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33. 얻지 말고 빼앗아라(1)
선비들은 격문을 받들고 우국충정에 가슴 벅차하는 대신 그대로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희순은 그 이상한 분위기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전주부 판관(判官) 이현수(李顯綏)가 비밀히 다가왔다.
“감사 영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라 감사가 전주부만 다스리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보통 전주부의 실제 행정은 판관이 맡는다. 김희순도 마냥 무시하거나 호통쳐서 쫓아내기는 힘든 자리였다.
“무슨 일인가?”
“저, 그게…….”
이현수는 잠깐 자리를 파하고 나가자며 눈짓하였으나 애국열사 김희순은 도무지 이 공무를 중단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이현수는 포기하고 저쪽에 모여 있는 선비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영감께서도 아시겠지만 작년 전국을 덮친 한해(旱害)에 이어, 다시 큰 홍수가 갈마드는 바람에 이 전주부는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도저히 의병이며 조연(助緣, 의연금)을 모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필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 유민이 될 것입니다.”
이현수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 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김희순은 버럭 화를 냈다.
“전주는 우리 성조(聖朝)의 근본이 되는 곳이고 선왕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인데 어찌 육침(陸沈, 멸망)을 시킬 수 있겠는가! 임진년의 병란(兵亂)이 덮쳤을 때 그 참혹함이 고작 한두 해 흉년 따위에 비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주에서는 선비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들고 일어나 웅치(熊峙)의 장절한 순사(殉死)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격문은 줄 필요가 없다. 격문 내용을 김희순 자신이 침 튀기며 외쳐 꾸짖고 있으니까. 김희순은 모여 있는 향사(鄕士)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오냐. 얼른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뭉그적대는 그 속을 이제야 알겠다. 필시다들 아랫사람의 속 좁은 원망이나 백성의 무지한 손가락질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는 것이렷다. 하민이야 배우지 못하였으니 그렇다 하여도, 이 유구한 고장에서 어찌 이리 불초한 자들만 모였다는 말인가!”
전주의 향촌 선비들은 당연히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신분이 신분이라 서울에서 오간 논의도 대강 소문으로나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작년 가뭄 때 전라도의 세금을 감해 주자는 논의가 왕에 의해 시원하게 엎어졌으며 뒤이은 전주부의 대홍수 때도 휼전(恤典) 한 푼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았다.
모두 원래 역사 때는 시행되었던 조치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는 조정이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하필이면 군주가 그 강철의 이공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관찰사만 빼고 모두가 김맹억(金孟億)이라 하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현역 양반이 아니라 해도 얕볼 인사는 아니다. 김맹억은 전주에서 알아주는 부호로써, 채수영(蔡壽永)이 중심이 된 1817년 전주 반란의 핵심 주모자다.
그러니까 원래 역사에서는 불과 6년 뒤 반역을 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강화도에 귀양 가 죽었던 왕족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의 아들 이 철득(李鐵得)을 옹립하기로 하고, 당시에 죽었던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사람을 모은다. 홍경래의 난이 의외로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일이 여의치 않으면 고군산(古群山)까지 달아나 대마도에 원병을 청한다는 계획까지 꾸며 두었다. 기상 하나는 웅후장대하기 그지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당연히 모의 단계에서 실패하고,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던 강화 백성 철득이만 고초를 당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김맹억은 용감하게 외쳤다.
“지금 위로 조정에 임금이 없어 영이 서지 않고, 아래로 백성은 의지할 데가 없어 산목숨이 흩어지고 있소. 이러한 사세에서 백성을 안심시키고 힘써 구휼하는 것이 감사의 책무이거늘, 난데없이 누구도 못 본 영길리 군병이 왔다고 소란스럽게 떠들며 의병을 모으라, 곡식을 공출하라 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김희순은 노기로 수염을 떨었다.
“저, 저놈이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로구나. 대벽(大?, 사형)의 죄를 짓고 있음을 네가 아느냐. 실로 적이 목전에 박두하였으니 지금은 곧 전쟁이다. 군율로 다스리기 전에 입 닥치지 못할까!”
허나 김맹억도 지지 않았다.
“나를 닥치게 하려면 목을 치시오! 영길리 사람의 통교는 이미 나라에서 허락한 바인데 새삼 무엇을 더 시끄럽게 할 이유가 있겠으며, 내 들어보니 여러 바닷가 사람들이 말하기로 영길리군은 코빼기도 비친 적이 없고 오직 관군만 쳐들어와 닭과 개며 쌀과 채소를 모두 쓸어갔다 하니 당최 도적이 누구라는 말이오?”
김희순은 숨이 턱턱 막혔다. 이미 사람들은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조차 믿지 않았다. 나라가 영길리군을 핑계로 괜히 돈이나 뜯으려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기야 조선 조정이 400년간 쌓아 온 찬란한 대민 신뢰 자산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다.
“이미 흑산도가 실함되었다. 깊이 생각해야[深謀] 멀리 염려할[遠慮] 수 있는법! 어찌 눈앞의 일만 가지고 현혹하는 말을 지껄이느냐? 안 되겠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저놈을 끌어내어 매우 치고 옥에 가두어라!”
김맹억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그는 주춤대며 다가오는 군사들 앞에서 발을 꽝 굴렀다. 그러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김희순은 흠칫하였지만, 김맹억이 꺼낸 것은 총이나 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감사또 나리께서 민심을 모르시니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아뢰겠소. 이것이 지금 삼남 전역에 퍼져 있는 격문이오. 불랑국 사람의 이름을 빌렸을 뿐인 이하찮은 괘서(掛書)로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호응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어찌 모르시오? 나는 죽어도 좋으나, 그 뒤로는 수백만 인민이 혁명의 이름으로 내 주검을 밟고 넘어올 것이외다!”
김희순은 김맹억이 부르짖는 낯선 말투에 긴장감을 느꼈다. 그래서 김희순은 병사들에게 재차 호령하는 대신 괘서를 받아드는 실수를 범했고, 병사들 또한 눈치 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것은 복공이라는 불랑국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김희순은 그자가 누군지 알았다. 김희순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언서로 된 글을 읽었다.
<나의 친구, 빈곤과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의 모든 인민 여러분께 이 글을 보냅니다.
나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현명한 왕을 모시는 기쁨과 그 정당한 권한 아래 통치받는 인민의 평안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조선에서 불랑국이라 부르는 프랑스 사람들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을 사로잡고, 그의 목을 쳤습니다. 구중궁궐의 깊은 곳에서 높은 사람들의 의논으로 결정된 음모가 아닙니다. 모두가 들여다볼 수 있는 경기장과 수만 명이 운집한 광장에서 신분을 가리지 않는 군중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통치자들을 구성하고 그들의 ‘위에서’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에게 봉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신이 내려주신 군주 앞에 무릎 꿇고 그 광휘를 영접하는 영광과 명예를 모두 버린 채, 끔찍한 내전을 겪으며 왕과 권신의 피로 목욕해야만 했을까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우리는 개나 돼지가 아니며, 우리가 원하는 것 ? 그것은 끼니일 수도, 무기일 수도, 옷일 수도 있습니다 ? 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아니라 싸늘하고 뚜렷한 당위(當爲)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량한 왕은 실로 백성들을 동정했습니다. 그들의 고난에 가슴 아파하며 산통모금(算筒耗金, 복권 기금을 말한다)과 우박 진휼 모금을 털어 빵을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동정심의 발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그 이상을 요구하는 순간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왕의 마음속에서 촛불이 꺼지듯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동냥이 적다며 대거리하는 거지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느끼며 근위대에게 발포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시민들은 연약한 자비심에 호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구걸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탈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조선의 인민들이여, 왕은 어질고 선량함[仁]으로써 그대들을 돌본다고 해 왔습니다. 흉년이 들면 왕과 신하들의 판단에 따라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들이 보기에 나라 형편이 되면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내려 준다고 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그것은 결단코 안 될 말입니다. 왜 주인에게 뼈다귀를 기대하는 개의 눈으로 왕을 바라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대들의 것입니다.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삶의 마땅한 권한[生之當權]’입니다.
왕이 스스로 농사를 지었습니까? 옷감을 직조하였습니까? 왕이 그것을 갖고 있다면, 그건 당신들에게 빼앗은 바에 불과합니다. 어째서 도둑이 원래 당신의 것이었던 재물을 선의로 갈라 주기를 기대하며, 강도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비를 구걸해야 한단 말입니까?
인(仁)은 필요 없습니다. 군주의 선량함은 그 자체로 이미 분수를 넘어선 오만입니다. 오직 당(當)이 있을 뿐. 자비심이 아니라 마땅함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을 인민에게 내놓아야 합니다!
조선의 모든 것을 정당하게 소유한 인민들이여. 나의 친구들이여! 오, 나는 그대들에 대한 나의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그대들에게 호소합니다. 얻지 마십시오. 빼앗으십시오! 조선의 모든 것은 그대들의 것입니다. 원래부터 그러했습니다!>
김희순은 거기까지 읽고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혼절해 버렸다. 군병들이 누구의 명을 따라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사이 김맹억을 포함한 선비들은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김희순이 멀쩡했어도 막지는 못했을 기세였다.
시준의 ‘삐라 작전’은 함경도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직접 사람이 들어가 있는 함경도는 오히려 필요성이 적다. 다른 지역, 특히 시준이 당장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삼남을 멀리서 흔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격변이 혁명막부와 중앙인민회의, 그리고 그 주석 시준의 이름으로 전개된다면 김조순은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호남과 영남의 대군을 일으켜 시준을 토멸할 것이다.
그래서 선전선동국의 격문은 마치 프랑스인이 쓴 것처럼 작성되었다. 평양 혁명막부와 정시준, 다리 잘린 왕에 대한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과격한 말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생지당권(生之當權) 네 글자 아래 얻지 말고 빼앗으라는 무책임한 선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불온선전물을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은 혁명군이 아니었다.
서상의 굴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 최대의 유통망과 자본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상단인 송상이었다.
과거 시준에게 혼쭐이 난 인연으로 서상 정치국 위원의 한 자리까지 오르고, 지금도 혁명막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선죽교 17대 1의 남자 박광유가 혀를 찼다.
“그 꼬마가 언제 그렇게 컸다는 말이냐. 우리 처지도 참 한심해졌다마는, 사세가 이러하니 어쩔 수 없구나.”
시준은 북부 송상과의 연락을 맡아 주던 박광유를 높이 평가했다. 다루기 만만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박광유는 중앙인민회의 외무위원회(外務委員會)에 객원으로 자리를 받아 대외연락담당초빙위원(對外聯絡擔當招聘委員) 증명서 하나 받을 수도 있었다.
쓸데없이 긴 직함에서 알 수 있듯 아무 실권은 없다. 허나 그건 막부에서 그렇다는 것일 뿐, 송상 안에서 그 이름은 매우 막강했다. 박광유는 이제 (홍경래에게 비명횡사한) 장시영의 일개 사인이 아니라 당당한 대방 중 하나였고 도중(길드)에서도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송상에게 평안도와의 연결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사는 무릇 살 사람과 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조선 전토가 빈곤에 신음하고 있는 지금 송상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궤멸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전국에 걸친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송상의 힘은 기존에는 한 곳이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곳에서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해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저변이 되었지만, 이렇게 전국토가 말라비틀어지면 때릴 데만 많아진 꼴이 된다.
왕이 없으니 간언과 탄핵으로 충심 드러낼 대상도 없다. 조정의 감찰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작금의 조정과 송상의 거대한 덩치가 연쇄 효과를 일으키자 사태는 끔찍하게 굴러갔다.
조선 각지의 지방관 중 적지 않은 수가 간단히 도적으로 변신한 것이다.
도저히 거기까지 신경 쓸 새가 없는 김조순은 충성과 세금만 보장한다면 지방관이 무슨 짓을 하건 묵과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고 수령들은 더 털 것도 없는 백성 대신 송상 같은 거대 상단에 그 눈길을 돌렸다. 이전에 안전보장금조로 지불하던 뇌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탈이 벌어졌다. 유교국가 조선의 국체인 사농공상의 엄정함이 이와 같았다.
견디다 못해 지역에서 철수하려는 송방도 많았다. 이 나라를 우습게 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돈주머니가 달아난다는 소식을 들은 수령은 일단 관군을 출동시켜 전부 두드려 부수고 재산을 몰수한 뒤에 처형하여 입을 씻었다.
누구든 사형에는 왕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는 게 조선의 법이다. 허나 어차피 왕도 없거니와 그 말은 참수형이나 교형 같은 정규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죄인을 심문하다 장하에 죽었다면 그건 사형이 아니다. 따라서 왕의 결재도 불필요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주목할 꼼수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공무원들이 조달청과 얽히기 귀찮으니까 어떻게든 계약을 2천만 원 이하에서 체결하려 하는 것처럼, 옛날부터 각지 수령은 패 죽이는 것으로 사형을 대체하길 선호했다. 수많은 송상 심부름꾼과 상인이 넝마 같은 꼴이 되어 황천길에 올랐다.
물론 송상도 시준의 등장 이전까지는 조선 최대 최악의 폭력 조직이었다. 가만히 참고 있을 턱은 없다.
“임금도 없는데 왜 이렇게 계속 원통한 꼴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듣자 하니 평안도 놈들은 왕을 옛날 척부인(戚夫人)의 꼴로 만들어 놓고도 잘 먹고 잘산다 하지 않는가!”
이공이 그렇게까지 전락한 건 아니었고 잘린 다리도 하나밖에 없지만, 어쨌든 그런 분노에는 ‘평안도 놈’들이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준은 총선거로 중앙인민회의와 막부가 구성되기 전부터 기꺼이 곡식을 받고 막대한 무기를 팔아치웠다.
동인도 회사에 아편 주고 받아오는 영국 무기는 얼마 안 되는 혁명군이 쓰기에도 차고 넘친다. 그래서 중국 반란도 부추길 겸 무기 밀매를 해 온 것인데, 외국 밀무역보다야 국내 밀무역이 더 쉽고 물량도 많은 게 당연하다.
곧 총칼 든 송상의 행동대가 죽기 살기로 탐관오리의 관아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총선거의 열기가 타오르고 있을 때쯤 삼남의 물동 요지인 천안에서도 관아가 불탔다.
향임 2명과 천안 군수가 온몸에 창이 꽂힌 채,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에 매달려 제멋에 겨워서 축 늘어진 사건은 비변사를 전율케 했다.
“이게 무슨 변고라는 말이냐!”
상놈들이 주리에 정강이 뒤틀리다가 뼈가 살을 뚫고 나오거나 장에 하도 맞아서 볼기짝 아래가 고기죽이 되어 죽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족 중에서도 수령이 무참하게 살해된 일은 그야말로 도덕국가 조선에서 존재해선 안 될 천륜의 파괴였다. 조야는 분노했다.
김조순이 안 그래도 없는 군대에서 헐어 갈라 보낸 병사는 항상 늦게 도착했다. 허나 송상이 증거를 남길 만큼 허술한 자들은 아니었다.
이미 범인은 전부 도망쳤고 남은 것은 해체된 인간과 관아뿐이었다. 군관도 뭔가 보고는 해야 하니 주위의 애꿎은 백성들만 쥐 잡듯 잡아댔다. 그리고 그 백성은 다시 반란에 합류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시준이 무슨 죽음의 상인이 되어 조선의 내란을 선동하려는 악의에 차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애초에 무기 장사는 그렇게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다.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 업은 21세기나 지금이나 똑같이 마약이다. 영국과 청이 워낙 많이 사가서 조선에까지 팔 물건이 없을 뿐이다. 무기는 어디까지나 부업이었다.
그것 말고도 평안도의 상품은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영국의 중국 침공전 윌리엄 자딘에게 부탁한 대로 최신 방적기와 방직기를 들여오고, 시준이 밤새워 가며 그걸 복제한 이후 평안도의 면포 생산량도 이제 급증의 단초가 보였다.
면포라면 송상이 가장 많이 취급하는 물품이라 송상은 절대 평안도와 척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시준이 송상에게 이런 하청 사업 하나 정도는 맡길 수 있게 된 것도 당연했다. 예전 만상이 송상 앞에 굽실대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각지에 민란이 빈발하는 것은 송상도 바라는 바였고, 송상 중에는 아직도 고려조를 그리워하며 이씨 왕조를 증오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송상 역시 시준의 선전물 살포에 적극 협조했다.
그러나 송상의 방법은 혁명군과 사뭇 달랐다. 이때 청주에 내려가 있던 박광유는 그 방법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륙에서 귀한 물건인 건어물을 갖고 와 팔던 박광유의 송방은 곧 예상하던 관리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네 이놈! 고변을 듣고 왔다. 네놈이 바로 흉참한 말을 퍼뜨린 대역죄인이렷다!”
“예? 아니, 나장 나리.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종이를 바로 네놈이 주었다고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어디서 시치미를 떼는 게냐! 여봐라! 이놈을 당장…….”
“어이쿠, 제발 봐주십쇼. 이 무식한 놈이 그냥 북어 쾌 싸매는 데에 아무 종이나 주워서 쓴 겁니다. 이 못 배워먹은 장사치 놈의 눈깔에는 검은 건 글씨요 허연 건 종이라. 뭘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요. 불쌍한 장돌뱅이들 잡지 마시고, 헤헤. 이건 가시는 길에 한잔 걸치시라고…….”
박광유가 나장의 소매에 뭔가 집어넣자, 나장은 소매를 소중히 갈무리한 채 고리눈을 뜨고 호통 쳤다.
“이놈이 그래도! 나라의 관헌이 이따위 돈 몇 푼에 넘어갈 것 같으냐! 네 죄가 한도 끝도 없구나!”
“그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나리의 높으신 뜻을 몰라뵙고…….”
“나는 이까짓 푼돈에 의를 팔아넘기는 자가 아니야!”
“과연 나리께서는 척 보아도 그 뭣이냐, 청백리 고관의 기운이 확 하고 다가 듭니다그려.”
“내 재차 이르지만, 하찮은 재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니까!”
과연 하찮지 않은 재물을 주자 나장은 순순히 돌아갔다. 박광유는 한층 열정적으로 선전물을 뿌려댔다.
푸셰의 문건은 한글이라도 어려워서 주로 식자 계층에 배포되었지만, 지금 송상이 가져온 것들은 더 간단한 한두 줄의 문구였다. 포장지나 벽지 명목으로 끼워 팔기 때문에 어차피 길게 적을 수도 없었던 이쪽이 더 ‘삐라’에 가까웠다.
<곡식을 원하는가? 가져라! 인민이 농사지은 것이다. 포목을 원하는가? 가져라! 인민이 실 잣고 짜낸 것이다!>
<평안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기와집에서 비단옷 걸친 채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 모두 왕과 수령이 가진 것을 빼앗아 나눈 덕이다!>
<오얏나무[李]를 불태워 버리는 것은 바로 혁명의 붉은 불꽃이다! 남쪽 열 개의 승리할 땅[十勝地]에 적기(赤旗)가 오르는 그때에 정 진인이 북에서 도래할 것이다!>
바빴던 시준이 수많은 삐라 전부를 직접 보고 결재할 수야 없는 노릇이어서 중간에 이상한 것들이 좀 섞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혁명막부는 모르는 일이며 다른 지방에서 멋대로 퍼진 소문’으로 위장한다는 대원칙은 지켜졌다.
글만이 아니라, 실제로 송상이나 송상 토벌과정에서 억울하게 인생 망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여기저기에서 소요를 일으키자 이제 목숨밖에 남은 게 없던 조선 사람들은 힘을 얻었다. 김조순은 물론, 사태를 관망하던 경상 감사 김회연마저 민란 진압에 상당한 세력을 할애해야 했다.
더 안 좋은 소식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서도 김조순 일파의 군세 약화를 감지하고 더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시준의 예상과 달리 이제 김조순은 ‘무리를 한다 해도’ 영남과 호남의 군세를 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김조순은 즉시 이 무엄한 불온선전물의 출처를 조사했다. 그러나 제일 용의자로 지목된 시준은 복공은 일본 가지 않았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 뻔뻔한 거짓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도가 없었기에 조선 조정을 미치게 만들었다.
분명 괘서가 호남까지 가는 데에 노출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도 조정에서 미리 대응하지 못했던 건, 어차피 시절이 하 수상해 하루가 멀다 하고 나붙는 요언 중 하나라고 치부한 실수 탓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괘서와는 격이 달랐다. 백성이 불만 터뜨리고 잊어버리는 배출구가 아니라 외국이 조선을 흔들려 한다는 증거다.
그리고 조정이 내전에 몰두하는 사이, 괘서는 송상의 연락망을 타고 이미 전국토에 퍼져 있었다.
그 기세는 마치 거목과 같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라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푸셰의 격문이 나무둥치라면, 송상이 뿌리는 각종 자극적인 짧은 문구들은 거기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초점을 명확히 잡아 정리했다.
“이제는 그 시준이라는 자는 전혀 상관없게 됐소. 그깟 토호가 영길리나 불랑 국과 결탁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오. 영길리국은 흑산도를 점탈하였으며, 불랑국은 사악한 도를 퍼뜨려 혹세무민하고 있지. 듣던 대로, 그 두 서양 나라는 각자 가장 잘하는 바를 써서 동방을 좀먹고 있는 거요.”
조정으로서는 영길리에 이어 불랑국까지 본격적으로 조선 침공의 야욕을 드러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김재찬의 말마따나 영국은 무력으로 실제적 침공을, 프랑스는 요설로 정신적 침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조순은 이를 갈다가 결국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던 수를 감행했다.
“천진에 배를 보낼 준비를 하라.”
작가의 말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추석 연휴에도 기존과 같이 정상 연재됩니다. 이번 태풍과 수재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도 따뜻한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독자분들 역시 대개 어릴 때 학교에서 수재의연금 모금에 동전 넣어 보신 적이 있을 테지요. 의연금 형식의 모금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작중에 나온 것처럼 모집 사유에 따라 조연(助緣), 혹은 의진(義賑), 의루(義屢, 여기서 屢는 '여럿'이 아니라 '어렵다'는 뜻)라 했습니다. '의연'이라는 말은 고종 대부터 주류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김희순의 말은 임진왜란 초기의 웅치(곰티재) 전투를 일컫습니다. 전주 사람들이 일어났다기보단 전라도 전체 의병/관군 연합군에 가깝기는 한데 웅치가 전주 바로 앞이다 보니 저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하지요. 전주는 김희순이 말했듯이 이씨 왕실의 본관으로 중요한 지역이기라 전주를 사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왜란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실패했지만.
3. 판관 이현수는 원 역사에서도 이때 전주부 판관 하고 있던 인물입니다. 주요 지역의 판관은 서울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왕이 결정하는 그 임명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이철득은 반란군에 의해 추대된 왕족이었지만 처형당하지는 않습니다. 1817년, (추대된 것도 아니던)그의 형 이성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강화부에서 고문받다 사망하고 난 뒤 순조는 이철득과 이쾌득 등 은언군의 아들들을 석방해 줍니다.(이언의 아들들은 전주의 반란과 관계 없이 그 전부터 천극유배, 그러니까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서 귀양 중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이 조선 정부에 의해 전부 인멸되어 현재도 이성득이 왜 맞아죽었는지 이유는 불명이며, 의금부가 조사를 위해 이성득을 부검하자고 청했을 때도 순조는 거부합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형문받다 물고 나는 경우는 흔했습니다. 왕조가 건전할 때는 물론 죽게 한 자도 조사받기는 했으나... 잡범 하층민들에게까지 그렇게 신경써 준 건 아니었거니와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죠.
5. 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선량한 통치'가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은 프랑스 혁명기 철학당의 주요 화두였습니다. 왕이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의무여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지요.
6. 산통모금이란 작중의 창작 단어입니다. 조선 복권 중 산통계라고 하는 것이 있었고(산통을 흔들어 추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산통 다 깬다' 는 말이 나왔죠) 모금(耗金)은 모집하는 돈이란 뜻이 아니고 환곡의 이자 곡식을 말하는 모곡(耗穀)을 푸셰가 변형한 말로서 '기금'을 말합니다.
기금은 이자 수익으로 운영되는 예산이죠. 프랑스에는 당시 실제로 우박 피해 기금, 복권 기금이 존재했고 루이는 삼부회 소집 전 이 돈을 다 털어 어떻게든 재정난을 해결해 보려 했습니다.
7. 생지당권 역시 푸셰와 시준의 창작 개념입니다. 조선에서 '권리'라는 말은 주로 '권력과 이권'이란 뜻으로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였습니다. '권한'은 관리의 책임 범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죠. 둘 모두 현대와 약간 의미가 다르기에 이 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이유는, 뜻하는 결도 좀 다르긴 하지만 무엇보다 시준이 이미 하늘을 부정해서 그렇습니다.
8. 박광유 오랜만에 등장했군요. 잊어버리셨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작중 초반 시준을 인삼과 모자 건으로 괴롭히다가 부하들이 전부 얻어터졌던 송상의 인물입니다.
시준이 근문소 정치국 처음 만들 때 송상과의 동맹을 논의하면서 언급되었던 게 마지막이었죠. 이제 고용주인 장시영은 작중 나온 것처럼 홍경래의 반란 과정에서 죽었고, 이 사람은 그 대신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군요.
33. 얻지 말고 빼앗아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