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37.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3)
이때 조정의 토포군은 벌벌 기듯 하면서도 어쨌든 북한산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양측의 군세는 격렬한 전투답게 계속해서 깎여나가긴 했으나, 그 사상자는 공성전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총융청도 전력이 다 고갈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원 누락은 탈주자에서 나왔다. 병사들은 대체 자기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매 순간 의심하면서 관성적으로 총을 쏘고 돌을 던졌다.
국왕 이품은 김조순 견제를 위해 자꾸 비변사를 질책했다. 왕의 질책 따위 개 짖는 소리로 치부할 수 있는 김조순도 빨리 경기도를 안정시키고 경상도로 군세를 보내고 싶기는 매한가지였다. 심지어 정시준을 경계하던 황해도 군세를 남하시킬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막부가 지원한 ‘의병’은 김조순에게 한 줄기 서광이었다.
백여 명밖에 안 되는 그 규모 때문은 아니다. 이것에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물론 김조순이 갑자기 시준을 자기편이라고 확신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김조순쯤 되는 인물이 자기가 했던 생각 – 그러니까 배신 – 이면 시준도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잊었을 리 없다.
그러나 김조순은 시준의 호의를 적어도 지금은 의심하지 못했다. 의병들이 김조순조차도 놀라게 할 만한 선물을 갖고 왔기 때문이었다.
한성 판윤 김이익은 그 선물의 가치를 간단히 평했다.
“이거, 나중에 그 정시준이라는 자를 팽할 때 내가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먼. 내 실책을 그자가 이리 깨끗이 처치하여 주다니.”
그들의 선물은 잘 묶인 전 수경포도장 이요헌과, 운이 없다는 죄로 같이 끌려온 조라포 만호 김진락이었다.
혁명군이 들이닥쳐 둘을 묶었을 때, 그들은 모든 종류의 욕설을 퍼부으며 시준을 저주했다. 신의를 배반한 악적에 대해 준엄하고도 쉼 없는 성토가 이어졌다.
정찰총국 요원들은 시끄럽다고 두들겨 패거나 하지 않았다. 훈련된 자들답게 그냥 무시했을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계속 소리 질러 봐야 빨리 배고파지는 자기만 손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다.
처음에 시준은 반대하는 쪽이었다. 김조순에게 신뢰를 얻어 속이기 위해 이요헌을 묶어서 보내자는 푸셰의 제안이 너무 배신력 넘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요헌은 역사를 모르는 시준이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장재가 아까운 사람이었다. 인재가 하나라도 아쉬운 혁명막부로서는 놓치기 망설여졌다.
그러나 조제프 푸셰는 시준에게 조언했다.
‘일세의 대학자였던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결국 인민의 앞에 목을 바칠 수밖에 없었네. 너무 아까워하지 말게. 사람의 능력이란 건 따지고 보면 다 엇비슷해. 혁명의 대의가 그것 아닌가? 인간의 가치가 다 다르다면 평등은 한낱 식언이겠지.’
‘사람들의 능력이 다르다는 현실성과 대우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꼭 배치되는 것이 아닐 텐데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들이 옆 사람보다 멍청하지 않다는 거짓 칭찬을 나눠주는 것도 ‘평등한 대우’야. 그게 공화국이지. 게다가 그자가 아무리 유능한 군인이라 해도, 그런 극렬 반동분자가 가진 재주는 결국 그만큼의 위협일 뿐. 노인의 조언을 믿고 일을 멀리 보게. 혁명 때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결국 대프랑스는 다시 한번 유럽을 제패했지 않은가. 자네는 아직 젊고, 그다지 많은 사람을 보지 못했어. 인재는 살다 보면 또 얼마든지 있다네.’
듣고 보니 그 말도 옳았다. 게다가 이요헌과 김진락이 남아 있다면 경상우수영 수군들이 딴마음을 먹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시준도 끝내 포기하고 두 사람을 눈물로 전송하여 주었다.
그리고 혁명해군 1함대에는 영국이 상대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쓸만한 전선 4척과 총통이 추가되었다.
시준은 그냥 위에서 시켜서 왔을 뿐인 경상우수영 군졸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약간의 ‘사상교육’ 후 혁명군에 편입될 것이었다.
김조순도 이 상황에서 따라간 우수영 군졸까지 내놓으라는 눈치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건 공을 세운 시준에게 ‘노비로 내리는’ 형식으로 처리하고, 간부인 이요헌과 김진락에게 서둘러 대역부도의 죄를 선고했다.
이요헌은 마지막 의지를 짜냈다. 그는 엿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공술하였다.
“왕의 다리를 잘라낸 상놈 정시준은 세상에 두려울 게 없소. 그 뱀 같은 어린아이는 영남의 근왕군과 손잡고 나리의 뒤를 노릴 셈이니, 어찌 나를 묶어 보낸 그의 충정을 칭찬할 수 있으리? 언젠가 그대도 나와 같이 되리라.”
하지만 수경포도장까지 역임한 사람답지 않게도 이요헌이 잊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심문이란 건 원래 듣고 싶은 말을 우려내기 위한 것이지 진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실과 심문은 아무 관계가 없다.
게다가 이미 이요헌을 잡아 보낸 게 정시준인 이상에야 시준이 김회연과 결탁했다는 ‘모함’이 도무지 먹힐 리가 없었다. 그 ‘어지러운 헛소리’의 공초는 작성되지 않았다.
과정이야 복잡했을지라도 결과는 단순하다. ‘두 흉패(凶悖)한 역적’에게 내려질 벌은 조선의 비공식 최고형인 거열형(車裂刑)뿐이었다. 두 사람은 시준이 마지막 인정으로 내어 준 아편을 몰래 삼키고 좀 덜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요헌의 머리를 비롯한 신체 부위가 알뜰하게 해체되어 도성 일대에 내걸리자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구 수경포도청 레지스탕스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무도한 불랑국 놈들이라면 이요헌의 머리를 바스티유의 드 로네이(Bernard-René Jourdan de Launay) 후작처럼 창에 꽂아 대비전 앞에 들이대어 꺼떡이며 ‘너의 주인 앞에 절하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조선은 도학국가이니만큼 그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
김조순은 숨을 죽이고 있는 대비 김씨의 반응만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고는 김이익에게 말했다.
“이제 백성들을 안심시켜야겠군요.”
“그러지.”
수경포도청 무리가 소탕되었으니 김이익이 그 일을 위해 끌어모았던 시정잡배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강회가 서울에서 보았던 것처럼 워낙 행패가 심해 여론이 악화되던 상황이다.
시준이 과거 이공 휘하에서 정치깡패로 활동할 때 걱정했던 말로를 김이익이 부리던 ‘순군’이 걷게 되었다. 포상하겠다는 말에 순진하게 모였던 깡패들은 훈련도감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요헌과 마찬가지로 갈기갈기 찢겨 내걸렸다.
한성부민은 세련된 도시 사람이다. 오랜 세월 정치와 밀접하게 살았던 그들은 평안도의 ‘혁명’ 이전 조선에서 유일한 민간 정치 계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성부민 역시 능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도성의 치안을 안정되게 한 왕과 김조순을 찬양하며 ‘감히 왕명을 빌어 백성을 노략한’ 깡패들의 목 앞에서 침을 뱉고 주먹을 쥐어질렀다.
그렇게 도성을 정리한 김조순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훈련도감까지 내어 북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했다.
“안으로 사직을 바루었고, 이제 밖으로 역당을 토멸한다. 그 군기로써 이 악적 이요헌의 목을 높이 내걸어, 중외를 모두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기치로 삼으리라!”
이만 집에 가고 싶었던 토벌군, 특히 함경도 지방군은 김조순이 서울에서 다시 기세를 올렸다는 말에 짧은 욕설과 탄식, 신음이 뒤섞인 개탄을 내뱉었다.
사람의 말로 번역하자면 ‘그냥 한양에 쳐들어가서 김조순의 모가지를 따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까?’ 정도의 의미였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병조 판서 남공철이 어느 날 김조순을 찾아왔다.
***
남공철은 예전 성균관에서 시준과 비눗방울로 인연을 맺고, 만수절 때도 시준을 사신행에 포함시키는 통에 모든 연행사(燕行使)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희귀한 경험을 했던 그 사람이다.
그는 돌아와서 이공이 나라를 결딴낸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으며, 정약용보다 한 발짝 더 빨리 강철군주 이공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군 이공이 왕 시절 최후의 위엄을 떨쳤던 평양 원정 때도 따라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김조순도 아직 그를 조정에 남겨 두었다. 남공철은 이공을 버렸을 뿐 김조순과 한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김조순 입장에서도 그의 귀한 재주를 쓰지 않기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 국왕 이품은 대국적인 시야에서 반대파를 용납한 김조순의 도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얌전히 김조순의 손아귀 안에 들어오는 대신 자꾸만 되지도 않는 정치적 술수를 시도하며 꿈틀대고 있었다.
이품 정도의 용렬한 자가 시도하는 일이야 그게 무엇이건 김조순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품이 김조순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마구 우대해 주고 있는 반(反) 김조순파 조신들은 얘기가 다르다.
옛 남인과 백탑파, 청론(노론 북학파) 등은 ‘어차피 허수아비 왕이라면 내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김조순을 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인사가 바로 병조 판서 남공철이다. 그러나 새 국왕 이품이 비 노론계를 결집하려 나댔을 뿐 남공철 자체는 최근까지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안 그래도 바쁜 김조순 역시 특별히 남공철을 건드리지는 않았는데, 그가 지금 비변사도 아니고 자택에 찾아온 것이다.
김조순은 남공철이 꺼냈거나 꺼낼 수 있는 주제를 더듬어 보고 여남은 가지 정도의 각기 다른 연습을 머릿속에서 마쳤다. 그러고는 남공철의 방문이 전혀 의외이며 자신은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병조 판서를 맞았다.
“병판 대감께서 어인 일이시오. 일단 들어오시구려.”
김조순은 남공철을 맞아들였다. 마치 자기 집에 사적으로 찾아온 손님을 맞는 태도였다. 남공철은 그 뻔뻔한 낯짝에 침을 뱉고 싶었다. 누가 보면 임금을 농단하는 권신 노릇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놈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남공철은 김조순이 내어놓는 술상이며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선비의 한담(閑談)으로 유도하기 위해 하인 시켜 방에 들인 진귀한 부채며 서책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병조 판서는 주객을 나누어 자리하자마자 얼음장 같은 얼굴로 용건을 꺼냈다.
“함경도의 토병은 이제 그만 북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국경을 너무 오래 비워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니와, 함경도 곳곳에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바람에 병사들의 예기가 이미 흩어졌습니다.”
김조순은 장죽을 몇 번 빨고 나서야 남공철의 지적에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오셨소? 결단이야 주상 전하께서 하시겠지마는, 이 사람의 생각에 함경도는 과히 걱정할 것이 없소이다.”
작년 겨울, 혁명군 1영대장 백윤구가 지도한 인민의 일제 봉기로 함경도는 대부분의 군에서 수령이 죽거나 쫓겨났다. 김조순이 보낸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은 겨우 목만 붙여 탈출한 상황이었다(그래서 범북방 씨름대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이영은 자신이 그 흉악한 비적 떼의 손에서 얼마나 극적인 과정을 거쳐 빠져나왔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문제는 김이영의 관찰력이 관찰사라는 직함을 감당하기에 아무래도 모자랐다는 사실이었다. 김이영의 보고는 김조순으로 하여금 함경도의 난리 통을 그저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한 민란쯤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김조순은 함경도의 인민 봉기와 시준을 연결 지을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일을 시준이 조종했다는 증거가 나왔다면 아무리 김조순이라도 다른 일을 희생하고 먼저 함경도로 군사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조선에서 민란은 일상생활의 한 종류 같은 것이어서 함경도의 난도 그 중 하나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 뒤에 시준이 ‘조정에서 받은 관북순무사의 권한으로 함경도의 난리를 진정시키러’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김조순은 시준의 의도를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생각했다.
시준은 평안도에서 그러했듯 장사치로서 함경도에서 이권을 취하러 무리를 끌고 나아간 것이다. 이해 못 할 노릇도 아니었거니와 자신이 용인한 일이기까지 했다. 김이익과 말했듯 나중에 삶아 버리면 그만이고, 따라서 지금 조정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남공철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저도 귀가 있소이다. 대감. 풍문에 듣기로 옛 예조 참판(정약용)의 제자인 정시준이 무슨 혁명막부의 주석이라 하는 자리를 꿰차고 평안도를 제 손으로 쥐락펴락한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다스릴 자도, 병사도 없는 함경도까지 그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째서 수령을 파견하지 않으십니까? 수령이 어렵다면 절도사와 토병이라도 되돌아가게 해야 하오이다. 자칫하면 경기와 관북(함경) 양쪽에서 대체를 실패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대놓고 조정의 지배를 벗어난 양계 사람들을, 왕통이 다시 선 지금 왜 바로 토벌하지 않느냐는 의문은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조순은 당연히 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물론 김이익하고나 했던 말을 묘당에서 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수준의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먼저 평안도는 현재 공식적으로 ‘수령이 없으며’, 평서대원수 정시준이 임시로 평안도에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관북순무사의 인장도 있는 만큼 시준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장악하는 활동은 모두 아슬아슬하게나마 정당하다.
주석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조신들은 그게 장사치 우두머리쯤 되는 자리로 알고 있었다.
평안도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혁명’ 두 글자가 조정에서 공박의 대상이 되었으나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이기 때문이다.
전왕을 아무 이유 없이 붙들고 있다는 문제도 ‘평양군 이공은 현재 평양에 유배 중’이라는 선언으로 해결해 버렸다.
이러한 공식적 설명을 만들기 위해 김조순이 한 노력은 말로 다 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남공철도 당연히 그런 조정의 공식 입장을 알고는 있다.
그리고 지금, 남공철은 그따위 개수작 늘어놓지 말고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 보라며 찾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개수작인 거 알고도 참았지만 남공철은 그러지 않기로 한 셈이다.
김조순은 잠깐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했다. 남공철이라면 사욕으로 대국을 망칠 위인은 아니니 김이익과 같은 정도의 이야기는 해 주어도 될 것 같았다. 토사구팽 얘기만 빼고.
“먼저 가슴과 배의 우환을 치유하고 그다음 종기와 버짐을 살피는 법이오. 폐주를 붙잡은 평서대원수(정시준)는 그 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고, 양계에서 그가 사익을 취하였다면 나중에 교서 한 장으로 꾸짖고 벼슬을 거두면 될 일. 지금 공공연히 역적을 비호한 경상 감사나 대박으로 나라를 침노하는 양이들이 더 급하오.”
허나 남공철에겐 통하지 않았다. 김조순은 지금 시준을 놔두기로 결정하고 나서 이유를 만든 것이지 이유가 있어서 시준을 놔둔 게 아니다.
남공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김조순이 직조해 놓은 정교한 논리를 깡그리 무시했다.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핑계를 찾아[吹毛覓疵] 가져다 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시준을 모른 척하시는 진짜 연유가 무엇입니까? 공자(김유근)가 평양에 있어서입니까?”
바로 그런 질문을 기대했던 김조순은 차게 웃었다.
“대감께서 나를 너무 졸렬한 자로 보시는군. 왕비였던 딸도 죽이려 했던 내가 무지무능(無智無能)한 아들은 또 유달리 걱정할 것 같소이까? 내 맹세컨대, 이 모든 어지러움이 다스려지고 아들이 돌아온다면 내가 바로 그날 칼을 던져주고 자결케 할 것이오!”
절대 거짓말이 아니다. 김조순에게는 이 모든 개판의 직접 원인이 된 큰아들의 목숨 따위 전혀 가치가 없었다.
그저 합리적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정치, 외교, 군사 어떤 면에서 보아도 정시준은 차순위로 미뤄도 되는 사안이었고 김유근의 석방은 그 과정에서 얻어걸리는 부산물 정도에 불과했다.
남공철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김조순을 바라보았다. 조선에서는 상당한 무례에 해당하는 동작이고 김조순이 남공철의 윗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김조순이 이때쯤이면 화를 내고 쫓아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 시점, 남공철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일전 만수절 진하사로 북경에 갔을 때, 경사에서 큰 소란이 났었지요.”
“알고 있소.”
“그때 조정이 워낙 어지러워 사람들이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당시 사람들을 일깨우고 이끌어 사교의 역도를 토벌하기로 결단하고 나아가 보전(寶殿, 천궁보전. 자금성의 내성)을 지켜낸 것은 오로지 정시준 한 사람의 공이었습니다.”
김조순은 가만히 남공철의 말을 들었다. 그도 시준이 북경에서 소신교위 받아 온 것은 알지만, 젊은 혈기로 선봉에 민첩하게 서서 칼질 몇 번 잘한 것쯤으로 생각했다. 시준의 재주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리라 여겼기에 크게 주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공철은 시준이 도구가 아니라 목적을 정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신단의 정사로서, 일개 장사꾼 상놈 하나가 ‘토벌하기로 결단했다’고 – 다시 말해, 자기는 시준에게 따랐을 뿐이라고 – 말하는 것은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으나 남공철은 담담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게 마련. 작금은 양란 이후 없었던 풍파의 시절이며, 한고조가 그러했고 명태조가 그러했듯 영웅호걸이 씨를 가려 가며 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소관은 대감께서 기왕에 바람과 불씨를 잠재울 양이시거든 단단히 꽉 밟아 두시기를 바랄 뿐이오이다.”
‘정말 그 장사치가 우리 지배자의 머리 꼭대기에 설 영웅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말하는 것인가?’ 따위로 되묻는 것은 남공철에 대한 지나친 무시다.
남공철은 그런 순진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김조순이 시준을 일개 장사치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이상의 평가를 촉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조순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만무일실이라, 어찌 그리하지 않겠소. 내 대감의 고언을 꼭 새겨들으리다.”
남공철은 일어나서 읍하고 나가 버렸다. 김조순은 남공철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남공철의 충고라면 한 번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고민할 가치는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조순이 대오각성하여 함경도 군세를 당장 돌려보내고 시준에게 힘을 집중할 리는 없다. 김조순이 고집스러워서가 아니라, 시준에 대한 김조순의 정책에서 정시준의 능력이나 위험성에 대한 고려는 원래 비중이 크지 않았다.
김이익과 논의할 때부터 이미 고려되었던 일이다. 시준을 치면 적을 하나 더 만들고, 김회연에게 후방을 내주게 되며, 영길리 상대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게다가 평안도에서 불장난하다가는 영국과 청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확률도 높다.
시준이 어떤 사람이건 김조순으로서는 이것밖에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내달린 순간 김조순은 갑자기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밖에 수가 없었다……?’
김조순은 예전 왕위를 저울로써 희롱하던 그때의 심상을 떠올렸다.
당시 김조순은 장기판을 앞에 두고, 자신과 시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장기말로 움직였다. 지금의 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직 반상 반대편의 맞수가 퇴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조순은 자기가 ‘가능한 유일한 길’을 택했다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유일한 길이라면 고민이 필요 없어 보인다. 그게 나쁘다면 모를까, 지금으로 봐서는 외통수는커녕 너무나 이치에 합치하는 단 하나의 길이다.
하지만 김조순은 장기뿐만 아니라 바둑에도 조예가 있었다.
‘축…….’
김조순은 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살려면 단 한 군데밖에 둘 수가 없고, 그러다 보면 점점 커지다 끝내는 잡힌다. 따라갈수록 손해다.
그래서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잘 닫힌 축머리를 알아차리자마자 그냥 그 돌들을 포기한다. 이건 혁기(奕棋)를 불과 며칠 배운 어린아이조차 아는 일이다.
그런데 김조순은 지금 상황이 축인지 아니면 묘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조순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번 시준이 보낸 수탉이 떠오르자 그는 초인적인 절제력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지금 이 번잡스러운 생각은 병판(남공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일어난 걱정이다.’
김조순은 감히 장사치 상놈이 자신의 맞수 정도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공정한 사람이었다.
아니, 공정을 넘어서 혁명적이라고 해도 좋다. 현재 조정에서 이런 인물은 김조순 외에 남공철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 미국에 가서 흑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런 김조순조차도, 시준이 ‘자신의 맞수’가 아니라 ‘자신보다 고수’라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바둑의 축이 그러하듯, 몇 수만 더 둬 보면 김조순의 선택이 옳았는지 글렀는지는 바로 드러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몇 수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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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거열형은 조선에서 공식적 형벌이 아닙니다만, 그냥 사형으로 처리하기에는 괘씸한 죄, 그러니까 반역죄에 대해서 주로 시행되었습니다. (도적에 대해서도 거열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2. 창에 꽂아서 들이댄다는 얘기는,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때 대장이던 드 로네이 후작의 머리를 시민들이 잘라 창에 꽂고 팔레 루아얄 광장을 지나가다가, 앙리 왕의 동상 앞에서 그 창을 절하듯 숙이면서 "후작, 당신의 주인에게 인사하시오!" 라고 조롱하여 외쳤던 일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