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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42화 (142/284)

142화

42. 궁여지책(4)

“관군이 이르니 도적들은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올시다.”

손태영의 상투적인 말에 박기풍은 자못 위엄을 떨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말 위에 올라앉아 채찍으로 적진을 가리켰다.

“허나 도망치는 자는 나오지 않고 있네. 내가 헤아리기로 적도는 필시 우리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야.”

손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순무사의 말을 이해했다.

이를테면 기마의 역할은 속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 자체의 위압감도 중요한 요소다. 어린아이 싸움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투쟁에는 기세라는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총의 기능 또한 장거리 타격만이 아니며, 소리와 불꽃으로 예기를 드높이는 것도 간과하지 못할 장점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폭음을 내기 위해서라도 총을 쏘아야 한다.

‘그런데도 일절 응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꿍꿍이가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쪽이 가까이 갔을 때 일제 사격을 퍼부으려 할 터. 프랑스군이나 영국군, 프로이센군이라면 그것을 무릅쓰고 돌격했겠지만 조선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몸은 그 터럭 하나까지도 부모가 물려준 것이므로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유교국가 조선의 군인들은 서양 오랑캐들처럼 목숨을 함부로 내버리는 불효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인륜이 땅바닥에 떨어진 다른 시공간 사람들은 조선군의 그 지극한 효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도망이나 잘 친다느니 하는 중상모략을 퍼뜨리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회피가 승리를 불러오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만력제의 빛나는 공훈이 회자되지만, 그 모든 업적도 선조 이연의 예술적 간격 조절이 없었으면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났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선군은 항상 원거리전을 좋아했다. 박기풍은 즉시 완구(碗口)와 총통을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포격으로 적의 녹각을 부수면 저 비적 떼는 필시 혼란해질 터. 틈을 타서 전군이 일제히 달려가라!”

조선군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아직 사용했다. 그러니까 장부에 비격진천뢰가 적혀 있다는 얘기다.

불량률이 꽤 높은 데다 비싸기까지 해서, 조선군이 건전하던 시절이라도 전선에 바로바로 공급되기는 어려웠다. 지금처럼 정부가 개판인 데다 병조 판서마저 탈주해 버린 상황이라면 더했다.

그래서 병사들이 준비하는 것은 일반적인 포환이나 석환이었다. 어쨌든 상대도 조선군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박기풍은 확신했다. 저들이 태산같이 믿고 있던 방벽이 뻐개어지면 더 쏠 것도 없이 줄행랑을 칠 터. 그때 일제 돌격하면 끝이다.

그런 면밀한 작전을 세워 두었기에, 아직 포를 쏘지도 않았는데 천아성(天鵝聲, 주로 돌격 신호로 사용되던 군악) 소리가 크게 울리자 박기풍은 짜증을 내었다.

“누가 나발 소리를 내었어! 아직 진군의 영은 내리지 아니하였잖느냐!”

그러나 군교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무도 나발 불라는 소리를 안 했을 뿐 아니라, 아군의 취타대(吹打隊, 군악대)에서도 그런 짓을 한 자가 없었다.

박기풍의 의문은 곧 답을 얻었다. 그건 조정 토포군에서 울린 소리가 아니었다. 저 앞에 있는 경상도 근왕군에서 불어 제친 나발이었다.

웅크리고 있는 줄 알았던 근왕군이 일제히 목책을 넘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곧 있을 돌격을 위해 창칼 든 살수들이 앞으로 나서고, 총 든 병사들이 뒤로 빠지거나 대포에 달라붙은 때를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다.

“저, 저……!”

박기풍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안 손태영은 재빠르게 앞으로 뛰어갔다. 지금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관군은 이대로 붕괴한다.

김회연이 당시 조선 최고라고 평가받던 경세치용의 재능을 발휘해 육성한 군은 규모에 비해 꽤 정예했다.

지금의 청국이나 미래의 남베트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군대는 투입한 재정에 비례하여 강해진다. 다행히 김회연은 그런 예외를 용납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심지어 기마병도 적지 않았다. 꾸물대며 대포 장전하는 중이었던 토포군은 근왕군의 선두에서 돌격해 오는 이백여 기의 마군에 정신이 아득히 흩어지는 것 같았다.

장부상 200기가 아니다. 실제 200기의 마군이다. 양란 이후의 조선군 전투 역사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대규모 기병 돌격이, 장부나 병진도(兵陣圖)가 아니라 물질계에서 관측 가능한 현실적 존재로서 강림했다.

조선 5군영도 그 각각으로 보면 이보다 더 많고 충실한 기마대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경상도 하나만 가지고 이 병력을 일구어낸 김회연은 다른 것 다 빼놓고라도 이것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것은 충청도에서 조령까지 밀리면서도 한 번도 꺼내 들지 않았던 김회연의 으뜸패였다. 그리고 그 패를 휘두르는 지휘관은 과거 강철군주 이공의 어영대장이었던 이해우 그 사람이었다.

이해우는 대장의 신분으로 몸소 출진하여 창을 들고 앞장서는 모범을 보였다. 프리드리히를 추종하던 이공이 보았다면 찬탄을 보냈을 광경이었다. 절대로 도망친 눈칫밥 신세라서 발로 열심히 뛰려는 건 아니다.

“장졸들은 모두 본관의 뒤를 따라라!”

대답은 없었다. 김회연의 의도대로 왕이나 이해우보다는 돈 주는 경상 감사에게 충성하는 기병들은 이해우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 작전도 이해우의 작품이 아니다. 뒤쪽 본영에 있는 김회연이 지시한 것이다. 그래서 기사들은 이해우를 반쯤 광대 취급하며 그냥 앞으로 달렸다.

“간신배 김조순에 영합한 역적도당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다시 울려 퍼지는 이해우의 준절한 외침에도 아무도 함성으로써 화답하지 않았다. 이해우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답게 관대한 이해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절대로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 실전을 처음 겪는 이 병사들이 말과 무기 다루는 데만도 긴장해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돌격 자체는 이뤄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철군주 이공의 삼대장이 왜 이렇게 푸대접받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근왕군으로서는 어영대장 이해우와 수어사 한용탁, 총융사 이당이 잘 구분 가지 않는 쪽이 정상이다. 일단 셋 모두 거지꼴이 된 채 경상도로 도망쳤다는 강렬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지휘하던 오군영 또한 그냥 전자오락에서 색깔만 바꿔 가며 나오는 잡졸 부대 같은 것이니 영남 사람들이 보기에는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물론 훈련도감의 정예함을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 훈련도감은 이를테면 스테이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전투력 좀 높게 설정된 잡졸 정도 된다. 복잡한 역사적 설명이 지루하다면, 이쯤만 인식해도 오군영의 차이를 대강 아는 것이다.

처음에야 나름대로의 목적에 따라 정교한 체계를 보유하고 창설된 부대들이었으나, 결국 돈이 없다는 한 가지 문제로 인해 오군영은 죄다 군인 아르바이트생으로 수렴 진화한 지 오래였다. 포유류든 파충류든 어류든 바다에 집어넣으면 다 비슷비슷하게 바뀌게 되는데 오군영이 그 짝이었다.

아무리 신묘하고 창의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해도 원인이 같은데 결과가 다를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영대장 이해우가 자기 기대보다 조금 모자란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을 마주해야 하는 토포군 입장에서는 이해우 한 사람의 기세가 그리 중요한 변별점인 것도 아니었다.

“으아악!”

“쏴, 쏴라! 총 재 둔 놈이 아무도 없어?”

“창검이라도 들어!”

포병이 가장 취약한 순간, 그러니까 아직 쏘지 못했을 때 순식간에 들이닥친 근왕군 기병은 토벌군 진형을 기세 좋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말발굽이 사람 다리를 밟아 으스러뜨리고 휘젓는 편곤이 대포 주위에서 머뭇대던 관군을 흩어놓았다. 이것이야말로 기병의 본령이었다. 이해우는 고대의 용맹한 장군, 바로 그 표상을 훌륭하게 쟁취해낸 자신에 대해 도취되었다.

그러나 이해우는 자신이 겸손한 선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장졸들을 한껏 추켜올렸다.

“너희의 충의는 바로 오늘 불타올랐다. 새로운 어영청 기사(騎士)의 이름으로 너희보다 걸맞은 자는 없을 것이니라!”

오군영이 처음부터 잡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조선의 중앙군이며, 창설 후 잠깐 동안은 정예군으로서 용맹을 떨친 적도 있다.

특히 이해우가 맡고 있었던 어영청의 경우는 그 이름도 위대한 장목대왕, 그러니까 인조 이종이 창설한 부대인 것이다.

이괄의 난 당시 반란군은 한양을 점거했으나 당연히 인조를 잡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씨 왕실의 후예가 펼치는 경공술을 겨우 만 명 정도로 따라잡아 보려 했다니 주제를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이때 인조를 호종해야 했으므로, 왕이 튀어버린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잘살고 있던 포수들을 잡아다가 구성한 게 어영청의 시초다. 강철군주 이공이 평안도에서 시도했던 것과 개념은 비슷하다. 인조는 성공했고 평양군은 실패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비록 그 군대는 인조의 머리를 지탱해 주지 못했지만, 어영청의 정예화는 아들 효종의 대로 이어진다. 입으로는 청나라가 싫다고 하지만 몸은 솔직하게 병사를 바쳤던 효종은 자기가 떠들어 둔 북벌의 표상이 필요했고, 선대왕이 창설한 어영청은 그에 힘입어 크게 확대된다.

본래 산척포수로만 구성된 군대였던 어영청은 이때 수많은 병종을 아우르며 2만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 핵심 병종 중 하나가 150명의 기사다.

따라서 이해우가 이 조령에서 새로 기사를 모집해 신 어영청의 기초를 세우려는 것은 엄밀한 고증에 근거한 바라고 할 수 있었다. 이해우는 아까의 선언으로써 은근슬쩍 경상도에 어영청 비슷한 부대를 정립하여 자신이 장악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물론 김회연의 병사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전장에서 각자 적군을 후려치며 자기들끼리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뭐래?”

“몰라. 아까부터 뭐라고 주절주절 시끄러운데. 서울 놈들은 다 저런가?”

그때쯤에는 이미 근왕군의 보병들도 기병을 따라잡아 토벌군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양쪽 모두 큰 의욕까지는 없어서 치열하다는 표현까지 붙여 주기에는 좀 부족한 전투였다.

그래서 영남순무사 박기풍은 조금쯤 여유마저 가진 채 전장의 상황에 대해 분노할 수 있었다. 박기풍은 이를 갈다가 친히 총을 들었다.

이건 잠상에게 큰돈을 주고 산 영길리 양총이었다. 혁명막부의 무기 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서, 조선판 브라운 배스 머스킷의 횡령품은 남쪽에도 상당수 풀려 있었다.

“네 이놈! 저자는 내가 안다. 폐주의 충견 이해우다! 역적을 하늘이 가만 놔둘 것 같으냐!”

그런데 박기풍은 아직 연습을 안 해 봐서 플린트락 머스킷의 정확한 사용법을 잘 몰랐다. 중초 초관 손태영은 습관적으로 화승 찾으려고 애쓰는 순무사를 보고 한숨을 쉬며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탕!

하늘을 대신해 불을 뿜은 브라운 배스 머스킷의 총알이 날아갔다. 혁명군이 쓰고 있는 ‘주석탄(主席彈, 미니에 탄)’까지는 없지만 영국군의 스테디셀러인 만큼 일반 탄환으로도 충분한 사거리와 명중률을 자랑했다.

허적(許積)이 왜 총을 두고 어린아이조차 항우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라고 했는지 지금 밝혀졌다. 잠깐 동안 이해우의 몸에 빙의했던 항우는 총탄이 그의 머리를 꿰뚫자마자 다시 멋쩍게 명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래도 시대에 맞지 않는 활약이긴 했다.

박기풍은 명중을 확인하자마자 손태영에게 다시 총을 빼앗아 들고 환호했다.

“적장, 내가 물리쳤다! 전군은 나아가라!”

그러나 박기풍의 생각과 달리 근왕군은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해우를 대장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근왕군은 ‘그 거들먹대는 서울 놈’ 하나의 탈락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적장이 쓰러졌다는 말에 토벌군 쪽의 사기는 확실히 올랐다. 한동안 볼 만하게 이루어진 난전 끝에 양군은 개전 전의 위치로 각자 퇴각했다.

양측에서 무주고혼만 수십 개 정도 만들었을 뿐 별로 얻은 것은 없는 싸움이었다. 딱히 친한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시체조차 수습해 주지 않은 이해우도 그 원통한 혼령 중 하나가 되었다.

***

같은 삼대장인 이해우의 전사 소식에, 남은 두 명의 대장 이당과 한용탁은 크게 분개했다. 그들은 즉시 군을 몰아 나아가 이해우의 원수를 갚을 것을 권고했다. 두 사람의 생각에 이것은 종묘사직을 떠받치는 솥발 세 개 중 하나가 부러진 꼴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두 사람뿐이었다. 김회연은 그런 별 쓸데도 없는 우자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아직 조령이 뚫리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느껴 보려 노력했다.

거꾸로 말하면, 김회연은 지금 상황에 희망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조령 전선이 좀 안정되자 대구 감영으로 돌아온 김회연은 애꿎은 서안만 두들겼다.

“으음……. 설마하니 정시준 그자가 찬탈자의 편에 붙을 줄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자였는가! 우리가 진멸되면 그다음은 자기 차례인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말이야!”

시준이 들었다면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시준이 정찰총국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경상도는 진작 끝장났다. 함경도 토병이 흩어지고, 훈련도감이 서울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시준의 공이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모르는 김회연의 입장에서야 감사할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우물대다가는 승냥이 같은 정시준의 평안도 군세까지 여기로 내려올 것이야. 무슨 수를 내야 한다…….”

그간 김회연은 격문을 돌려 사람과 돈을 모았다. 근왕의 명분으로 민란을 다독이며 최대한 수탈을 피하고 이자놀이 정도로만 재정을 비축했다.

그 옛날 충무공을 흉내 내어 둔전을 만들고 고기를 잡아 말렸다. 조선에 뭔 일 있나 하며 자꾸 기웃대는 대마도 왜인들 역시 점잖게 쫓아 보냈다.

장담하건대 경상도 좌우 수영과 감영이 세워진 뒤로 있었을 리가 없던 규모와 질의 군대도 만들었다. 순수하게 군대만 보자면, 충청도로 진격할 때의 근왕군은 훈련도감과 정면 대결해도 밀리지 않았을 수준이었다.

그건 김회연의 뛰어난 통치 능력에 더해, 멋대로 임금을 폐한 간신을 징벌한다는 알기 쉬운 명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명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 그러니까 전 국왕 이공을 돌려보내라는 요청을 시준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무슨 야합이 있었는지, 김조순이 북방이나 영길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나라를 다 말려 죽일 기세로 사람과 돈을 뽑아다가 경상도로 들이밀면서 초기의 우세는 다시 뒤집혔다.

“으음…….”

김회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그야말로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 궁여지책이건 뭐건 가릴 때가 아니다.

그는 감영의 여러 문서를 끄집어냈다. 싸 들고 탈출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중 왕명으로 내려왔던 것들을 찾아본 것이다.

지금까지도 경상 감사의 권한을 한참 넘어선 일들을 벌여 온 김회연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으로도 한계다. 명분은 실질이 있다고 해서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전 경상도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려면 일개 감사의 권한 범위로는 부족하다. 불평꾼들의 구시렁거림을 막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권도를 쓸 필요가 있다.

김회연은 비밀히 옥새를 위조했다. 그러고는 그럴싸한 밀조를 여러 개 만들어 경상도와 주변 지역에 배포했다. 이공이 자기 명의로 주식 산 시준에게 분노할지 자기 명의로 밀조 양산한 김회연에게 분노할지는 알 수 없었다.

김조순에 대한 봉기와 근왕당에 대한 협력을 촉구하는 여러 상투적인 문구를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건 평양 감옥에 있는 이공이 기이한 초능력으로 김회연에게 내린 여러 관직이다.

영중추부사 겸 병조 판서는 기본으로 깔고, 존왕도원수(尊王都元帥)에다가 팔도순무경차관(八道巡撫敬差官)이라는 개국 이래 최초의 직책에다 덤으로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까지 얹었다. 이로써 김회연은 형식적으로 조선 전체의 군사와 행정, 재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는 당연히 그가 장악한 지역에만 한정되지만 그것만 해도 당장의 여러 사소한 짜증 거리를 막아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이러한 선언에는 여러 밑준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교지 쑤셔 넣으면 바로 복종이 튀어나올 정도로 멍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회연은 교지를 배포하면서 그 일도 해결했다. 그간 비협조적이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던 지역 유지, 강력한 향임, 일부 첨절제사 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거나 김조순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덮어쓰고 처형되었다.

김회연은 이제 최소한의 선을 유지하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벗어던졌다. 영남 일대의 ‘합법적’ 수령이 된 김회연은 그의 능력을 활용하여 극히 효율적으로 경상도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때 경상도에는 피난민이 많았다. 다른 지역에서 김조순이 사실상 손 놓고 있던 수령들에게 약탈당하다가 겨우 여기로 도망쳤던 백성들이다. 그들은 지옥이 잠시 유예되었던 것뿐이었음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니, 처음부터 선택지는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계의 혁명적 인민들과 달리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인민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계의 인민들도 원래부터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해 봤기에 노예에서 주인으로의 신분 상승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다른 고을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회연이 했던 것처럼 통일되고 엄격한 포고가 아니었다. 그건 비유하자면 속담처럼 퍼져나갔다. 변형이 잦고, 누가 처음 말했는지 알 수 없으며 어느새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속담이 그렇듯이 거기에도 필수적이고 공통되는 사항은 있었다.

그건 바로 300년 동안 심산유곡에서 수도하다가, 고통받는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인세에 강림한 혁명의 영도자 정시준 주석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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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조선에서는 딱히 대규모 회전이 벌어질 만한 환경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형도 그렇고, 군과 전투의 규모도 그렇지요. 임진왜란 같은 비상식적 전쟁 때에는(일본의 침공 자체는 조선에서도 사전 인지를 했습니다만, 히데요시가 뜬금없이 온 나라의 국력을 조선 정복에 쏟아부어 영혼의 한타를 걸 거라고 예측한 정상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슷한 게 있었는데, 대부분은 그냥 사람만 많이 모아 나간 거라 대규모 전투라기보다 대규모 붕괴&도주극에 가까웠습니다.

상당한 대규모 내란이었던 홍경래의 난 때도 공성전 이후의 학살 같은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전투 한 번 할 때마다 뭐 3명 사망, 1명 부상...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작중 나오는 김회연의 200여기 기마대는 조선 시대로서는 정말 대단한 겁니다. 전성기의 어영청도 기사 150명 정원을 다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거든요.

2. 김회연이 막 갖다 붙인 벼슬은 작중 창작입니다. 그러나 작중 김회연도 일정 부분 정치적 고려를 하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작중 김회연은 홍경래처럼 평서대원수 어쩌고 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원수라는 벼슬이 조선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썼느냐 하면 홍경래 같은 반란군이 썼지요. 이 XX대원수 칭호가 조선 시대에는 사실상 반란군 전용으로서, 홍경래 말고 영조조에 반란을 모의했던 정회충(鄭懷忠)은 영호대원수를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회연은 그런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차관은 중국의 흠차대신을 생각하면 됩니다. 원래는 조선에서도 흠차라고 불렀는데 중국이 흠차를 쓰기 시작하니 한 끗발 낮춘 게 경차관입니다. 지방이나 외국의 사정을 살피고 위무하는 역할로서, 홍경래의 난 당시 순무사가 토벌군 사령관의 역할로 쓰였듯이 팔도 전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바로잡는다는 뜻을 나타낸 말입니다.

달성부원군도 실제로 있던 작호인데, 이건 지금 김회연의 근거지가 대구라서 하는 김에 얹은 권위주의적 칭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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