도 고민해 볼 시간도 있었다.
그 결과로 지유는 돌아오자마자 끙끙대는 남편을 보게 되었다.
당분간 나갈 계획이라 해서, 시준이 좋아한다고 기랑에게 들은 샌드위치까지 준비해 놓았던 지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고민에 너무나 몰두해 있던 시준은 남자들 특유의 무심함으로 그냥 말해 버렸다.
“지금 감옥에 있는 김유근을 어떻게 반간으로 써 보려 하는데 설득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구나.”
김유근에게 깊은 원한과 은혜가 동시에 있는 지유는 흠칫했다. 한동안 가라앉아 있던 흙탕물 같은 찜찜함이 시준이 던진 돌멩이에 의해 떠올라 흩어졌다.
물론 둘 다 김유근이 멋대로 지유에게 반해서 벌인 일이니 지유는 조금의 잘못도 없다.
그러나 책임은 항상 잘못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에게 지워지게 마련이다. 홍득주가 지유를 보호하지 않았으면 그녀 역시 그때의 고난의 행군 와중 ‘역적에게 꼬리쳐서 집안 결딴낸 년’으로 몰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시준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유는 조선 사람다운 가책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샌드위치를 치워 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뭘 하면 되는데?”
시준은 아직도 지유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대었다.
“김조순의 아들이라면 얼굴이 곧 신표니까, 거기에 병판의 문서를 들고 간다면 속오군은 물론이고 도성의 잡다한 부대들…… 훈련별대나 졸경군(卒更軍, 순라군) 따위를 엉뚱한 곳으로 보낸다거나 투항시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그러라고 하면 그 작자는 천하의 멍청한 놈도 다 봤다 하며 대번에 자기 아비에게 달려가겠지. 이를 어쩐다…….”
예전에 중국 가서 조선 독립을 쟁취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준은 지유에게 일 얘기를 그다지 숨기지 않았다. 지금 말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유는 시준이 자신에게 뭔가 행동을 촉구한다고 생각했다.
불쾌한 느낌은 아니다. 책임에 기반한 부담감이라기보다는 애정에 기반한 의무감에 가까웠다.
지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준에게 말했다.
“내가 나서 볼게. 좋은 생각이 있어.”
시준은 그제야 김유근과 지유의 관계를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든 시준은 지유를 막으려 했다.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니야. 너와 그 작자를 다시 얽히게 하기는 싫어.”
그러나 지유는 이미 결심한 뒤였다. 그녀는 시준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시준이 더 이상 망설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명분을 준다는 취지에서 조곤조곤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고 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리의 신하가 아니잖아. 그런데 나라고 해서 가만히 평양에 앉은 채 그 많은 사람들의 핏값을 받을 수는 없어. 그건 전혀 ‘혁명적’이지 않잖아?”
“지유야. 너는 이미 지금까지도 충분히 고생했고…….”
“그건 대의를 위한 건 아니었지. 누구는 편하게 있고 누구는 팔다리 수고롭게 놀려 가며 일하고 싸운다면, 이제까지와 다른 게 뭐가 있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 보고 싶어.”
시준은 지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유는 그런 시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위험한 건 아니니까. 잠깐 가서 얘기만 하고 올게. 단지 너는 따라오면 안 돼. 기랑이랑 같이 갈 거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부부였기에, 시준은 지유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
옥리 노릇 하던 혁명군 병사들은 지유를 보고 좀 많이 놀랐다. 어떤 병사는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같이 온 급양과장 기랑이 주석의 명이라는 사실을 보증하자 들여보내 주었다.
본래 조선의 감옥이라는 것은 죄수를 오래 가둬 두기 위한 구조가 아니다. 그러나 단 세 사람만은 오로지 그들을 위해 특별히 건설된 장기수 전용 감옥에 갇혀 있었다.
처음에 시준은 간편하게 지하실을 팔까 하였으나, 사람이 몇 년이나 햇빛을 보지 못하면 죽는다.
서로가 갇혔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엄중한 설계로 분리된 독방 세 개인지라 호사스럽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강철군주 이공과 그의 근위대장 홍경래가 지금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호사에 감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아직 혼자 밥숟갈 정도는 뜰 만했다.
부상 자체는 사지가 날아간 둘에 비해 경미했다 해도, 지금은 장미 가시에만 찔려도 죽을 수 있는 시대다.
홍경래군에게 계속 끌려다닌 것도 모자라 감옥에 3년이나 처박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유근이 아직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유근은 방금 죽을 뻔했다. 갑자기 나타난 지유의 모습은 사람을 놀라 죽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 어, 어떻게……?”
김유근은 혁명군 병사와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눈을 비빈 것이다. 큰칼을 쓰고 그 짓거리를 하니 좀 웃기기는 했다.
그러나 지유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전에 나를 구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러 왔소. 그간 몸이 좋지 않아 운신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거든요.”
한참 생각하던 김유근은 겨우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관군의 화살을 맞고 그대로 살해당할 뻔했던 지유를 구했다.
남에게 베푼 은혜를 일일이 새겨 두지 않았으니 정녕 군자라 할 만했다. 철인 김조순의 아들이 멍청이라는 모함은 부당하다.
면밀하게 김유근을 관찰하던 지유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틀어 올린 머리에 가 닿았을 때를 정확히 노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지유와 김유근의 얼굴이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그때 그대가 나를 구해 주셨기에 나는 목숨을 건지고 혼인도 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었소. 이것은 약소하지만 내가 주석에게 말하여 가져왔으니 천천히 드시오.”
그러자 기랑은 정말 싫다는 듯이 찬합 하나를 내주었다.
김유근으로서는 정말 몇 년 만에 보는 쌀밥과 고기였다. 김유근은 잠시 이성을 잃고 그것을 퍼먹다가 문득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떠올렸다.
김유근은 헛기침을 하고 입가에 붙은 밥풀과 기름을 쓱 닦아냈다. 그런다고 멀쑥해질 몰골은 아니었지만.
“말하는 것으로 봐서 역시 주석…… 정시준이 그대를…….”
“그래요. 어린 시절의 인연이 있고, 아비의 명도 있어 기쁘게 출가하였소.”
김유근은 지유가 화살에 맞았을 때 시준의 이름을 부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씁쓸한 탄식만을 뱉었다.
그러나 김유근은 다음 순간 지유의 말투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유근은 지유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다. 실제로 지유는 그런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지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인의 마음이란 갈대 같은 것이라. 그래서 믿고 싶은 사내를 의지하게 되지요. 그때는 정녕 주석을 의지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남녀가 만나 교분을 나눔에 있어 부부의 연정(戀情)만이 전부는 아닌 법입니다.”
여기서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기랑의 이상한 표정은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김유근도 엉뚱한 생각을 한 듯했다.
지유의 이어지는 말은 그런 생각을 더욱 가속시켰다.
“그대는 분명히 나를 목숨 걸고 구해주었어요. 어떤 사람도, 심지어 내 부친이신 홍 장주나 남편인 주석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테지요. 나는 그 이후로 그대가 계속하여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어디 은혜를 아는 사람이겠소?”
김유근은 벅찬 표정으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랑은 지유에게 한 번도 느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 그러니까 소름 끼친다는 기분을 맛보며 지유를 쳐다보았다.
물론 지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매인 몸이고, 부부의 정리와 여인의 절개가 또한 중하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주석이 들으실지 모르겠으나, 그대를 자비롭게 풀어주어 부친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간청해 보겠소. 그동안 몸 상하지 않게 간수하세요. 부디…….”
지유는 저고리 고름을 들어 눈을 찍었다. 김유근은 지유가 눈물을 흘렸다고 확신했다.
이 정도까지 가면 조선 시대 기준에서 애타는 사랑 고백과 전혀 차이가 없다. 김유근은 결연하게 말했다.
“내가 여기에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으나 한 가지를 미루어 두 가지를 짐작할 재주는 된다. 이미 부친은 나를 버렸다. 만약 부친이 정시준을 적대했다면 진작 나를 죽였을 터요, 내 방면을 청했다면 진작 풀어주었을 테니까.”
기대하지 않았던 분석이었다. 기랑은 갑자기 말할 줄 아는 개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런 무례한 생각을 알 리 없는 김유근은 들뜬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오직 그대만은 나를 기억하고 찾아 주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 법. 비록 그대의 말처럼 절개가 중하다 해도, 나는 그대를 먼발치에서 잠깐씩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리니 이제 와서 구차하게 목숨 살려 그대의 곁을 떠나지는 않으리라.”
이 역시 조선 시대의 화법으로 기회 되면 바람 좀 피워 보자는 얘기다. 당연히 지유도 알았으나, 그녀는 슬픔 때문에 김유근의 말 그 자체만 들었다는 태도를 취했다.
지유는 제법 끅끅대며 울음을 참는 모습까지 보이다가 겨우 꺼내놓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나도 그대도 서로를 먼빛으로나마 그리워할 수 있는 방도가 있기는 하오. 그러나 효를 배반하는 일인 데다, 내가 그대를 속인다고 의심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 무엇보다 가슴 찢어지는 비통함이니까요.”
김유근은 몸만 자유스러웠으면 지유를 당장 끌어안았을 거라는 기세로 무릎을 움직여 다가들었다.
“그럴 일은 결단코 없다. 내 의주에서 한 번은 경솔하였으나, 이미 나와 그대의 마음은 다를 게 없는데 어찌하여 그대를 또 슬프게 하겠는가? 그 방도가 뭔지 말해 보라. 아마도 그것은 평안도 사람들을 위해 공을 세우라는 것이겠지? 그러면 주석이 나를 용서하고 곁에 둘 테니 말이다.”
지유 역시 무너질 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창살을 부여잡았다.
“과연 명문가의 자손께서는 이 고초 속에서도 그 지혜가 쇠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감히 드러낼 수 없지만, 이것으로써 저의 진심을 알아주세요.”
지유는 머리에 비녀와 함께 꽂아놓았던 나무 뜨개바늘을 뽑아 내밀었다. 지유의 비녀는 전부 시준이 사준 것이라 주기 싫어서 챙겨온 것이었다.
김유근은 그것을 부여잡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맹세했다.
“내가 천하 다시없는 불효자의 오명을 써도 상관없다. 무엇이든지 말만 하라. 오로지 그대를 위해 섶을 지고 불에라도 뛰어들리라!”
기랑은 그냥 천장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오랜 친구 지유가 너무 무서웠다.
원래도 별로 날카롭지 않았던 지성이 오랜 수감으로 깔고 앉아도 될 정도로 뭉툭해진 상황에서, 홀연히 선녀처럼 나타난 지유와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는 김유근의 이성을 손쉽게 찢어놓았다.
지유는 오열하는 듯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김유근은 지유와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김유근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지유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그러고는 다시 망설이듯 말을 멈추었다. 김유근이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지유의 한마디가 저항할 수 없는 주박(呪縛)처럼 김유근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혁명, 해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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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남공철의 말처럼, 병조 판서가 자기 부절이나 직인 다 들고 나왔다고 그것만으로 조선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작중 초중반에 나왔지만 오로지 반란 막겠다는 집념 하나로 구성된 조선군의 보안과 명령체계 하나는 대단히 정교했죠. 그 시대로선 틀린 판단도 아니었으나, 문제는.. 복잡스런 절차가 대개 그렇듯 감당할 인력이나 숙련도가 안 될 경우는 군대의 발목만 잡았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2. 자로는 병사들에게 습격당해 죽을 당시, 칼을 맞고 관이 떨어졌는데 "보아라! 군자는 죽을 지경을 당해서도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하며 관을 다시 단정히 쓰고 죽었습니다. 옷차림 자체에 목숨 걸었다는 뜻은 아니고, 선비는 죽음이나 그에 준하는 위기가 있다고 해서 절개를 꺾거나 바른 뜻을 굽혀서는 안 되며 그것은 '예(禮)', 다시 말해 도덕의 표면적 표상을 사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