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43화 (143/284)

143화

43. 남조선혁명당(1)

암약하는 반란 단체라고 하면 대개는 점조직 구성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딱 점조직 형태가 어울릴 듯한 단체인 남조선혁명당은 점조직이 아니었다.

조제프 푸셰는 점조직의 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흔히 적발이 어렵다는 장점만 부각되지만, 점조직에는 통일된 행동이 어렵다는 치명적 단점도 있다. 이는 혁명막부의 – 정확히는 푸셰의 – 목표인 ‘일제 총궐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소다.

조직 자체는 송상, 백정, 무당, 노비, 소작농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구성되었지만 그 형태를 갖춘 건 사실상 푸셰의 공이었다.

푸셰가 파견한 ‘사상지도원’들은 지역별로 단체들을 묶고 유동적인 지휘부를 창설했다. 약간 엉성하고 삐걱거리긴 해도, 지금 양계의 인민위원회를 참조한 그 체제는 통일적인 움직임 비슷한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남조선혁명당을 점조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지리상 점점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물론 시대적 한계 때문에 정치국의 지시를 어기거나 오해, 혹은 듣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의해 진압된 곳도 몇 군데 있기는 했다.

점조직이 아니어서 보안성은 낮았다. 잡힌 자들은 고문 끝에 자신들의 연락선과 추종자의 이름을 불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조선 팔도의 화적들이 잡히기만 하면 정시준 이름 대는 마당이라서 가치 있는 정보 누출이라고 해 주기는 힘들었다.

그 정도 일탈이야 이 시대에는 국가 정부조차도 극복하지 못하는 사항이다. 어쨌든 남조선혁명당이 통일조직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또 대놓고 간판 건 채 활동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조선혁명당 사람들은 백정촌, 산사(山寺), 무당집 등 관헌은커녕 양민들조차 발 들여놓기 꺼려하는 조선의 음지에서 주로 모였다.

그렇다 보니 당 하부 조직 간의 체계에서는 도부꾼(행상인)이나 운수승(雲水僧, 떠돌이 승려) 같은 사람들이 주 연락책을 맡았다.

지휘부와 하부 조직은 이들을 통해 서로 대표를 파견하거나 지시를 내려보냈다. 이런 체제하에서는 자연스럽게 (정보와 인력이 부족한) 하부 조직이 상부 조직에 복종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점에 있는 조직은 당연히 현재 조선에서 유일한 인민의 대표 중앙인민회의였다.

그리고 가경 18년(1813년) 정월이 가까워 오자,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혁명역사에 아로새겨질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에 부속되는 특별정령 225호를 발령했다.

중앙인민회의와 막부, 그리고 군이 수행해야 하는 여러 지시를 담은 특별정령 225호는 즉시 양계 각지에 전파되었다.

조선 정부군의 황해도 군세가 거의 완전히 철수하여 경기도와 충청도를 초토화하며 영남으로 행군할 때쯤이었다.

김조순과 김회연이 반년에 걸쳐 우스운 전투나 더 우스운 정치 투쟁만을 간헐적으로 수행한 것에 비해 혁명막부의 일 처리는 대단히 빨랐다.

그건, 공정하게 말하자면 시준이 체계를 잘 정립해 놓아서는 아니다.

지켜야 하는 전례의 구습이 별로 없다 보니 좋게 말하면 실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는 게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령을 내릴 지역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거기에서 ‘더 좁아지게’ 되었다.

그간 조정이 버리다시피 하던 양계였지만 지금은 마차 다닐 도로도 꾸준히 닦이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또 한 번 혁명적으로 개혁된 통신 장비가 거기에 일조했다.

남공철이 투항했을 즈음, 역사를 잘 모르던 시준은 유럽에 이미 전신(電信)이 있는 줄 알고 푸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정황상 아시아까지는 연결되지 않은 게 확실했으나 유럽 안에서는 이미 가설하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혹시 유럽에 글자를 멀리까지 빠르게 보낼 수 있는[télégraphe] 기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래,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거 뭐냐, 영국인들이 그런 얘길 하길래…….’

그렇게 얼버무린 시준은 곧 푸셰가 전신기를 만들어 오기 기대했다. 과연 혁명의 주석답게 날로 먹으려 드는 뻔뻔함 하나는 이제 실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혁명은 좌절되었다. 시준은 푸셰가 가져온 샤프 텔레그라프의 설계도를 보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음? 뭐긴 뭐야. 이야말로 혁명의 상징 텔레그라프지! 자네가 영국인에게 들은 얘기가 뭔진 몰라도 다 잊어버리게. 세마포어(semaphore) 신호를 쓰는 건 마찬가지니까 내 기억이 맞을 거야. 내가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게 없었다면 오스트리아군이 벨기에로 치고 들어왔을 때 혁명정부는 소식을 제때 전달받지 못했을 걸세. 자, 그럼 당장 설치하도록 하지! 함경도 쪽과 길이 험해서 항상 고민이었는데 잘 되었어!’

봉수대 비슷한 탑에 거대한 나무 팔다리 같은 것을 달아, 그 움직임으로 문자를 전송하며 그것을 받은 다음 봉수대에서 똑같이 전송하는 원리는 조선의 봉화와 거의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은 밤에 쓸 수 없으며, 대신 문자를 보낼 수 있어 봉화보다 훨씬 구체적 지시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푸셰의 말대로 이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군사적 대응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조선 혁명정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덜떨어진 백인 바바리안 놈들. 그렇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만 겨우 쓰던 게 봉화 업그레이드판이야? 지금 19세기 아냐?’

시준이 분개하거나 말거나, 이 ‘천리마 봉화’는 평안도와 함경도 곳곳의 요지에 설치되었다. 절대로 시준이 개입한 건 아니고 소식이 전해지는 속도가 마치 천리마에 비견되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삼수갑산에 가로막혀 압록강이나 다른 샛길로 통할 수밖에 없었던 양계의 통신은 빠르게 결합되었다.

시험 삼아 보내 본 통신이라든지 그 후 실무적인 수준에서 오간 여러 급보를 제외하면 이 천리마 봉화로 선포된 최초의 정보가 바로 특별정령 225호에 따른 정치국 결정이었다.

후대의 전신처럼 이 텔레그라프도 아주 복잡한 장문의 신호를 보내기에는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그 선언에는 혁명열의를 불태우는 주석의 연설 같은 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문장은 단순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가장 복잡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문장이었다.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특별정령 225호 발령에 따른 제1기 정치국 제45차 회의 결정 통지. 올해 삼월 삼짇날을 기하여 전 조선국에서 중앙인민회의 보궐선거(補闕選擧)를 실시하도록 한다.>

‘선거가 미뤄진’ 양계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정당한 인민의 대표를 뽑는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혁명의 남진.

저 분수 모르는 양반과 권세가에서 인민의 허락도 받지 않고 또 뽑아 놓은 왕을 파면하고, 영남에서 이미 파면된 왕을 옹호하며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경상 감사 또한 파면한다.

그것도 앞으로 두 달 안에 말이다.

나머지 사항은 당연히 군사기밀에 속하는지라 인편과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달되었다. 사무적으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혁명군 5개 영대(연대) 중 청의 동태를 관찰하고 평양성을 지킬 1개 영대를 제외한 4개 영대의 소집.

그리고 두 번째는 앞으로의 사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혁명군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6, 7, 8, 9영대의 모집이며,

마지막 하나는 남조선혁명당 전 지부의 일제 총궐기였다.

***

경기도 용인현(龍仁縣) 사람 이응길(李應吉)은 품에 보자기 하나를 감싸 안고 허겁지겁 달리고 있었다.

오지랖 넓은 조선 사람들이라면 한번 불러 세우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법도 하건만, 동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수틀리면 사람 죽이고 불 지르기를 예사로 할 개망나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열대여섯 살 때 훈계하던 동네 어른의 코뼈를 주저앉혀 버린 이후로 그는 세상에 두려운 게 없었다.

천성이 삐딱하고 남이 자기 깔보는 것을 참지 않다 보니 툭하면 싸움을 일으켰다. 잡아다가 매를 쳐도 그때뿐이요, 동네 밖으로 쫓아내도 곧 침 뱉으며 어정어정 기어들어 왔다.

피 묻은 적삼을 보아하니 둘러메고 있는 쌀자루나 돈꿰미의 출처는 묻기조차 두려웠다. 몇 년 전부터 흉년과 전쟁으로 나라가 혼란한 이후에는 관아도 잡범 다스리는 데에는 아예 손을 놔버리는 바람에 제법 따르는 패거리까지 생겼다.

얼핏 봐서는 이 혼란기에 발생한 흔한 무법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응길에게는 동리 사람들이 전혀 모르던 신분도 하나 더 있었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달리던 이응길은 곧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와 같은 젊고 강건한 청년이라 할지라도 몇 번은 쉬어가야 할 험한 걸음이었다.

이응길은 어느 암자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치거나 놀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 보따리 안에 있는 것은 그 개고기 응길이조차도 고개를 기꺼이 숙일 물건이긴 하나, 그는 안에 있는 ‘동지들’ 앞에서 태연하게 허리를 펴고 싶었다.

나는 이미 이 ‘승리의 날’이 올 줄 알았노라고.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말이다.

암자 안에서는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경애하는 정시준 주석 동지께서 교시하시기를, 혁명의 도는 곧 수평에 있으니 모든 사람이 아래위가 없다 하였다. 지금 궁궐과 대갓집에 있는 비단이며 면포, 오곡과 금은, 돈꿰미나 땔감은 모두 누가 만들었는가?”

“인민이 만든 것이오.”

그런 교시 안 한 시준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푸셰는 자신이 과거 퍼뜨렸던 격문을 은근슬쩍 주석의 교시로 바꿔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다. 또한 경애하는 정시준 주석 동지께서 교시하시기를, 사람은 나면서부터 누구나 똑같이 마땅한 권리[當權]를 가지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서 값없이 그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상전이랍시고 자처하는 이들이 우리를 끌어다 일 시키고 매를 치며, 마지막 곡식마저 빼앗아 가 굶주려 죽게 할 동안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조선의 백성들이 그때 한 번 들어본 얘기이며, 또한 다시 듣고 싶은 얘기이기도 하기에 이 ‘생지당권’ 논리는 잘 먹혔다. 사람들의 분개한 성토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주지 않았소. 그것은 원래 우리의 것인데도!”

“마땅히 반동 놈들의 교활한 책동을 다 짓부수고 되찾아 와야 하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유 없이 빼앗아간 만큼, 이번엔 우리가 그들에게 이유 없이 빼앗아 올 차례요!”

그런 웅성거림을 좌장이 진정시키는 동안 잠시의 휴지기가 생겼다. 이응길은 바로 지금이 자기가 나설 때라 판단하고 쓱 들어섰다.

대체 왜 보초를 아무도 세워 두지 않았느냐, 들키면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하는 사소한 사항은 이응길도 지적하지 않았고 암자에 모여 있던 혁명당원들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응길은 안에 있는 동지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동지들은 이응길의 상기된 얼굴에서 그가 무언가 중요한 소식을 갖고 왔음을 짐작했다.

좌장 노릇 하던 중년 선비가 점잖게 부채를 툭 접어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우리 동지께서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오신 모양일세.”

그는 혁명적인 선비, 용인을 대표하는 실학자 중 하나인 유희(柳僖)였다.

원래는 지금 충청도 단양군에 가 있어야 하는데, 전쟁 때문에 고향인 용인 모현으로 돌아왔다가 남조선혁명당 용인지부를 이끌고 있었다.

혁명을 깊이 이해한 선비인 유희는 상놈 깡패인 이응길에게도 그렇게 말을 반쯤 높여 주었다. 이응길은 한껏 고취된 자부심을 담아 보자기를 확 벗겼다.

그리고 암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유희를 포함하여 모두 숨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바로 ‘경애하는 정시준 주석 동지’의 초상. 정치국에서 내려온 최상급 명령을 뜻하는 비할 데 없는 증표였다.

시준이 알았다면 뒷목을 넘어서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선전선동국의 두 번째 책략이었다. 물론 푸셰에게는 남조선혁명당에 워낙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다는 핑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응길은 목이 메어 말을 꺼내놓지 못했다. 전령으로서는 실격이라 할 것이다.

“저, 정치국…… 결정…… 나, 나, 남조선혁명당의…….”

유희가 눈을 번득이며 뒷말을 대신 했다.

“남조선혁명당 총궐기! 정녕 그 지시가 정치국에서 내려온 것인가?”

이응길은 그저 고개만을 급하게 끄덕였다.

암자 안은 조용한 함성으로 들끓었다. 사람들은 소리 지르려다가 자기 입을 틀어막고 서로에게 다급한 눈짓만을 보냈다.

정치국 지시가 담긴 문서를 유희가 읽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어 암호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남조선혁명당의 교육을 받은 사람만 해독할 수 있었다.

물론 푸셰가 파견한 인원들의 교육은 빈틈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 선비들이 원체 똑똑하다 보니 그쯤은 금방 배운다.

유희는 정치국 지시에 담긴 여러 이행 사항과 주의 사항을 빠짐없이 숙지시켰다. 긴장한 얼굴로 지시를 듣던 당원들은 곧 하나둘씩 암자를 빠져나갔다.

비록 만민이 수평하다고는 해도, 완전히 혁명화된 평안도나 함경도가 아닌 이상 다른 지역에서는 교육받은 선비 계층이 이렇게 ‘인민의 앞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허나 대부분의 선비는 여전히 반혁명적 입장이다. 혁명에 참여한 선비는 지금 막부의 면면에서도 알 수 있듯 남인 실학자가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꼭 혁명사상에 공감해서는 아니다.

정약용을 상대할 때 시준이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이 깊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학문에 물들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혁명막부가 남발하는 여러 선동과 날조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계층이었다.

남조선혁명당에 가입한 선비는 극히 드물었다. 혹시 있다면 거의 유희와 같은 실학자였다. 그리고 그 사유는 지금 막부에 투항한 남공철이나 그 전부터 있던 정씨 형제 등의 예와 같다.

그들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공철의 배신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오래전에 알려졌다. 오죽당 철수 시에 가솔들을 미리 대피시켜서 그렇지, 아니라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한성 판윤 김이익은 시준을 내버려 뒀다고 해서 실학자들까지 내버려 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불안한 노론 시파 독주체제를 타 당파의 숙청을 통해 굳히고자 했다.

꼭 남인이 아니라도 실학이나 노론 청론, 백탑파와 학문적 인연이 있어 사상이 불순하다고 생각된 자들은 철저하게 숨죽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실학자들이 혁명막부에 가담한 이유도 다른 백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중에서도 유희는 주자의 기풍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용인의 여성 실학자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의 아들이며 모친의 평소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은 자제였다.

사실 유희가 혁명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도 모친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노모가 장차 무슨 용인 부녀회장이 되어 여인들을 가르칠 셈이라면서 자신에게 혁명막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유희는 불효한 일이지만 모친이 노망이 났나 하고 의심했다. 그 나이에는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어머님. 고정하시고 일단 누워 계시면 제가 의원을, 아니 무당을…….’

‘네가 그따위로 어미를 망령 난 여자 취급하면 나는 진짜 화병이 나서 죽을 게다.’

명징한 어머니의 말투에 유희는 곧 크게 놀라서 엎드려 명을 받들었다.

실제로 모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라의 사방이 혼란하고 도적 떼가 일어서고 있으니 바야흐로 새 영웅이 나올 시기요, 북쪽을 홀로 안정시키며 어진 선비들을 끌어안은 정시준 주석이 아니면 누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지금이 무슨 한고조나 명태조 시절도 아니고 걔는 좀 심하게 상놈 아니냐는 유희의 반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양반가의 큰 선비인 정약용 등이 그 밑에서 충정을 바치고 있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호통으로 짓밟혔다.

혁명의 대의에 따르면 사주당 이씨가 직접 당을 지휘해도 상관은 없다. 모든 사람은 수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의 나이가 이미 많고, 그녀 자신 역시 아무래도 평안도 사람들보단 조금 덜 혁명적이었기에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기는 좀 꺼려했다.

그런 전차로 아들 유희가 대신 혁명의 기수가 되어 용인지부를 몇 달간 운영해 온 것이다.

처음에는 그 혁명막부라는 곳이 남조선혁명당을 허울 좋은 방패로 내세우고 총알받이 소모품으로나 쓰는 게 아닌가 의심되었으나, 정치국을 통해 끊임없이 내려오는 지시와 요망사항 반영은 그런 의심을 불식시켰다.

정치국은 최대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서울 오죽당을 움직여 무기를 공급하거나 제한적인 당원 구휼을 도와주었다.

비록 당면 과제가 한 번에 해결될 정도는 아니지만 주겠다고 한 것은 반드시 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시준은 잘 체감하지 못했으나 남조선혁명당이 와해되지 않고 인기를 모은 것은 이런 ‘신뢰성’ 있는 조치 덕이 컸다.

혁명막부는 선동과 날조는 해도 약속을 어기거나 동지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준이 모래에서 쌀 만들어낸다는 소리가 거짓말인 건 무식한 백성도 대충 무의식적으로는 안다. 그러나 모월 모일까지 곡식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것은 신뢰에 치명타가 간다.

시준은 이러한 약속을 장사꾼의 관점에서 지켰다. 그리고 백성들이 보기에 이는 조선 왕조 400년간 한 번도 그들이 체감하지 못한 신뢰의 행정이었다.

사주당 이씨를 중심으로 한 향촌 사회의 영향력도 겹쳐, 차츰 용인 오죽당은 경기 내에서도 꽤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총궐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무기와 사람을 더 모으던 차에, 어김없이 정치국 결정이 전파된 것이다.

이제 완전히 혁명가가 된 유희는 집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노모에게 전했다. 사주당 이씨는 그런 아들을 보고 대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매우 장하다. 이르면 정월보름부터 늦어도 중양절(仲陽節, 음력 2월 1일. 농사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그렇습니다. 동지들은 치소(治所, 현청)를 먼저 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주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든 일은 성급하면 좋지 않다.”

“예?”

그녀는 아들이 가지고 온 문서를 서안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도성부터 땅끝까지 각지에서 인민을 토색하는 자가 많아. 혁명의 불꽃은 거기에서 가장 처음 올라올 것이다. 그 불꽃을 따라야지, 다른 젖은 곳에서 억지로 불을 피우려 하면 수고만 들고 뜻한 바를 얻기 어렵다.”

유희는 일껏 얻은 기세를 묵혀 놓자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 옛날의 학자 율곡이 그러했듯 지혜로운 모친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는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유희는 며칠 뒤 서쪽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지금의 안산과 그 인근)에서 들려온 소식을 접하고 그것을 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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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최초의 공식적 전신은 1844년입니다. 이때 사용된 문장은 "신은 무엇을 만들었는가(What hath God wrought)?".

2. 샤프 텔레그라프 또한 18세기 말에 차용되어 19세기 전반기 널리 쓰였으며, 이때 전쟁이 많았던 유럽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작중 나온 혁명군 얘기가 대표적이고... 또 19세기 중반쯤에는 (국가 공식 통신에만 사용되도록 엄격하게 제한된) 텔레그라프의 송신원을 매수하여 국채 가격을 빠르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2년간 차익을 취했던 사기 사건이 있었죠.

전에 나왔던 전신 발명 직후의 런던 얘기도 그렇지만, 빠른 통신 수단이 개발됐을 때 당시 유럽인들이 한 번은 꼭 하던 생각이 '이걸로 사기 쳐서 돈 좀 땡겨 보자!' 였습니다. 통신 수단이 출현했지만 보급은 아직 안 된 그 격차를 노린 거죠.

3. 이응길은 실제로 순조 당시 있었던 용인의 명화적(횃불을 든 도적이란 뜻인데, 당시 무뢰배의 표상이 '사람 죽이고 불지르는 것' 이었기도 하고 이들의 주무기가 화공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으로서 전성기는 사실 한참 후입니다. 지금은 청년으로 나왔네요.

4. 사주당 이씨와 그 아들 유희 역시 용인 사람입니다. 작중 나온 대로 이때는 단양 살았는데, 전쟁 때문에 돌아왔다는 설정.

당연하지만 원래 역사에서는 이렇게 혁명적인 사람까진 아닙니다. 사주당 이씨는 전주 이씨 왕가의 먼 자손인데, 태교에 관한 저서 '태교신기'가 있어서 현대에 실학자로 분류되긴 하나 사임당 신씨처럼 당시의 체제에서 모범으로 지칭되는 '유학자'에 가깝습니다. 아들 유희는 이 태교신기를 한글로 번역했죠.

개인적인 삶 자체는 상당히 고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허난설헌이나 사임당 신씨도 남편이 좀 변변찮았듯이;;; 여기도 남편 유한규와 혼인할 때 나이가 20살 넘게 차이났으며 유한규는 이미 그 전에 3명을 상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들이는 며느리마다 족족 죽어가나가니 조선 시대 평균수명이 짧다 해도 이쯤 되면 '집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할 법 하죠. 그 상황을 주변 사람도 대강 알았던지, 사주당이 가장 칭송받는 부분이 시부모 봉양 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말년에는 자식들이 잘 모시면서 편하게 살다 가긴 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다 망해가는 집안을 능란한 재테크로 지탱하여 돈을 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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