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40. 아스라이 울리는 폭풍(1)
시준이 발휘한 것은 전생에서의 직업 정신이었다.
국제 조약 같은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큰 사업에 부차적으로 딸려오는 여러 세부적인 실무 사항은 높으신 분의 눈에는 원래 잘 안 보인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지위상 그렇게 자세히 살필 시간도 없거니와, 경솔하게 이를 비웃는 젊은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에게도 찾아올 노안에 탄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능숙하고 게으른 관료들은 보고서의 맨 끝 첨부 2번 자료쯤 되는 부분에 중고딕 8 정도 되는 글씨로 안 보이게 중요한 사항을 삽입한다. 주로 숫자와 관련된 게 많다.
이렇게 되면 해당 사업의 수혜를 받는 ‘정책고객’들은 굉장히 촉박한 신청 기간이라든가 사실상 매우 협소해진 신청 대상자라든가 하는 일에 화만 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정책고객을 위해 획기적 복지를 기획하고 기자들 앞에서 자화자찬한 최고 관리자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 고객들은 최고 관리자에게 직접 항의하기 힘들다. 민원 전화 같은 일은 실무자가 맡기 때문이다. 정책의 행정 부담자가 자기 편하기 위해 그런 사항쯤은 조절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어찌 보면 타당하다.
시준이 정약용 및 윌리엄 자딘과 함께 이번 조약의 하부 단계에서 엮어 넣은 일이 그것이었다. 굳이 큰 조항에 전쟁 당사자도 아닌 조선의 이익을 표시 나게 끼워 넣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시준은 눈을 비볐다.
“너도 이제 선생님께 배웠으니 대강 짐작하겠지만, 이런 약속은 겉에 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 숨겨진 뜻을 봐야 해.”
“이른바 글의 진의를 숙고한다는 것 말이지?”
기랑은 정약용식 스파르타 경전 학습이 생각난 듯 진저리를 쳤다. 시준은 그것을 보고 미미하게 웃었다.
“맞아. 그래……. 먼저 여기를 보자. ‘상인의 무역에 필요한 모든 조치에 협조’라고 되어 있지?”
“응.”
“그런데 여기서 ‘상인’이 누구일까?”
“영길리 장사꾼들을 말하는 거 아냐?”
“그런 말은 없지. 왜 영국 상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기랑은 시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시준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차피 동인도양행에는 머리칼 얼룩덜룩하고 얼굴 하얀 영길리 사람뿐만 아니라, 흔도사단(인도)이나 저 남쪽 여송(필리핀, 여기서는 동남아시아 일대) 사람들도 날품팔이꾼이라든가 선원으로 들어 있거든. 그 모두가 중국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게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 영길리 국왕의 신민이잖아? 그럼 어차피 영길리 사람인 거 아냐?”
시준은 나른하게 웃었다. 현대인과는 다른 맥락의 인종 개념을 가지고 있는 기랑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 말도 맞아. 하지만 그냥 다른 나라 신민인데 동인도양행에 품삯 받고 일꾼 노릇 하는 자들도 많아서 그래. 게다가 문상(하청 상인)으로 중국 사람을 쓸 수도 있는 거거든. 여기까지 말했으면 이제 알겠지?”
기랑은 잠깐 생각하다가 가볍게 손바닥을 쳤다.
“그러니까 우리도 거기 문상 노릇 하며 끼어서 작반하여 중국에서 이것저것 장사할 수 있는 거구나. 게다가 대포 많은 영길리 사람들을 뒤에 업으면 물건값 맘대로 후리거나 거슬리는 녀석들 손쉽게 해치울 수도 있을 거고?”
시준은 왜 이 시대에 제국주의가 유행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련하게 위를 쳐다보았다.
“……뒤의 말은 나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튼, 음. 잘 요해(了解)했어. 네 말이 맞아.”
기랑은 예전 은행 갖고 왔을 때의 수줍은 미소를 다시 보여주었다. 시준은 지유가 말한 기랑의 ‘안전’이 과연 사실인지 잠깐 고민하다가 설명을 이었다.
“이런 나라 간의 일은 ‘당연히 이치가 그렇다’는 말로 치워 버릴 수 없어. 글자 하나하나까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자세히 정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매번 싸움이 날 테니까. 백성 두 사람의 송사 위에는 수령이 있지만, 나라 간에는 그런 게 없잖아? 그래서 그런 것들을 논하는 쪽에서 뛰어다니며 인정 먹이고, 문서 초하여 바치고, 통변해 대느라고 바빴던 거야.”
“그럼 이 여덟 개 조목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네?”
“물론이지. 이건 청나라 황제나 영길리 국왕이 보기 좋고 반포하기 쉽게 정리한 거고, 그에 부속되는 별단은 수레로 몇 개는 될 거다. 그것도 베껴서 가져 왔어.”
시준은 문득 원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베끼는 일이라면 너도 능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놀려 두었네. 어차피 몇 부 더 있어야 할 테니 돌아가면 총괄서결국에 잠깐 가서 도와 다오.”
“싫어.”
“닭 튀겨 주마.”
시준은 궁극기를 내밀었으나 놀랍게도 기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예전 인민대회 때 시준이 너무 바빠서 제1몸종 소질개에게 비법을 전수한 이후, 치킨은 이제 더 이상 시준만 만들 줄 아는 게 아니다.
기랑이 시준의 치킨을 제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며칠 밤샘 작업과 바꿀 정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기랑도 이제 당당한 혁명막부 주석보필국 급양과장. 몸값이 그리 싸지는 않다.
시준은 고민하다가 큰마음을 먹었다.
“그럼 저번에 해 준 것처럼 내킬 때까지 쓰다듬어 줄게.”
기랑은 ‘하? 이 주제도 모르는 자의식 과잉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시준을 지그시 바라봄으로써 시준으로 하여금 먼 이국땅에서 자결하고 싶도록 만들었다.
‘내가 피곤하긴 피곤했나 보다. 무슨 멍청한 짓을!’
시준은 자가 진단을 꽤 정확히 내리고도 그 진단을 참고하지 않는 우행을 다시 저질렀다. 황급히 사태의 수습을 꾀한 것이다.
“노, 농담인 거 알지. 지유에게는…….”
기랑은 시준의 말을 끊었다.
“그럼 도와주는 대신 그 문상에 나도 끼워 줘.”
“뭐라고?”
“이제 동인도양행에 끼어서 중국 많이 다닐 거 아냐. 서상이 주로 맡아 하기는 하겠지만, 백발백중회에서도 그런 거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어.”
기랑의 요청은 시준이 이 조약 이후 혁명막부 치하 양계에서 유도하려 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중국 시장 확대를 통한 민간 상업의 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도 막부가 먹여 주는 밥만 뜨는 게 아니라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시준이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생각이면 대부분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눈앞의 기랑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조약과 결과가 혁명막부 치하에 퍼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 돌아가기도 전에 시준에게 청탁을 시도하고 있는 기랑은 상당히 적시성 있는 선택을 했다 말할 수도 있었다.
설마 기랑이 그런 생각까지 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 시준은 아마 그냥 생각나자마자 말했으리라고 확신했다 –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약삭빠른 행동이 되었다.
시준은 놀라서 피로함도 잊고 주의 깊게 기랑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일은 짧지만 영길리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면서, 조선 사람들도 동인도 회사를 보고 ‘우리도 저런 거 만들어 보자!’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시준도 아는 바이지만, ‘조선 전쟁’ 중에도 이미 몇몇 사람들이 평화로운 평양에서 나름대로 주식 발매나 합자회사 홍보 비슷한 시도를 해 보았다.
선대(투자) 받아 장사하는 관습이야 조선에도 있었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분배한다는 정도의 개념은 조선 사람들도 잘 이해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굳이 이유를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너무 똑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주식(이때는 채권에 가깝다)을 사면 배당금을 주겠다는 영업 자체가 지금 시대에는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다.
지혜로운 조선 사람에게는, 한마디로 말해서 천하의 호구 상대로나 걸맞은 희롱이다. 당연히 주식인지 뭔지 팔아 돈 모으고 그대로 보따리 싸서 야반도주할 셈이 분명하지 않은가.
척 보아하니 영국인들을 흉내 내어 만든 증권이라는 것도 야학 아이들마저 그려낼 수 있게 어설펐다. 사서(史書) 작히 읽었다는 식자들은 ‘교초가 왜 망했더라?’ 하는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철마다 모아서 배당을 준다지만, 그런 걸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이미 2년간의 흉년 와중 다 죽었다. 이게 바로 지금 서너 살짜리 꼬마인 찰스 다윈이 반세기쯤 뒤에 주장할 자연선택이라는 것이다.
“어림도 없지. 쥐알봉수 같은 작자들의 수작에 누가 넘어갈랴고!”
“주석 동지가 어린 나이에 장사일로 크게 성했다 보니 별것들이 다 날뛰는데, 계룡산 정기를 받아온 것도 아니고 그게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사람들 후리고 싶거든 심산유곡에서 도나 다시 닦고 오너라!”
대동강 물을 팔아먹는다는 얘기보다 더 가소로웠다. 양계 사람들이 또 원체 혁명적이다 보니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거짓 허상에 잘 속지 않았다. 그들은 침을 뱉고 돌아설 뿐이었다.
그렇다고 조선 사람들이 회의적이라거나 비관적이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실제로 그 ‘주식회사’들은 별다른 사업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니 외면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혁명막부는 기본적으로 장사꾼들의 집합이었으며, 장사할 만한 것은 이미 막부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양계에는 민간 상업이 클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서상 통제의 계획경제 – 5개년 계획 같은 것은 아니고 농산물이 계획적으로 분배된다는 뜻이다 – 치하의 양계에서는 마땅한 사업 거리도 없었거니와, 밀무역이라든가 조운선 약탈, 마약 재배는 이를테면 정시준처럼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르다. ‘조선 전쟁’으로 거대한 외부 시장을 개척한 영국의 노도에 조선 역시 탑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랑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중국 사람들이 많이 팔아 줄 테잖아. 녹용이나 사슴이며 곰 가죽, 호피도 있고, 포수들이 사냥 안 할 때는 심마니 노릇도 하니까 약초도 캐지. 그런데 조선이 워낙 흉년이라서 그런 비싼 물건들은 잘 안 팔려.”
중국은 조선의 옆이며, 대국이라고 흉년이 피해 갈 리는 없다. 그러나 중국이란 데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어느 곳이 흉년이면 어느 곳은 풍년이기 마련이다.
물론 대부분의 인구는 가난하다. 건륭 황제의 성세에조차도 북경에서는 매일 수레 끌고 돌아다니며 시체 수거하는 사람들을 따로 두어야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만 모아 봐도 썩어날 만큼 많은 것이 중국의 인구다. 이건 19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항상 수요는 존재한다. 중국 시장의 막대한 잠재력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시준은 기랑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데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개항장이라는 데는 말하자면 영길리 사람들의 세가 미치는 골목인 거잖아? 손해 보면서 싼값에 들여와서 장사 방해하는 놈들이나 괜히 시비 걸어 쫓아내려는 부랑패들은 다 배에 실어 바다에다가…….”
시준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와장창 부서졌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음. 그래. 요지는 비싼 물건을 갖다 팔겠다 이거지. 하기야 싼 물건은 배로 실어 나르다가 본전 다 탕진할 테니.”
수렵과 채취로 상품을 마련하는 사업 특성상 대규모 돈벌이는 무리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감각이다. 그리고 시준은 그것을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혁명막부의 계획과 결합해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조립되는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야. 나도 거기에 선대하지. 같이 일해 보면 어떨까.”
시준은 기랑의 사업을 높이 평가했다. 박대했다간 그녀가 지유에게 아까 일을 일러바칠까 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시준은 여전히 의주 만상과 평안도 서상의 핵심 인물이며, 정치가보다는 상인의 경력이 더 길다. 본인도 대리인들에게 맡겼을 뿐 여러 가지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직도 서울에서 군량 횡령하는 서울 오죽당이 대표적이다.
시준은 일단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여 기랑을 돌려보냈다. 지금은 조약 관련 후처리만 해도 너무나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기랑의 사업은 그 처리가 완료되고 대중 무역이 궤도에 오른 뒤의 일이다.
기랑은 뿌듯한 얼굴로 물러갔다. 시준도 정약용과 정리하던 서류를 돌아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그것들을 챙겨 든 뒤 자기 방으로 향했다.
시준은 조선국 평서대원수로 온 만큼, 정약용이나 기랑과 같은 곳을 숙소로 쓰지는 않았다. 조약 체결 후에는 지친왕이 시준을 크게 치하하며 아예 큰 관사 하나를 비워 쉬도록 내려 주었다.
시준은 깨끗한 방에서 비단 이불을 덮은 채 누웠다. 청에서 붙여 준 시종들을 물리치고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만 주위에 남긴 채였다.
평양에서 주석이 쓰는 집보다도 훨씬 좋았다. 시준은 기가 막혀서 잠도 잠깐 깰 지경이었다.
만약 조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당장 국왕부터 밥을 굶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이 솔선수범해서가 아니라, 이런 전쟁 한 번 하면 왕의 사유재산이건 국고건 전부 파탄날 것이기 때문에.
‘왜 열강이 침 줄줄 흘리며 달려들었는지 알 것 같다. 진짜 놓치기는 아까운 고기네.’
청나라를 거덜 낸 것이나 다름없는 시준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처럼 부당한 의심은 두 가지 점에서 반박된다.
우선 청나라는 고작 그 정도에 거덜 날 만큼 작지 않다. 대국은 달리 대국이 아닌 것이다. 영국이 자신만만하게 내민 배상금 1억 5천만 냥을 청국에서 울며불며 반으로 깎은 것은 가경제의 쪼잔함이 두려워서이지 청에 그 정도 돈이 없어서는 아니다.
가경제가 권신 화신을 처형하고 몰수한 돈만 9억 냥이다. 당연히 이것은 가경제의 추가 수입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재산은 훨씬 많다.
가경제가 쪼잔해서 이번 전비(戰費)에 예민하게 반응했을 뿐 가경제의 대금고는 건재하다. 그런 돈쯤 내어준다 해도 살림에 지장이 오지는 않는다. 물론 가경제가 ‘나랏일’에 자기 돈을 쓸 리는 없고, 청의 백성은 갑자기 2년 예산을 쥐어짜야 하는 정부에게 시달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 시준이 엄연히 천조를 위해 대공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암허스트와 삿대질하면서 싸우는 시늉까지 해 가며 ‘무기 수입 금지를 관철시키고 산동 반도의 탈취를 저지했다.’
암허스트 남작도 영국 귀족이라 희곡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는데, 시준조차도 문득문득 저 자식이 지금 진짜 해보자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 두 가지는 대국의 체면을 극히 올려 세운 크나큰 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쟁의 원인을 밝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오랑캐를 따끔히 훈도하였고, 감히 땅을 요구하는 야만족에게 도리를 설유해서 장사의 허락과 세폐 정도로 막았으니 말이다.
지친왕은 시준이 양해해 줄 거라 믿고 이 두 가지를 자기 공으로 크게 포장하여 보고했다. 가경제 역시 속아 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친왕을 야단치고 해임했다가는 조약도 엎어질 것이요, 그러면 진짜 자기 돈 더 써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것만은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영길리국이 사교도 무기 지원의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황제는 너그럽게 항구를 추가로 열어 주었으며 해적 토벌에 애쓰는 영길리국 수군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 은전은 백성들이 나라 위하는 마음으로 약간만 고생해 주면 마련할 수 있다. 가경제는 이미 돈을 많이 썼으니까 말이다. 고통 분담이라는 말을 가경제가 알았으면 잘 활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친왕과 신하들이 만들어 준 정교한 이야기를 가경제가 화난다고 망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대규모 출혈이 불가피하다.
결국 가경제 역시 지친왕을 크게 상찬하고 여러 가지 작위와 보물을 더하며, 그를 사실상의 후계자인 것처럼 주위에 인식시켰다.
그리고 지친왕은 그 일을 혼자 다 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시준에게 입막음 겸 보답을 잊지 않았다.
지금 시준이 받고 있는 대접은 물론이고, 만군(滿軍) 상삼기(上三旗) 출신의 최고 귀족 영애와 중매를 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으나 시준은 이미 장가를 들었다는 말로 거절했다.
지친왕 입장에서도 그냥 해 본 소리라서 다행히 떼써 가며 붙잡지는 않았다. 아무리 시준의 직책이 진짜로 평서대원수라도 상삼기에 비길 수는 없다. 조선의 격이 낮아서가 아니고, 신분의 고귀함은 직위라기보다는 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어쨌든 그렇게 쌓아 놓은 친밀감은 큰 도움이 된다. 시준은 앞으로 기랑의 사업을 포함한 여러 장사를 구상 중이었다.
‘영국 놈들은 조선이 소규모로 무역에 끼어드는 것 정도야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중국인들은 좀 다르게 생각할걸.’
영국인도 장사에 환장하였긴 하나 그들은 중국에서 너무 악감정을 많이 쌓았다. 그 사이를 조선은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악독한 영길리에 시달리는 동양의 동포끼리 돕고 삽시다.’
아주 간단하다.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무역 조약을 지키겠지만 세상은 관부의 통제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시장 상인과 고용 선원, 지역 유지 등이 잔인한 영길리 오랑캐 대신 조선을 선호한다면 훨씬 더 쉽게 장사할 수 있다. 선택지가 영국밖에 없는 것과 조선도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다.
시준은 누운 채 발을 까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암허스트는 중국이 영국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영국이 중국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비웃고 있다.
그들은 둘 다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속았다. 여기에서 완전한 의미로 속지 않은 것은 오로지 시준 하나뿐이었다.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 속에서 시준은 앞으로의 일을 하나둘 헤아렸다.
영국의 행패만 제외하면, 모두 완전한 해결책은 없어도 대강 틀어막을 정도의 비전은 그려지는 것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준은 어느 정도 자신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 돌아가서 또 마주할, 평온하고 바쁜 일상을 그리워하면서 잠들었다.
***
출장은 불편하고 촉박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의 업무를 잠시 잊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근로 시간 기준에 대한 법률을 회피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휴대폰이란 물건이 다행히도 없으니 더욱 그렇다.
시준은 그것을 돌아와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귀환 후 진행할 여러 가지 일을 예상해 두었으나, 주석의 도착 소식을 미리 전달받은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나와 있는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영국 해군의 선도함을 통해 미리 소식이 갔을 테니 사람들이 시준의 일정을 아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군데군데 깃대에 큰 천을 묶어 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준은 물론 이번 출장에서 자신이 수고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환영 인파가 있을 만한 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선두에 있는 사람은 바로 선전선동국장 조제프 푸셰였다. 시준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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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교초가 위조 때문에 망한 건 아닙니다. 원이 망해서 교초도 망했을 뿐...(하지만 위조범은 상당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여말선초의 몽골 제국과 고려의 도미노식 붕괴에 의한 국제 신용망 파탄이 그 이후 해금령 및 동아시아 무역/상업 경색의 원인이라는 말도 있지요.
2. 쥐알봉수란 얕고 간사한 꾀를 부리는 작자를 멸시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3. 봉이 김선달 얘기는 19세기쯤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특하게도 평안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고,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던 서북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는 1906년 '황성신문' 연재 소설본입니다.
4. 상삼기는 만주팔기 중 양황기(황제의 호구를 등록하는 곳), 정황기, 정백기의 3기를 말합니다. 나머지 5기는 하오기라고 불렸습니다. 이 상삼기는 황후를 배출할 수 있는 사회 집단이라(니루-잘란-어전의 사회체계를 가문이라 하기엔 좀 미묘) 지친왕은 시준에게 사실상 인사치레 정도의 제안을 한 셈이죠.
혹시 이때 황실의 공주는 있었느냐? 물으신다면 대부분 나이가 전혀 안 맞거나/시집을 갔거나/요절해서 작중에서는 나올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가경제의 딸들 중 영유아 시기, 혹은 젊을 때 죽은 사람이 꽤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