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41. 이용후생(2)
모리 후사아키를 붙잡았던 당시 시준에게는 현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중에 때가 되면 그를 조슈 번, 나아가 일본과의 외교에 써먹기로 하고 그를 최초로 데려왔던 정약전에게 맡겨 두었다.
그러고 나서 시준은 까먹었지만 정약전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전은 정치국 위원들에게 모리 후사아키를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고는 곧 조슈 번과 혁명막부가 우의를 다질 것이라 장담하고, 난생 처음 박수갈채 받아 보는 후사아키를 일단 퇴장시켰다.
그러고는 약간 낮은 목소리로 안건을 발의했다.
“일본 사람들이 무(武)를 숭상한다 들었소. 천하제일이라는 영길리의 총포라면 마땅히 천금을 주고라도 사겠지요. 남는 총포를 일본에 팔아 봅시다.”
***
조슈 번이라고 하면 에도 시대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번영했던 곳이다.
여기도 도쿠가와에게 미운털 박힌 것은 남쪽 사쓰마와 마찬가지라. 시마즈에는 암군이 없다[島津に暗君なし] 하던 사쓰마처럼, 절치부심의 응원을 받은 모리 가의 명 군주들은 효과적인 부국강병 개혁을 주도했다.
19세기 중후반쯤 가면 훨씬 큰 나라인 조선엔 단 한 척도 없는 증기 군함을 몇 척이나 보유하고, 해협에 포대까지 열심히 만들어서 영국과 실제로 한판 떠보기까지 하는 호전적 전투집단으로 변모한다.
영국 해군조차도 눈먼 포탄에 지휘부가 거의 몰살당할 정도로 애를 먹었다. 그러고도 분풀이로 주변의 민간인 마을을 불사르는 식으로밖에 보복을 못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성공에는 조슈 번의 지리적 위치가 큰 몫을 한다.
옛 오우치[大內]의 터전으로서, 대마도를 제외하면 대륙에 가장 가까이 있던 그 위치상 일찍부터 조선이나 중국, 사쓰마 및 남쪽 바다로 통하는 길이 뚫려 여러 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밀무역이다.
초기에는 이웃들도 친절하게 일본 상인들을 초대해 공무역을 텄지만 곧 그건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때 왜상(倭商)의 수준이란 게 ‘장사가 안되면 동종업계 경쟁자를 다 죽여 버리면 되지 않을까?’ 정도였던 게 문제였다(이 사상은 일본인들의 유전자에 면면히 이어졌으며, 원자폭탄이 내뿜는 방사선에 DNA가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전까지 유지된다).
때문에 영파(寧波) 등 명나라 개항장에서는 서로 다른 동네에서 온 일본 사람들끼리 사고가 빈발했다. 규모를 보면 거의 전쟁이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고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그래서 명은 학을 떼고 감합무역을 차단해 버렸다. 좀 뒤의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꽤 선견지명 있는 결정이었다.
많은 사람이 전근대 중국의 해금과 해외무역 경색에 혀를 차지만, 중국으로서는 애먼 백성들의 원통한 죽음을 나 몰라라 해 가며 왜인에게 은혜를 베풀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어쨌든 그래서 조슈 번도 많은 무역을 밀무역으로 진행했다.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의 카이엔타이[海援隊, 해원대]는 맨땅에서 생긴 게 아니다. 그 기민하고 교활한 무기 밀매 단체는 이미 그 전부터 조선과 중국, 대마도를 오가던 비합법 상인들의 노하우가 집적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항으로 유명한 장소가 바로 코토이[特牛]. 야마구치 북서부의 포구이다.
더 남쪽의 아카마가세키[赤間關, 지금의 시모노세키]에 밀려 현대의 인지도는 낮으나, 이 동네 대외 무역의 선봉이었던 선종 승려들의 근거지로서 꽤 오랜 세월 번영했다.
***
코토이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도 빈임포(賓任浦)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서 보듯 조선도 일찍부터 이 포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준을 포함한 정치국 위원 대부분이 말하다가 혀 씹어버릴 그 길고 낯선 이름의 지도는 지금 시점에서 400여 년 전의 물건이다. 그래서 정약전도 그 지도보다는 후사아키에게 들은 이름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포구의 이름은 특우(特牛)라고 하오이다. 대마도에서 지척이라, 전라도 남서쪽을 무인지경 가듯 휘젓는 혁명해군 함대라면 여기에도 능히 갈 수 있을 거요.”
그 이름은 정치국 위원들을 웃겼다. 출출한데 끝나고 소 잡으면 안 되냐느니, 네가 소 대신 쟁기 끌고 싶지 않으면 닥치라느니 하는 훈훈한 농담이 몇 번 오가고 나자 시준이 다시 본래 의제로 위원들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여기 방금 총괄서결국장 동지께서 주신 글을 보면……. 일본 사람들은 총포를 급히 사들일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근대 이전의 일본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역시 임진왜란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다. 그리고 그 전쟁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엄청난 수의 조총병으로 흔히 대표된다.
물론 조총은 당시 명과 조선에게 있어 초월적 신무기까지는 아니었고, 임진왜란의 승부도 다른 전쟁처럼 국력과 외교, 전략이 주로 결정했지 첨단무기가 결정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임진왜란의 도식을 조총으로 간편하게 설명했던 데에도 아주 이유가 없지는 않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총병을 보유했다는 일본의 조총 부대가 그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도 시대의 천하태평을 거치면서 일본의 총기는 그 급증만큼이나 빠르게 쇠퇴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우선 대규모 전쟁이 없는, 혹은 없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량의 무기는 불안 요소밖에 안 된다.
강력한 군대를 빠르게 구성할 수 있다는 총의 최고 장점은, 이세계 출신 개혁군주들에게나 장점이지 태평기의 영주들에게는 끔찍한 악몽 그 자체일 뿐이었다. 강력한 반란군이 빠르게 양산된다는 얘기밖에 안 되니까.
게다가 일본은 청동기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쭉 전사 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조선에서도 ‘어린아이가 항우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라고 표현한 조총은 많은 항우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무예로 먹고살던 저 서양의 맘루크도 총기 도입에 격하게 저항한 바 있다.
군대마저 평화로운 문치의 나라 조선 사람들에게는 아마 한글의 사례가 더 잘 와 닿을 것이다. 배우기 쉬운 글이나 배우기 쉬운 무기는, 그게 원래 어려웠기 때문에 독점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던 계층에게는 사형 선고다.
시준이 그런 역사는 몰랐으나 별문제는 없다. 그 비슷한 내용이 그간 틈틈이 후사아키와 친분을 쌓은 정약전의 자료에 들어 있으니 말이다. 요체는 지금 일본에서 총이 그다지 인기 있는 품목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석 동지의 말씀이 옳소이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 칼로 찌르고 베는 술기를 높이 쳐서 총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초정(박제가)의 저술(북학의를 말한다)에서도 일렀듯 나라 사람들이 그릇 비뚤어지는 것에 개의치 않으면 도야가 없는 법이올시다.”
“그러면 무기를 어떻게 팔 생각이시오?”
정약전은 이용후생의 의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시준은 그 미소가 예전에 조운선 해적질하자고 주장할 때의 그 표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합니다. 무기가 필요하게 만들어 주면 되지요.”
***
얼마 후, 주석보필국장 서유구는 주석의 일정에 한 가지를 추가해서 막부의 여러 부서며 해당 인민위원회에 공문을 보냈다.
한창 가동 초기의 열정을 자랑하는 삼화부 무기 공창에 주석이 친히 살피고 격려하러 나간다는 것이었다. 별로 드물거나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단어가 없으므로 아무도 ‘현지지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날 삼화부에 도착한 시준은 정확히 그것에 일치하는 기분을 느꼈다.
‘왜 그쪽 공화국 최고존엄이 그리 자주 현지지도 나갔는지 알 것 같네.’
혁명막부는 근간이 상인들의 연합체이며, 비록 총선거와 중앙인민회의가 있다 하지만 그 대의원들도 대부분 원래부터 힘이 있던 지역 유지들이다.
시준의 권력은 그들의 합의에 의해 지탱된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등을 돌렸을 때 시준은 많은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모든 힘’이 아닌 이유는 영국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준이 의도치 않게 노비당과 부녀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이런 체제의 권력자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와 직접 접촉하는 유력 계층 외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신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화가 없는 이 시대에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지배력’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가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이 그리 흔하지 않다. 강력한 유교적 ‘교화’로 지탱된 조선의 중앙집권이 경이로운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준이 이제 막 태생한 거나 다름없는 혁명막부에서 국가의 부패나 사람들의 타락을 염려하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다.
과연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이가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젊은 국가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삼화부 공창도 그러한 종류의 열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망치 두드리는 소리, 고함 소리, 장작개비 쏟아놓는 소리, 걸쭉한 욕설 등이 정신없이 뒤섞였다. 땀방울과 긴장과 환호가 지금 노에 있는 쇳물처럼 절절 끓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선전선동국원들의 노래가 들렸다.
“승리, 또 승리! 신심 드높이! 승리, 또 승리! 용맹정진해!”
프랑스군에게 유럽식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운 선전원(宣傳員)들의 연주는, 주석의 방문을 인지하자마자 그 소리가 두 배로 커진 것 같았다. 시준은 박자에 맞추어 팔을 벌렸다 오므리며 목소리 높이는 그 합창을 더 보기가 괴로웠다.
그러나 이것도 공창 만들 당시 시준이 생각했던 타락의 결과물이었으니 누굴 탓할 일이 못 된다.
시준이 운만 띄워 본 화선식 선전선동에, 자기편 사람들 일거리 줄 수 있겠다 생각한 노비당 쪽 전문위원들은 열렬히 찬성했다.
그리고 선전선동에 쓴다는 얘기는 곧 조제프 푸셰의 부하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원래 반쯤 범죄자들이었던 조선의 예인들을 기꺼이 정찰총국의 하부 요원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낮에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밤에는 아무리 특수 정보부서라도 저지르기 껄끄러운 어둡고 더러운 일들을 대신 처리했다. 얼마 안 되는 보상보다는 나랏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이들에게 의욕을 더 주었다.
아무튼 이쪽이 본업이다 보니 목소리 하나는 참 좋았다. 시준은 그중 특히 의욕적인 서너 명이 프랑스인들에게 유럽식 성악 발성 기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시준은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제발 이런 일에만 그렇게 열심히 달려들지 마…….’
가사는 시준의 어두운 기억과 미륵사 일당의 종교적 색채가 혼합되었다. 음악은 프랑스군에서 적당히 혁명 당시의 군가를 편집해 주었다.
아무리 시준이 기억을 쥐어짜도 멜로디까지는 복원 불가능해서 취한 고식책이었다. 하긴 그 악보를 여기서 줄줄 써 줄 수 있을 정도였다면 시준은 진작 공무원 잘렸을지도 모른다.
시준이 만약 저기서 일하고 있는 장인들이었다면 노래 듣다가 망치 삐끗해서 손가락을 찍어버릴 정도의 민망함이었으나, 그게 평안도 사람들에게 잘 먹힌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전통적인 조선의 음악적 관점에서, 빠르고 높은 음정은 비속하고 음란한 것으로 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달랐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혁명적 기풍’으로 선전되었으며, 도통 발 맞춰 걷기 어려워하는 혁명군 신병 훈련용의 군가에도 빠르게 도입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음악이란 단순히 귀의 쾌락을 위한 게 아니라 통치의 척도이며 문화의 총아이다. 장인들의 근로 의욕은 왕성한 것처럼 보였다.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돌아보다가 시준에게 말했다.
“이제는 옛날 조총을 가진 혁명군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새로 만들어질 함경도 5영대도 마찬가지고……. 구닥다리 총이라고 다 버린 건 아니니 이대로만 가면 2개 영대는 새로 만들 수 있겠소이다.”
비록 공학적 지식은 없으나, 시준은 영국인도 한 수 배워 갈 정도의 현대적 분업 체계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창의 생산성을 극히 끌어올렸다.
사람들이 영길리총이라 부르는 브라운 배스 머스킷은 영국군도 보안에 그다지 신경 쓰는 물건이 아니었고 – 1세기 동안 쓰던 물건이다 – 그래서 쉽게 복제할 수 있었다.
비전투 손실을 제외하면 딱히 대량으로 손망실할 일도 없어서 혁명군 전체의 보급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빠른 기세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매번 돈, 돈 하는 시준의 절박함과 달리 그간 해 놓은 여러 사업이 슬슬 결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의 신비한 영약’의 자바 판매 대금은 신뢰의 상인 윌리엄 자딘에 의해 충실히 전달되었고, 그 약리 효과가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새로 개척한 중국 시장에도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중국인은 그냥 약만 파는 영국인보다, 좀 비싸더라도 청심환도 같이 끼워 주는 조선 사람의 것을 샀다. 영길리인은 아편에 독을 섞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째 조선 아편은 피워도 정신이 그렇게까지 출타하지는 않는 것이 – 파트나보다 품질이 떨어지니까 당연하다 – 몸에 더 좋은 것도 같았다. 진시황이 떴다방 건강식품 사기에 당하던 시절부터 알아주던 동방 의료대국의 명성은 사방에 떨쳤다.
아편쟁이가 무슨 건강 생각하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21세기 미국에서도 마리화나를 말아 피우는 용도로 ‘폐에 나쁜 일반 종이’ 대신 ‘몸에 좋은 식물성 투명 수지’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사람이란 게 대개 그렇다.
어쨌든 그런 전차로, 혁명막부의 재정은 웅크린 채 추진력을 모으는 중이었다.
공중분해된 함경도 토병들을 모집한 신규 5영대도 머지않아 시준의 ‘해수구제사업’과 함께 모양새를 갖출 것이었다.
지금은 전체를 조망하면서도 자세한 자료를 살펴야 하는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약전은 그것을 굳이 동네방네 떠들 필요까진 느끼지 못했다.
이처럼 지금 혁명막부의 사업은 여러 위원과 대의원,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이익단체의 탐욕이 어우러져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굳이 모자란 것이 있다면 식량과 가축이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정약전이 이용후생의 책략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차형기의 야망과는 별개로 6영대와 7영대의 창설은 보류되었다. 지금은 그 많은 병사가 당장 필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들에게 돌아갈 총을 쌀로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총은 불과 철과 노동력이 있으면 만들 수 있으나, 쌀은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는 이상에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사를 늘리기보다는 일본에 내어 줄 물건의 양을 맞춰야 하오. 동인도양행에서는 사람이 왔소?”
차형기도 다행히 그렇게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예. 동인도양행에서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
막부 안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계약상 이 공창은 혁명막부의 것이 아니다. 엄연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것이다.
노동자도 혁명막부에서 대어 주고, 시준이 시찰한 것처럼 경영에도 상당 부분 간섭하기는 하나 형식적으로 여기의 무기는 막부가 동인도 회사에게 사들여야 한다.
물론 동인도 회사는 이제 전쟁 끝나서 쓸데도 없는 무기를 조선에 잘 팔아먹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제 안 쓴다고 공창을 해산하기는 투자금이 아까웠다. 그리고 어차피 영국이 여기 있는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전쟁이 또 난다. 그건 중력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동인도 회사 동아시아 방면 책임자까지 승진한 존 레디가 일찍 와서 시준을 기다린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전쟁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의장 각하.”
“오랜만이오. 소령. 아, 이제 소령이 아니군.”
존 레디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저에게도 명예로운 직책이었으니 그렇게 부르십시오. 그러고 보니 각하와 제가 교우한 것도 그때였지요.”
그렇게 클라이언트와의 친분을 강조해 보인 존 레디는 이제 중국에서 다시 수입할 수 있게 된 홍차를 내놓았다. 시준은 잠깐 흠칫했다가 아직 이 시대에는 폴로늄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잔을 들었다.
‘하긴 그건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 전공이지.’
아무리 영국에 세상 모든 악덕이 다 있다 해도 정말로 모든 것을 덮어씌우는 것은 부당하다. 시준은 자기가 왜 방사능 홍차 생각을 했나 고민하다가 곧 답을 찾아내었다.
그가 러시아의 일로 처음 말을 꺼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시준은 지나가듯이 말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려 한다는 얘기는 들으셨지요?”
사실 지금 시점에서 나폴레옹은 이미 모스크바 입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준 혼자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아무도 모른다.
통신 수단이 미비할수록 미래 정보에 대한 지식은 개략적인 것이라도 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 발생으로부터 정보가 알려지는 시점까지의 격차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물리적 거리 때문에 시준이 21세기와는 다르게 영국 주식 단타를 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머리를 조금만 쓰면 그 격차를 그대로 이익으로 전환하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쯤이야 어렵잖은 일이다.
증기선이 상용화되지 않은 시대다. 현재로서 가능한 가장 빠른 수단을 동원하면 영국에서 중국까지의 항해에 약 4개월 정도가 걸린다.
따라서 존 레디 역시 나폴레옹이 사방의 동맹군을 끌어모아 곧 러시아령 폴란드로 쳐들어갈 것이 확실시된다는 정보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 놀라워했다. 시준이 동인도 회사처럼 인류 문명에서 가능한 물리적 한계에 가까운 속도의 정보망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암허스트 남작이 말한 대로 조제프 푸셰가 프랑스를 대신하여 혁명정부와 내통하는가?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자라도 배보다 빠르게 소식을 알 수는 없을 터. 만약 푸셰가 말해 준 것이라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최소한 그가 조선에 온 3년 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쉽지 않았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건 근래의 일이며, 전쟁처럼 변수가 많고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을 그때부터 작정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존 레디는 일단 상식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는 시준이 자기가 모르는 정보 출처를 가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듣기로 보나파르트가 계획하는 대군의 반 이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강제로 끌어가다시피 한 병사들인데 모두가 나폴레옹을 원수로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폴레옹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병 방식을 취하는 영국 해군도 잘만 전쟁하고 다닌다. 원정군의 사기가 높지는 않겠으나, 그것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다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존 레디의 말은 그저 영국인으로서의 애국심 섞인 예측이라 해야 한다.
그러나 시준은 미래를 알고 있었으므로 존 레디의 예측에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그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래 줄 용의가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멀리 보는 법이지요. 당장 유럽의 전쟁에 열강의 촉각이 곤두서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이 끝난 뒤의 일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존 레디는 시준이 장기적이고 중대한 사업 논의를 하러 왔음을 알아챘다. 그는 너무 오래 우려 맛이 떫어지기 시작한 차를 바꿔 오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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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실제로 영파에서의 감합무역이 중단된 큰 사유는 오우치와 호소카와가 중국 땅에서 무역 이권을 두고 싸움박질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람도 휘말려서 많이 죽었지요. 해원대는 작중 시대는 아니고 막부 말기의 무기 밀매단으로서, 조슈 번의 서양 무기 무장에 많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2. 작중 나온 <청동기 시대부터 20세기까지>는 무사 계급이 그 고대부터 정립되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청동기 시대는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육=권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전사죠.
3. 맘루크는 15세기 말쯤, 화약 무기 도입과 개혁에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술탄이 창설한 총병부대(이 부대가 노예 출신이라는 것도 불만이었습니다. 사실 맘루크도 노예 출신이긴 하지만...)를 전부 살해한 적이 있습니다.
4. 작중 나온 선전가요의 원본은 시준이는 알지만 저는 모릅니다. 진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