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41. 이용후생(3)
전후(戰後)의 상황을 논하자는 시준의 말에, 존 레디는 아까 프랑스의 패배를 점쳤던 것과는 달리 나폴레옹이 승리한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그건 이 시대 유럽인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럴 거면 시준이 굳이 일부러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까지 있었던 역사의 반복일 뿐이니 딱히 뭔가 덧붙일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 레디는 곧 시준의 의도를 눈치챘다.
“각하께서도 나폴레옹이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고 계십니까?”
존 레디는 그것이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군대를 영국군밖에 못 보고 그 위용에 매혹되어 버린 비문명인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프랑스 대육군은 상상할 수 없이 크고 강하며, 잔인하고 탐욕스럽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나폴레옹은 요즘 조선에서 부르는 말마따나 패왕의 이름에 어울린다. 존 레디는 그것을 말해주려 했다.
그러나 시준은 존 레디가 간과할 수 없는 말을 꺼냄으로써 그런 ‘백인의 가르침’을 막았다.
“그렇소. 들어서 아시겠지만 나는 근래 동인도 회사 주식을 대량 매입했소. 영국과 동인도 회사의 미래 가치를 높게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존 레디는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요즘 똥값인 동인도 회사 주식 많이 사 준 호구, 아니, 큰손에게 어쭙잖은 훈계를 해서 일 다 망쳤다간 존 레디의 경력에도 묵직한 흠집이 날 것이다.
게다가 시준이 가진 정보망은 방금 전 그가 직접 확인했듯 보통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충분한 근거를 가진 채 정의의 승리, 그러니까 영국 주식의 상승에 베팅한 것이라고 존 레디는 확신했다.
존 레디는 신중하게 첫마디를 골랐다.
“비록 지금은 전쟁 때문에 런던 쪽 경기가 좀 안 좋지만…….”
동인도 회사 주식까지 샀다면 대강 회사 사정을 알 터. 너무 뻔뻔한 태도는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존 레디는 먼저 상황을 인정하는 무난한 서두로 운을 띄웠다.
“각하의 평가는 매우 정확하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작금의 승리도 그렇지만 지금 평안도에도 계획하고 있는 면포 공장은 인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써, 랭커스터의 공장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요.”
물론 이건 영업용 사탕발림이다. 그 랭커스터의 공장주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다면, 동인도 회사의 간부들이 외국에 면포 공장을 함부로 세울 리가 없다.
그들은 ‘중국인의 소매 길이를 10인치 늘리기 위해’, 그럼으로써 ‘공장을 24시간 밤낮없이 돌리기 위해’ 전쟁마저 환영했다. 그리고 유럽인은 분쟁이 있을 시에 법적으로 고소하거나 하는 일 따윈 쩨쩨한 짓으로 치부한다. 재판은 원래 권총으로 하는 거다.
따라서 이건 그냥 조선에게 방적기와 역직기 좀 더 사가라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의 혁명막부는 기계를 쓸데없이 늘리기보다 일단 목화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그래서 시준은 그 얘기를 흔한 카탈로그 설명 정도의 주의력으로만 들었다. 어차피 지금 용건은 그게 아니다.
“아까 러시아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각하.”
“가정이지만, 프랑스가 러시아에 패배했다고 해 봅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소?”
오래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고래로 상처 입은 마왕이 당할 일은 자명하다.
“전 유럽이, 아마도 영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프랑스를 치겠죠. 뭐……. 가장 엉망진창으로 굴욕을 당한 프로이센이 맹견처럼 선봉에 서긴 하겠군요. 어쨌든 열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다음엔? 나는 그런 뻔한 것을 물은 게 아니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세웠을 때, 그럼으로써 파리 시민들이 루이의 목을 자르기 이전으로 유럽이 되돌아갔다고 할 때 영국의 적은 누가 되겠소?”
이쯤 되면 존 레디는 자신의 머리가 둔함을 탓해야 했다.
“러시아입니까?”
“그렇소. 나는 2년 전 조선의 사절단을 따라 베이징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러시아의 장군 레온티 베니그센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소.”
“리투아니아 공작!”
“바로 그 사람이오. 그 시점에 그는 이미 당신도 아는 대중 공작을 실시하고 있었지. 나폴레옹 때문에 썩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건, 그때 리투아니아 공이 조선에 대한 본격적 접촉을 시도했다는 거요.”
“러시아가 진작부터 다른 마음을 먹은 지 오래되었군요.”
지금 허겁지겁 현역에 복귀해, 러시아군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맞서러 나갔을 베니그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시준과 나눈 우정을 통째로 재검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준은 어쨌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긴장한 존 레디가 물었다.
“그래서, 조선은 러시아와의 외교적 연결을 받아들였습니까? 그 당시의 조선왕은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난 그때 일개 심부름꾼이었소. 뭘 어떻게 하겠다는 답을 줄 수는 없었지. 게다가 그때는 워낙 국내외로 어지러운 일이 많아 그냥 유야무야되었소.”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러시아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문명화된 통상과 교역만을 원하지만, 러시아는 중국을 상대로 증명했듯이 구식 봉건귀족들의 장원으로 쓸 영지와 농노로 부릴 사람을 원하지요. 아무튼 타타르의 후손 아닙니까? 그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시준은 범인류적인 동의의 미소를 보냈다. 인류의 공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도 억울하지 않은 집단이 몇 개 있는데,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바로 그중 하나다.
그러나 그건 눈앞에 있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시준은 천천히 말했다.
“소령의 충고를 명심하지. 동인도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는 소령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러시아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번에는 해양강국 영국 사람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 존 레디는 무례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시준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겨울에 얼어붙지 않는 항구죠.”
“정확합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유럽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흑해의 항구를 빼앗는 것이 가장 좋을 거요. 허나 그렇게 지중해로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영국이 있지. 이번 전쟁에서도 보았듯이 아시아에서 부동항을 노리는 것도 해 볼 만한 선택이오.”
둘의 회담장은 무기 공창 구석에 있었다. 시준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굴러다니는 숯 한 조각을 주워 왔다. 그러고는 책상에 개략적인 동아시아 지도를 그렸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온다면 아마 여기, 만주의 동남부가 우선 목표가 될 것이고…….”
시준은 그러면서 현대의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작은 원을 그렸다.
말하는 사람이 런던 사교계의 신사가 아니라 아시아인 청년이라 그렇지, 말 자체는 놀라운 예지라기보다 상식적인 추측 정도다. 존 레디 역시 턱을 쓰다듬으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다음 남하해서 조선국 함경도 원산진(元山津). 그리고 다시 더 내려온다면 부산포(釜山浦)와 대마도. 여기까지 왔을 때 대양으로 나가기 위해 러시아가 건드릴 곳은.”
시준은 극적인 연출을 위해 숯 조각을 단번에 주욱 그어 내렸다. 그는 자신의 동작이 확신에 찬 것처럼 보이길 바라며 큐슈와 그 동쪽, 조슈 번에 표시를 했다.
“일본이오. 조선은 물론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소. 아까 타타르 이야기를 했는데, 아실는지 모르겠으나 조선은 옛날에 9차에 걸쳐 타타르의 침공을 받아 인민이 아예 멸종당할 뻔한 적이 있소.”
시준은 그 말로써 단번에 러시아를 몽골과 동족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히 근거 따윈 없었지만, 어떤 주장이든 동의의 원천은 동의하고 싶다는 생각이지 정교한 근거가 아니다. 존 레디도 기꺼이 동의해 줄 생각이었다.
“과연, 그러니 조선으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겠군요. 특히 함경도 쪽도 장악한 혁명정부라면 최초로 러시아를 마주치게 될 테니까요.”
존 레디 역시 시준의 지도를 보았으니 시준의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일종의 역할극이라는 것 정도는 알 나이였다. 그래서 존 레디는 시준에게 말할 차례를 넘겼다.
“이렇게 귀중한 의견을 주신 것을 보니 그러한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제게, 아니, 동인도 회사에 하실 제안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제 본론을 말해 보라는 소리에 시준은 점잖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일본에 대해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렸는데, 동업해 보시겠소?”
***
시준이 영국인한테 가서 ‘내가 끝내주는 아이템을 가지고 왔는데 말이야’ 따위의 20세기 사기꾼 같은 짓을 하는 이유는, 모리 후사아키가 소개된 정치국 회의 때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이 발안한 이용후생 책략의 중심은, 그 자신이 정치국 회의에서 말한 대로 ‘조슈 번으로 하여금 무기가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작전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일단 거래를 트고 얼굴을 볼 수는 있어야 한다.
처음에 정약전과 시준은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리 후사아키에게서 뜯어낸 대조선 간첩질의 증거가 있으니까 말이다.
‘허튼짓하면 너희 주군 배 가르는 거야. 알겠지? 처신 잘하라고.’
이런 사기가 먹히는 것은 지금 일본이 예전 청나라처럼 조선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고 있기 때문이다.
경상도가 막혀서 통신사가 가지 않기는 했으나, 대마도에서 나중에 책잡힐까봐 몇 번 사람을 보냈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김회연이 점잖게 사절을 돌려보내자 막부에서도 더 이상 통신사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으로서는 조선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짐작할 만했다. 조선은 ‘돈 많이 드니까 다음 통신사는 대마도까지만 오지 않을래?’ 하는 일본의 요청에 빈정이 상해, 정조 시절부터 계속 통신사 파견을 미뤄 오던 상태였다.
어차피 원 역사의 조선도 1811년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통신사를 보내지 않는다. 일본 역시 쇼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통신사가 필요하던 시기는 지났다.
쇼군 이에나리가 야망 있는 자였다면 조선을 신중히 살피고 혼란의 징조를 잡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일국의 통치자답게 안의 일만 해도 바빴다. 이를테면 55명의 자식을 만든다거나 하는 막중한 책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여전히 그 전과 같은 상태였고, 따라서 조선에 군사적 염탐을 시도했다는 모리 가문의 죄도 여전히 큰 것이었다.
그렇게 한 번 뚫어 놓은 개구멍으로 정찰총국 요원들을 들여보낼 수 있게 되면 그때 총 팔 준비가 된 것이다.
애초에 모든 인질범과 협박범이 그렇듯, 시준과 정약전은 조슈와의 비밀 유지 맹세를 지킬 생각 따위 손톱만큼도 없었다.
요원들을 중으로 변장시키든 배의 허드레 일꾼으로 둔갑시키든 일본에 좍 풀어서 막부와 조슈 번을 이간질하는 것이 제 일보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 때 정찰총국 요원들이 왜말을 능숙히 하거나 일본 문화에 익숙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일본인으로 변장하는 건 좀 무리수다. 어쨌든 조제프 푸셰가 아무리 똑똑해도 일본어까진 못한다.
허나 그렇게 전문적인 첩보 역량까지도 필요 없다. 이미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를 의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으니. 그쪽 막부가 이쪽 막부를 잘 도와줄 것이다.
의심은 증거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의심하기로 결정한 뒤에 증거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조선인들이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제공해 줄 생각이었다.
‘조슈가 조선과 연합해서 대박을 에도 앞바다로 올려보내, 세키가하라와 분로쿠게이죠노에키[文祿慶長の役,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의 치욕을 한번 통쾌하게 갚고자 한다!’
‘모리 가는 본래 딴마음을 품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기리스(영국)가 이번에 대청을 깨뜨려 기세가 높은 것을 보고 근간에 자주독립한 조선을 꾀어 결탁했다!’
‘통신사가 오지 않는 것이 그 논의를 위해서였다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이묘의 일문가로인 후사아키가 조선에 특사로 갔다 왔다던데. 봐라, 그 답으로 조선인들이 지금 몰래몰래 드나들지 않느냐!’
내전까지는 아무래도 어렵다. 설마 막부의 가로와 조정의 공경이 다 얼간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막부는 건수 잡은 김에 조슈를 반드시 압박할 것이고, 그 방법은 아마 주변 영주들을 활용하는 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슈는 꽤 부유한 영지다. 그런 식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주변 영주들은 조슈를 침몰시켰을 때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올지 주판을 튕겨 보게 된다.
머리가 있다면 이쯤에서 조선을 의심해 보겠지만 그때는 의심을 한들 소용이 없다.
도쿠가와 막부는 모함의 출처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조선인 잠매꾼들이라 하더라도 너그럽게 수용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고 싶기 때문에.
에도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닌 이상에야 그 ‘잠통모반 고변의 출처’는 당연히 조선인이 아니라 ‘믿을 만한 소식통’인 것으로 합의될 수밖에 없고, 조선은 적어도 공식적인 혐의는 피할 수 있다.
들킨들 어쩌겠는가. 조슈나 막부에서 수군을 일으켜 조선을 치겠는가? 시준은 할 테면 해보라는 심정이었다.
그 변명은 김조순과 김회연이 신경 쓸 일이지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나중에 정말 혁명이 완성되어 조선 팔도를 다 손에 넣는다면 ‘도쿠가와 막부를 적대하려 한 조선 조정을 타도’하였다는 핑계로 일본과 친교를 틀 수도 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이 아무리 약체라 한들 그건 영국 해군을 상대로 했을 때 얘기다. 일본 수군은 바로 그 조선 수군에게 걸레처럼 박살 난 전적이 있다.
어쨌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면 조슈는 자위력이 필요해진다.
언제나 이웃에게 친절한 혁명막부는 주는 것 없이 서럽게 구는 도쿠가와 막부 대신 바로 그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다. 이름이야 같은 막부라도, 이것이 도덕국가 조선과 안 도덕국가 일본의 차이란 것이다.
조슈도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과 밀매를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한다. 동인도 회사는 공창에서 나오는 무기 잉여분을 혁명막부에만 팔기로 계약한 데다, 조슈가 정말로 영국과 직거래를 튼다면 그건 즉각 반역자 자백 확정이다.
물론 조슈가 혼자 총도 못 만드는 영지는 아니다. 그러나 명백히 품질 좋고 대량으로 한 번에 들여올 수 있는 영길리 총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 총 판 돈과 쌀은 혁명의 기계를 돌리는 좋은 윤활유가 될 것이다.
그 정도가 정약전의 ‘작전명 이용후생’이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말했듯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는 법. 그렇다면 수요를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남인 실학파는 그 이름과는 다르게 북쪽에서 꽃을 피웠다.
***
조슈 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갖고 놀다가 배신해 버리자는 이 계획이 아무래도 선비로서 최후의 양심에 찔렸는지, 정약전도 대의를 위해서라는 식의 변명을 덧붙이긴 했다.
“꼭 모리(謀利)를 위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장차 머지않은 앞날에 남조선혁명당 일제 총궐기(정약전은 이 시점에서 시준이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갸웃했다)가 이루어질 텐데, 그때 장주나 살마(사쓰마)의 해적들이 옛 삼포의 왜란과 같은 난을 일으키면 조선 땅의 인민들은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외다. 정신없이 바쁘게 해 줘야지요.”
시준은 기뻐하며 즉시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실무적 역할을 해 줘야 하는 외사통호국장 정약용이 이의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사람과 달리 아직 도덕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보가 나쁜 흉계라며 반대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도덕이 뭔지 아는 사람만이 내다볼 수 있는 미래가 있었다는 얘기다.
정약용은 이 흉계의 대전제, 다시 말해 조슈 번이 조선 밀매상을 받아들인다는 예측을 부정했다.
“겉보기에는 잘될 것 같지만 이는 매우 위태한 책략이오이다. 물론 대명(大名, 다이묘) 한 사람은 말씀하신 대로 장군(쇼군)의 진노를 두려워해 우리를 들여보내 주려 할 수도 있지만, 설마 장주국(조슈 번)에 사람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갖다 팔 것은 영길리 총포인데 무기부터 들이민다면 누가 수상히 여기지 않겠소이까? 만약 일이 잘되어 제후와 막부를 이간할 수 있다 하여도, 우리를 저 영길리와 같은 해적도배라고 몰아 전부 거짓말이라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도 맞다. 무역하자고 하면서 배에 무기만 싣고 왔다면 이놈이 무역상인지 아니면 반란군 지원자인지 헷갈리게 마련이다. 상식적으로 너무 수상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칼침과 뇌물이면 대충 만사가 해결되던 평안도와 달리 세상에는 명분이란 게 있다. 번주 모리 나리히로가 밀매상을 눈감아 주고 싶어도 그 가신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 에도 침공설을 성공적으로 퍼뜨려도 뒷일은 생각만큼 잘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도쿠가와가 조슈를 싫어해도 모리 가문 역시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참근교대]로 평생의 절반을 에도에 머무른다.
따라서 세이이타이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변명을 들어도 조선보다는 모리 가문의 변명을 더 자주 듣게 된다.
이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도쿠가와 가문이 외국인의 말만 믿고 번을 팽하려 한다는 의혹을 두려워할 가능성도 크다.
정약용의 열변을 들은 정약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것도 옳은 말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일본에 총 내다 팔겠다는 허망한 계획은 관두고, 차라리 동인도양행에서 사는 물량을 줄여서 돈을 아끼는 것이 맞소이다. 그냥 그 돈으로 쌀을 사 오는 게 리(理)에 합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시준이 반대했다.
“그건 안 됩니다. 동인도양행과 앞으로 돈독한 우의를 유지하려면 거래선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물량을 줄였다가 그들이 그럼 더 이상 조선에 볼일 없다 하고 군함으로 모두 강점해 버리면 어쩔 셈이십니까? 영길리 장사꾼은 자기가 손해 보면 바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천진이 무슨 꼴이 났는지 보셨잖습니까?”
정약용은 침묵했다.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반문해야 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영길리라면 그러고도 남을 족속이다. 그들은 그것을 천진에서 담백하게 증명했다. 정약용은 애달프게 말했다.
“그,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는데…….”
시준도 그것에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정약전이 시준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시준도 잠시 뒤에는 깨달았다.
혁명막부와 달리, 총 말고도 여기저기 갖다 팔 많은 물건을 가진 자들이 가까이에 있었다.
시준은 어느새 정약전과 비슷한 정도의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약용이 형과 제자의 동반 타락에 개탄하는 동안, 정약용도 이미 예상한 말이 시준의 입에서 나왔다.
“영길리국과 동업해 보죠. 어쨌든 우리가 총 많이 사다가 일본에 팔아 주면 그쪽도 이득 보는 사세가 아닙니까. 필히 알아들을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시준은 존 레디와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시준의 사업 아이템에 크게 공감한 레디는 곧 암허스트 남작에게 의사를 타전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암허스트는 시준이 넘어야 하는 마지막 난관이었다.
그는 일전의 일로 계속해서 시준을 의심하고 있는 데다, 그냥 외면하기에는 현재 그럴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기도 했다.
========================
작가의 말
1. (중국인이 워낙 많으니까) 중국인의 소매 길이가 10인치 늘면 랭커스터의 공장이 무휴가동할 것이라는 소리는 실제 당대 영국의 중국 침략용 국내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이때쯤 자본의 세계 연결이라는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죠.
2. 이때 일본은 후일처럼 강고한 쇄국까진 아니었습니다만, 쇄국인 건 여전했고 외국과 사사로이 통하면 당연히 사형이었습니다. 물론 영주쯤 되면 일반법과는 적용이 다르긴 하나.. 도쿠가와 막부가 이 갈고 작심하면 개역 조치를 검토한다고 협박해 굴복시킬 수는 있는 건수지요. 이때는 아직 도쿠가와 치세가 튼튼하던 때였습니다.
3. 참근교대는 영주들이 1년씩 교대로 에도에 머물러야 하던 규정을 말합니다. 신라와 고려 때도 지방호족 견제를 위해 비슷한 제도가 있었죠. 단지 이때는 시대가 더 발전했으니만큼 아주 빡세게 지켜졌고, 다이묘들은 정말 엄청난 돈을 써가며 이 짓거리를 해야 했습니다.
국가 전체로 보면 긍정적인 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오랜 기간 다이묘들의 반란을 억누를 수 있었고, 또 사람과 재화가 대량으로 지속 유통되며 섞이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이 참근교대가 일본의 교통, 상업, 도시화를 촉진시켰다는 설도 있을 정도죠.
4. 작중 언급된 대로 조선이 일본을 침공한다는 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겠습니다만, 당대의 정보 부족을 생각하면 단숨에 부정될 거라고 확신하여 말하기도 힘듭니다. 작중 초중반 언급된 것 같은데, 인조 이후 조선은 일본과 대만이 연합해 (대만 해적 가문의 모계가 일본계였음) 조선으로 임진왜란 시즌2를 찍으러 밀려들어온다는 소문/그리고 삼번의 난으로 청이 중원을 포기하고 만주로 물러나 조선을 재침공한다는 소문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육수군 확충에 나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