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05화 (105/284)

105화

31. 총선거(3)

시준이 던지고 간 사향 주머니를 집어 들던 기랑이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왜?”

“……몰라서 묻니?”

지유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됐다. 이거나 좀 치워 줄래? 그 애……. 아니, 이제는 시준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준이 볼까 봐 감춰 두는 데 고생했어.”

그러면서 지유는 이불 밑에서 흰 무명천을 하나 꺼냈다. 기랑은 그것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피 났어? 상처 좀 봐.”

“아니야. 이건 기침하다 나온 거야.”

기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각혈은 조선 시대 사람이라도 그 위험성을 알 수 있을 만큼 중증의 환후다.

그러나 지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절대 이야기하지 마. 그 사람은 걱정이 많으니까. 온 평안도를 뒤져서 의원을 찾아온다 어쩐다 할 텐데, 지금까지 왔던 의원도 별로 효험이 없어서 새삼 그러고 싶지는 않아. 독한 약 마실 때마다 몸에 기운이 죽 빠지는 것 같아.”

기랑은 긴장하여 침을 삼켰지만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지유는 물론 기랑 역시 조선 사람이었기에 ‘의사에게 가면 병이 낫는다’는 개념을 현대인처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점괘 안 맞았다고 복채 돌려받지는 않듯이, 이 시대의 치료는 의사가 책임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어의 정도의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면,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면 어차피 죽을 건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찾는 서비스에 가까웠다.

오히려 아무 약이나 퍼먹이고 침 막 찌르다가 멀쩡한 사람도 황천길 보내기가 예사인 것이 이때의 의사다. 사회 체제의 문제라고 하기는 뭐한 게, 의대에서 학위까지 받는 유럽 의사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당연히 사람들 역시 웬만하면 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의사가 기껏해야 중인이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글 아는 선비라면 대개가 그냥 관찬으로 검증된 의서를 구비해 놓고 기초적인 의학 지식을 스스로 익혀 처방했다.

그래서 기랑도 ‘무슨 소리냐. 지금 당장 시준에게 부탁해야 한다. 불랑국 의사든 뭐든 데리고 와서 수를 내줄 거다.’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유가 기이하리만큼 심상하게 말했다.

“남쪽으로 끌려가면서 우리 식구들 중에도 병들거나 지쳐서 죽은 사람이 많았어. 상갓집에 가 본 적은 있지만 옆에서 사람이 죽는 건 나도 어릴 때 말고는 못 봤는데 사람 팔자가 사나우려면 그렇게 되더라고. 늙은 개가 며칠 앓더니, 어느 날 나가 보면 눈가에 파리 꼬인 채 죽어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게…….

산다는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

기랑도 조금 다른 면이지만 동감했다. 아무리 위세를 자랑하고 천년만년 살것 같이 패악을 부리던 인간이라도 칼날이 한번 창자에 스며들면 길어봐야 이틀을 못 버티고 죽는다.

그러나 지유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 둘은 그럴 만한 교육도 받지 않았거니와, 21세기 사람인 시준과 같이 매체를 통한 가상적 경험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지도 않다.

매일같이 대량의 정보를 간접 경험하는 현대인은 정보의 선택적 무시에 능숙하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테니까.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서 이미 현대인은 그것이 게임이건, 영화이건, 뉴스이건 가상적 죽음을 유희로 즐길 수 있다. 죽음에 의미를 붙이는 호사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지유는 이 시대의 여인으로서는 체험하기 힘든 경험들을 하면서, 감정과 감각이 배제될 수 없는 현실적 죽음의 경험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종국에는 자신조차도 그 위험을 겪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대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생경한 방식으로 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집중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주제에 한가롭게 사(死)의 찬미를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모두 포기하거나 관망하는 일이다.

죽음을 인정한 지유는 어느 때보다 삶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심상을 명징한 언어로 자아낼 학식은 없지만, 지유는 투박하게나마 그것을 표현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내가 바라는 것을 전부 다 하고 싶어졌어.”

“무슨 말이야?”

지유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기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준이 너를 맞이한다고 했어?”

기랑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밤에 가까이 한 적은 있어?”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던 기랑이 고개를 갸웃하자, 지유는 난처해하며 설명해 주었다. 기랑이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몰랐다는 사실은 그녀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유의 설명을 들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그게 무슨 일인지 알아야 부끄러움도 있는 법이니까.

기랑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요전에 그럴 뻔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실패한 경험이니까.

“아니.”

“그럴 것 같더라. 미안해. 네 생각도 알 것 같지만, 난 이제부터 남의 안색 살피지는 않을 거야. 그 사람의 배필은 나야.”

“……알아.”

“일전에 시준이 나으면 성례 치르자고 했었어. 다음에 오면 대답을 해 줄 거야.”

“그래.”

지유는 풀이 죽은 것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기랑을 보고 엷게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만약 내 팔자가 박복해서 오래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을 돌봐줘. 이제 늙은 장주님 돌아가시면 남은 식구도 없고, 조실부모한 데다 동기도 없어.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어도 그건 바깥일할 때뿐이지, 집안은 앞도 뒤도 없이 휑하단다.”

기랑은 고개를 들었다.

“뭐?”

“나 죽고 홀아비 되면 기껏해야 이상한 책이나 쓰거나 노름질에 난봉질밖에 더 하겠니. 네가 옆에서 쥐어박아 주렴. 너도 그러고 싶잖아. 아니야?”

기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유는 농담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작은방 차지하고 사는 건 안 돼. 나는 절대 그 꼴 못 봐. 나 죽으면 알아서 해.”

기랑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녀 자신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반응이었다. 기랑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눈물 흘려 본 게 대체 언제인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너는…… 그렇게나 생각을…… 네가 없어진 후에도…….”

“응. 난 그렇게나 그 사람이 좋아.”

지유가 기랑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기랑은 그 약간씩 떨리는 각오를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후대에야 조롱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선의 축성술은 빈말로라도 뛰어나다고 해 주기는 곤란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산성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이야말로 조선군의 본령.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이 올린 드문 승리는 대부분 산성에서 이루어졌다.

고대에 천 년 가까운 전란의 시대를 겪어 온 한반도의 웬만한 방어 요충지에는 거의 전부 산성이나 그 옛터가 있다. 그리고 저 예리코의 공성전부터 비행기와 박격포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전투성의 입지 요구조건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대 산성의 증축은 선험자들의 지혜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남한산성은 그러한 조선인들의 생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성이 홍 타이지의 군대에게 함락당한 것은 성 안에 있는 인간들이 약해서지 성이 약해서는 아니었다. 청군은 결코 정면으로 남한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삼국 시대나 17세기나 공격군으로 하여금 그냥 집에 가고 싶게 만드는 악랄한 지형은 여전했다.

첨언하자면 19세기라고 해도 사정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다. 폭격기나 장거리 곡사포가 없기로는 17세기든 19세기 초든 마찬가지다.

설사 유럽 군대라 하더라도 이 성을 정공법으로 함락시킬 방법은 제한적이다.

현대인은 걸어 올라가도 헐떡거리는 산에 박격포 수십 수백 문을 끌고 올 근성의 사나이는 이 시대 생존자들 중 나폴레옹 정도밖에 없다.

아시아 군대, 그중에서도 최약체인 데다 공성용 박격포 따위 있지도 않은 조선군이라면 더욱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하다.

공충도 병마절도사 최조악은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예전 동인도 회사 배가 장자도에 처음 왔을 때 조정에 자기도 모르게 거짓 장계를 올린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그다지 의욕 있는 인사는 아니었다. 허나 지금 최조악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유는 태만이 아니다.

제정신인 군 지휘관이라면 남한산성을 정면 공격하는 우행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최조악은 훈련대장 겸 평난도원수(平難都元帥)로 임명된 이득제를 돌아보았다.

“함경도 군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적도가 산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오이다.”

약탈은 항상 다급한 고식책이지 정규 수입으로 활용할 수단은 아니다. 나라 전체가 특히 가난해진 요즘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조순과 비변사는 남한산성의 어영청 및 수어청이 그리 많은 식량을 비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득제는 청군처럼 저들을 포위해서 말려 죽이자는 최조악의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최조악과 달리 김조순의 심복으로서 중앙 정계에 깊이 관련된 인사였다.

그를 평난도원수에 임한 이병원은 현재 비공식적으로 사도세자의 양자가 되어? 이병원이 정조와 동갑이라 정조의 양자로는 도저히 넣을 수 없었다 ? 즉위의 꿈에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꿰맞추기 위해 수주군(水州君, 水州는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의 옛 명칭)이라는 근본 없는 작호도 얼렁뚱땅 받았다. 사도세자가 정말 평안도 무당 꿈에 나타나서 가출을 천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종실 돌아가는 꼴이 한심하기는 했다.

어쨌든 김조순은 왕위에 오르는 일은 천하를 평정한 뒤라는 암시를 주었고, 이병원은 거기에 넘어가 비변사에 적극 협조 중이었다. 이병원은 먼저 토벌의 공을 세우는 장수에게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물론 이득제가 그런 사정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가며 진격을 주장했다.

“세 가지 이유에서 불가하오. 먼저 반적을 한시라도 빨리 쳐 없애지 않으면 각지 지방관과 절도사들이 다른 생각을 할 터이니 이것이 첫째이며, 함경도 군세는 북한산성에 웅크린 도적(총융청을 말한다)을 쳐야 해서 여기로 올 수 없는 것이 둘째요. 그리고 셋째로는, 우리 토포군(討捕軍) 역시 군량과 마초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 않소.”

사람은 착실하지 못하다 하나, 김조순이 믿고 군을 맡긴 인재인 만큼 대는 핑계 하나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결국 충청도 지방군과 훈련도감을 합쳐 1만 2천에 달하는 군세는 남한산성에 대한 공성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최조악이 외롭지는 않았다. 며칠 뒤에는, 빨리 오라는 명령에 마군을 주로 이끌고 왔다가 말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북한산성을 쳐다보게 된 함경 남북도 병마절도사 두 사람도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강철군주 이공이 둑을 터버린 조선 내전은 이제 급류가 되어 경기도를 휩쓸었다.

비슷한 시기, 가경제는 조선 방향에서 계속 들려오는 이상한 보고에 유의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접수되는 첩보는 모순되는 것투성이였다. 왕이 평안도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한편으로 평안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도 했다. 상식적으로 북쪽에서 난이 터졌다면 왕은 남쪽으로 도망치는 게 맞다.

그러나 청은 요 몇 달 동안 조선에 누굴 보낸다거나 첩보 역량을 더 할애할 수가 없었다. 신하들은 ‘지금 그게 문제냐?’고 한목소리로 입을 모았고 가경제도 일단 거기에 찬성이었다.

북경은 당장 급하지도 않은 외부 문제는 의식적으로 회피한 채 국내 반란 통제에 전념했다. 굳이 말한다면 성경부에 네 선에서 좀 해결해 보라는 추달을 한 게 전부였다.

그리고 곧 성경 장군이 자랑스럽게 갖다 바친 조선의 자문은 그나마 청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이제야 앞뒤 이치가 들어맞는구나. 평안도에서 변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젊은 조선왕은 도망친 게 아니라 친군(親軍)을 이끌고 토벌 차 출병한 것이로군. 이를 상국에 따로 아뢰지 않은 잘못은 한 사람 칙사를 보내어 꾸짖어야 마땅하나, 병무(兵務)는 신속함을 으뜸으로 치는지라 경황이 없어 그러했으리라는 사정도 충분히 요량하니 조선에 천자의 자비와 위엄을 제대로 전하도록 하라.”

조선이 정말 공순한 번국의 도리를 교본 그대로 발휘하여 상주사(上奏使) 먼저 보내고 중국의 답서가 올 때까지 반란 토벌을 미루고 있었다면 청이 오히려 더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평안도가 난리 통이라면 중국에 주문을 보내 고해바칠 길 자체가 막혔다는 이야기다. 사신을 못 보내는 게 당연하다.

가경제는 정말 대국의 아량으로 충분히 조선의 그런 사정을 헤아려 줄 용의가 가득했다. 지금 북경은 조선 일이 다 잘 해결된 것으로 마무리하고 귀 틀어막고 싶었다.

사교도 반란 자체만으로 대청이 이렇게 헐떡이는 건 아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청의 힘을 두려워해 숨죽이고 있었을 사방의 불온분자들이 임청의 활약으로 군사력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봉기했고, 그 봉기는 다시 치안의 구멍과 연쇄적 추가 반란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지속됐다.

지방 순무와 총독들은 이대로라면 청이 치세 내내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 그러니까 몽고 48부와 티베트의 전면적 반란이 가시화될 지경이라는 보고를 미친 듯이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뭐 뛰니까 뭣도 뛴다고, 주둥이로 떠드는 협기(俠氣)만 있는 줄 알았던 강남 한족 역시 각종 태업과 납세 거부, 현청 습격 등으로 저항하고 있다.

작금의 상황은 그 가경제가 개인 창고의 개방을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큼 악화일로다. 안 그래도 돈 없는데 조선 놈들이 명나라 때처럼 쫓아와서 쌀 내놔라 지원군 내놔라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는 끔찍한 광경은 악몽에서라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가경제는 얼마든지 관대해질 수 있었다. 여하간 조선은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가경제의 칙사는 상당히 느린 속도로 준비되었다. 일단 평안도가 완전히 안정되었다는 조선 왕의 상주문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 칙사는 출발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대국 칙사가 비명횡사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칙사가 조선으로 출발하는 일은 없었다.

꾸짖기는 하지만 도와주기는 싫은 모순된 칙서의 교열에 북경의 문장가들이 모든 힘을 쏟아내 가며 매달리고 있을 때, 거짓말 같은 급보가 도달했기 때문이다.

“영길리국 군선 이십여 척이 대고구(다구 포대) 앞에 나타났습니다!”

고북구제독이자 군기대신 부찰복장안은 일전에 영길리 함대를 용맹하게 격퇴했던 등주 수군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보고는 그 자신이 만들었던 환상을 산산이 박살 내었다.

“등주 수군은 패멸(敗滅)! 총병관 황상신이 적에게 붙들리고 나머지는 굉침되거나 궤산(潰散)하였다 합니다!”

부찰복장안은 혼백이 흩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서양 대박이십여 척이라면 이놈들이 아주 작정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반란을 지원하다가 들켜서 쫓겨났으면 마땅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건만, 서양국의 무도함과 강폭함은 끝이 없었다.

물론, 로드 암허스트와 윌리엄 드루리 제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당한 개항지를 강짜와 무력에 의해 빼앗기고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자신들의 정당한 복수였다.

드루리 제독은 베트남 해군과 자웅을 겨룰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긴 했지만, 그의 절치부심은 과장이 아니었다.

“아시아에서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굴욕은 없을 것이다!”

그는 2급 전열함 HMS 넵튠(Neptune)을 새로운 기함으로 삼았다. 기함이었던 3급 전열함 파워풀호 역시 뒤를 따랐다. 여러 슬루프와 프리깃 역시 대동한 데다 로드 암허스트의 원래 함대까지 지휘권 아래 넣어 명실공히 아시아 최대 함대의 지휘자였다.

거기다가 동인도 회사를 어떻게 겁박했는지 봄베이 마린(Bombay Marine, 동인도 회사 인도 해군) 배도 여러 척 끌고 왔다. 남중국해의 해적왕이라는 대만 홍기방의 정일수마저도 그들이 어디 가는지 뻔히 알면서 침묵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 해군은 곧 대고구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19세기 말의 진보된 함대로도 곤욕을 치렀던 곳이기는 하나, 그때처럼 서양의 최신 함포가 도배된 것도 아니라서 영국의 불리함은 상당 부분 상쇄되었다.

“포대를 함락시킨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드루리 제독이 묻자 로드 암허스트는 씩 웃었다.

“뻔하지. 황제에게 그가 누구의 양해하에 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것인지 알려 줘야 한다. 톈진에 상륙을 개시하게. 영국군이 배 위에서만 강하다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야.”

“알겠습니다.”

“무리하게 진격할 필요는 없어. 항구를 확보하면 내가 나서서 러시아, 그리고 조선과 교섭해 보지. 이건 그냥 화풀이를 하는 전쟁이 아니네. 러시아와 영국을 극동에서 연결해서 최종적으로는 봉쇄령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전략 목표야.”

윌리엄 드루리는 솔직히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했다. 지도만 봐도 러시아가 조선으로 내려와 영국과 연결하려면 중국 영토의 거의 2할을 뜯어가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극동에 필요한 만큼의 병사를 보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황제가 러시아의 이름에 겁먹어 주기만 하면 충분하다. 영국이 개항장을 돌려받고 조선을 ‘중국의 압제에서 해방’하며 청국과 다시 ‘공정한’ 무역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면 이 정도 군대를 동원한 값은 하고도 남는다.

드루리는 암허스트의 구상에 반박하는 무익한 일 대신 일단 아시아인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 표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전혀 지킬 생각 없는 약속을 태연스레 장담했다.

“명심하지요.”

가경 16년(1811년) 여름, 아시아의 중요 지역 2곳에서는 거의 동시에 전쟁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조선에서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일대에서 근왕파와 김조순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쪽이 모두 지치고 가난한 군대라 격전이라고까지는 말하기 부끄러워도 어쨌든 도합 5만에 가까운 병력이 동원된 대전이었다.

청의 경우는 조금 더 사정이 심각했다. 수도의 관문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은 같으나, 청을 침공한 것은 세계 최강최악의 해적 로열 네이비가 눈 뒤집혀서 끌고 온 함대였다.

그들 역시 나폴레옹 전쟁에 신경 써야 했기에 지금 온 것은 좋게 말해 줘도 2류 해군이라지만 그건 유럽에서의 이야기다. 가경제는 피눈물을 흘리며 개인 창고의 봉인을 풀었다.

역설적으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국 평안도는 전혀 병화의 기미가 없었다.

허나 비록 재난이라 해도 어떻게 보면 익숙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전쟁과 다르게, 평안도에서 일어나는 것은 실로 이 땅 역사에 그 사례가 전무한 사건이었다.

평안도 마흔두 고을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처음 치러진 것이다.

작가의 말

1. 폐병에 피가래가 올라온다는 것은 조선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증상으로 사직하려는 신하들도 종종 있죠. 폐렴은 아시다시피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치료법이 없는 병이었는데(현재도 항생제 투여와 대증요법을 하면서 낫기를 기다립니다), 흔히 고전 작품에서 나오는 '창백하고 야윈 병자' 가 폐렴의 대표 증상입니다.

2. 지유의 대사에서, '동기' 란 한배에서 난 형제자매를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노인들은 아직 이 표현을 쓰시는 분들이 있죠. '앞도 뒤도 없다'는 말도 주로 옛날에 결혼을 강권할 때;; 쓰이는 말로, (부모가 늙어 죽으면) 뒤 봐줄 사람이 없고 (자식이 없으면) 앞에서 막아줄 사람도 없으니 결혼해서 자식 보라는 말입니다.

3. 남한산성에 한번 올라 보시면, 그곳을 포위해야만 했던 청군의 심정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작중에도 서술되었지만 산자락의 요철을 따라 건설된 성벽은 자연적으로 구성된 보방 요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청군은 남한산성의 정면 공략을 모조리 실패했지요.

4. 조선군도 야포나 함포는 있었지만, 공성용 포는 써먹을 만큼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홍경래의 난 당시 정주성을 폭파시켜야 했던 이유는, 동시기의 유럽이나 청과 달리 성벽을 뚫을 수 있는 화포나 제대로 된 공성 전술이 없어서였습니다.

5. 함경도는 좌우가 아닌 남북 병마절도사가 있었습니다. (행정구역상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일전에 처음 등장했었을 때 언급이 안 되었군요.

6. 작중 등장한 HMS 넵튠은 작중 초반에 나왔던 배와는 다른 배입니다.

31. 총선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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