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19화 (119/284)

119화

36. 어긋나는 비탈길(4)

김회연과 비슷한 이유에 더하여, 김조순을 아직 정면 적대하기 싫은 시준의 명에 의해 혁명군 함대 역시 철저하게 영국 함선으로 위장했다.

그리고 그 수준은 경상도 함대보다 당연히 훨씬 높았다.

이건 조선인들이 독자적으로 서양 배를 몰 수 있도록 속성 교육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영국을 사칭하여 해적질하는 일에 영국인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전라 감사 김희순은 민란을 진압하면서 약탈을 막고, 서울의 김조순을 지원하기 위해 추수기가 끝나자마자 쌀을 닥닥 긁어모아 올려 보냈다.

지금 호남은 맘 편히 환곡 갖고 이자 놀이해서 재정 불릴 처지도 아니니, 서울에 두면 최소한 뺏기지는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시준이 이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송상 덕분이었다.

흑산도 어민을 비롯한 수군 자원자들이 혹독한 훈련을 받는 동안, 시준은 송상과 급히 연락을 취했다. 당시 조선 수운은 상인, 특히 경강 상인의 배를 세내는 게 많아 이들에게 물어보면 대강의 세곡 운송 일정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김희순의 의도를 알게 된 시준 역시 마음이 급해졌다. 전라도가 텅텅비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영국인 몇 명을 독에 묻어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준은 이강회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지나치게 드러내며 물었다.

“지금 사정이 이러하니 당장 출항할 수 있겠소, 국장 동지?”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이강회도 마음과는 약간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주석 동지.”

이강회는 임시방편으로 원래 조작인원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태운 다음 출발했다. 그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전투병을 줄여야 했지만 어차피 조선 배 상대로 전투력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몇 번인가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긴 끝에 그들은 날짜에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적이라고 표현할 일까지는 아니다. 원 역사에서도 문순득은 표류 중 견문한 첨저선의 (조선 평저선과 변별되는) 특징을 정확히 파악했던 사람이고 이강회도 문순득의 진술을 잘 포착하여 전문적 조선(造船) 서적을 저술해낸 사람이다.

그들은 조선 해안에서 불리하지만 외양에 유리한 서양 배의 특성을 살려, 혹시 있을지 모를 수군도 피할 겸 약간 육지에서 떨어져서 빙 돌아 여기까지 왔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이 옥구현(군산)이라면 양측의 수영이 관할 문제로 우왕좌왕할 거라는 치밀한 계산도 함께였다.

그런 만반의 채비가 있었기 때문에, 이강회가 지휘하는 혁명 수군 1함대는 그야말로 기염만장이었다.

원래 이름이 HCS 다이애나(Diana)였던 혁명군의 첫 번째 전함 ? 사실 쉽(Ship)급 무장상선이지만 ? 은 하백(河伯)이라는 새 이름에서부터 동명성왕의사당이 있는 평양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이제 한문도 수준급으로 배운 조제프 푸셰가 혁명적으로 제안한 적성(赤星, 붉은별)이라는 이름은 조선 사람들에겐 불길하다는 이유로, 시준에게는 쪽팔리다는 이유로 거부된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강회는 망원경을 내리고 크게 외쳤다.

“저기 대변선이랍시고 저어 오는 꼬라지가 보이는구나! 혁명 동지들에게 묻겠다. 저 쌀이 누구의 것인가!”

“인민의 것이오!”

“그렇다면 인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자가 누구냐!”

“경애하는 정시준 주석 동지올시다!”

“옳다. 그렇다면 주석의 명을 받은 우리가 저 쌀을 거둬 오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백번 옳소이다!”

“그렇다. 옳다. 이건 노략질이 아니다. 혁명의 진군이다. 모두 가자!”

“와아아!”

그리고 그 기세에는 약간의 희극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혁명의 길에 구간(苟簡, 거칠고 엉성함)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위장은 아주 철저했다.

얼마나 철저한가 하면, 영길리인을 흉내 내어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상투 위에 볏짚을 싸매 묶어놓아 나름대로는 백안금발의 서양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영길리 사람의 옷을 여기저기 걸쳤음은 물론이다. 다만 잠방이바지 위에 셔츠를 입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좀 파멸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동지 제군은 영길리 사람이다. 알겠는가?”

“예, 국장 동지!”

이강회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나름대로 대장이라 아래위로 충실히 영길리 옷을 갖춰 입은 이강회는 도망치려는 대변선을 따라잡고 영어로 크게 외쳤다.

“Stop there, criminal scum(거기 서라, 이 도적놈)!”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바로 그러라고 떠드는 것이다. 혼이 빠져나간 대변선 선원 중 일부는 진짜 영길리군이 습격했다고 믿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강회 휘하 혁명군 역시 대장을 충실히 모범으로 삼았다.

최근에 영국인들과 친해졌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강회처럼 수재인 것도 아니요, 말을 유창하게 배울 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장 처음부터 참여한 자도 겨우 두 달 정도 영길리 사람을 봤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20년 가까이 영어를 배우고도 멍석 깔아 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현대 한국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20년까지도 필요 없다. 2개월이면 조선 사람에게 충분했다.

혁명군은 나룻배를 던지고 배의 흔들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우글우글 타서 노를 저었다.

대변선에 들이받은 혁명군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태도로 갑판에 뛰어들며 자기 생각에만 유창한 영길리 말을 쏟아냈다.

“Hi! Thank you!”

“Hello there!”

“I’m fine! Bastards!”

“Fuck you! Give me some drinks! I’m sorry!”

대변선 선원들은 그 몰골을 마주하자마자 이게 그냥 습격이 아니라 정신 질환자 패거리에 의한 습격임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하긴 나무랄 수도 없는 판단이다.

동시에 혁명군 전원은, 영길리인과 영락없이 똑같은 자신들의 풍채며 능란한 오랑캐말 솜씨에 저들의 기가 단숨에 꺾였다고 확신했다.

진짜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강회만이 피식피식 웃었을 뿐이다. 혁명군 중에서 자기가 지껄이는 말의 뜻을 아는 자는 전혀 없는데도 자신감 하나는 하늘을 찔렀다.

‘하긴 말이야 아무거나 따라하면서 배우는 거지. 나도 그 오묘한, 아니, 추잡스런 사형의 패관을 보면서 익혔고…….’

이강회가 한가하게 옛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차피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백의 18파운드 포가 불을 뿜자 대변선 두 척은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손쉽게 옮겨 탄 혁명군이 칼을 치켜들자마자 승무원의 반은 물에 뛰어들고 나머지 반은 무릎을 꿇었다.

“목숨만 살려 주시오!”

그렇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세곡을 접수하던 와중, 유니언 잭을 제발 봐달라는 듯 그려 놓은 배 세 척이 나타난 것이다.

정말이지 이요헌만큼이나 이강회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강회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설마 진짜 영길리군이…….”

이강회 역시 김회연의 예측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사고 과정을 거쳤다.

흑산도의 영길리 수군이 빼앗은 조선 배를 타고 북상했다는 판단은 상식적이었다.

문순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대로 영길리 배인 척하고 물러나는 건 어떻소이까?”

문순득까지 그런 소릴 할 정도니 혁명군 대부분이 자신의 위장을 얼마나 굳게 믿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강회는 영국인들이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것과 같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위치상 이강회의 배에서는 망원경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저쪽 배에 탄 사람까지는 안 보였다. 이요헌 함대에는 군사랄 게 많지 않아서 판옥선 특성상 상갑판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혁명군의 나룻배는 조운선 탈취 때문에 한참 앞서가 있다. 범선으로 원하는 목표에 가까이 붙이는 것은 지금의 혁명군에게 무리였다.

이강회의 생각에 지금 저 ‘진짜 영길리인’들은 벌써 이쪽의 웃기는 짓거리를 다 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감히 자기들을 사칭한 자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강회는 각오를 다졌다. 어차피 지금 탈취한 이 조운선을 포기할 수도 없다.

동인도 회사 이름을 팔아서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물론 이강회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이요헌은 꿈에도 ‘진짜 영길리 함대’에 덤빌 생각이 없었다(망원경도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조라포 만호 김진락이 초조하게 말했다.

“서양 오랑캐가 나라의 배를 침탈하고 있으니, 어찌 맞서 싸우지 않겠소이까?

군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요헌은 이자가 미쳤는가 하고 김진락을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들은 이 나라에서 으뜸간다는 전라우수영을 깨강정으로 흩어 놓은 영길리 해적이다. 변변한 총통도 별로 없는 이 세 척으로 무얼해 보겠느냐? 격군들에게 일러라. 흩어져 뒤로 노를 저어 섬그늘에 몸을 숨기라고! 저 배는 큰 데다 노가 없으니 깊이 쫓아오지 못한다!”

과연 수군절도사 경력자다운 정확한 판단이었다. 일찍이 헨리 호프 함장이 흑산도에서 보았던 것이지만, 갤리선의 섬세한 기동은 때로 육중한 서양 범선을 능가한다.

그리고 조선군의 경우, 후퇴할 때 최대로 발휘되는 그 기동력은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경상우수영 배 3척은 마치 수면을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처럼 우아하게 흩어져 달아났다.

문순득이 미심쩍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어째 달아나는 것 같지 않소이까?”

망원경으로 눈을 짓눌러 찌그러뜨릴 것 같던 이강회도 조금 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보이는군. 영길리 놈들, 마치 조선 사람만큼이나 노를 잘 젓지 않는가. 저들의 배에는 그게 있지도 않았을 텐데.”

“조상 대대로 해적이라 하니 그 정도 재주쯤은 가전의 술기(術技)로 갖춘 것 이겠지요.”

두 사람은 짧은 의논 후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저 영길리 배는 아마 이쪽을 보았겠지만, 딱히 공격을 하지도 않은 데다가 비록 사람은 가짜라도 배와 화포가 진짜이니 수상해하면서도 일단 물러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강회와 혁명군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 문순득은 짐짓 분위기를 바꿔 쾌활하게 말했다.

“아무튼 결국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세곡도 무사히 거둬 오고, 사람이며 배도 전혀 다치지 않았잖습니까.”

그 말이 옳았다. 이강회는 군의 사기를 추스르기 위해 혁명의 승리를 높이 선언했다. 혁명군은 아까의 일은 금방 잊어버린 채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쌀자루를 옮겨 실었다.

결과적으로는 대승이었다. 탈취한 대변선은 조선에서는 정예한 배다. 평안도의 운수에 중하게 쓰일 것이다.

붙잡은 조졸(漕卒) 역시 예전부터 혁명군이 붙잡았던 포로들 ? 예를 들어 이 공과 같이 사로잡혔던 금군처럼 ? 과 같이 귀중한 노역에 부릴 수 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기다려서 다른 조운선을 또 납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이강회는 재빨리 철수를 결정했다.

“영길리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선을 저리 많이 포획하였다면, 영길리 수군은 내가 들은 대로 흑산도에서 가만히 있으려는 게 아니라 다른 짓을 꾸밀 수도 있다. 어서 돌아가 주석 동지께 보고해야 해. 이번에는 언제든 조운선을 탈취할 수 있는 혁명군의 용맹함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순득 역시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첫 승리를 올린 혁명군 함대는 곧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

시준은 일단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함대를 크게 치하했다.

이제 이들은 혁명군 해군(革命軍 海軍) 1함대로서 정식 명칭을 가지게 됨은 물론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수여하는 혁명영웅(革命英雄)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돈 안 드는 포상이라는 점에서 이는 시준에게 매우 유혹적이었다. 이제 꼭 필요하다면 소련이건 북한이건 거리끼지 않을 작정이었던 시준은 군사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조선 사람이 좋아할 만한 북한식 칭호’를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예를 들면 노력영웅이라든가.’

어쨌든 그건 좀 나중 일이고, 지금 급한 것은 이강회의 보고였다. 허나 시준은 지금 한창 전쟁 중인 로드 암허스트에게 사절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국장 동지. 그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이 영길리 사람인지 직접 보았소?”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돛 전체에 영길리국의 국기를 크게 그려 놓았다 했지요.”

“그렇소이다.”

시준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영국 배 중에 유니언 잭을 달아 놓은 배는 많이 봤어도 돛을 꽉 채워서 그걸 그려놓은 배는 본 적이 없다.

시준이 항해에 익숙했다면, 의장용 같은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서야 훼손되기 쉬운 소모품인 범선의 돛에 국기를 그리는 낭비를 하진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준은 좀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깨달았다. 단순한 역지사지였다. 시준이 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아마 그들 역시 우리처럼 조선 배였을 거요.”

“예? ……아! 제가 그 생각까진 미처 못 했소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자칫하면 선수를 빼앗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국장 동지께서 현명하고 재빠르게 일을 처치해서 다행이오.”

시준은 우선 그렇게 이강회의 사기를 높여 준 뒤 말했다.

“하지만 세곡을 탐내 온 건 아닐 겁니다. 그들은 조선 배이니, 굳이 그렇게 술수를 부릴 필요 없이 조운선에 가까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필시 각지 수영(水營)이나 영길리군의 배를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이강회도 깨달았다. 관군의 공격을 걱정해야 하는, 다시 말해 김조순에게 반대하는 상당히 강력한 지방 세력이 또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막부에게 동조하리라는 예상은, 현재 시점에서 두 사람 모두 하기 어려웠다. 시준과 이강회가 떠올린 것은 조금 더 비관적이면서도 상식적인 예측이었다.

‘근왕당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방향으로 봐서 보나 마나 경상도다.’

경상 감사 김회연이 김조순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야 이미 들어온 지 오래다. 그들이 그렇게 김조순을 피해 가며 북으로 올라와 뭘 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짐작할 만하다.

이강회가 그것을 지적했다.

“강화도를 쳐서 한강을 막으려 했던 것이군요. 방법은 다르지만 대강 조운선을 노리는 것은 그들도 같았다 할 수 있겠소이다. 허나 세 척밖에 없었는데 그것으로 어찌……?”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소. 그렇지만 이제 여유가 별로 없게 되었소.”

김회연은 왕을 데리고 있는 시준을 잘 구슬려 근왕당에 합류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준은 한성 부민 이씨 아저씨와 다시 사이좋게 지내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유 일 때문만은 아니고 일단 평안도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설사 어떻게 김조순 타도를 목표로 잠깐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근왕당은 종국에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조순의 적이라면 현재 명목상 그의 동맹인 시준의 적이기도 하다.

시준에게 동맹에 충실할 생각이 없는 것과 별개로, 김회연이 김조순보다 나을 이유 또한 없다.

머리를 굴리던 시준은 결론을 내렸다.

“할 수 없지. 또 신경 써야 하는 도당이 하나 늘어났으니 이제 전국(全局)을 대등하게 가져가야 합니다. 우선 농상진흥국장 동지께서는 임시로 1함대도 맡아 하던 일을 계속해 주시오.”

지금까지 밑간만 열심히 해 오던 함경도를 정식으로 손에 넣고 본격적 확장에 들어가야 했다.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김조순이 경상도를 상대하기 위해 서둘러 왕을 즉위시켜서 지방 세력의 재통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함경도 사람들이 1영대장 백윤구의 선전선동에 거의 넘어왔다 하지만, 왕의 이름은 그 저울추를 한순간에 뒤집을 만큼 무겁다. 일껏 해놓은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웬만하면 급하게 서두르고 싶지 않았는데. 선전선동국장(푸셰) 동지와 혁명무력국장 동지를 이리로…… 아니, 아니오.”

시준은 입술에 대고 손가락을 눌렀다.

“그냥 전부 오라 하시오.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겠소.”

가경 16년(1811년) 겨울, 김조순은 심장까지 찬바람이 스며들 것 같은 세 가지 소식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세곡 운반선이 ‘영길리 해적에게’ 연이어 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조순은 효율이 무지막지하게 떨어지더라도 많은 선을 육로로 옮기는 한편 전라우수영 함선을 호위로 붙였다. 그러나 이강회는 대담하게도 직접 교전까지 시도해 가며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둘째로, 김회연의 파면을 재촉하러 내려간 사자들이 마치 함흥 간 것처럼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김조순은 당장 충청도 군을 파견하려 하였으나 그나마도 여기저기에서 암초에 부딪쳤다.

아직 전투를 겪지 않은 경상도 군세도 만만치 않은 데다 세곡이 줄줄 새고 있어서 전비가 버거웠다.

게다가 김회연은 아직 공식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침 뚝 뗀 채 일반 정무의 장계는 계속해서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아직 조정에 남아 있는 비 노론계 인사들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분부 전하러 간 사자가 충청도 쪽 민란에 의해 변을 당하여 단순히 못 들은 게 아니냐며 김회연을 변호하는 자까지 나왔다.

셋째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함경도에서 북청?단천?함흥?경성 등 요지라는 요지마다 백성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는 군대를 상당 부분 뺐음에도 민란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 소식은 기습적이었다. 물론 지하에 침투했던 백윤구의 혁명군이 지금까지 잘숨겨왔기 때문이다.

정치국의 지시가 떨어지자 굶주리던 함경도 백성과 수령에 불만 많은 토착 향임들은 일제히 합세해서 봉기했다.

함경도 수령들은 억울했다.

그들 역시 북청 민란을 안다. 게다가 옆 평안도 상황을 보았던지라 나름대로 백성들에게 잘해주려 노력은 했다. 원래 대책 없이 착한 사람이 잘 없는 것처럼 순수하게 악독 외길만 걷는 사람도 보기 드물다.

그러나 하필 시점이 겨울인 게 문제였다. 수령 아니라 왕이라도 어쩔 수 없는 추위와 기아가 찾아오자 백성들은 그런 사소한 은혜 따윈 다 잊어버렸다.

“창고는 인민의 것이다!”

“군량도 인민의 것이다!”

“기다려라! 너희가 배곯고 있다면 마땅히 진휼소를 열 테니, 이런 도적패 같은 짓은…… 으아악!”

“어딜 감히 거지에게 동냥 뿌리듯 인심 쓰는 척하느냐! 복공의 격문을 읽지 못했느냐. 오직 당당히 빼앗을 뿐이다!”

이때 아직 함경도의 군세는 대부분 북한산성을 공격하는 데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바람같이 돌아가고 싶어 했다. 당장 거기 가족들이 있는 토관병사가 많았다.

하지만 김조순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돌아가려거든 더욱 거세게 공격해 북한산성을 떨어뜨리고 가라는 김조순의 엄명에 함경도 지방군에서는 탈주자가 빈발했다.

김조순은 차라리 그들을 그냥 보내고 훈련도감 군사를 다시 투입할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에는 선후가 있다. 함경도에서 백성 따위가 무슨 짓을 하건 결국 백성.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다.

훈련도감 군세는 다른 일에 써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저울을 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김조순은 즉시 병사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육조와 성문, 그리고 시전이며 주요 부잣집에 나누어 보냈다.

서울을 계엄 상태로 만들어 놓은 김조순은 백관을 이끈 채 연(輦, 왕의 가마)을 대동하고 수주군 이병원의 집 앞에 당도했다.

거기에는 이미 완벽한 연기 준비를 마친 채 황망해하는 척하는 이병원이 있었다. 김조순은 그 앞에서 건조하게 대사를 읊었다.

“천명과 인심이 이미 돌아갔습니다. 지존의 위는 한시도 비워 둘 수 없는 것인데, 나라를 떠받쳐야 할 사대부들이 태만한 죄가 큽니다. 부디 위로 하늘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의 소망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원래는 더 면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조정을 확실히 김조순의 것으로 삼고 대비를 완전히 침묵시키며, 이병원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지형을 만들어 놓은 뒤에야 이 말이 의도한 효과를 발휘한다.

허나 비탈길을 정신없이 굴러 내려가는 이 형국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완전히 어긋난 길로 미끄러져 나라가 개골창에 처박힐 판이었다.

‘한순간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끝장이다. 저 머저리에게 화낼 틈도 없어.’

김조순은 자신을 다잡으며 더욱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사양하는 척하며 연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이병원에게 주특기인 벼루 투척을 발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작가의 말

1. 오늘은 해설할 것이 많지 않으니 혁명막부의 조직에 대해 간단히 풀어 보겠습니다.

혁명막부는 여러 차례 언급되었듯 가칭이며, 주석 정시준을 수반으로 합니다. 정시준은 중앙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합니다. 상임(항상 일하는)위원회가 따로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인민회의는 상시 소집되어 있는 게 아니지요. 국회처럼요.

정부인 막부 휘하에는 현재까지 나온 바로 다음과 같은 부서가 있습니다. (정치국은 회의체이지 부서가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언급되지 않을 뿐 존재하는 부서는 더 있습니다.

총괄서결국 : 총괄과 서결은 조선 조정에서 의정부의 역할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비슷한 발상으로 명명되었습니다만 역할은 조선 의정부+이조+호조 일부 정도 되겠군요. 현 국장은 정약전입니다.

농상진흥국 : 말 그대로 농업과 의류라는, 이 시기 모든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핵심인 두 가지 산업을 관장합니다. 상조농장이나 양귀비, 대마밭도 여기 관할. 현 국장은 이강회.

혁명무력국 : 군정부서입니다. 현 국장은 차형기입니다.

공장영선국 : 공장은 조선에서 쓰던 말로 기술자라는 뜻이고, 영은 건물을 짓는 일, 선은 도로를 닦는 일을 말합니다. 조선 공조라고 보시면 대충 맞겠군요. 국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외사통호국 : 바깥의 일을 우호로써 통하는, 외교 부서입니다. 예조와는 달리 예식과 예법에 관한 일은 여기서 관장하지 않습니다. 현 국장은 정약용입니다.

선전선동국 : 원래 비공식 부서였지만 은근슬쩍 정식 부서가 되었습니다.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 국장은 조제프 푸셰입니다.

2. 칭호를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수여하였는데, 북한의 경우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로력영웅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칭호를 수여합니다.

당에서 주는 것도 없는 건 아닌데 기본적으로는 국가에서 주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시준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돈으로 주려니 한도끝도 없어서) 북한에는 오만가지 칭호가 많습니다. 중복 수여도 있고... 다만 작중 나온 혁명영웅은 북한에는 없는 칭호입니다.

3. 조선 조운은 복잡한 해안선을 잘 타고 배도 제때 준비하며 장부에 어긋나지 않게 날라야 하는, 전근대 조선으로서는 그냥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미션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세곡 나를 때마다 배가 없거나, 풍랑과 암초에 침몰하거나, 운송업자들이 먹고 튀거나/안 오거나, 관리 소홀로 썩거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다 터졌지요. 이 공백을 채운 자들이 자체적으로 함선 제조까지 하던 경강 상인입니다.

4. 이제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의 전반부 스토리가 대략 종료되었군요. 내일 120화가 연재된 이후, 121화부터는 10.14(금)부터 (이전의 모든 화수와 함께)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120화 말미에 또 공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외전) 제1회 주석기 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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