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33. 얻지 말고 빼앗아라(2)
비변사 당상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이 기존에 평안도와 심양을 거쳐 육로 사절만을 보냈던 건 배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건 기존 사행의 절차와 관례를 완전히 무시할 만큼의 비상사태라는 의미다.
“피국(청)에 원병을 청하여, 흑산도의 영길리군을 내쫓고 평안도로 십만 팔기군을 불러와 역적을 전부 진압한다.”
육로로는 보낼 수 없다. 시준이 막아설까 봐서가 아니라, 보나 마나 장자도를 북부의 근거지로 삼았을(조정에서는 아직 삼화부 군항의 존재를 잘 몰랐다) 영길리군이 막아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군을 평안도로 진입시켜 영길리 놈들을 전부 주륙 내어 버리고 이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반적도 토벌한다. 아무래도 한번 함락해 본 놈들어 잘할 것 같았다.
더하여 평안도를 지나오는 김에, 사사건건 수상한 그 정시준의 혁명막부인지 뭔지도 반 시체로 만들어 놓는다는 게 김조순의 계획이었다.
아들이 여전히 평양에 있다는 게 걸리지만, 굳이 시준을 적으로 규정하고 토멸할 필요도 없다.
조선이 임진년과 정유년 때 겪었고, 강남의 중국인들이 현재 겪고 있듯이 중 국군은 원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광범위한 지역에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백성이 끔찍한 피해를 입겠지만 다른 방도를 아무도 제시할 수 없었기에 결국 그 초유의 안은 승인되었다.
아무리 급해도 사신단이 아무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덜렁 천진에 배 타고 갈수는 없다. 길잡이 겸 선발대로 몇몇 실무자와 군관이 배 세 척에 나눠 타고 중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열흘 뒤, 황급히 돌아온 그들이 올린 보고는 김조순으로 하여금 벼루를 내던져 장지문을 찢어버리게 만들었다.
“천진이, 천진이 영길리 군사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대청국의 수도 관문 천진은 철저하게 초토화되었다. 김조순이 배를 보낸 시점에서는 도시 점령과 전투 자체는 끝난 지 좀 되어서 조선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명분도 실로 영국적이기 그지없었다. 청이 (자금성까지 범궐한 반란군에게 무기를 팔아먹었던) 영국 상인들을 쫓아내고 (그 불법 무기 밀매상의 굴혈인) 개항장을 점령했다는 죄였다.
로드 암허스트의 서신을 받아든 청 조신들은 면역되지 않은 사태에 당황했다.
“정녕 이게 사람의 뻔뻔함이란 말인가? 이것을 위임받은 국서랍시고 보내다니, 영길리 놈들이란 정말 나라 전부가 애비도 군주도 없는 해적 패거리인가?”
도적놈이 거꾸로 매를 든다[賊反荷杖]는 경구는 그들도 알았지만, 장구한 중 국 역사를 다 뒤져 보아도 그 말을 이렇게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실천했던 양아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반면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윌리엄 드루리 제독이 인도 해군을 끌고 돌아올 수 있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 의회는 당연히 한참 전 이 전쟁을 승인했다.
아편 전쟁 때 9표차로 전쟁이 가결된 일은 유명하다. 당시 글래드스턴은 한탄 했으나, 공정하게 보자면 그게 그나마 영국인이 역사상 최대의 양심을 발휘한 순간이라고 봐야 한다. 글래드스턴의 호소는 영국에서 ‘명예’와 ‘존엄’이란 단어가 원래 뜻대로 사용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그때처럼 표차가 적지 않았다.
영국 입장에서 정말 아무런 하자가 없는 완벽한 정의의 전쟁이었다. 자유 무역을 방해하다니, 국가의 이익과 하느님의 정의 아래 토벌해야 마땅했다. 의회는 유럽에서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찬성을 의결했다.
‘반박할 수 없는 명분’이 있는 이 전쟁은 19세기 기준으로도 악랄 무도한 영국인의 습성을 잘 보여주었다.
아편 전쟁 때 강남 사람들이 당했던 참화가 30년 정도 일찍 천진에서 펼쳐졌다. 이미 천진의 민가에는 영국군의 약탈 때문에 과장 없이 요강 하나 안 남았다. 요강도 엄연히 중국 도자기다.
굳이 있다면 사람인데, 영국은 이제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노예제를 폐지’했기 때문에 노예 장사는 안 한다. 영국은 세계 문명을 선도하는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진의 민간인은 영국군에게 놀잇감 이상의 가치가 없었다.
써먹을 데는 없지만 전통적 존경 때문에 민중을 규합할 가능성은 있는 노인들이 가장 먼저 몰살당했다. 길거리에는 난도질당한 시체가 장식처럼 내걸렸다.
방어선 건설 때문에 강제 노동에 동원된 젊은이들은 저러고 일을 시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구타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러져 어긋나버린 다리를 질질 끌면서 땅을 파고 흙을 다져야 했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제법 큰 건물을 비운 ‘수용소’에 몰아넣어졌다. 물론 영국 신사의 발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영국군은 소대 단위로 돌아가며 그 ‘수용소의 상황을 점검’하러 근무했으며, 드루리 제독은 근무 결과에 대한 어떤 보고도 받지 않음으로써 행정 부담을 덜어 주었다. 그는 병사의 사기를 귀하게 생각하는 지휘관이었다.
윌리엄 드루리 제독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대신 신사답게 감정을 절 제하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비어지는 미소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흐흠. 수도 외항의 방어가 이 정도라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해. 도대체 이 군대로 제국을 어떻게 지킨 거지?”
드루리 제독의 폄하와는 달리 청이 약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영국 해군 7천여 명과 20척이나 되는 군함의 일제 습격을 방어할 수단은 현재 인류 문명 대부분이 갖추고 있지 않다. 굳이 말한다면 툴롱이나 마르세유 같은 프랑스의 주요 군항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자기 배를 흑산도의 헨리 호프에게 인계하고 여기는 참모로서 따라왔던 조지 시모어 함장이 그 자만심에 제동을 걸었다.
“원래 대제국이란, 어느 정도 이상의 발전 단계를 지나면 군대는 자국민을 제압할 정도만 되어도 충분한 법이죠. 그 이상이 되면 로마처럼 내전의 단초가 될 뿐이니까요.
그러나 외부의 위협이 새로 생겼을 때 그 힘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제 군주가 위협받는 만큼, 중국은 필사적으로 저항해 올 겁니다. 이 나라의 수억인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대한 저력입니다.”
“저런, 자네는 지금 이 미개인의 나라를 로마에 비유하고 있군. 아시아인은 원래 권위에 쉽게 복종하고 지능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 식의 대응은 합당하다 할 수 없네.
중국인들은 가축처럼 전제 군주에게 사육되고 있을 뿐이야. 능숙한 목동은 손짓만으로도 수백 수천 마리의 양을 부릴 수 있지만, 그건 양이 원래 그런 동물이기 때문이지 절제하며 힘을 숨기고 있어서가 아냐. 양 떼가 얼마나 있든 사자를 잡아먹을 수는 없어.”
시모어 함장은 드루리 제독이 자신의 말에 왜 이리 장황하게 반박하는지 알고 있었다. 시모어 함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끝내 운하로 진격하실 겁니까?”
시모어가 말하는 운하는 당연히 중국 내륙을 관통하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다.
유럽에 대항해시대가 있었지만, 중국인은 그에 비견할 만큼 엄청난 물동량이 오가는 이 대운하가 있었기에 그런 게 필요 없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의 중요한 교통로다.
황하가 그 흐름을 바꿔 버리는 바람에 운하 북부 구간이 버려지는 1855년의 대사건도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편 전쟁 때도 영국은, 강남에서이긴 하지만 이 대운하의 관절을 공격해 마비시킴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잡는다.
이번에는 강북이다. 운하의 북부 중심 구간은 북경 바로 옆 탁군(?郡)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종점에 도착하기 전 가장 큰 도시가 바로 이 천진이다.
운하 자체는 천진 항구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로드 암허스트는 청과의 정치적 협상이 만족스럽게 끝날 때까지 천진의 무력 점거와 외부 진격 자제를 명령했다.
그리고 지금 ‘외부’의 해석에 대한 견해차가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원정 총사령관 암허스트 남작의 명령은 여기에서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정구역상 운하 또한 여기 톈진에 속해 있다. 운하를 통해 안정적으로 보급과 명령을 받으며 끝도 없이 몰려들 중국인 메뚜기 떼를 언제까지 상대할 수 있다고 보나?”
시모어 함장은 방금 네가 양 떼 따위는 수억이 있어도 두렵지 않다 했지 않느냐고 비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짓이기에 그는 좀 더 논리적인 반박을 했다.
“축성과 요새화의 진행은 항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가면 말 그대로 야지에서 부딪쳐야 해요. 말씀대로 적병은 숫자가 많고, 운하의 중요성은 그들 역시 당연히 알기 때문에 방비가 강할 겁니다. 무의미한 희생입니다.
우리 군의 물자와 사람이 고갈되기 전에 로드가 협상을 마칠 테니 기다려야 합니다.”
“협상을 빨리 마치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운하를 타격해서 황제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거지. 미루고 회피하며 거짓 핑계 대는 데에 따라올 자가 없다는 중국인도 그 지경이 되면 헐레벌떡 조약에 서명하러 뛰쳐나올 거야.
뭘 두려워하나? 이미 한 차례 쳐들어온 그 타타르 기병도 전혀 손실 없이 격퇴하지 않았나.”
4년 전 서부 변경의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지금도 티베트를 내리누르고 있던 섬감총독(陝甘?督) 살툭 창링[薩爾圖克長齡]을 우익총병(右翼摠兵)에 급히 임하여 불러왔건만 영국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창링은 몽골 팔기 출신인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우익총병으로서 다스리는 보병 이외에도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용맹한 몽골 기병까지 동원해 돌격하였다.
그러나 담벼락과 마을에 의지한 채 대규모 총격을 퍼붓는 영국군 앞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물론 현재의 청은 도광제 시절만큼 썩어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병든 노인이 젊은이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노인을 데려와 봐야 결과는 십중팔구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현재 영국군의 질은 아편 전쟁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영국 해군은 증기선의 일부 활약을 제외하면 장비 면에서 그때와 대동소이하다. 퍼커션 캡을 갖춘 최신예 보병의 투입도 아편 전쟁 후반기에나 있었던 일이다.
19세기 중후반이라면야 청 또한 원래 역사처럼 다른 서양 나라에서 군함과 무기를 일시불로 마구 질러다가 항거해 볼 수도 있었겠으나 지금은 미국도 프랑 스도 여기 없다.
따라서 원 역사와 크게 어긋난 시간의 차이는 중국보다는 오히려 영국에게 더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시모어 함장은 방책 저편에서 쌓인 채 썩어가고 있을 말과 사람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손실 없이 싸우며 기다리자는 말입니다. 왜 희생을 감내해야 합니까?”
“군인이 할 말은 아니군. 더 이상의 토론은 시간 낭비인 것 같네. 로드 암허스트를 대리하는 지휘권을 행사하여 명령하겠다. 공격을 준비하도록.”
결국 시모어 함장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사 세인트 빈센트 제독이
“왕국 최후의 닻“이라 칭송했던 왕립 해병대는 더 중요한 유럽에서의 싸움 때문에 여기 오지 못했지만, 수병만으로도 승리를 거두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는 시모어 역시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었다.
여기에서 영국 해군 수병이 처참하게 패배하여 윌리엄 드루리 제독의 능력이 의심받는다면 통쾌해할 사람은, 심지어 영국군 중에도 꽤 많았다.
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출된 수병 1천 2백 명은 격렬한 전투 후에 천진 운하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황제는 열하로 몽진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북경 방어의 총책은 당연히 황제가 신뢰하는 군기대신이자 고북구제독인 부찰복장안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부찰복장안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오랑캐 놈들이 천조를 업수이 여기는 바가 끝도 없다. 감히 이 굴욕을 겪게 하다니,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부찰복장안이 이렇게 상황에 안 어울릴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호언을 뱉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가경제는 이미 등주 수군이 전멸했을 때부터 내탕금 일부의 개방을 허락했다.
일부라곤 해도 그 어떤 경우에도 열리지 않은 최후의 금소(禁所), 청을 포함해 세상 어느 나라의 국고를 가져다 대어도 초라해질 가경제의 대금고가 황명에 의해 봉인을 풀어버린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왼손의 붕대를 찢어버린 중학교 2학년과 같았다. 부찰복장안은 물도 그렇게는 못 쓸 것처럼 돈을 펑펑 써댄 끝에 기적이라고밖에 표현되지 않는 시간 안에 막대한 군대를 집결시켰다.
조선에도 흠차대신으로 왔을 만큼 촉망받던 인재 온승혜가 이끄는 5만의 대군이 부랴부랴 출진 준비를 마쳤다.
녹영(綠營)이며 주방팔기는 당연하고 금려팔기까지 닥닥 긁어모아 만들어진 ‘선봉대’였다. 도움이 될지는 의심스럽지만 봉천(奉天, 심양 일대) 수군도 소환했다.
이제 아묵사특(阿默斯特, 암허스트)인지 뭔지 하는 오랑캐 해적 두목 상대로 협상을 해 줄 듯 말 듯 하며 밀고 당기던 치욕도 끝이다. 부찰복장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영길리 해적의 총포가 아무리 맹렬하다 한들 그래 봐야 만 명이 되지 않는다.
청군이라고 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숫자면 지려야 질 수가 없다.
군함도 두렵지 않다. 이쪽은 시간이 한참 걸리겠지만, 지금 막대한 돈을 내걸고 모집 중인 후군(後軍) 20만이 출진하게 되면 사람 무게가 함대 전부의 무게마저 능가한다. 과연 대륙의 기상이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았다.
부찰복장안은 승리를 확신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부찰복장안은 2차 아편전쟁 당시 50대 1이 넘었던 전사자 교환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7천 명의 50배인 35만 명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청과 조선, 그리고 영국은 국가로 보면 모두 혼란스러운 싸움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안쪽을 관찰해 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쟁이나 민간 소요에서 벗어나 있는 평안도는 말 그대로 평안(平安)했다.
자연스럽게 많은 유민이 평안도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군에 입대하기도 하고, 금은을 캐거나 요즘 시도해 보는 천일염전에 나가기도 하며 도로를 닦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조선에서 ‘일반적인’ 경제 활동이란 농사고 극히 일부를 제외한 조선의 전 인구는 농민이다. 과도한 혁명 선전을 듣고 찾아온 농민들은 농토를 원했다.
하지만 시준이 야밤에 칼침 맞고 싶지 않고서야 무슨 북한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할 수는 없다.
결국 시준은 유상 판매를 선택했다. 가져온 재물이 넉넉한 사람들은 그 돈으로 막부로부터 땅을 불하받을 수 있었다.
현재 혁명막부가 ‘소유한’ 땅은 상인 집단에서 출발한 막부답지 않게 꽤 넓었다. 국가 소유의 토지나 왕실이 갖고 있던 궁방전(宮房田), 군대의 둔전 등이 전부 편입되었으며, 총선거 당시 반동으로 지목된 자들에게 몰수한 토지도 상당했다.
그런데 유민이 돈 많이 갖고 있을 확률도 낮은지라 그렇게 판매된 땅은 별로 없었다. 여전히 많은 토지가 혁명막부의 공유지였으며 대부분의 유민은 거기에서 실험적인 ‘농업 노동자’로서 정착했다.
그리고 이 공유지는 앞으로 계속해서 늘여 가야 했다.
자영농의 증가는 보통 전근대 농업국가로서는 호재지만 막부에게는 그렇지 않다. 현재 막부는 토지세를 걷지 않기 때문이다. 시준은 이러다가 진짜 어떤 나라처럼 자영농을 다 반동으로 몰아 처넣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세금 징수도 고려는 해 보았다. 그러나 혁명 하나 믿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과중한 세금을 떠안기면 네가 폐주랑 다를 게 뭐냐는 원성이 쏟아질 게 분명했다.
흉년이 끝난다 해도 조선보다 더 많은 비율로 걷기는 힘든데, 조선의 ‘공식 세금’은 상당히 적어서 그보다도 낮은 세율로는 누구 코에 붙일 것도 없었다.
당분간은 혁명막부 소유의 공공사업으로 버텨야 한다.
그래서 농상위원회는 이번 가을을 기해 그 땅에서 조금이나마 수확이 나오는 대로 다 갈아엎고 체제를 개편하여 상조농장(相助農莊)을 만들 계획이었다.
말하자면 집단농장이다.
집단농장의 최대 문제인 생산성 저하 대책은 심하게 농땡이 치는 자를 각지 인민위원회 판단하에 내쫓아 버리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하고 싶어 하는 유민이야 넘치니까 말이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인민위원들의 횡포부터 시작해서 부작용은 적지 않겠지만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다.
시준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이 발상은 정약용이 적극 주장했던 여전론(閭田論)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정약용은 시준과 비공식적으로 ? 정약용은 어디까지나 외교 담당이다. 여전론에 현실적 허점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여기에 대해 논의했다.
“농장을 만들고 각지 인민위원회에서 나온 농상위원(農桑委員)을 여장(閭長)으로 삼아 지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지금 어디 농사를 지을 데가 있느냐?
가뭄이 너무 오래되어서 논에 물 대는 일은 강가가 아니고서야 어렵다. 굳이 한다면 모내기를 하지 않고 직파(直播)해야 하는데 그 옛날 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이앙법(移秧法)을 쓰지만, 북쪽이나 섬은 그래도 직파하던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농상위원회에서 노인들을 모아다가 가르치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허나 직파라고 해도 물 없이 벼가 자랄 수야 없는 노릇 아니냐?”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론은 명백했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뿐, 지금 시준에게 속고 있는 정약용만 빼고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정약용이 담당도 아닌데 안달 나서 열심히 오가며 참견하는 상조농장 중 적지 않은 수는, 쌀도 감자도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데 쓰일 것이다.
양귀비는 물이 부족해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오히려 물이 많으면 해롭다. 21세기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귀비 농사가 해마다 번창하는 원인으로 경제의 붕괴와 탈레반의 묵인 등을 주로 꼽지만, 수자원 부족이 갈수록 심해져 다른 농작물의 재배가 어려워진 것도 중요한 이유다.
기세 오른 것처럼 보이는 혁명막부의 경제는 결국 마약 없이는 지탱되지 않는다. 이 시대에는 마약이 아니라는 변명은 시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가 떠들고 다니는지 모를 ‘정 진인의 신묘한 영약’ ‘믿고 사는 약재의 대국조선산’ 어쩌고 하는 복장 터지는 선전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정상 경제로 전환해야 하기에 막 부도 어느 정도 숨 돌리자마자 면포와 염전에 적극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지금은 천리길에 한 걸음이라는 표현도 아깝다.
면포의 경우 방직 기계 몇 대가 전부다. 게다가 기계만 있다고 천이 쏟아지는 게 아니다. 원료가 있어야 하는데, 평안도는 목화를 재배하기 어려운 기후다.
송상에게 솜을 받아오고 있기는 하나 밀수라는 말이 더 어울릴 그런 규모로는 평안도판 산업혁명 따위 언감생심이다.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넓게 펼쳐 말려 소금을 얻는다는 유치한 개념밖에 전달하지 못해 삽질을 거듭하는 중이다. 다른 모든 품질을 포기하는 대신 오직 싼값 하나로만 승부하는 물건이 천일염이거늘 아직까지는 바닷물을 퍼다 끓이는 게 저렴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는 아편과 대마 말고 수단이 없다. 이 고부가가치 영농사업을 이 시대에는 있지도 않은 윤리 때문에 팽개치는 건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광태다.
정약용의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척하던 시준은 대충 얼버무렸다.
“물이 한 방울도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농장이 전부 논인 것도 아니고요.
의주감자도 있고 순무며 보리도 있으니, 그 일은 선생님과 다른 농상위원들의지혜를 빌려 볼 생각입니다.”
“네 말이 옳다. 가뭄이 혹심하다 한들 어찌 감히 땅 갈고 씨 뿌리는 근본을 폐하겠느냐.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이번에도 제자에게 이용당한 정약용은 시준의 의도대로 행동해 주었다.
어차피 지금은 청에 협잡질하는 것이나 영국 함대에 식량 공급하는 것 외에는 외교랄 게 없기도 해서 정약용은 심혈을 기울여 집단농장의 운영에 대한 실무적 체계를 짜낼 수 있었다.
조선에서 집단농장 개념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중농학파 실학자 정약용이니만큼 의욕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래 회사생활 하다 보면 꼭 자기 담당 아닌 업무에 열심인 사람이 있기도 하다.
정약용은 그 외에도, 대영무역 최고 인기 수출품 중 하나인 김치를 담글 소금이 모자라니 바닷물로 대충 절여서 줄 계획이라거나 ? 야채를 한데 모을 수 있다는 건 인민위원회의 조직력 덕분에 이제 역내 생산의 분업화가 조금씩 이루어진다는 증거다 ? 하는 안을 보고하고 떠났다.
시준은 진이 빠져서 한참 영혼 없이 서류를 보다가 눈을 비볐다.
“핑계야 뭐든 간에, 어쨌든 가을만 지나면 이것저것 들어올 테니 나아지겠지.”
그러던 시준은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기랑이 괴상한 표정으로 시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곤란한 실수를 들킨 사람의 표정에다가 서러움에 울 것 같은 표정을 반반씩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시준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기랑은 한참 머뭇대다가 자기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종이로 단단히 싸맨 무언가를 꺼냈다. 시준이 받아 보니 거무튀튀하고 둥그스름한 정체불명의 물질이었다.
“이거, 백발백중회에서 전해 달라고 한 건데……. 웅담(熊膽)이래. 내가 숨기려던 건 아니고 바빠 보여서…….”
시준도 그제야 옛날 모르핀 처음 만들던 시절 정약횡 의원집에서 이런 걸 봤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포수들이 마련할 만한 물건이기는 하나, 시준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이건 갑자기 왜? 인정(뇌물)이라면 받을 수 없는데.”
“그게 아니고……. 너 가을 추석 때 혼례 한다고 소문이 나서 그 선물이라고……
했어.”
소문치고는 정확하기는 하다. 정약전과 홍득주는 많은 사람 불러 모아 주석의 체면도 세울 겸, 빈곤을 최대한 잊고 분위기 띄울 수 있는 팔월 보름을 혼인 날짜로 결정했다.
시준은 멍하니 웅담을 손에 든 채 아까 자신의 혼잣말과 기랑의 표정을 다시 짜 맞추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시준은 자기가 기랑에게 대단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시준은 머리를 짚고 몸을 뒤로 젖혔다. 여기서는 도망갈 수도 없다. 여기가 그의 집무실이니까. 시준은 대체 왜 자기가 지금 기랑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말
1. 영국군이 천진에서 저지른 일은 아편 전쟁기와 보어 전쟁 등 19~20세기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실제로 했던 일들입니다.
영국은 독일과 달리 2차 대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반성하는 흉내라도 내는 독일과 달리 지금도 그 시절 만행에 대한 비판과 자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프랑스도 마찬가지죠), 2021년에도 영국이 일본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했다고 주장한 교수에게 정치인들까지 일제히 나서서 엄청난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었죠. 이 면에서는 전쟁에 지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더 괴이하기는 합니다만...
2. 살툭, 그러니까 살이도극(薩爾圖克) 가문은 청에서 대대로 명문가였습니다. 작중 나온 살툭 창링의 약력은 섬감총독 등 대체로 실제 역사와 비슷하며, 시점은 다르지만 우익총병(전쟁기에 소집되어 수도권의 보병을 지휘하는 임시직입니다)도 맡았었습니다. 다만 그가 무관으로서 활약하는 것은 주로 도광제 때이고 커리어의 대부분은 사실 문관이었습니다. 온승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중국 운하에 대해서 연구한 국내의 학자로는 고려대학교 조영헌 교수가 있습니다. 대중 교양서로는 <대운하와 중국 상인>,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가 있는데 관심 있으신 분은 일독해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4. 세인트 빈센트 제독은 영국 해병대의 창설과 '왕립(Royal)' 칭호 수여에 공헌한 해군 인사입니다. 이 시기, 영국 해병대는 약 500여명 규모의 대대 1개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규모가 증가하여, 2대대는 작중 시점(1811년) 바로 다음해인 1812년 창설되고 3대대 역시 큰 차이나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지긴 합니다만 극동까지 차출되기는 힘들었겠죠.
5. 서양 열강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에 들어오는 19세기 중반 이후, 태평천국의 난에 직면한 중국은 군함도 팍팍 지르고 무기 공장도 몇 개나 세웁니다. 활용도는 처참했습니다마는, 그래도 이게 양무 운동과 북양함대 등의 기초가 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그간 개혁으로 부를 쌓은 사쓰마, 조슈 등 몇몇 번은 번 자체적으로 군함을 만들기도 하죠. 다만 조선은 같은 아시아의 두 나라와 비교해도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나마 고종이 시원하게 사기당한 게 많기도 했고..
6. 웅담은 정확하게는 곰 쓸개 자체가 아니라 곰 쓸개를 말려 약재로 처리한 것을 말합니다. 통념과는 달리 한국에서 곰 사육과 쓸개 채취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합법이며, 유예기간이 끝나는 2025년부터 곰 사육이 법적으로 막힙니다.
곰을 마스코트로 한 어떤 유명한 피로회복제 때문인지 몰라도, 웅담이 피로회복용 보약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동의보감에 따르면 웅담은 보약이 아니라 열병, 이질, 실명(!) 등을 치료하는 용도의 '치료제'입니다. (진짜 동의보감에 소경이 눈을 뜬다고 써 있습니다.)
아무튼 보약이 아니고 치료약이기 때문에 부작용도 상당합니다. 기생충 때문에 간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기도 하고... 생약재가 다 그렇지만 전문가의 처방과 제조, 공급이 없이는 건드릴 게 못 되죠.
34. 드러나는 밑그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