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42. 궁여지책(2)
정치국 회의가 끝난 후, 공식적으로는 평등한 정치국 위원들이지만 사실상 정치국의 최고위 서열로 인정되는 세 사람이 따로 모였다.
주석 정시준과 총괄서결국장 정약전, 그리고 선전선동국장 조제프 푸셰였다.
시준은 편의상 이들을 정치국 상무위원(常務委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협잡배들’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상태였다. 물론 자기만 빼고.
정약전이 시준에게 아까 회의에서의 발언에 대해 질문했다.
“아직 좀 이르지 않겠습니까, 주석 동지? 남조선혁명당의 동지들이 비록 용맹하나 그들만으로는 관군에 대적할 수 없소이다.”
그 남조선혁명당을 사실상 만든 사람인 조제프 푸셰가 반박했다.
“혁명군이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민이…… 줄잡아 20만 명은 족히 될 사람들이 봉기할 거요. 이는 국가 인민 전체와 억압자의 싸움이지, 혁명막부와 남조선혁명당 연합군의 대정부 전쟁이 아니외다. 그것이 혁명의 기초요.”
정약전은 그 말도 안 되는 허풍에 관해 푸셰와 논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시준을 돌아보았다.
“그럼 정말로 당장 시작하실 셈입니까?”
시준은 푸셰를 박헌영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20만 남조선혁명당 일제봉기론’에 얼른 제동을 걸었다.
“아니오. 아까 나는 정치국의 지시를 전달할 채비를 마치라고 했지 지시를 내리겠다고 하지 않았으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했지 오늘이 그때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한 가지 더 기다려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시준은 푸셰를 보고 미소지었다.
“선전선동국장 동지의 말씀은 알아들었으나, 그 ‘때’는 필연적으로 내전이 끝나기 전에 다가올 테니 초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약전은 잠깐 생각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해도 군세의 철수군요.”
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 김조순에게 남은 여유는 황해도 군세밖에 없소. 김회연이 예상보다 더 잘 버티고 있으니, 그는 필연코 나와 연통하여 내가 남하하지 않는지 알아보고 나서 그 군대를 돌려 영남을 치려고 할 거요. 누가 지든 황해도 군세가 끝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 가만히 있을 거란 믿음을 줘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연통한다면 사람이 올 터. 게다가 지금 같은 사세에 일개 심부름꾼을 보내지는 않겠지요. 그 사람에게 신의를 보여 믿음을 주면 됩니다.”
시준은 빙긋 웃었다. 정약전은 지금 시준이 말하는 ‘신의’와 ‘믿음’이 일반적인 단어의 쓰임과 전혀 다르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
영국이 청을 짓밟아 버리고, 시준이 조선을 청과 ‘수평하게’ 만들며 혁명막부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 장삿배로 드나들며 돈 버는 약 반년 정도의 기간 동안 김조순도 멍하니 앉아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국에 대한 연락은 실패했으나, 김조순도 여러 정황을 통해 전쟁의 경과는 대강 추론할 수 있었다.
천진에 보냈던 배가 하나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김조순은 중국에서 병사를 빌려오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이 멍청한 여진족 정부는 그 큰 땅과 인구, 막대한 재부를 가지고도 십만 리를 건너온 오랑캐 해적 떼에게 깨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김조순의 계획은 특별히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시준의 세력을 완전히 휘하에 두려 시도하는 일은 무익할뿐더러 어리석다.
청에서 얻어올 게 딱히 없는 이상 평안도의 육로를 확보하는 사항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당연했다. 우선 근왕당이랍시고 반항하는 김회연을 철저히 토벌한 후에 북쪽을 정리해야 했다.
그 뒤에는 영길리와 청을 저울질해 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의 조정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내기는 힘들었다. 김조순도 아직은 영길리 편을 든다는 생각까진 하기 어려워서 그 결정은 뒤로 미뤄 두었다.
현재 경상도 근왕군은 기세를 올려, 거의 충청도의 절반 정도까지 치고 올라오는 상태다. 국왕 이품은 이례적이게도 김조순을 거의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지금 피국(청)이 전쟁 중이라 청병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렇다면 어찌 평안도와 함경도 양계의 군세를 모집하여 남하시키지 않는가? 그 정시준이라는 하민은, 예전 임시변통으로 비변사에서 수여한 평서대원수니 관북순무사 따위의 인장을 차고서 무얼 하는가! 혹시 그 마음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은 아닌가?”
표면상 시준을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그건 김조순을 목표로 한 말이었다.
정시준을 당장 건드리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동맹 정도로 놔두기로 한 건 김조순이다. 너 혹시 평안도 놈들과 결탁하여 나라를 다시 뒤집을 셈 아니냐고 묻는 셈이었다.
비변사는 좀 닥치라는 말을 공손하게 포장해서 올려 보냈다.
“양계가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으며,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청국의 인민이 소란하기에 자칫 되사람들이 압록강을 떼 지어 넘어올까 저어됩니다. 그것을 막는 평서대원수의 임무는 막중하고, 영남의 토적(土賊)은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청도)의 병사로 정벌해야 합니다.”
황해도 군사의 언급이 없는 이유는, 그 군사들이 정시준을 경계해야 하며 동시에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조순은 자기도 너와 마찬가지로 정시준을 믿지 않는다고 – 그러니까 이상한 말로 이 미묘한 정국의 산통 다 깨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 상언한 셈이다.
이렇게 비변사는 드러나는 말과 드러나지 않는 말로써 이품에게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
현대인이라면 무슨 놈의 나랏일을 은유로 하느냐고 성질을 내겠지만 이 시대의 조정에 참여할 정도로 소양 있는 학자라면 고심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말이다.
통치자로서의 위치 때문에 잘 조명되진 않아서 그렇지, 대부분 당대의 거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유학자들이었던 조선왕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품은 아무래도 조선 학자의 평균에서 좀 모자랐다.
“그 양호의 병사들은 몇 달째 충청도에서 밀고 당기기만 하고 있지 않느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대체 경들은 진충보국의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가!”
김조순과 노론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분명 그들은 허수아비 왕을 세워 놓고 자신들이 잘 보필해서 나라를 제대로 이끌려고 했다.
권신의 국정 농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소한 시각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의외로 여기에서는 허수아비의 역할이 꽤 중요하다.
‘가만히 있어 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요한다. 이걸 잘 실천했던 왕으로 정종이나 철종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말하자면 그 허수아비가 제멋대로 쓰러져 땅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벼를 다 꺾어놓는 꼴이다.
애초에 김조순이 어리석은 자를 골랐던 건 맞다. 그러나 김조순은 이품의 적당히 별 볼 일 없는 후천적 경력에만 주목했지, 그가 인조의 자손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선천적 결함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대체 이자가 지금 도성을 자신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훈련도감이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는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는 협박도 협박을 알아들을 머리가 있어야 통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품은 계속해서 진상을 부렸다.
“경들은 여러 말로 어지럽게 할 것이 없다. 평서대원수에게 어명을 내린다. 당장 존왕의 기치를 들고 병사를 이끈 채 달려와 저 남쪽의 적을 토벌하라고! 만약 망설이거나 의혹을 가진다면 그자가 바로 두 마음을 품은 자이다.”
이품도 아주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정시준이 평양군 이공을 붙잡아 다리를 잘라버린 자라는 점이며, 나머지 하나는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시준은 폐주 이공의 반대파이고 김조순의 반대파이기도 하다. 그 입장은 놀랍게도 이품과 일치했다.
풍양 조문을 부려 대비 김씨의 내락을 얻어냈고 또 김조순의 딸까지 은밀히 포섭해서 나름대로는 김조순을 쳐낼 준비를 열심히 하는 이품이었으나 그런 허울 좋은 연합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족했다.
바로 무력이었다. 이품이 무슨 신묘한 정치적 묘기를 부린들, 그건 늙은이와 여인들의 붓장난에 불과하다. 실제로 상대의 뱃구레를 쑤셔 줄 칼날 움켜쥔 자들이 없으면 모두 소꿉놀이나 다름없다.
그런 면에서 이품에게는 정시준이 필요했다.
이품이 따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평서대원수 정시준은 지금 신하들이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사실상 양계의 영주나 다름없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왕이니 장군이니 하는 이름을 칭하지 않고 조정에서 준 작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볼 때 야심이 크지는 않은 자라고 생각했다.
주석 칭호는 이품도 들었으나, 다른 모든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이품 역시 그것이 하민들끼리 부르는 근본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다만 그 혁명 어쩌고 하는 구호들은 약간 거슬렸는데 그것쯤 왕의 위엄으로 잘 타이르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 정시준이 병사를 이끌고 내려온다면, 훈련도감으로 서울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김조순에게 대적할 패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본향을 떠난 영주는 항상 무력한 존재. 서울 안이라면 이품이 얼마든지 쥐고 흔들 자신이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그건 폐위당한 강철군주 이공도 해 본 생각이다. 정시준이냐 홍경래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공이 왜 홍경래를 부추겼고 왜 평양으로 가려 했는가. 모두 크고 아름다운 근위대를 얻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로, 정시준이 미치지 않은 이상 자기 근거지를 버려두고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달려올 리가 없다. 그가 그렇게 충효를 아는 인간이었으면 애비가 셋일 리도 없고 왕 다리를 잘랐을 리도 없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이품이 할 수 있는 생각은 김조순도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조순이 어떤 인간인데 강력한 평안도 군세가 – 혁명군의 소문은 남조선혁명당에 의해 좀 과장되어 퍼져 있었다 – 서울에 내려와 하루아침에 자기를 숙청하는 상황을 초래할 리 없다. 김조순이 정시준을 가장 마지막에 해결해야 할 과제로 둔 채 외면하고 있는 이유다.
이품의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김조순은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었다.
‘가만히 앉아 주는 수라상이나 받아 처먹고 있으면 알아서 지방을 진압하고 공은 다 저에게 돌려 줄 것을! 멍청한 네놈 대신 일 해주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아니꼬웠더냐!’
하지만 왕이 두 마음 어쩌고 하는 극언까지 내뱉은 이상 김조순으로서도 당장 이 자리에서 맞대들기는 힘들다.
허수아비 왕이라도 왕은 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조순은 망극하다느니 하는 상투적 대응만 하고 물러갔다.
신묘한 정치적 놀음에 취한 이품은, 이때쯤 해서 삼사의 관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는 상황을 기대했다.
청요가 일제히 김조순을 공격한다면 자신이 못 이기는 척하고 김조순을 잠깐 은퇴시킬 수 있다.
물론 김조순 편의 사대부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므로 곧 복귀시켜야 한다. 허나 그때는 이미 이품 자신이 정시준의 군대를 이용해 경상도를 진압하고 훈련도감을 무력화한 뒤일 것이다.
이품은 이제부터 올라올 사헌부의 김조순 탄핵 상소를 두근두근하며 기다렸다.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품은 당황했다. 그는 병조 판서 남공철 등 ‘자기편이라 여겼던’ 신하들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내 보았다. 그러나 남공철도 차마 동조해 주기 민망한 왕의 작태가 수치스러워서 별다른 반응을 돌려주지 못했다.
이품은 다시 머리를 쥐어짰다. 곧 그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품은 며칠 뒤 열린 상참에서 준엄하게 교시했다.
“중국과의 통교가 요사이 끊겼는데, 이제 곧 책력을 받아오고 황제의 여러 명령을 살피며 영길리 해적의 행패도 고하여야 하니 이 일은 마땅히 준행해야 할 바다. 작금의 화급한 사세로 볼 때 전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으므로, 병조 판서(남공철)가 수고스럽겠지만 한 번 더 경사에 갔다 오라. 일전 북경의 난을 진압한 일로 황제의 신임을 얻었을 그대가 바로 적격이다.”
이 시점에서 당연히 김조순은 왕의 의도를 깨달았다.
삼척동자도 짐작할 유치한 책략이다. 이품은 지금 연행사인 척하는 평안도 특사를 보내 시준을 포섭할 생각이었다. 연행사가 평안도를 지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자기 혼자만 밀사라고 생각하는 이 사절 작전을 위해 이품은 은밀히 조만영을 불렀다.
과거 김조순의 딸 김씨에게 과자에 든 쪽지를 전했던 그 풍양 조문의 기대주였다. 그사이 장수 고시생 신세에서 벗어나 은근슬쩍 승지로 특채된 조만영은 왕의 ‘밀지’를 역시 ‘은밀히’ 남공철에게 전했다.
교지를 받든 남공철은 겨울이 되어가는 하늘에 대고 허탈한 웃음을 뿌렸다. 허연 입김이 흩어졌다.
지금 무법천지일 게 분명한 평안도에 가기 싫어서는 아니다. 남공철이 그 정도로 졸렬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품이 능란한 정치가라서 남공철 없이도 상황을 제어할 수 있으면 중요 임무에 측근을 보내는 것도 시도할 만한 기술이다.
그러나 이품의 천품은 보통 사람만도 못한 데다가, 조정은 보통 사람 이상인 김조순과 그의 부하들로 거의 채워져 있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남공철을 자기 측근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품 혼자뿐이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남공철 같은 중신을 도성에서 떼어 생환이 불확실한 도박에 소모해 버린다는 상상을 할 수 없다.
남공철은 그 순간, 과거 이공의 진채에서 벼루 투척의 욕구를 느끼던 정약용과 비슷한 결심을 했다.
그날 밤, 누군가가 남공철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남공철은 하인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남공철은 어쩔까 하다가 자기가 직접 나갔다.
과연 문 앞에는 김조순이 있었다.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하인 놈 하나만 딸린 채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대감.”
“그럴 필요 없소이다. 내가 새벽에 입시해야 하는데 모자가 찢어져서 관모만 좀 빌리러 왔으니.”
대수롭잖은 용건으로 왔다는 투였다. 남공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섬뜩한 고사를 떠올렸다.
세조가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쳤을 때도 핑계가 딱 이랬다.
남공철이 방어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눈치 빠른 하인이 “소인이 안에서 모자를 받아 오겠습니다요.”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문 앞에는 무안한 남공철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김조순 둘만 남게 되었다.
남공철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제 머리를 떨어뜨리러 오셨소이까?”
왕의 사절로서 시준을 설득하러 가는 일을 막으러 왔냐는 소리였다. 김조순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반대지요. 오히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대감의 머리가 떨어졌을 거요.”
“어째서?”
“정시준은 그대 주인의 천품쯤이야 꿰뚫어 보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반드시 나를 택할 테니. 그 웃기는 얼렁뚱땅 진하사라는 것은 평안도에 들어가자마자 전부 어육이 되어버릴 게 분명하오. 전 수경포도장 이요헌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으셨소?”
남공철은 겁먹지 않았다.
“그는 폐주를 따른 역적이고, 나는 지금 조정의 신하외다. 어지러운 말로 속이려 하지 마십시오. 정시준이 아무리 영용하다 한들 일개 신민인데,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이까?”
김조순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소매에 손을 넣었다. 남공철은 설마 김조순이 그 신분으로 직접 철퇴를 꺼내 휘두를 생각인가 하여 숨을 삼켰다.
하지만 김조순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조선 지배층의 유서 깊은 분쟁 해결 도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공철이 두 번째로 예상했던 것, 그러니까 김조순이 시준에게 보낼 서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달걀 하나였다.
남공철은 딸꾹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달걀과 김조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조순은 ‘내가 증거로 남을 서신 따위를 전할 것 같으냐’라는 조소를 드러내었다.
“내가 평서대원수에게 우의로 보내는 선물이오. 이게 있으면 정시준이 대감의 목을 치지는 않을 것이외다.”
한참 뒤에야 자신을 진정시킨 남공철은 잠시 생각했다. 김조순이 야밤에 갑자기 이런 광태를 부릴 자는 아니었다.
“……암탉과 수탉이 만나면 병아리를 까는 법. 하지만 달걀을 낳는 건 항상 암탉이지요. 대감께서 이것을 주신 걸 보니 대감 쪽이 암탉이 되기로 하신 것 같소이다.”
김조순은 남공철이 참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닭으로 오간 김조순과 시준 사이의 애증을 보지 않고도 짚어내었으며, 무엇보다 그것을 숨기지 않고 당장 다 말해버렸다.
남공철이 이품의 충신이었다면 김조순과 시준의 연결을 짐작하고 침묵한 뒤 아침에 고변했을 것이다(물론 정말 그랬다면 김조순은 남공철이 궐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공철이 그 짐작을 김조순 앞에서 다 말했다는 것은, 비록 김조순과 결은 다를지언정 그 역시도 이품에게 경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 화법이었다.
그래서 김조순도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면 더 말장난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소.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남북에서 짝 맞추어 무엇을 하시려고? 잠통모반입니까?”
“오해가 있군. 나는 오히려 정시준이 한양에 군대 끌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소. 남쪽의 역적을 안전하게 토벌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지.”
남공철은 김조순을 바라보다가 다시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가 어떤 것을 묻고, 어떤 것을 받아와야 합니까?”
김조순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마저 느꼈다. 비록 남공철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놓은 김조순의 협박 때문에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이렇게 흉금을 터놓고 얘기한 것이 몇십 년 만이던가.
“훈련도감은 뺄 수 없소. 황해도 군세를 남으로 내려보낼 생각인바, 정시준이 그사이 불측한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인지 헤아려 주시오.”
남공철은 반드시 불측할 것임에 틀림없는 정시준에게 무슨 보상을 준비해 놓았는지 물으려 했다. 다행히 김조순은 그것을 먼저 말해 주었다.
“그가 경거망동하지만 않는다면, 사방의 난리가 평정된 이후에는 이 나라의 모든 부귀영화가 그의 것이오. 원한다면 나와 동렬의 자리를 주어도 좋소.”
남공철은 김조순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왕 두 명이 지나치게 개판을 쳐 놓는 바람에 희대의 권신 김조순마저 어쩔 수 없이 자기희생적 애국지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저를 대감의 사절로 쓰실 생각이로군요.”
김조순은 남공철을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왜 평양에 따로 심부름꾼을 보내는 대신 야밤에 이 짓을 하겠소? 내 용건도 있지만 바로 공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요. 시준은 왕의 사절이라면 목을 날릴 것이나 내 사절이라면 목을 붙여 둘 것이오. 암탉과 달걀이 없다면 수탉은 어떻게 자식을 보겠소.”
남공철은 씩 웃었다. 김조순도 같은 표정을 지어 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복잡하게 깔린 궤계는 이 순간 상쾌하게 사라진 듯했다.
물론 세상살이가 그렇게 시원호탕하지는 못하다. 김조순은 물론, 남공철도 상대와 그런 종류의 감정 동조를 이룰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남공철은 속마음과 완전히 반대되는 대답을 했다.
“대감의 덕에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어찌 명에 따르지 않겠소이까.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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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일전에 한 번 작가의 말에서 설명드린 적이 있는데, (공산당 정치국에서) 상무위원은 본래 그냥 항상 일하는 위원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높은 위원들을 의미합니다.
2. 20만 명은 공교롭게도 박헌영이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서 봉기할 거라 장담했던 숫자입니다. 물론 허풍이었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의심 가는 인간은 다 죽이고 봤던 해방 직후의 남북한 분위기상 색출되어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3.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야밤에 집에 가서 모자 빌린다는 핑계로 김종서를 불러내 (물론 종을 시켜서) 철퇴로 찍어버립니다. 그 전에 이방원도 정몽주를 철퇴로 처리했고... 하여간 이씨 왕실 사람들이 철퇴를 좀 좋아하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