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37.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1)
가경 17년(1812년) 봄 조선국 한성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역사학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일이었다.
엄숙하고 예의 바른 식전에서 올리는 백관의 찬송이며 답하는 임금의 겸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추잡하고 무례한 비방과 협잡과 지켜지지 않을 약속들이 오갔다.
19세기 초 조선은 혈족, 지역, 학맥으로 구성된 권력 네트워크가 거의 완성되어 있던 시점이다. 이들은 그 그물망 같은 관계망 위를 미끄러지며, 역사에 다시없을 작금의 복잡다단한 상황을 타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한 마디로 표현되는, 어찌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조선국 제24대 국왕, 사도세자의 아들 이병원이 즉위했다.
아니, 엄밀히는 이제 그 이름이 쓰이지 못한다. 병(秉)과 원(源)은 모두 대단히 많이 쓰이는 글자인데 이것을 기휘(忌諱)하게 되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당장 신하 중에 개명해야 되는 녀석도 많다.
이병원 역시 그 점은 알았다. 그는 조선의 언어를 갈아치우느냐 자기 이름을 갈아치우느냐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돈 덜 드는 후자를 택한 태조 이성계, 그러니까 이단(李旦)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야 했다.
이병원은 정조 이산(李祘)의 형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똑같이 시(示)를 부수로 하는 글자를 골라 품(稟)을 새 이름으로 정했다.
딱 거기까지만 보면 국왕 이품의 첫걸음은 실로 선정이었다.
자전을 한참 뒤져야 나오는 글자라, 위에 여쭌다[稟議]는 말을 적고 싶은 사람은 그냥 목(木) 부수의 원래 쓰던 한자 쓰면 된다. 신민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부모가 물려준 이름을 버렸으니 멸사봉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자기 일을 해결하였다면 이제 다음은 가문의 차례였다. 이품은 철딱서니 조카에 대한 처우를 결정했다.
“여러 조신들의 논의에 따르겠다. 전왕(前王) 공(玜)을 평양군(平壤君)에 봉한다.”
‘여러 조신들의 논의’를 상달한 사람인 영돈녕부사 김조순이 공손히 왕 앞에 엎드렸다. 이제부터 이공의 정식 호칭은 조선 국왕이 아니라 조선국 평양군이 되었다(물론 그 평양에서는 여전히 한성 출신 이가놈이다).
선례는 중요하다. 그것은 명분의 면에서 정당성을 제공할뿐더러 실리의 면에서 합리적인 길도 제시해 준다. 역사를 괜히 보감(寶鑑)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병원 또한 조카 자리 빼앗아 앉은 삼촌이 해야 할 일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조선 왕실은 그 일을 이미 전에도 한번 해 봤으니까.
세조는 단종을 유배 보낸 다음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공이 알아서 유배를 가 있는 상황이어서, 이병원은 이공이 지금 평양에 있으니 평양군이라는 악의적 군호를 내려주기만 하면 되었다.
여기에는 개국공신 조준 이래 공 있는 신하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였던 평양군을 이공에게 준다는 이중의 조롱도 있었다. 그래도 세조는 왕 하고 난 뒤 잠깐이나마 단종을 상왕으로 모셨는데, 이병원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나 수양대군 이유보다 더한 놈이라는 희대의 인격적 모욕은 – 차라리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 쪽이 그 상투성으로 인해 덜 거슬릴 것이다 – 이병원에게 억울한 노릇이다. 이병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공은 단종 이홍위처럼 세조에게 관을 스스로 내주어 양위한 게 아니다.
선양을 해 줬다면야 그게 설사 칼 들이대고 받은 것이라 해도 대접해 줄 명분이 생긴다. 그러나 이공은 이미 이병원의 즉위 훨씬 전부터 조정과 사직을 내팽개친 폐주로 확정되었다.
근왕당으로서 김조순과 이병원을 반대하는 경상 감사 김회연마저 이공을 다시 왕으로 세울 생각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경우는 단종이 아니라 연산군의 전례를 따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족보 문제였다.
김조순은 대비와 협상했다. 대비는 무슨 꿍꿍이인지 김조순의 협상에 응했다.
더 이상 정치적이나 생물학적으로 위해를 끼치지 않는 대신에, 대비는 새 국왕 이품을 임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다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교서에서 대비가 효장세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이품과 이산은 이제 모두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역사대로 장조(莊祖)라는 시호를 받은 사도세자는 드디어 자기 아들을 되찾아 오고 덤으로 장남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대비 김씨에게 줄 김조순의 선물로서, 사도세자 시호 올리는 김에 정종 이산의 시호도 정조로 바꿔 주었다. 대왕대비가 된 혜경궁 홍씨가 이 모든 쾌거에 기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김조순은 대비와 협상하여 효장세자의 적통 자체를 통째로 지워 버린 것이다.
이품은 정조 이산을 승계한 것이지 평양군은 누군지 알 바 아니었다. 그런 강철의 프리드리히는 조선에 없었다.
김조순은 의외로 대비가 그런 무리수에도 백기를 들어 준 것에 감사했다. 평상시의 김조순이라면 의심을 해 보았겠지만 지금의 김조순은 그렇게 깊은 심모원려를 펼치기에 기력이 모자랐다.
지금은 나라를 거의 그 혼자 다시 세우는 꼴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약간 안심한 김조순은 돌아와서 딸에게 말했다.
“너와 그 아이의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항상 삼가고 평생 집 밖을 나서지 마라.”
전직 왕비 김씨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한 것처럼 보였지만, 영민한 그녀는 형세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김조순이 딸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여전히 생살여탈권이 그에게 있다는 의미이므로.
김씨는 나인 현완이 과자 봉투 속에 숨겨 전했던 종이쪽지를 떠올렸다. 김씨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절했다.
김조순은 안도와 감사의 표시라 여겼지만, 김씨에게 그것은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품이 후원하는 풍양 조문과 대비 김씨, 그리고 딸 사이에 오간 논의를 모르는 김조순은 딸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는 폐주의 처자인 자기 딸과 외손주를 정법(正法)함은 물론 가족으로서 죄가 있는 자신까지 벌하여 달라 의례적으로 요청했다.
물론 국왕 이품은 그러한 청을 점잖게 물리쳤다.
“지금 내우(內憂)와 외환(外患)이 겹쳐 바야흐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어찌 나라에 공 많은 신하를 벌할 수 있으리. 경은 앞으로도 조정과 임금을 버리지 말고 힘써주시오.”
이전의 이병원이었다면 철기 오천을 도성에 벌여 세우고 자신을 벌해 달라 지껄이다니 조롱과 다를 게 뭐냐며 벌컥 화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이품은 그 정도 자제력 정도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왕의 격이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럴 때의 관례적 조치로 이품은 김조순의 벼슬을 오히려 올려주었다. 지금 김조순을 공박하는 선비도 많았기에 실직(實職)은 어렵지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위는 명목상 서반의 최고위직이다.
중추부는 조선의 군사 통괄기구이고 영중추부사는 그곳의 장이다. 하지만 중추부 자체가 공명첩 돈벌이 외의 가치가 없는 기구여서 정말로 명목상으로만 최고위직이고 실권은 전혀 없다. 당장 시준을 분노하게 했던 이공의 공명첩에 적힌 직책이 동지중추부사다.
그러나 김조순이 뒷방으로 물러났다는 어설픈 예측은 틀렸다. 그는 시준 같은 상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원래 역사나 지금이나 김조순의 권력은 벼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김조순이 명사이기에 벼슬을 하는 거지 벼슬을 해서 명사가 된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의외로 김조순은 정승직을 맡은 적이 없다. 그는 실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김조순에게 필요한 건 비변사 제조나 군영 대장처럼 실제 필요한 직책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승이 아무 의미 없는 자리라는 건 또 아니다. 그래서 김조순을 도왔던 김재찬은 영의정에, 이시수는 좌의정으로 각각 한 계단씩 올랐다.
도읍의 역적을 때려잡은 한성 판윤 김이익의 경우도 가자가 논의되었으나 그는 김조순을 만난 자리에서 그것을 거절했다.
“이 늙은이 살날 며칠 남았다고 또 무슨 벼슬을 받겠는가. 아직 도성에 이요헌의 잔당이 남아 있네. 내 여생은 나라를 위해 쥐새끼들을 깨끗이 쓸어내는 비질에 바치겠네.”
내가 도성의 치안과 폭력을 쥐고 있어야 네가 만일의 경우를 당하지 않는다는 김이익의 암시는 김조순도 알아들을 만했다.
설마 자기 딸과 자기가 세운 왕이 참여했을 줄은 몰랐지만 김조순도 풍양 조문의 불만은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조순도 잠자코 그 뜻을 따랐다.
결국 김이익은 그대로 한성 판윤에 머물렀으며, 김이익이 부리는 무뢰배들에 의해 한성 부민들이 당하는 고통도 특별히 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수신에 이어 제가(齊家)를 마쳤다면 이제 치국(治國)이다.
김이익이 말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북쪽의 소위 혁명막부와 그 수령 정시준이라는 자는 어쩔 생각인가? 북한산성의 총융청도 곧 떨어질 것 같다고 하던데. 끝나는 대로 함경도 군세를 돌려 평안도를 치겠는가?”
김조순은 고민해 보았다. 한숨 돌리고 나니 아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김유근은 아직 거기에 있다.
물론 김조순이 어떤 인간인데, 아들 때문에 평안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부친을 실망시킨 아들 김유근은 김조순에게 있어 여러 가지 고려 사항 중 하나 정도의 무게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김조순은 곧 아들 생각을 스쳐지나가듯 잊어버렸다. 김조순이 평안도를 당장 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많았다.
지금 청에 왕 바뀌었다고 당당히 보고할 처지가 안 되는 조선은 당분간 청과 마주치기 싫었다. 청 역시, 조선이 영길리 상대할 원조라도 요구할까 봐 귀 막은 채 벽 보고 있었으니 실로 천조와 번국의 이심전심이 이와 같았다.
따라서 평안도라는 완충 지대를 유지할 필요도 있었다. 여진족이 혁명막부로 바뀌고 요(遼)가 청으로 바뀌었다 뿐, 고려 때 거란에 조공 못 바치는 이유로 댔던 변명을 그대로 써먹을 수 있다.
게다가 아직 엄연히 김조순의 ‘우호 세력’인 시준에 비해 더 적대적이고 급한 쪽이 많았다.
“정시준은 아직 왕호를 칭하지 않았습니다. 역심까지는 없다는 뜻이겠지요. 옛 내명부를 의리로 놓아주었고 저는 부절과 인장을 보내어 답하였는데 새삼 급하게 치기는 꼴이 우습게 되오이다. 또 그쪽보다는 지금 딴마음을 먹은 경상도나 조운선을 노략하고 있는 영길리 놈들이 더 우환거리입니다.”
김조순은 ‘영길리 해적의 조운선 약탈’ 때문에 많은 세곡 수송로를 육로로 바꿔야 했다.
아직 서울에 남아 있던 만상 서울지부장 박득출이 그 하청을 맡았다. 이것은 김조순이 당장 시준을 전면 적대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했다.
박득출은 조선 정부 예산으로 평안도에서 공장영선국의 마차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러고는 보부상이며 경상과 손잡고 사업을 개시했다.
다급한 조정이 무는 수수료 이외에, ‘길이 험해 잃어버린’ ‘송구스럽게도 도적에게 털린’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 등등의 가지각색 핑계로 유실된 막대한 쌀이 만상의 손에 들어왔다.
이강회가 철수할 때 생각했던 대로, 아무리 껍데기밖에 없다 해도 기름진 생선은 역시 껍데기부터 맛있는 법이다. 영길리 해적에게 주는 것보단 낫기에 김조순이 참는 것뿐이었다.
“북한산성이 떨어지는 대로 함경도 군세를 경상도로 돌려 그곳을 평정한 다음, 삼남의 수군을 전부 동원해 영길리 해적을 토멸합니다. 영길리군은 거의 전부 천진에 몰려가 있기 때문에 흑산도에는 그렇게 정예한 병사가 있지 않을 겝니다.
그러고 나면 정시준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겠지요. 그다음 상놈에게야 언감생심이지만 남쪽 어느 고을의 군수 자리 하나 줘서 그 도당과 떨어뜨려 놓고, 적당히 때 봐서 해치우면 그만입니다.”
김조순은 시준을 배신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함경도 토병들에게 공언한 ‘북한산성을 함락시키면 돌아가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초개처럼 버리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이익은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신의를 지키는 일은 군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지 그깟 하민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다. 주인 따르는 개를 복날에 패 잡기 위해 고기로 꾀어 묶는 일을 가지고 개에 대한 신의를 어겼다 하는 자는 없다.
김이익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 바쁜지라 둘의 논의는 그쯤에서 끝났다.
국왕 이품이 말한 내우외환에서 내우를 담당하고 있는 혁명막부의 주석 정시준이 그 논의를 들었으면 상당히 아쉬웠을 것이다.
만약 시준이 북경에서 반란군 모가지 베었을 즈음해서 그 제안을 했다면 시준은 정말 치킨의 원한도 잊고 감사하며 받아서 지유랑 친구들 데리고 남쪽 가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지만 지금은 주석으로서 위원회에 출석한 시준은 건조한 목소리로 보고를 마쳤다.
“하여, 영길리국과 청국에서 들여오는 곡식의 양은 보고드린 대로입니다. 이번 보릿고개는 어찌 넘길 수 있겠다 여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강회가 조운선을 털고 한편으로 박득출이 세곡을 횡령하여 갖고 온 쌀은 무역의 결과로 둔갑되었다(마약 거래라서 그렇지 진짜 무역으로 얻은 쌀도 물론 있기는 하다).
어차피 조선 안에서 나오는 쌀이라 넘쳐난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당장 새로 얻은 함경도의 기민을 먹여 살리는 데에는 쓸 만했다.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방청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써 시준의 예술영도에 화답했다.
“정시준 주석 만세!”
“정 진인 만세!”
중앙인민회의 의원쯤 되면 모든 사람의 지위가 수면과 같이 동등하다는 수평도를 익숙히 하여야 한다. 당연히 지금 박수 치는 김개똥과 중국 천자, 정시준 주석은 모두가 같은 신분으로서 만세 소리를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시준은 정감록파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가 모래에서 쌀을 빚는 게 아니라 진짜 피나게 일해서 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보고는 시준만 하는 게 아니다. 이제 평안도에는 고을마다 하나씩은 있다는 야학에서 속성으로 기른 – 시준이 의주 시절 가르쳤던 희만당 제자들이 큰 역할을 해 주었다 – 실무 직원들이 이제 계획대로 막부와 위원회, 혁명군 사무 볼 정도의 인원을 채웠다는 학교위원회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 외 몇 가지 실무 보고가 있은 다음, 시준은 인민회의에서 퇴장하여 주석당으로 왔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때다. 그러나 시준은 밥숟갈을 드는 대신 한숨을 쉬면서 책을 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도저히 여가를 내기 힘든 시준은(물론 지유와 함께 하는 시간은 업무보다 우선이다)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약간 더 부담이 적은 장기적 업무를 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조제프 푸셰가 주었던 나폴레옹 법전이었다.
지금이야 임시조치에 가까운 특별정령으로 누덕누덕 기우고 있지만 언젠가는 정식 법률을 반포해야 했다. 그래서 시준은 일반적인 조선식으로 한 상 잘 차려 놓고 밥 먹을 여유도 없었다.
그는 전직 공무원이었다. 점심시간을 사수하는 각오 하나는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에도 비견할 수 있다. 그런 시준이 이 귀중한 휴식을 버렸을 정도이니 지금 얼마나 사정이 바쁜지 알 만했다.
분주한 시준을 위해 급양과장 기랑이 손에 들고 먹을 만한 점심을 갖고 왔다. 시준은 고개를 들었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기랑을 쳐다보았다.
기랑은 흠칫해서 말했다.
“가수저라(加須底羅, 카스텔라. 여기에서는 빵 일체를 말한다) 만들기에 시간이 없었어. 밀도 없고…….”
“누가 그걸 타박했니. 그냥 신기해서 그래. 다음엔 주먹밥으로 때워도 되니까 괜히 마음 많이 쓰지 말고 편하게 하렴.”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던 시준에 의해 – 시준은 그 정도 사욕쯤은 괜찮지 않느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 요즘 점심은 급양과에서 빵을 잘라 고기며 상추 등등을 끼워서 만들어 왔는데, 아직 천방지축으로 돌아가는 혁명막부 특성상 영국인들에 의한 빵 공급이나 밀 공급도 자주 끊겼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게 또 조선 사람이다. 기랑은 잠깐 고민하다가 밥을 뭉쳐서 빵처럼 납작하게 만든 다음 그 사이에 이것저것 넣어 왔다.
시준이야 한 손으로 들고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데 시준이 ‘그런 모양’을 좋아한다고 잘못 파악한 기랑의 궁여지책이었다.
기랑이 부끄러워하며 나가자, 시준은 그 쌀밥 샌드위치를 보고 피식피식 웃었다. 어째 밥버거 비슷하게 생긴 것이 전생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때 주석에게 보고하러 들어온 혁명군 2영대 2전대 3복대장(2연대 2대대 3중대장) 방우준(方禹準)은 주석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잘된 일이었다. 지금 그는 주석에게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을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준도 방우준이 들어오자 약간 놀라면서도 맞아 주었다. 방우준은 원 역사에서 홍경래의 난을 토벌하는 무신 방우정(方禹鼎)의 동생이며 그 자신도 서울 수문장으로 무과에 입격한 사람이었다.
이강회가 오갈 데 없는 군관 매수하면서 따라온 처지였는데, 서울에 연줄이 있는 방우준 같은 사람들은 도읍에 두고 온 지인들과 소식을 통하며 혁명막부의 귀한 첩보원이 되어 주고 있었다.
박득출이 있긴 해도 그는 사대부들과 직접 사귀기 어려운 신분이다. 그래서 방우준의 실질적 계급은 그저 일개 복대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5대손이 소파 방정환(方定煥)이라는 사실이야 시준으로선 알 턱이 없지만 방우준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사람이었다. 이게 방우준이 복대장 직책으로 주석에게 직보를 하는 이유다.
그 젊은 군관은 약간 머뭇거리며 서울의 소식을 전했다. 내용은 김조순과 김이익이 논의한 바로 그 계획이었다.
시준에게 남쪽 군수 자리 준다는 그 말은 아니다. 북한산성의 총융청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며, 조정은 함경도, 충청도 연합군을 경상도로 진군시키려 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건 비밀이라 해도 이쪽은 실무 준비 때문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다. 방우준도 총융청 토벌군에 포함되어 있는 형을 통해 이 내용을 입수한 참이었다.
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고했소. 복대장 동지. 곧 혁명무력국의 하달이 있을 것이니 지시를 기다리시오.”
“알겠습니다. 주석 동지.”
그러나 방우준이 나간 이후 시준은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를 바로 부르지 않았다.
그가 부른 것은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이었다.
시준은 함경도 군세가 바로 함경도로 돌아오거나 평안도를 들이치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은 시점부터 군대가 아니라 협잡질로 김조순을 무너뜨릴 희미한 기회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실학적 자세로 조운선을 터는 계책을 올렸던 손암 정약전이야말로, 시준이 아는 내에서 가장 그 협잡에 능통한 인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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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오늘 편에 나온 종법과 정치 얘기는 최대한 간략화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문제들이 많습니다만 모두 생략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병원(이품)이 왕위에 오르면서 전왕 순조 이공을 흑역사화 해버리고 그냥 사도세자-정조-(폐주)-자기에게로 이어진 새 혈통을 창조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정조에게 새삼 시호를 다시 올린 이유도, 정조의 호적마저 세탁하기 위해서이지요.
2. 외전이 3편 있었고 해서 다시 설명하자면, 현재 수도권의 상황은 순조가 장악했던 총융청이 북한산성에, 어영/수어청이 남한산성에 들어가 김조순에게 항거하다가 남한산성은 평난도원수 이득제에 의해 털리고 대학살을 당했으며 북한산성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경상도 감사 김회연은 근왕당으로서 영남을 장악하고 시준과 동맹을 꾀하는 중이죠. 청나라는 영국과 박터지는 전쟁 상태.
3. 18세기경부터 조선에 빵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보니 일본식 카스텔라가 대표적이었죠. 가수저라는 카스테라의 음차로 실제 조선에서 불렀던 말입니다.
숙종이 말년에 입맛이 까다로워지자 어의가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을 정도로 안습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나중 가면 실학자들이 책에서 언급할 정도로 퍼진 듯합니다. 이덕무의 책에 카스텔라 제조법이 있는데, 요즘도 유투브 같은 데에서 나오는 밥솥 즉석 야매찐빵 제조법과 비스무리합니다.
그리고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와 이덕무는 이 카스테라와 과자를 네가 먹었니 내가 먹었니 하며 서로 싸운 적이 있습니다. 너는 세번이나 단거 먹었고 나는 안 주고 또 내 과자도 뺏어먹고 어쩌고 하는 서신을 서로 친구들끼리 돌려 험담도 했습니다. 어릴 때 얘기가 아니라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었을 때 얘깁니다. 먹을 것의 원한은 무섭습니다.
4. 이것도 언급되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혁명군의 제대는 방대(분대)-단대(소대)-복대(중대)-전대(대대)-영대(연대) 순으로 커집니다. 명칭이 저런 건 정약용이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어원을 고증하여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인원은 10명, 30명, 120명, 480명, 1,440명이며 오늘 화 시점에서 혁명군은 4개 영대를 보유중입니다.
5. 방우정은 홍경래의 난 당시 정주성 함락에 공을 세운 무장이고, 방우준은 그 동생으로 실제 역사에서도 수문장을 했습니다. 그의 5대손이 방정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방우정은 현재 시점에서 마흔 살 정도로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