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외전) 주석 동지의 혁명적인 하루(1)
조선 혁명막부의 주석 정시준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다.
이제는 자연의 소리 비슷하게 느껴지는 자명종이 계속해서 울렸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말의 의미는 듣기 좋다는 게 아니다.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
닭을 닥치게 하려면 모가지를 비트는 수밖에 없듯이 이 시대의 자명종을 끄려면 부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행히 태엽이 그래봐야 19세기 물건이라 얼마 안 가 그친다는 게 위안이었다.
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만약 21세기 한국에서 지금 저 요란한 소리가 울렸으면 이웃의 집단 린치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조선인, 아니, 전등이 없는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지구인에게는 일반적인 기상 시각이다.
그래서 지유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불편한 몸으로나마 이미 머리까지 빗은 그녀는 이부자리 옆에 앉아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다.
“일찍 일어났네. 조금 더 쉬지.”
지유는 그 말에 뒤를 돌아보며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건 시준이 예상하던 대로 대바늘과 실뭉치였다.
혁명막부가 명색이 인민 구제를 내걸면서 대마나 아편 따위만 파는 건 아니었다(확실히 잠깐 동안이라면 구제가 되기는 했다). 도덕 문제 이전에, 리스크 관리에 많은 암수(暗數)지출이 생기는 밀매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일반 상품의 판매. 그중에서도 시준이 만상 시절 하던 모자 산업은 이제 눈치 볼 것 없이 확산되었다.
조선 본국이나 청이 다 전쟁 중이라 하지만 혁명막부와 전쟁 중인 것은 아니다. 조선의 더럽게 혹독한 겨울 탓에 영국인의 수요도 꽤 있어서 겨울 털모자 판매는 여전히 호황이었다. 청 북부가 전쟁에 휩쓸려 요동 중후소의 모자 생산이 중단된 일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은 덤이다.
그 원료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산 양모가 꽤 들어오고 있었다. 기계 편직은 아직 발달이 일천한 상태라 요즘 평안도 부녀회의 인기 부업이 이 뜨개질이었다.
중앙인민회의 전문위원 김부용이 지휘하는 부녀회는 조선 전통의 삯바느질 경제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각 가정에 일감을 나누어 준 다음 모아서 조합을 이루어 판매하면 단가 경쟁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가격을 보호할 수도 있다.
백발백중회가 기랑을 끌어들였던 것처럼, 평안도 부녀회도 주석의 부인 지유를 부위원장에 앉혀 세력의 확대를 꾀했다.
시준은 그런 속이 뻔히 보이는 감투 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해 주었지만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기랑이 때처럼 이름만 쓰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감투가 있으니 나한테 사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고해바치기는 하겠지. 너도 따로 사람 두지 않고 나한테 얻어듣는 게 좋지 않겠어?’
‘몸도 안 좋은데 너까지 내 일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따로 나가서 일 보는 것도 아니니까. 아프다고 계속 드러누워 있으면 그냥 말라 죽을 것 같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래.’
시준은 기랑과 지유가 단지 자기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나서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녀들 역시 시준처럼 자신의 일을 선택하려 했다. 그 와중 고려 사항에 시준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시준은 그 뒤로 지유의 일에 대해 의료상의 참견 이상은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시준은 이쪽으로 몸을 돌린 지유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복지 혜택을 믿고 하는 짓은 아니었다. 시준은 설사 자신이 폐렴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이 기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잘 잤어?”
“으응.”
지유도 시준을 마주 안아 주었다. 잠자리의 얇은 홑옷 사이로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시준은 안심했다.
안고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자, 지유는 남편을 살그머니 떼어냈다.
“이제 곧 기랑이가 올 거야.”
“그렇게 일찍은 못 와.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과연 기랑은 아직 시준의 신혼집에 오지 않았다. 그녀도 지금 일어났을 테니까.
다만 그러고 있는 시간은 끝내야 했다. 밖에서 쓸데없이 부지런한 소질개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주석 동지. 세숫물을 떠 왔소이다.”
‘젠장할, 저놈의 주석 동지 소리만 들으면 잠이 확 깨는군.’
시준은 고개를 저으며 남은 미련을 다 떨쳐 버렸다. 소질개는 시준이 노비에서 해방시켜 준 이후에도 – 시준의 얄팍한 선의였지만 사실 소질개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해고나 다름없다 – 주석의 제1 몸종을 자처하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시준은 나가서 세수한 다음, 소질개가 잽싸게 챙겨주는 옷을 입었다. 그 외에 소질개와 함께 고용된 여러 명의 똘똘한 사용인들이 말을 끌어 온다, 냉수를 가져온다 법석을 떨었다.
시준이 권위주의적이라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일을 직접 챙기기에는 주석의 공무가 너무 많아졌다. 당장 아침밥도 출근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시준은 전생에서 대체 왜 저놈들은 집 내버려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회사에만 붙어 있는 거냐고 욕했던 과거의 고위 상관들이 어째서 그랬는지 실감하며 집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은 기랑이가 좀 늦네?’
보통 이때쯤 기랑이 간병인들을 거느리고 와 보기 때문에 시준은 출근길에 기랑을 마주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시간관념 상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시준은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으나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총괄부서와 비서실은, 어떻게 보면 업무상 겹치는 면이 있고 경쟁도 하지만 각자가 별개로 필요한 이유가 있다. 이건 조선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총괄서결국장 정약전도 그 문제를 제기했다.
‘정원(政院, 승정원)에서는 임금과 신하 사이를 오가며 사무를 간략하게 하고, 의정부에서는 그 간결함 속의 큰 뜻을 다시 세밀하게 살펴 총괄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역할이 같다 할 수 없소. 지금 주석당에 머슴과 몸종이 오가며 심부름하고 있는데, 비밀한 군국기무에 별로 적합한 처신이 아니오.’
사실 미국 대통령도 처음에는 세금으로 백악관 직원을 쓴 게 아니라서 이 발상은 꽤 선진적이었다.
조지 워싱턴이 자기 돈 많다고 수행원을 죄다 사비로 고용한 이후 백악관 인원은 꽤 간소했다. 워싱턴만한 부를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미국의 후대 대통령들도 경호원 없이 다니다가 총 맞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시준에게 경호대는 이미 주석결사옹위대가 있다. 따라서 비서실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시준은 해당 부서를 창설했다. 시준이 내려보냈던 관리지원국(管理支援局)이라는 명칭은 ‘관리’나 ‘지원’이라는 말의 생경함 때문에 주석보필국(主席輔弼局)으로 은근슬쩍 바뀌어 올라왔지만 시준은 그런 일에 이제 일일이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했다.
그 주석보필국은 말 그대로 주석의 좌우를 모시는[輔弼] 업무를 본다. 국장은 이강회의 형 이유회를 앉힐까 하다가, 너무 정약용 계파 사람들이 다 해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골랐다.
원래 명망 있는 백탑파 관료이지만 김조순 쪽에 줄을 안 서는 바람에 왕의 군대에 따라왔다가 포로로 잡혀 버렸던 전 홍문관 부제학 서유구였다.
시준이 어릴 때, 영국인이 처음 장자도에 왔던 당시 의주 부윤이라 이쪽 사정을 잘 알았다. 프랑스인이 중국인을 죽였다는 만상들의 진술에 대해 수상함을 느꼈으면서도, 일을 최대한 빨리 덮기 위해 가짜 장계를 그대로 올려버린 사람이다.
시준은 올해 내내 강철군주 이공의 신하들을 (감옥에서) 지속적으로 포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유구가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가장 빨리 나왔다.
서유구를 우대하는 것은 혁명적 신분 대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제왕학까지 갈 것도 없는 상식이다.
이런 경우 흔히 따라오는 신뢰성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는 과거 시준의 고을 수령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충성스러운 태도로 시준의 일정을 보고했다. 원래 실학자들이 이렇게 태세전환이 빠른가 싶을 정도였다.
“주석 동지.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하오이다. 아침에는 영유현 상조농장으로 마차가 순행할 것입니다. 농상진흥국에 따르면 양귀비……가 아니고 제12화훼농장(花卉農莊)과 제3마포농장(麻布農莊, 대마 농장)의 준비 태세가 특히 좋아 훈장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석께서 친히 격려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점심에는 거기서 새참을 드시고……. 저녁때는 일전에 말씀하신 영길리인이 공 차러 온다고 합니다.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도 이번에야말로 설욕을 하리라 벼르고 있어서 아무래도 더 피하기 어렵게 되었소이다.”
일전 씨름대회 이후로 축구에 맛들린 영국 놈들은 툭하면 찾아왔다. 윌리엄 자딘은 그 풋볼, 아니 파이트볼(Fightball)이라고 불러야 할 경기가 혁명막부에 대한 아주 좋은 영업 수단이라고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식사 때문에 말한다는 듯이 매우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 오늘 급양과(給養科)에는 이미 일러둔 바이겠지요?”
급양과는 주석보필국의 한 휘하 부서다. 시준이 집이 아니라 주석당에 있을 때의 의복이며 식사, 기타 개인적인 수발을 책임지고 겸사겸사 주석당 직원 및 드나드는 사람들 대접도 했다.
조선 남자 중에 밥해 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 부녀회 입김도 좀 키워 줄 겸 여기에는 주로 여자들을 따로 채용했다.
그리고 급양과장으로는 기랑을 임명했다.
기랑이 이제 시준의 호위역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따로 돈 줄 핑계가 마땅찮았다. 그렇다고 지유의 개인 간병인 정도에 머무르면, 명색이 백발백중회의 총재인 기랑의 사회 활동에 있어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재물과 지위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그렇다.
시준이 주석보필국을 창설한 이유의 한 4할은 사실 적당한 부서 하나 만들어서 기랑에게 공식적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 또한 시준의 코드인사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만 더 곤란한 착각이 유행했는데, 주석이 내명부와 궁녀를 들였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시준은 지유에게만 성의껏 변명한 다음 나머지는 신경 껐다.
그런 일을 모르는 서유구는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것 때문에 오늘 저녁까지는 급양과장 동지(기랑)가 따로 분주할 일이 없어, 하루 급가(휴가)를 낸다고 하였는데 이건 미처 말씀을 못 올렸군요.”
“허, 그래요?”
시준은 기랑이 왜 자기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서유구에게만 보고했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조직으로서는 권장할 만한 정석적 행동이다. 시준과 친한 사람들만 서열과 층위를 무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 시준은 새벽에 이어 두 번째로 고개를 갸웃하기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유구가 말한 대로 지금 당장 나가야 했으므로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시준이 여전히 조선(과 영국 해군 아시아 함대) 남색 음란소설계의 대부로 군림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 아시아 사람들에게 동성 간 성관계(동성애와는 좀 다르다)는 무슨 호들갑 떨 만한 시빗거리는 아니었다.
분명 조선의 경우 ‘부도덕’으로 규정했으며 들키면 형벌도 있다. 특히 왕실에서 그것은 엄격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왕실의 경우 세종 때 왕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괘씸죄가 적용된 면이 좀 크다. 그리고 궁궐이란 데가 원래 그거 아니라도 희한한 규칙이 많다.
게다가 고대든 현대든 형벌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도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인식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조선 시대가 현대보다는 훨씬 관대했다.
다만 자손을 남기는 것이 작게는 가정의, 크게는 국가의 중대한 의무였기 때문에 ‘결혼’은 남녀가 해야 했다. 결혼과 연애는 동서양 공히 항상 구분되었으며, 가문의 재산 분배와 직결되는 결혼은 엄격한 제한이 따랐지만 연애는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 때, 몇몇 사람에게만 빼고 다 남자라고 알려진 기랑을 왜 백발백중회 포수들이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기랑은 시준이나 지유와 동갑이다. 따라서 해를 넘기면 조선 나이로 19살이 된다.
젊음의 조화가 향기와 같이 피워낸 미모는 기랑의 거친 복식이나 눌러쓴 혁명립 정도로 가릴 수 없었다. 게다가 어린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매력 또한 움켜쥐기 시작하여, 참으로 불공정한 아름다움의 집중이 시작되는 나이였다.
포수들은 이제 저놈이 남자라도 상관없다는 각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아무도 기랑의 방에 밤을 틈타 난입하지 않은 것은 기랑이 사회적으로 남자라고 인식되어서가 아니다. 기랑이 ‘주석 동지의 총애 – 총애의 의미가 좀 다르긴 했지만 – 하는 측근’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시멘트에 묻힌 채 남포 앞바다에 내던져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국면에서 혁명적인 평안도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앞날 생각해 가며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과거 총선거 때 태천군에서 백발백중회의 표를 위해 맹활약했던 길명이었다.
이제 곧 정월이 되어서 평양성은 분주했다. 내년 예산을 확정해야 하는 중앙인민회의 때문에 가지각색 직위 단 사람들이 성 안팎으로 바삐 오가고 있었다.
영길리 사람조차 갑자기 줄어든 조선인의 관심에 남몰래 아쉬워할 정도로 북새통이다 보니, 태천군에서 온 사람들 정도는 전혀 눈에 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명이는 남의 귀를 별로 걱정하지 않은 채 친구 상돌이를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었다.
“보자고, 주석 동지는 혼인을 했잖아. 사내를 첩으로 앉히겠나? 아닐 거란 말이야. 그럼 임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나선들 누가 탄하겠느냐 그 말이거든. 아! 당장 오늘 밤이라도 회장(기랑)의 방에 뛰어들고 싶어서 근질거리는구나.”
이때 상돌이는 이미 노비가 아니었다. 당당한 혁명군의 동지였다.
멀쩡한 양인을 폭력으로 굴복시켜 노비 만드는 일이 잦았던 조선이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을 혁명은 증명했다.
반동분자로 몰린 주인집이 풍비박산 나고, 셋째 아들만이 실성해서 돌아왔을 뿐 나머지 가족은 어디서 돼지밥이라도 되었는지 시체도 못 찾는 꼴이 되어버리자 상돌이도 자연스레 해방되었다.
그러고 나면 갈 데가 뻔하다. 상돌이도 길명이 따라 포수 되어 혁명군에 입대하며 백발백중회의 여러 잡무를 거들었다.
그러나 상돌이는 아직 노비 시절의 눈칫밥 먹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 죽고 싶어?”
“죽다니? 내가 왜 죽어. 뭘 잘못했기에? 혁명의 뜻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석 동지와 나는 수평한 하나의 인민이라고. 막말로 5년 뒤에 내가 주석이 될 수도 있지. 누가 알아?”
의도가 시커멓다는 것만 제외하면 길명이의 말 자체는 그야말로 혁명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만큼 혁명적이지 못한 상돌이는 5년 뒤에 저놈은 절대 찍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길명이가 신나서 말했다.
“오늘 백발백중회의 예산검사보고(豫算檢査報告)가 있잖나. 내 가을에 거두었던 은행을 남몰래 회장에게 좀 나눠드릴 거거든. 따로 먼저 보낸 서간에 말씀드렸더니 꼭 오겠다며 매우 좋아하더라고.”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는 기랑은 백발백중회의 행사에 잘 오지 않았다. 회에서도 기랑이 없는 게 편하기 때문에 나중에 형식적으로 보고하는 것만 제외하면 간부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듣자 하니 기랑은 이제 막부에서도 주석 뒷배로 한자리 얻었다 하는데, 그 바쁜 와중에도 온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회장도 내가 보기에는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게야. 만물이 생동하는 경칩(驚蟄)이 머지않았으니…….”
“대동강 물이 아직도 꽝꽝 얼은 걸 보니 경칩은커녕 우수(雨水)도 한참 멀었는데 뭔 소리야.”
“아, 좀 닥치고 들어봐. 응? 아무튼 그걸 싼 종이에다가 내 마음을 절절히 적어 놓았다는 게 아니냐. 가서 은행 구워 먹으면 그걸 보게 되겠지. 내가 우리 동네 서기 말동, 아니 미동이 알지? 걔한테 부탁해서 아주 정성껏 쓴 거야.”
우연의 일치인지, 대강 발렌타인데이와 비슷한 계절에 조선에서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은행을 서로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취향에 따라 지금 길명이처럼 연시(戀詩)를 첨부하기도 한다.
다만 이건 좀 배운 사람들이거나 애초에 공인된 부부 혹은 연인일 경우의 얘기고, 조선에서 일반 하류계층이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애타는 연모의 정’을 쟁취하는 방법은 대개 야밤 난입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달리 조선은 자력갱생의 전통이 있어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 조선도 19세기의 다른 나라처럼 사적 보복이 대단히 발달했으며, 부모의 원수 같은 경우는 살인조차 정식 인정하고 무죄 처리한 사례가 있다.
현대 범죄자들처럼 속 편하게 법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 조선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도덕국가다. 법보다 도덕이 우선시된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름도 있는데 이런 것을 일컬어 협(俠)이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석의 분노는 둘째치더라도, 기랑 자신의 총칼 쓰는 솜씨가 너무 만만치 않아 자칫하면 시체도 못 찾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길명이도 이렇게 선비 흉내를 내야 했던 것이다. 꽤나 반동적이라 할 수 있었으나 길명이의 눈에 그런 게 보일 리 없었다.
상돌이는 찜찜해하며 물었다.
“나도 연서라는 소리는 들어 보았다만, 사내가 보내는 연서를 대체 누가 헤아려 준다는 말이야? 나 같으면 당장 은행 볶을 불쏘시개로나 쓰겠는걸.”
“흐흐. 네가 잘 모르는구나. 사내는 또 사내 나름대로 다루는 방법이 있단다. 요즘 나오는 그 은근한 이야기책에서도 좀 뽑아서 써놓았으니 사람이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지. 밤에 홀로 용두질이라도 생각나 뒤척이고 있을 때 내가 찾아가면 만사 끝이야.”
완전히 뇌가 무언가 깊은 어둠에 절여졌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 발상이었다. 아무튼 시준의 죄가 많이 컸다.
“그런고로 나는 오늘 태천에 돌아가지 않는다. 며칠 더 평양에 있을 테니 너도 날 좀 도와다오.”
하지만 상돌이는 이제 노비가 아니었다. 아직 혁명을 완전히 체화하지는 못했어도 그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이다. 상돌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으려고. 나 먼저 간다. 혼자 태천까지 덜렁덜렁 돌아오다가 호환 당하지 말고 조심이나 해라.”
“어? 야, 야!”
길명이가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상돌이는 그저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은혜도 모르는 놈 어쩌고 구시렁거리던 길명이는 곧 선화당 쪽을 바라보고 주먹을 쥐었다.
기랑이 결혼한 주석에게 홀대받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바로 자신이 주석의 손에서 회장을 구해 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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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최초의 자명종은 오직 새벽 4시에만 울렸다고 하죠. 자기 일하려고 만든 물건이라;;; 이 시대 사람들이 원래 좀 일찍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정말 밤에 낮과 동일한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때는 전등의 본격 보급 이후입니다. (솔직히 초기 전등은 촛불이 낫겠는데 싶을 정도로 어둡습니다만....) 결국 생활리듬은 일몰과 일출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꼭 해 지고부터 해 뜰때까지 잠만 자는 건 아니었는데, 이에 대해선 한 번 나올 것 같군요.
2. 조지 워싱턴은 백악관을 (노예들 부려서) 짓기는 했지만 거기서 살지는 못했습니다. 작중 나온 대로, 조지 워싱턴은 처음에 비서를 자기 돈으로 고용한 조카 하나 덜렁 두고 집무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대통령의 직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였죠.
경호원 없이 다녔다가 총 맞았다는 사람은 제임스 가필드인데 작중 시점으로부터 약간 후대에 임기 하는 인물입니다. 가족끼리 휴가 간다고 기차역에 맨몸으로 있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지만.. 어쨌든 미국 사람들이 워낙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총으로 해결하는 전통이 있어서, 지금의 체제대로 경호 인력이 매우 확대되게 되죠. 처음에는 지방경찰이, 나중에는 전담 부서가 챙기는 식입니다.
3. 약탈혼은 고대부터 어디에나 있었고(심지어 스키타이 쪽에서는 신랑 약탈도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중앙아시아 쪽에 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작중 설명처럼 어지간한 문명국이라면 그런 식으로 '결혼'하는 것은 차차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되어갔고, 조선의 경우 16세기 노수신이 진도에 귀양 가 그곳의 약탈혼 풍습을 교정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적어도 제도권에서는 추방된 거죠.
하지만 '기정사실만 만들어 놓으면' 된다는 풍조야 전근대나 현대나 항상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20세기에는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사가 중매 서 주기도 했고.... 실록에 이런 난입에 대해 처벌한 기록이 많은데, 뒤집어 보면 '성공 사례'도 많았다는 거죠.
4. 관리, 지원이라는 말은 조선에서 잘 안 썼지만(한자로 써놓으면 뜻은 통했을 겁니다) 의외로 또 화훼라는 말은 썼습니다.
5. 전기가 없던 시절의 밥짓기는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기밥솥이라도 (요즘은 어디 가서 구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싸구려를 쓰면 숙달되지 않은 경우 맛없는 밥이 나오죠. 비싼 밥솥일수록 대충 해도 밥이 괜찮게 나오고... 20세기엔 일본 다녀오는 여행객의 최고 선물이 바로 일제 전기밥통이었습니다.
6. 작중 설명할 기회가 없었는데, 사실 이때의 영국 해군은 원래 남색이 유행하기로 유명한 집단이었습니다. 시준의 소설이 히트친 작중 이유이기도 하고요. 허나 동시기 일본이나 중국도 그랬듯 그건 성폭력에 가깝지 '동성애'와는 좀 다른 얘기였죠.
7. 경칩에 은행을 주고받는 일은 실제 조선에서 있었던 풍습입니다. 경칩은 보통 양력으로 3월 초쯤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2월 중순인 발렌타인데이와 큰 차이는 안 나지요. 물론 발렌타인데이와 초콜릿은 이 시대에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8. 실제로 충효가 가장 큰 가치였던 조선으로서는, 부모의 원수는 당연히 불구대천인 것이어서 쟤가 죽든가 내가 죽든가 해야 했습니다. 사회적 인식이 그랬다는 것에서 나아가 국가의 공식 기본 가치이며 권장 사항이란 거죠(물론 실제로야 위정자들은 좀 말리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죽인다 하더라도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은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