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32. 혁명의 파도(3)
사람들이 시원한 비 소식 한번 없는 더위에 짜증 내면서 올가을은 언제 올 테냐고 성질부릴 무렵, 김조순과 시준 사이에서는 ‘서로는 어디까지나 모르는’방식으로 활발한 연락이 오가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쨌건 왕비와 대비를 ‘구출’해내야 하는 게 김조순의 입장이다.
황해도에서 기일 어기지 않고 맞이할 준비, 조정의 사전작업 등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끝이 없다. 시준과의 협의는 꼭 필요했다.
김조순만 곤란한 게 아니라 시준 입장에서도 만만찮았다.
‘한성부민 이공’을 인민 앞으로 끌어내라는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비와 왕비를 그냥 풀어주는 것은 시준의 정치적 생명 자체를 흔들리게 할 위험이 있었다.
물론 조선 전체에 왕실의 모독자로서 비칠 위험, 내부 반동분자의 명분이 될 가능성, 김조순과의 향후 관계 등을 생각했을 때 석방 쪽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평안도 내부의 여론은 그렇지 않다.
김조순이 대가로 제공할 여러 가지 이권은 이 경우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반동과 손잡아서 혁명을 팔아넘긴다는 비난은 치명적이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설득해 볼까 했지만, 시준은 곧 그 방책을 포기했다. 표결에서 밀리게 되면 더 이상은 손쓸 방도가 없다. 왜 독재자들이 밀실 정치를 좋아했는지 좀 알 것 같았다.
조제프 푸셰는 시준의 토로를 듣고 껄껄 웃었다. 그는 총선거에 참가할 자격이 없는 탓에, 막부의 가장 비밀스러운 어떤 방을 차고앉아 다른 사업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럴 테지. 그러면 자네가 풀어주지 않은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벌써 20년 전이군. 멍청한 실수와 예기치 않은 어긋남이 엉망진창으로 얽혔던 바렌느의 도주[La fuite a Varennes]가 불현듯 떠오르네그려. 서울의 섭정공(김조순)은 부이예(Bouille) 후작 프랑수아(Francois)처럼 실패하지 않겠지?”
푸셰는 시준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농담하듯 말했지만, 프랑스 역사는 일반인보다 조금 더 배운 수준에 불과한 시준은 한참 생각해야 했다.
결국 도주[fuite]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시준은 손뼉을 딱 쳤다.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루이는 자신의 권력을 차례차례 박탈해 가는 혁명정부에게 반발하여, 부이예후작의 도움을 받아 몽메디(Montmedy) 요새로 이어(移御)를 시도하다가 바렌느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바렌느 도주라고 부른다.
루이가 철석같이 믿던 용기병 근위대를 비롯한 여러 제반 조치는 무슨 부조리 극 같은 연쇄적 삽질 끝에 무력화되었다. 루이는 2백 년 앞선 동방의 완벽한 도주왕, 조선 선조 이연의 빛나는 사적을 공부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푸셰는 피와 열정이 넘치던 혁명기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듯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래. 뭐 변장시킬 필요도 없으니 일은 어렵지 않을 거고……. 왕비의 애인 같은 건 없나? 그 왜 그때 왕비를 수행하려 했던 스웨덴의 페르센(Fersen) 백작,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런 정부(情夫) 말일세. 뭐? 그만큼이나 자유롭게 풀어 줬는데 아직도 없어? 전통 있는 귀족이 근처에 없어서 그런가? 자네라도 한 번 안 가봤나? 아, 그렇게 무슨 프랑스인이 다 발정 났다는 것처럼 쳐다보지 말게. 자네들 조선인이 너무…….”
“헛소리 그만하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보시죠.”
“쳇, 이야깃거리 하나 건질 것 없이 꽤나 지루한 탈출이 되겠군. 어허,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니까. 으음. 그래. 군사정부(막부)의 입장을 명확히 하려면 라파예트 정도의 성의는 보여 줘야겠지. 평양 혁명군의 기강도 점검할 겸, 대포도 몇 발 쏘고 경계령 한 번 요란하게 내리는 게 좋겠어.”
푸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렸다.
“곤란한 부분은 책임 문제인데, 누가 왕비와 왕의 모친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자인가? 자네 정적인 귀족파 인사 중 하나에게 뒤집어씌울 텐가?”
“그런 생각까진 안 합니다. 그 ‘귀족파’는 아직 소중한 동료입니다. 어쨌든 혁명의 대의는 같으니까요. 프랑스에서도 혁명 때 강경파가 온건파를 닥치는 대로 숙청해 버린 건 아니잖습니까.”
“닥치는 대로 숙청한 거 맞는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자네 앞에 있는 내가.”
“아니, 그러니까…….”
“핫핫, 농담일세. 이해했네. 산악파[La Montagne]와 지롱드(Girondins)와의 관계하고는 다르다 이거지? 자네가 이제 나보다 낫군.”
“별로 안 반가운 칭찬이올시다.”
투덜대던 시준은 문득 푸셰가 지금 자기에게 줄 보고를 들고 왔다가 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하시던 일은 잘 되어 갑니까?”
하시던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혁명군의 본령. 굶주리고 지친 인민들에게 혁명 정신을 전파할 밑 작업이다.
근왕군을 진압한 김조순이 그간 수고했으니 이만 서쪽으로 도로 꺼지라고 하면 얌전히 꺼지려고 시준이 천오백 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지출을 감행한 게 아니다.
시준은 근본이 상인이라 이문 안 남는 장사는 안 한다. 이 돈을 쓴 이상 함경도는 막부의 것이다. 김조순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3개 도는 수중에 있어야 했다.
주석 건 때문에 시준은 평안도 사람들이 북한스러운 이름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인민대회에 혁명군에다가 최고인민회의까지 튀어나오는 마당이니 시준이 성급한 판단을 했다고 단정하기도 뭣하다.
그래서 이 비밀 부서의 이름을 과감하게 선전선동국(宣傳煽動局)이라고 붙였다. 추후 공개했을 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반공교육 최후의 세대인 시준 자신으로서는 듣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일어나는 이름이었으나, 인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주석은 자기 입맛보다 인민의 취향에 따라야 함이 마땅한 법. 자신을 죽이고 공의를 섬기니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푸셰가 대답했다.
“아직 다듬어 볼 여지는 있네만, 군대의 출진에 맞춰야 하니 우선 가지고 왔네. 자네가 좋아할 거야. 아까 그 두 여자의 일처럼, 자네나 평안도 혁명정부의 이름은 싹 다 빼고 나한테만 모든 욕이 돌아오게 썼거든. 나는 공식적으로 조선에 없는 사람이니까 부담도 없지.”
“당신은 대체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명석하고 유능한 것과 별개로, ‘그는 항상 화려한 역할을 원했고 자기가 지은 죄보다 더 많은 죄를 고백했다’고 평가되는 조제프 푸셰의 성향은 한 마디로 표현했을 때 관심종자에 가까웠다. 시준은 겪어 보고야 그 성격을 알았지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푸셰의 능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시준은 ‘밑간’의 핵심인 푸셰의 ‘격문’을 읽어 본 뒤 그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조제프 푸셰는 이제 평안도는 물론, 눈앞의 목표인 함경도만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대상으로 선전전(宣傳戰)을 펼쳐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미묘한 시기에서는 정시준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김조순을 정면 적대할 수 없다. 그것은 함경도에서 시작되는 통제할 수 없는 물결로써 김조순을 약화시킨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푸셰는 평안도에서 애용되는 궐련 대신 여전히 쓰고 있는 자기 파이프를 물었다.
“혁명의 파도는 이제 시작일세. 조선 전체는 우리가 일으킨 그 파랑에 속절없이 휩쓸릴 거야.”
함경도 원정 혁명군이 의주에 한창 집결하고 있을 때, 시준은 왕비와 대비의 ‘탈출’ 건을 마무리 지었다.
우선 시준은 막부 정치국, 그리고 연이어 소집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김조순이 ‘왕과 대비 및 왕비를 내놓지 않으면 십만 정병으로 평안도를 치겠다고 위협했다’ 는 가짜 문서를 발표했다.
의원들은 당연히 분노로 들끓었다. 조선에 십만 정예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분노는 매우 쉬웠다.
당장 왕족이고 궁인이고 죄다 끌어내어 모가지를 내걸자는 정감록파와, 그래도 현실적으로 조정과 아직 정면 대결하기 어려우니 성의를 보여 시간을 끌자는 김창시 신흥파가 맞섰다.
시준이 손을 들어 준 것은 김창시 쪽이었다. 푸셰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김창시 일파는 시준에게 있어 섬멸해야 할 반대파가 아니라 같이 이 신정부를 꾸려야 할 동료였다.
그들이 연이은 패배로 피해의식을 갖지 않게 하는 일은 중요했기 때문에 시준은 일부러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것이다.
과연 김창시는 시준의 목적에 들어맞는 안을 내어 주었다.
“당장 힘도 없으면서 원한을 사는 일은 해서는 안 되오. 혁명의 대의에는 맞지 않으나 권도도 때로는 피할 수 없는 법. 대비와 왕비는 임금처럼 직접 죄를 지은 바 없으므로, 당장 풀어 줄 수야 없다 해도 환관 몇몇을 딸려 살림을 보살피게 하고 우대하는 자비를 보여 나중에 저들이 함부로 우리를 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오.”
회의 와중 표시 나지 않게 왕비와 대비의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언급한 시준의 암시가 먹힌 것 같았다.
막부의 수반이면서도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 역시 당연하다는 듯 차고앉아 있는 ? 김정은도 안 하는 짓이다 ? 시준은 기뻐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곽산 인민위원장(김창시)의 말씀에 본 위원장도 찬성이오.”
그렇게 되고 나니 이의가 있을 리는 없다. 상임위원회는 이제 꽤나 익숙해진 절차로 ‘중앙인민회의 특별정령(特別政令) 74호’를 통과시켰다.
시준에게 프랑스 민법전을 천천히 읽어 보고 검토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하고, 학교위원회에서도 그런 어려운 프랑스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현재 평안도는 완성된 법령 체계를 구축하는 대신 그때그때 포고를 발하는 일종의 임시 군정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막부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특별정령은 일반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무정령(庶務政令)에 대비되어 한시적?
단발적이거나 예외적인 조치를 인민의 이름하에 발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얼굴에 주린 빛마저 떠돌던 대비와 왕비, 그리고 원자에게는 먹고살 만한 살 림이 제공되었다.
물론 옥새나 패물, 값비싼 의복 같은 건 돌려주지 않았다. 옥새는 시준의 외교에 아직 필요해서 ‘잃어버린 것’으로 처리되었고 패물과 의복은 옥새 뺏을 당시의 시준이 내린 허락에 의해 아직까지 기랑의 사유재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과 궁인 몇 명이 돌아온 것은 큰 힘이 되었다. 대비와 왕비는 심부름할 사람으로 막부 편의 감시자가 아니라 원래 자기 휘하였던 자들을 보낸 시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준비를 시작했다.
“역시 상한의 헤아림은 멀리 미치지 못하는구나. 수직 서는 병사도 이제 다해이해졌는지 가끔 와서 보는 정도라 성을 나가는 것쯤이야 여반장(如反掌)이다. 이곳만 빠져나가면 며칠도 걷지 않아 저놈들의 더러운 손이 미치지 못하는 황해도에 도달한다. 그러면 서울로 돌아가 보위를 바로 세우고 저 괘씸한 놈들을 즉각 토벌하리라!”
두 사람 역시 시준이 강제로 시킨 백 리 행군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대비는 지금까지의 구중궁궐 여인보다는 한 단계 성장하여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곧 대비와 왕비가 주위 병사를 ‘매수’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길을 엿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시준은 즐겁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유가 그런대로 식사 등 개인적인 일은 혼자 처리할 수 있게 되자 조금 시간이 난 기랑이 와 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들까지 보내도 괜찮아? 왕자 아니야? 새로운 왕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바로 그래서 보내는 거야.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백발백중회에서 네 이름 거저 쓰게만 할 수는 없지. 거기 포수들 몇 명 골라내줘. 서울 오죽당에 심부름꾼 보낼 건데, 지금 경기도가 영 엉망진창이라 도적에게 걸려 비명횡사하기 쉬우니 솜씨 좋은 녀석들로.”
“알았어.”
왕비와 대비가 착각에 빠져 있는 동안 시준은 말귀 알아들을 만한 사람인 이 강회에게 일의 전말을 전달했다. 증거를 남길 수 없도록 구두이긴 했지만, 이 강회의 입으로 그 ‘탈출극’을 설명받은 김조순은 황해도 군사를 일부 전진시켰다.
그와 함께 김조순은 시준에게 약속한 이권을 보내 주었다. 시준이 보냈던 사절 편으로 평서대원수 겸 관북순무사(關北巡撫使)의 임명 문서와 함께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인수와 부절, 검과 관복까지 왔다.
그리고 좀 비밀스러운 자리에서, 주석과 국장이 아니라 옛 스승과 제자로서 시준과 만난 정약용이 이 조치를 해석해 주었다.
“홍경래가 왕에게 하사받았던 평서대원수를 다시 내린 것은 이제 김조순도 임금, 아니, 한성부 사람 이공을 더 이상 군주로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관북순무사의 인장은 말할 것도 없이 혁명군이 함경도에 들어가 변경을 지키는 일을 허락한다는 게지.”
더 이상 공명첩이 아니라 진짜 관직이었지만 시준은 이 조정이 항상 타이밍어긋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려면 내가 서울에 있었을 때 주든지 했어야지.’
정약용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절충장군은……. 아직 김조순이 새 임금을 세울 수 없다는 뜻이다.”
“예?”
“직함으로 보아서 못해도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문무 상급 산계)는 내려야 마땅하다. 정3품은 너무 낮아. 그러나 대부의 글자가 붙은 작위를 내리려면 임금의 교서에 따르지 않고는 어렵지. 천자는 제후를, 제후는 대부를, 대부는 사(士)를 거느리는 것이 옛 봉건의 법이다.”
그거야 맞지만 춘추전국시대의 대부와 현재의 대부는 실질과 형식 모두에서 많이 다르다. 시준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런 고대의 예법이 아직도 지켜집니까? 아니, 그런 식이라면 대원수니 순무사니 하는 것도 내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직책은 필요에 의해 만들지만, 작위는 예에 의해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사람의 일은 만대의 어느 누구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교훈이라 청요의 누군가가 사도(士道)로써 공박한다면 김조순으로서는 할 말이 없어. 아마 그런 위험을 무릅쓰진 않을 게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라는 흔한 말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근대화 이후, 그러니까 사람들이 시대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체득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며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비로소 통용되는 말이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다들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겉으로는 옛일일수록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가 지배하던 황금시대라는 명분을 따라야 한다.
시준은 21세기 시절에 자꾸 라떼 찾던 노인네들을 떠올리고 나서야 이 감성을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심술궂게 웃었다.
“별로 돌려받고 싶지도 않은 사람을 받으면서 그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영안부원군도 꽤나 역정이 나 있겠군요.”
“너는 어째 그렇게 심성이 꼬였느냐? 대비는 그렇다고 쳐도 왕비는 영안부원군의 딸이 아니냐. 비정한 권신이라도 부모자식의 사랑은 다를 것이 없느니라.”
정약용은 자꾸 엇나가는 것 같은 제자를 그렇게 다시 훈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준의 말이 맞았다. 대비와 왕비가 그들 생각에만 치열하고 장엄한 탈출에 성공하고 황해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조순은 딸과 외손주가 돌아온 기쁨보다 골치 아픈 정적이 들어온 걱정을 더 크게 느껴야 했다.
수주군 이병원은 자기가 전격적으로 방문한 것에 김조순이 놀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조순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동안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안달이 났던 이병원이 자기 존재가 지워질 수도 있는 이번 대비의 귀환을 참아 넘길리가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임금을 폐했다면 당연히 왕비도 서인이 되는 것인데, 이제 와서 서울로 다시 들어오겠다니!”
김조순은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짧게 설명하고 내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대비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비 전하께서 다행히 무사하시다는 것을 안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와중 그분이 데리고 있는 가솔이 같이 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내 딸과 외손주’는 더 이상 궁궐에 들이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시고 자중하시지요.”
이병원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격노하여 외쳤다.
“그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오!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수렴청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소. 수렴을 한다면야 원자, 아니, 공의 어린 외손자를 앉혀 놓고 아녀자가 정병을 쥐겠다 할 것이 뻔하지! 애초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 간신히 바로잡힌 종통이 흔들리는 꼴을 공께서 스스로 불러오시다니!”
김조순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병원에게는 그 무례를 교정할 힘이 없었다. 이병원은 선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제가 정말 그럴 작정으로 배반하였다면, 수주군께서는 대비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하셨을 것이외다. 차분히 생각해 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으실 겝니다. 부디 자중지란을 일으키지 마시고 굳건하게 위엄을 보이십시오.”
이병원은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김조순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가 집 문설주도 넘기 전에 죽여 버릴 수 있다’며 협박했다는 사실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그는 노여움에 가득 차 김조순을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나가버렸다.
김조순은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김이익과 바둑을 두었을 때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다. 그가 이병원을 선택한 것은 그의 어리석음이 이용하기 좋아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둑돌이야 모두 같은 하나의 돌이고 사람이 부리기에 따라서는 때로 한 개보다 더한 값을 해 주지만, 인세라는 장기판은 다르구나. 졸(卒)을 궁(宮)의 자리에 세웠으니 반면이 한심하기 그지없도다.’
김조순은 이병원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세웠다. 사실 이는 따지고 보면 효장세자의 적통을 이어야 하는 조선 왕실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병원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면 그는 정조의 친형(이병원이 반년 정도 나이가 많다)이며 폐주 이공의 백부가 된다.
물론 조카를 승계한다는 것이 걸림돌은 아니다. 지금 왕실은 그 세조 이유의 자손. 아재비가 조카를 치는 일 정도야 현재의 종묘를 시작한 건국신화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사도세자의 자손이라도 백부뻘이 되는 것은 똑같다. 5촌이라면 조선 시대로서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패륜은 조선 왕실의 고려 사항이 되기에 부족하다.
형제들끼리 두 차례에 걸쳐 살육극을 펼치건, 우애 깊은 형이 남긴 유일한 아들을 교살하고 왕위를 찬탈하건, 애원하는 친자를 뒤주에 처넣고 굶겨 죽이건, 형에게 감과 게장을 올려 의학 스릴러물을 찍건 그자가 군대만 제대로 갖고 있다면 현명한 조선인들은 적절히 외면해 줬다(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자들은 죽었다).
이병원이 효장세자의 장통(長統)을 잇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촌수가 약간 떨어진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새롭게 종통을 만들고 ‘부친’ 사도 세자 이훤을 정식 신원한 후에는, 좀 억지를 부려서 현 대비 김씨의 동의가 없이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도세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정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비 김씨는 정조의 부인이다.
이공이 애비 없는 고아이고, 시준이 애비 셋 가진 종놈이라면 김조순은 애비의 능란한 창조자였다.
물론 이건 노론의 사상적 기반에 심각한 타격이 되겠지만 생물적 기반에 심각한 타격이 오는 것보다야 낫다. 시파는 사도세자에 유화적인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편리하게 이공 항렬로 집어넣을 수 있는 아들 이채중이 아니라 이병원을 선택한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강점이 될 수 있다. 이병원에게 제수가 되는 대비김씨는 현재 이병원의 명백한 윗사람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다시 말해, 김조순은 대비가 돌아올 수 있는 사태를 미리 내다보고 이런 판을 짰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비는 돌아왔다.
대비가 살아 있다는 것이 공표되는 순간 김조순은 어차피 행동의 자유가 없다. 무조건 구해내야 한다. 따라서 김조순으로서는 여기까지가 최선을 다해 궁리한 방어책이며, 효과도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전말을 노론 시파의 주요 대신들은 당연히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눈앞의 이 모자란 자는 그렇지 못했다. 김조순은 진정 왕실의 명운이 다했는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조순은 꺾이지 않았다.
딴마음을 먹고 있는 이병원이 불안해한다는 사실, 그리고 대비도 없어진 세력을 회복하려 수렴청정이니 뭐니 하는 얘기를 벌써부터 떠들고 있다는 사실은 김조순에게 좌절이 아니라 용기를 주었다.
저들이 시끄럽게 짹짹대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김조순으로서는 자기 꼭두각시인 왕족과 자기 외손자 중 어느 쪽을 택해도 손해가 아니다. 선택지가 있는 자는 전략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선택당하는 입장에 있는 두 세력은 그렇지 않다. 지면 파멸이라는 그 초조함을 잘 이용하면 정국은 아직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김조순은 이를 앙다물었다.
‘반상의 장기판에서 말이 멋대로 미끄러진다면 그냥 버리고 새것을 가져오면 될 뿐이다. 내가, 나만이 착수할 수 있어. 너희는 나와 대등한 맞수가 아니야. 내 손끝에서 치워지고 또 놓이는 말일 뿐이지.’
그 시점에서 김조순은 ‘대등한 맞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반상을 사이에 두고 김조순과 마주할 수 있으며, 그래서 김조순이 통제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말이다.
시준은 과거 그에게 수탉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우월감을 당장 뒤집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김조순은 간신히 다잡았던 마음에 금이 쩍쩍가는 것을 느꼈다.
대비는 김조순이 직접 도성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의 의미를 깨닫고 조급해졌다.
그녀가 경기도에서 사방으로 미친 듯이 심부름꾼을 보내고 있을 때, 백윤구가 지휘하는 혁명군은 중앙인민회의 무력위원회의 지시를 받들어 의주에서 함경도로 출진했다.
작가의 말
1.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는 루이를 데리고 도피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 했던 총신입니다. 몽메디 요새는 베르됭에 있으며, 루이는 흔히 '독일 연대' 라 뭉뚱그려 일컬어지는 벨기에 주둔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혁명 초기 프랑스에서 광란의 학살이 벌어진 데에는 이런 '외국군의 위협'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습니다.
대역 세워 놓고 변장도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프랑스 특성상 국왕 부처의 얼굴이 꽤 팔린 데다가 믿고 경유지에 대기시켜 놨던 호위군은 백성들의 위협에 굴복하거나 시민들과 술을 처먹고 있다던가 하는 천방지축 소란 끝에 루이는 결국 탈출에 실패합니다. 마지막까지 좀 시간 끌어보려고 마차에서 자는 척하다가 마차 째로 파리에 끌려가지요.
2. 루이를 잡아온 혁명정부는 사실 처음에는 의사결정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꽤 난처해 했습니다. 당시 귀환하는 루이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렸지만, 혁명정부는 "왕을 환영하는 자는 중형, 왕을 모욕하는 자는 교수형" 이라는 엄격한 포고를 내걸죠. 생각 좀 해야겠으니, 왕에게 찬성하는 자든 반대하는 자든 이제까지처럼 폭주하지 말고 다들 일단 다물어 보라는 의미입니다.
3. 북한에서 칭호 수여나 정부 명령, 위원회 소집 등의 최고인민회의 권한하 명령을 발할 때 최고인민회의 정령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그쪽 의미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도 쓰던 말이고 특히 일본 내각의 성문법을 정령(세이레이)이라 합니다. 조선에서도 개화기 때 대한제국 정부가 정령이라는 이름으로 포고와 법령을 발했습니다.
4. 정령 부분에서 '서무'가 일반적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일반이라는 말이 있고 보통이라는 의미도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같다'라는 뜻으로(예를 들어, '그거나 그거나 매일반이다') 더 많이 쓰였기에 저 말이 되었습니다.
5. 정약용이 작위라고는 했는데, 절충장군이나 정헌대부 같은 것은 산계이며 엄밀한 의미의 작위와는 조금 다릅니다. 봉건적인 의미도 아니고요. 정약용의 말은 일종의 은유적 설명입니다.
32. 혁명의 파도(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