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13화 (113/284)
  • 113화

    34. 드러나는 밑그림(1)

    기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시 더듬더듬 말했다.

    “나도 뭔가 주고 싶은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너도 많고, 요즘은 산에 가지도 못하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로 새신랑에게는 호피(虎皮)만한 게 없다고 하던데…….”

    “그만, 그만.”

    보나 마나 시준도 알고 있는 조선의 대표적 속설 중 하나인 ‘호피를 깔고 자면 정력이 굳세어진다’정도의 소리임에 분명했다. 기랑이야 그게 결혼할 때 최고로 쳐 주는 모피라는 정도로 알아들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사실도 아니거니와 사실이라고 해도 반갑잖은 배려였다. 혼인이 머지않았다고 한들 지유는 중병에 걸린 환자다. 신혼의 달콤함은 미뤄 놓아야 한다.

    “어쨌든, 내가 가을이 어쩌고 혼잣말한 건 농사 얘기지 그 얘기는 아니었어.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그리고 이건…….”

    웅담은 그냥 너 가지든지 백발백중회에 돌려보내라고 말하려 했던 시준은 기랑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나중에 아프면 잘 쓸게. 지유도 이거 먹고 낫는 병이었다면 좋았겠는데.”

    “으응.”

    지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함으로써 시준은 자기 태도를 다시 한번 확정했다. 그는 기랑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시준이 기랑에게 무엇이라는 말인가?

    기랑의 마음이야 이제는 시준도 안다. 허나 기랑에게 그 말을 직접 들었던 그때, 영변부 습격 전야(前夜) 당시에 시준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거부했다기보다는 사고를 봉인당한 채 옴짝달싹 못 했다는 편이 더 적절하긴 해도 결과는 같다.

    차마 기랑에게 직접 하기는 어려운 얘기지만, 시준은 기랑에게 애정을 빚진 바 없다.

    때맞춰 홍총각이며 오죽당이 들이닥친 결과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만약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면 기랑은 그녀의 말마따나 ‘신표’를 시준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인가?

    시준은 아마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땐 지유가 납치되었을 때였어.’

    이건 현대인이라 축첩을 할 수 없고 있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유는 당시 ? 물론 직접적으로는 김유근과 홍경래의 죄이지만 ? 넓게 보자면 시준 때문에 뜻하지 않은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차라리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자기 자신이 귀양 갔을 때 첩질하는 게 낫지, 자신 때문에 납치된 사람을 두고서야 아무리 윤리 갖다버린 전근대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썩 마음에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시준은 그렇게 납득하고 생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육체와 정신의 주인이 아니다. 시준의 마음속에서 전혀 허락한 적 없는 심상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지유가 돌아온 지금은 어떤가?’ 하는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그 모든 것을 의무감이라는 망치로 때려 박아 눌러 버렸다. 기랑은 그의 동료이며 가족이고, 지유는 연인이며 아내다. 그 이상은 지금 생각해서도 안 되고 생각할 수도 없다.

    잠시 후, 날뛰는 정신을 일단 복종시키는 데 성공한 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좀 편해지자 그는 기랑에게 미소를 보낼 수도 있었다.

    “너도 간병하느라 애썼어. 내 호위는 이제 혁명군에서 부대를 붙여야 한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 무력위원회에서 곧 조치를 할 거야. 이제 지유 챙기는 시간 말고는 네 볼일 봐도 돼.”

    기랑이 “너는 이제 해고야!

    “라는 말을 들은 사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 내가 더 칼질 잘 하고 총 잘 쏘는데?”

    “그, 그래. 나도 알아. 너 피곤할까 봐 그런 거야. 그간 병구완하면서 백발백중회하고도 얽히고, 그 와중에 나 따라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잖아. 벼슬아치들 급가(給暇, 휴가) 같은 거지. 나도 자주 가겠지만 지유나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봐 주고, 그 외에는 쉬다가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뭐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시준은 여태까지 기랑의 패턴으로 봤을 때 이번에도 안 간다며 고집부릴 거라 예상하고 반쯤은 포기한 채 횡설수설 떠들었다. 기랑이라면 시준의 옆에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쉽게도 시준의 지나친 자의식이 틀렸다. 기랑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논밭 마지기쯤이야 어렵잖게 줄 수 있고, 이 기회에 정착하는 것도……. 뭐?”

    “하고 싶은 게 있어. 농사 말고.”

    시준은 침을 삼켰다.

    “뭔데?”

    “나도 글 배울래.”

    이 시점에서 기랑의 사고 과정을 시준이 다 알지는 못했다.

    이제 거의 일국의 영주라고 할 수 있는 시준의 옆에 지유처럼 연인이 아니라 동료로 남아 있으려면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칼부림과 총질 말고 다른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 문서와 씨름하는 시준을 하루 종일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쪽이 떠올랐다는 것은 기랑도 설명하지 않았다.

    “야학 말하는 거야? 그거야 뭐…….”

    야학이라면 부녀회의 주도로 이제 여자들도 꽤 다닌다. 당연히 장소는 엄격히 분리되어 있지만 그것만 해도 이 나라 역사상 초유의 업적이다.

    이는 총선거 당시 모든 부녀회의 대표로 선발되어 당당히 의원석 하나를 차지한 성천군 출신의 젊은 여류시인 김부용(金芙蓉)의 공이 컸다.

    김부용은 원래 관기였는데, 역사에서는 20년쯤 후 기생 그만두고 김이양(金履陽)의 소실로 들어가나 지금은 혁명군에 의해 평안도 관기가 죄다 해방되어 대신 부녀회를 이끌고 있었다.

    주석이 부녀회와 노비당을 자기 세력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많았던 데다 김부 용은 이때 이미 선비들 사이에서 운초(雲楚)라는 호와 함께 문명(文名)이 알려진 사람이어서 부녀회 사업은 예상외로 수월했다.

    시준도 기랑이 그런 야학에 다니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밤에 무리무리 가잖아. 나는 지유도 돌봐줘야 해서, 스승 모시고 따로 배워야 될 것 같아.”

    “으음. 부녀회 전문위원(김부용)에게 따로 와 달라 부탁해 볼까? 내 소개라면해 줄지도…….”

    기랑은 그렇게 권력의 사적 유용에 골몰하는 시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준은 조금 후에야 그 시선을 알아채고 묻는 눈길을 돌려주었다. 기랑이 말했다.

    “네가 배웠던 걸 나도 배우고 싶다는 거야.”

    시준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겨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긴 김부용 말고도 여자인 기랑을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시준의 옛 스승정약용이다.

    그런데 기랑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시준의 해박한 서양 지식과 날카로운 영도력이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단련되었다고 믿었는데, 후자야 시준도 질색할 소리라 해도 전자는 오히려 상황이 거꾸로다. 정약용에게 시준이 가르친 것에 가깝다.

    허나 이제 정약용도 푸셰와 말이 통할 정도로 서양에 익숙해졌고, 학문의 전체적이고 기본적인 역량 자체는 시준과 비교도 할 수 없는지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선생님께 말해 볼게.”

    남은 일을 처리한 시준은 지유에게 들러 본 뒤 곧바로 정약용을 만나러 갔다.

    만들어 온 집단농장 체계를 검토해봤더니 역시나 매우 좋더라고 추켜세워 준 다음, 정약용의 기분이 괜찮아 보이면 기랑을 제자로 받아주십사고 부탁하겠다는 얄팍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약용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정약용은 시준을 보자마자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화부에서 사달이 터졌소. 주석 동지.”

    다른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말투와 호칭도 공식적으로 바뀌었다. 허나 시준은 어떻게 이리도 태세전환이 자유자재인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삼화부요? 설마 영길리군이…….”

    “아니, 영길리가 관계된 건 맞지만 지금 생각하시는 그건 아니오. 일전에 내 가형이신 삼화부 인민위원(정약전)께서 말씀하신 그자가 실제로 간자인 것 같소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여섯 시진쯤 전, 불굴의 간첩 모리 후사아키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삼화부 부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급히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둡기는 했지만 글은 안 보여도 쓸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불을 밝혀도, 또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도 그 글은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자신을 포함한 모리 가문의 일부 주요 인사들만이 해독할 수 있는 암호였다.

    <천운으로 항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자세한 사정이나 여러 숫자, 그림, 지도는 별단을 보아 주시기 삼가 바랍니다. 여기서는 결론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한두 달간 세밀히 보건대, 이기리스(イギリス, 영국) 사람들은 이 평안도의 소위 카쿠메이바쿠후[革命幕府]라 불리는 세력과 결탁한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청국을 도모하는 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동맹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허나 이 ‘바쿠후’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왜 이기리스 사람을 돕는지도 의문입니다. 조선 인들은 저를 의심하고 있으며, 제 거동은 항상 누군가 지켜보는 처지라 더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사방이 카쿠메이[革命] 두 글자와 붉은 깃발로 가득 차 있는데, 우두머리를 슈세키[主席]라고 칭한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사족과 국왕의 지위는 여기에서 전연 통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들이 그저 도적떼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정체(政體)를 세운 것인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제 조선 통신사가 오지 않는 이유는 밝혀졌습니다. 확실하게 조선의 혼란 때문입니다. 이 평안도는 도자마 번처럼 오랫동안 박해받았던 지역으로 이제 반란을 일으킨 바, 이에 대해서는 상술하였던 별단에 자세히 썼습니다.>

    거기까지 썼을 때, 갑자기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깜짝 놀란 후사아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삼화부에서 어찌어찌 입수한 연필 끝이 연약한 조선 종이를 약간 찢어 버렸다.

    “야! 에또 이놈 어디 갔어!”

    후사아키의 조선말은 유창하지만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말 중간중간에 떨어뜨리던 일본어 군말이 그대로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진작 가명을 만들어 두지 않은 후사아키가 잘못했다.

    그간 후사아키를 말 잘 못하는 외국인이라고 참 많이도 괴롭혔던 십장(什長)은 금방 후사아키를 찾아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조선 속담에도 불구하고, 십장은 청어 말리는 가로대 아래에서 멋쩍게 웃으며 나타난 후사아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지금 시각에 고깃배 많이 드나드는 거 알아, 몰라? 이리 바쁜 때에 어디 몰래 숨어 있으려고?”

    삼화부 항구는 거의 영국 해군이 시설을 마련했다. 그리고 대강 공사가 끝나자 평안도 사람들은 뻔뻔한 얼굴로 들어와 고맙게 이용했다.

    로드 암허스트는 대청 전쟁에 골몰하느라 신경 쓸 시간이 없었고, 대신 불평하는 동인도 회사에게 시준은 항만세를 조금 할인해 주었다.

    정약전은 그가 이주에 일조한 흑산도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삼화부 인민위원의 권한을 활용하여 그들의 생활을 안 보이게 보살피고 있었는데, 마침 그중 어민이 많은지라 여기에 투입하여 사업을 기획했다.

    새 돈벌이 찾던 정치국에서도 흔쾌히 허락하여 적극 밀어준 청어잡이가 주 종목이었다. 조선 어업이 워낙 궤멸적 상태라 말 그대로 블루오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려서 먹는 건 물론 기름도 짜내고, 남은 찌꺼기는 비료로도 쓸 수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후사아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선뿐만 아니라 이기리스 배도 한 척 와 있었다.

    요즘 영국 배 드나드는 일을 자세히 관찰하고 오늘을 결행일로 정한 보람이 있었다.

    십장의 성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처럼 근본도 모르는 놈을 받은 게 잘못됐어. 내 당장 인민위원회에 고해서 어디 광산 같은 데로 쫓아내라고 해야겠다. 네놈이 간자라는 소문도 슬슬 돌던데, 처신 잘못하면 저 수많은 반동처럼 호랑이 밥이나 될 줄 알아라. 뭐해? 빨리 안 움직이고!”

    후사아키는 그 말대로 했다. 그는 빨리 움직였다. 좀 지나칠 정도로.

    숨겨 가지고 있던 자그마한 식칼이 십장의 배를 파고들었다. 십장은 고함 한 마디 치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다. 후사아키는 십장과 그에게 꽂힌 칼을 내버려두고 힘껏 달렸다.

    요즘 삼화부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윌리엄 자딘 역시 장자도에서 대부분의 시설을 철수하고 삼화부에 자주 드나드는 중이었다.

    오늘도 거래차 항구에 배를 댔는데, 당직 선원의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웬 놈이 자신을 조선에서 도망치는 망명객이라고 주장하며 불법 승선을 시도 했습니다.”

    다소 놀라긴 했지만 윌리엄 자딘은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조선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상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 국내 사안에 대해선 엄정 중립이다. 하물며 우리는 동인도 회사 직속도 아니잖나. 시끄러운 일 생기기 전에 돌려보내.”

    “그, 그게……. 그자는 자기가 조선인이 아니며, 불법적으로 잡혀 온 일본인 포로라고 강변 중입니다. 처음 지껄이는 게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네덜란드어였는데 다행히 조선말을 할 줄 알아서 겨우 통했습니다.”

    “뭐?”

    동양인이 네덜란드어를 한다면 일본인이 맞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자딘은 곧 후사아키를 만나게 되었다.

    후사아키는 원 역사에서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의 함대에 몰래 타 미국 가려 한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처럼 장황하게 애원하며 밀항 의사를 늘어놓았다. 영국인과 일본인이 조선말로 대화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자딘은 후사아키의 주장, 그러니까 조선인이 그를 납치하여 노예 노동을 강요했으며 자기는 일본의 외교 담당 관료이고, 조슈 번은 특히 개항에 관심이 있으니 자기를 일본에 데려다주면 아마도 영국의 목적일 대청 전략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게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점을 알아보는 데에 밀무역으로 단련된 통찰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윌리엄 자딘은 찌르듯이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분을 밝혔으면 되었을 텐데. 이곳의 주석 정시준은 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다. 무턱대고 외국 고관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부릴만큼 멍청한 위인이 아니야. 왜 그러지 않았지?”

    “그, 그건 그런 높은 사람에게 말 붙여 볼 새도 없이 노예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말이야 아랫사람들 통해서 대신 전할 수도 있어. 난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아. 떳떳하지 못한 목적으로 여기 왔기 때문이지. 떠들던 계획이 거창한 건 인정하나 먼저 그 옷에 묻은 피나 씻고 왔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사아키는 마지막에 저지른 치명적이고도 어이없는 실수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딘의 휘하 선원들이 억센 팔로 후사아키를 내리누르자 그들에 비해 체구가 반밖에 안 되는 후사아키는 그냥 찌그러졌다. 자딘은 헐떡대는 후사아키 앞에서 이죽거렸다.

    “나를 만난 게 불운이라고 생각하게. 저번에 시준에게 들은 얘기로 남쪽 섬에 에식스와 킹피셔를 보내 데려온 자 중 수상한 외국인이 있었다던데 그게 당신이었군. 미안하지만 당신을 ‘잡아 온’ 배를 알선한 자가 바로 나야. 하하! 이거, 혁명정부에 또 하나 빚을 지울 수 있겠는걸. 사업의 번창을 미리 경축해야겠어!”

    이 소식은 정약용에게 보고되고, 몇 단계를 거쳐 외사통호국장이 내리는 모리 후사아키의 압송 명령이 떨어졌다.

    시준이 정약용에게 찾아간 시점이 이때였다. 그래서 주석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시준이 정약용과 오래간만에 같이 의주감자를 나눠 먹으며 저녁을 해결하는 동안,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는 함거, 아니, 마차(馬車)가 도착했다.

    영국인들의 조언에 따라 도입한 물건이다. 다만 양심 상실이 동인도 회사의 입사 최소조건인지라 가격은 그리스도조차 대노하여 왼뺨을 먼저 올려붙일 수준이었다.

    허나 시준은 고종처럼 호구가 아니었다. 그는 꺼지라고 말해 준 다음 목수들을 동원해 함께 직접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약간 주먹구구식이긴 했다. 시준은 우아한 조선 빅토리아 식 마차를 기대했지만 결과물은 굳이 말하면 춘추전국 피난민 식에 가까웠다.

    게다가 충격흡수 장치나 바퀴 등의 기술이 모자라서 주행 중 자주 망가졌다.

    의외로 마차는 (현대의 자동차처럼) 과학기술을 꽤 드러내어 주는 산물이다.

    시준의 손재주 하나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일은 못 되었다.

    그래도 현재 평안도에서 가장 빠른 육로 운송 수단이었다. 외항인 삼화부에서 평양까지 우선적으로 길을 닦아 놓은 것도 주효했다.

    조선만의 주체적 마차인 만큼, 멀미에 시달리던 후사아키도 유럽 마차와는 판이한 체험을 했다.

    하인이 문 열어주면 점잖게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우산 짚고 내리는 신사는 없었다. 대신 후사아키는 마부에게 되게 걷어차인 다음 날아오르듯이 튕겨 나와 바닥에 구르며 신음했다.

    윌리엄 자딘의 말은 정확했다. 시준은 후사아키가 자기 목적을 밝히고 일본과의 협조를 요청했다면 진지하게 고려할 생각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막부의 과세를 피해 농사가 아닌 상공업 전매로 부를 쌓을 만큼 영리한 조슈 번이라면 훌륭한 거래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지나치게 성실한 간첩은 자기 역할에 너무 심취했는지 영국인에게 잘난 척할 거리만 잔뜩 만들어주고 잡혀 왔다.

    같이 온 자딘의 편지로 이자의 신원과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한 시준은 그런 악감정을 담아 빈정거렸다.

    “너 같은 녀석을 간자라고 보낸 장주(조슈)의 모리 가문도 참 딱하게 됐군.

    길게 얘기할 깜냥도 못 되는 자 같으니 허튼수작 그만두고 조선에 왜 왔는지, 여기다 뭘 썼는지나 어서 불어. 남은 문서도 다 내놓고.”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선비로서 가문에 대한 충정을 저버릴 것 같으냐!”

    허탈해진 시준이 “그럼 형식적으로라도 고문해 볼까?

    “ 하면서 옛날 만상 패거리 출신 혁명군을 호출하려 할 때, 정약용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하찮은 필부의 절개를 들어 입을 다문다면 그거야말로 가문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안부원군의 위임을 받아 평안도를 다스리고 있는데, 우리가 너를 묶어 서울로 압송하고 서울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다면 과연 가문이 무사하겠느냐?”

    정약용은 일본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어 그쪽 사정만큼은 시준보다 잘 안다.

    그런 정약용의 엄포는 후사아키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금 일본의 체제 및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그 협박은 허튼소리가 아니다. 이 일을 막부에 들켰다가는 조슈 번은, 정확히는 모리 가문은 그대로 끝장난다.

    최악의 경우 영지를 반납하고 배를 갈라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는 사사건건 불손한 조슈 번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후사아키는 발악을 해 보았다.

    “조선왕이 패퇴하여 자리가 비었다는 것쯤은 나도 들어 안다! 게다가 너희는 반란군일진대, 너희가 어찌 감히 통신사를 보낸다느니 만다느니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지금 상대하는 자는 그저 그런 조선 선비가 아니다. 요새 평안도의 사족 사이에서 혁명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라고까지 불리는 정약용이다. 그는 후사아키를 간단히 논파했다.

    “계사가 잠깐 비었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사람이 없겠는가. 게다가 지금 우리 주석이 갖고 있는-”

    그 순간 시준은 잽싸게 절충장군의 인수를 들어 보였다. 외국인 상대하는 일에 필요할지 모르니 처박아 둔 장에서 꺼내 갖고 오라 한 정약용의 충고가 주효했다.

    “-장군의 인수를 보고도 우리가 반란군이라 하는가? 뭣하면 서울에서 보낸 평서대원수의 문서까지 보여줄 수 있다.”

    후사아키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은 시준이 끼어들었다.

    “네가 칼 휘둘러 찌른 사람도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하니 그 행패는 무마해줄 수도 있다. 만약 다른 뜻을 품지 않고 성실한 신의를 보여준다면, 우리도 절대 비밀을 엄수함은 물론 장주와 조선, 그리고 서양 사이의 길을 여는 데 힘써 도우리라. 알아서 택일하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모리 후사아키는 땅 밑으로 파고들 정도로 꿇어앉아 절하여[土下座] 주석 앞에 사죄하고 예절을 표했다.

    작가의 말

    1. 호피 얘기는 조선에 실제로 있었던 속설입니다. 그 외에 호랑이 뼈도 약재로 쓰였고..

    2. 정약용뿐만 아니라 정약전도 귀양살이 하면서 첩을 얻어 자식을 보았습니다. 이때 정약전의 본부인 평산 김씨와 며느리는 상당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정약전의 아들 정학초가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남자가 없었던 셈이죠.

    그래서 준재였던 친척 정학기의 아들을 정학초의 양자로 들이고 싶다 하고, 정학기도 쾌히 허락하여 얘기가 진행되나 싶었는데... 정약전의 편지를 받은 정약용이 "흑산도에 형(정약전)이 낳은 서자가 있는데 서자를 적자로 입적시켜야지 왜 멀리서 양자를 새로 들이냐? 예법에 어긋난다" 고 태클을 겁니다. 정약전도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다고 찬동하여 일단 보류되죠.

    이 일이 기록된 정약용의 편지는 상당한 인용과 근거로 점철되어 있어 유교 전통적 종법과 조선에서 토착화된 종법을 다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당사자들은 환장하죠. 멀리 가서 첩질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꼬박꼬박 어깃장 놓는 이 두 형제 때문에 평산 김씨와 며느리는 아주 속이 탑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얼굴이라도 오가며 보던 친척 아이가 낫지, 서자는 정약전의 자식일 뿐 김씨의 자식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정약전의 자식이라면 정학초와 동렬인데 그러면 김씨 며느리는 과부인 채로 시동생과 같이 사는 셈이라 그것도 애매했을 겁니다.

    결국 평산 김씨가 나 좀 살려달라고 정약용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약용의 부인 홍씨도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나란히 목 매는 꼴 보고 싶냐고 편지하여 정약용도 한 발 물러납니다.

    정약용과 정약전이 인격적으로 다른 부분에서는 흠잡을 데가 많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작중 많이 나온 대로 전근대의 도덕은 현대의 도덕보다 절대량이 낮은 게 아니라 방향성이 달랐다는 한 예겠죠.

    3. 운초 김부용은 남자를 무색하게 한다는 평을 들은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조선 후기 여성 활동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비슷하게는 죽향(竹香)이라는 여류화가도 있지요.(운초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부용의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1830년대에 결혼하는 건 맞습니다.

    당시 적령기의 결혼이라면 작중 시점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으나;; 정황상 결혼은 기적에서의 도피 수단으로 상당히 늦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하에, 작중 시점에서는 성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만큼 젊은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4. 청어잡이는 물론 그 전에도 있었지만 대규모로는 메이지 시대 일본 북부에서 본격적으로 일으켰던 사업 중 하나인데, 이게 근대화에 필요한 식량, 비료, 기름을 제공하는 데 한 몫을 합니다.

    일본 만화 <골든 카무이> 같은 데에서 잘 묘사되고 있죠. 조선 시대에는 평안도나 황해도에서도 청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주로 별로 없는 조선 어민 대신 중국인들이 몰래 와서 잡아가는 게 많아서 문제였지만요.

    4.  요시다 쇼인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거물로, 물론 지금 시대 인물은 아닙니다.

    페리 제독이 흑선내항으로 일본에 왔을 때 그의 기함인 포우하탄(USS Pawhatan)에 거룻배를 훔쳐 타고 무작정 다가가 미국 데려가달라 요청하는 기행을 벌이나, 페리 제독은 당연히 거절하고(일본 개항이 목적이었는데 이런 일로 트집을 잡히면 협상에서 불리해질 게 뻔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돌아와 자수하여 감옥에 갇힙니다.

    5. 마지막의 土下座는 도게자라고 읽습니다. 일본의 절 예법 중 하나인데 (한국처럼) 인사나 감사가 아니라 사죄할 때 쓰는 예입니다.

    34. 드러나는 밑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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