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30. 다시 움직이는 국면(2)
안타까운 일이지만 열정과 적성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약용은 조선 조정의 일에서야 따라갈 사람이 드물지만, 혁명에 있어서는 백전노장 푸셰만큼의 관록이 안 되었다. 사람들은 불신을 온몸으로 드러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정약용은 따라온 서상 사람들을 시켜 지게에 진 것을 내려놓도록 했다.
그건 흑산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구경도 못 해봤던 쌀자루였다. 심지어 말린 고기도 있었다. 연설을 듣던 도민들은 저 일꾼들이 허리에 칼만 한 자루씩 차고 있지 않았어도 당장 달려들었을 거라는 표정이 되었다.
“교활한 놈.”
정약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정약용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혁명 연설에서도 야유는 일상이다. 그런 불평꾼들에게 일일이 마음이 상하면 위원회 생활 못 한다.
정약용은 뻔뻔하게 목소리를 드높였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나와 같이 북으로 갈 자는 나서도록 하시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흑산도에는 아예 3, 4대쯤 가족 전부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말인즉슨 여기 있는 가장 한 사람이 나서면 일여덟 명쯤은 그냥 따라온다는 얘기다.
젊은 청년 하나가 머뭇대며 나섰다.
“따라가면 먹을 것을 그냥 준다는 겁니까? 혹시 이대로 배에 싣고 가서 다 노비로 팔아 버리는 건 아니오?”
“여기 있는 손암 선생께서 바로 내 가형이 되시는데, 귀양살이 죄인을 잘 보살펴 준 그대들에게 어찌 내가 그런 무도한 짓을 하겠는가? 그리고 노비 장사를 할 양이었으면 무엇하러 많은 돈을 들여 호구도 얼마 안 되는 이 먼 섬까지 오겠는가?”
그렇게 청년을 설득한 정약용은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평안도에 가면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일은 해야 하오. 늙은이는 아이를 돌보거나 새끼를 꼬고, 기운 쓰는 장정은 혁명군에 입대하며, 부녀자는 길쌈하고 옷을 짓는 것이지. 그러나 누군가의 종놈 신세가 될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이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소. 내가 진실로 이르건대, 평양에는 노비가 한 사람도 없소이다. 모두 뜻을 같이하는 동지인 것이지요!”
정약전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동생이 갑자기 무엇이 되어 돌아온 것인지 궁금했다.
흑산도 주민들 사이에서 ‘동지가 뭐냐?’에 해당하는 눈빛이 오갔다. 정약전에게 문자 배운 학동 몇이 이웃 사람이며 친구들에게 무언가 일러주는 모습이 보였다.
정약용은 사람들을 더 흔들기 위해 좀 더 미시적인 보상을 제시했다.
“이미 소문 들었을 테지만, 여기 우리를 싣고 온 영길리군 중 몇몇이 섬에 머무를 것이오. 만약 일가족이 모두 따라온다면 어차피 집은 빌 텐데, 그간 영길리 사람들이 집을 세내는 삯을 준다 하였소.”
조선 곳곳에 영향력을 확보해 두고 싶은 암허스트 남작의 지시 때문에 영국해군은 가능하면 흑산도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시준은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닌 영토라 부담 없이 팔아버렸다. 시준이 말린다고 해서 영국이 그만둘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망설이는 듯했다. 당연하다.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 느니 여기 앉아서 그냥 굶어 죽는 것이 조선 사람의 ‘상식적인’ 선택이다.
정약전은 이쯤에서 동생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 초라하고 다 쓰러져가는 서당에도 발 뻗고 누울 곳쯤이야 있지. 여기도 삯을 쳐 줄 텐가? 어차피 집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망가지게 마련이니 영길리국 사람이건 뭐건 세 주고 가는 게 나을 것 같구먼.”
정약용이 얼른 대답했다.
“역시 형님의 헤아림은 멀리까지 미칩니다. 이 사촌서당은 학문하기 좋은 명당에 있으니 어찌 마땅히 대장의 군영으로 쓰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많은 몫을 쳐 드리는 것은 물론, 병사들이 마당 쓸고 물 뿌리며 힘써 돌볼 겁니다.”
이름 높은 손암 선생이 선뜻 따라나선다고 하자, 사람들은 삽시간에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하긴 원 역사에서도 흑산도 주민들은 식자로서 훈장 노릇 하며 글도 읽어 주고 문서도 만들어 주던 정약전을 많이 존경했다.
얼마나 존경했는가 하면, 1814년 정약용 해배 소식을 듣고 혹시 육지에서 좀 가까우면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우이도로 (몰래) 나가려던 정약전을 붙잡아 다시 감금했을 정도였다. 일 너무 잘하면 수령도 서울 못 가고 감금되던 조선의미풍양속이다.
어쨌든 지금은 조선식 존경을 정약전에게 표하기도 어렵다. 흑산도 주민 전체가 몰려나온다 한들 영국 수병보다도 형편없이 모자라다.
결국 주민 중 적지 않은 수가 평양 가겠노라고 결의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사람 별로 없던 이 귀양지는 삽시간에 텅텅 비게 되었다.
결국 영국 해군은 그 어떤 폭력도 쓰지 않고 흑산도를 점거할 수 있었다.
“비록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곳은 중국 동남부와 바로 통하는 요지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우리 최종 목적은 마카오와 왐포아니까 가능하면 이곳을 중점으로 장기 전략을 세우는 게 좋아.”
대프랑스 전쟁에서 맹활약한 젊은 장교로서 부함장의 직위를 맡은 헨리 호프(Henry Hope)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병사를 남겨두실 겁니까?”
“물론이지. 그렇지 않을 거면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겠나? 나는 장교 몇 명과 함께 동인도 회사 배에 타고 돌아가겠네. 이제부터는 자네가 킹피셔의 함장대리야. 식사하고 곧 내 방으로 오게. 지휘권 인수를 바로 개시할 테니.”
“제가?”
“아무래도 자네라면 믿을 만하지.”
시모어 함장은 불만에 찬 부하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우리가 중국과 싸우려면 인도 함대가 도착해야 해. 그 전에는 평양외항(삼화부)에서 따개비나 떼며 세월 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하지만 여기라면 최전선일세. 섬을 수복하려 드는 조선 해군은 물론이요, 어쩌면 중국해군이 침공할 수도 있어. 공을 세울 최적의 장소 아닌가.”
“그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설마하니 조선군이 감히 쳐들어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조선인도 충분히 이곳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을걸. 들어 보니 벌써 천 년도 전에 조선의 전설적인 제독(장보고를 말한다)이 이곳에 성을 쌓기도 했다는군.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은 축성토대가 될 걸세.
“흠. 그렇다면 아마 물이 나오는 곳이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해보죠.”
“내가 로드께 자네의 열성을 충분히 전달하겠네.”
그렇게 호전적인 부하를 달랜 시모어 함장은 해도에 이곳을 포트 요크(Port Yorke)라고 적어 두었다.
원 역사에서의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그러니까 거문도처럼 현 제1 해군경 찰스 필립 요크(Charles Philip Yorke)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곧 사촌서당 위에는 유니언 잭이 크게 휘날리게 되었다(여기서 유일한 귀족의 자택이라는, 집세 좀 더 받으려는 정약용의 수작 덕분이 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이도의 조선군이 조선 수군의 역량을 전부 대표한다는 판단은 영국 해군의 지나친 오만이었다.
흑산도별장(黑山島別將)은 전라우수영에 달려가 고변하고, 우수사 서유봉(徐有鳳)은 즉시 각지 수영에 영을 보냈다.
영국 해군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조선은 충분히 전라도 서남부 해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원래 흑산도?우이도 등 이 근방은 위치상 정말 툭하면 외국 표류민이 떠밀려오는 곳이며, 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표류민보다 조금 더 공격적인 목적을 가진 자가 올 위험도 크다. 이를테면 지금 하늘의 도움에 기뻐 날뛰고 있는 조슈의 간첩 모리 후사아키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우수영은 조선의 어떤 수영보다 더 많은 군선을 보유했다.
19세기 초 기준으로 그 수효는 저판이 쉰 자 이상 되는 대전선만 세어서 무려 서른한 척. 아무리 킹피셔가 포격에 능란해도 증기 철갑선이 아닌 이상에야 결코 쉽게 볼 숫자가 아니다.
“양추(洋醜)놈들을 모조리 몰아내라!”
한 척은 가는 길에 침몰해 버리긴 했지만, 전선 12척이라는 근세에 유례가 드문 대함대가 결성되었다. 전라 우수사가 직접 지휘하는 함대는 곧 영국군에게도 발견되었다.
“조선 해군이 접근합니다! 수효는 9…… 10, 아니, 11척!”
헨리 호프 부함장은 입맛을 다시며 손바닥을 비볐다.
“좋아. 그래도 꼴에 군대라고 나오긴 나오는군.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크기로 봐서 병사가 못해도 50명은 탈 것 같은데, 그러면 600명에 가깝다. 상륙하게 되면 우리가 이기기 힘들어. 바다에서 저 야만족의 장난감 같은 배를 모조리 수장한다!”
곧 흑산도 인근에서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빈말로라도 화끈하다고는 하기 힘들었다.
삼화부에 있는 프리깃 정도 되면 아까운 포탄 쓸 것 없이 들이받으면 그만일 터이나, 360톤 내외의 킹피셔는 조선 대전선보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크다고 하기도 힘들다.
포탄을 천진에서 거의 소모해 버린 영국 해군은 그래서 거의 저격 수준의 단발 포격을 지속해야 했다.
조선군의 경우를 말하자면 그냥 대포 사정거리 자체가 영국군에 비해 모자랐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 명량에서의 왜군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가까이서 총통을 쏘려고 접근했다가 킹피셔의 포격을 받고 화들짝 놀라 물러나거나, 재수 없으면 피탄되어 그대로 배를 버리는 양상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두 편 다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이 영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곧 인도 함대가 도착해 보급을 해줄 영국군과 달리 조선은 본토에서 일어난 싸움에도 불구하고 살림이 엄청나게 쪼들렸다는 점이다.
호남은 작년의 흉년으로 가장 혹독한 타격을 받은 곳이다. 당시 재해 때문에 면세가 검토된 ? 원래 역사와 달리 이공이 군대 만들어야 해서 면세는 검토만 되었다 ? 8만여 결의 땅 중 절반 이상이 호남이었다.
물론 호남의 경작지 자체가 넓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선 논밭의 반 이상이 전라도에 있는 건 아니다. 비율로 따져도 호남이 입은 피해는 가장 막심했다.
그러므로 전선 12척의 출동은 전라도 전체의 재정을 뒤흔들 수 있는 지출이다.
중앙의 지원이 미비한 상황에서, 감사 김희순과 우수사 서유봉, 전라도 병마절도사 서춘보(徐春輔)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이 실함 사태에 대처하려고 애썼다. 전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주조하며 화약을 그러모으라는 분부가 사방을 달렸다.
물론 그건 다 돈이다. 이공이 역사대로 면세만 해줬어도 좀 나았으련만, 강철군주가 모아들인 그 돈은 수경포도청 같은 곳에서나 훌륭한 성과를 발휘하여 서울 도성을 수놓는 칼침과 폭탄질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 속오군을 소환하려고 했던 김조순은 불난 집에 가서 쌀좀 달라고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비변사에서는 연일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어차피 수단은 제한되어 있다.
김조순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지시했다.
“할 수 없다. 일단 통제사(統制使)에게 서쪽으로 나아가 전라우수영의 뒤를 받치라고 일러라!”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 우수사를 겸한다. 따라서 위치로 보아도 전라도를 지원해 줄 가장 가까운 곳이거니와, 삼도수군통제사는 말 그대로 경상·전라·충청의 3도를 책임지기 때문에 직무상 출동해야 마땅했다.
현 통제사 오재광(吳載光)의 경우 위인은 특출날 것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영길리군을 막을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경상도의 해상 전력을 일부 떼어감으로써 경상 감사 김회연으로 하여금 막대한 지출을 강요하고 ? 본래 조선군은 군영에서 군비 지출을 감당하기로 되어 있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 좌우 병마절도사 역시 당장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어차피 영남은 지금 김조순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다고 하여도, 영호남을 합쳐 군적상 11만에 달하는 병력을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것은 매우 뼈아팠다.
그야말로 차(車), 포(包) 다 떼버린 격이다. 김조순은 이를 갈며 남은 자산을 정리했다.
일단 황해도 군세는 뺄 수 없다. 시준이 그 틈을 노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성이 있다면 내부를 단속하지 굳이 서울로 쳐내려오지는 않겠지만, 왕 다리를 분질러 먹은 미친놈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하는 물음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훈련도감과 경기·충청의 남은 병사를 긁어모으고, 강원도 군세까지 다 합쳐도 ‘장부상’ 5만 명이 될까 말까다.
물론 실제로는 그 반이나 되면 다행이다. 철학이 발달한 유학국가 조선답게 조선군 역시 상당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조선군 대부분은 팔랑대는 군적 장부를 매개로 하여 존재와 비존재의 두 영역에 걸쳐 있다. 400년간 어떤 군주도 차원의 틈새에 속한 조선군의 이데아를 현실 세계에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무익한 노력을 경주하는 대신 끝까지 손대지 않으려 했던 세력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함경도에 파발을 보내야겠소.”
당장 반대가 터져 나왔다. 역사보다 조금 일찍 병조 판서가 된 서영보였다.
“함경도 아병(牙兵)과 별무사, 토관 군관들은 변경을 막는 임무가 막중합니다. 함부로 군을 빼올 수 없소이다.”
“나도 그 점은 헤아려 보았소. 그래서 일단 육진(六鎭)의 병사는 되도록 그대로 두고, 부령 남쪽의 진에서 초환(招喚)할 생각이오. 혹시 여진의 침범이 있을 때는 군을 돌리더라도, 지금은 일단 가슴과 배의 우환을 없이 하는 것이 더 급하오. 경사(京師, 서울) 바로 옆에 악적이 둔치고 있는데 어찌 한시라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겠소?”
신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울이 중요한 이유는 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서울이 과연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가?
김조순은 그 답을 내려 주었다.
“지금도 이 악적들은 경기 일대를 노략하여 세가 어디까지 불어날지 알 수 없소.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서 일시에 서울로 밀고 들어오며, 도성 안에서는 포도군관을 자칭하는 반적들이 내응한다면 한성 삼십만 인민의 꼴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 따로 없을 거요.”
서울은 여전히 중요하다. 왕은 없어도 그들 자신이 서울에 있으니까. 비변사당상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김조순의 제안에 찬성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시준 역시 군대의 정비에 힘쓰고 있었다.
일단 정약용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안도에는 노비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적어도 평양에는 없다.
특별히 시준이나 서상이 인본주의와 혁명 대의에 충실해서는 아니고, 장사가다 그렇듯 그저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혹독한 흉년 때문에 있던 노비도 내쫓아야 할 판이다. 지난겨울 ‘구휼’하는 와중 시준은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평양 근교의 노비들을 매입했고, 그들을 민병대, 지금은 혁명군에 복무하게 함으로써 인력을 충당했다.
물론 시준이 자선사업가는 아니고 그럴 여유도 없다. 따라서 해당 노비들은 상당 기간 무상으로 혁명군에서 뛰어야 했다. 허나 종노릇보다야 백번 낫다.
이제 시작이지만 저항은 크지 않아 보였다. 서상 소속 상인들은 본래 그 자신의 신분도 낮아 함부로 종놈 여럿 거느리고 거드럭대기 힘들었거니와, 장사하는 데에 노비는 적당하지 않다.
장사란 농사와 달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이 많은데, 그런 데에 노비를 썼다간 당장 이튿날로 움켜쥘 수 있는 재산 전부 움켜쥐고 달아나 버릴 것이다.
가축과 완벽히 동등하게 대우받는 조선 노비들에게 가축 이상의 도덕을 기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부리는 일꾼은 많아도 종은 별로 없었던 서상 상인들 역시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던 시준도 한숨 돌리게 되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었다. 혁명의 기치 높이 들고 왕을 (물리적으로) 주저앉힌 사람들마저 종놈하고는 한솥밥 먹을 수 없다며 심하게 반발한다는 점이었다. 원래 내가 당하는 차별은 부당해도 내가 하는 차별은 정당한 게 사람이다.
결국 시준은 이번에도 역사의 교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견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호칭을 강제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제부터 혁명군 안에서는 무력위원회의 위임을 공히 받은 지휘자들을 제외하면 높고 낮음이 없다.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 ‘동지’라는 말만 쓸 수 있다.
백정의 씨앗이니, 종놈이니, 박수집 아들이니 하여 동지를 폄훼하는 자는 곧 혁명의 기세[動]를 반하여[反] 꺾는 자, 다시 말해 반동(反動)이다.”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것은 개와 함께 둘러앉아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폭거다.
정약용도 만득이와 겸상하였듯이 애견인이라면 개와 밥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물 애호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시준은 양보하지 않았다. 사람 없어 죽겠는데 저렴한 병사를 마다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노비 출신들은 (돈 없이) 탈영해 봐야 얼굴 알아본 동네 사람들에게 붙들려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뿐이어서 신뢰도도 높았다.
그래도 폭거인 거야 시준도 이해했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평소의 온화한 태도를 버리고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폭거는 폭력으로 관철시켜야 한다.
이공을 격파한 뒤처리를 위해 소집된 무력위원회에서 시준은 그 방침을 확정했다.
“반동에게 혁명군이 내릴 것은 죽음뿐이다. 이제 우리는 동네 장정들이 모인 구사대나 도당이 아니라 군(軍)이다. 군은 군율로 다스린다.”
무력위원회는 곧 호칭과 계급을 포함한 혁명군의 군율을 반포했다. 과연 군율답게 명시된 처벌 중 태반이 사형이었다.
지금까지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밥이나 얻어먹을까 하여 모여든 혁명군은 이제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실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못 해 먹겠다고 나가 봐야 진짜로 아무것도 못 해먹다가 굶어 죽는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흉년은 멈출 기세가 안 보였다.
시준이 이공처럼 계몽주의에 심취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절박한 정치적 요구였다. 이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시준의 무리는 그저 일개 지방 반란군으로 끝난다.
왕에게 적대한 이상 왕이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의 이념이 필요했다. 신분제와 봉건 질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야 그냥 이씨 왕조가 그대로 있는 게 훨씬 안정적이고 간단하지 않겠는가.
시준이 홍경래를 평가할 때 생각했듯이, 원 역사에서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데에는 기껏해야 평안도 향임과 유지만의 난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평안도 외 다른 지역이나 일반 백성, 사족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한계는 명확했다.
평안도민, 그리고 상인들만의 반란이어서는 안 된다. 되도록 넓은 계층을 포용해야 했고 그것은 ‘사람’을 초월하여 노비까지 뻗쳐야 했다.
조제프 푸셰 역시 적극 찬성했다. 그는 용천부에서 들여온 와인으로 직접 닭을 요리하여, 그간의 보답이라며 시준을 초대한 다음 이번 조치에 대해 단평을 남겼다.
“포용이란 게 꼭 너그러운 혜택만 있는 것은 아냐. 대부분의 법은 군법에서 출발했고, 법은 서로 다른 것들을 강제로 획일화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다. 사람이란 구속이 없으면 불안해하지. 진정한 자유는 그 자신부터가 허락하지 않기에 어려운 걸세. 그런 자들에게는 안심을 줘야 해.”
“뭔가 준비해 오셨다는 어투군요.”
“과연 우리는 서로의 뜻을 아는 벗[知己之友]일세. 회장 동지. 물론 준비했지.”
시준은 어느새 동양 고전까지 자유롭게 인용하는 푸셰가 싫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제프 푸셰는 병사를 부른 다음 젖었다가 말린 것 같은 책을 몇 권 꺼내놓았다. 시준이 보기에는 흉기로 쓰면 딱 적당할 것 같은 부피였다.
“이건…….”
“황은으로 제정된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 des Francais)』일세. 자네라면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자네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알기는 안다. 시준이 유럽 사정에 밝아서가 아니라 이 법전, 통칭 ‘나폴레옹법전’은 약간의 개수를 거쳐 21세기까지도 프랑스에서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준은 눈앞에 차려진 닭 냄비와 법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자도에서 있었던 일이 기시감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시준은 그때와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지금 하고 있는 건 군대 정비인데, 민법전을 어디다 쓰라는 겁니까? 내 사업은 그게 아니에요.”
“또 거짓말을 하는군. 조선인 특유의 화법인가? 군대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부차적인 요소이지 핵심이 아닐세.
낫을 챙기는 농부를 보면 밭일에 대한 조언을 하겠지. 군대를 만든다는 건, 곧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얘기야. 아, 자네 입으로 말하기 힘들어서 그런가? 그러면 경력자인 내가 대신 말해줄까?”
그러면서 푸셰는 예전 장자도에서 닭다리를 건네줄 때와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젠 더 미룰 수 없어. 길드의 간접 통치로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었던 시절은 끝났어. 합법 정부를 구성하여 왕의 목을 치고, 그 죄에 물든 피를 땅에 부어 그대 조선 인민들의 밭고랑을 기름지게 하게나[Qu‘un sang impur, Arrosez vos sillons].”
작가의 말
1. 서춘보는 원 역사에서도 작중 시점 전라 병사였고, 홍경래의 난 당시는 정주 목사였습니다. 몇 번 나왔던 서영보와 동일 항렬입니다. 참고로 대구 서씨는 이 당시의 명문가라, 서영보라는 동명이인의 2명이 모두 동시기에 조정 고위직을 역임해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만 아마 작중에서 둘이 같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 아병은 지방관 직속 군병을 말하는데, 정예병으로 인식되었고 특히 양계 병력에서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작중에서는 속오군이 주로 언급됩니다마는 조선군의 병종은 지방군 기준으로 마병, 속오군, 방수군, 별무사, 장사부군... 등등등 십수 가지에 달했고 각 병종마다 몇 명~수천 명씩 뒤섞여 편제된 게 보통이었습니다.
입직 경로나 대우 방식도 다 달라서 지금 보면 뭣하러 이런 복잡한 짓을 했나 싶은데, 이건 신분제 사회와 부족한 재정, 반란 방지, 지역별 교류가 어려웠던 시대상 등이 전부 어우러진 시너지 효과가 컸습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누덕누덕 깁다시피 한 군대이다 보니..
3. 조선 수군은 양란 이후 중국/일본과의 해상 전면전 가능성이 사실상 매우 감소함에 따라, 소위 '황당선'이라 불리는 소규모 침입이나 표류에 대한 신속대응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량 고속화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전라좌수영의 전력 등은 송기중, 2015, <17~18세기 수군 軍船의 배치 변화와 개선 방안>을 참조하였으며 지방군의 전력은 유동호/이석린, 2014, <조선후기 下三道 지역의 軍事編制와 軍兵組織>을 참조하였습니다.
3. 포트 해밀턴은 작중 나온 것처럼 당시 영국 해군성장관 W. A. B. Hamilton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당시 영국 신문은 거문도 점령을 아시아 전략에서의 신의 한 수라며 극찬했으나 언론이 제주도와 거문도를 헷갈린 정황도 크고;;;(당시 제주의 서구 명칭이었던 '켈파르트'로 쓴 언론이 많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영국 외교 쇠퇴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요.
4. 나중에 다시 언급될 것 같은데, 조선의 노비제가 전근대의 다른 노예제에 비해서 너그러웠던 편이라고 하지만 그건 주인 각각의 개인적 자비심에 의지하는 규범에 가까웠습니다.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였죠.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체로 노예 학대범의 처벌 기록이나 당대의 여러 인식을 보면, 작중 표현대로 그냥 말하는 가축 정도의 대우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5. 푸셰의 마지막 대사는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를 살짝 비튼 것입니다. 원래는 너희의(vos) 밭고랑이 아니라 우리의(nos) 밭고랑이죠.
31. 총선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