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39. 트로이의 목마(1)
가경 17년(1812년) 4월이 되자, 열하에 있던 가경제는 전쟁의 중단을 결정했다.
자신만만했던 고북구제독 부찰복장안의 대군이 다 깨져나가고 후속 부대마저 전쟁사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추태를 압축적으로 자랑하며 패퇴해서는 아니다.
천단과 원명원이 불타버려 조상들에게 낯을 들 수 없어서도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북경의 황자와 핵심 기능이 포탄에 뻐개어질까 봐서도 아니었다. 간악한 영길리 오랑캐에게 겁략당하는 백성들의 고생 따위는 고려 대상에 들지도 못했다.
가경제는 자기 돈이 별 성과도 없이 밑빠진 독의 물처럼 줄어가는 이 사태에 경기를 일으켰다.
가경제의 무한한 금고가 고갈되었다는 얘긴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돈은 어떤 나라의 국가예산에도 비견하지 못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시준이 가경제의 창고와 장부를 한번 구경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열흘은 질투 때문에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경제가 정말 애국안민 하나의 마음으로 개방했던 그 창고는 이제 무한에서 유한의 영역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불멸자가 필멸자로 전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황제는 도저히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영길리 오랑캐의 범죄를 규찰하고 그들의 변명하는 말을 황제에게 아뢸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지친왕(면녕)이 맡아라. 그리고 오랑캐의 소요[洋擾]를 막지 못한 패장들은 그 책임을 물어 엄히 추국하도록 하라!”
‘오랑캐의 소요를 막지 못한’ 앞에 ‘그 피 같은 돈을 쳐들이고도’라는 말을 넣지 않은 건 황제 최후의 품위였다. 아무리 그래도 군주가 그런 소리까지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군주의 어심을 알아 모시는 것이 신하들의 일이다. 고북구제독 부찰복장안, 기병대 지휘관 살툭 창링, 우총병 온승혜는 전부 소환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무의미한 자백을 거친 뒤 처형되었다.
다른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황제와 같은 양황기 출신의 이종형제이며 군기대신, 고북구제독이라는 청국 최고의 권신 부찰복장안까지 처형했다는 사실은 황제의 심기가 그저 불편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유례없는 재산 손실을 입은 가경제는 총신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공정한 신상필벌을 시행했다. 원래 당태종이 말했듯 현군은 사사로이 친소(親疏)에 따라 사정을 두지 않는 법이다.
실제로 긍정적인 면도 있었는데, 많은 장수들로 하여금 차라리 용감하게 싸우다 영길리인 손에 죽었다면 최소한 고문받다 죽진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후세에 도움이 될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아들도 죽여 버릴 거라는 확신 속에서, 이 사태의 수습을 떠맡게 된 지친왕 면녕은 그냥 왕작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산신령이 나타나서 미래에 당신이 이 거대한 제국의 군주 도광제(道光帝)가 될 거라 알려준다 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처지에서 책임을 반납하려면 그냥 목숨도 같이 반납하는 게 낫다.
가경제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고,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봐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부황은 3대 전 조선왕(영조)의 전례를 참고할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황제에게 설마 큼지막한 뒤주 하나 없겠는가.
결국 면녕은 ‘영국인이 변명하는 말을 황제에게 아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말해 영국과의 전후 협상을 위해 천진으로 출발했다.
면녕은 물론 열심히 준비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로 협상단을 꾸렸다.
아쉬운 점은 서양 사정에 능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광저우 쪽에서 사람을 부르기에는 시간이 없고, 북경에 몇 명 안 남아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은 영국 놈들과 협상을 하느니 차라리 독사 떼와 목욕을 하겠다며 달아나 버렸다. 현명한 처사였다.
영국 놈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인륜도덕을 다 내팽개치고 되도 않는 요구를 할 게 뻔한데, 서양인인 선교사는 협상 내용이 황제 마음에 안 들 경우 모든 죄를 덮어쓰고 모가지가 날아갈 게 뻔했다.
그래서 면녕은 수치를 무릅쓰고 서양국의 여러 형세며 간단한 말, 그리고 영국군의 현황이나 규모 등을 친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외교관이라면 당연한 준비다. 허나 전근대 동아시아의 외교에서 우두머리의 역할은 외교 안건을 직접 세세하게 파악하고 논하는 ‘잡일’ 따위가 아니다. 조선 연행사도 그렇지만, 그런 건 그 아래 간부들이 한다.
사신단 대표는 그가 태생적으로 지니는 높은 신분을 활용하여, 실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중 자기편 아랫사람들을 보호하거나 단속하고 사신단 전체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
상대 고관과 외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교류를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분위기를 유화시키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잘못되면 자기 목을 내놓는 것도 대장의 품격. 고위 신분이 목을 바치는 건 아랫것들 백 명의 희생보다 값진 일이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기 힘들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안이 딱히 없을 때는 조선 사신단의 정사로서 왕가의 사위들이 종종 갔다. 신분은 높지만 죽어도 되니까.
이것이 귀하신 분의 역할이고, 오로지 귀하신 분만 할 수 있는 역할이다.
그리고 존귀한 지친왕인 면녕도 평소라면 이 이상 알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한성에서 김조순을 어떻게 쳐내버릴까 고민 중인 조선왕 이품과 못해도 동격의 신분이다.
그런데 상대인 영길리 오랑캐는 그런 전통적 예의나 암묵적 규칙이 전부 통하지 않는 자들이다.
영길리인은 무례하게도 ‘전권 위임자의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한 개념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청국 조정에서는 ‘일단 지친왕의 높은 신분으로 뭉개고 들어가 보자. 지친왕이 영길리 왕과 동격 아니냐?’ 정도의 엉성한 계획만 세운 상태였다.
면녕은 체면상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뜬금없이 도착한 성경 장군의 급보에 면녕이 화를 낸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사람이란 게 스트레스받으면 예민해지게 마련이다.
“일의 경중을 가리지 못하는가. 전령은 매 스무 대를 쳐서 보내고, 성경 장군은 추후에 추고(꾸짖음)하라!”
성경(심양)은 물론 청의 옛 수도로서 중요한 곳이고 성경 장군도 낮은 직위가 아니다. 허나 지금은 성경에 무슨 일이 있건 그런 사소한 건 알아서 처리하고 위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씩씩대던 지친왕은 성경 장군 화녕이 설마 그런 것도 모를 자는 아니라는 점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그는 급히 전령을 불렀다.
화녕은 실제로 유능한 자였고, 지금 지친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친왕은 화녕의 전갈을 받아들고 희색이 만면하여 외쳤다.
“하늘이 아직 성조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조선 예조의 자문(외교문서)이었다.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은 없었지만 조선국 예조 참판의 증명이 있었다.
이건 애초에 지친왕에게 보내는 문서가 아니니 조선왕의 명의가 아닌 것은 자연스러웠다. 지친왕 역시 설마 이 글이 가짜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성경 장군의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다. 그가 진짜라고 판단했다면 진짜일 터. 실제로도 전직 예조 참판이 썼으니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진품이기는 하다.
거기에는 전왕 이공이 홍경래라는 자가 일으킨 평안도의 난을 토벌하러 갔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이품이라는 왕의 아재비뻘 되는 자가 왕위를 탈취하러 정변을 일으켰으며, 혼란한 조선 북방은 일단 영길리에 항거하는 평서대원수 정시준이 맡고 있다는 차분한 서술이 들어 있었다.
조선왕의 명의가 아닌 이유는 지금 조선왕이 없기 때문이요, 없는 이유는 대국의 천자께서 임명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보에서 난신적자 이품은 당연히 제외된다.
지친왕이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조선 왕실은 옛날에도 아재비가 조카 내쫓고 죽인 전적이 있다. 같은 일을 두 번은 못 하겠는가.
뭔가 수상쩍다고 할 정황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지친왕은 모든 사정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넘어갔다.
면녕이 넓은 도량을 발휘한 이유는 그 마지막에 적힌 이름 때문이었다. 면녕은 북경성 앞에서 자기가 부르짖었던 통한의 호곡에 영령들이 응답했다고 여겼다.
‘정시준! 그자는 분명 그때 난폭무례한 아라사인을 설복시켜 의거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서양국 말과 사정에 능통하다고 했으렷다.’
지친왕은 자신이 조선의 심계를 헤아렸다고 여겼다. 조선인들은, 청국에 연줄이 있는 소신교위 정시준을 청국과의 접경에 배치하여 이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바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시준의 출신은 별로 위화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지친왕의 생각에 청국 소신교위라면 조선에서는 대원수쯤이야 당연히 해 줘야 했다. 그것이 대국이니까 말이다.
지친왕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조선은 왕위 계승이 이상하게 꼬여 혼란이 온 상태다. 영길리 하나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 청으로서는 평안도에서 몰려들지도 모르는 유민 문제만 제외하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면녕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조선에서 패륜이 벌어진 이 사태는, 청이 조선에 뭔가 무리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지친왕은 지혜[智]의 왕이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심모원려를 마쳤다. 그러고는 지필묵을 대령하라 외쳤다.
***
‘천안은 사방 변경에까지 빈틈없이 미치므로, 조선국의 괴이한 사정을 묻기 위해 조선국의 충신 평서대원수 정시준을 시급히 소환’ 한다며 지급으로 날아든 문서를 야밤에 집에서 받아 든 시준은 기분이 좋았다.
청에서 완전히 예상대로의 소식이 왔을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지유에게 말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야 허세를 잔뜩 부렸지만 영길리국 때문이야. 결국 청국에는 영길리 말 매끄럽게 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드니, 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게지. 내가 이래 봬도 청구검법의 달인으로 대청국 소신교위를 받은 몸이라는 말씀이야.”
시준의 잘난 척은 오만이 아니라 골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기댄 지유의 머리칼 사이에 손을 넣어 빗질처럼 쓰다듬었다.
집에서 편하게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미래에서 온 남편과 지내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지유도 알게 모르게 현대인의 생활 습관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지유는 머리를 풀고 있었다. 시준은 손가락에 머리칼이 감기는 그 감촉이 좋았다.
다만 지유는 주석의 부인이니만큼 이미 혁명사상을 익숙히 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런 봉건적 직책 따위 가소롭다는 듯 피식함으로써 남편을 부끄럽게 만든 뒤에 물었다.
“새삼 거기서 통변 품삯 벌려는 건 아닐 테고, 영길리국과 청국의 나랏일에 끼어들어 뭔가 이득을 취해 보려는 거야?”
기랑이 그러했듯 지유도 옛날 홍 장주 댁 부엌이나 호령하던 천방지축 말괄량이가 아니다. 지유는 시준의 일을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병세도 약간씩 나아져서, 이름만 얹어 놓았던 부녀회에 부위원장으로서 출석하는 등 대외 활동도 시작했다. 건강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 아이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나, 시준으로서는 지금 이대로만 가 준다면 원이 없었다.
시준은 옛날처럼 지유에게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하지 않았다.
“비슷해. 그치들이 거기서 무슨 얘길 하든 조선은 절대로 빠질 수가 없어. 서울 조정에서 이상한 말 꺼내기 전에 우리가 청국에 선수 쳐서 뱃길과 육지길을 다 막은 다음, 영길리국이 우리를 비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해. 영길리국은 반드시 청국에게 무언가를 뜯어낼 테니 그 떡고물도 얻어 와야지.”
혁명정부는 꽤나 불안한 상태다. 체제는 있지만 국가로서의 외견이 없다.
이를 해소하려면 주변 나라들의 인정이 필수적이며, 시준은 그 초석을 이번에 쌓으려 하고 있었다.
우선 이번 협상의 제일 목표는, 사실 원 역사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청과 맺었던 조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름 아닌 조선의 독립국 인정이다.
영국이 비호하는 독립국이 되고 나면, 그 안에서 단두대로 잔치를 벌이든 정 진인의 신왕조를 개창하든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든 청은 간섭하지 못한다.
이품과 김조순은 사색이 되어 무슨 수를 쓰든 중국과 통해 보려 하겠지만, 안전한 길은 이미 시준과 영국 해군이 다 틀어막고 있는 데다가 혹시 연결됐다 하더라도 그때 이미 청은 이품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친왕이 시준을 소환한 것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벌어질 협상 모두가 ‘이품이 아재비로서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전제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그 ‘괴이한 일’이 없다면 지친왕은 ‘평서대원수를 시급히 소환’할 이유가 없다.
나중에 가서 이를 다 부정하려 들면 일단 체면 문제가 생긴다. 지친왕을 포함한 청 정부가 완전히 낚였다고 고백하는 꼴밖에 안 된다.
거기에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때는 이미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기로 영국과 약속한 뒤라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북경성 대약탈을 벌이지 못했다는 것에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영국이 계약 위반자에게 징수하는 위약금은 언제나 상상보다 혹독하다.
게다가 이품에게는 한 가지 더 난관이 있다.
그가 조카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무슨 거짓 음해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부동의 사실인 것이다. 그저 이공 다음 왕이 이품이라는, 너무나 단순해서 뭐라고 덧붙일 것도 없는 진실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러니까 애초부터 지친왕 면녕은 시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셈이다.
시준은 이러한 계획을 암허스트 남작에게 설명했다. 교활한 귀족적 책모가 매우 취향이었던 암허스트는 열렬히 찬성했다.
“하하! 내가 이 동양의 변경에서 트로이의 목마를 볼 줄은 전혀 몰랐군. 잘 부탁하겠소!”
시준은 대청국의 충실한 소신교위로서 지친왕 면녕을 도와 협상장에 선다. 영국 입장에서는 바라마지 않는 도움이다.
청이 영국의 무도한 직설적 외교에 개탄하는 만큼 영국도 동양 외교에 횡행하는 뻔뻔스런 거짓말과 제멋대로의 은유, 온갖 복잡하고도 개떡 같은 사회적 불문율의 하모니에 환장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든든한 동맹자가 스스로 적진에 잠입하여 손발을 맞춰 준다니 이보다 좋은 제안은 없었다.
로드 암허스트는 자신도 바라던 조선의 독립 – 그래야 차후 조선을 집어삼키니까 – 은 물론이고 시준이 슬쩍 요구한 여러 조건을 긍정적으로 고려하여 강력히 주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시준은 로드 암허스트에게 말하지 않은 일, 그러니까 속이 뻔히 보이는 영국의 차후 조선 침탈을 막을 방책을 여러 가지 생각해 두던 참이었다. 답이 안 나오는 영국의 자연재해적 횡포만 제외하면 현재 시준에게 고민은 없었다.
지유는 시준이 직접 천진으로 갈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약간 불안해했다.
“주석이 직접 가야 하는 거야?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겠지만,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돼? 통교 맡아보는 사람이라면 희만 선생님이라던가 있잖아.”
시준은 지유의 마음속에서 남편 대신 희생해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 정약용에게 잠깐 애도를 보냈다.
“선생님……. 아니, 외사통호국장도 가긴 갈 거야. 하지만 내가 여기서나 주석이지, 거기 가면 잘 쳐줘 봐야 조선 관헌이라서 더 배짱부릴 계제는 못 돼. 걱정하지 마. 병사들도 데리고 갈 거고…….”
“주석결사옹위대 말이야?”
되도록 그 이름 말하기 싫었던 시준은 괴로워했다.
“그, 그래. 맞아. 그리고 무엇보다 영길리 사람들이 우리 편이니까. 여차하면 몇 놈 때려눕히고 야반도주를 해서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 옛날 의주에서 기민들 대접할 때 너 희롱하던 부랑배를 내가 내던져 버린 거 기억나지?”
시준은 전생에서는 입이 찢어져도 하지 않았을 흑역사적 추태 – 연인에게 힘자랑을 하는 – 까지 부리며 지유를 안심시켰다.
지유는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준은 지유가 납득해 준 건가 하였으나, 지유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기랑이를 데려가.”
“뭐?”
“어차피 급양과장이잖아. 식사거리나 옷매무새 수발도 들고, 총칼 쓰는 솜씨가 좋으니 여차하면 지켜 줄 수도 있을 거야.”
“……내가 기랑이보다 약해 보이냐?”
툴툴대던 시준은 심술이 났다. 기랑이 자신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지유도 알 텐데, 잘 참고 있는 시준에게는 이게 도발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내가 기랑이와 정분이라도 나면 어쩌려는 거야?”
“어머, 너도 사내라 이거니? 너는 못 믿지만, 기랑이는 내가 믿는단다. 네가 설사 욕심이 동해도 기랑이가 단매에 고꾸라뜨릴걸.”
지유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시준이 사향 주머니 받아온 기랑 앞에서 도망쳤을 때, 지유는 기랑과 시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유는 기랑이 그때 나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굳이 엉성하게 말한다면 여인들끼리 통하는 감이라고 할까.
실제로 기랑은 지금까지 약속을 지켰다. 이제 기랑은 영변부 때와 다르게 ‘가까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정말 지유를 무시할 생각이었으면 야밤에 은행 들고 시준의 방에 들어가서 고작 쓰다듬만 받고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지유는 손을 내밀었다. 시준은 그 손에 저항하지 않았다.
“기랑이는 여러 가지로 재주 있는 인재야. 남녀가 같이 있으면 정분부터 생각이 나니? 사내가 패가망신하는 데에는 첫째가 권세고 둘째가 여인이라더니, 역시 여기서 양기 뻗치는 게 모든 우환이로구나.”
시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참 교훈이 되는 말씀이올습니다. 부인.”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느니라. 급한 일이니 내일이라도 출발할 거지?”
지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상스러운 정돈처럼 손을 움직였다. 시준의 옷이 정리되는 게 아니라 풀어헤쳐지고 있다는 점만 달랐다. 시준은 지유에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대답했다.
“맞아.”
“그럼 오가는 길에 쓸데없는 생각 하지 않도록, 그런 기운은 오늘 밤에 다 쓰고 가렴.”
눈치 보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갈급하여 실수하지도 않는 것이 오래된 연인이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면서도 서로에게 그런 편안함을 주는 형태로 서로에게 한없이 접근해 있었다.
시준이 고개를 돌려 등불을 훅 불어 껐을 때도 지유는 갑자기 내려앉은 어둠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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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사신단 얘기에서, 왕가의 부마 출신으로서 정사를 두 번이나 한 인물로 금성위 박명원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신행에 박지원을 데려간 것이고... 작중에도 언급되었지요. 작중에는 다소 농담조로 표현되었습니다만 진짜 가서 죽든지 말든지 하고 내팽개친 건 아닙니다. 왕의 인척이라는 신분은 충분히 체면을 세울 수 있고, 왕의 친자손은 보내는 의미가 달라지니 사위가 적당하기도 했죠.
2. 흔히 옥새라고 부릅니다만, 조선이 내부에서는 은근슬쩍 천자국 용어를 써서 그렇고 원래 '새'는 천자의 도장을 말합니다. 제후의 도장은 '인' 이지요. 조선도 명, 청으로부터 모두 조선국왕금인을 받았고 그중 최초로 만주어로 새겨진 조선국왕금인을 받는 영광을 누린 왕은 물론 인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