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44화 (144/284)

144화

43. 남조선혁명당(2)

사주당 이씨와 같이 혁명의 길에 관계된 여성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모두 사주당처럼 양반가의 자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덕개(德介)는 본디 충청도 단양군 사는 무당집 딸이었다.

그러나 충청좌도(忠淸左道)가 온통 전쟁에 휩쓸리면서, 본래대로라면 무세(巫稅) 뜯어 가는 데에나 만족하던 아전바치들이 집안 남자들을 죄다 취타수며 무부군뢰(巫夫軍牢)로 끌어갔다.

하는 김에 살림도 같이 다 들어 내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전들도 자기 수고한 일당은 받아야 하니까 말이다.

구실아치들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늘 하던 대로 밥상 잘 차려 놨던 덕개의 아비는 기가 막혀 나장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니, 우리네가 대대로 취타수로서 군적에야 올라 있지마는, 한 집 사람이며 재물을 다 쓸어가는 화적 떼 같은 법이 나라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제발 한 번 살펴 줍소사.”

군사들은 무당 따위를 상대로 친절한 민원 대응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군졸로 쓰기에는 좀 늙은 덕개의 아비는 죽도록 맞은 다음 며칠 뒤에 죽었다.

덕개의 어미와 어린 자식들은 남은 살림 그러모으며 기우제 굿판이라도 열러 다녔지만, 기우제도 일단 사람 먹을 게 있어야 지내는 것이다.

조선 사람 인심이 후하다 해도 지금은 동냥 갔다가 걸친 것마저 다 뺏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남은 가족들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관군에 의해 하루아침에 집안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다.

물론 조선군이 무당을 군악대로 쓰는 거야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은 그냥 병사로 쓰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남은 가족이 몰사한 시점과 끌려간 덕개의 남자 형제들이 죽은 시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때 덕개는 이미 출가하여 건넛마을 사노(私奴) 집에 살았는데, 남편이라는 인간은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여 덕개를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조선 시대에 여자 혼자, 그것도 사회 최하층 신분인 무당에다가 사노의 아내 출신으로서 무얼 하겠는가. 대부분은 이 시점에서 다른 인간들의 사냥감이 되어 죽는다.

덕개는 그래도 정신을 놓지 않을 만큼 강인한 사람이었다. 덕개는 남편 몰래 취리(取利, 이자놀이)하여 두었던 쌈짓돈과 이웃의 호의로 밑천을 마련하여 들병장수(술병을 짊어지고 팔러 돌아다니는 사람)로 나섰다.

조선 후기쯤 오면 여자 혼자 주막을 하거나 이동식 술장수를 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대번에 짐작할 수 있듯 그 노릇이 쉬울 리는 없다.

조선 역사상 가난의 일인자로 회자되는 박흥보 같은 사람조차 아내가 들병장수 하겠다면 뜯어말렸다. 이는 그저 삶이 고달프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다.

여기저기에서 술값 뜯기기는 예사요, 대어들라치면 얻어맞으면 양반이고 다른 종류의 폭력도 숱하게 당했다. 덕개가 여태 자살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의지가 강인해서라기보다는 원래부터 별로 존엄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술이야 그냥 마을 내려가서 장터에서 바꾸면 훨씬 싸다(여기는 조선이라 아무리 흉년이라도 술은 항상 있다). 그렇다면 덕개가 제공하는 약간 더 비싼 술에는 운임 외에 다른 가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조선 사회의 암묵적 약속이다.

놋짐 이고 다니는 덕개를 괜히 불러 한잔하려는 도부꾼(일종의 행상인)도 다른 속셈이 없을 리는 없다. 몇 마디 뻔한 수작을 건넨 이후에는 다들 옷끈부터 끌러 내렸다.

이제 4년 차로 접어드는 흉년에 조선 사람의 윤리나 도덕 따윈 전부 소화되어 버린 지 오래다. 어차피 그런 의식 희미했던 덕개도 곧 사내들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럴 수 있는’ 기미만 보이면 횡액이 뻔한 길에도 걸어 들어가는 것이 또 사내들의 슬픈 습성이라. 봉놋방에서 하룻밤 즐기고 난 다음 날 전대 다 사라진 행상인들도 길길이 날뛰기만 할 뿐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덕개는 어느새 능숙한 떠돌이 장사꾼이 되어 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악의는 선의만큼이나 많은 자원과 스트레스를 소모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이기만 했으면 덕개는 벌써 한참 전에 살해당했을 것이다.

드물긴 해도 그녀를 불쌍히 여겨 웃돈 주고 일부러 술 사는 사람도 있었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 공덕 쌓는다며 그녀를 들여서 밥 한 끼 먹여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덕개도 그런 집에서는 기회 봐서 은수저 움켜쥐거나 시렁에 걸린 고기 슬쩍하지는 않았다.

흘러 흘러 경기도 이천현(利川縣)까지 온 덕개가 호젓한 산길에 화톳불 피우고 같이 둘러앉은 봉달(捧達)이란 사내도 그런 부류였다.

그는 석화(굴) 젓갈 동이 둘러메고 팔러 다니는 도부꾼이었다. 그가 젓갈을 안주로 내고, 덕개는 술과 찐쌀을 내어 여행자들의 조촐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이런 모임이 열릴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공통분모 덕분이었다. 봉달이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수염을 쓱 훔쳤다.

“화랑(花郞, 남자 무당)집이라는 게 별수 없거든. 나도 저어기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7대째 무당 노릇 하던 집 자손이오. 듣자 하니 감사가 무슨 근왕군인지 무엇인지 한다고 난리기에 일찌감치 도망 나왔지. 지금은 부모형제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겠소.”

“군적에 있는 사람이 도망한다면 식솔에게 화가 미쳤을 텐데.”

“거기 있으면 화가 안 미치겠나? 그놈들이 아무리 악착스러워도 오십 넘은 노모를 데려다가 군사로 쓰지는 않을 테고, 마누라도 일찍 죽어 걸릴 것도 없었다오.”

봉달이는 그렇게 대꾸하고 껄껄 웃었다.

맨손으로 굴젓 집어 입에 넣고 손가락 쪽쪽 빠는 품이며 지저분한 행색은 분명 상놈 중에서도 불상놈이었다.

그러나 그의 언행에는 삶을 포기한 자의 태도가 비치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봉달이는 자신의 가소로운 사업 도구, 그러니까 젓갈 동이를 툭 치며 그것에 대해 말했다.

“이건 저 남양(南陽, 남양도호부) 사는 백운사(白雲舍)댁 어른(이옥(李鈺)을 말한다)이 굴에 조예가 있으셔서 거기서 떼 온 것이외다. 그분이 참 양반 같지 않게 우리 장사치나 소작 농군들에게 세세하게 신경을 써 주시거든. 하긴 그래서 귀양 가신 것이겠지만…….”

성균관 유생 출신 선비 이옥은 딱히 귀양 온 게 아니다. 어쨌든 고향으로 귀양 보내 주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는 정조가 평생의 원수로 삼았던 소설 문체를 휘둘러 ‘성균관 전체를 타락시키는’ 바람에 학교에서 쫓겨난 것뿐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그랬듯 그에게도 ‘순정한 문체’로 반성문 쓰면 봐주겠다고 했으나 이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지원처럼 당장에 납작 엎드렸으면 말직이라도 얻어걸리련만 이옥은 그저 표표히 귀향했다. 돈이 많았으니까. 그 와중 평안도에서 돈다는 소설을 얻어 보고 자기 정도면 매우 순정한 글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이옥의 잘 알려지지 않은 취미 중 하나가 굴 요리였다. 현재는 타계한 유득공과의 교우에서는 석화에 대한 그의 애호가 드러난다.

그러나 덕개나 봉달이 같은 사람에게 그런 세세한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덕개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 그 젓갈 장사는 이문이 좀 남소? 소금값이 만만찮을 터인데.”

“자네 안목이 있네그려. 남쪽에서 살았다니 평안도 소금 얘기를 못 들어봤을 수도 있겠군. 그 정 진인 얘기는 아오? 아는 사람만 아는 연줄이지만 혁명막부에서 소금을 엄청나게 싸게 내다 팔고 있거든.”

정 진인 얘기는 덕개도 들어 보았다. 그녀는 약간 긴장하여 물었다.

“그러면 소문대로 진인이 신병을 부려 바다에서 소금을 자루에 그냥 퍼담는다는…….”

“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금이 싸게 나온단 말씀이야. 물론 싼 게 비지떡이라 그냥 먹기에는 쓰고 맛없기는 한데 젓갈이란 게 원래 쿰쿰하고 냄새나는 물건이니 그런 흠이 좀 가려지지 않겠소?”

그간 해 온 염전 사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 시준은 조선 국내에 소금을 싸게 유통시키고 있었다.

시준이야 이세계인이 주도하는 보람찬 문명 발전에 가슴이 벅찼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조선 사람들을 너무 깔본 처사다.

그들은 싼 물건을 떼다 정직한 싼값에 다시 팔아 봐야 이문은 같으니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안도에서 싸게 파는 소금을 고맙게 받아 간 다음, 그냥 그때까지의 자염과 같은 값에 팔아먹었다.

전쟁과 흉년으로 장터가 자꾸 쇠하는 마당이라, 보부상과 도부꾼은 현재 조선 내륙의 거의 유일한 물류였다.

산골처럼 당장 소금 없으면 죽는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저질 천일염을 비싼 돈 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봉달이처럼 소금 품질이 좀 덜 중요한 젓갈을 담그는 데 쓰는 건 도덕적인 축이다.

시준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평안도에서부터 소금을 더 비싸게 출하했다. 현대 천일염과 똑같은 영업 방식이 평안도에서 개시되었다.

‘예부터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라 했다. 이 바다 소금은 정 진인이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어 구워냈으니, 혀에 닿을 때 날카롭고 쓴맛이 나는 건 다 몸에 좋은 기운이 나쁜 병독을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들이 미네랄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렇지 알았다면 시준은 그것도 집어넣었을 것이다. 흙 섞인 천일염에 좋은 핑계가 되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전차로 시준의 소금은 여기에서 여행객 두 사람의 안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경로에 대해 대강 설명을 들은 덕개는 봉달이가 평안도까지 연결된 장사 연줄을 잡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시대의 상인에게 유망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좀 우습지만, 봉달이가 자기 사업에서 나름대로의 생각과 ‘전망’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건 조선 사람에게 정말로 드물게 보이는 자질이다.

게다가 화톳불 옆에 짐 풀어놓자마자 달려들지는 않았으니 사람도 썩 괜찮아 보였다. 곧 모종의 결심을 한 덕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맨입에 술만 먹으려면 속을 버리고, 젓갈도 짜서 그것만으로는 끼니 못 하지만 안주로는 그만이지. 나는 술 가지고 있고, 이녁(당신)은 젓갈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작반(동행)하여 술과 안주를 같이 판다면 어찌 장사가 잘되지 않겠소?”

명목이야 동업 제의이지만, 때로 언어란 그것이 표기하는 의미와 전혀 관계없는 뜻도 전할 수 있다.

혼자 들병장수 하는 아낙네가 어떻게 살아왔을지는 같은 업종에다 같은 나라 사람인 봉달이도 잘 안다.

봉달이도 어딘가에서 객사할 게 운명인 장돌뱅이 뜨내기 신세.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의탁할 리가 없으니 여기서 인연 얻어 부평초 두 송이가 얽혀 조금이나마 견디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람들의 무지스러운 약탈에서 살아남은 관솔 몇 개로 힘겹게 타오르는 화톳불은, 두 사람의 얼굴에 후끈한 빛과 짙은 그늘을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늘 밤 이 호젓한 산길에서 가시버시가 또 하나 생겼다. 굴젓과 탁주를 제물로 내어놓고 올빼미를 집사 삼아 치러진 예식이었다.

***

하급 관원 정도로 오해되는 찰방(察訪)은 해당 지역으로 내려가면 그 위세가 결코 작지 않다.

크게는 여러 속역(屬驛) 합해 (장부상) 천 명에 달하는 인원을 통솔하며 그 역의 마필과 보급을 유지할 책임, 바꿔 말하면 인근 지역에 대한 징발과 행정의 권리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시대 지방 수탈의 커넥션에는 항상 이들이 끼어 있었다.

물질계의 얘기는 아니지만, 한 도(道)에 속한 역리의 수는 1만에서 2만 명 내외. 이 정도 규모의 무력은 조선에서 관군 외에 없다. 게다가 도성에서도 충분히 머니 수탈과 폭력에 쓰기에는 최적의 이익집단이다.

역졸 하면 암행어사가 데리고 출두하는 장정들의 이미지가 깊게 남아 있으나 암행어사의 보고에 툭하면 올라가는 것도 찰방의 폐단과 수탈이다. 수령과 결탁한 찰방은 지방에서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흉년에도 잔치판 벌일 형편은 되었다.

나라가 잘되면 잘사는 사람들의 재산은 당연히 불어난다.

그러나 잘나신 분들의 가치는 나라가 어려워질 때 더욱 빛난다. 불가사의하게도 그들은 오히려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런 이치를 잘 아는 봉달이와 덕개는 다른 곳은 훔쳐보지 않고 중림역(重林驛, 현대의 시흥에 위치) 찰방 성석귀(成錫龜)의 집으로 향했다.

다만 성석귀의 집은 찰방역인 중림역이 아니라 속역인 석곡역(石谷驛, 현대의 안산에 위치) 근처에 있었다. 여기로 길을 잡은 이유는 봉달이가 설명해 주었다.

“이 길로 가면 내 일전 말했던 백운사가 나오지. 동네 사람들에게 듣기로 여기 잔치판이 열린다니, 말 잘해서 한 동이 넘기고 백운사 주인어른에게 새로 굴 얻어다가 젓갈 담가 보세나. 자네 술도 거기에서 좀 연통해 볼 수 있을걸.”

덕개도 찬성이었다. 두 사람이 굽실대며 ‘찰방 어른 댁’에 들어가 그 집 행랑채 하인 놈들과 이래저래 흥정할 때까지만 해도 그 사업 계획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어 보였다.

원래 그런 돈꿰미 흥정까지는 관여하지 않는 양반인 성석귀가 잔치 중 뒷간 간다고 나와 지나가다가 덕개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들병장수 신세이기는 하나 이제 봉달이도 있고 해서, 이 시대의 여자들이 그렇듯 외간 사람과 직접 얘기하지 않고 고개 얌전히 돌린 채 물러나 있는 덕개의 모습은 성석귀를 사로잡았다.

술이 불콰하게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덕개가 그 형편없는 행색에도 불구하고 시들지 않는 미모를 갖추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성석귀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덕개를 훑어보았다.

당장 그 여자를 끌어오라고 외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사내가 곁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석귀는 조금 머리를 굴리더니 두 사람을 불러 자못 관대한 척 말했다.

“장돌뱅이가 누우면 방이고 앉으면 마루라지만 그래도 지붕 있는 집만 하겠는가. 기왕 잔치도 하는 중인데 그냥 보내기는 마땅찮지. 먼 길 피곤할 테니 한 상 먹고 쉬어 가게.”

“주인어른의 덕이 드높아 은혜 백골난망이로소이다.”

봉달이는 그렇게 다시 굽실대었으나 덕개는 오랜 경험으로 성석귀가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성석귀가 남녀유별이라느니 무슨 헛소리를 해 대며 부부를 다른 방에 묵게 한 것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뀌게 했다.

과연 뻔한 전개였다. 성석귀는 그날 밤 덕개를 찾아왔다. 술 냄새 풍기며 추근대는 성석귀에게 덕개는 왼고개를 꼬고 말했다.

“이놈 저놈 다 손대는 들병이 년이라도 차제는 서방 멀쩡히 둔 마당이니 그렇게는 못 하겠소.”

“이것아. 네 말대로 들병장수 주제에 무슨 절개를 논하느냐. 사내야 오늘 바뀌고 내일 바뀌는 게지. 젓갈장수 서방을 무엇에 쓰겠느냐? 오늘 이고 지고 온 물건은 계추리(경상도 삼베. 상등품으로 쳐주었다) 동이나 쳐서 사들이고, 그놈도 내 잘 얘기해서 보낼 터이니 문간방 주인 노릇이나 하거라.”

덕개는 그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덕개의 예상대로 바깥에서는 “아이구!” 하는 사람 죽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덕개는 눈을 확 불태웠다.

“화적패도 아니고, 길손에게 이게 무슨 짓이오!”

이런 일 한두 번 당해 본 것도 아닌 만큼 덕개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녀는 성석귀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를 밀치고 방 밖으로 내달렸다. 나이가 적지 않은 찰방 성석귀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뛰쳐나간 덕개는 마당에서 얻어맞고 있는 봉달이를 보았다. 옆에는 정말로 계추리가 굴러다니는 것이, 이거 받고 꺼지라는 협상안을 거부한 끝에 제2안이 나온 것 같았다.

덕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위로 뛰어들었다. 자기 집 주인마님이 무엇 때문에 이 젓갈장수를 쫓아 보내려 했는지 아는 하인들은 덕개를 때릴 수 없어 손을 멈추었다.

덕개는 곧바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 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이 도적 같은 놈들이 길손을 붙잡아다가 사내는 죽이고 여인은 겁간하려 하는구나. 양반이면 천벌이 안 떨어질 줄로 아느냐! 네놈들이 장돌뱅이 신세라고 깔보았다마는, 내가 그 욕을 당하느니 이 자리에서 죽겠다. 죽여라! 죽여보란 말이다, 이놈들!”

그러면서 본때 있게 몸부림을 치니, 지게에 기대 놓았던 젓갈 동이고 술병이고 다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그때쯤 해서 삐끗한 허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온 성석귀는 수염을 떨었다.

“저, 저 못 배워먹은 상놈들의 행태라더니! 기껏 불쌍해서 유숙하게 해 주었더니만 남의 집에서 무슨 행패더냐!”

성석귀는 잔치 때문에 오가는 이웃들이 볼까 봐 두려웠다. 모든 탐관오리가 그렇듯이 성석귀도 자기가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놈이라 해도 유부녀를 겁탈하려 했다는 소문은 좀 곤란했다.

“저 연놈을 끌어내 쫓아내라!”

어차피 지금 덕개의 꼴도 술과 굴젓, 모래흙이며 먼지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어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있던 욕정도 다 식어버릴 판국이었다.

성석귀는 일 더 커지기 전에 그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계집쯤이야 그의 권세라면 물리도록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다. 오늘 일은 그저 술기운이 올라 저지른 작은 실수였을 뿐이다.

내란으로 경기도가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찰방 자리 지켜낸 성석귀는, 자신이 이번에도 재빠른 판단으로 일신의 안위를 보전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싸게 틀어막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가 재앙의 시작이게 마련이다.

***

덕개와 봉달이는 걷어차이고 얻어맞으며 대문 앞에 내팽개쳐졌다. 덕개는 봉달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이게 무슨 꼴이오. 내 팔자가 사나워서 서방 잡아먹었나 보오. 당장 다 죽게 생겼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하지만 봉달이는 덕개의 팔자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툭툭 털고 일어났다.

덕개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봉달이를 쳐다보았다. 봉달이는 왁자한 웃음과 함성이 들리는 성석귀 찰방네 집을 건너다보았다.

그 집 주인은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뻔뻔스러운 잔치판이었다.

그 순간 덕개는 봉달이의 옆얼굴이 굉장히 낯설게 보였다.

연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라서는 아니다. 무언가 한 꺼풀 벗은 것 같은 봉달이의 얼굴은 덕개가 여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봉달이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 반동 놈의 새끼들……. 내 인민의 수평도 맛을 한번 보여주겠어.”

“뭐라고요?”

봉달이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덕개를 일으켰다. 덕개도 그럭저럭 운신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덕개를 이끌었다. 덕개도 어리둥절한 대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예정대로 짐을 비웠지만, 예정과 달리 수중에 재물 한 푼 남지 않은 부부는 원래 가려던 백운사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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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조선 시대에는 중앙집권 관료제 국가답게 각 계층을 참 알뜰살뜰히도 뽑아 먹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무당과 승려입니다.

승려의 경우는 작중에도 몇번 나왔지만 선비들의 편리한 무보수 용역직원이 되거나(선비들이 산에 가서 시 짓고 그림 그리고 술 마시며 놀 때 끌려와서 음식 마련, 셰르파 노릇 등등 다 했습니다. 거부하면 두들겨 맞고 절이 불태워집니다.) 국책 사업 노동력, 또는 많이들 아시는 승병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특수성 때문에 사명대사 같은 사람이 관직에 임명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의병으로 일어난 승병들은 정말 주는 것 하나도 없는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을 행한 거죠.

그리고 무당은 작중 나온 것처럼 취타군, 그러니까 군악대로 썼습니다. 대체로 궁중음악을 제외하면 악기 다루는 일이 천했고, 맨날 하는 일이 굿판에서 악기 치고 춤추는 것 아니냐.. 하는 발상인 것 같기는 한데 현대로서는 어이가 없지만 이때는 원래 권리 없는 의무가 많았습니다. 갈수록 남자 무당이 줄어들면서 샅샅이 찾아내어 거의 모든 사람을 취타군 군적에 올려 버립니다.(모든 취타군이 무당은 아닙니다)

이 당시 단성군의 호적을 살펴보면 무당집을 하는 박씨 백성의 집이 있는데 여기는 무려 6대 연속 무당;;으로서 처음엔 노비와 혼인했다가 양인과 혼인하기도 하며 차차 천민에서 벗어납니다. 작중 가상인물인 봉달이는 이 집을 모델로 했습니다. 자세한 학술적 사항이 궁금하신 분은 김효경, 2012, <조선시대 단성현 무당의 존재양상과 생활양태>를 참고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2. 들병이는 여자 들병장수를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 분명 드물지 않았지만, 인생 막장 최후까지 가서나 선택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이유는 작중에 나오니까 생략하겠습니다. 그래서 '흥보전'에 보면 흥보가 아내를 말리고, '변강쇠전'에서는 옹녀가 들병장수까지 해 가며 돈 벌어오니 변강쇠가 모조리 노름에 탕진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3. 작중 나온것처럼 찰방은 사실 낮은 벼슬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고위 관리가 임명되어 가기도 했을 정도(그 사람들 입장에선 좌천이긴 했습니다). 작중 나오는 성석귀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4. 이옥은 작중 나온 것처럼 실존 인물로, 기화요초와 벌레, 동물 등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유득공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굴요리에 관심 있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그 동네(경기도 바닷가) 사는 사람이나 먹을 수 있는 거긴 한데 석화는 생굴이 최고라는 의견도 피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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