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27화 (127/284)

127화

38. 로열 럼블(Royal Rumble)(2)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이득제가 서울에 보고를 보냈기 때문에, 이 시점 김조순은 요즘으로서는 실로 드물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북한산성의 승리에 딱히 평안도 의병이 기여한 것은 크게 없었다. 그러나 김조순은 시준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난이 평정됨을 알리는 교지에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평안도를 포함하려 자구(字句)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나중에 계획대로 전쟁 없이 혁명막부를 집어삼키려면 지금부터 작업을 해 두는 게 좋았다.

그런 즐거운 전망 속에서 붓을 놀리던 김조순은 비변사에서 가져오는 계본을 받고 – 그걸 왜 왕이 아니라 김조순이 받느냐는 기초적 불만을 말하는 자는 한성부에도, 이승에도 없었다 – 인상을 찌푸렸다.

“함경도 토병들이 모조리 탈주했습니다!”

“뭐? 어찌 감히 군명도 없이 자리를 벗어난단 말인가! 함경 남북 병마절도사는 뭘 하고 있어!”

“그, 그것이 북한산성이 떨어졌으므로 임무를 다했다 하여……. 병마절도사 두 사람은 지금 찾고 있는데 종적이 묘연하오이다. 평안도 의병이나 남은 병사들의 말로는 절도사들이 말 타고 야밤에 북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사실상 조선 최고위의 단위부대 지휘관인 병마절도사의 탈영 소식에 김조순은 현실이 상식으로부터 박리되어 툭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김조순은 간신히 정신을 추슬렀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다시 한번 샅샅이 알아보라!”

김조순의 입장에선 당연한 의심이었지만 의병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혁명적인 평안도 인민들은 원래 거짓말을 안 한다. 그들은 분명히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신경, 남도병마절도사 김희가 야밤에 북으로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바로 그들이 데리고 갔으니까.

게다가 사실 지금 김조순이 걱정할 일은 병마절도사의 탈영이 아니다.

조선을 잘 아는 정약전과 인간을 잘 아는 푸셰가 주의 깊게 기획한 함정에 의해, 경상도 진공에 나섰어야 할 북한산성 토벌군은 현재 통째로 공중분해되는 중이었다.

***

혁명군 복대장이며, 시준이 미래의 정찰총국장으로 눈여겨보고 있는 방우준은 원래 뼈대 있는 무가 출신이다.

그 형 방우정 역시 초관으로서 토벌군에 근무 중이었다. 그리고 방우정은 함경도나 다른 지방군의 군세가 아니고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북한산성에서 그 파국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이 나라 조종조의 사직이 백성에게 가르친 바가 겨우 이 정도였던가!’

비통했다. 아무리 무식한 하민이라고 한들, 눈앞의 재물과 살육에 취해 일순간에 도적 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의문이었다.

그것은 관군의 직업 정신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방우정 역시 조선군에게 그런 의식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가 바로 조선군이니까.

방우정은 위로 대장부터 아래로 병졸까지 신분과 처지를 초월해서 모두 가지고 있었어야 하는 도덕과 윤리를 믿었다.

허망한 이상론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조선을 지탱하는 것은 재물도, 군사도, 체제도 아니다. 조선은 어차피 그중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4백 년을 버텼으며, 그 기둥은 바로 충효와 의리와 정도(正道)다.

실제로 이 땅의 신민들이 그러했기에 치세는 융성하고 아래위는 바로잡혔다. 혹시 나오는 악적은 모두가 함께 토멸하였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세 번은 망했을 양란과 대기근 위에서도 국가는 재건되었다.

도학국가 조선은 힘만으로는 강요할 수 없는 것, 바로 자존심을 신민들에게 새겨 주었기 때문이다.

방우정의 생각은 이 나라의 지배층 거의 대부분의 이념과 일치했다. 그리고 그것은 방우정이 획득할 수 있었던 지식을 통해 볼 때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시준이 성균관 앞에서 강의할 때 느꼈듯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본다면 정치, 군사, 기술적 변화는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매우 작은 것이다. 명나라는 아시아 최고의 화약 무기와 세계 최대의 국고를 보유했고 여진족은 둘 다 없었지만, 명은 멸망하고 여진은 흥했다.

국가를 존속하게 하는 것은 병장기도, 군함도, 막대한 창고도 아니다. 자발적 도덕과 자부심이다.

당장 그 모든 면에서 훨씬 강했던 옆 나라 중국에 조선처럼 400년을 간 나라가 있었는지 묻는다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여진이 딱히 도덕적 종족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명보다는 나았던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 군졸과는 격이 다른 훈련도감도 그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방우정은 자신의 초에 속해 있는 군졸들이 지방군처럼 자유롭게 약탈하지 못하는 것에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곤장을 쳤다가, 열 명이나 되는 군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울고 싶은 놈 뺨친다는 게 이런 노릇이거든! 초관 나리야 저 혼자 청백리면 그만이시겠지마는, 우리는 당장 이거 끝나면 다시 굶주려야 한단 말이지.”

“나라에서 포상이니 뭐니 요란하게 포고나 했지 진짜 논공(論功) 정히 해주는 일을 본 적이 있냐고. 그래 봐야 댁네 양반들 가자(加資)하는 감투 잔치뿐 아니오?”

“얌전히 굿이나 보면 떡이나 먹었을 것을. 반란군이 죽인 걸로 하고 즉시 멱을 따다 어디 골짜기에 던져 버리자구.”

군사들이 당장 방우정을 묻어버리지 않고, 그저 둘러싸기만 한 채 봉건주의 구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만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방금 방우정이 뛰어난 검술로 두 명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칼침이란 게 겸손함을 잃어버린 병증에 대해 항상 효과적인 처방이긴 했다.

방우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왜도를 내밀었다.

“너희는 이제 군사라고도 할 수 없다. 달아나면 굳이 쫓지는 않으마.”

그 오만한 발언은 훈련도감 군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새끼가 지금 눈깔에 뵈는 게 없나!”

“한꺼번에 달려들면 제까짓 게 어쩌겠어? 야, 가라!”

“아니, 너부터 가!”

방우정은 저들이 조총을 장전하는 낌새가 없나 살폈다. 이런 오합지졸 따위 – 방금까지 자기 휘하였기 때문에 좀 슬프긴 했지만 – 총만 없다면 두려울 건 없었다.

군사들도 그 생각을 한 모양이다. 아무리 타락했어도 이들은 훈련도감이다.

병사 둘이 화승에 불을 붙이고 총을 치켜세우는 동안, 나머지는 창칼을 들고 그 앞을 막아섰다. 단 한 명을 상대로 진형을 갖춘다는 망신스런 상황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대처다.

방우정은 순사를 각오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총을 재던 놈의 머리가 홱 꺾이는 것을 시작으로, 총알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야만적인 무기가 열 명의 군사를 강타했다.

“끄아악!”

조선 사람이라면 석전 한 번 안 해 본 사람은 드물다. 방우정을 구한 사람들은 무릿매까지 갖춰 온 ‘평안도 의병’들이었다.

한 명 상대하려면 열 명이 필요한 것이 훈련도감 군사였는지라 손에 똑같이 창칼 든 평안도 의병이 서른 명이나 몰려오자 곧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방우정은 눈을 크게 떴다. 평안도 의병 자체에 놀라서는 아니었다. 그 선두에 있는 자는 방우정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혁명군 2영대 복대장 방우준은 오랜만에 만난 가형을 얼싸안았다.

“형님! 오랜만에 뵙소이다!”

“네, 네가 여기 웬일이냐? 평안도로 갔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방우준과 방우정은 연락 자체는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서 방우준이 시준에게 김조순의 계획을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방우정은 동생이 그저 혼란한 서울을 피해 평안도로 달아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석인지 뭔지가 보냈다는 의병에 포함될 리가 없다.

방우정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동생을 보았다.

“너 거기서 그냥 농사짓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냐?”

“하하, 형님. 목숨을 건진 판에 지금 그런 게 무에 중요하겠소이까. 우선 놀란 마음을 다스리시지요. 여기 이게 그 유명한 평안도 담배인데 한 번 잡숴 보시면…….”

과연 서초는 그 이름답게 심기를 가라앉히는 데 탁효가 있었다. 방우정은 곧 동생의 설명을 열린 마음으로 들을 준비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상봉은 방씨 형제 말고도 많았다. 당장 훈련도감이 이반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정찰총국은 그처럼 은근한 접촉으로 김조순의 군에 미리 뿌리를 뻗어 둘 수 있었다.

***

총괄서결국이 생긴 이후로 웬만한 일은 거기서 걸러졌기에 이번 정치국 회의는 꽤 오랜만에 열렸다.

정찰총국을 정식으로 혁명군에 편입하고, 그들의 사업 수행을 평가하며 경기도와 수도권의 혼란을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대략적 의제였다.

그 중심인물인 선전선동국장 조제프 푸셰가 점잖게 발언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일로 수천 명의 새로운 혁명군이 생길 거라는 기대는 과욕이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시준은 손을 들어 눈 위쪽을 문질렀다. 요즘 좀 피로한 것 같았다.

함경도로 되돌아온 토병 수천 명은 그 대부분이 그냥 고향으로 슬쩍 돌아갔다. 지휘관인 병마절도사 두 명이 함경도에 있으니 군사가 장수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백윤구와 혁명군 1영대는 그런 토병을 혁명군에 흡수하기 위한 전도 작업 중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는 푸셰도, 시준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전부 혁명의 대의에 감화되어 붉은 머리띠 매고 나섰으면 시준부터가 곤란했을 것이다.

함경도의 지방군은 장부상으로 7만 명이 넘는다. 그 중 십분지 일만 혁명군이 되어도 7천 명. 2개 영대에 가까운 숫자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시준이 마음속으로 설정해 둔 한도였다.

그 이상 된다면 현실적으로 혁명막부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장비를 지급할 방법이 없다. 현재 막부가 바라는 최고의 상황은 그들이 얌전히 농사짓고 사는 것이다.

함경도에 대한 경제 개발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몇 가지 구상이 시준의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일뿐더러 오늘의 의제는 그게 아니다.

시준은 돈 생각을 잠시 지우고 다시 푸셰 쪽을 바라보았다.

“남쪽에 대한 공작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조제프 푸셰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담당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을 것 같소.”

불려온 사람은 중앙인민회의 외무위원회의 대외연락담당초빙위원 박광유였다.

박광유는 오래전 시준에게 부하들이 흠씬 두들겨 맞은 일은 벌써 다 잊었는지 붙임성 있게 인사를 올렸다. 시준 역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초빙위원의 노고에는 항상 감사하고 있소이다.”

“영광이올시다. 주석 동지.”

엄밀히 말해 박광유는 막부 소속이 아니라서 ‘동지’는 아니지만 모두가 그 호칭을 양해했다. 박광유가 송상을 움직여서 하고 있는 일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박광유는 현재 막부의 적극적 지원 하에 송상의 차기 대방 자리를 노리는 유력 도방이었다. 그리고 막부는 그런 박광유를 이용해 여러 하청 사업을 진행했다. 송상의 역할은 일전 푸셰의 격문을 삼남에 전하는 것 외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박광유는 상인으로서 일신의 능력도 모자라지는 않다. 비록 시준 때문에 여러 차례 망신살을 당하기는 했어도, 과거 장시영이 그를 믿고 인삼 전매를 위해 평안도에 파견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박광유는 정치국 앞에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남조선혁명당(南朝鮮革命黨)은 이제 각지 송방마다 튼실하게 자리를 잡았소이다. 황해도와 경기도가 가장 많고, 강원도에도 사람들이 부지런히 넘어 다니고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천안에서의 기의(起義)로서 또한 몰려든 호걸이 적지 않습니다. 자세한 수효는 계본(정식 보고서)을 보아 주시기 바라며……. 다만 농토와 반동이 많아 가장 혁명이 시급한 영호남은 김조순과 김회연 두 반동의 수괴가 단단히 휘어잡고 있기에 혁명당의 수가 가장 적습니다.”

시준은 자기가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 애쓰며 ‘남쪽에 대한 공작’ 운운했던 정식 명칭이 기어코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혀를 깨물었다.

비록 통증 때문이긴 하지만, 시준은 고뇌에 찬 주석의 표정을 정확히 지으면서 박광유를 치하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실로 큰 성과요.”

현 국왕 이품이 즉위하기 전, 각지 지방관의 도를 넘는 토색질에 폭발해 버린 송상은 막부의 지원을 받아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령과 아전을 밤송이 꼴로 만들어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에 걸어놓은 일이 대표적이다.

허나 송상답게도, 그건 그저 무작스러운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면밀한 계산이었다. 안성과 천안은 이 시기 삼남의 유통 길목이다. 송상은 절대로 그러한 요충지를 잃어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송상이 그 징벌로 전멸당하지 않은 이유는, 송상이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그 짓을 누가 했는지 무의식의 단계에서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가 사람 때리는 짓을 모두 자수해 가면서 경찰에 증명받고 나서야 그것을 훈장으로 협박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증거가 없더라도 누가 이 일을 일으켰는지는 다들 알고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한 협박이 된다.

새로 오는 수령들은 송상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수령에게 군권이 있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지역의 군사 책임이 수령에게 있다는 소리다. 요컨대 수령들은 스스로를 알아서 지켜야 했는데, 그때는 충청도 관군이 남한산성 치러 몰려갔던 상황이다.

허나 이제는 왕이 새로 즉위했으며, 관군은 남한산성을 떨어뜨리고 북한산성마저 짓밟았다. 송상은 그간 김조순이 몇 번 삽질하다 바빠서 사실상 방치했던 송상 토벌을 재개하리라 직감했다.

그게 아니라도 김조순이 다른 지역을 다시 평정하려면 전비가 필요하다. 송상은 현재의 조선에서 김조순이 부담 없이 털어먹을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결국 송상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시준의 지원을 받은 순간부터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은 셈이었다. 이제 송상과 서상은 대등한 관계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송상은 사실상 정치국의 손발이 되어, ‘승리의 날(이제초의 표현이다)’이 오는 그 순간 조선 중부와 남부 전지역에서 일제 봉기를 일으킬 ‘남조선혁명당’ 조직에 앞장섰다.

이번만은 시준도 이 이름에 반대하지 못했다.

사실 시준이 북한식 슬로건을 써먹은 이유는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해서였지 시준이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외부에까지 자랑스레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애매했다. 시준이 몇 마디 캐치프레이즈와 구호로 사람들을 편리하게 선동했던 업보는 바로 그 사람들이 ‘이름’에 심혈을 기울여 신경 쓰는 결과로 돌아왔다. 시준마저도 수평한 동료들의 의견을 근거 없이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혁명은 들어가야 한다. 혁명을 하는 무리이니 당이다. 시준이 경기를 일으켰던 남조선이라는 이름도 정치국에서는 환영할 만했다. ‘조선혁명당’이라고 해 버리면 혼동이 올 수 있는 것이, 지금 평안도의 중앙인민회의도 엄연히 조선이다.

대별되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남조선보다 더 직관적으로 이들의 위치를 잘 설명하는 명칭은 없었다.

송상은 자기들 이름도 넣고 싶어 했지만 여기에는 꼭 송상만 있는 게 아니라 송상과 손잡고 민란을 일으켰던 백성, 향임들이라거나 그 사이에서 움직이며 떡고물 받아먹었던 보부상도 많아서 그건 곤란했다.

혁명은 우리의 것이라는 막부 사람들의 인식도 한몫했다. 그들의 생각에 송상은 어디까지나 정치국의 하부 조직이지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조선이라는 이름은 그러한 우위를 확인하는 역할도 했다.

‘우리가 조선이고, 저들은 남조선이다. 우리가 원조이며, 저들은 나중이다.’

특히 조제프 푸셰는 ‘조선에서 제2의 방데(Vendée)를 만들고 싶지는 않군.’이라고 씨부렁거리며 그의 특기를 발휘했다.

그는 시준마저도 좀 너무하지 않나 느낄 정도의 치밀함으로 송상 각 지부에 첩자와 감시원을 심어 두었다. 명목상이야 사상교육용 지원 인력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전국 인민의 총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파리 시민들만의 유혈 축제에 가까웠다. 나중에 덮쳐온 프랑스 혁명정부의 혹독한 초기 통치에 반발하던 지방 사람들을 무차별 도륙할 수밖에 없었던 교훈을 푸셰는 잊지 않았다.

이는 김조순에게 ‘의병’을 파견하는 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물에 물 탄 듯 이루어졌다. 막부의 가장 정치적인 간부들은 푸셰의 면밀함에 칭송을 보냈다.

시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러한 주도권 싸움 끝에, 결국 남조선혁명당 수십 개 지부가 조선에 우후죽순 탄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회상이 주마등처럼 시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준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온 기분에 허핍하게 웃었다. 지유가 보고 싶었다.

그때 주석의 표정을 잘못 읽은 이제초가 지금이 바로 때라고 판단하고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주석 동지,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무릇 병귀신속입니다. 정치국의 승인으로써 남조선혁명당 전 지부가 즉시 일제 총궐기하도록 명해 주십시오!”

이제초의 열정적 제안에 시준은 더 의욕이 사라졌다. 시준은 침울하게 –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는 진중하고 신중한 태도로 보였다 – 말했다.

“모든 위원들은 잠시 진정하시길 바라겠소. 비록 초빙위원(박광유)이 가져온 소식이 고무적이나, 우리는 중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그에 대해서 이제부터 외사통호국장께서 말씀하실 것이외다.”

그건 이제초 등 정감록파의 돌출을 막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이다.

막부가 아직 국가를 칭하거나 전조선 총궐기를 지시하지 않은 이유는 김조순이 무서워서라기보다 외국,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국과의 관계 확정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영-청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김조순, 김회연 등 조선 세력은 물론이고 청과 영국까지 얽혀 싸우는 동아시아는 현재 다른 말이 필요 없는 난장판이었다.

시준은 전생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 교실 뒤편에서 소화기와 의자 들고 즐겁게 따라했었던 미국 프로레슬링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건 한마디로 말해 로열 럼블(Royal Rumble). 로프 젖히고 링에 들어갈 때를 잘 골라야 해. 누구랑 임시로 태그를 짤지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강한 자가 생존하는 게 아니라, 생존하는 자가 강한 것이다.’

시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외사통호국장 정약용은 그가 정리한 전쟁 상황과 향후 전망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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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천안 얘기는 전에 자세히 나왔지만... 좀 된 얘기라 다시 설명하자면, 조선 왕위가 비었을 시절 김조순은 각지 지방관의 무제한 착취를 용인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보장받았던 때가 잠깐 있었죠. 그때 작중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 일을 다시 간단히 언급한 것입니다.

2. 프랑스 혁명은 지방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반종교적 태도, 폭압적인 정치 등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방데 학살로 대표되는 무차별 진압이 이루어졌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파리 부르주아 시민들이 왕 자리를 대신 꿰어찬 것 뿐이라고 빈정대기도 합니다.

3. 남조선혁명당은 남조선로동당과 전혀 무관합니다. 여기에서의 당은 무리라는 뜻이지 정치 모임으로서의 party는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시준의 혁명정부와 북한 정부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죠. 당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판사님께서는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4. 로열 럼블은... 작중 시준이처럼 교실 뒤에서 프로레슬링 놀이 해 본 분들이라면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그러다 소화기 터뜨리고 야단맞기도 하죠? 하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깐 언급하자면,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의 행사랄까 대회 같은 겁니다. 페이퍼뷰라고 하죠.

서른 명의 프로레슬러가 차례로 링에 진입하여 한 자리에서 난투를 벌이는 장대한 프로그램입니다. 동시 입장이 아니라 순차 입장인 데다(나중이 대체로 유리하겠죠?) 오만가지 협잡과 반칙, 속임수가 넘치는지라 애초에 기량을 겨루는 공정한 경기는 아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선수들이 헤쳐 나오는지를 지켜보는 볼거리입니다. 현재 작중의 동아시아 국제 상황에 대한 비유로 시준이 떠올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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