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40. 아스라이 울리는 폭풍(2)
HMS 알세스트가 삼화항(三和港, 남포항)에 정박했을 때 시준은 한 가지 멍청한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노동신문……?’
어느 공화국의 당 기관지 같은 붓 글체가 – 당연하지만 북한에서는 ‘궁(宮)’서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 눈앞을 꽉 메우고 있었다.
총선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혁명막부가 주최하거나 조장한 여러 궐기대회, 토론회 때문에 사람들이 현수막이나 깃발 들고 모여 있는 광경은 시준에게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건 여느 때보다 훨씬 규모가 굉장했다. 게다가 며칠 동안 불가피하게 반동적 봉건질서 안에 들어갔다 나온 시준으로서는 상대적 온도 차를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함성이 항구를 뒤흔들었다.
“조선 독립 만세!”
“위대한 주석 정시준 동지의 영도업적 만세!”
“만국의 수평도가 실현되었도다!”
라는 따위의 외침이었지만 그 모두가 뒤섞여서 시준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말이 흰 깃발에 붉은 글씨, 혹은 붉은 현수막에 흰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짐작했을 뿐이다.
시준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배에서 내린 시준은 조제프 푸셰를 보자마자 그에게 뭔가 소리치려 했지만 푸셰는 시준이 입을 여는 그 순간 책 한 권을 내밀어 시준의 말을 막았다.
“「월간 대혁명」의 영광스러운 첫 번째 호외 발행은 이번 주석 동지의 대업적이 되었군.”
시준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책장 넘기듯 지나갔다. 정치국이고 중앙인민회의고 뭐고 이미 자기가 중국에서 하고 온 일이 쫙 알려진 뒤라거나, 조제프 푸셰가 월간 대혁명의 판매 부수 증대를 위해 이것을 연출했으리라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그 변명은 이 책 안에 있을 것이었다. 시준은 푸셰를 한번 노려보고 책을 펼쳤다.
<사상은 전진하고, 철학은 비약한다. 혁명에 끝은 없다. 혁명이란 정체가 아니라 변화이다. 혁명은 변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만약 멈춘다면 그것은 이미 그때부터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혁명의 대상이 된다. 우리 모두가 아는 혁명의 지식인 희만 선생이 자세히 연구한 수평도로 논하자면, 고인 물은 바로 썩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한다.>
유럽 개념을 한자로 번역한 단어와 조선에서 쓰는 말이 뒤섞여 있어서, 조선 사람은 몰라도 시준에게는 직관적으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준은 애써서 집중했다. 지금 조제프 푸셰가 불러온 화공들이 월간 대혁명을 직접 읽는 주석의 모습을 잽싸게 스케치하는 꼴에 정신을 할애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 혁명의 주석 정시준 동지는 그러한 역동성의 표상이다. 바로 이번의 업적이 그것을 말해 준다. 수평의 도가 어찌 사람 사이에만 있겠는가? 조선에서의 혁명이 미처 완수되기도 전이지만 인민의 앞장에 서겠다는 주석은 그렇게 안일하지 않았다.
…… 불타는 정열과 함께 합리적 이성을 갖춘 우리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을 보라. 그는 저 총포 빗발치는 끔찍한 전쟁터로 스스로 달려나가 굶주린 야수 영국과 탐욕스런 거수(巨獸) 중국을 중재했다. 그에게는 군함 한 척, 총 한 자루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주석은 이 땅 4천 년 역사에서 최초로, 소위 중심국가[中國]라 하는 저 오만한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왔다.
…… 동지들, 자랑스러운 혁명 동지들이여. 그대들은 억압자를 억압하고 약탈자를 약탈했다. 군주를 지배하고 귀족보다 귀해졌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랑스러운 업적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나라 안의 사람들 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주석 동지는 그것을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서 다시 발휘했다. 이 나라 조선은,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윗나라[上國]’를 단호히 거부했다. 주석 동지의 이 새로운 혁명을 나는 감히 세계혁명[Révolution mondiale, 世界革命]이라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혁명의 주역이 되는 자들은 바로 이 땅 조선과 조선의 인민들이니, 어떻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식견 있는 자는 모두 이 기적의 창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준은 이 신속성에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조제프 푸셰가 시준의 목적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 성공을 전달받자마자 이렇게 재빠른 행동에 나설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어로 물었다.
“제가 지금부터 이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까?”
푸셰 역시 친구로서 시준을 대할 때처럼 말했다.
“그렇다네. 독단 행동에 대한 변명을 여기서 해야 하나?”
“짐작할 만합니다. 조약 내용과 오간 말이 자세히 알려지면 제가 청 황제의 앞에서 조선의 벼슬을 칭하고 무릎 꿇었다거나, 청과 영국이 조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든가 하는 사실이 퍼지겠죠. 그 경우 좋을 일은 없을 테니 이러한 열기를 미리 조성하여 미리 막은 것입니까?”
조제프 푸셰는 시준의 빠른 반응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있지. 왕국 정부와 다른 세력 내에 존재할 독립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을 혁명정부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대표적이겠군. 어쨌든 자네라면 내 행동을 이해할 줄 알았네.”
시준은 얼굴을 굳혔다.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왜 미리 논의하지 않으셨죠? 결과만 좋으면 절차를 무시해도 된다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무책임과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전에도 이런 적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저는 당신을 믿지만 한 번이라도 실수할 경우 절벽으로 추락하는 곡예라는 것을 모르실 분은 아니겠지요?”
“계속 의심 거리를 쌓으면 꼬투리 한 번 잡아 숙청해 버리겠다는 말이지? 진실로 두렵군. 내 각별히 유의하겠네.”
시준은 싱글벙글하는 푸셰를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푸셰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조선에서 있을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나도 빛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네. 늙은이 과욕을 이해해 주게.”
“예?”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얘기. 시준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나 푸셰는 손을 내저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지. 우선은 자네를 보러 나온 저 많은 인민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줘야 하지 않는가?”
시준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무리 푸셰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도 지금은 산통 깰 때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자주독립이 혁명적 민중의 손에 의해 바로 이 순간 자랑스럽게 쟁취되었음을 알리는 짧은 연설을 한 뒤, 밀려오는 우레 같은 갈채 소리에 위통을 느끼며 마차에 올랐다.
***
최대한 빠른 일시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막부 정치국의 소집 일자를 결정한 다음, 그 외 부수적인 여러 가지 업무도 보고 나서 시준이 푸셰를 만난 때는 거의 저녁이었다.
“낮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야 이제 내가 잠시의 일탈에서 복귀하여 다시 대프랑스 제국을 위해 봉사할 때가 왔다는 뜻이지. 자네 없는 사이 영국 해군에 침투시켜 놓은 첩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었다네. 그리고 자네보다 먼저 왔던 선도함 편으로 전달된 중국 선교사들의 편지도 비슷한 정황을 시사하고 있더군.”
혁명막부가 중국에 배를 보낼 수 있는 일이 흔하지 않았기에, 임상옥의 밀무역 경로 관리를 위한 서한이라거나 푸셰가 선교사에게 보내는 연통 역시 이 길에 교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일은 정약용이 전담했기 때문에 시준이 신경 쓰지는 못했지만, 이는 삼화항의 이벤트와 달리 미리 결정된 사항이라 시준 역시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시준은 가만히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역사 지식을 헤아렸다.
몇 년 전 희만당에서 정약용과 나누었던 대화처럼, 시준은 앞으로 3년 뒤 나폴레옹이 몰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시준은 그 과정까지는 자세히 모른다. 솔직히 1815년이란 숫자도 시준이 프랑스에 잠깐 유학하지 않았으면 평생 알 이유가 없는 연도다. 역사 매니아가 아닌 보통 사람이 외우는 연도의 한계는 가족이나 연인의 생년 정도다.
하지만 시준에게도 상상력은 있었다. 나폴레옹 권력의 근간인 대육군은 어디 훈련 나갔다 벼락 맞아 몰살당한 게 아니다. 3년 뒤에 예정된 나폴레옹의 대몰락에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사건이 있다.
시준은 침을 삼켰다.
“황제가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했습니까?”
자기가 말할 생각이었던 푸셰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시준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럴 징조가 보인다고 해야겠지만, 아니, 그렇다 해도 정말 놀랍군. 미리 정보를 입수했으면 내게도 알려주지 그랬는가. 아무리 그래도 내 고향인데.”
“추론의 결과입니다. 어쨌든 정확한 정보를 들려주시지요.”
배경이야 시준이 대강 아는 것과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다.
시준 자신이 집필한 소설에서도 드러나듯 장밋빛 애정을 과시하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였지만, 원래 연인 관계는 성격 뒤틀린 사람들이 만날 경우 가장 끔찍한 폭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인류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규모의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었다. 그는 대륙 봉쇄령이라는 이름의 감금 상황을 연인에게 강요했으며, 물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알렉산드르는 감금피폐물이 취향에 맞지 않는 쪽이었다.
초토화되는 러시아의 무역 수지를 보다 못한 알렉산드르는 자기에게 자유를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독점욕이 워낙 강했던 나폴레옹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러시아는, 나아가 유럽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알렉산드르가 자신을 놔두고 영국과 어울리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영국이라는 매력적인 외간 남자가 600척의 상선을 띄워 알렉산드르에게 추파를 던진 사건은 나폴레옹을 격노하게 했다.
푸셰는 파이프를 뻐끔뻐끔 빨았다.
“작년에 이미 원정이 검토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지금 입수한 최신 소식에 따르면,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에 걸쳐 수십만 명의 군량을 조달했다는군. 내가 아는 황제의 성격으로 봐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아.”
지금은 음력 5월이 머지않았다. 양력으로는 6월쯤이다. 1812년 6월에 프랑스와 동맹국의 60만 대군이 실제 러시아를 침공하니 푸셰의 예측은 꽤 정확했다.
시준은 이번에 몽고 48부의 반란 움직임을 선동하여 영국의 승리에 기여한 러시아가 왜 떡고물 얻어먹겠다고 나서지 않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세계의 정복자 나폴레옹이 온다. 러시아는 지금 중국의 일에 최소한의 자원도 할애할 수 없었다.
시준은 그 비밀한 임무 탓에 천진에서 한번 다시 보지도 못했던 레온티 베니그센을 동정했다. 중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던 그 노장은, 아마도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는 본국의 소환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실 생각이십니까?”
혁명해군 1함대가 있기는 하나, 정약전이 지적했듯 그들은 아직 원양 항해를 할 수 없다. 프랑스까지 푸셰를 데려다 주기에는 능력도, 이유도 부족하다.
푸셰는 빙그레 웃었다.
“바로 거기에서 자네의 영도업적이 빛나는 것이지. 나는 조약의 부속 규칙들을 꼼꼼히 확인했네. 자네는 이제 머지않아 조선의 무역 함대를 동인도 회사에 포함시켜 중국의 개항장으로 보낼 생각이지?”
시준은 푸셰가 시준의 의도를 짐작했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래봐야 천진이나 강남 정도일 텐데요. 아, 윌리엄 자딘의 밀무역상을 이용하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그들 역시 영국인입니다. 자딘이 아무리 밀무역 중개인이라 해도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은 너무 눈에 띕니다.”
푸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기에서 날 태우긴 어려워. 영국 해군의 눈치가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조선만이 아니라 바타비아(인도네시아)와 쿠치(베트남)에도 중개선이 있고, 애초에 본진은 광저우와 마카오 쪽이야. 조선 배가 그쪽에 정박하면 나는 자딘 회사의 배로 환승하여 쿠치에서 선교사들의 배편을 이용할 생각일세.”
“상당히 위험한 계획이군요.”
“외방전교회는 어떤 제국도 도달하지 못한 세계 각지의 오지에 뻗쳐 있어. 가늘지만 끈질긴 교통망을 가진 그들은 많은 요령 또한 갖고 있다네.”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 당신은 배신자일 텐데?”
“하지만 그 전에 프랑스인이지. 선량한 사제와 선교사들은, 일단 나를 구해 주고 나서 욕을 해도 할 거야. 나도 전직 사제여서 잘 안다네. 쯧쯧. 자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능하지만 그게 문제야. 그렇게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편견은 버릴 필요가 있겠어.”
시준은 두 번째로 푸셰를 후려치고 싶었다. 도적놈에게 인의예지의 가르침을 들어도 이보다는 덜 기분 나쁠 것 같았다. 푸셰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조만간 작별 인사를 정식으로 하지. 어쩌면 다음에도 내가 정식 사절로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확신을 못 하겠군. 거짓 없는 진심으로 말하건대 조선에서의 혁명 사업은 정말 보람차고 즐거웠다네.”
시준은 피식 웃으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좋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 드릴까요?”
“구역질이 나려 하는군. 혹시 자네 정시준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인가?”
서로 상당히 유사하게 변해버린 두 사람은 함께 껄껄 웃었다. 시준이 곧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죠. 그간의 우정과 공적을 생각해서 최대한 편의를 보아 드리겠습니다.”
“자네들 살림도 빠듯할 텐데, 됐어. 어차피 그레테 자작이나 프랑스 수병들이 있으니 사람은 더 필요하지 않고……. 윌리엄 자딘과 자네가 친밀하다고 아는데 우리 말이나 잘 해 주게.”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그 전에 여러 가지 조율할 게 있어서, 중국에 대한 함대 파견이 내일이나 모레 당장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아직 혁명막부는 대중 무역의 준비가 안 되었다. 기랑의 사업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진행될 조선의 수출입 업무는 얼른 떠올려도 할 일이 태산이다.
상품을 싣고 가격을 정하며 상인을 선정한다. 배편과 순서를 짜고 필요하다면 관세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한다. 시준은 벌써부터 지끈대는 이마를 누르고 말했다.
“만약 정 급하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조선 배가 아니라 윌리엄 자딘의 배를 이용하셔야 하겠는데요.”
“그렇게 급하지는 않아. 어차피 내가 전선에 가서 지휘하려는 것도 아니잖나? 나도 외방전교회에 미리 기름칠을 해 놓아야 해서, 당분간은 자네가 천진에 보내는 배편에 내 서신을 전달해 주기만 하면 돼. 미리 말하는 이유는 내가 만들어 놓은 부서와 체제가 조선 혁명정부에 안정적으로 계승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조선말로 욕속부달이라 하던가. 천천히 진행하자구.”
혓바닥에 기름칠을 한 듯한 푸셰의 말에서 시준은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유유상종, 이심전심이라고 해도 좋다.
‘이 맛은…… 거짓말을 하는 맛이구나!’
푸셰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이기는지 지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출발할 셈이다. 일종의 감이었으나 시준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는 시준이 푸셰를 돌려보내고 집에서 천천히 생각하며 정리되었다.
하긴 푸셰가 군사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이 시대 귀족에게 군사는 기본 소양에 가까운 데다가 러시아 원정은 프랑스 국내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반대했던 일이다.
도박꾼을 자처하는 사기꾼이 그렇듯 푸셰 역시 애초에 도박을 안 하는 부류다. 원래 타짜는 도박같이 불확실한 일은 하지 않는다. 확실할 때만 승부를 건다.
그리고 시준은 오늘 푸셰가 이런 요란한 행사를 벌인 이유도 새삼 깨달았다. 푸셰는 자기 말과 달리 이것을 마지막 행사로 추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늘 일로 월간 대혁명과 선전선동국의 영향력은 더 확대되었다. 어차피 기다려야 할 일이라면 푸셰는 그사이 ‘조선의 혁명사업을 완수’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나폴레옹에게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조선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배제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실제 조선이 점점 어쩔 수 없이 영국 쪽으로 기우는 것이야 푸셰도 알겠지만, 어차피 조제프 푸셰가 진실에 관심 있었던 적은 별로 없다.
그는 나폴레옹이 승리할 경우, ‘영국 편을 들어 개항하려는 조선 왕의 정부를 혁명으로 전복’시켰다고 보고할 것이다. 진실은 아니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푸셰라면 거기에 대육군이 싸우는 동안 자기는 러시아를 동쪽에서 견제했다는 뉘앙스도 표시 나지 않게 섞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깨질 팔자잖아.’
아무리 조선에서 역사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한들 그건 동아시아의 일이다. 그건 저 먼 유럽에서 아스라이 몰아치는 폭풍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시준은 나폴레옹이 전쟁에 지리라는 – 그리고 자기만 그것을 알고 있다는 –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해 집중해 보았다. 당장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할 수 없으리라는 당연한 예측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간섭이라고 하면 프랑스보다는 영국이 더 문제인데…….’
시준은 혹시 영국도 어디 쳐들어갔다가 깨져 주지 않나 하는 기대를 하며 옆에서 잠든 지유를 돌아보았다.
시준 쪽을 보다가 잠들었기에 지유의 머리카락은 옆얼굴로 흘러내려 있었다. 시준이 그것을 정리해 주자 지유는 약간 뒤척였다.
별생각 없는 동작이었으나, 때로 영감은 그런 데에서 발현한다. 시준은 무언가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크게 외칠 뻔한 시준은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히 미영전쟁이 나폴레옹 시대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상호 통상봉쇄 과정에서 미국이 피해를 입은 게 주요 원인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몇 년이었지?’
사실 그것도 1812년 6월. 러시아 원정과 거의 동시기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와 미국이 동시에 움직여 한쪽은 영국을, 한쪽은 러시아를 상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과가 안 좋아서 그렇지 겉만 보면 꽤나 아름다워 보이는 합작이다.
허나 당사자들에게도 ‘망각의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는 미영전쟁의 연도가 시준에게 금방 떠오를 리 없다. 시준은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허사였다.
시준은 손톱을 깨물고 싶었다. 주변 정보로 추론해 보자면, 분명 요즈음의 동인도 회사에서 전쟁의 흔적은 읽어낼 수 없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반드시 일어난다. 프랑스도, 영국도 전쟁 중이라면 적어도 1815년에 유럽이 재편되기 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손 뻗치기 어려워지겠지. 좋아, 일단은 중국 무역을 하며 시간을 벌어볼 수 있어. 그다음에는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생각해라!’
3년 안에 발악이라도 해 볼 힘을 갖추지 못하면 영국에게 100% 먹힌다.
일단 시준이 생각한 최소의 힘은 조선 8도의 장악이었다.
그 정도가 있어야 영국으로 하여금 싸우는 것보다 협상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할 수 있다. 깡패는 보통 자기가 한 대라도 맞을 것 같으면 승리가 확실해도 시비를 걸기 꺼려한다.
‘이득, 이득…….’
그러나 21세기 한국인이었던 시준에게 있어서 이득이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주식과 코인 정도였다.
시준은 그 전염병 같은 생각을 치우려고 노력했으나 분홍 코끼리가 그렇듯이 그 쓸모없는 개념은 떨쳐내려 할수록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러던 시준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어, 잠깐. 주식은 지금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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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궁서체와 비스무리한 '그 북한 글씨'는 거기서는 붓글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글자체가 더 있지요. 노동신문의 프레임, 폰트 등 기본적인 디자인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소소한 변화만 있을 뿐 대규모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초기를 제외하면 금방 가로쓰기로 바뀐 게 그나마 눈에 띄는 변화지요.
2. 월간 대혁명은 외전에서 언급되었던 선전선동국의 잡지책입니다. 그리고 세계혁명은 물론 저 뜻이 아닙니다.
3. 러시아는 원 역사의 아편전쟁 때 딱히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조약에는 참여해서 이권을 강탈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거꾸로, 일은 해줬는데 얻어간 게 없게 생겼군요.
4. 조제프 푸셰가 혁명정부의 일원이 거의 다 되어서 혹시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르는데, 애당초 그가 나폴레옹의 명을 받아 조선에 온 목적은 1. 귀양 2. 당시 국왕 이공의 친영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