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37.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2)
주석이 부른다는 소리에 들어왔던 정약전은, 밥을 손으로 집어 먹고 있는 시준을 보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영길리인과 통한다 해도 오랑캐의 습속마저 다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석 동지.’라고 하여 시준의 복장을 뒤집어 놓은 다음에야 설명을 들었다.
정약전은 노인 특유의 느린 사고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는 노인이되 범용한 노인이 아니었다. 정약전은 그렇게 오래 생각하지 않고 시준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과연. 이는 내 아우, 아니, 외사통호국장 동지(정약용)가 정치국 회의에서 고한 그 일과 엮어 볼 수 있겠소이다.”
시준은 정약전을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 동지의 생각이 바로 나와 같습니다.”
***
지금 두 사람이 말하는 일은, 두 달쯤 전 – 그러니까 작년 경상 감사 김회연의 사자로서 왔다가 이강회의 가짜 영길리 함대에 놀라 도망쳤던 이요헌의 얘기였다.
당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하고 통영에 돌아갔던 이요헌은 김회연에게 통사정하여 배를 한 척 더 늘렸다. 배에는 큰 총통을 가득 싣고 격군도 많이 실었다.
김회연은 사부(射夫, 궁수)와 조총수를 더 많이 데려가는 게 어떤가 하였으나 이요헌도 무장으로서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 희한한 객장(客將) 처지여서 눈칫밥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영길리 함대를 상대로는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쓸 데가 없소이다. 다가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저 총통을 쏘아 잠시 주춤한 사이 격군을 몰아대어 빨리 달아나는 것만이 상책이오이다.”
없어 보이기는 해도 조선 수군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전술이다. 김회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도주 준비를 갖춰 나온 이요헌은 두 번째 항해에서는 철저히 복잡한 해안과 군도를 이용하는 경로를 잡았다.
과연 경기도 수군절도사 경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관군과 영길리군을 모두 피해 다니느라 좀 느려지기는 했으나, 얼마 전 이요헌은 기어코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혁명해군은 연이은 조운선 약탈 성공에 기세를 올려 한창 평양 앞바다에서 조련 중이었다.
그러나 혁명해군이 체계적 해안 경계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영국 해군도 혁명막부를 지켜주기까지 할 은혜는 없었다.
그래서 주춤대며 나타난 경상우수영 전선 4척은 일단 아무 공격을 받지 않았다.
영국 해군이 없던 건 아니었다. 천진 인근에서의 일진일퇴 때문에 영국군은 차분히 장기전을 준비하며 병사를 교대로 삼화로 돌렸다가 다시 출격하는 상태였고, 옆에서 친근하게 아무 영어나 지껄이는 조선인들이 자기 깃발 걸고 해적질을 하는 중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재정비 과정에서 잠시 돌아와 있던 존 메이틀랜드 소장은 이요헌의 경상우수영 전선을 보게 되었다.
애들 낙서 수준의 유니언 잭을 돛 가득히 채운 조선 배는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메이틀랜드 소장은 화를 냈다.
“조선놈들이 우리의 신성한 국기를 위조하다니 꿍꿍이가 뭐냐, 해적질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맞다. 조선인들은 해적질하려고 유니언 잭을 위조했다. 영국 해군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정확한 판단력이었다.
그러나 그 범인은 경상우수영이 아니다. 지금 메이틀랜드 소장의 옆에서 매우 놀란 척하고 있는 혁명막부의 농상진흥국장 이강회 쪽이다.
이강회는 이때 혁명해군 1함대의 임시 제독으로서 삼화에 있었다. 그는 그냥 메이틀랜드 소장의 의견이 옳다고 해 주고 이 자리에서 경상 감사의 전선 4척을 전부 수장시킬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자고로 범인이 잡히면 수사를 더 안 하는 법. 저 멍청한 놈들만 확실하게 파멸해 주면 앞으로의 해적질이 더 쉬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강회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준이 일전에 말한 대로 저들이 경상 감사의 사절이라면 함부로 죽게 놔둬서는 곤란하다.
이 시점에서 주석은 아직 경상 감사 김회연을 어떻게 대할지 확정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강회는 이요헌이 자신에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메이틀랜드 소장에게 기름칠을 시전했다.
“지금 조선국 사정을 아시지 않소. 오는 길이 워낙 험하니, 다른 지방에서 주석을 보러 온 사람들이 강대한 영길리 수군의 위엄을 임시변통으로 빌리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인정으로 헤아려 주시지요.”
라는 둥 오만가지 아부를 해대자, 영국 해군은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특별히 양해’해 주었다.
그리고 이요헌과 조라포 만호 김진락을 비롯한 경상 감사의 사절은 그 분풀이를 대신 받게 되었다.
다만 예전 홍총각이 영국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장독에 넣고 시멘트 부어 바다에 던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여기엔 지금 홍총각도 없거니와 혁명의 대의를 따르는 인민들이 모두 그렇게 폭력적이지는 않다.
현재 혁명해군 1함대의 제독 대리(提督代理)이며, 더하여 조선 수군 때문에 고향 떠나야 해서 감정이 좋을 리가 없던 문순득이 이강회 대신 썩 나섰다.
그는 친절하게 물었다.
“왜 배에 그 지랄을 하고 예까지 오셨소? 그릴 거면 좀 잘 그리던가. 꺼병이 새끼 덤불 이고 주저앉듯 꼴같잖은 그림 덕지덕지 칠하고 도적놈처럼 숨어들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외다.”
문순득만이 아니라, 그 옆에 모여 서서 있는 대로 흰자위를 드러내고 침을 탁탁 뱉는 ‘평안도 놈’들이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삐딱한 태도에 이요헌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요헌은 일단 칼을 뽑으려는 김진락을 제지했다. 주변에 몰려든 사람은 군사가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숫자만 해도 이미 위협적이다. 게다가 그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이요헌은 조선 무관의 요직을 거의 다 거친 사람이고, 영변 부사도 그 경력에 들어 있다. 순조, 아니 평양군 이공이 폐주만 안 됐어도 한성 판윤에까지 오르는 목민관의 재목인 것이다.
그래서 이요헌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너희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본관은 수경포도장 이요헌이다. 그리고 여기는 조라포 만호이며, 우리는 경상 감사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일개 백성들이 간여할 일이 아니므로, 경을 치기 전에 그 주석이라는 자더러 어서 나와 보라 해라.”
안 그래도 시비 걸 곳만 찾고 있었던 혁명적 분노가 폭발했다.
“이게 지금 미쳤나?”
“감사는 무슨 개뼈다귀 같은 감사야. 임금도 파면시킨 우리 주석 동지께 뭐라고 지껄였냐?”
“어딜 코딱지만 한 쪽배 끌고 와서 유세야? 야! 대포 끌어내! 이 새끼들을 오늘 살려 보내면 내가 바로 반동이다!”
“대포까지도 필요 없지! 어이, 장독하고 그 ‘쌔맨’인지 뭔지 갖고 와라! 이 어르신이 친히 착착 담아 삼화 앞바다에 묻어 주겠다!”
어느새 그들의 주위에는 세 자릿수를 헤아리는 적대적 인간들이 우글우글 에워싸고 있었다. 이요헌은 멈칫멈칫 물러났다. 어느새 칼을 뽑을 생각을 못 하게 된 김진락도 함께였다.
죄 지은 것 없는 경상우수영 수군들은 애초부터 조선군답게 평화주의자였다. 그들은 상관의 자발없는 입놀림을 원망하며 하나둘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혁명 해군은 상대의 약점을 노련하게 잡아내었다.
“이 새끼, 어딜 도망가!”
프랑스 수병들이 훈련을 시켰든 어쨌든 혁명군의 주축은 만상 깡패들이다. 그들은 남이 보이는 공포를 초감각적으로 잡아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도망치려던 수군 군졸들은 가장 먼저 소리개 만난 병아리 꼴이 되었다.
“이 반동 같으니! 죽어라, 이놈!”
“혁명군 앞에서 유세 떨고 살아남은 반동이 없었느니라!”
이요헌은 보란 듯이 매 맞는 부하를 보고서도 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지도 못하던 경상우수영 군졸들이 이요헌과 김진락을 제물로 바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쯤, 이강회가 어디 갔다 온 척 시침 뚝 떼고 나섰다.
이요헌은 아까와는 딴판인 태도로 이강회에게 매달렸다. 이강회는 아까 영국 해군이 자기에게 했던 것 같은 거드름을 피우며 그 폭행을 말렸다.
‘사소한 언쟁이 있었지만 경상 감사의 사절이 삼화부에 들어왔다’는 보고는 곧 시준에게도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서 농상진흥국장의 유연한 보고는 사소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시준은 그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긴 우수영 사람들을 위로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서신이야 받았지만 어차피 내용은 시준의 예상대로 동맹 제의여서 놀라울 것도 없었다. 당시 시준은 오히려 그들을 직접 만나는 일조차 삼가며, 심지어 이강회에게 그들을 너무 잘 대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칫하면 김조순에게 내가 배반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이강회는 자기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러고는 신나서 그들을 더욱 구박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결국 이요헌 일행은 평양성에 들어와서도 주석을 만날 수 없었다. 옛날 대비와 왕비가 유폐되어 있던 바로 그 집에서 조밥이나 뜨는 신세가 되었을 뿐이었다.
***
김조순에게 사실상 반기를 든 영남의 사절이 평양에 와 있다. 그리고 김조순은 지금 함경도 군세를 바로 그 영남으로 돌리려 한다.
그대로 놔두어도 시준에게는 손해가 아니다. 하지만 불타는 의주 만상의 혼이 시준을 부추겼다. 뭔가, 뭔가 더 이득을 뽑아낼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준 앞에서 정약전이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야겠군요. 순망치한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김조순이 경상도를 토벌하게 되면 다음은 우리입니다. 마침 저들도 우리와 손잡으려 하니 잘된 일이오이다.”
시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강회가 옥구현(군산)에서 처음 이요헌을 마주치고 돌아왔을 때 생각했듯이, 지금 시준은 근왕당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인간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적이 된다. 그리고 저쪽도 바보가 아니라면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회연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요헌을 통해 부담스러운 요구를 해 왔다. 시준은 만지기 싫다는 듯이 손가락 끝으로 김회연의 서신을 잡아 올려 팔랑거렸다.
“하지만 경상 감사는 평양군…… 이공을 석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자들과 손잡을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방우준의 첩보가 도착하기 전까지 시준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김회연은 이공의 석방이라는 상당히 강도 높은 동맹 조건을 내세워 시준을 떠보려 했다.
시준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김조순과는 완벽하게 관계가 파탄 나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아직 원한을 기억하는 평양 인민들이 시준을 ‘불신임’할지도 모른다.
대비와 왕비 때처럼 뻔한 탈출극을 연출하기도 불가능한 것이, 이공은 지금 다리가 하나뿐이다. 아무리 이공이 도주 천재의 혈통을 타고났다 해도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시준이 앙감질로 서울까지 간다는 말은 믿겠지만 이공이 그랬다는 말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아예 김회연의 동맹 제안을 무시해 버리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게 속이 편하기도 힘들다. 방금 정약전이 지적한 것처럼, 새 왕을 세운 김조순이 경상도를 통합해 버리고 나면 시준은 무슨 수를 써도 조정에 대적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김회연은 지금 자기 자신을 인질 삼아 시준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협박에 굴복할 자들은 여기 없다. 정약전이라고 해서 김회연과 정말 동맹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대원칙은 말 그대로 대원칙일 뿐이지 지금 상황에서는 적용이 안 된다.
“손을 잡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김조순이건 김회연이건 모두가 한가지로 반동일 뿐. 여기에서는 이이제이의 책략을 써야지요.”
대부분의 혁명막부 치하 인민들은 반동이라는 말을 그냥 ‘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썼다. 그러나 정약전은 정약용이나 푸셰 등과 함께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시준은 간담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급한 것은 경상 감사지 우리가 아니오이다. 김조순은 경상도를 먼저 치려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피아의 강약이 너무 부동이면 경상 감사가 그대로 세를 들어 김조순에게 바치고 항복할 수도 있으니……. 티 나지 않게 도와야 하겠군요.”
“티 나지 않게 돕는다?”
“천주의 말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김조순의 세가 될수록 약해져서 경상 감사와 양패구상(兩敗俱傷)하는 것이지 감사 김회연의 환심을 얻는 것이 아니올시다. 뒤에서 조용히 김조순의 손발을 잘라내도록 하지요.”
천주가 가르친바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이 해야 하는 일은 선행이지 뒤치기가 아니다. 정약전은 충성스러운 선비가 아니었듯이 신실한 천주교 신자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주석 정시준도 그 둘 다 아니기는 매한가지다. 시준은 정약전을 부르길 잘 했다고 느끼며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에 있는 박 행수(박득출)에게 연락을…….”
“아니오. 물론 박 행수가 움직이면 김조순의 치중 상당수를 끊고 아래위가 연결되지 않게 만들어 매우 곤란케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주석께서도 바로 역적이 됩니다. 서울 오죽당의 안전도 장담하기 어렵고요. 비밀한 사람들을 써야 하오이다.”
여기에서 역적은 새 국왕 이품의 역적이라는 의미다. 이미 왕에게 이형 어쩌고 한 시준으로서는 그 악명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악명이 가져올 여러 손해는 두려웠다.
정약전은 손을 모아 마주 잡았다. 기도하려는 동작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앉은 채로 방만하게 허리를 펴고 먼 곳을 돌아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결국 요체는 김조순으로 하여금 경상도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만큼 약해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여기에서는 선전선동국장 동지(푸셰)를 부르셔야 하겠소이다.”
곧 조제프 푸셰가 불려왔다. 얘기를 들은 푸셰는 시준이나 정약전이 뭔가 해설을 덧붙이기도 전에 대답했다.
“우리가 잘 ‘도와주면’ 조선 왕국 정부의 세는 많이 꺾일 것이고, 김회연이라는 자는 당장 항복하기도 아까워질 테니 아마도 맞서 싸우겠군. 그러면 둘 다 힘을 많이 소모할 터. 당연히 우리가 유리해지지. 도움을 줌으로써 곤경에 빠트린다……. 아주 좋아.”
프랑스어로 중얼대는 푸셰의 모습에 시준은 정약전을 쳐다보았으나, 정약전은 시준과 달리 천재였다. 그는 이미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푸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정약전이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씀대로올시다. 국장 동지. 역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요.”
“나를 뭘로 보는 거요? 물고기에게 수영을 가르칠 필요는 없는 법[Il ne faut pas apprendre aux poissons à nager]. 내 성미에 아주 맞는 일이야. 마침 이때를 위해 길러 둔 자들이 있소.”
“길러 두었다고요?”
“그래요. 혹시 잊은 건 아니겠지요? 나는 대프랑스 제국의 경찰장관이었소. 지금 와 있는 조선 수도치안총감(수경포도장 이요헌)도 바로 내게 지식을 전수받았지. 파괴공작, 첩보, 납치, 암살, 정찰……. 뭐든지 이 혁명정부에서 긴요하게 쓰일 거요. 아, 오해는 하지 마시오. 어디까지나 의장(주석)의 명령을 받고 한 일이니.”
정약전은 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준은 자기까지 저 협잡꾼 늙은이와 한통속으로 엮이는 게 두려워서 황급히 말했다.
“분명 정보부서가 필요하다는 말은 했지요. 하지만 그건 혁명군의 소관일 텐데…….”
“혁명군에서 내게 요청했네. 뭐, 다른 사람 험담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에 관한 경험이 있는 자가 없잖나. 아무래도 미국이건, 프랑스건 혁명정부란 게 원래 의욕에 비해 인재가 모자라게 마련이니 부끄러울 일은 아니야.”
생각해 보니 함경도 일제 봉기를 지휘한 백윤구는 현재 혁명군 제1영대장이며, 원래 중앙인민회의 검사위원회 소속으로서 푸셰와 한솥밥 먹던 사이다.
시준과 정약전 모두 ‘그럼 그건 네가 여차하면 혁명막부를 뒤집어엎으려고 길러 둔 자들이 아니란 말이렷다?’라는 멍청한 질문을 삼갔다.
지금 푸셰는, 그 특유의 자기 과시가 좀 섞였기는 했지만 이 ‘요원’들이 혁명군에 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건 권력을 탐할 의지가 없다는 세련된 표현이다.
‘하긴 쟤 입장에서는 제3세계 빈곤국에 자원봉사 나온 기분일 테지. 굳이 여기에서 정치권력을 쥐려 할 동기가 없다. 조선에서 출세를 해 봤자 여기가 조선이고 19세기지.’
현대 기준에서 이 시대는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생활수준에 큰 차이가 없다.
프랑스 제국 황제라고 해도 현대의 중산층보다 더 안락한 생활을 하진 못한다. 가진 부의 절대량은 많아도 그것으로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한계가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파리 빈민의 생활수준 차이는 현대 도시 빈민과 포브스 50대 부자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그중에서도 윗사람부터가 손수 검약을 실천하는 도학국가 조선은 더하다.
흉년이나 국상으로 왕이 반성하고 절약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깎아내는 부분이 ‘먹을 것’이란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럴 때 편리하게 감액할 비(非)필수적 사치품이라고 할 만한 게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설사 시준이 조선을 정복한다 한들 그게 조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푸셰를 총리 시켜주건 장관 시켜주건 그 체감은 기껏해야 조밥이 쌀밥 되는 정도다. 따라서 푸셰는 초연할 수 있었다.
대우가 심각하게 서운하지 않는 한, 푸셰는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순수한 대의를 위해 일할 것이다.
과연 푸셰는 별 미련 없다는 듯이 시준에게 공을 넘겼다.
“음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양지의 동지들보다 더 확고한 자부심이 필요하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테니. 마침 잘 됐어. 이들의 이름을 주석이 지어 주었으면 좋겠군.”
이건 군에 대한 권한이 시준에게 있음을 확정하는 대사다. 정약전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내친김에 혁명군의 위격도 바르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본래라면 군사란 나라를 다스리는 방편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가 문보다 높을 수 없지만, 혁명막부를 만든 혁명군의 사기도 생각해야 합니다. 중앙인민회의, 막부, 그리고 군이 세 솥발처럼 든든히 인민을 지탱해야 하오이다. 총괄서결국이나 선전선동국처럼 국(局)의 이름을 붙여 동등한 부서를 만드시지요.”
정약전의 말은 시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김조순 쪽 일은 푸셰가 호의적으로 처리해 주었으니, 그가 한발 물러난 동안에 푸셰의 첩보부서를 관할할 군에 대한 장악을 명확히 하라는 얘기다.
그러나 시준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주석답게, 이 시점에서 자신의 군 장악보다는 인민들의 취향을 고려하고 있었다.
지금은 존재조차 비밀인 부서라 해도, 시준과 동료들이 국가 건설을 준비하는 이상 언젠가는 양지에 드러내야 한다.
선전선동국처럼 (시준이 생각하기로) 조선 사람들에게 수용되기 쉬운 이름이 필요했다. 향토적이면서도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 영화에서 본 무슨무슨 방패니 검이니 하는 것을 떠올렸던 시준은 곧 그런 미 제국주의적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자, 그럼…….’
아직 나라가 없으니 ‘국가’정보원이나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이름은 쓸 수 없고, 중앙‘정보’부도 정보(情報)라는 말이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달라 낯설다.
결국 시준의 생각엔 이것밖에 없었다. 타락한 시준은 서안에 팔꿈치를 괸 채 깍지 낀 손을 턱에 받쳤다. 시준이 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 탁하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혁명군 정찰총국(偵察總局)이 어떻겠소?”
잠시 침묵하던 두 사람은 곧 열렬히 찬성했다.
“오호, 그거 아주 좋은 이름이오이다. 주석 동지. 그들은 적정을 은밀하게 살펴 알리는 선봉이 될 것이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째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군. 그 정도면 비밀을 유지하면서도 긍지를 줄 수 있겠네.”
약간 두근두근하며 제시한 이름이었지만 둘의 반응은 시준을 크게 고무시켰다.
‘역시 내 생각대로 지금 조선에서는 그쪽 공화국 같은 센스가 대강 먹힌다!’
정책이 먹힌다는 얘긴 아니다. 자본주의랄 게 없는 조선에서 앞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긴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슬로건 관련해서는 이 방향이 맞겠다고 시준은 확신했다. 역사는 미래인의 무지스러운 횡포로 인해 더더욱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름이야 사안의 핵심은 아니다. 시준은 그 ‘정찰총국’을 만들어야 했던 원인을 잊지 않았으며, 즉각 김조순에게 ‘요즘 인생 참 뭐 같지? 도와줄게.’에 해당하는 타전을 보냈다.
김조순이 기뻐할 것이 분명한 ‘선물’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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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존 메이틀랜드 소장은 암허스트가 처음 조선에 왔을 당시 한 번 잠깐 등장했지요. 당시 영국 해군에서 선상 육박전의 전문가였습니다.
2. 꺼병이는 꿩의 새끼를 말합니다.
3. 정찰총국은 북한 조선인민군의 휘하 부서입니다. 역할은 작중 설명된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하기 때문에 상당한 권한이 있으며,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도 어느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정찰총국장의 임면 발표는 그저 정보기관 수장의 교체가 아니라 북한 대외 정책의 변화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