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42. 궁여지책(1)
암허스트 남작은 현재 베이징에 있었다.
아직 본국으로부터 주청 영국 공사의 신임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사실상 정식 공사나 다름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누구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청의 조신들은 암허스트에게 다른 시비를 걸었다가 그가 열하에서 뭉그적대고 있는 가경제에게 달려갈까 봐 걱정했으며, 영국인들은 어차피 암허스트 외에 중국 공사를 맡을 만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런던은 현재 중국에 별로 관심이 없다. 독점욕이 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이 자기 외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정말 호언하는 대로 찰과상인지, 아니면 다리를 잘라야 할 중상인지 파악하는 데만도 엄청난 열정과 자원이 들어가야 했다.
물론 남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득을 쌓고 싶어 하는 교활한 정치가들이야 항상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암허스트 남작이 고군분투하며 기반을 다져 놓고 난 뒤에야 거드름 피우면서 부임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암허스트가 남의 좋은 일만 해 주는 얼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본래 조선과 중국의 의사 타전 및 프랑스 견제 정도로 파견된 인물이었지만, 그는 일직선으로 내달려 ‘잠자는 사자’가 깨어나기도 전에 가죽을 벗겨버렸다.
암허스트의 날카로운 예지와 보기 드문 난폭함은 런던의 정계보다 ‘비문명지의 미개인’에게 더 잘 통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암허스트는 정치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적격자였다.
그런 사람답게, 암허스트 남작은 존 레디가 가져온 시준의 제안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거절이라고 전하게.”
“거절이오?”
존 레디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을 개항시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도 이득이 되는 제안입니다. 의장 정시준의 말대로 러시아는 반드시 동쪽을 통해 남하할 겁니다.”
시준의 제안은 요약하자면 ‘우리가 일본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같이 가서 일본도 개항시켜 골수까지 빨아먹어 보지 않을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흥분하지 않으면 영국인도 아니다.
하지만 암허스트 남작은 아직 시준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논리의 정교함은, 이미 있는 신뢰를 강화시키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신뢰를 창조할 수는 없다.
존 레디가 타타르와 슬라브가 동족이라는 시준의 아무 막말에 기꺼이 동조했듯이, 암허스트는 시준이 어떤 매력적인 제안을 들고 온들 당장 달려가 찬성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득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시준에게는 더 이득이 될 거야. 그리고 난, 적어도 당분간은 그게 싫어. 게다가 지금은 중국에 집중해야 할 때야.”
그건 암허스트의 말이 정론이다. 중국인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청 영국 공사관을 습격하고 있었으며, 암허스트는 이제 중국 관리들이 사과하며 초청하는 범인들의 능지형 쇼도 구경하기 질린 참이었다.
존 레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황제가 비협조적인가요? 한 번 더 압력을 넣어볼까요?”
여기서의 압력이란 포신 내에 작용하는 화약 폭발의 압력을 말한다. 이것이 통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로드 암허스트는 의외로 한숨만을 쉬었다.
“글쎄, 별장에서 문 잠그고 안 나오겠다는 황제가 어떤지는 잘 몰라. 하지만 사람들이 문제라네. 이건 예상외야. 노예 따위는 황제가 문서 한 장 내리면 모두 그대로 따를 줄 알았는데.”
문제는 북경만이 아니었다. 개항장 거의 전부에서 중국 민중에 의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무협지의 원조인 중국이니만큼 아무래도 협기 넘치는 무림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황제가 시켜서 조약대로 영국 무역 편의 봐 준 죄밖에 없는 일부 관리들은 양추에게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라며 뒷골목에서 두드려 맞거나 심하면 살해당했다. 시준도 감탄한 한족의 종족 특성인 창봉권술이 곳곳에서 발휘되었다.
물론 무림인의 기본 소양은 상대의 경지를 잘 짐작하여 함부로 고수에게 덤비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인은 딱히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다. 강호 동도 중에 총포탄을 튕겨낼 수 있는 심후한 경지의 고수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영국군은 아직 자국민이 살해당하거나 하지 않아 직접 나서기도 명분이 부족하고, 가만히 있자니 협조자들이 점점 이탈하는 짜증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암허스트는 그런 사태가 중국인에게 지나치게 원한을 산 자기들의 소행 탓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이 무역에 끼어드는 바람에 중국인들이 영국에 저항하면서도 무역의 이점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개항장의 심각한 소요 사태가 마치 조선 혁명정부를 도와주지 못할 핑곗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허세를 부렸다.
“그 꼬마에게도 머리 좀 굴린다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줘야지.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원숭이들 상대로 부끄러운 줄 알게. 장사꾼이 그렇게 쉽게 호구 잡혀서야 되겠나?”
존 레디 소령은 하릴없이 돌아가 시준에게 그 말을 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북경과 조선의 거리가 꽤 만만찮고, 그 역시 영국 내 아시아 최고 전문가 중 하나다.
게다가 이미 그는 시준에게서 이 경우 대응할 전술을 받아 왔다.
“만약 영국이 거절할 경우, 조선은 네덜란드와 접촉해 본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정말 그렇게 말했나?”
“당연히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죠. 암시입니다. 일본 개항 얘기를 하면서 1808년 영국 해군의 나가사키 공격을 이야기하더군요.”
그때 영국 해군이 나가사키를 털어먹은 페이튼 호 사건은 그다지 큰 정치적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이 얻어간 것은 돼지고기뿐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시준의 말이 그 사건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네덜란드인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암허스트는 잠시 놀라긴 했으나 곧 다시 비웃었다.
“네덜란드라. 그런 나라가 존재하긴 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나. 대체 있지도 않은 나라와 어떻게 접촉한다는 건가? VOC는 없어진 지 오래고, 나가사키에 네덜란드로의 직통 창구는 없어.”
“제발, 각하. 모르시는 척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제안의 대전제가 나폴레옹의 몰락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프랑스가 패배하면 당연히 그들이 강점한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도 해방되는 겁니다.”
암허스트는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귀찮다는 동작으로 들고 있는 서류를 툭 던져놓았다.
“그래서?”
“저는 지금 호구 노릇 하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나중에 조선을 우리 영향권 아래에 두려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하고, 그러려면 일본을 간과할 수는 없으며, 네덜란드가 본국과 소통할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일본에 새로운 유럽 파트너로서의 영국을 알릴 기회입니다. 사실 혁명정부 의장 정시준이 말한 것은 정말 네덜란드로 갈아타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 다시는 오지 않을 귀중한 시점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존 레디가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데지마에 네덜란드 대신 영국이 들어가자는 계획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1808년의 일 때문에 일본에 대한 평화적 개항은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일본 항로를 차지하게 놔둘 수도 없지요. 무력을 써서라도 선점해야 합니다.”
페이튼 호 사건 당시 영국은 일본에 너무 큰 악감정을 쌓았다. 어디 사략선도 아니고 국가의 정규 해군이 네덜란드 국기를 달아 위장한 채 비무장 교역소를 습격하여 사람을 납치한 것이다.
그러고는 물도 내놓고 고기도 내놓고 데지마의 재산도 내놓고 아무튼 다 내놓으라는 진상을 부린다. 솔직히 해적이 했어도 치사하고 더럽다고 비난받을 짓이었다.
영국 해군은 네덜란드인을 억류하자마자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네덜란드 국기를 내리고 영국 국기를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애로 호 사건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유니언 잭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유니언 잭은 졸리 로저(해적선의 해골 문양 깃발)와 동급으로 취급되었으니까.
당시 나가사키 부교[奉行, 막부 직할령의 책임자]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康英]와, 의리로써 군을 이끌고 달려온 오무라[大村] 번주 등등의 영웅적 활약 끝에 영국은 돼지고기로 타협을 본 뒤 물러갔다. 전투도, 사상자도 없는 평화로운 격퇴였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뭔가 이상하게 보이지만 원래 19세기가 그렇다.
그러므로 지금 영국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해맑게 데지마에 들어갔다간 다음 날로 격분한 나가사키 사람들이 몰려들어, 데지마 전체를 둘러싸고 다 태워 죽일지도 모른다.
막부는 유럽인이 전부 해적이라는 정확한 판단을 내렸고, 이들에 대한 연구와 방비에 들어간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작년에 『암액리아흥학(諳厄利亜興学)』 등 영어사전까지 발간해야 하나, 지금은 이미 조선에 정약용의 영학해설이 나와 있어 그것을 경상도에서 수입해 번역 중이었다.
바뀐 역사에서도 1825년의 이국선에 대한 무조건 타격령[無二念打払令]이 내려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네덜란드인이나 그들이 고용한 미국 상선을 제외한 유럽인은 절대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조선이 나서서 밀무역이라도 주선해 주겠다는 것은 상당한 장점이었다.
레디 소령은 인간에 대해 환상을 품는 부류는 아니다. 어차피 일본 내에서 영국의 인식은 더 추락할 데도 없다.
그러므로 밀무역으로 항로와 영향력을 확보한 뒤에, 본격적인 침공으로 막부에게 ‘누가 더 적합한 파트너인지 알려’ 줄 생각이었다.
동인도 회사가 인도 장악 시에 인도인 세포이를 썼듯이, 동양 장악의 첨병으로 조선인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안인 것이다.
설명을 들은 암허스트 남작은 턱을 어루만졌다. 확실히 영국인의 취향에 맞는 계획이다.
게다가 레디 소령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만약 무장 충돌이 발생한다 해도 이렇게 되면 조선인에게 덮어씌우기 쉬워진다. 페이튼 호 때처럼 조선 국기 – 아직 국기가 없었지만 – 를 달고 들어가 중요 시설을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황의 주도권을 혁명정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암허스트를 매혹시켰다. 그는 깍지를 낀 채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다가 말했다.
“좋아. 일단 전향적으로 고려할 가치는 충분하군.”
“그렇다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정시준의 제안은 매력적이지만, 어떤 물건이든 허겁지겁 사겠다고 나서면 장사꾼은 가격을 올리게 마련. 먼저 지금은 그 제안에 관심이 없는 척하게. 일본 침공은 우리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놓고 시작할 필요가 있어. 지금은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네.”
“조건이라니요?”
“먼저 계획의 대전제부터가 문제야. 자네나 정시준은 나폴레옹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물론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현재로서는 증거가 없어. 귀납적으로 보면 이번에도 나폴레옹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지. 따라서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네.”
레디 소령은 그 말이 옳음을 인정해야 했다. 암허스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또한 일본인이 겁먹고 개항하려면 일단 우리의 힘을 알아야 해. 그런데 그 방식으로 일본을 직접 깨부수는 건, 글쎄. 지금 중국에서 겪는 것처럼 민중의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더 높아. 그런 공포는 풍문으로 접하게 하는 편이 좋겠어.”
일본 말고 다른 곳을 아무 데나 시범 케이스로 까부수겠다는 소리다. 레디 소령은 영국인답게 그 언행의 비윤리성을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비논리성을 지적하기는 했다.
“조선은 명목상 우리 우호국이고, 중국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안남(베트남) 해군은 만만치 않은 상대죠. 어디를 치시려는 겁니까?”
암허스트는 그런 반응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낮게 웃고 나서 말했다.
“조약을 이행해야지. 해적 토벌 말이야. 영국 해군 극동함대는 지금부터 적기함대[赤旗艦隊, Red flag fleet]를 박살 낸다.”
***
시준은 오늘도 즐겁게 세곡 징수하러 나간 혁명해군 1함대로부터 받아든 보고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순박하게 추진한 일본 무역 계획이 이런 대참사로 이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약전도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역시 영길리 사람들은 호구가 아니었군요.”
“그렇소. 이건 아무리 봐도 우리가 하자는 대로는 끌려가지 않겠다는 엄포요. 흑산도의 영길리군이 굳이 혁명해군 함대에 찾아와서 글월을 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암허스트가 쓸어버리겠다고 언급한 ‘붉은 깃발의 함대’는, 다행히 혁명해군을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홍기방이었다. 사실 이번 조약 때문에 청나라 다음으로 많은 피해를 본 세력이었는데, 청이 단수이를 개항한 데 이어 남중국해의 해적 토벌권을 영국 해군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일수도 자신을 배신한 청 정부에 이를 갈며 세력을 끌어모았다. 그녀가 가경제에게 항복한 것은 전쟁 발발 직전이었기 때문에 아직 정일수의 많은 세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륙의 기상은 대륙이 아닌 이곳에도 적용되었다. 1,800여 척의 함대와 8만 명이 넘는 해적을 부리는 홍기방은, 겨우 4척 남짓한 배로 카리브해에서 이름깨나 날렸다고 깝죽대는 검은 수염[Blackbeard] 따윈 갑판 청소나 해야 마땅할 대함대였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영국 해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홍기방은 처절하게 박살 났다. 어차피 도적은 숫자가 수만이건 팔이 늘어나건 칼을 세 자루 쓰건 군대에 정면으로 이길 수는 없다.
해적이 정규군에게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각개격파와 게릴라전인데, 홍기방은 규모가 큰 만큼 본진과 그 세력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공격을 지휘한 메이틀랜드 소장은 청 정부의 간섭이 들어오기 전에 정일수와 그 남편 겸 의붓아들인 장보자(張保仔) 이하 간부진을 전부 교수대에 매달았다. 죄목은 해적과 동성애, 그리고 근친상간이었다.
홍기방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그들은 (지켜졌는지는 의문이지만) 엄정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에는 납치한 부녀에 대한 강간 금지도 포함된다. 어기면 사형이었다.
그러나 정일수는 진작 그 규칙에 납치한 ‘남자’에 대한 강간 금지도 포함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기에 홍기방은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는 다 겁탈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사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그 방면에서는 홍기방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조예가 있는 영국 해군도 그들의 혐의를 쉽게 입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홍기방이 건드리지 않은 부녀자들은 전부 영국 해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어쨌든 영국 해군은 홍기방과 달리 딱히 남녀를 가리지도 않고, 강간죄로 처벌받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지친왕이(가경제는 만력제의 파업을 본받으려는 것 같았다) 개항장 단수이 외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압력을 넣을 때까지 타이완 섬에서는 대학살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혁명막부도 꽤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정약전은 영길리인의 악의를 헤아리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며 입맛을 다셨다.
“게다가 남방의 해적을 토멸한다고 이번에 만들어진 무기를 많이 가져가는 통에 당장 물량을 맞추기도 어렵게 되었소이다.”
조선-조슈 우호친선 계획의 수정은 불가피했다. 영국의 비호가 없는 이상 방향은 약간 달라져야 했다.
그러나 시준과 혁명막부도 이제 거의 국가 단위의 신디케이트 조직. 영국이 겁주면 어이쿠 무서워라 하며 물러날 리는 없다.
영국을 끌어들이려던 이유는 무기 말고 팔 상품이 없어서가 크다. 그래서 고민하던 시준은 무기 대신 평안도 담배를 앞세워서 일본 시장을 뚫기로 했다.
아편은 일본 사람들도 알고 있어서 의심을 피하려면 신중해야 했다. 영국이 참여해 줬다면 중국처럼 알아도 ‘판매 당하게’ 만들어 줬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무리다.
그래도 아시아에서 알아주는 서초라면 비록 영길리 면포 같은 것만은 못해도 무역의 마중물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어느 정도 비밀을 공유할 만한 신뢰의 밀매상들이 생기면 그때 무기를 팔면 된다. 어차피 여기도 당장은 많은 총을 준비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방향을 잡은 시준은 이번 영국의 난장판을 거꾸로 이용해 먹을 의견을 내었다.
“이주(대만)에서 섬 몇 개만 징검다리처럼 건너면 유구국(류큐)과 살마국(사쓰마)이오. 지금쯤이면 소문이 퍼졌겠지. 혁명해군 1함대 제독대리(문순득)가 유구 인근에 갔다 온 경험이 있으니 그쪽에 한번 보내 보고, 장주(조슈)에는 무도한 영길리 해적이 일본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내도록 하시오.”
조슈 입장에서도 막부에 항거하기보다 영국에 항거하는 쪽이 더 마음은 편할 것이다(몸이 편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 더 무기 수출엔 쉬울 수도 있다.
“그리고 유구에 갈 제독대리께서는 가능하다면 흩어진 홍기방 잔당을 잘 달래어 혁명해군에 합류케 하였으면 좋겠소.”
“나중에 영길리국에서 트집을 잡으면 어쩌지요?”
“그렇지 않을 거요. 영길리국이 원하는 건 바로 악명이 퍼지는 것일 테니.”
영국 해군의 의도는 시준도 짐작할 만했다. 처음부터 무력시위로 돌입하는 것을 보면 영국은 자신들에 대한 일본 내 평판을 꽤나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해소할 수 없는 악명이라면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렇게 급히 방향을 돌리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영길리는 넘어오지 않았다. 정약전이 그간 숱하게 부렸던 어둠의 책략이 일부나마 실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치국은 꽤나 침울해져 있었다.
시준은 그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손뼉을 쳤다.
“그러면 일본에서 쌀을 가져오기는 당분간 어렵게 되었소. 우선은 중국과 장사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기로 하고……. 총괄서결국장 동지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바대로 역시 쌀은 더 가까운 데에서 가져와야 하겠소이다.”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정약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석을 쳐다보았다.
“가까운 데라니요?”
시준은 그런 정약전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자기가 들었던 말을 돌려주었다.
“조선이지요. 예정보다 많이 이르긴 하나, 언제까지 놔둘 수도 없소.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김조순이 소위 근왕당을 완전 토벌하고 기세를 정비해 북진할 것이 분명하오. 원래는 일본과도 연결해 김회연의 동태도 살피고 싶었으나, 역시 달아나는 노루 쳐다보다가는 가진 토끼도 놓치겠지. 본 위원의 생각으로는 남쪽부터 해결하는 게 낫겠소이다.”
그 말을 가장 먼저 알아들은 사람은, 그런 논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이제초였다. 그는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그렇다면, 주석 동지! 바로 그날이 온 것입니까?”
시준은 웬일로 이제초의 말을 타박하거나 끊지 않고 동의해 주었다.
“존경하는 정치국 위원들의 표결과 의견을 들어 보아야겠지만, 그렇소.”
이제초 같은 정감록파만이 아니라, 차형기와 김창시 등 나머지 위원들도 일제히 시준을 쳐다보았다.
시준은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어쨌든 남쪽으로 내려가 쌀 털어오자는 소리보단 나으니까 말이다.
“남조선혁명당 각 지부에 정치국의 지시를 전달할 채비를 서두르시오. 일제 총궐기의 날이 가까이 다가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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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페이튼 호 사건은 작중 초중반에도 한 번 간단히 언급되었죠. 이는 당시 나가사키 일대의 방어를 책임졌던 나메시마 번의 굴욕과 서구화 흐름을 유도하는 일도 되었습니다.
2. 암액리아흥학의 '암액리아'는 라틴어로 영국을 뜻하는 Anglia의 음역입니다. 여기에서 번역된 일본식 영어가 근현대에 한국으로도 많이 유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happiness를 '행복'으로 최초 번역한 것이 바로 이 책에서였습니다.
3. Red flag fleet은 실제로 홍기방의 영어 명칭이었습니다. 거의 직역명에 가깝죠. 영어로 번역하면 다른 어감 때문에 괜히 폼나 보이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Spring and Autumn period - 봄과 가을의 시대) 같은.
홍기방의 규칙은 실제 역사와 같은데(몇 개 더 있습니다. 약탈품의 2할은 공동 기금에 보관해야 한다거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금지했다는 점 때문에 저게 여해적 정일수가 만든 규칙으로 오해되나 실제로는 선대 두목이자 그 첫 번째 남편 장을과 두 번째 남편이자 의붓아들 장보자가 관여한 규칙이라고 합니다. 그 목적도 범죄 방지와 인권 때문이라기보단, 당시 인식으로 해적에게 성범죄를 당한 남자는 풀려나도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하를 늘리기 위한 유도라는 설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