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39. 트로이의 목마(4)
이 자리에서 그나마 시준에게 가장 호의적인 사람은 윌리엄 자딘이다. 그는 혹시 시준이 지금 영국 해군을 오염시키고 있는 포르노 소설의 저자라는 사실이 들켰나 하여 머뭇대며 말했다.
“수상하다니요? 혁명정부는 영국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해군의 기술적 사항은 물론, 인도나 자바에서 실어 오는 식량에 안보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암허스트는 도덕의 혼탁 때문에 시준을 의심한 건 아니었다.
“아니, 내가 말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준이라는 인간 그 자체일세. 아시아의 야만 열등종족, 거기에 신분도 귀족이 아니지. 무엇보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에 너무 뛰어나.”
암허스트는 와인 잔으로 책상을 탕 쳤다.
“박사의 말이 맞아. 혁명정부의 힘? 사실 보잘것없어. 그리고 그게 바로 기가 막힌 점이야.”
“예?”
“북부는 조선에서도 인구가 적고 재정이 빈약한 곳이지. 뭐, 그래서 내가 그쪽의 손을 들어 준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의장 정시준은 그 애처로운 기반 위에서, 몇 가지 기만책만으로도 혁명정부를 조선의 유일한 대표로 만들었네. 게다가 청은 물론이고 우리까지 별수 없이 그들에게 협조하도록 강제했지 않나. 군함 한 척 없이 말일세!”
자딘과 메이틀랜드 소장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장사 파트너로서 시준을 보고 있는 자딘이나, 혁명정부가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기에 의식적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메이틀랜드와는 달리 암허스트는 정치가의 관점에서 시준을 보고 있었다.
“국가를 정복하는 위업 자체는 대단한 게 아냐. 소장에게는 미안한 말이네만, 우리만큼의 대해군을 거느리고 있다면야 범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아시아 촌구석의 야만국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시준은 모든 요소가 열위에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해 거의 건국에 가까운 사업을 이뤄냈어. 나는 런던의 사교계나 의회에서도 이렇게 머리 잘 쓰는 자를 본 적이 없네.”
격렬한 인종차별주의자 암허스트 남작으로서는 자신이 조선인의 계략에 포함됐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암허스트는 그가 공언한 대로 시준 하나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윌리엄 자딘은 그게 호의라고 착각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국 귀족, 그중에서도 저 캐나다의 학살자 제프리 암허스트의 조카가 베푸는 인정이다. 다시 말해 시준은 상당히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과연 암허스트는 낮게 말했다.
“그자를 조사해 봐야 해. 자딘 박사. 자네는 그가 어릴 때 봤다고 했지. 어떻던가?”
윌리엄 자딘은 옛날 장자도에서 시준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수병의 총을 쏘아 맞혔던 뛰어난 저격수가 있었지. 살아 있다면 지금은 혁명군 소속이려나?’
어쨌든 암허스트의 질문이 시준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그건 말 그대로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자딘은 대강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글쎄요. 그때는 그도 지역 토호 상인 집단에 속한 직원 정도였죠. 눈에 띄는 재능이 있기는 하였지만 별다르게 이상한 점은 못 느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고아 출신으로서 거두어졌던 것이라 하더군요.”
둘 다 시준이 너무 어린 나이에 생업을 시작했다는 점은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그때의 시준보다도 훨씬 어린 아이들이 기계에 들어가서 부품을 고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암허스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유럽에 갔거나, 유럽인과 접촉한 적은 없나?”
“제가 알기로는 동인도 회사와의 접촉이 최초입니다. 다만 그때부터 영어를 할 줄 알았으니, 말은 아마 그 전에 북경 교구의 프랑스 신부에게 배웠을 가능성도 있죠. 그치들은 예전부터 조선에 밀입국을 했지 않습니까. 마침 평안도는 중국과도 가까운 지역이었고.”
암허스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야.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자네라면 조선말과 중국어를 그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서 수학하지도 않고 1, 2년 만에 유창히 구사할 수 있겠나? 게다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개략적인 정치적 형세까지 미리 알고서?”
1, 2년 안에 외국어를 익숙히 하는 일은, 확실히 좀 어렵긴 하겠지만 머리가 좋을 경우 불가능한 범주도 아니다. 자딘은 암허스트의 과도한 의심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암허스트는 자기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시준의 여러 언행은, 귀족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조선인이나 중국인과는 달랐어. 그건 적어도 기초적 인격을 구성하는 단계에서 유럽인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의 것이야. 다른 야만족들과는 뭔가 달라……. 내 개인적으로 상당한 사례를 하겠네. 그에 대해 처음부터 조사해 주게.”
자딘은 감탄했다. 암허스트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한 게 아니라, 실로 뿌리부터 개자식이나 할 수 있을 저 싸가지 없는 발상에 감탄한 것이다.
인종차별이 악덕으로 취급되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권장할 만한 고결한 도덕인 것도 아니다. 역시 가문이 중요하긴 중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딘의 입장에서는 아직 암허스트가 시준보다 더 비중 있는 고객이다. 자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왜 그것을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그가 유럽의 다른 세력, 그러니까 이를테면 프랑스와 관련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좀 과도한 상상일지 모르지만 보나파르트가 조선인 한 명을 괴뢰 정부의 첩자로 교육시켜 보낸 것일 수도 있잖나. 실제로도 조제프 푸셰가 붙어 있고. 이제 보나파르트의 신하는 아니라고 공언한다지만 프랑스 놈은 믿을 수 없지.”
자딘은 마지막 말에만 동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시준이 정말 프랑스 제국과 깊은 연관이 있거나, 그게 아니라도 영국을 적대할 경우에는……?”
암허스트는 그 특유의 투명하고 미친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천진을 공격하기 전의 바로 그 상쾌한 미소였다.
“시준에게 맞춰 주는 것이 이득이라 그렇게 행동하기는 했으나, 애초에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대등한 관계는 아니지. 우리 문명인을 상대로도 트로이의 목마를 들여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면 대단한 착각. 만약 그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그때부터는 어떤 대화도 없다. 목마 따위 보자마자 부숴서 불태워 주겠네.”
암허스트의 눈 안쪽에서 정신 질환의 증거 같은 푸른빛이 번득이는 것 같았다.
“시준은 잘 선택해야 할 거야. 소중한 친구와 가족들을 전부 지옥에 밀어 넣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이 대화를 자네가 시준에게 어차피 전할 테니 말해두는데, 이 마지막 말만큼은 꼭 전해지길 바라네. 톈진을 기억한다면 우정을 소중히 여기라고.”
자딘은 메이틀랜드 소장의 눈치를 보며 얼어붙었다. 암허스트는, 자딘이 지금까지 필요에 따라 영국의 정보를 시준에게 조금씩 흘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긴 지금 펼쳐진 복잡한 그물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요소가 몇 개 있다. 암허스트 남작 정도 되는 자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암허스트 남작의 마지막 대사에는 중의적 의미가 있었다.
톈진을 기억하라는 말은 이 톈진과 같은 꼴을 평양이 당하지 않게 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암허스트가 시준의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할 ‘톈진 조약’에서 영국이 수행한 역할을 기억하고 동맹을 유지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허스트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는 일어나 외투를 챙기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시준은 우리의 친구라고 할 수 있지. 따라서 나도 우정으로 맺은 약속을 지키겠네. 그가 부탁한 것을 포함하여, 중국 황제에게 여러 가지 얻어내야 할 게 많군. 슬슬 나가보도록 하세.”
***
1812년, 두 개의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과 청이 정면충돌한 이 전쟁은 영국인들에게 통칭 ‘조선 전쟁(Joseonian War)’으로 불렸다.
조선은 전쟁 당사국은커녕 배경지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괴한 명명이다.
원래 역사의 아편 전쟁과는 영국이 나쁜 놈이라는 점만 같을 뿐 – 19세기의 전쟁 거의 모두의 공통점이라 별로 주목할 점은 못 된다 – 원인, 과정, 그리고 결과는 많이 달랐다.
따라서 이번의 ‘톈진 조약’ 역시 원 역사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준의 활약 덕에, 청과 영국 모두 자신이 정보 격차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쪽 모두 협상에 대한 열의는 있었다.
암허스트 남작은 부드럽게 말했다.
“요구 사항은 전달했지만,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전권 대리인이 나와 주셔야 하오.”
“지친왕 전하께서 친히 납셔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시준이 그 말을 전하자 총관 상영귀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랑캐들의 오만무례함이 한도 끝도 없었다.
“문서에 우리 지친왕 전하의 증표가 있지 않소? 황극(皇極)에 관계된 지체는 오로지 금(禁) 한 글자를 엄수할 뿐이라. 어찌 야만족 앞에 사사로이 드러내 위험과 모욕을 자초할 수 있겠는가!”
상영귀의 그 추상같은 기세는, 이 말세에 다 꺼져가는 상하의 법도를 엄히 밝히는 유일한 등불 그 자체였다.
감동한 시준은 그 준엄한 꾸짖음을 침착하게 영어로 통역했다.
“웃기지 말라는데요? 말본새가 뻔뻔하니 좀 패야 대화가 통할 것 같습니다.”
지친왕이 시준에게 보내는 신뢰도 있거니와 여기에는 영어 실력으로 봤을 때 시준의 발끝에 미칠 사람조차 없다. 그래서 시준은 창작 수준의 번역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쨌든 총관 상영귀의 의도 자체는 잘 전달되었으니 날조라는 음해는 억울하다. 결국 번역은 뜻을 전하는 것이니까.
암허스트는 웃지 않았다. 그 역시 시준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허스트는 호위로 따라온 메이틀랜드 소장을 불러 몇 마디 했다. 그러고는 상영귀의 재촉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찻잔을 들었다.
그 차가 바닥을 드러내고 남은 약간의 찻물도 식었을 때쯤, 갑자기 벼락이 쳤다. 임시 협상장 용도로 건설한 이 가건물 전체가 흔들린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무, 무슨 일인가?”
영국인들은 당황한 중국인들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암허스트 남작은 고의가 명백한 동작으로 놀라는 척을 하더니 일어나서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자연스럽게 그쪽을 돌아본 상영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천진 시내를 보게 되었다.
영국인과 연기가 동시에 상영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모든 것이 대번에 이해되었다.
“대포! 이, 이런 무도한 놈들을 보았나!”
이제 막 사람이 주춤주춤 돌아오기 시작한 천진의 민가에서 먼지가 솟구치고 있었다. 진짜 말 그대로 아무 데나 겨누고 쏜 듯했다. 상영귀는 선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암허스트 남작은 다시 돌아서서 팔을 벌렸다.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냥 대표자가 나오면 다 끝나는 일이지. 이런 헛된 자존심을 세워서 당신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소? 그 역겨운 돼지꼬리(pig tail, 변발을 말한다)의 길이를 서로 강조하며 겨루고 싶다면, 페킹의 돼지우리에서 너희들끼리 실컷 해. 난 관심이 없단 말이야.”
시준은 반사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가 이걸 통역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동안 암허스트는 다시 그 푸른 눈길을 칼날처럼 상영귀에게 꽂으며 이를 드러냈다.
“다른 돼지보다 좀 더 살쪘을 뿐인 돼지가 인간 앞에서 거드럭대는 꼴을 내가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당장 황제의 아들이 나오는 편이 좋아. 명심해. 너희 냄새나는 야만족과 대화하는 치욕을 감내하는 건 내 쪽이야. 그런데도 이러쿵저러쿵 계속 시간 끌면, 여기서 한 놈씩 창자를 끄집어내 스코틀랜드 푸딩으로 만들고 페킹으로 달려가 그걸 황제의 주둥이에 처넣겠다. 아, 의장. 표현은 맡길 테니 적절히 통역해 주시오.”
시준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암허스트 남작이 미리 알려줘서는 아니고, 원래 영국인은 이런 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영국 쪽일 테니 저렇게 나오는 거겠지. 청 대표단이 조금 더 냉정했으면 파악할 수 있는 허세겠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지혜의 왕이 없어서 그런지, 청 조신들에게서는 공포만이 느껴졌다. 시준은 상영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암허스트의 말을 전했다.
“송구하지만 지친왕 전하께서 행차하시지 않으면 이들은 계속해서 쏠 것 같습니다.”
“으으음……! 이, 이 굴욕은 반드시……! 저놈들을 기필코 천 갈래로 찢어 주리라!”
“그 말씀도 전할까요?”
“아, 아니, 그만두게! 지친왕 전하를 모셔 오지!”
곧 헐레벌떡 나오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은 지친왕의 느릿한 행차가 도착하자 드디어 제대로 된 협상이 재개되었다.
‘뭐, 좀 화끈한 아이스 브레이킹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덕분에 어색한 게 좀 풀렸잖아.’
협상 당사자도 아닌 시준으로서는 청나라 사람들의 공포 따윈 말 그대로 남의 일이었다. 시준은 자연스럽게 ‘일’을 시작했다.
시준은 지친왕을 매우 황송하다는 듯 맞아들였다.
“옛말에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主辱臣死, 『국어(國語)』]고 하였는데, 저 악독한 영길리인들의 행태를 미리 막지 못하고 양추와 친히 마주하시는 환란을 겪게 하여 드린 점은 신이 만 번 죽는다 하여도 마땅합니다.”
시준은 실로 통탄스럽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만고의 충신이 따로 없었다.
시준은 더없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대왕께서 굳이 저들과 말씀까지 나누셔서는 아니 됩니다. 이미 왕의 존안을 뵈었으니, 저들도 더 이상 시비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으음! 비록 곤궁한 처지에도 마지막까지 윗사람의 체면을 손상되지 않게 하려는 뜻이 장하다. 총관과 이하 신료들은 조선국 평서대원수를 힘써 도우라!”
암허스트 역시 진짜 지친왕이 참석했다는 것을 듣자 거기엔 더 흥미 없다는 듯 다른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지친왕은 시준의 ‘수완’을 더 믿게 되었다.
결의에 찬 청 대표단은 열심히 업무에 착수했다. 그리고 시준도 마찬가지였다.
시준은 청의 약점과 문서를 슬쩍 암허스트에게 불어 버린다거나, 영국인들의 속셈을 중간중간 알려주는 척하면서 청 협상단을 혼란에 빠뜨리는 식으로 충실하게 일했다.
유일한 조언자가 이렇게 배반하는 데에야 아무리 지혜의 왕 면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청나라 사신단은 넘어가야 할 부분에 매달리고 잘 봐야 할 부분을 간과하면서 영국과 시준의 의도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결국 사흘 뒤 ‘톈진 조약’이라 불리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이 잠정적으로 붙인 이름으로써, 청 국내에서는 사건 자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부르며 존재조차 부정 중이었다.
양국의 사서나 신문에 발표될 ‘대표적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1. 대브리튼 연합왕국(이하 영국) 국왕과 대청국(이하 청국) 황제는 모든 종류의 의전에서 대등하며, 양국은 모든 문서에서 동등한 표현을 사용한다. 특히, 공문서에 야만인[夷]이라는 표현을 금하도록 한다.
2. 청국은 영국 런던에, 영국은 ‘대청국 황제와 정부가 있는 수도(베이징이라고 지정하면 황제가 열하에 머무르며 사실상 분조를 두어 베이징을 빈껍데기로 만들 거라는 시준의 조언이 주효했다)’ 에 각각 전권공사를 주재시킨다.
3. 청국은 영국에게 광저우, 마카오, 난징, 상하이, 톈진, 단수이[淡水, 현대의 타이베이]의 6개 도시를 개항하고 각 개항장의 영사 주재를 포함하여 상인의 무역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공행은 폐지한다.
4. 영국 해군은 청국 관헌 및 관군과 협력하여 해적 토벌 등 원활한 통상에 필요한 치안을 집행한다. 영국 해군은 이에 필요할 경우 청국 개항장에서 자발적 사용인을 고용할 수 있으며, 청국은 영국 해군의 항구 이용에 관해 모든 국면에서 적극 협조한다.
5. 항구의 무단 폐쇄와 영국군 장교 살해, 그에 따른 전쟁 등에 대한 배상으로서 청국은 영국에게 은 8천만 냥의 배상금을 3년 안에 지불한다.
6. 영국과 영국 동인도 회사는 추후 대청국의 신민 모두에게 어떠한 종류의 무기도 판매 혹은 공여하지 않으며, 모든 방법의 무기 밀매를 성실하게 차단하고 감시한다.
7. 청국은 조선 왕국의 외교‧군사‧행정‧사법 등을 포함한 전 영역에서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며, 그 내정에 어떤 방법으로도 간섭할 수 없다.
8. 이상의 사항이 지켜지는 한, 양국은 영속적인 우호를 돈독히 하며 양국의 평화적 교류를 지속하고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포로는 즉시 교환한다.
혁명막부 외사통호국장 정약용이 씁쓸하게 웃으며 ‘망국팔조(亡國八條)’라고 칭한 이 조약에는, 사실 조선 독립을 제외하면 시준이 관여한 부분이 별로 없었다.
조선은 전쟁 당사국이 아니어서 조약에 조선을 주체로 하는 조문이 삽입될 수가 없다.
솔직히 7조는 양국 각자의 시커먼 속셈이 맞지 않았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조항. 지친왕의 제안을 암허스트 남작이 잘 맞장구쳤기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이 ‘주어만 아니면’ 되잖소? 이 경우는 일종의 목적물이지.”
그 당시 청국 조신들은 영국이 처음 부른 배상액 은 1억 5천만 냥을 어떻게든 반 가까이로 깎아 놓느라 녹초가 된 상태였다.
어차피 시준이 미리 면녕에게 귀띔한 일이기도 해서 이 건은 쉽게 동의되었다.
그렇다 보니 기랑은 돌아온 자기 스승과 친구가 왜 이리 지쳐서 뻗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 돈 벌 일 많이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런 말은 없는 것 같은데.”
시준은 그냥 자게 내버려 두라고 하려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돌아가서 정치국과 중앙인민회의에 출석하여 설명해야 할 일. 지금 기랑을 상대로 연습해 보는 것도 좋았다.
이런 일에는 빠지라면 서러워할 정약용도 피곤한 나머지 기랑을 모른 척하고 이미 잠들었다. 시준은 건조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말했다.
“거기에는 없지. 좋아. 간단히 얘기할 테니 잘 들어.”
물론 기랑의 걱정은 과한 것이다. 시준이 돈 안 되는 일에 이렇게 열심히 뛸 리가 없다.
그에게 무임 노동을 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저 강철군주 이공 하나뿐이었다. 기랑은 시준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말을 들었다.
========================
작가의 말
1. 피그 테일은 실제로 청인들의 변발을 서구에서 부르던 멸칭입니다. 포니 테일과 완전히 같은 방식의 작명법입니다만 어감은 상당히 다르죠.
2. 스코틀랜드 푸딩은 그 동네 전통 요리인 블랙 푸딩을 말한 것으로서... 순대라고 보시면 작중 대사를 이해하는 데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