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29화 (129/284)

129화

38. 로열 럼블(Royal Rumble)(4)

영국군의 야포 사격이 떨어진 곳은 부찰복장안이 급히 끌어모은 병사들의 대열 가운데였다.

포환은 줄지어 가는 오리 가족 사이에 막대기 휘두르며 난입하는 악동처럼 꽂혀버렸다. 그러고는 어린아이가 즐겁게 뛰어놀듯이 텅텅 튀었다. 핏덩이와 비명이 정신없이 홰치며 흩어지는 새와 같은 꼴로 날아올랐다.

아직 작렬탄이 없으므로 피해는 대단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 평양성 앞에서 서양 대포를 맞았던 이공의 금군과 유사한 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들은 수백 명의 기병이 아니다. 십만이 넘는 대군세다.

“영길리 양추가 환술을 쓴다!”

“사, 살려줘! 난 그냥 품삯이나 벌 수 있다고 해서 온 거야!”

청군의 숫자를 봤을 때 대포는 그야말로 눈 감고 쏴도 맞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청군은 영국군의 ‘정확한 사격’이 주술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변발 십여만 개가 일제히 흔들렸다. 청군의 진형이 양옆으로 넓게 펼쳐졌다.

드루리는 아직까지도 중국군이 좌우로 광역 전개하여 영국군을 포위하려나 생각하고 긴장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없이, 끝없이 좌우로 늘어나기만 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윌리엄 드루리는 중국군이 마치 둑 터진 물처럼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히 모은 일반병의 좌우를 지키고 있던 녹영은 파도에 던져 넣은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사실 애초에 녹영은 방금 뭉그러진 팔기보다도 아래의 비 정예병이다.

가경제가 피 같은 사비까지 써 가며 모은 천하제일의 대병은, 바로 그 큰 규모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붕괴했다.

차라리 그들이 없었다면 싸우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을 녹영이며 팔기는 우왕좌왕하다가 아군에게 짓밟히거나 달아나는 중이었다.

시준이 보았다면 북경성에서 용맹하게 돌진하여 천리교 반란군 2천 명을 깨뜨린 주방팔기, 그리고 청군이 왜 이 꼴이 났는지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천리교 반란군이 더한 오합지졸이었을 뿐이고 청군이 강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같은 생쥐가 메뚜기를 붙잡아 갉아먹을 때는 용감하지만 고양이 앞에서는 공포와 혼란에 빠져 허둥대다가 잡아먹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영국군은 생각해 보니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얼결에 깨달은 것 같았다.

윌리엄 드루리는 환희에 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모습으로 팔을 벌린 채 하늘을 우러렀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열등해, 열등해, 열등해! 돼지 놈들, 하찮은 미개인들아! 그저 숫자가 많이 모이면 문명국의 군세에 대적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드루리의 찢어지듯 벌어진 입에서는 거의 침까지 흘러나올 것처럼 보였다. 드루리는 들었던 손을 옆으로 홱 뿌렸다.

“전 장병은 들어라! 저 거만하고 주제 모르는 중국인들이 국왕 폐하의 해군 앞에서 오줌을 질질 싸는 모습이 보이는가! 제군, 용맹무쌍한 왕립 해군의 신사들이여! 본관은 지금에야말로 명예를 드높일 용맹한 돌격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청군이 무너지고 있다 한들 안 될 말이다. 저쪽은 이쪽의 20배다. 지나가는 평범한 시민 하나를 붙잡고 ‘저 20명의 혼란한 도적 사이로 돌격하시오’라고 한다면 누구나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전쟁은 사람의 이성을 휘발시키기 때문에 재해라고 불린다. 원래 이성의 용량이 크지 않은 영국 수병들은 그것이 더욱 쉬웠다. 그들은 자기가 이기는 상황인 것 같자 일제히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네 시간 후, 영국군은 팔리교를 건넜다.

***

조선이 청에 사신을 보낸 지는 2백 년이 다 되어간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은 국가 간 이동이 현대보다 훨씬 통제되던 전근대에 최소한 2백 회 이상 북경을 오간 외국인이다. 이런 훌륭한 첩자는 어디서 또 찾기 힘들다.

그리고 전직 예조 참판인 정약용은 천재답게 그 방대한 사신행의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정보는 동양의 오묘하고 은유적인 질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인에게 친절하게 설명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군이 가장 먼저 들이닥친 곳은 북경 남동쪽의 천단(天壇)이었다.

남교(南郊)의 제사를 지내는 이 천단은 환구(環丘)와 기곡(祈谷)의 두 제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잡한 설명을 다 제하고 말하자면, 이곳은 천자의 유일무이한 상징이다. 서양인들이 막연히 상상하는 것보다 천단의 의미는 훨씬 크다. 황제 외에 누구도 천단을 만들고 유지할 수 없다.

뒤집어 봤을 때, 여기를 영구히 상실해 버린다면 종교적으로 황제는 천자가 아니게 된다.

물론 수염을 깎아 버린다고 사내가 환관이 되는 건 아니긴 하나, 비슷한 정도의 굴욕을 선사할 수는 있다는 얘기다.

조선인들은 그 점을 조언했다. 특히 성경을 읽었던 정약전이 예루살렘 성전에 빗대어 천단을 말한 비유는 영국인에게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되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천단을 들부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경비 같지도 않은 경비들을 간단히 쓸어버린 윌리엄 드루리 제독은 항상 부하들의 바람을 살피는 덕장이었다. 그는 관대하게 선언했다.

“신사 제군, 2시간 주겠다!”

발 빠른 수병들이 한껏 재물을 짊어지고 나왔다. 요강 하나라 할지라도 유럽에서는 비싸게 팔리는 이국의 귀물이다. 좀 눈치가 느려서 텅텅 빈 중국식 건축의 아름다움만 구경해야 했던 수병은 분풀이로 안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북경 교외의 시민들 – 청군 탈영병이 많이 섞여서 인구가 꽤 늘어난 상태다 – 은 통째로 불타는 천단을 보고 엎드려 ‘아이고, 아이고’ 하며 비통한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안 그러면 나중에 죽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한족이라, 그들이 부르짖고 있는 것은 곡(哭, 눈물과 소리가 모두 있는 울음)이 아니라 호(號, 소리만 있는 울음)였다.

천자의 몰락에 대해 한족들이 건성으로 조의를 표하는 동안 영국군은 재빨리 서쪽으로 이동했다. 수도 방위군이 본격적으로 출동하기 전에 한 군데 더 박살 낼 곳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조지 시모어 함장이 조언하러 다가왔다.

원래 흑산도에 파견되었던 킹피셔의 함장이며, 천진에서의 작전 범위를 둘러싸고 드루리 제독과 꽤나 버성겼던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승리가 이어지자 드루리와 시모어 사이에도 함께 역경을 헤쳐 나온 자들에게 마땅한 전우애가 피어났다. 귀한 도자기와 금은 비녀며 빛나는 구슬을 몇 개나 얻은 시모어는 드루리 제독의 노선에 적극 찬성하는 충실한 부관이 되었다.

시모어 함장이 말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제독. 조선 혁명정부 외교장관(정약용)은 그 ‘만 개의 정원 중 최고의 정원[One of ten thousand, 万圓万園, 원명원의 별명]’에 중국의 가장 귀한 보물이 전부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 이제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는군. 병사들을 정렬시키고 제독의 말을 전하게. 애피타이저 시간은 끝났다. 이제 진짜 메인 코스를 맛보러 가자고!”

영국군은 신속하게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은 이 이국의 수도 근처에서 당연히 마주쳤어야 할 지리적, 사회적 혼란을 크게 생략할 수 있었다.

매카트니 자작의 자료는 솔직히 너무 오래되었으나, 극히 최근까지 북경 주변을 오가던 조선인들이 대부분 평안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최고 속도로 원명원을 향해 달려갔다. 아까 천단에서 손 빠른 장병들이 자기 짐 때문에 좀 느려진 동안, 그때 재미 못 봤던 나머지 수병들은 원명원에서 훨씬 귀한 보물들을 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랑캐가 천단을 파괴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 2황자 면녕마저 무장을 갖추고 북경성을 나왔을 시점에는 이미 원명원까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전소된 뒤였던 것이다.

면녕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내 무지무능함으로 인해 이 치욕을 겪었으니 죽어서 조상들을 뵐 낯이 없구나!”

그러고는 즉시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죽어서 조상들을 뵐 낯이 없다면 죽지 말고 살면 되지 왜 저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능숙하게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오래 망설이면 면녕이 세상 최대로 느린 검술을 발휘해야 할 테니까.

젊고 기운 넘치는 지친왕 면녕은 어디까지나 늙은 대신들의 힘이 너무 센 탓에 자결하지 못하고 칼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군주가 사죄했으니 신하들의 차례다. 면녕은 조신들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하기 위해 큰 소리로 통곡했다.

“그 조선인이 생각나는구나. 소신교위 정시준은 다만 홑옷에 칼 한 자루만으로 의기를 떨쳐 천조의 사직을 보우했거늘! 그와 같은 협객이 열 명만 있었어도 저 영길리군 따위가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면녕의 의도대로 장군과 대신들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군신의 아름다운 사죄와 용서, 찬양과 겸양이 한바탕 끝나자 그들은 일단 산 사람은 살자는 맥락에서 면녕을 달래어 성으로 복귀했다.

***

지금의 영국군은 아편전쟁 때와 달리 베이징 자체를 점령할 수는 없다.

공성 장비도 부족하고, 그때만큼 청군이 막장도 아니거니와 지금 지방의 각 성에서 반란을 정리하고 올라올 근왕병 때문에라도 뒤통수가 선뜻하다.

그래서 영국군은 일단 물러나서 암허스트 남작의 협상을 뒷받침했다. 천진에서 통주까지의 주변 민가를 모조리 불사르고 약탈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직례가 지옥이 되어가고 있을 때, ‘홑옷에 칼 한 자루만으로 의기를 떨친 협객’ 정시준은 역시 단출한 혁명군복에 책 한 권 든 채 윌리엄 자딘을 만나고 있었다.

주석의 공무라고 보기에는 희한하게도 수행원 하나 딸리지 않은 채였는데, 그 이유는 물론 이게 공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준은 책을 내놓았다.

“이번 원고는 꽤 잘 팔릴 거라고 자신하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전례가 검증된 내용이니까. 그것은 유럽에서도 현재 절찬리 창작 및 판매되고 있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의 연애 소설이었다.

물론 과거 사람들이 이미 생각한 것을 베껴서야 또 미래인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정시준 버전은 현대인의 센스를 발휘한 것이었다.

실제 대머리에 발기부전이었던 알렉산드르의 여러 신체적 결함을 과감히 무시한 윤색이 가해지고, 나폴레옹의 단구도 수정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당당한 체격의 미남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조선 왕이 다들 미남이라서 사극에 유명 배우를 기용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구한말 로맨스 사극에 고종과 최대한 닮은 사람을 썼다간 2화 만에 내려야 할 것이다.

야학 학생들 여남은 명의 정신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끝에, 애수에 젖은 빙원의 북부 황제와 활달한 태양의 정복자 서부 황제의 밀고 당기는 정치와 연애가 애틋하게 그려졌다.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을 맞추기 위해 시준은 비슷한 스토리의 2가지 이야기를 발매했다. 차이점은 누구를 ‘왼쪽’에 두느냐는 것인데 이쪽 취향의 독자들에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세일즈 포인트를 잘 잡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시준이 유일하게 고생한 것은 이 짓거리를 푸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좀 써야 했다는 점이었다. 푸셰가 현재 아무리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해도 그건 역시 껄끄러웠다.

어쨌든 푸셰나, 알렉산드르는 몰라도 최소한 나폴레옹은 항의하지 못한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단둘이 밀실에서 몇 시간 동안 회담을 나눈 뒤, 돌아와서 조세핀에게 ‘만약 알렉산드르가 여자였다면 그를 내 정부로 삼았을 것이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까.

그런 사적을 모르는 시준 또한 전혀 양심에 거리끼지 않았다.

이것은 절대로 음란서적이 아니다. 프랑스를 적대하는 영국인들에게 잘 팔기 위한 소재일 뿐이다.

모든 것은 영국과의 관계 발전 및 그로써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한 멸사봉공의 외길이라고 시준은 굳게 믿었다(러시아 황제가 곧 영국 동맹이 된다는 사실은 간편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윌리엄 자딘 역시 시준의 생각에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었다. 그는 벌쭉 웃었다.

“의장 각하의 저서는 언제나 영국 해군의 베스트셀러가 아닌 적이 없었지요. 그러시다면 계약의 조건은……?”

“물론 당신 회사…… 아, 우선 회사 설립을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딘 조선 의약회사(Jardine Joseon Medical Company)와의 독점 계약이지요.”

“매우 영광입니다. 의장 각하. 각하의 정부와 앞으로도 잘 해나가고 싶습니다.”

하는 일은 여전히 밀무역상이지만, 윌리엄 자딘 역시 이제 정식 법인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조선과 중국 무역에 뛰어들었다.

회사 이름이 왜 의약회사냐면, 윌리엄 자딘 자신도 의사 출신이거니와 일전의 계약 때문에 그가 현재 주로 취급하는 품목이 ‘신비한 동방의 의료대국 조선의 약재’라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약품 거래를 하러 온 건 아니다.

자딘이 시준을 만난 이유는 시준이 정치국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딘을 만나러 온 이유와 같았다.

시준이 음란소설이나 팔자고 직접 찾아온 게 아닌 것처럼, 자딘 역시 용돈 벌이밖에 안 되는 도색서적 때문에 의장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비밀 회동의 진짜 이유는 한 가지. 둘 모두 영국 해군의 대청 전쟁 승리가 예상보다 빠르게 목전에 다가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준은 자딘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싶었고, 영국 해군 역시 조선의 요구 조건과 거래 방향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직접 얘기하기에는 암허스트 남작과 시준 둘 다 ‘아직’ 입장이 곤란하다.

지금의 공식적 상황은 어디까지나 ‘영국이 평양과 삼화부를 강점한 채 조선의 협조를 강요하는’ 상황이다. 암허스트 남작은 조선의 정복자로서 명예를 얻고, 시준은 핍박당하는 도리의 수호자로서 변명을 얻는 거래였다.

실로 영국다운 짓이었기에 그 누구도 – 심지어 가까이 있는 북경의 프랑스 선교사들조차도 – 이 공식 상황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난처한 상황이야말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끗발 날리는 국제 브로커 윌리엄 자딘이 활약하는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혹시나 들키더라도 쪽팔리는 것으로 끝날 음란소설을 들고 왔다. 소설 때문이건, 외교 때문이건 둘 다 공무로 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자딘 역시 소설 자체에는 예의상의 관심만 주고 시준에게 의자를 권한 뒤 술잔을 놓았다. 어차피 시준의 글은 보증수표이니 나중에 봐도 된다.

이건 시준이 천재적인 대문호의 자질을 가졌다기보다는, 지금 새로운 컨텐츠를 계속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이 인쇄 시설을 가진 시준밖에 없다는 탓이 컸다. 군함에 출판 장비를 싣고 다닐 수야 없으니까.

광기의 대량소비 사회에 익숙한 시준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이지만 이 시대에 ‘계속해서 갱신되는 컨텐츠’라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개념이다.

아직 영국에서도 잡지는 상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이며, ‘대중 오락물의 다양한 제공’이라는 개념은 발달하지 않았다.

어쨌든 시준이 브랜디를 한 잔 마시자 자딘이 운을 떼었다.

“피차 아는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암허스트 남작이 청 정부와 맺을 조약에서 조선이 요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중국의 영토는 어렵습니다. 조선의 도움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영국 정부도 몇 개 개항장 이외에는 영토를 할양받을 생각이 없으니까요.”

“우선 남작이 나를 조선의 유일한 대표자로 생각하는지부터 알고 싶군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시준이 조선의 대표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명분상으로 조선의 정당한 국왕이요, 실질적으로도 조선 인구의 가장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 현 국왕 이품이 그 자리에 어울린다.

그렇다면 시준은 영국의 판단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해야 한다. 만약 암허스트 남작이 조선왕을 무시하고 시준과 거래하겠다면 좋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준은 왕에게 하사받은 평서대원수 자리를 활용하여 중간에 선을 차단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자딘은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듯 태평히 말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의장 각하께서 이 상황을 다 만드셔 놓고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제가 이해했나 알아보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진짜 몰랐던 시준은 자딘의 말이 맞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딘은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고 계속했다.

“암허스트 남작이 현재 조선의 국왕과 손잡는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러면 조선 국왕은 더 이상 중국 황제의 봉신일 수 없으며, 이는 귀족들의 반발을 부를 겁니다. 귀족들이 중국에 충성해서가 아니라 ‘반대해야 마땅한’ 전왕의 반청친영(反淸親英) 정책을 계승한다는 선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강철의 계몽군주 이공의 서양 개항 치적은 조선에서 완전히 어둠의 역사가 되었다.

이품과 김조순은 기이하게도 대외 정책 측면에서는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위정척사. 누구도 감히 폐주 이공처럼 서양과의 무역이나 중국에 대한 배반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자딘의 말마따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의 현재 왕이 전왕처럼 또 다른 반왕(反王, Anti-King)의 손에 다리가 잘리고 싶지 않다면야 그는 싫어도 반유럽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죠. 각하께서 전왕을 유폐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정당한 혈통으로 볼 때 고려해 볼 만한 외교 상대가 될 수 있었겠지만, 각하께서는 그 선택지를 봉쇄하셨습니다.”

암허스트나 자딘 정도 되는 사람은 시준을 정식 명칭대로 의장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아직 이 세계에는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알려진 공화국이 별로 없다.

왕을 폐위하고도 스스로 왕이 되지 않는 시준의 행보는 올리버 크롬웰과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호국경[Lord Protector]은 사실 왕의 존재를 전제(前提)하는 섭정공의 개념이 원조이기에 시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시준의 난폭한 행보는 누군가를 보호[Protect]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 해군 수병들은 시준만의 특이한 업적에 더 주목했다. 그들은 시준을 일컬어 다리 절단자[The legcutter], 혹은 반왕이라 불렀다. 지루한 선상에서 오락거리에 목마른 수병들이 센세이셔널한 이슈를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호칭을 좋아한다면 그건 중학교 2학년이거나 변태다. 시준의 인상이 찌푸려지자 자딘은 싱긋 웃었다.

“따라서 암허스트 남작은 싫어도 다른 파트너를 골라야 합니다. 그 면에서 현대적인 사업 대화가 잘 통하고 유럽인에 호의적인 각하의 정부는……. 아니, 입발린 소리는 그만두지요. 혁명정부는 군사력과 재정의 대부분을 영국 해군과 동인도 회사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암허스트 남작의 구미에 매우 당기는 선택지입니다. 배신당할 염려가 적으니까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습니까?”

시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딘은 말하지 않았지만, 시준도 그 뒷 내용은 알아들었다.

자딘이 말한 요소는 곧 ‘장기적으로 영국의 영향력하에 두기도 더 쉽다’는 말이며, 더 간단하게 번역하면 ‘만만하니까’이다.

영국은 자선 사업하러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시준은 그 절대 명제를 단단히 새겨 두었다. 세계의 포식자 영국에 먹히지 않으려면 충분히 주의한다는 정도로는 모자라다. 절박하게 지혜를 짜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로얄 럼블에서는 일단 영국과 태그를 맺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시준과 혁명막부도 로프를 밀어 올리고 링에 들어가야 한다. 시준은 마음속으로만 심호흡을 했다.

시준은 이공의 다리를 잘라버린 게 지유의 일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자딘이 혼자 다 말한 대로 자신의 정치적 심모원려라는 점을 강조하는 표정을 지으며 여유 있게 몸을 뒤로 젖혔다.

“아니오.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조선의 요구 조건을 말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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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청군도 대포와 군함을 알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화기를 쓰는 것 자체를 주술이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원래 조준해서 명중시키는 물건이라는 인식이 잘 없었던) 대포를 서양인들이 정확히 맞히는 것이 주술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아편전쟁 당시 음기로써 양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자의 요강을 가져다가 서양 군대 앞에 벌려놓고 그 주술을 막으려 했습니다. 못 배운 일반 백성이 그런 게 아니고 군 최고 지휘관이 그랬습니다.

2. 환구단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황제는 천지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에 천단은 곧 황제의 상징이었습니다. 항상 남쪽 교외에 있는 것이 전통이었죠. 고종이 세웠던 대한제국의 환구단도 경복궁에서 약간 남쪽, 을지로에 있습니다.

3. 아편 전쟁 당시 천단이 약탈당한 건 아니지만 원명원은 작중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약탈당하고 전소되었습니다. 다만, 아편 전쟁 때는 청에서 서양인 포로를 학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요.

재미있는 여담이 있는데, 중국 한 역사 어용단체의 간부가 작중 원명원에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문화재를 경매에서 낙찰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은 오로지 애국심의 발로일 뿐 돈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면서 낙찰된 경매품에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사재를 털어 애국을 실천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배짱으로 큰돈 불러 낙찰되어 놓고 배째라고 돈 안 낸 겁니다. 물론 유찰되어 이 일은 무산..

4.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를 엮은 BL소설은 사실 별로 음지의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작중에 설명된 여러 실화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는 거의 공인 커플 수준. 둘이 뺨 붙이고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메달이나 키스하는 그림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현재에도 인터넷에 한 번 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합니다. 뭐 곧 원수 사이가 되지만 그것도 로맨스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5. 작중 초반 한 번 설명했지만 윌리엄 자딘은 본래 역사에서 2022년 현재까지 홍콩에 남아 있는 자딘 앤 메디슨 회사를 세운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친구 메디슨이 빠지고 자딘 혼자 세웠고, 그의 의사 경력을 살려 의약회사가 되었군요. '일전의 계약' 이란 외전에 나왔던, 프랑스령 자바에 약을 파는 그 계약입니다.

6. 안티 킹은 '대립왕' 이라는 뜻이 원조이긴 한데, 여기에서는 '왕의 모욕자' 정도의 뉘앙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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