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31. 총선거(4)
태천군(泰川郡) 사는 상돌(尙乭)이는 이름에서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사노(私奴)였다.
언제부터 노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몇 대조 ? 노비가 이런 말을 쓰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 가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혹은 가난에 못 이겨 자신과 가족을 통째로 노비로 팔았는지 기록해 둔 사람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상돌이의 부친 백손(白孫)은 곰비임비 푼돈을 모아 어느 정도는 살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털어서 나올 먼지조차 없다.
그 경위도 따지고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백손의 주인은 상돌이를 포함한 백손의 자녀 네 명을 모두 분할하여 자식들에게 상속해 버렸다. 따라서 백손은 뭐라 해볼 틈도 없이 ‘자식 없는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국법에 따라 자식 없는 노비가 죽으면 그 재산은 전부 주인에게 귀속되는데, 이를 기상(記上)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 흔히 쓰이던 노비 재산 갈취용 꼼수였다.
이때는 조선도 어느 정도 시대가 발전하여, 외거노비의 통제는 사실상 포기했고 공노비도 해방한 뒤였지만 그만큼 사노들은 더 악착같이 쥐어짰다. 본전은 뽑아야 하니까.
거기에 한층 더하여, 주인은 늙은 백손이 이미 일하기에는 쓸모가 없어지자 백손이 죽기도 전에 기상을 강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몸이 안 좋던 백손은 건강 돌볼 재산마저 전부 빼앗기고 자식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지저분한 방에서 목숨을 떨구었다.
이론상 노비가 주인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서에는 노비가 격쟁(擊錚)까지 한 기록이 존재한다.
허나 21세기 대한민국의 서민도 이론상이라면야 대형 로펌을 낀 기업에게 법적 분쟁을 시도할 수 있다.
잘 정비된 법은 어디나 멀끔하게 있다. 단지 아랫것들에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조항’이 방대할 뿐이다.
애초에 상돌이는 소송이 뭔지도 몰랐다. 화가 나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네 애비 죽었으니 와서 시체 수습해 가라는 말에 부친을 거적때기로 싸묻었을 뿐이다. 그의 마음에 일어난 버성김은 쓰레기를 치울 때 이상은 아니었다.
백손이 죽기 전에 방에 똥오줌을 흘렸다고 괜히 역정 내며 걷어차는 현 주인? 그러니까 아버지 주인의 아들에게도 그다지 굴욕감이 들지 않았다.
인간은 말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동물보다 훨씬 빠르게 조련할 수 있다.
실제 사례로 증명된바, 고등 교육을 받은 현대인조차도 악랄한 고문이 반복되면 뇌가 스스로 이성을 삭제하고 충실한 노예가 된다.
상돌이처럼 몇 대에 걸친 노비는 주인에게 매 맞으면서도 그곳밖에 갈 데가 없어 주인의 품에 기어드는 강아지나 다름없다. 말 몇 마디로 자유의 불꽃이 가슴에서 용솟음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돌이는 요즘 노비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고 있는 총선거 소문이나 노비당 가입 권유에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새벽에 나가서 개똥 줍고 아침에 마당 쓸며 오후에는 소꼴 베고 저녁때는 새끼를 꼬아야 한다. 소소한 일탈이 있다면, 요즘 여기저기 시뻘겋게 칠하는 통에 너도나도 사들여 값이 많이 뛴 꼭두서니를 나간 김에 좀 캐 오는 정도다. 그게 상돌이 인생의 전부였다.
오늘 새벽, 막 망태기 들고 나서는 상돌이의 귀에 들린 종소리도 지저귀는 새소리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나오시오! 선거 날이오! 모두 나와 인민위원에 투표합시다!”
“단돈 넉 전! 넉 전에 수령을 여러분의 손끝으로 임명하시오! 돈냥이 없으면 쌀자루나 닭을 묶어 와도 상관없소!”
해가 채 뜨기도 전에 기운차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요즘 상돌이도 몇 번 보던 혁명군인가 뭔가 하는 자들이었다. 의주바지와 의주 민소매 저고리(조끼)를 붉게 물들여 입고 다녀서(형편 안 되는 자는 붉은 수건이라도 맸다) 눈에 잘 띄었다.
그들은 어디 서양의 것이라는 작은 종을 울려 사람들을 깨웠다. 흔들기만 하면 성가실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나는 물건이었다.
원래 이때가 조선 사람의 기상 시간이기는 하지만, 게으른 자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었기에 몇몇 집에서 시끄럽다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것들아! 그놈의 영길리 종 그만두지 못해! 짐승이고 사람이고 밴 새끼 다 떨어진단 말이다!”
“하하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는가!”
사람들은 너도나도 일어났다. 다만 새마을을 만들러 나가는 대신 혁명군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다행히 덤비는 사람은 없었는데, 칼과 몽둥이를 차고 있는 건장한 남자 여남은 명에게 맨몸으로 달려드는 것은 현명한 조선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혁명군 하나가 문간에 멍청히 서 있던 상돌이를 발견했다.
“아, 상돌이 아닌가. 자네도 우리와 같이 가세! 이 길로 투표소(投票所)에 가서 인민위원을 뽑아 보자는 말일세!”
“저 말입니까? 하지만 전 한 푼도 가진 게 없는데요.”
“오늘 하루 우리 일 좀 도와주면 돼! 그 품삯으로 넉 전쯤이야 쳐 주지. 안 그래도 사람 모자랐는데 잘 되었군!”
“아니, 그런데 소인네는 일하러 나가야…….”
그때 종소리에 놀라 나와 본 집주인 김 진사가 고함을 쳤다.
“너희들이 지금 남의 집 종놈을 꾀어 뭘 하느냐! 냉큼 꺼지지 못해!”
상돌이에게 말을 걸었던 젊은 사내가 인상을 팍 구겼다.
“꾀다니, 점잖은 어른이 그 무슨 말씀이오? 우리는 근문소 정치국의 명에 따라 투표를 독려하는 중이외다. 거기에 우리는 무력위원회로부터 총선거에 헤살 놓는 자를 혼쭐낼 권한도 받았소. 말조심하쇼!”
‘정치국’ ‘무력위원회’ ‘총선거’ ‘권한’ 따위의 생경한 단어에 엄청나게 힘을 주어 발음하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관헌 같았다.
허나 어차피 혁명군이라고 해봐야 이 동네 사람. 여기 모인 청년 대부분을 코흘리개 때부터 봐 오던 김 진사는 주눅 들지 않았다.
“너 이 자식. 개울 건너 살던 포수 길명(吉明)이 아냐? 어딜 감히 눈을 이렇게 치뜨고 대들어? 네 부모도 이 어르신 앞에서는 마님, 마님 하며 길을 비키는데 이 버르장머리없는 게!”
노비 가진 주인들은 총선거의 노비 참여를 당연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비들이 시준을 지지하는 것처럼, 향반이나 향임들 중에서는 거꾸로 부호들의 권익을 내세운 평준위원장 김창시 쪽 지지자가 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호응한 부호들은 자기 집 노비나 머슴들의 투표를 방해했다.
조선 종놈이란 게 대개는 상돌이 수준이라 주인이 가지 말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집에 있었다.
반항하는 녀석은 집에서 떠날 수 없는 일을 시키거나, 흠씬 매질하여 걷지도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이것이 조선의 선거였다.
그러나 상대도 조선 사람이다. 길명이는 삐딱하게 서서 김 진사를 쳐다보았다.
“이거 나리께서 수평도를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오. 임금도 수령도 없는데 누가 누구 마님이야? 동네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계시라고.”
“이, 이 무도한 도적놈들이 때 만났다고 날뛰기는……! 야, 상돌이 이놈아. 넌 뭘 그렇게 멀거니 서 있어! 그 오라질 놈의 투표인지 뭔지 갔다가는 내 손에 요절이 날 줄 알아라. 어서 나가 일이나 하지 못해! 우리 집에는 갈 녀석 없으니 너희들도 썩 물러나라!”
“회장 정 진인은 누구나 투표에 올 수 있다 했는데, 지금 총선거에 어깃장을 놓자는 거요?”
길명이가 그렇게 대꾸하며, 자리를 피하려던 상돌이를 가로막자 김 진사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놈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남의 집에서 이 무슨 행패더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내던졌다. 길명이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그 노인의 힘보다는 공기의 힘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은 부채가 길명이의 이마를 건드리듯 하고 떨어지자 길명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아이고! 아이고! 이 늙은이가 선거 못 하게 막으려고 혁명군을 함부로 치네!
반동이다! 반동이야!”
“뭐, 뭐, 반동?”
김 진사는 그 말에 흠칫했다. 반동이 무슨 뜻인지까지는 자세히 몰라도 혁명군에서 ‘반동은 사형’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곧 사방의 청년들이 살기등등하게 무기를 빼 들었다. 그때쯤 해서는 김 진사의 아들들도 뛰쳐나왔으나, 그건 오히려 혁명군의 분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
“반동을 다 때려잡아라!”
빡! 김 진사의 머리에 자비 없는 몽둥이가 내리꽂히자 탕건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무시무시한 폭력이 벌어졌다.
조선은 법적 처벌이 전혀 공정하지 않은 대신 사적 처벌이 발달한 쪽이었다.
김 진사는 평소 도리를 잊고 법을 자기 유리한 데만 끌어다 쓴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었다.
백손이 상대로 야비한 수작을 부린 김 진사의 횡포는 동네 사람 모두가 알았다. 나와 있었던 사람들은 “음, 반동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나도 투표나 하러 갈까.” 하며 슬금슬금 들어가 버렸다.
김 진사와 아들 삼 형제가 운신도 못 할 정도로 두드려 맞고 옷을 다 뺏길 때까지도 아무도 도우러 오질 않았다. 내친김에 김 진사네 살림까지 다 들부수어 버린 혁명군은 비명 지르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술병과 그릇을 챙기고 닭이며 개를 끌어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상돌이는 울상이 되었다.
“아, 아니. 이렇게 난장을 놓으면 소인은 어찌합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데, 내일이면 맞아 죽거나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그 무슨 걱정이야? 이제부터 혁명군에 들어오면 되는걸! 지금 봤지? 우리 패거리에 들면 아무도 자네를 함부로 하지 못할 걸세! 언제까지 손 비비고 공짜일만 해 줄 텐가? 한 동리 사니 나도 다 알아. 이자는 자네 아버님의 원수잖나?”
그러면서 길명이는 새끼줄에 묶인 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김 진사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존경받는 진사 어른을 제 아들 쥐어박듯 하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무도한 행동에 상돌이는 몸이 얼어붙었다.
“정 진인이 오셨으니 이런 놈들은 오금을 펴지 못할 걸세. 일단 따라오라구!
오늘 투표만 끝나면 밤엔 이놈들로 잔치 한번 할 테니!”
상돌이는 거의 알몸으로 묶여서 끌려가는 옛 주인들을 턱 벌린 채 바라보았다. 그토록 위엄 있고, 무섭고,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주인들은 지금 혁명군에게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자신과 같은 노비처럼 보였다.
그리고 양반이 노비가 될 수 있다면, 노비도 양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전 문구나 책자, 요란한 연설보다 그 비참한 모습이 상돌이의 마음을 더 뒤흔들었다. 상돌이는 망태기를 벗어 내팽개치고 혁명군의 뒤를 따랐다.
이 동리 투표소는 면장이라 할 수 있는 권농(勸農) 집에 차려졌다. 물론 권농인 변대헌(邊大憲) 역시 인민위원 중 하나로 출마하였기에 도저히 공정한 선거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면사무소가 없는 조선 지방 행정 탓이지 근문소가 수작을 부려서는 아니다.
상돌이는 사방을 뒤덮은 벽보와 깃발에 둘러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보가 각자 평양에서 누굴 지지할지를 천명하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서상의 돈을 어떻게 끌어오겠다는 둥의 호언장담을 이름과 함께 휘갈겼는데 심지어 내걸 자리 두고 격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런 문구는 혁명의 유행을 따라 대개가 시뻘겋게 쓰여 있었다. 가시성이야 좋겠지마는 언서조차 못 읽는 상돌이 입장에서는 기이하고 무서운 부적 같았다.
문간에 멈춰 서서 들어가기 어려워하는 상돌이의 어깨를 길명이가 다독였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자. 여기 넉 전을 내고……. 아차, 빈손이라고 했지? 그럼 내 장부에 적어두게 함세. 이봐. 미동이. 이 친구 저 쇠골 사는 상돌이라고 하는데, 돈은 없고 오늘 우리 품이나 거들어주기로 했네. 들여보내 달라구.”
서상이 보통선거의 대의에 어긋나게 넉 전의 투표값을 받는 이유는, 재정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중복 투표를 방지하기 위해서가 더 컸다.
조선의 호적이란 게 믿을 물건이 못 되어서 동네 사람들의 안면인식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면 당연히 부정 투표자들이 나온다.
선거의 위력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굳이 그런 데 돈 많이 붓고 싶지 않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투표 수십 번씩 할 부잣집은 동리에서도 유명하여 속이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효과는 있었다.
그러니까 길명이는 제도의 취지를 유연하고 현명하게 지킨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수금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동(未同)이 아니라 말동(末同)이다! 젠장할. 새벽부터 오는 놈들이 다 이런 공짜 손들뿐이군. 이래서야 무슨 낯짝으로 위에다 돈통 가져가라는 거야?”
혁명군 군적에 이름 올릴 때 서기가 실수하는 바람에 미동이가 되어버린 말동이가 역정을 내자 길명이는 코웃음을 쳤다.
“말똥이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그냥 그 이름으로 바꾸지 그래. 아무튼 신소리는 그만하고, 네 돈도 아닌데 왜 난리야? 위에서 돈 빼돌렸다며 의심할까 봐?
내가 잘 말해 줄 테니 그만 뭉그적대라고. 이제 사람들 몰려올 거야.”
“알겠네, 알겠어. 자네 이름이 뭐? 상돌이? 이 패쪽 받고 들어가게. 그런데 누굴 묶어 온 거야?”
“아, 반동이네.”
반동이라는 말 한마디면 설명이 다 됐다는 투였다. 상돌이는 말똥이, 아니, 미동이가 한마디의 반론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더 놀랐다.
길명이는 청년들에게 능숙하게 지시했다.
“너희는 이것들을 어디 광에 처넣어 둬. 그리고 상돌이 자네는 날 따라와. 어떻게 투표하는지 가르쳐 주지.”
그러고는 미동이에게 받은 패쪽 두 개를 상돌이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저기 건넛방이 투표소인데, 사람들 들어가고 나오는 거 보이지? 가면 상자가 두 줄로 늘어서 있을 거야. 자, 잘 들어. 검은 패쪽과 붉은 패쪽이 있는데, 앞줄과 뒷줄의 가장 왼쪽에 넣으면 되네. 가장 왼쪽이야. 알지? 밥숟가락 드는 손의 반대편이란 말이야.”
상돌이는 고민하다가 용기를 냈다.
“그러면 누구한테 투표하는 거지요?”
설마 상돌이가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던 길명이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줄은 인민위원을 뽑는 투표인데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이 이 집 주인인 권농 변씨야. 변씨 공부 많이 한 거 자네도 알잖나. 인민대회에도 갔다 오고 혁명군이 영변부 치는 데도 곡식을 대어, 정 진인이 굳게 믿는 사람이니 검은 패를 거기 넣으면 되네. 나머지는 정 진인을 호시탐탐 노리는 가산이며 박천쪽 패거리들 편이거나 변씨만 한 인망이 없는 자들이라 돌아볼 것도 없어.”
엄청나게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투표 요령 교육은 계속 이루어졌다.
“붉은 패쪽은 뒤쪽인데, 이건 어…… 전문위원회(專門委員會)라고 들어봤나? 아니, 자네 얼굴 보니 알겠군. 됐네. 그러니까 이것도 왼쪽에 넣으면 돼. 알아들었지?”
신분별, 직능별로 무섭도록 빠르게 이루어진 합종연횡 결과 탄생한 각종 계급 대표 단체들의 선거라는 말은 해 줘도 상돌이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명이는 그대로 상돌이를 안에 밀어 넣었다.
“내 말대로 하면 아무 걱정거리도 없어. 끝나거든 날 찾아와서 이것저것 심부 름이나 하면 되네.”
안에는 작은 상자가 여러 개 있었는데, 언서 모르는 자를 위해서 두어 명이 돌아다니며 이 상자는 누구의 상자이노라고 계속 말해 주고 있었다.
먼저 이 집 주인이라니까 별생각 없이 검은 패를 왼쪽에 집어넣은 상돌이는 붉은 패를 들고 뒷줄에 갔다.
상돌이가 멈춰선 것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안내하는 자는 상돌이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잽싸게 따라붙어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가장 왼쪽부터 말해 줄 테니 잘 들으시오.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니깐.
여기는 포수들이 모인 백발백중회이고, 이다음은 중과 무당이 모인 미륵사(彌勒社), 그리고 여기가 노비당이며 저 오른쪽이 부녀회요. 그리고 그다음은…….”
평안도에 난립하던 단체들은 정치국의 조율을 거쳐 대강 분야별로 한 개씩 대표 단체를 내세울 수 있었다. 내분이나 소통 수단의 미비로 도저히 그러지 못하는 자들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빠졌다(마찬가지 이유로 시준은 백발백중회를 없애지 못했다).
시준은 비례대표를 참고해서, 이들은 인민위원회와는 별도로 평양에 대표를 보낼 수 있다고 규정했다.
정해진 기한 내에 자기들끼리의 교통정리를 끝내는 데 성공한 단체는 단체의 이름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일정 수 이상마다 한 명씩 대표를 추가할 수 있었다.
선거 관련 업무는 해 본 적 없는 시준이 기억을 쥐어짜 만들어낸 원시적 비례대표제였다. 잘만 하면 지역별로 한 명인 인민위원장에 더해 고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추가로 파견되는 일이라 지역 사회도 최대한 많이 힘을 실어 주었다.
상돌이는 가장 왼쪽에 있는 상자에 투표하라던 길명이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길명이는 김 진사가 기억해 냈듯이 포수집 아들이었다.
그러나 상돌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 상돌이는 조그맣게 물었다.
“노비당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노비당이 많은 패쪽을 얻으면 평양에 한 사람 가게 되겠지. 가서 정 진인에게 잘 얘기하면 노비 신세 벗을 수 있겠다는 사람도 많고.”
아직 대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조선식 설명이지만 상돌이에게는 오히려 잘 들어왔다. 상돌이는 길명이가 지정한 맨 왼쪽 상자를 한번 쳐다보고 빨간 패쪽을 움켜잡았다.
그는 노비당 상자에 떨리는 손을 집어넣었다.
별로 비밀 투표도 아니고 엄밀히는 보통 선거도 아니었으며 투표소 현장에서까지 쌀 주머니와 담배쌈지가 오가는 막장 총선거였지만, 1인 1투표 원칙만은 돈 받고 나무패 내어 주는 혁명군 병사들에 의해 잘 지켜졌다.
그리고 그 대표자는 다시 그들의 장을 선출하였으며, 수령은 이미 뒷전이 된 인민위원장들은 ? 사실 개중에 수령도 몇 명 있었다 ? 평양으로 집결했다.
42명의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승려?공장?무당?백정?노비?부녀 등 각계각층의 단체에서 뽑힌 21명의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합쳐 예순세 명의 대표는 명실공히 평안도의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중앙인민회의(中央人民會議)의 당당한 위원이다. 더 이상 평안도라거나 서도(西道)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중앙, 그러니까 가운데를 천명한 이 기구는 큰 의미가 있었다.
비록 1기(期) 회의에는 평안도 사람만이 모였지만, 이는 앞으로 평안도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까지 확장하겠다는 선언이다.
당연히 지역 인민위원회와는 차별화되어 한 끗발 높은 명칭을 쓸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김창시가 내놓은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가 시준에 의해 단칼에 기각당하긴 했어도 명칭에 담긴 뜻이야 한마음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막중했다. 이들은 이제부터 행정부와 사법부를 구성해야 하며, 그 수장을 선발함은 물론 휘하 조직의 얼개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63명의 중앙의원(中央議員)들 대부분은 엄밀히 말해 행정이나 통치 전문가가 아니라 지역의 대표일 뿐이다. 실무진은 거의 서상에서 일 보던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고을의 의사를 대변한다면 이들에게 주어진 권한 중 하나, 그러니까 이 모든 집단의 최고 권위자를 선발하는 일부터 잘 해야 했다.
총선거의 뜻을 퇴색시키지 않기 위해 시준은 대한민국과는 좀 다른 체제를 취했다. 중앙의원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중에서 최고 대표를 선발하는 것이다.
이는 중앙인민회의의 권위를 크게 제고할 것이다. 또한 총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조선 사람에게는 아직 의회의 의장과 행정 수반을 따로 유지할 만큼의 정치적 성숙함은 없었다.
그래서 중앙의원 중 야심 있는 자들은, 이번 선거에서는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투어 입회했다. 이들은 일반 민중보다야 정치적 감각이 훨씬 나은 자들이었으며 지금 이름을 알려 둬야 다음 기회를 노리기 쉽다는 사실도 금방 파악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무대에서는 아니다.
평양부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힌 서상 회장 정시준의 연설 차례가 가장 첫째라는 사실은 어떤 세력 분석보다 더 강렬한 확신을 주었다.
시준은 천천히 연단으로 올라섰다.
그는 이제 인민대회 때처럼 장터에 대충 사람 모아 놓은 게 아니라 선화당을 화끈하게 부수고 터서 확장해 놓은 회의장에 있었다. 사람이 백 명도 되지 않아 목소리도 충분히 들릴 만했다.
새삼 자기를 소개할 필요가 없는 위치이지만, 대화라는 것은 서로가 모르는 사실이 아니라 아는 사실을 교환할 때 더 가치가 있기에 시준은 간단히 인사를 마쳤다.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시준의 첫마디는 의원들의 기대에 꽤 어긋나는 것이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중앙인민회의를 돌아보던 시준은 입을 열었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친 이 크나큰 혁명은 결코 저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말
1. 백손이와 상돌이가 당한 일은 조선 후기 이전까지 만연했던 꼼수입니다. 작중에는 그냥 솔거노비 상대로 저질렀지만 주로 외부에 있어 따로 재산을 갖추기 용이했던 외거노비에게 쓰던 방법입니다. (물론 솔거노비라고 집안에만 있는 건 아니었고, 주인 옆집 산다던가 하는 경우도 흔했으며 따로 자기 몫의 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재산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외부에 사는 노비는 딴생각을 할 확률과 능력이 높고, 지속적으로 모든 수단을 써서 반항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때쯤 오면 외거노비는 견디다 못한 주인이 돈 받고 해방하거나, 아니면 주인을 모함해서 죄인으로 만들거나, 극단적으로는 주인을 살해해 버리든가;; 하여 사라져가는 추세였습니다.
공노비 중에서도 밖에서 신공 납부하는 노비가 많았지요. 공노비 해방의 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19세기 조선에는 외거노비가 많지 않았으며, 그래서 작중에서는 저렇게 서술되었습니다.
사실 집 안에 있는 노비라면 그냥 패고 뺏으면 되므로 저건 점잖다는 평판 잃지 않고 뒷탈 안 나게 하려고 머리 쓴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조선 (외거노비를 포함한) 노비에게 가끔 보이는 자유성과 작중 상돌이의 무기력이 뭔가 모순된 것으로 보이실 수는 있는데, 둘 모두 조선에서는 공존하던 요소였습니다.
2. 신새벽에 나가 개똥 줍는 일을 왜 하냐면 거름 때문입니다. 일찍 안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다 쓸어가게 마련이라 부지런해야 했죠.
3. 변대헌은 실제 역사에서도 태천군 출신으로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사람인데, 권농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작중의 창작입니다. 또한 오늘 많이 등장한 백성들 역시 전부 가상 인물입니다.
4. 미륵사 명칭이 寺가 아니라 社인 것은 오타가 아니고 의도된 명칭입니다. 작중 묘사된 기표 방법이 좀 복잡한데, 글 못 읽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5. '전문' '중앙', '최고' 라는 말은 어째 일본식 단어 같지만 현재와 비슷한 맥락으로 조선 시대에서도 쓰였습니다.
'최고인민회의'는 아시다시피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한의 최고 의결기구이며,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다르게 김정은은 여기 대의원이 아닙니다.
겸할 때도 있긴 했는데, 요즘 '정상국가화' 흐름에 따라 표면상 '우리 공화국은 행정/입법을 엄격히 분리한다'는 어필이죠. 물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의장'은 따로 있는데 이쪽은 대표자스러운 명칭과 다르게 상임위원장보다 한끗발 낮습니다.) 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므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김창시가 회귀자인 건 물론 아니고 우연의 일치입니다.
32. 혁명의 파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