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32. 혁명의 파도(4)
혁명군이 천 단위 이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무력위원회는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이들의 편제를 확정했다.
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시준은 참견을 최대한 자제했다.
처음에는 소대, 중대, 대대 같은 한국식 편제를 부여해서 알기 쉽게 ? 그러니까 자기가 보고받기 쉽게 ? 정리할 욕심도 있었으나 조선에 그 말이 이미 있는 데다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혼선만 불러올 우려가 컸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쓰이는 대(隊)부터 영(營)까지의 체제는, 정교한 역할 분담과 보직 구분 같은 현대적 요소를 제외한 채 숫자만 놓고 보자면 현대 한국군과 그리 크게 다르지도 않다. 삼각편제 같은 개념은 조선에도 있었다.
어차피 한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병사의 수, 그리고 한 장수가 다스릴 수 있는 지휘관의 수를 고려하여 책정되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취사병이 포함된 10명을 기초 단위로 묶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관찰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혁명군은 애초에 훈련을 프랑스식으로 받았기 때문에 유럽식 지휘체계를 적용하는 그 자체는 큰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말단 병사까지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조선 사람에게 익숙하고 쉬운가의 여부다. 그러려면 현지화된 ‘이름’이 필수다.
그리고 여기에서 혁명 역사에 남을 주석 칭호를 지어 바친 희만 정약용 선생이 활약했다. 정약용이 무력위원회 위원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의 조언을 경청했다.
“불랑국 말로 싸울 수 있는 대열(戰隊)은 에스카드레(escadre, 분대)라고 하는데 이는 네모지다[squadra]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10명이 모인 대를 방(方)이라 한다. 또한 그것이 세 개 모인 것을 펠로통(peloton, 소대)이라고 일컬으니 이는 작은 공[pila]처럼 단단하게 뭉쳤다는 말이다. 따라서 방 세개를 단(團)이라 한다.”
이러한 번역 명칭은 계속 이어졌다.
중대[compagnie]는 고대 라틴어로 함께[com] 빵[panis]을 먹는다는 말이라 한 솥밥 식구라는 의미에서 복(?, 국솥)이요, 대대[bataillon]는 말 그대로 싸우는 집단이라는 뜻이므로 전(戰)이다. 연대[regiment]는 지배하다
[regimentum]라는 옛 뜻을 파헤쳐 영(令)이라 이름했다.
그 이상은 지금의 혁명군 규모에서 쓸 일이 없는 말이라 희만 선생의 무자비한 고증은 그쯤에서 끝났다. 물어본다고 다 알려준 조제프 푸셰가 문제였다.
다른 게 있다면 시대와 상황, 병종에 따라 부대 정원이 자주 바뀌는 유럽과 달리 혁명군은 웬만하면 고지식한 숫자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혁명군은 그렇게 세분화되거나 전문화되지 않았을뿐더러 무엇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안을 처음 보고받은 시준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름에 괴로워했다. 조선 사람에게는 쉬워 보이는지 몰라도 시준에게는 엄청나게 어려웠다.
그냥 조선군을 베껴 오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준은 곧 고개를 저었다.
웬만하면 기초부터 조선과 다른 체제를 갖추는 게 좋았다. 시준이 군주정을 깨끗이 단념하면서 생각했듯이 같은 체제로는 400년을 안정적으로 이어 온 조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고민하던 시준은 뒤에 무조건 대(隊)를 붙이고 우두머리는 ‘대장’으로 부르도록 강제 통일시켰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조선군을 참고하여 삼각과 오각편제로 짜 맞춘 숫자도 시준에게 좀 더 익숙하도록 사각편제를 섞었다.
결국 방대장-단대장-복대장-전대장-영대장이 각각 10명, 30명, 120명, 480명, 1,440명의 혁명군을 지휘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혁명군 전체는 닥닥 긁어모아 대략 4개 영대 정도 되고, 지금 그중 1개 영대가 함경도로 나간 셈이다.
허나 멋들어진 것은 이름뿐이고 사람은 애석하게도 거기 따라가지 못했다. 각자 무슨무슨 대장 칭호 달고 자랑스럽게 돌아다니는 혁명군 청년들이 장교의 소양을 가지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 게 예의다. 어차피 시준도 거기에는 기대하지 않았다.
곧 이강회가 올려 보내 줄 조선군 출신 군관들을 적당히 두어 보완하는 수밖에 없다. 해당 군관 역시 매우 낯선 혁명군의 분위기와 체제에 조금은 자만심이 꺾일 테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 함경도의 혁명군은 전투를 하러 나가는 게 아니다. 혁명을 전파 하러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군 제1영대 영대장으로서 총지휘관을 맡은 백윤구는 그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백윤구는 의주에 도열한 혁명군 앞에 섰다. 그의 주위에는 목청과 덩치가 둘다 좋은 청년 이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붉은 깃발이 올라가자, 백윤구와 그 인간 확성기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경애하는 정시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중앙인민회의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시준이 주석을 상전으로 모시는 일은 혁명에 반한다고 명백하게 규정했기 때문에, 백윤구는 존경(尊敬)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결이 약간 달라도 시준은 그의 사형이다. 시준을 돋보이게 할 문구는 필요했고, 혁명막부가 인민의 대표인 중앙인민회의의 이름으로 군사 행동을 한다는 구호도 필요했다. 막부란 그저 통칭일 뿐이니 중앙인민회의야말로 내세우기 좋았다.
그래서 백윤구가 사흘이나 고심해서 만들어낸 출진의 호령이 이것이었다. 정말로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혁명의 열기에 고양된 병사들은 우렁차게 화답했다.
“사수하자! 사수하자!”
“승재궁궁(勝在弓弓)! 승재궁궁!”
군 내부에 적지 않은 정감록파가 퍼뜨렸을 수상한 주문도 군데군데에서 들렸다. 자리에 나와 있던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는 과연 정약용이 백윤구를 추천할 만하다며 감명 깊게 승복하였지만, 시준으로서는 여기 없는 게 다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기세는 드높았다. 백윤구가 이끄는 혁명군 제1영대는 자신만만하게 총 칼을 치켜들거나, 혹 그게 없는 자는 선전선동국에서 써 준 전단지 뭉치라도 끌어안고 의주를 떠났다.
그리고 그 소식은 오래잖아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에게 들어갔다.
호남처럼 김조순과 동렬형제인 전임 관찰사 김명순(金明淳)이 그대로 북백(北伯, 함경 감사) 자리 지켰다면 더욱 좋았겠으나 그는 작년 병으로 죽었다.
해서 왕이 멀쩡히 있던 당시에는 조덕윤(趙德潤)으로 대임시켰는데, 이공이 서울에서 도주하고 나서 김조순이 정계를 개편하는 와중 역사보다 조금 일찍 김이영에게 관찰사 자리 맡긴 것이었다.
그건 당연히 이 김이영이 안동 김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김이영도 김조순과 연결이 있었고, 이 소식도 들었다.
김이영은 옷 안에 뭐가 스멀거리는 것처럼 께름칙한 기분이었다.
“으음. 정말로 오기는 왔구나. 비변사의 분부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들을 변경 요해에 나누어 둔치게 하되 한곳에 모여 사달을 내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
함경도는 군대 중심의 행정 구역이라 남북도 병마절도사에 비해 관찰사가 직접 가진 군권은 크지 않았다. 이 정도가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처였다.
그리고 혁명군이 가장 바라고 있던 조치이기도 했다.
혁명군에게는 애당초 변경을 지킬 생각도, 능력도 없다. 그들은 부령을 비롯한 6진 각지에 흩어져 눌러앉은 다음 열심히 대민 업무를 시작했다. 방법이야 유서 깊은 사이비 종교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처음에는 같이 흉년에 대해 한탄하다가, 말문이 트였다 싶으면 요역과 환곡거둬 가는 수령들을 함께 욕하고, 어지간히 친해진 것 같거든 은근히 전단지를 건네며 혁명군의 회합에 나오라 권유하는 식이었다.
“주변의 친지며 동무들을 많이 데리고 오시오!”
“살림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하시오. 누구든 도와주겠소!”
곧 예전에 반란이 한 번 일어났었던 북청을 포함하여 여러 고을에서 사람들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왕도 사족도 아니라 너희가 바로 지배자이고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민주(民主)’의 구호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는 평안도가 아니라서 들키면 경을 치니까 몰래몰래 모였다는 점만 달랐다. 그리고 어차피 정식 군제에 편입되지도 않은 혁명군은 기꺼이 파견을 나가 강의와 연설을 일삼았다.
푸셰가 말한 대로 혁명의 파도는 전 조선을 휩쓸어버릴 준비를 시작했다.
이강회도 이제는 마지막 준비에 들어간 단계였다. 김조순이 대비에게는 원래 살던 창덕궁 자전을 내어 주고 자기 딸과 외손주는 일단 자택에 둠으로써 ‘공정한 처사’로 여러 선비들의 여론을 얻는 동안, 박득출이 비밀히 와서 보고했다.
“정 주석에게서 사람이 왔습니다. 영길리국과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네.”
평안도로 올려보내야 할 것은 매수한 군관뿐만이 아니다. 정약용과 막부 중요 인물의 가솔, 도성에 있는 중요 재산과 문서 등 서울 오죽당의 핵심 기능이 모두 이전 대상이었다.
하지만 김조순도 바보가 아니다. 차단까지는 아니어도 황해도에는 당연히 김조순의 손길이 뻗쳐 있다. 김조순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그런 대규모 이동을 감행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시준은 동인도 회사에 의뢰하여 강화도에 수송선을 보내기로 했다.
북쪽에 김조순의 눈길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다른 쪽은 허술하다는 뜻이다. 영국 해군이 가져간 김치 수백 동이를 외상 장부에서 지워 주는 조건이었다.
이강회가 궐련을 물자 박득출이 얼른 발화철로 불을 붙여 주었다. 시준이 봤다면, 사제가 장사꾼이 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마피아 대부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며 한탄할 광경이었다.
“아직까지 도성에 남은 건 일을 지도해야 하는 당원 간부 정도입니다. 개성이나 고양쯤에 짐 나르러 간다 하고 여남은 명씩 나누어서 서대문을 나가면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오이다.”
“그래도 마음을 풀지는 말게. 요즘 한성 판윤(김이익)이 담가버린 사람 젓갈이 큰 독으로 스물이 넘는다 하네. 염라태수가 따로 없다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있어.”
“예. 소인도 들었소이다. 허나 걸려도 무마할 길은 있을 겝니다. 그 독이며 소금 날라 주고 사람 구해다 드리며 숨은 포도군관 찾아내어 소식 갖다 바친게 누굽니까. 우리를 박대하지는 못할 테지요.”
김이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시준이 예상보다 조금 더 빠르게 서울에서의 철수를 결심한 이유가 김이익 탓이었기 때문이다.
반란군 진압 때문에 김조순은 거의 모든 군대를 한성부 밖으로 내보냈다. 현재 그 군은 경기 일대에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숨을 고르다가 잠깐잠깐 싸우는 방식으로 국고를 거덜 내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이익이 도성 내에서 방화와 폭파, 습격을 일삼는 수경포도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할 군사가 또 남아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이익에게는 김조순에게 바둑판 앞에서 장담한 것처럼 다른 수가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정의 강맹한 노병(老兵) 김이익이 모집한 자들은 길거리의 부랑자와 검계 잔당, 뒷골목 깡패들이었다.
고귀한 사족 대신인 김이익이 그런 천것들과 연결점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 사업에서 중개자 역할을 맡은 자들이 서울 오죽당이다. 김이익의 구상을 들은 김조순은 기꺼이 이강회와 박득출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오죽당은 포도군관 저항군에게 삶터를 빼앗긴 채 목숨만 간신히 붙여 달아난 여러 시정잡배들과 김이익을 연결했다.
현재 한성부의 암흑가는 구도가 조금 바뀐 상태였다. 과거 이요헌은 수경포도 청을 레지스탕스화하면서, 당연히 포도군관들과 잘 알던 조선 지하조직을 ‘활용’했다.
현대에도 검경은 대한민국의 폭력조직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다. 잡아 봐야 중형을 내릴 건수도 마땅찮고 수뇌부가 괴멸되면 통제 불가능한 양아치 집단으로 흩어질 뿐이기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식 비밀경찰 체제를 배운 수경포도청 역시 그런 정보망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잠적한 수경포도청은 그때까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서울 지하조직의 폐허를 접수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요헌이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다만 그 당시는 점잖은 협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이요헌은 철퇴로 두령의 머리를 으깨어 퇴거를 권유하고 가족을 눈앞에서 교살하며 투항을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시전 사태에 이어 이요헌에게 두 번이나 깨지게 된 깡패들은 이를 박박갈았다.
“내 반드시 이가(李家) 저놈의 생간으로 국을 끓여 먹고 말 것이다!”
원한은 있지만 힘이 없는 나머지는 도망쳤다. 그리고 결국 음양이 바뀔 때는 찾아왔다. 한성 판윤 김이익에 의해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은 그들은 잔인한 복수를 시작했다.
그런 종류의 복수가 사람 가려가며 시행될 리는 없다. 그저 깡패 두목 놈이 지목한 집이 역적의 집이요, 도적 모주가 원한 품은 사람이 곧 반도일 뿐이었다.
물론 부주의한 몇몇 포도군관을 잡아내는 성과는 올렸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억울한 사람이 몽둥이에 머리 깨지고 채찍에 걸레짝이 되어 죽었다. 머슴이 원님 되면 곤장이 칼이 된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한성부민들은 조정의 비호를 받는 이 무뢰배 도당이 집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재물을 제 것처럼 집어가는 참화 앞에서 벌벌 떨었다.
그들은 반항하다가 맞아 죽은 아들의 시체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국문’한다며 끌려가는 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과거 금위영과 훈련도감이 격돌하여 시가전을 벌일 때보다도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
“선생님(정약용)이나 우리의 가솔도 언제 참화를 입을지 모른다. 신상필벌이 흐트러지고 억울한 사람들이 잡혀 죽는 것은 곧 난세의 조짐. 김조순도 필시오래가지는 못하겠구나.”
돌아가는 꼴을 본 이강회는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서울이 무슨 전쟁터라도 된 것마냥 여기저기에서 불길과 비명이 솟구치는 판이라 급히 도성을 떠나는 자도 많았고, 그 피난민에 섞여서 사람들을 탈출시키자 일은 더욱 쉬웠다.
그리고 이제 그 준비가 거의 완료된 것이다. 이강회는 박득출을 돌아보았다.
“좋아. 마지막 행렬에는 나도 간다. 바다 쪽은 빈틈이 없겠지?”
어차피 오죽당이 완전 철수할 수는 없다. 그러면 즉시 김조순이 시준의 이반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시준은 현재 김조순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대비와 왕비도 보내 준 게 아닌가.
그래서 남은 오죽당의 연락망과 재산은 박득출이 이어받게 된다. 핵심적인 부분이 평안도로 이전하여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기름진 생선은 껍질까지 맛있는 법. 김조순의 심부름을 하며 떨어질 이득은 적지 않기에 박득출은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혹여나 그 코 큰 오랑캐 놈들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강 애들에게 후한 값 치러 주어 선심 크게 썼으니 그 녀석들의 조운선에만 끼어 타도 평양 정도야 수월히 갈 수 있을 겝니다.”
오죽당과 그 지인, 가족을 전부 실어가려면 한 척으로는 어림도 없다. 동인도 회사 배는 중요 인물의 탑승 및 선단의 호위 역할이고, 짐과 재물을 싣는 자들은 경강 상인이었다.
그러나 이강회는 고개를 저었다. 시준이 많은 돈을 들여 동인도양행(동인도 회사)에서 배를 대어 준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그쪽을 다시 한번 확인해라. 영길리 배가 없어도 되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터. 그 배는 반드시 필요하다. 혹시 김조순이 미쳐서 경기 수군을 풀어놓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렇게 되면 짐 나르는 배 가지고는 방도가 없네.”
“그도 그렇군요. 분부대로 합지요.”
박득출도 납득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영국 배가 없으면 혹시 조선 수군이나 강화 유수가 군선을 동원하여 가로막았을 때 꼼짝없이 되돌아가거나 붙들려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영국 배만 제대로 와 준다면야 조선국은 어떤 수단을 쓰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이강회는 갓을 내리며 심술궂게 입술을 뒤틀었다. 바로 그래서 이 탈출극이 수월해지기는 하였으나, 이 나라 수군의 힘이 민간인 이상은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강회는 시간이 생긴 김에 품에서 공책을 꺼냈다. 옛날 용천부에서 불랑국의 엄청난 대박을 봤을 때 그 제도를 자세히 기록해 둔 물건이었다. 평안도에서 스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그림과 여러 수치를 조금 더 상세히 논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강회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시준은 자신의 의도를 잘 납득시켰으며, 동인도 회사는 현재 조선 근해에 있는 선박 중 최대급인 데이비드 스콧을 강화도에 보내 주었다.
데이비드 스콧은 평범한 배가 아니다. 3년 전 조선의 문을 열어젖힌 바로 그 거함이다. 총융청 군사도 오래전에 다 물러간 판이라, 강화도의 관리와 병사들은 지금 조선에 있지도 않은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몸소 체험하며 새파랗게 질렸다.
“유수께 보낸 파발은 아직도 안 돌아왔느냐!”
“저, 그, 그것이…… 방금 돌아왔는데, 강화 유수께서 마침 자리를 비우셨다 하오이다!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이, 자근자근 저며서 물고기 밥이나 해야 할 늙은이가 직임 팽개치고 내빼버렸구나!”
결국 이강회의 함대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황해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조선군이 근본적으로 약해서는 아니다.
상대는 영국 해군이니 비교 자체가 불공정하다. 조선 수군은 영국 해군의 대청 전쟁 뒤에서 출렁이는 여진(餘震)에 불과한 흔들림조차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윌리엄 드루리 제독의 인도 함대는 암허스트와 합류하여 천진을 습격하기 전, 삼화부 가는 길에 흑산도에 들러서 킹피셔에게 보급을 해 주었다.
헨리 호프 부함장과 킹피셔의 승조원들은 당시 너무나 많은 조선 군함 때문에 철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싸우면 당연히 압승이지만 그사이에 다른 군함이 상륙하는 것을 막지 못할 만큼 조선 함선은 다수였다.
그러나 이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드루리 제독은 탄약과 포탄의 보급과 함께, 중국과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동인도 회사 함선을 분할해 떼어 놓고 갔다.
봄베이 마린 소속인 22문 탑재 프리깃 HCS 모닝턴(Mornington)을 필두로 한 세 척이 더 합류하자 조선 최강의 수군 전라우수영과 원군으로 온 경상우수영은 그대로 묵사발이 났다.
그래도 하늘이 조선 수군을 아예 버리지는 않았다. 슬루프나 쉽(Ship)보다 좀 더 덩치가 큰 프리깃은 정박할 곳을 찾기 어려웠기에, 주위를 배회하던 모닝턴이 한번 암초에 거하게 들이받고 침묵한 것이다. 그래서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급히 달려오려 했던 충청수영 수군도 영국군은 보지도 못한 채 풍랑으로 2척이 침몰해 버렸다. 군관과 병사들은 나가 싸우기를 거부했다. 다섯 명을 효수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 난리를 진정시킨 김조순은 전통적 정책으로 회귀했다.
“서쪽 바다의 섬을 전부 비우고 육지의 산성을 단단히 지켜라! 함부로 나가서 군선을 파침시키지 마! 조운하는 배는 얕은 빈해(瀕海, 해안)를 따라서 올라오면 적의 대박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전차로 강화도의 군선 역시 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수군에게는 참으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선 정부가 갑자기 공도(空島)정책을 엄수하기 시작하자 경기, 충청, 전라도의 섬 거주민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그러나 중앙에서 물자 분배가 안 되니 자력갱생해야 하는 각지 수영은 차라리 잘 됐다는 심정이었다.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 뒤에 차라리 영국군이 쳐들어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수준의 ‘징발’이 이어졌다.
그래도 그러한 민폐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각지의 고위 관리들은 현재 세계의 많은 지역처럼 아버지 지위를 물려받거나 매관매직해서 벼슬산 자들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조차도 반세기 뒤에나 실현하는 시험 임용을 통해 뽑힌 수재들이다.
그들은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지금 최우선으로 자원을 끌어모아 막아야 하는 것은 영길리군의 본토 상륙 ? 영국 해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 이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서유봉은 영길리군의 상륙 예상 지점에 병사를 긁어모아 배치하려 했다. 상대는 서양 천하에서 최강이라는 영길리 군대.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재와 비실재를 넘나드는 조선군의 면모는 여기에서 재차 과시되었다. 도무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는 이 고차원적 군대 중 실제 물질계에 현현한 자들은 군적에서 관측된 결과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규모였다.
게다가 지금 호남은 연이은 재해 때문에 보급선마저 꾸리기 어려운 상태다.
가난한 섬 몇 개 약탈한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강회 함대가 평안도에 도달했을 때쯤 해서, 서유봉과 김희순은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조선군의 비동시성은 꼭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최신 양자역학이 증명하였듯이 만물은 소멸하면 또 어디서 생겨나는 법. 있는데 없어질 수 있듯 없는데 나타날 수도 있다.
“종묘사직이 누란지위에 이르렀으니, 뜻 있는 선비들은 의병을 모아 관군의 깃발 아래 집결하도록 하라! 병사만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집에 곡식이 있는 자는 쌀자루를, 천이 있는 자는 상목(常木)을, 아무것도 없는 자는 두 팔뚝만 가지고 신역(身役)에 오라. 저 서양 오랑캐들은 들불처럼 일어나는 충신열사 앞에 휩쓸려 가라앉을 것이다!”
병자년에는 실패했지만 임진년과 정유년에는 꽤 재미를 본 기술이었다.
감사의 명을 받은 각 고을 수령들은 동네 선비들을 모아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 전라도의 중심 도시라 할 수 있는 여기 전주부(全州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안도 관찰사가 평양 부윤을 겸하는 것처럼 전라도 관찰사는 대개 전주 부윤을 겸한다. 김희순은 사태의 중요성을 감안해 전주부의 유력자들을 친히 모았다.
“……해서, 지금이야말로 어진 선비가 팔뚝을 걷고 일어설 때 아니겠는가? 내가 격문을 한 장 써줄 터이니 그대들은 향촌을 교화하는 사족의 임무를 잊지 말고 부디 힘쓰도록 하라.”
작가의 말
1. 백윤구의 구호는 뭐... 작중 설명되었지만 북한과 비슷한 사유로 북한스러운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쪽 동네 열병식 같은 데서 주로 외치는 말인데, 거기는 국가 군대가 아니라 조선노동당의 당군이기 때문에 목숨으로 사수하는 게 당 중앙위원회라는 것만 빼고 똑같습니다.
2. 승재궁궁은 창작 구호로서, 원래는 이재궁궁(利在弓弓)입니다. 궁궁은 정감록 신앙에서 일종의 수호 주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래는 도피할 곳으로서의 이로움인데, 작중 혁명군은 원정 나가는 마당이고 기세도 드높아서 저렇게 바뀌었습니다. "승리"는 천리교나 정감록 등 당시 동아시아 민중신앙의 주요 키워드이기도 했습니다.
3. HCS란 Honourable (East India) Company's Ship, 그러니까 '명예로운 (동인도) 회사의 배' 입니다. 초반에 동인도 회사의 정식 이름 중 하나가 '명예 회사'였다는 말이 나온 적 있었죠. 모닝턴은 이때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정말 드문 프리깃이었습니다.;; 물론 HMS는 His(Her) Majesty's Ship. 영국 국왕의 배를 말합니다.
4. 작중 몇 번 언급되었지만, 경강상인은 자체적인 조선 시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조선 시대 얘기는 아니지만, 한국은 조직폭력배의 경우 '결성만으로도 사형' 시킬 수 있기 때문에(이론상 그렇다는 겁니다) 조직폭력배가 무슨무슨 파 하고 공식적으로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알려진 조직의 '이름'은 대개 수사기관에서 지어 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웃기는 이름도 좀 나오고 하죠.
6. 공도 정책은 조선 시대 내내 유지된 정책입니다. 정식 폐지는 조선이 끝날 때인 고종 시절이죠. 그러나 부역과 세금을 피해 섬으로 도망가는 백성이 하도 많아서 정책의 존재감은 그런 게 있었나 하는 수준이었고, 주기적으로 가서 잡아오고 또 잡아오고를 반복했습니다.
33. 얻지 말고 빼앗아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