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03화 (103/284)

103화

31. 총선거(1)

시준은 당장 반대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역시 혁명군의 노비 편입 건으로 느끼고 있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푸셰는 지금 잘난 척하려고 나폴레옹 법전을 가져온 게 아니다. 지금 시준의 세력은 매우 위태한 상태였으며, 그 원인은 기껏해야 ‘길드’ 수준밖에 안 되는 느슨함에 있다.

우선 시작부터 문제다. 깃발이야 요란했지만 평양 부민들의 혁명 명분은 굉장히 조야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 새끼가 날 쳤는데?’에 가장 가깝다.

맹자나 순자의 설, 혹은 천부 인권이나 사회 계약론은 정약용이라든지 푸셰, 잘해 봐야 백윤구 같은 일부 지식층만 따로 누리던 지적 사치다.

대동강에서 차형기가 부르짖은 말 역시 생각보다 큰 영향력은 없었다. 그때의 중심 내용은 봉건 군주 타파가 아니라 존경하는 회장의 구출이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왜 평안도가 시준을 따르고 있는가? 거칠게 요약하면 그쪽이 먹고 살 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대개 육체적 배고픔이 해결되면 정신적 갈증을 채우려 한다.

시준은 언젠가 때려치우고 편하게 살리라는 욕심에 자신의 권위를 창조하지 않았지만, 제왕학을 잘 모르는 시준의 생각과 달리 권위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기댈 곳을 원했던 사람들은 알아서 권위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의주 놈들이 싸움에 이겼다고 기고만장하여 평준위원회의 사업까지 손대려고 하는데!”

“무슨 소리야. 장사는 평준위원회가 다 해먹으라는 법이라도 있어? 어차피 다 같은 장사꾼 출신 아닌가?”

“회장이 평준위원회에 그 일을 맡겼는데 네가 진인보다 잘났냐? 계룡산에서 삼백 년 도 닦았냐고?”

라던가,

“가산 쪽 이가(이희저)의 도당이 혁명군에 군기(軍器) 대는 일을 지체하며 야료를 부리는군!”

“그놈들이 없다고 버티면 별수 있나. 결국 회장이 나서야 되는데, 정치국 회의를 열도록 내가 한번 의견을 몰아 보지!”

라는 것처럼, 법이 없으니 시준의 판단에 의지하고 전통이 없으니 시준의 행적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김조순은 언제든지 과거로 회귀하여 너희가 안심하고 섬길 수 있는 우상을 주겠다며 새로운 왕을 내세울 수 있다. 더 이상 고민 안 하게 해주겠다는 유혹은 더없이 강렬하다.

결국 푸셰의 권유는 명백했다. 평안도뿐만 아니라, 앞으로 확장될 지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단일 정부가 필요했다.

‘단지 눈앞의 사업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부드럽게 은퇴하려면 다른 사람이 맡아도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해. 사람이 아니라 체제다.’

체제를 잘 만들어 놓는다면 해당 정부는 아마 누구라도 수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준이 만상에서 확립했던 문서관료제의 핵심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이공이 최종적으로 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공은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혁명정부의 대표자는 될 수 없다. 반동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제에 존재감만 크다면 그 크기만큼의 방해물일 뿐이다.

그의 가치는 현재 단 하나다. 지금 푸셰가 암시하듯이 인민 전부를 ‘왕을 죽인 공범’으로 만들어 더 뒤돌아볼 틈 없는 혁명의 길로 내모는 제물 정도다.

그러니까 지금 시준에게 필요한 것은 정 진인의 덕이 아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잔인함과 크롬웰의 과단성이었다. 푸셰의 말처럼 정부 수립과 이공의 죽음은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시준은 ‘왕이 무죄라면 인민이 유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것 같았다.

“하다못해 말일세. 왕을 재판하기 위해서라도 법은 필요하네. 대체 뭘 근거로 재판할 건가? 조선의 법전은 나도 보았다만, 기본적으로는 루이 카페 때와 다를 게 없어.

루이의 말마따나 ‘왕이 주장했으므로 합법’이고 ‘왕은 다른 사람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조선의 법이지. 그걸로는 안 돼. 뒤집어 말하면, 자네들이 반역자가 되지 않는 데에도 법과 법을 통제하는 정부는 꼭 있어야 해.”

“그래서 왕 모가지 베어 본 당신들의 법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혁명정부가 아니라 제정 정부의 법전이 아닙니까.”

“모르는 척하지 말게. 나는 법전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지 베끼라고 하지 않았어. 핵심은 말이야. 왕보다 더 상위의 윤리 체계를 자네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조제프 푸셰는 마치 ‘내일부터는 아침마다 운동을 하게.’ 정도의 어투로 말했다.

“정부를 만들고 대표자를 뽑아. 의회를 구성하고 법원을 조직해. 그런 다음 왕의 목을 쳐서, 고귀한 피로 인민들의 갈증을 풀어주게.”

시준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왕은 사람들 모두가 왕의 피를 원할 만한 잘못까지는 한 게 없습니다.”

“루이도 그랬지. 그는 선량한 왕이었네. 왕이 죽어야 할 이유가 꼭 혁명의 단초와 일치할 필요는 없어. 일단 일으켰으니, 나중에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서 민중에게 나누어주면 돼. 그리고 그 ‘나중’은 바로 지금이야.”

시준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를 느꼈다. 푸셰에게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찾아오는 질문이 그를 엄습했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지?’

대한민국에서 시준은 남은커녕 그 자신의 태생적 한계조차도 뛰어넘을 생각이 없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그런 짓을 꿈꾸기에는 너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다. 시준은 서민의 자식으로서 가진 자원을 주의 깊게 활용했고, 그 안에서 견실한 예측 가능성을 구축했다.

조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준은 타고난 신분이나 끔찍한 환경에 절망하는 대신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 올려갔다. 그의 재주는 예기치 못한 변수의 제거라는 한 가지의 목적에 집중 투자되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조선 사람 누구보다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아는 자라 할 수 있었다.

흔해빠진 시위라던가 시민운동에도 한 번 참가해 본 적이 없다. 광화문 거리에서 생각했듯이, 단두대 앞에서 고귀한 왕의 머리통을 잡아 흔들면서 드디어 민중의 자유가 쟁취되었노라고 포효하는 역할은 시준의 인생 계획에서 수십억광년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시준은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한다.

시준은 마지막 저항을 해 보았다. 흔히 안 되는 반박이 그러하듯이, 지엽적인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얘기였다.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에요. 유럽인인 당신에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재판의 권위가 재판정(Court) 자체에서 나오는 사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재판은 지방관이 하며 ? 다시 말해, 법정이 아닙니다 ? 그 지방관은 왕의 권위를 위임받아 민형사 소송을 처리합니다. 지금 여러 위원에게 가발 씌우고 법복 입힌 채 법원을 구성해 보아야 조선인에게는 기괴하다는 느낌밖에 안 들 겁니다.”

푸셰는 시준의 우회 공격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 맞는 재판 방식을 궁리하는 것까지 내가 해 줘야 하느냐는 의미로 한숨을 푹 쉬었다.

시준은 푸셰의 의도대로 부끄러워했다. 푸셰는 그런 시준을 달래듯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거꾸로 생각해 보지. 왕을 죽이지 않으면 어쩔 텐가? 왕실을 내세운 괴뢰 정부? 자네가 왕에게 항거한 사실이 다 알려진 이 상황에서는 허황된 탁상 공론이야.

아니면 왕의 장인에게 의탁할 텐가? 미안하지만 자네는 혁명군과 평안도 인민이 없이는 극히 무력한 존재에 불과해. 자네에게 훼손될 수 없는 혈통적 신분이나 특권층 사이의 전통적 인맥이 있나? 합법적 영지는? 권력자가 손댈 수 없는 재산은? 섭정공(김조순)은 손가락 튕기는 정도의 수고만으로도 자네를 숙청할 수 있을걸.”

푸셰는 레드와인 한 잔을 따라 시준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시준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을 속삭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한번 그런 꼴을 당하게 둘 건가?”

시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조심하시죠.”

“조심하지 않을 테니 듣기 싫다면 내 턱을 뭉개 버리는 수밖에 없을걸. 만약 자네가 이대로 우유부단하게 군다면 살아남기 힘들 걸세. 낯부끄러운 말이네만 나를 믿어 보게. 생물의 정의(正義)는 그 생을 지속하는 거야. 사람들이 배신자라고 욕할지라도 난 삶을 속인 적은 없어.”

시준은 타오르는 눈으로 푸셰를 노려보았다. 조제프 푸셰는 느긋하게 잔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시준이 음산하게 물었다.

“당신은 조선왕의 배신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내게 그런 피비린내 나는 길을 권하는 겁니까?”

“그리고 마찬가지 배신자인 자네와, 그 아름다운 연인도 함께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시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푸셰의 손에서 잔을 낚아챘다. 시준은 와인 잔을 마치 소주처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함경도 관찰사 조덕윤(趙德潤) 및 북도병마절도사 이신경(李身敬), 남도병마절도사 김희(金羲) 등 관북(關北)의 군을 관할하는 벼슬아치들이 비변사의 진군 지시를 받았을 때, 평양 근문소 정치국은 이 땅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總選擧)를 결의했다.

정치국 위원들이 죄다 시준의 꼭두각시라서 이 급진적인 제안이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국에는 평준위원장 김창시를 비롯해 만만치 않은 인물이며 파벌이 많았다.

시준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서상이 재정적 권력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 권력까지 명시적으로 획득할 것임을 암시했다.

“우리는 왕을 거꾸러뜨렸소. 만약 우리가 왕과 서백(西伯, 평안 감사)이나 조정을 대신하여 평안도 인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새 왕은 수십만 병사를 휘몰아 평안도를 진멸할 것이오. 우리에게는 더 큰 혁명군이 필요하며, 혁명군을 먹이고 입힐 사람과 땅과 물과 숲이 필요하오.”

정약전을 구해온 이후, 시준이 그 공으로 손을 써서 학교위원장에 앉혀 정치 국에 끌어들인 정약용이 손을 들었다.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서상의 큰 뜻과 포부를 일찍부터 보았소만, 사족과 인민들은 거개가 앞뒤 살피지도 않은 채 장사치가 어찌 수령을 대신하느냐며 격분할 것이오.”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장사꾼이 대부분인 정치국 위원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으나, 정약용은 지금 시준의 옛 스승이며 양부라는 티를 전혀 내지 않고서도 아무도 반박 못 할 정론을 말할 수 있었다.

시준이 이제 본격적으로 손대기 시작한 담배를 내려놓았다.

“존경하는 학교위원장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던 떳떳한 도리를 더욱 밝혀야 합니다.”

“그 도리라는 것은…….”

“대저 군주는 배라 하고 인민은 물이라 하는데, 이제 배는 사라지고 물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물만 있는 이 평안도에서도 쓸데없는 배가 떠 있을 때보다 훨씬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을 확고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이전에 시준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감회깊은 표정을 슬쩍 쳐다본 시준은 말을 이었다.

“물은 어디에 담아 놓건 더 높은 물과 낮은 물이 없이 한가지로 평평할 뿐입니다. 이를 수평(水平)이라고 합니다. 서운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와, 여기의 정치국 위원들께서는 여항의 장삼이사(張三李四)보다 높은 사람이라서 능히 제세안민(濟世安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임을 받았기에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시준은 자신을 쳐다보는 몇몇 사족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지금부터 ‘정부’를 수립하려면 이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 했다.

“만약 다른 물보다 높아진 물을 자처하여 스스로 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지금 옥에 있는 임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임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물 밖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배가 없어졌는데, 배와 더 가까운 물이나 멀어진 물이 새삼 있을 까닭이 무엇이겠소이까? 싫은 사람은 우리의 사업에 등 돌리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다만 그런 사람은 이제 스스로 배가 되길 자처한 자들이니, 서상이 구휼할 민(民)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역사적인 신분제 철폐 선언이라고는 불러 줄 수 없다. 시준의 말은 신분제를 밀어버리겠다는 호쾌한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 신분제를 주장하는 자는 근문소와 서상의 일에 안 끼워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상 근문소와 서상의 그늘을 벗어난 평안도 사람은 경제적, 군사적 두 가지 의미에서 무사하기 힘들다. 찌그러진 큰갓 보전하겠답시고 그 질서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아무 보호 없이 토벌군과 빈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결국 평안도에서는 이제 상하의 분수와 예의의 차등 따위 쓰레기통에 처박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족은 물론, 신분제가 사라지면 이득을 볼 장사치들마저 경악하여 시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준은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아남는 방법이 왕국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준은 전생에서 100억짜리 대형 연구용역 지시를 받았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복잡하고 큰 업무일 뿐이다.’

업무는 뭐든지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단순하고 빠르게 처리할수록 그것은 좋은 사무다. 그래서 시준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서상의 회장으로서 말합니다. 서상은 모든 ‘수평한’ 인민의 위임으로써만 일하는 도리를 떳떳이 밝히기 위해, 평안도 마흔두 고을에서 백성의 신임 받는 사람을 뽑아 올리는 일을 지지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부터 임금과 수령을 대신하여 평안도의 공사(公事)를 맡게 될 것인바 이는 많은 사람의 뜻이야말로 공변된 것이기 때문이오.”

몇몇 위원들은 시준이 ‘서상이 뽑는다’가 아니라 ‘뽑아 올리는 일을 지지한다’라고 말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시준이 상인 연합체인 서도상고총협동회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만들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국가일 것이다.

오매불망 정 진인의 등극만을 기다려 왔던 이제초가 일어나서 회장을 위해 외치려 했다. 그러나 시준은 손을 저어 그를 도로 앉혔다.

“거기에서는 나도, 여러 위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의 ‘물’이오. 한가지로 다시 인민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소.”

서상 각 위원회의 해산을 의미하는 발언이었으나, 동요하는 위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은 서상이 그간 해 왔던 일의 확대판이다. 지난겨울 어지간히 어리석어 인심을 못 얻었지 않고서야 새롭게 개시될 ‘신임’에 떨어질 리가 없다.

그러한 낮은 난이도의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장사치나 토관 사족으로서 큰소리칠 기회 없었던 이들은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인민 전체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시준은 다양한 생각이 얽히고설킨 정치국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서양국에서는 이미 이러한 일이 나라의 풍습이 되었는바 일컬어 총선거라 합니다. 모든[總] 사람이 뽑아[選] 올린다[擧]는 뜻입니다.

수령부터 노비까지 모두가 인민대회에 손을 보태고 구휼을 도왔으므로 단 하나도 외면하거나 따돌릴 수 없소이다.

그들 모두가 인민위원회를 통해 바로 자기들의 사무를 위임받을 수 있고 또한 위임할 수 있으니 이것이 군주(君主)가 아닌 민주(民主)의 공변된 이치요. 이의가 있으신 위원은 지금 말하시오.”

시준은 물론 ‘그런 위원은 왕의 옆에 나란히 매달아 주겠소.’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정부를 만들 결심을 마쳤을 뿐 왕을 죽여버릴 결심까지 마친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협박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되도록 권력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 해서 김창시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위세 높아 보이는 착각도 있었지만, 시준은 평안도에서 가장 강대한 무장 병력의 사실상 지휘자이며 평안도 인민의 지지를 누구보다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시준의 오래된 지인들은 그가 이미 10대 초반부터 거리낌 없이 사람을 파묻어왔던 상인 깡패조직의 모주라는 점까지 기억해 냈다. 시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두 사람인 조제프 푸셰와 정약용마저 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항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별로 반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준의 말은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가 될 일은 없다.

반가(班家)라면 아이 앞에서도 버선코에 머리 조아리던 굴욕도 이제 끝이다.

자리에 있던 임상옥은 작년 겨울 구휼에 힘쓸 당시 겪었던 일들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사사로이 고을 일에 개재한다며 붙잡아가던 영변 부사 정도는 말 그대로 양반이었다. 장사치들이 어딜 감히 어른께 진지 바치는 데 생색을 내느냐며 호통치는 향반에게 그럼 그만두라며 돌아섰다가 건방지다고 뺨 맞은 경험도 있었다(물론 그 향반은 용천부 바닷물고기들 ‘구휼’하는 데에 잘 쓰였다).

백윤구 같은 향토 사족들은 약간 배알이 뒤틀리겠으나, 아쉬우면 인민위원회 선거에 입회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동네에서나 헛기침하고 다니던 자괴감을 뒤로하고 지금까지는 감히 ‘평안도 놈’이 사족이랍시고 나설 수 없었던 정치 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

‘수평’이 절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위원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순간 시준도 눈치채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회장을 따라온 것이다. 이 자손 대대로의 어찌할 수 없는 설움을 벗기 위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서상의 결성 목적은 평안도 치안 유지와 상인들의 이익보호였다.

그러나 조제프 푸셰가 말했듯이, 명분은 ‘나중에’ 주어져도 된다. 사람들은 그걸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이제 정치국의 모든 위원들은 ‘수평 혁명’의 기수가 되었다. 짧은 토론과, 그보다 더 의미 있게 진행된 눈빛 교환 뒤에 표결이 이루어졌다.

정치국 설립 이후 처음 이루어진 만장일치였다.

그 후, 조제프 푸셰가 시준을 찾아왔다. 시준은 약간 피곤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꺼내놓은 말은 웅대한 정치 구상이 아니었다.

“내가 학교위원장(정약용)에게 들으니 자네가 사드(Sade) 후작에 비견할 만한 출판물을 팔아 막대한 치부를 하고 있다던데.”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대개 그렇듯이, 학교 도서관에 고전으로 취급받아 들어와 있는 『소돔 120일』 따위의 책에 손댔다가 정신적 상처만 얻은 경험은 시준도 있었다. 시준은 역정을 냈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시준의 음란소설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이 흉년에 그런 한가한 독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해결책은 시장 확대에 있었다.

시준은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현재 중국어와 영어 교육을 받고 있는 야학학생들 중 똑똑한 청년들을 모아 음란소설을 번역했다. 정약용은 한동안 평안도에 없었기도 하거니와 돌아와서는 형의 구출과 정착, 서울의 가솔 탈출 작전에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못 썼다.

청나라에도 평안도 담배와 묶어서 수출되었고(아편은 성욕마저 죽여 버리는 극약이라 이때는 평안도 담배가 더 적절했다) 영국 선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특히 술집도 사창가도 없는 ? 정확히는 있기는 한데 도깨비 같은 서양인에게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 하는 대담한 사업자가 없었다 ? 삼화부에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남색을 시도하다 걸려 채찍이나 맞던 영국 해군 수병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신비한 동양의 이야기(Mystical Oriental Tales)라는 은어로 통하는 시준의 영역(英譯) 음란소설은 불티나게 팔렸다. 하긴 명장 관우와 여포가 갑자기 뜨거운 전우애를 과시하는 둥의 그런 내용은 차라리 신비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시준은 영국인을 대상으로 하여, 숨기기 좋게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판본을 제작했다. 그러면 당연히 권수가 많아지므로 전질은 더욱 비쌌다. 심지어 윌리 엄 자딘은 자신들이 제대로 된 영어로 교열을 봐서 군에 납품할 테니 동업하자는 제안까지 해 온 적이 있다.

조선-영국의 문화 교류는 시준에게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서양의 다양한 톱니바퀴 사이를 기름칠하는 데에 잘 쓰였다.

그런 사정을 모두 들은 푸셰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라고 하는 걸 보니 자네도 다 읽긴 읽어 봤나 보군? 지금 비세트르(Bicetre) 정신병원에 처박혀 있는 사드 후작이 봤으면 피를 토하며 부러워했을 걸세. 그는 뭘 쓰는 족족 검열에 걸려서 자네와 달리 돈을 전혀 벌지 못했거든. 이 어찌나 출판의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라는 말인가!”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뭘 원합니까?”

“자네와의 대화는 항상 핵심이 빠르게 잡혀서 좋아. 내게도 그 인쇄기와 작업장을 좀 빌려주게. 좀 펴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아, 음란물은 아니니까 안심하게. 뭐, 프랑스에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만, 상도덕이 있지 어찌 자네 밥그릇을 빼앗겠는가.”

“젠장, 전 도색서적 장사꾼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한 푼이라도 벌려면 뭐든지 해야……”

“다 이해한다니까 그러는가. 나는 뭐 젊은 시절 그냥 건너뛴 줄 아는가?”

시준은 말하다가 혀를 깨물고 고통스러워했다.

“무얼 출판하실 생각입니까? 죄송하지만 지금 평안도의 정치, 군사와 관련된 내용은 공개하기 어려운 게 많은데요.”

“하지만 공개해야만 할 것도 있잖나? 이 나라 공전(空前)의 총선거를 하는데 아무도 소식 듣지 못해서야 우스운 꼴 아니겠는가. 이런 일은 널리 알려야 해. 입소문으로는 신뢰성이 없고, 벽보는 부족하지. 종이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신문까진 어렵겠고…… 나는 소책자[brochure]를 만들고자 하네.”

뭔가 이상한 거 나오면 아까의 놀림을 앙갚음하리라 단단히 결심했건만, 푸셰는 시준에게 반박 불가능한 공무를 제시했다. 시준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작가의 말

1. 푸셰가 루이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모두 실제 한 말입니다. 삼부회 소집 건으로 갈등을 일으키던 혁명 직전, 루이는 고등법원에서 새 과세법을 등기하게 한 뒤(프랑스 고등법원은 입법부이며 동시에 사법부였습니다) 이에 대해 오를레앙 공이 '불법이오!' 하고 외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소. 불법이오. 하지만 내가 원하므로 합법이오."

그리고 오를레앙 공은 체포됩니다. 이에 대해 고등법원 법복귀족과 기타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루이는 또 이렇게 답하죠.

"왕은 신민에게 변명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공공의 질서를 이야기하는데, 공공의 질서란 곧 나의 권위를 높이는 일을 말한다."

왜 목 잘렸는지 아시겠죠? 하하. 하지만 그거야 현대인 입장에서 보니 분노하는 것이고, 앞뒤 맥락으로 보면 루이가 왕권 강화에 진심이었다기보단 대들면 안 되는 자들이 대드는 이런 상황에 놀라서 웅얼웅얼 대답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때는 루이의 말 쪽이 올바른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국대전에는 왕을 구속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조선에서 법은 참고 사항이나 업무 가이드라인 수준이고, 왕의 결정이나 사림의 여론이 더 핵심적인 근거였죠. 실록에는 "법은 이러이러하지만, 얘는 죄질이 나쁘고 괘씸하니 더 중형을 가하는 게 어떻습니까?" 라는 투의 의논이 자주 나옵니다.

2. 조선 시대의 지방관들은 물론 봉건 영주가 아니었지만, 각자 방백으로서의 별칭이 있었습니다. 평안 감사는 서백, 함경 감사는 북백(北伯), 황해 감사는 해백(海伯), 전라 감사는 완백(完伯), 경상 감사는 영백(令伯)... 하는 식이죠. 조정에서도 공식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것이 외왕내제의 일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3. 김조순은 물론 섭정공이 아닙니다. 오를레앙 공처럼 왕족도 아니고... 그냥 푸셰가 그 지위에 빗대 부른 것이죠.

4. 소돔 120일은 사드 후작 사후(1814년 이후) 출판되어서 작중 시점(1811년)에 존재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푸셰의 말은 그것 말고도 사드 후작이 많이 썼던 그렇고 그런 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소돔 120일은 21세기 사람이라 해도 어지간하면 불쾌해서 끝까지 읽기가 힘들죠. 관능적이라기보다는 폭력적이고 더러운 느낌이랄까요. 18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어서 혁명정부건 나폴레옹 정부건 일반 국민이건 다 사드를 싫어했습니다. 사드 후작을 정신병원에 처박은 것도 나폴레옹이죠.

다만 출판의 자유를 억압당한 문필가 이런 포지션은 아니고... 사드는 실제 성범죄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좀 이전 시대 인물인 카사노바가 사실 그냥 강간마에 성매수자였던 것처럼, 전근대에 자유연애니 성적 해방을 외치는 자들은 실제로는 그냥 욕심 채우기 위해 댄 핑계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5. 관우와 여포(로 추정되는 인물. 주유로도 보이긴 하는데..)가 나오는 남색소설(삽화 포함)은 정말로 있었습니다. 보고 싶으신 분은 검색해 보셔도 되겠군요. 저도 내용까진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31. 총선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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