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29. 바람은 남쪽으로(3)
평안도에 아직도 남아 있던 몇몇 친(親)서상파 수령들은 요 한두 달 동안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이 사실상 시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있지도 않은 환곡을 챙기고 도착도 못 할 장계를 쓰며 송사를 판결하고 관소의 위패에 제를 올렸다.
그러나 꿈은 언젠가 깨어야 하는 법. 수령들의 착각도 끝장이 날 때가 왔다.
어차피 평양성 전투의 결과는 도저히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준은 그 전까지의 정보 은폐 지침을 모두 깨버리기로 결심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조선 국내에서의 이야기다. 청에는 최대한 길게 숨겨야 했다. 어쨌건 청에 갈 ‘공식’ 통보는 이공의 것이었으므로 청이 조선을 삼키기로 작정하지 않는 이상에야 시비할 수는 없다.
여러 수령들은 서상의 통보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꿈에서 깨는 방식치고는 너무 고약스러워서 그대로 황천 갈 법한 충격이었다.
“서울에서 병화(兵禍)를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를 버린 채 도망친 이공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약탈한 흉적 홍경래를 대장으로 삼아, 아무 이유 없이 평양 부민들에게 화살을 쏘아 다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금군 오천을 깨뜨리고 필부(匹夫)를 사로잡았습니다.”
서상과 친해 둘 만큼 똑똑한 수령들은 이제 장사치들이 이런 말을 지껄여도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시준은 대들지 않으면 무사할 것이라는 상투적인 어구도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신하들이 모두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혁명군’은 다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으니, 어찌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베겠습니까?
먼저 우리를 해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모든 일은 이전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는 얼핏 보면 미친 짓 같지만 사실 김조순을 배려한 계산이었다. 왕이 어떤 폭군보다 더한 패악을 부렸다는 증거는 김조순 하나가 주장하는 것보다 평안도 사람들이 같이 증언하는 쪽이 훨씬 신빙성 있다.
분명히 이 일을 전해 들었을 김조순 또한 시준에게 별다른 제지나 반대를 보내지 않자, 수령들은 이제 서울과 평양의 뜻이 한가지로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주 부윤 조흥진 역시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홍경래에게 빼앗은 옥새로 임시변통을 하겠다는 말이냐?”
“예.”
조흥진은 작년만 같았어도 당장 끌어내어 장살(杖殺)하라 외쳐야 마땅한 이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준은 이제 당당히 부윤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이제 시준이 종2품 부윤을 대하는 태도는 상놈이 벼슬아치를 뵙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젊은이가 연장자를 대하는 정도의 공손함에 가까웠다.
그리고 조흥진은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시준과 같이 몰려든 붉은 깃발의 패거리가 당장 무서워서는 아니다.
시준은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당장 내일부터 부윤이 밥 굶게 만들어 줄수 있다. 아마 평안도 수령 전부를 구걸하는 처지로 내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글 읽은 선비로서 그만한 고생에 굴복할 수는 없다. 사실 사세를 눈치챈 수령 중에는 벼슬 던지고 사직서 한 장 남겨둔 채 낙향한 사람도 몇몇 있다.
그러나 조흥진은 현대어로 말하자면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시준이 격파한 것은 왕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시준은 옥새 가지고 청에 이런 가짜 문서나 보낼 것이 아니라 당장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새로운 왕을 칭했어야 한다. 아니면 하다못해 김조순에게 옥새와 왕을 묶어 보내기라도 했어야 한다.
그러나 시준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시준이 권력에 담백해서 그렇다고는 보기 힘들다. 결국 시준은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다른 형태의 권력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보다 김조순이 지탱하고 있는 기성 권력이 훨씬 안정적인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항상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땅 끝에 있는 조흥진으로서는 수령이라는 기성 체제뿐만 아니라 이 신진 체제와 협조할 방도도 생각해 둬야 했다.
조흥진은 요 한 달간 고민해왔던 것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좋네. 그렇지 않아도 봉황성 수위(鳳凰城守尉) 복녕(福寧, 푸닝)이 사람을 보내와 월경하는 도적이 없도록 단속하라고 하였지. 여기에다가 내 치보(馳報)를 덧붙여서 중강(中江)에 있을 복녕에게 보내겠네.”
시준은 갑자기 바뀐 말투와 과도한 배려 뒤에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부윤의 배려에 감읍하고 또 감읍할 뿐입니다. 저희 장사치들이 무언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기탄없이 명하여 주십시오.”
조흥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질문을 꺼냈다.
“요사이 고을 전체뿐만 아니라 면, 리, 통에서조차 사람들이 가가호호 모여인민위원장인지 무엇인지를 선출한다고 하던데.”
“예. 서상에서 나누어주는 곡식을 실어간다거나, 사람을 모아다가 제방 고치고 모내기하는 등의 일에서 관이 일일이 다 개재할 수 없으므로 명망 높은 부로들을 뽑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동네 어른이라면 서상도 안심하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서상 중에 아무리 평안도 토박이가 많아도 모든 동네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공식적이지 않은 거래선 형성은 반드시 뒷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상은 예전부터 각 동리에 대표자 선출을 요구했다. 인민대회에 왔던 사람들도 보통 그렇게 뽑힌 대표자들인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상의 체제를 본떠 ‘의주 광서면 인민위원회’ 혹은 ‘미라산면 인민위원회’ 따위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 밝은 사람이라면 그 ‘인민위원회’가 서상의 평안도 지배 도구임을 모를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는 단지 감자와 쌀 받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대가로 땔감이나 목재, 가죽을 지불하는 창구 역할도 했다. 농사 다 망쳐서 밥벌이 떨어진 품팔이꾼은 양귀비 농장으로 무리무리 떠나가 일하곤 했다.
군사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민위원회 ‘부위원장’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동네 망나니들을 혁명군에 쫓아 보내고, 짐 들고 청소하며 빨래할 사람 모아 주는 등 보조 업무도 나누어 맡고 있었다.
이는 조선 병조처럼 거대한 행정기구가 없는 서상에게 필수불가결한 역할이었다. 평안도에서는 물자뿐만 아니라 인력 또한 유례없는 속도로 휘돌고 있었다.
그래서 시준은 혹시 부윤이 의주의 인민위원회를 다 해체하라고 할까 봐 긴장했다. 하긴 수령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리 없는 조직이다.
그러나 조흥진은 원 역사에서 홍경래에 맞서 고을을 지켜낸 명 목민관답게 시준의 예상 안에서만 놀지 않았다. 그는 시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은근하게 말했다.
“그거, 꼭 상민들만 하라는 법은 없잖은가? 내가 알기로 자네들의 인민대회는 사민공영(四民共榮)을 내걸었다 하던데, 문반(文班)이라고 해도 고을 사람들의 뜻이 일치된다면 인민위원장이 되어도 문제는 없겠지?”
“그, 그건 그렇기는 합니다만…….”
조흥진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딱 쳤다.
“그러고 보니 자네 역시 호적이 의주부에 있지. 꼭 참석해서 한 번 거수(擧手) 부탁함세. 내가 섭섭하지 않게 해 줄 테니.”
인민의 뜻을 대표한다고 선전하지만 사실 시준 자신은 누군가의 투표에 의해 뽑힌 적이 없다. 서상의 회장은 그가 서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이고, 무력위원회 위원 또한 그가 오죽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얻은 자리다.
그래서 이런 선거운동에는 적응이 안 되었다. 하물며 그것이 선거와는 수만리 떨어져 있을 듯한 조정 벼슬아치임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래도 시준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것은 평안도에 남은 수령 중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시준 진영에 합류하겠다는 신호다.
시준은 떨떠름한 기색을 최대한 숨기고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실 이 의주에서 부윤만큼 덕과 문명(文名) 알려진 분은 없지요. 소인이 꼭 한 표를 들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지 청국 쪽 일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내게 맡겨만 두게.”
공직선거법이란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의주 부윤과, 지금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합리화를 마친 시준은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왕조가 이제 볼장 다 봤으니 새 질서에 합류해야겠다는 생각은 조흥진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직접 장사하는 용천부의 부사 허명은 자신을 평준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해 달라는 뜻을 넌지시 전달해 시준을 벙찌게 만들었다.
시준은 간신히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안 그래도 지금 통무아문이 유명무실하여 관소 기둥이 썩어 들어가고 문서는 흩어져 있는데, 부사께서 평준위원회의 위원이 되신다면 영길리 사람과 통하는 일에 법도를 잡는 기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문소 정치국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역시 희만 선생의 제자로군! 나는 평소부터 자네의 큰 뜻을 눈여겨보고 있었지! 고맙네.”
허명은 조흥진처럼 또 시준의 손을 잡았다. 시준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허명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정약용! 정약용의 합류가 사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정약용이 특별히 평안도를 돌며 유세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으로 이름 높은 예조 참판이 ‘혁명군’에 합세하였다는 음지의 소문은 당연히 수령들 역시 들었을 터이다.
정약용이 그랬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충심이나 도덕은 둘째치더라도, 설마져서 패망할 편에 붙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실제로 정시준은 강대한 (호왈) 오천 금군을 깨뜨리지 않았는가.
그런 계산은 평안도의 사족들이 들고 있는 저울을 시준 쪽으로 상당히 기울게 만들었다. 시준은 앞으로 이 일에 대해 대비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허명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가?”
“아, 별것은 아닙니다. 단지 장자도에서 영길리국 사람과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요. 오는 길에 부사께 인사 올리려 들러 보았습지요.”
“그랬군. 어제도 배가 왔으니 아마 아직 사람들이 있을 걸세. 심부름할 자가 필요한가?”
“어찌 제가 그런 주제넘은 청을 하겠습니까. 부사의 배려는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윌리엄 자딘은 홍차에 우유를 부어 시준에게 권했다. 괜히 이 시대의 우유 따윌 먹고 듣도 보도 못한 병에 시달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시준은 사양하고 옆에 놓인 브랜디 뚜껑을 땄다.
아직 파스퇴르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오만가지 병균의 잔치판이 되어 있을 우유보다는 술이 훨씬 안전하다. 시준은 복지 혜택 덕분에 ‘병으로 죽지는’ 않지만 그게 고생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조선인이 홍차에 익숙하지 않다 여긴 자딘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평양에 프랑스인이 있다는 거야 아마 암허스트 남작도 짐작할 걸세. 그가 지금 가만히 있는 이유는 현재 힘이 없기 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닐세.”
조선 군함 훔쳐다가 도주했던 프랑스인은 장자도에서 시준과 대담하고 곧 서울로 돌아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자딘이 이토록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데에는 시준도 약간 흔들리고 말았다.
“제가 그것을 인정하면 어떻게 됩니까?”
“러시아는 이제 대놓고 봉쇄령을 어기고 있어. 파리에서는 모스크바로의 원정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야. 본국(영국) 역시 그 빌어먹을 통상 탄압 때문에 난리도 아니지. 이 상황에서 암허스트 남작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모험을 결심해도 이상하지 않네. 윌리엄 드루리 제독의 함대가 도착하면 우선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싶겠지.”
시준은 윌리엄 자딘이 이 말을 해 주는 이유를 가만히 짐작해 보았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 해군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나라 해군인데, 이들이 그보다 조선에 더 우호적일 이유까지는 없다. 이건 암허스트 남작이 윌리엄 자딘을 통해 내게 전하는 경고로 봐야겠지.’
시준은 좀 세게 나가 보기로 했다.
“마카오와 왐포아가 중국의 영향권에 완전히 들어간 이상 유일한 동아시아 기항지를 버리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영국 함대는 우리가 어떤 ‘표류민을 보호’하든지 간섭할 권한이 없습니다.”
윌리엄 자딘은 난처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야 국제 규범상으로는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영국에게 있어 규범이라든가 도덕 같은 것은 씹다 버린 개뼈다귀와 가치가 동등하다. 다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런 머리가 꽃밭에 가 있는 소릴 하는 건지 자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시준은 자딘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만약 암허스트 남작이 ‘외교 사절을 공격’하기 위해 평양을 친다면, 우리는 평양성을 하나 남김없이 불사른 다음 후퇴하여 흩어지겠습니다. 약탈로 보급을 채울 만큼 조선은 부유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어떤 백성도 유럽인을 위해 물자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조직적이고 기습적인 민중 봉기와 정부의 반격을 항상 걱정해야 할 겁니다.”
시준은 고의로 자신이 보유한 무력의 정보를 누락했다. 윌리엄 자딘은 그게 흥미롭다는 듯이 시준을 살폈다.
“이건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네만, 어째서 자네 자신이 맞서 싸우는 선택지는 없지? 숨길 필요는 없네. 자네가 저 옛날의 호국경 크롬웰처럼 철기군(Ironsides, 鐵騎軍)을 만들었다는 소문은 여기까지 들려오던데.”
협잡도 이렇게 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국왕 이공이 이 정도로만 대화가 통했어도 그는 아직 두 다리를 멀쩡히 가질 수 있었으리라.
바로 그 말을 기다렸던 시준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 병력은 다른 곳에 쓸 일이 있으니까요. 창설된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만, 우리 혁명군(Revolutionary army)은 조선을 노리는 중국을 대비해 북부에 있습니다.”
시준은 경악한 윌리엄 자딘을 무시한 채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것만은 21세기와 다를 바 없는 맛이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등사(謄寫)해온 심양 사령관(성경 장군)의 문건을 보시지요. 동아시아적인 은유를 이해하신다면, 이것이 유사시 조선에 개입하겠다는 선언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다급한 사정을 이리 솔직히 일러드리는 이유는 조선의 진정성과 우애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준은 뜨거운 날숨과 함께 조용한 한마디를 토해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정 조선을 공격하겠다면야, 적은 바뀔 수도 있지요.”
며칠 뒤, 로드 암허스트는 굴욕감과 지적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 과연, 그 녀석 정말 보통이 아니야.”
“로드. 다른 건 허세라고 하더라도, 시준의 말은 틀린 게 없습니다. 괜히 조선 민중과 원수져서 일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어요. 적어도 중국 남부의 개항장을 되찾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윌리엄 자딘의 걱정스러운 말에 암허스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그 부분이 아니야. 기항지 보급 문제라던가 여차하면 중국과 연합해 영국을 치겠다는 협박 정도야 우리도 다 예상했어. 사실 자네에게 전한 말도 프랑스와 함부로 동맹하지 말라는 위협이었으니까 그 정도 대답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자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괘씸한 놈들은 중국이 조선을 치려 한다는 사실을 흘렸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나? 다른 수가 없지. 당장 중국과 조선 국경에 뭐가 있지?”
영국 유일의 동아시아 개항장인 장자도가 있다. 자딘은 침을 삼켰다.
“우리는 노루섬을 지켜야 하겠군요.”
“그래. 맞아. 그놈은 지금 이 문서, 내가 보기에는 그냥 조선에 벌어진 소요로 인해 몰려드는 피난민을 걱정한 것 같다만, 어쨌든 이걸 우리에게 주지 않았는가. 해석하기에 따라서 조선 국경에 군대를 전진 배치한다는 것은 충분히 군사적 강요로 읽힐 수도 있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명분이 생겼다는 거야.”
“명분이오?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일세. 이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중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요구하고 있어!”
로드 암허스트는 기쁜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속국인 조선으로서는 표명할 수 있는 최대의 지지 표시다. 이제 영국의 중국 침공 계획은 여태까지의 불안한 타협 대신 확고한 동맹을 얻은 셈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일전이 시준이 요구한 대로 영국이 조선을 강점해서 항구를 탈취했다느니 하는 겉치레는 안 해도 되겠군요. 그렇잖습니까?”
암허스트는 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이 맞기는 한데, 그러려면 그가 이미 본국에 배편으로 보낸 ‘조선의 정복자’ 칭호를 철회해야 한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철기군이니 뭐니 해도 결국 조선의 일개 지방 반란군이 중국 육군을 상대할 수는 없어. 이건 그들에 대한 빚으로 남겨두지. 우리도 나중에 내밀 카드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암허스트는 자딘이 자기 의사를 꿰뚫어 보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건 내 말에 대한 시준의 답변이고…… 원래 그쪽에서 노루섬을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용건은 뭔가? 만약 그것뿐이라면 가까이 있는 나를 찾아오는 게 편할 텐데.”
자딘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암허스트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대답했다.
“뭐, 별건 아닙니다. 직조용 방적기(紡績機)와 방직기(紡織機)며 석탄갱에서 물 퍼낼 기관을 수입할 수 있는지 타전했고…… 또 배를 한 척 빌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선원까지 함께.”
“한 척? 그러면 군사적 목적이 아닌 것 같은데.”
“예. 사람을 좀 구출해야 한답니다. 목적지는 조선 남부의 복잡한 군도(群島)입니다. 이름이 검은 산의 섬[黑山島]이라 하던가요.”
그 제안은 암허스트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다. 현재 영국 해군은 강화도 일대와 평안도 해안 말고는 정보가 없는 상황이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조선의 해안을 자세히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슬루프함을 하나 딸려 보내겠네. 구출이라. 아무래도 기존 조선 정부에 의해 체포된 요인(要人)이 있나 보군. 조선 해군과의 충돌은 우리 책임이 아니겠지?”
“저도 그 부분을 물어봤는데, 조선왕의 해군 따윈 자기네가 알 바 아니니 마음대로 하랍니다.”
“오호. 역시 꽤나 뭘 좀 아는 친구야. 비록 반역자라고 해도 난 그 친구가 마음에 들어. 런던의 사교계에서 만났다면 깊이 사귀어보았을 텐데.”
로드 암허스트는 시준이 들었다면 경기 일으킬 소리를 태연히 지껄였다.
“자네들에게 간 걸 보니 그 일은 민간 차원에서 해결하고 싶은 모양인데 존중 하도록 하지. 해군은 뭐, 호위 전력으로 한 척 증원해 주고, 안전을 위해 수심과 항로를 탐지하며…… 물과 먹을 것이 떨어진다면 상륙해서 평화롭게 민간 인과 교섭하는 정도에서 활동하도록 하겠네.”
윌리엄 자딘은 그냥 기회 봐서 점령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암허스트는 의자에 길게 누워 손을 쭉 뻗었다.
“그래. 인도 함대 도착 전 몸풀기 정도로 생각하면 딱 적당하겠어. 우리가 조선 국왕의 폭압에서 구해내야 하는 자의 이름이 뭐지?”
“정약전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로크 선장의 개항 당시 접촉했던 조선 외무성 차관(예조 참의) 정약용의 형입니다.”
작가의 말
1. 이 당시 성경 장군은 화녕(허닝)이라는 사람이고, 봉황성 수위는 다른 벼슬입니다. 푸닝은 원래 역사에서는 홍경래의 난 어찌되었는지 알아보고 '은밀히 군병을 보내' 단속하라며 명령받았던 사람이죠. 청 조정은 이에 상당히 신경쓰고 있었는지, '그 한 사람만으로는 일을 처리하기 어려울 것이니' 녹성(루칭)이라는 다른 벼슬아치도 추가로 파견합니다.
2. '등사'는 현대에는 복사기에 집어넣고 찍었다는 말로 쓰지만(그래서 옛날에는 '등사기'라는 게 있었죠) 원래는 베꼈다는 뜻으로서, 조선 시대에도 사본과 원본의 구별은 엄격했기에 함부로 가져올 수 없는 조칙이라던가 예부의 외교문서는 이렇게 '등사'해서 돌리곤 했습니다.
물론 문서는 그게 뭐든간에 되도록 공개를 안 하는 게 공무원의 일처리이므로... 가끔 보여주기만 할 뿐 등사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뻗대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사신으로 가는 선비쯤 되면 돌아앉아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 수 있는 놀라운 암기력의 소유자가 많아 그냥 보고 외워버렸던 경우도 있습니다.
3. 엄밀히 말하면 철기군은 크롬웰의 기병대를 부르는 별명이고, 크롬웰의 군대 전체는 '신식군(New Model Army)'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4. 100화입니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신 독자분들 덕분에 연재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30. 다시 움직이는 국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