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15화 (115/284)

115화

35.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조선 정조 이산의 문치(文治)를 대표할 업적을 든다면 현대에는 역시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첫손에 꼽힐 것이다.

물론 그 중요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다. 허나 합리성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잘 주목받지 못하는 방면에서의 관제 간행물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일종의 점술서인 『협길통의(協吉通義)』가 그것이다.

이는 왕실과 조정의 주요 행사부터 민간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소사에 관한 길흉과 택일, 대처법을 총망라한 책이다. 심지어 이 책의 증보판은 열강의 침탈에 정신없던 고종 시절에도 편찬되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허황된 미신’은 상당히 선택적이었으며, 그에 대한 배척이 무신론적 회의주의에 기반한 사상인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 시대 유럽인들 역시 평일에는 첨단 과학을 연구하면서 주말에는 예배에 참석했다.

유교의 합리성이 무엇인지 깊이 아는 정약전과 얄팍하게 아는 시준의 대화는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정약전은 협길통의를 한 손에 든 채 말했다.

“의혼(議婚)이 이미 이루어진 마당에 물색없는 소리 같지마는, 명색이 혼주(婚主)를 대리하는 백부로서 뒤늦게나마 말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신부가 계축년(癸丑年) 소띠이니 19세의 나이는 혼인하기에 대체로 나쁘지 않으나, 8월은 방녀부모(妨女父母, 결혼하면 친정부모가 해를 입는다)에 해당한다. 홍 장주는 조금 미루고자 하는 눈치던데.”

시준은 정약전의 말에서 그가 홍득주의 제안을 귀찮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준은 전생에서 주워들었던 경구를 인용했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약전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그야 자네 말대로 공자는 덕행이 없는 자는 신령에 쏠리고 지모가 모자란 자는 점복에 의지한다[德行亡者 神靈之趨 知謀遠者 卜筮之蔡, 『역전(易傳)』]

고 가르쳤다. 허나 역(易)의 말하는 바는 넓고 깊으며 그 안에 잃어버리지 않은 옛말을 품고 있기 때문에 기이하고 어지러운 요설과 같이 볼 수는 없네.

택일(擇日)은 예를 치르는 법에 대한 결정이므로 어디까지나 그 요체가 의리(義理)에 있다고 할 것이지, 어찌 쌀을 던지고 방울을 흔들어 귀신의 말을 듣는 따위의 소도(小道)라 하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韋編三絶] 역을 읽었고, 또 ‘나는 그것을 점치는 데에만 쓰는 일로 안주하지 않는다[予非安其用也]’ 한 것일세. 그러니까…….”

시준은 역시 형제라고 생각하며 정약전의 말을 끊었다.

“예. 죄송합니다. 그러면 예식을 미루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뭐 급하게 혼례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무래도 연관된 사람이 많아 지금 갑자기 바꾸기는 어렵겠는데요.”

“아니. 그런 말에 흔들리자는 건 아니었어. 이번 일은 점을 칠 필요조차 없는

[不占而已矣, 『논어(論語)』] 것이니 말일세. 그냥 그런 수군거림이 나올 것이니 알고 있으라는 뜻이었네. 이거야 원, 불민한 아우 대신 내가 다 가르치게 생겼군.”

시준은 정약용의 불민함을 애써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스승을 배신했다. 정약전이 말했다.

“자네가 이쪽을 더 좋아한다면 툭 터놓고 말하지. 자네 말대로 이제 와서 미루겠다느니 할 수는 없어. 돈과 사람의 낭비도 심할 테지만, 무엇보다 한시바삐 성례를 올려 자네가 미동(美童) 포수나 탐하고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다느니 쑥덕대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만상을 떳떳하게 승계해야 하네.”

시준은 좀 너무 툭 터놓고 말했다고 생각했다. 앞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뒤의 말은 상당히 불쾌한 것이었다.

“전 만상을 차지하기 위해 혼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만상은…….”

“그래. 어차피 사실상 자네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지? 그러나 그렇다면 왜 세상이 다 임금의 아들인 것 아는 왕자를 두고 세자를 책봉한다느니 중국에 아뢴다느니 하며 엄청난 돈을 쓰겠나? 여기에서 자네가 홍 장주의 양자이며 사위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 차이야. 예컨대 임상옥 같은 자는 충분히 자네를 대신해서 만상을 이끌 수 있을걸. 물론 그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말일세.”

거기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들을 시준은 아니었다. 시준의 결혼은 그의 바람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행사였고, 시준이 바라지 않는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만상의 승계 문제였다.

홍득주가 형식상 만상 대방의 자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실질적으로는 시준의 손아귀에 있다. 그런데 정약전의 말대로 이러한 체제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혁명막부의 사업에 만상을 활용하는 일이 잦아지자, 공기업이 대개 그렇듯 이 윤만 볼 수 없게 된 만상은 예전보다 줄어드는 이익을 체감하는 상태였다.

만상 휘하의 문상들 중에서는 주석은 정치를 하고 장사는 우리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공공연히 떠드는 자도 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홍득주를 움직인 것이다. 혼례를 감히 무르자 말하지는 못해도 약간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아직까지 만상의 좌장이자 주인은 홍득주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제스처였다.

반면 정약전을 비롯해 평안도가 아니라 시준에게 연고가 있는 자들은 그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돈은 그만큼의 힘과 같은 말이다. 시준이 혁명막부의 주석과 중앙인민회의의상임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더하여 만상의 부까지 공식적으로 움켜쥔다면 정(政)과 의(議), 그리고 무(武)가 한 손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정국이 불안한 이때 서둘러서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그 반석 위의 새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물론 시준의 사생활에 대해 떠도는 불온한 소문을 종식시킬 필요성도 중요한 이유다.

시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직까지는 건전한 정치 경쟁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하기야 이 정도 알력도 없었다면 유토피아는 바로 평안도에 있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킬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 난 뒤, 시준은 정약전이 암시한 바를 실행했다.

시준의 혼례에 많은 주목이 쏠린다는 말은 곧 많은 위험도 쏠린다는 뜻이다.

시준은 공식적으로 혁명군에서 자기 호위병을 차출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러자 혁명무력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결과를 올렸다.

평양에 주둔해 있던 2영대(연대)에서 1개 복대(중대)를 뽑아 주석의 공식 호위대로 만든 것이다. 백윤구의 연설에서 따와 혁명무력국이 자랑스럽게 이름붙인 주석결사옹위대(主席決死擁衛隊)라는 명칭은 그냥 외면했다. 이제 반박하기도 싫었다.

그런저런 소동을 거쳐 시준의 혼례는 예정대로 거행되었다. 주석결사옹위대의 첫 번째 임무는 이 행사의 엄중 호위가 되었다.

고르고 고른 120명인 만큼 이들은 자부심에 차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 한눈에도 정예병인 것처럼 보이는 부동자세로 홍득주 집을 둘러싼 1개 복대는 일단 겉보기부터 일사불란했다.

붉은 조끼와 의주바지에다가 패랭이를 물들인 혁명립(革命笠)은 멀리서 보기에 횃불이 불타는 것 같았다.

혁명무력국은 신발까지 시뻘건 색으로 통일하고자 했지만, 심미적으로도 보기에 이상하고 염색도 공짜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종아리 아래로는 밤새 닦은 가죽 각반과 구두가 빛나고 있었다.

허리띠에는 종이 약포 열두 개와 총검을 꽂았으며 등에는 브라운 배스 머스킷을 단단히 메었다. 거기에다가 환도며 활까지 하나씩 차고 있으니 시준이 보기에는 솔직히 과무장 같았다.

그러나 혁명무력국은 이것이 시준이 만상을 공식적으로 취하는 행사라 여기고 있었으며, 그에 어울리는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엉망진창인 오해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 자리를 얻고 싶어 하던 만상의 다른 행수들마저도 이 꼴을 보고 제2의 정시준을 노리겠다는 야망을 상당 부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즉 정시준과 홍지유는 그런 복잡한 편 가르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고생 상당수가 사서에 기록될 만한 역경을 거쳐 마침내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백마 타고 기러기 주러 온 시준의 사모관대 성장(盛裝)이라거나, 기랑이 빌려준 적의(翟衣, 왕비의 예복)를 비롯해 신분 제한을 혁명적으로 무시하고 치장한 새신부 지유의 자태와는 관계가 없었다.

자연이 선사한 젊음이 넘치는 19세 청춘의 나이로는 어색한 표현이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미(美)는 풍상과 세월이 주는 품격에 가까웠다.

그것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맑은 아침 하늘 아래 피워낸 이름 모를 꽃의 아름다움이었다.

흔히 폄하 받지만 사실 가장 위대한 대지와의 격투를 마치고 돌아온 농부의 고단한 보람이었다.

인생의 여로에서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저 그 길을 가감 없이 걸어왔기에 자랑스러운 노인의 나그네와 같은 자부심이었다.

시준과 지유의 머릿속에서는 어릴 때 메뚜기를 같이 볶아 먹던 일부터 시작해서 지난 십여 년간의 인생이 스쳐 지나갔다.

각자 장사와 부엌데기 일이나 하며 귀한 취급은 못 받던 어린 시절, 더 자라서는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주고받았던 마음, 이제는 잊을 수 없는 곳이 된 싸리나무 울타리 뒤쪽까지 그 모든 것이 어제 일 같았다.

결국 그런 일상을 지키려던 노력이 거꾸로 홍경래의 돌출을 불러왔다.

지유도 무력한 포로로서 견디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시준의 정표를 흩어 가며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김유근에게 보내려는 홍득주의 의사를 거부한 것처럼, 왕의 화살에 맞는 순간까지 지유는 시준을 다시 만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 시준은 평안도를 탈취하고 이 나라 최초의 반봉건 혁명군을 일으켜 왕의 다리를 잘라 버렸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역사는 돌이킬 수 없이 뒤틀렸을지라도 둘은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의주의 흔한 장사꾼 가족으로 끝났을 두 사람은 운명의 손에 지나치게 오래 놀아났다. 지유와 시준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제 끝났구나.’

고양감보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행복이 두 사람의 얼굴 밑에서 떠올랐다. 혁명이고 정치고 나발이고 간에 이 두 사람에게는 지금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이겨낸 것이다.

지유가 환자임을 감안해서 혼례의 복잡한 의식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애초에 서민인 지유가 당당하게 금칠한 예복을 입고 나온 시점에서 예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기꺼이 집례(集禮, 사회자)를 자임한 의주 부윤, 아니 의주부 인민위원회 위원장 조흥진의 지도 아래 합환주(合歡酒) 또한 식혜로 대체되었다. 당시는 유럽에서조차 술이 약으로도 쓰이던 때라, 병자에게 술을 먹일 수는 없다는 상식을 납득시키느라 시준은 조금 고생해야 했다.

이때 결혼하는 남자들이 피해갈 수 없는 다른 고생도 있었다. 시준의 어린 시절 악우(惡友)들이 신랑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야 한다며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모여들었다.

그 면면을 살피던 시준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물었다.

“너도 왔냐?”

최대한 안 보이게 서 있던 기랑은 시준의 시선을 외면했다.

기랑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끌려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기랑의 지위 때문에 일부러 데려왔고, 그 작전이 먹혀서 별일 없이 들여보내 준 모양이었다.

본래 ‘고향 친구’라는 직위는 굉장히 독특한 것이어서, 황제건 주석이건 다 눈 아래로 깔아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들은 이제 아무도 안 부르는 시준의 옛날 아명을 함부로 외쳐대며 낄낄거렸다.

“처가에서는 어찌 이리 손님 대접이 박한가? 어서 한 상 잘 차려 내오지 않으면 사위가 첫날밤부터 기어 다닐 줄 아시오!”

시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도 먼저 장가가는 친구 발바닥 패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상을 어떻게 차리건 흠씬 두들겨 맞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첫 번째 봉투에 얌전히 들어오는 함진아비 따위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 주석의 발바닥이 온통 부르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치 없는 녀석들이 진짜로 시준을 흰 끈에 묶어 매달려 하자, 주석을 위해 죽기를 마다하지 않는 옹위대가 나섰다.

시준은 긴장했지만 이들 또한 축제 분위기 망치고 싶지는 않은지 그저 껄껄웃으며 점잖게 해산시켰다. 홍득주 또한 입이 벌어질 만큼 푸짐한 밥상으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했다.

시준과 지유는 관례대로 신부 집에서 첫날밤을 치렀다. 홍득주는 당연히 큰방을 내주었으나, 시준과 지유는 원래 시준이 쓰던 방이었던 행랑간에서 머물기를 희망했다.

시준은 가볍게 기침하는 지유를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지유는 시준을 올려다 보고 말했다.

“여기에서 네가 기침약 준 거 기억나?”

“그럼. 네가 너비아니 갖다 준 것도 다 기억나.”

“이제 평양 가면 여기에 다시 오기는 어렵겠네. 그간 평양성에 누워 있어서 여기가 그리웠어. 우리가 자란 곳이잖아.”

시준은 지유의 손을 잡았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데려올게. 명절에도 장주님 뵈러 올 수도 있고.”

“주석께서 그렇게 한가하겠어?”

장난스러운 지유의 물음에 시준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런 건 너를 구하기 위해 한 일이 생각지도 못한 산물(産物)을 낳은 것뿐이야. 너에 비하면 전부 하찮아. 나도 그런 감투는 바라지 않았고……. 5년만 지나면 다시 총선거가 있어. 그때는 다른 사람이 뽑히겠지. 그 후에는 네 곁을 하루라도 떠나지 않을게. 죽을 때까지.”

시준은 지유가 대답하지 않자 고개를 내렸다. 간소화되었다고는 해도 혼례가 꽤 피곤했던 모양인지 지유는 잠들어 있었다. 시준은 그녀가 추울세라 이불안에서 지유를 끌어안았다.

피곤한 것은 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 시준의 숨소리가 규칙적이고 느리게 바뀌었다.

그러자 시준의 품 안에 있던 지유가 눈을 떴다. 지유는 잠든 시준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으며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그래. 죽을 때까지만 그렇게 해줘.”

좀 과장해서 의주의 거지를 다 먹여 살렸다고 표현할 만한 잔치는 3일 내내 이어졌다.

간소한 예식에 대비해서 엄청나게 많이 풀린 쌀과 고기며 술은 이 행사를 ‘권력자의 사치’ 대신에 ‘주석의 대범함’으로 해석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기회, 다시 말해 야바위꾼에게 최적의 사업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원래 보성군(寶城郡)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김장순(金長淳)과 함께 고구마 재배를 연구하다 혁명막부로 온 농상진흥국(農桑振興局) 부국장 선종한(宣宗漢)이 그러했다.

“이 큰 경사를 맞아, 막부에서는 주석에 대한 경애의 뜻을 표하기 위해 의주사람을 우대하기로 하였소.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상조농장에 들 자를 특별히 뽑겠소!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가뭄이 들건 홍수가 나건 상조농장에서는 절대 굶어 죽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데 세상에 이보다 더 땅 짚고 헤엄치기인 노릇이 어디 있겠는가?”

대신 풍년이 들어도 딱히 뭐가 더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점은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멍청한 자는 혁명막부의 관료로서 일익을 맡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율 상승이 예상될 때는 고정이자 대출을 택하는 게 현대의 상식이듯이 이때도 다르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흉년에 베팅한 기민들은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선종한과 나란히 농상진흥국 부국장으로서 여기 온 김장순은 영국에서 수입한 모래시계를 탁자에 세우고 깃발 아래에서 외쳤다.

“자. 농사일이란 용력을 써야 하는 법이지. 저쪽의 깃대를 돌아 이 사구(沙晷, 모래시계)가 다 될 때까지 들어온 사람 오십 명을 뽑겠소. 만약 오십이 넘으면, 그때는 팔심을 겨뤄 볼 것이오!”

저 말인즉슨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게 아니란 소리다. 유민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치열한 경쟁 속에 농상진흥국 국원들의 손길도 바빠졌다.

본래 선종한이나 김장순이나 그럭저럭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서 장사꾼처럼 손뼉 치고 점잖지 못하게 소리 질러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이들이 쓸모 있는 재주를 갖춘 것이 화근이었다.

두 사람이 서울에서 고구마에 천착하고 있을 당시, 이강회도 농사에 골몰하고 있었다. 실패만 거듭하던 둘의 고구마 농사와 달리 돈 뿌려 군관 수확하고 물뿌려 대마 거두는 알찬 농사였다.

자금이 모자라 땅 일부를 팔아야 했던 이들의 농토를 이강회가 대마 재배용으로 사들이려 한 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

이강회는 이들의 능력이 의주감자를 보급한 시준에게 귀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돈만으로는 넘어올 것 같지 않아서 이강회는 약간의 계교를 꾸몄다.

김이익이 고용한 정치깡패들이 반역자 잡는다고 서울을 뒤집어놓기 시작하자, 오죽당은 그 두 사람이 이요헌의 도당이라며 스리슬쩍 무고했다.

그러고는 한편으로 두 사람에게 어서 떠나지 않으면 살과 창자가 소금에 푹삭혀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두 사람은 의심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청계천 무뢰배 서너 명이 찾아들어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강회는 바로 그 순간 오죽당원을 이끌고 나타나 거짓말처럼 통쾌한 구출극을 펼쳤다. 무뢰배들은 세 배는 되는 오죽당원에게 두드려 맞고 뻗었다.

이런 일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이강회는 별 부담 없이 그 무뢰배들을 ‘이요헌의 수하’로 조작해 젓갈로 만들었다. 어차피 김이익은 정치깡패가 누구인지, 몇 명인지조차 모르는데 뒤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김장순과 선종한에게는 가족까지 모두 안전하게 평안도로 피신시켜 주겠다 약속했다. 물론 그것은 여지없이 지켜졌다.

나중에 보고받은 시준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제는 언젠가 천벌을 받을 거요.’

‘그럴 리가 있나? 천벌은 사형, 아니 주석 동지에게 모두 내려서 내게는 남은 천벌이 없을 걸세. 핫핫!’

김장순과 선종한은 나란히 농상진흥국 부국장에, 그리고 이강회는 농상진흥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강회는 다시 한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계교를 써서 두 사람을 의주에 딸려 보낸 것이다.

상조농장은 사실 오겠다는 사람 다 받아줘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이런 체제가 태만과 비효율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조선 시대 사람들마저 다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강회는 장사의 기본인 블러핑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명의 부국장은 생명의 은인인 국장의 뜻을 의주에서 충실하게 실천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오! 주석의 혼인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런 기회가 또 있겠는가?”

“평양에서는 이미 자리가 다 차서 입주권(入住券)을 사고판다 하는 이야기 못들었는가! 어서들 오시오!”

농상진흥국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신부 집에서 3일을 보내고 난 시준이 마차에 지유를 태우고 ? 이건 진짜 영국 마차를 시준의 개인 자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 평양으로 돌아가는 행렬 뒤에는 세 자릿수의 신규 상조농장 입주자가 따르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위치는 미묘하다.

원 역사에서 대비가 예우를 양보함은 물론, 환후가 있으면 별도 관청까지 설치해 가며 나은 후에는 대사령도 반포하는 등 부족하지 않은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신원되지 않은 지금 그녀가 대비보다 ‘관직’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대비처럼 왕이나 조정에 바로 하교를 내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신하들이 혜경궁의 의중을 직접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추석 인사’ 들어갔다 온 김조순은 그것을 핑계하여 마치 혜경궁이 자신에게 그 일을 지시한 것처럼 말했다.

“혜경궁 저하(邸下)께오서 환후가 갈마들고 보령 팔순이 머지않으신지라 존숭하는 예를 갖춰야 하오. 근래에 국난을 당하여 난적에게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당당히 위엄을 유지하신 그 기상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

마땅히 신하들이 나서서 좌우를 모시지 못한 부끄러움을 사죄하고 자리를 올려 드려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의 시호를 추숭하여 왕대비(王大妃)의 직임을 회복시켜 드리는 것보다 좋은 수는 없소.”

왕통을 새로 만들어 수주군 이병원을 즉위시키기 위한 밑 작업이라는 거야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그러나 영조가 뒤주와 게장으로 마법처럼 꼬아버린 조선 왕실의 족보를 생각하면 예송논쟁이 일어나도 몇 번은 일어났어야 했을 민감한 사안이다.

당장 김조순은 이공을 부정하고 이병원의 즉위를 의식하여 왕대비라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대왕대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유학자들이 칠일 밤낮의 승부를 불사할 논쟁거리가 넘쳐난다.

하지만 김조순은 이런 일에 시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논쟁의 유서깊은 필승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조순은 별로 우회적인 표현 없이, 훈련도감 군대가 서울 곳곳에 주둔하며 순찰하고 있음을 명백히 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 많지만 그럼 난 칼 들 테니 넌 붓 들고 싸우자고 하면 찬성할 자는 없다. 서울 유일의 오천 군세 앞에 논쟁 따윈 무의미하다.

아직 경상도에서 별다른 소식을 듣지 못한 대비 김씨는 예상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인 김조순의 행동에 입술을 깨물었다.

작가의 말

1. 조선에서는 무당과 의원(전근대에는 두 범주가 대충 유사하게 취급됐습니다)을 천대하였지만 한편으로 세종이 용하다는 판수에게 집을 상으로 내려 주기도 했고, 조상에 대한 제사 이외의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했지만(천주교 유입과는 관계없이, 조선 초중기의 법전이던 대명률에도 규정된 사항입니다.) 가뭄 들면 국가 공식적으로 도교의 초제를 지내려 다녔으며 공무에서 점과 무속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나 주술을 부리는 자는 처벌했습니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 자주 인용되나, 이처럼 유교적 합리성은 근대적 합리성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범주가 많이 다르죠. 주역은 되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식으로 칼같이 나눌 수도 없고요.

비슷한 맥락에서, 주역은 전근대 내내 철학서와 점술서의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작중 정약전이 인용한 『역전(易傳)』인데 이는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가 저술한 것으로서 전자의 입장에 치중하고 있죠.

2. 정약전이 말한 혼인 적령기와 택월은 모두 작중 나온 협길통의 및 이를 증보 개정하여 고종대 간행된 '연길귀감' 등에 근거하며, 구체적 사항은 이수동, 2022, <조선후기 혼례택일 연구>를 참조했습니다.

3. 조선 시대의 혼례에는 현재의 주례 역할이 없었습니다.(요즘 한국에서도 서서히 없어지는 추세죠) 주례라기보단 사회자의 역할로 집례, 혹은 집사가 있었지요.

또 현대와 다른 점은, 결혼 예식이 실질적인 결혼/혼인신고가 법적인 결혼으로 취급되는 현대와 달리 이때는 예식 전 사주단자를 주고받는 단계에서 결혼으로 인식되었으며 이 이후 결혼이 파토나게 되면 이혼으로 여겨졌습니다.

작중에서는 간략하게 지나갔는데, 혼례에는 원래 여섯 가지의(사대부가에서는 더 축약해서 네 가지) 예가 있고 정약전이 말한 '의혼'이 그 첫 단계입니다.

결혼식에 해당하는 대례는 마지막에 신랑이 신부를 맞아 오는 '친영' 의 일부였습니다. 기러기를 주러 갔다는 말은 이 대례 중의 전안례(奠雁禮)로서 신랑은 백마를 영도하는 '기럭아비'에게 기러기를 받아 상에 올려 놓고 예를 치릅니다.

4. 옹위라는 말은 지금 북한에서 주로 쓴다는 인식이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매우 자주 쓰였던 말입니다.

5. 선종한, 김장순은 조선의 고구마 재배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당대 조선,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기근 해결을 위해 (일본에서 수입된) 고구마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선종한과 김장순은 북쪽 서울에서의 고구마 재배를 성공시켜 고구마를 중부지방까지 확대한 공헌이 있습니다. 저서로는 '감저신보(이때 고구마는 감저, 감자라고 했습니다)'가 있죠.

6. 소제목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서양과 일본에서 주례사로 많이 알려져 있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나 "백년해로"등이 더 많이 쓰입니다.

7. 입주권의 권이 權이 아니라 卷인 것은 의도된 표현입니다. 들어갈 수 있는 표라는 뜻입니다.

36. 어긋나는 비탈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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