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39. 트로이의 목마(3)
지친왕이 놀라서 물었다.
“조선을 영길리에게 하사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의 말대로 상당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준의 말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 청의 영토가 아니다. 유럽인의 이분법적 개념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으나, 그것이 이곳의 세계 질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조선국 평서대원수 정시준이었다. 지친왕의 생각에, 설마 조선 사람이 자비로운 대청의 보호 대신 저 악독한 영길리인의 폭압에 시달리고 싶어서 저 미친 소리를 하진 않을 터였다.
물론 시준도 영국으로 주군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인민을 생각한다면 맹세컨대 중국의 왕조를 주군으로 섬기는 편이 천 배는 낫다. 총 든 근육질 깡패보다는 몽둥이 든 늙은 깡패가 좀 만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준은 그 말의 진의를 설명해 주었다. 시준은 유럽인이 가진 식민지 개념을 간략하게 거론한 뒤 말했다.
“……이런 까닭에 저들은 그 말을 의심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지금 평양은 영길리인이 점거하고 있으므로 거기를 산동 대신 내어주겠다고 하십시오. 저들은 아마 천진에 오문이나 황포처럼 상관 열 땅을 달라 할 것인바, 천진과 평양이 지척이므로 영길리인 입장에선 천진, 강남, 평양을 세 솥발과 같이 한 것이 되어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시준이 준비한 시나리오는, 참신하다고 해 줄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는 과거 가경제가 마카오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조선령 장자도의 개항을 허락했던 때와 개념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그 규모가 산동 대 평양으로 커졌을 뿐이다.
하지만 진부한 것이 항상 그렇듯이 이번에도 효과적이었다. 이를 지금 시대의 말로 하자면 ‘선현의 자취를 본받는다’라고 한다.
들어보니 영국 입장에서는 확실히 좋은 일이다. 청 입장에서도 산동 반도를 통째로 빼앗기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
지친왕 개인으로서도 가경제가 한 정책을 그대로 수행한다면 아버지의 위광도 높여 주고, 위광 높아진 아버지는 자신을 총애할 것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중국 뒤처리 해주러 국가 제2의 대도시를 뺏겨야 하는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말도 안 되는 조건 때문에, 지친왕은 시준이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천진의 개항을 전제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황급히 물었다.
“그, 그러나 그건 대국이 번방을 보살피는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대대로 조선이 큰 나라 섬기기를 공손히 하여 왔는데, 그 양민을 이제 오랑캐의 참화 앞에 내어준다면 조선 땅의 선비들은 반드시 천조가 제후를 저버렸다며 욕할 것이다.”
과연 지혜의 왕답게 최후의 양심, 혹은 최후의 면피용 잔머리 정도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시준은 지친왕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설사 진짜로 청이 조선을 내어준다 한들 조선의 선비들은 천조가 제후를 저버렸다고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진족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어 ‘여진족’ 했다고 욕하긴 할 테지만.
어쨌든 시준은 그 고민도 풀어 주었다.
“실로 대왕의 헤아림은 하늘의 덕을 그대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을 하사한다는 말은 공표하거나 소위 조약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영길리 사람들에게 짐짓 표정과 말투로 그럴 것 같은 안색만 보이는 것입니다.”
막후 협상을 하라는 의미.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본 청 조정은 서양과의 조약 자체는 실무 경험이 있다. 지금처럼 대판 깨지고 조약을 맺어 본 게 처음일 뿐이다.
그래서 시준은 그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게끔 하여 주었다. 조금씩 어울리며 끌어당겨 주는 시준의 말재주에 청의 고관대작들도 조금씩 딸려 들어갔다.
지친왕과 조신들은, 21세기에 화폐를 좀 복사해 보려다 유서 깊은 차원이동 통로에서 수온을 시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게 되기 직전 느껴 본 감정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자기들이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시준의 말을 정신없이 경청했다.
“다만 교활한 영길리 사람들은 반드시 조약에 평양에 대한 말을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터입니다. 그것만은 결코 들어주지 마시되, 정 어려우면 돌려서 쓸 말이 있습니다.”
‘정 어려우면’이라는 말은 모든 직장에서 ‘여기까지는 대충 해도 괜찮아’쯤으로 번역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인수인계나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외의 번거롭지만 옳은 방법 따위 전부 폐기하게 마련이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지친왕은 귀가 솔깃했다.
“그게 무엇인가?”
좀 넘어온 것 같자 시준은 진짜 용건을 꺼냈다.
“조선국을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으로 인정한다는 자구입니다.”
애석하게도 지혜의 왕 지친왕을 비롯한 조신들이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리 시준이 분위기를 몰았어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라는 소리에는 모두가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상영귀가 노하여 외쳤다.
“이제 보니 모든 것이 조선의 수작이로구나! 너희들이 백구지국(伯舅之國, 제1번국)의 영광된 지위를 저버리고 천조에 등을 돌리겠다는 것이냐!”
각오했던 일이지만 시준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여차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청나라 대신을 한 명 끌어안고 인질로 삼아 탈출하기 위해 문을 잘 봐 두었다.
나가기만 하면 지척에 암허스트의 영국 해군이 있다. 시준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요구한 내용대로,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 파탄나고 시준의 신변이 위협받을 경우 로드 암허스트는 지친왕을 포함한 청나라 사신단을 ‘애초에 오지 않은’ 것으로 처리할 예정이었다.
이건 현실이기 때문에 그러한 안전 대책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준은 그런 대책이 있다는 사실로써 자신을 위로한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단지 영길리국에 그렇게 써서 주면 되는 일입니다. 병법이란 속이는 데에서 길을 찾고, 오랑캐를 상대로 하는 모략은 덕의 상실이 아니지요. 조선은 결코 그럴 뜻이 없습니다. 양추들에게 방편으로 써 준 종이의 글자가 어찌 감히 군신의 의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과 자기 사이에 군신의 의리가 있었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준은 그사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조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동, 서, 남이 모두 바다인 조선에서 중국을 버린다면 누구와 통하며 무엇으로 물산을 바꾸고 어디에서 모화(慕華)를 족히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이 옳다. 가난하고 궁벽한 조선에서 새삼 소위 독립이 무에 탐날 바 있겠느냐? 부유한 이웃과 손을 끊으면 굶기밖에 더 하겠느냐. 조선국 평서대원수의 말을 더 들으라.”
지혜의 왕은 흥분한 신하들을 지혜롭게 진정시켰다. 시준은 호구에게 보내는 감사의 예의를 취하고 계속 말했다.
“아시다시피 영길리인은 이미 평안도를 점거하고 그 노략이 직례에 비견할 바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의 청국의 땅이라 여겨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거짓으로나마 중국과 조선이 갈라선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저들은 굳이 조선 사람과 원수지려 하지 않을 터이니 이로써 조선도 임시로 이득을 봅니다.
영길리인은 감쪽같이 속아, 조선은 저들이 천천히 요리할 수 있다 여기고 본국에서 병사를 더 불러올 때까지 조선에 웅크려 있기 원할 터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자주독립 허여(許與)는 곧 자기들이 평양을 차지하게 해 준다는 말과 같다고 영길리인을 속이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평양을 내린다는 말 대신 조선을 홀로 서도록[獨立] 허락하신다는 말로 바꾼다면 천자께서 번국을 저버리기는커녕 관대하게 도량을 베푸시는 것이 됩니다. 조선의 글줄 아는 선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나라 인사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럴듯했다. 평양을 청이 영길리에 하사한다면 조선인들은 격렬히 반발하겠지만, 조선을 거짓말이나마 독립시켜 준다면 조선 내부의 쑥덕공론도 깔끔히 막을 수 있다.
만주족 역시 귀가 있다. 조선인이 자기들을 오랑캐 왕조라 깔보고 정축년의 굴욕에 이 갈고 있다는 사실쯤은 잘 안다.
형식적이나마 더 이상 여진족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는 선전은 조선 신민들에게 먹힐 것이다. 진실은 양국의 지배층만이 알 것이고 말이다.
시준이 지나가듯 말한 ‘영길리가 본국에서 더 불러올 병사’ 때문에, 자기들이 지금 배짱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상영귀가 황망히 다시 물었다.
“그, 그러면 조선은 영길리군에 맞서 평안도, 나아가 나라를 어찌 지킬 셈인가?”
“힘이 없으니 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도 대국을 위한 번국의 충정이니, 어찌 고단하다 하여 도리를 저버리겠습니까? 되도록 영길리인의 비위를 맞추며 힘써 견디다가 의병을 모아 토벌하는 수밖에요.”
청의 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병이라면 조선의 유서 깊은 필살기이니 의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시준의 말은 뼈 있는 함의를 담고 있다.
원래 중국의 책이니만큼, 시준이 과거 평안도에서 절찬리 팔았던 『변이채』 정도는 여기의 조신들도 다들 (몰래) 읽었다.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는 힘없고 비겁한 아버지를 위해 남색가에게 몸을 바치는 아들의 역할을 조선은 자처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조선이 대책 없이 착해서는 아니다. 시준의 말처럼 조선이 청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조선도 분명히 피를 덜 흘리는 방향의 이득을 본다.
여태까지 청의 군신에게 이토록 진지한 동의를 받은 조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홍 타이지마저 감동시킨 인조의 능란한 허리놀림 정도 되어야 지금 시준의 혀놀림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친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걸어 내려오더니 시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비록 악독한 영길리의 핍박에 잠시 곤고해졌다 하나, 조선의 충정은 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대충 이럴 때를 대비해 감정 연기를 준비해 왔던 시준도 지유가 화살 맞았을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황제 폐하 만세!”
그리고 지친왕을 비롯한 조신들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당당히 협상에 임할 준비를 시작했다. 조선과 청의 끈끈한 우정을 기반으로 한 계책이 이미 펼쳐졌으니, 영길리인 따위는 이미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천진에 있던 로드 암허스트는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대표 윌리엄 자딘과 와인 잔을 부딪치고 씩 웃었다.
“청 황제는 우리에게 조선이 마치 자기 영토인 것처럼 허세를 부릴 테지. 우리 역시 거기 어울려 주며 적당히…… 별로 탐나지도 않는 산둥에 대해 고집을 부리다가 청이 내어주는 평양 – 이건 비공식이겠지만 – 과 조선 독립 선언을 얻어 오면 돼.”
암허스트는 와인을 들이켰다. 그는 몰랐지만 얄궂게도 지금 먹는 와인은 동인도 회사가 처음 조선에 가져왔던 것과 같은 아몬틸라도였다.
암허스트는 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정말 평양을 우리 땅으로 할 수는 없으므로, 중국에 ‘양보하는’ 대가로 전쟁 배상금은 또 두둑이 뜯어내야 하지. 그 문제에서 자네의 수완을 기대하네.”
윌리엄 자딘이 대답했다.
“페킹에는 그간 무기 거래 관련해서 저와 안면을 튼 부패 관리들이 있습니다. 움직여 보죠. 그나저나 그렇게 된다면…… 청은 기존의 개항장에 더해 톈진, 그리고 배상금까지 물면서도 자기들이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겠군요.”
“바로 그거지! 그치들은 자기들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할걸? 자기 땅도 아닌 곳을 허세로 넘겨 영국인을 속이고, 결과적으로는 항구 더 열고 돈 좀 내어준 것 외에 손해는 없으니 말이야.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될 걱정도 안 하겠지. 그들이 ‘공식적’으로 해 준 것은 조선의 독립국 선언밖에 없으니까.”
두 영국인은 시준과 미리 합의한 대청 사기 작전을 맛있게 음미하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모략과 기만은 영국 신사의 음습한 자아에 너무나 들어맞는 것이었다.
“우리가 조선과 피 터지게 싸우고 난처하게 돌아와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그림을 은근히 바라고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평양을 점령하지 않을뿐더러 조선과 싸우지도 않아! 하하하!”
“우리에게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니 중국과는 상관이 없다’고 통쾌하게 말해 줄 상황을 기대하고 있겠죠? 사실 그 말은 우리가 곧 중국에 해 줄 텐데도 말입니다.”
암허스트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낄낄댔다.
“자네 말이 맞아. 그 순간을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네. 열등종의 우둔한 지혜를 놀려먹는 일이란 유쾌하기 그지없군! 마음껏 기뻐하라고 해. ‘조선과 중국의 동아시아적 특수 관계를 모르는 멍청한 유럽인’들이 있지도 않은 거래 목적물에 속아 퇴각했다고 비웃으며 축제를 벌이라고.”
암허스트는 거의 와인을 토해낼 것처럼 몸을 흔들며 웃었다. 그는 간신히 진정한 뒤 서쪽을 돌아보고 조소를 보냈다.
“어차피 그들은 조선에 사실상 통치력을 행사하는 게 없었으니. 자주독립 선언은 손해볼 것 없는 거짓 채권에 불과하다고 여기겠지. 그나마 혁명정부 의장(시준)이 그건 사실 유럽인을 거짓으로 속여 넘기기 위한 모략에 불과하다고 잘 말해 주고 있을 거고.”
“그리고 조선은, 정확히는 혁명정부는 그것을 이용해 친영국 정권을 재창출하겠지요. 중국이 조선에게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단 하나의 영향력, 그러니까 차기 정권의 승인이라는 짐을 벗어던진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 위태한 곡예는 지금밖에 할 수가 없다.
평소라면 국왕 이품과 김조순은 무슨 수를 쓰든 중국과 연락을 취해 자기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조선의 내전이 있다. 현재 김회연은 북한산성에서 김조순의 군세 대부분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이제 대놓고 근왕군을 모병하는 실정이다. 한 판 붙어볼 만하다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김조순의 상대는 김회연뿐만이 아니다. 도망간 함경도 토병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정치국이 자제를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날뛰고 있는 남조선혁명당의 민란도 막아야 한다. 모든 도전자를 상대해야 하는 챔피언의 비애라고 해주면 위로가 될지 모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혁명막부만이 내전의 난리 통에서 제외되었기에 그들은 나머지를 치워 놓고 영국 및 청과 조선의 대표로서 거래할 수 있었다.
또한, 새 조선왕은 조선을 안정시킨다 하더라도 중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윤리를 위반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중국은 그 새로운 왕을 승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약이 체결되는 즉시 조선은 자주독립국이 될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약간 더 직접적이었다.
로드 암허스트는 존 메이틀랜드 소장이 들어와서 경례하자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말씀하신 대로 조선에서 배를 보냈습니다. 낌새를 눈치 챈 것 같은데요.”
정찰총국은 시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전문성은 푸셰의 작품에 비해 떨어질지 몰라도, 조선은 훨씬 유서 깊은 여러 탐보망이 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국경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장점 역시 혁명막부만의 전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이점은 김조순에게도 똑같이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김조순은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정시준이 영국과 청의 전쟁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김조순이 걱정한 부분은 조선 사람다운 것이었다. 시준이 청에 입을 놀려 새 국왕 이품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사태는 놔두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하긴 똑같이 조카 내쫓은 조선 세조도 명나라에 상당히 강경하게 나가긴 했다. 사람이 양심에 찔리면 괜히 목소리 커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김조순이 상식 외의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비상식적인 것은, 항상 그렇지만 영국인 쪽이다.
암허스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과연! 그래, 몇 척이나 왔는가?”
“3척입니다. 제법 열심히 무장도 갖춰 왔더군요.”
“결과는?”
“저희는 풍랑에 침몰한 조선 배 3척을 인양하고 그것을 혁명정부에 선물로 양도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유감이지만 선원들은 한 사람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완벽하군. 소장.”
그러나 메이틀랜드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조선인이 영국 해군을 두려워해 절대 천진으로 올 수 없으리라 장담했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피해 랴오둥(요동) 정도로 상륙하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무지한 건지, 용감한 건지. 아무튼 영국 해군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는데요.”
“자존심은 훼손되었더라도 내기는 내가 이겼군. 6페니였지? 온 김에 주고 가게.”
메이틀랜드 소장은 투덜거리며 은화를 지불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본전을 뽑을 만한 아몬틸라도 와인을 발견하고 냉큼 잔을 따랐다. 윌리엄 자딘은 웃어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암허스트 남작이 대답했다.
“아까 얘기하던 정시준 덕분이지. 그는 랴오둥에서 페킹으로 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는데다 육로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왕국 정부가 톈진에 직접 배를 보낼 거라 말했어. 그대로 됐군.”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통찰력이 대단하군요. 조선 사람이라 조선을 잘 알아서겠지만 말입니다.”
메이틀랜드 소장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시준을 평가했다. 그러나 암허스트는 입으로 가져가던 와인 잔을 멈추었다.
암허스트가 음산하게 말했다.
“그렇지?”
“예?”
“맞아. 자네 말대로 대단하지. 그래서 뭔가 수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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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계략이 오가느라 대화가 약간 복잡해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내용은 간단합니다. 마치 청나라에 관대한 조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이중기만을 짜고, 그 틈새에서 시준이 궁극적 목표였던(다른 부수적 내용은 나중에 나올 겁니다) 조선 독립을 얻어내려는 것이죠. 오늘 나온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모두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