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99화 (99/284)

99화

29. 바람은 남쪽으로(2)

시준이 도미니크의 고명한 의술에 불만을 가진 사항은 하나 정도였다.

그건 그가 툭하면 팔다리를 자르려 든다는 것이었다.

시준이 옆에서 끈질기게 설득하여 이 평양에서 유럽 최속 사지절단기 도미니 크-장 라레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그에게 실려 가는 환자는 신발이나 저고리 소매 한두 개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시준 역시 항생제가 없는 이 시대에 불가피한 처방 중 하나라는 점은 이해했다. 그래서 학문적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불만을 가진 부분은 지유의 가료(加療)에 방해되는 소음이 자꾸 들린다는 쪽이었다.

시준이 특별히 냉혈한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지금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비명은 유난히 컸다.

‘역시 왕이라서 목청도 다른가.’

본래 이공의 경우 도미니크로서도 다리를 잘라야겠다는 진단까지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공은 포로로 잡혀가면서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아무리 조선 왕가가 도주에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한들 외다리로는 별로 현명하지 못한 짓이었다.

결국 간신히 위치를 맞춰 놓은 뼈는 몇 군데의 추가 골절이 생긴 채 주저앉았다. 이공의 종아리는 퉁퉁 붓고 염증이 퍼져갔다. 도미니크는 차라리 잘 됐다는 듯이 이공을 끌어다가 가죽끈으로 침상에 묶어 버렸다.

모르핀은 모두에게 줄 만큼 많지는 않았다. 있다고 해도 시준은 그 귀한 약을 ‘한성 사는 이가놈’에게 쓸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강철군주 이공은 그 강인한 정신력 덕에 졸도도 하지 못한 채 끔찍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또 한 번의 거대한 비명 속에서 시준은 옆으로 누운 지유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는 지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해 보았다.

“이제 등의 살도 거의 다 아물었어. 천만다행으로 곪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거의 다 아물었다는 이야기는 피가 나지 않는다는 소리요, 곪지 않았다는 말은 그저 고름이 새어 나오는 게 안 보인다는 수준의 진단이다. 그러나 시준은 그런 엉터리 판정을 내리면서 자기 스스로도 그 말을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테니까. 예를 들어, 지금 비명의 주인공인 이공에게로 달려가 화풀이로 나머지 팔다리도 전부 잘라버리려 들지 모른다.

부끄러워할 기운도 없는 지유는 시준의 손을 잡은 채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 일으켜 줄래?”

“아직 더 누워 있어야 해.”

“하지만 오래 이러고 있어서 허리가 너무 아파. 잠깐 일으켜 줘.”

잠깐 침묵하던 시준은 조심스럽게 지유를 안아 일으켰다. 지유는 기다렸다는듯이 몇 차례 기침했다. 시준은 섬뜩한 느낌에 허둥지둥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으음. 괜찮아. 기침이 나오는데 누운 채로는 힘이 없어서 그랬어.”

시준의 예상대로, 그렇게 깊이 들어간 화살이 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준의 잇새에서 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시준은 다시 한번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이제 무슨 일 끝나면, 무엇 하고 나면 같은 흐리멍텅한 소리는 하지 않을게.

네가 걸을 수 있게 되면 바로……. 누가 뭐래도 성례 올리자. 지금까지 고생시켜서 미안해.”

반대할 사람은 아마 하나밖에 없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내팽개쳤음에도 불구하고, 불요불굴의 의지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회복력으로 며칠 만에 미음을 먹을 수 있게 된 김유근 정도다.

홍득주도 평양성에 와서 사정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지유를 김유근에게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감히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지혜로운 노인이었던 홍득주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평양성의 권력 구조를 파악했다. 그는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취하며 뒷방으로 물러날 준비를 마쳤다.

지유는 창백한 얼굴 위로 살풋 웃음을 띄워 보였다. 시준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조선 시대에 당사자끼리의 청혼이라는 것은 약간 기괴한 일이다.

지유는 살그머니 손을 뺐다.

“얘는 남사스럽게 무슨 말이니. 혼자 밥술도 못 뜨는 처녀를 데리고 가서 어디다가 쓰려고.”

시준은 목이 막혔다.

“곧 나을 거야. 낫지 않더라도 내가 평생……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이렇게 돌봐 줄게. 팔다리가 없어도, 혼자 아무것도 못 해도 옆에 살아만 있어 주면 돼.”

지유는 미소를 짓기는 했으나 그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싫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정권이 애초에 자기에게 없는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시준은 지유의 허락이 듣고 싶었다.

시준이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지유가 입을 열었다.

“기랑이가 여자인 줄은 몰랐어. 너 없는 동안 기랑이가 잘 돌봐 줬어. 나중에 잘 챙겨 줄 거지?”

“……응. 숨기려고 한 건 아냐. 나도 네가 잡혀가고 난 뒤에 알았어.”

시준은 별 이유도 없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지유는 다시 작게 기침을 했다.

“그래. 나도 마음을 놓았어.”

“뭐를?”

“다시 눕혀줘.”

시준은 지유가 어리광부리는 듯한 이 상황이 오히려 평온했다. 등의 상처가 바닥에 닿지 않게 옆으로 누운 지유가 말했다.

“기랑이가 네 얘기 많이 해 줬어. 네가 그동안 많이 도와줘서 지금까지 무사히 살 수 있었다고.”

시준은 그 말이 자기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대동강 부교에서 기랑의 저격이 없었다면 시준은 그대로 총 맞고 죽었을 것이다.

“그냥 그 애가 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이었을 뿐이야.”

“후후, 으음. 콜록! 이제…… 애라고 하기에는 좀 나이가 들지 않았어?”

시준과, 지유, 기랑은 이제 모두 19세다. 수명이 짧고 노화가 빨리 되는 이 시대에는 성숙도 빠르다. 현대로 말하자면 20대 중후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시준은 부디 이런 잡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자리 알아봐서 시집이나 보내 주려고 했는데, 영 말을 듣지 않더라고.”

“기랑이는 아마…… 그런 걸 싫어할 거야. 어릴 때부터…… 사내아이로, 포수로 산 타고 다녔으니까.”

지유는 눈을 감은 채 드문드문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잘 챙겨 줘. 네가 어릴 때처럼…… 동무들 잘 돌보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마음을 놓았다는 건…… 그런 얘기야.”

“내가? 아니, 그야 삯이나 챙겨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사람들이 뭐라고 보겠어?”

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준의 머릿속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퍼뜩 지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지유는 그저 잠든 것이었다. 시준은 한참 동안 잠든 지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놓쳐 버릴 것 같아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지문이 열렸다. 시준이 돌아보니 이만 쉬라고 보냈던 기랑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마치 지유에게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있던 시준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시준은 자기를 뚱하게 쳐다보는 기랑을 향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더 쉬어도 돼.”

“괜찮아. 그리고 어차피 너 찾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한둘이 아냐. 일단 방금 내 멱살 잡고 당장 정시준을 데려오지 않으면 혀 깨물고 죽겠다고 한 인간은 임상옥이었어.”

“때렸냐?”

“때렸지.”

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 참……. 알았어. 조금 있다가 갈게.”

기랑은 별말 하지 않고 들어와 능숙하게 이것저것 잡일을 챙겼다. 시준은 빨아온 옷이며 붕대를 널고 방을 청소하는 기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까 지유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국 프리깃 함대는 드루리 제독의 파워풀한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삼화부에서 숨죽이고 있으므로, 지금 서상 평준위원회와 접촉하는 것은 거의 동인도 회사였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면포라던가 약재, 사치품은 제공할 수 있어도 사람이 살아남는 데 가장 필요한 ‘먹을 것’은 제공하기 힘들었다.

서상의 세력 기반이 평안도에 대한 복지 활동임을 감안할 때 다른 거래처가 필요하다는 건 확실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청과의 밀수 루트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맡은 사람은 기존에도 조선의 대청 밀무역 전문가였던 임상옥이었다.

문제는 원래 역사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딱히 중국에 뭘 남기고 팔 게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영국조차 아편밖에 못 팔았는데 조선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조선 ? 정확히는 평안도 상인들도 영국과 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다.

홍득주가 가진 양귀비 생산지는 그가 영향력과 건강을 좀 회복해야 다시 가동되겠지만, 기존에 시준이 모르핀용으로 따로 마련해 둔 양귀비 밭도 있고 임상옥 등 눈치 빠른 자들이 알음알음 키우던 것도 있었다.

게다가 홍경래군을 공중분해하고 얻은 그들의 수입원 중에도 양귀비가 있다.

그래서 지금 조선의 대청 아편 무역은 거의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정 진인은 모래가 아니라 아편에서 쌀을 빚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시준은 거기에 다른 무역도 시도 중이었다. 이제 영국에서 충분한 수량이 수입되어 본이 많은 브라운 배스 머스킷은 어설프게나마 복제가 가능했다.

관이 해체되어 갈 곳을 잃은 대장장이들을 무력위원회는 따스하게 환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안도는 포수가 많아 총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공장(工匠)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한 성과제로 총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푸셰가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기존 서양총을 가져다 개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처음부터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제자일(Jezail)처럼 관리 소홀이나 수명 도과로 버려지는 총을 동인도 회사에서 싼값에 사들여 조선인의 취향에 맞는 장총신 저격총으로 개조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서상이 그 모두를 사들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총보다 더 급한 물건(쌀이라든가)이 많아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다.

거기다가 이 시대의 무기라는 것은 총이건 칼이건 소모품에 가깝다. 현대처럼 보존유 떡칠해서 진공 포장하여 창고에 쌓아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결국 일부는 중국에 넘기기로 결정이 되었다.

나름대로는 안전하고 확실한 돈벌이였다.

서상이 조금씩 밀수출하는 총은 대청국 전체로 보면 새 발의 피라는 표현도 아깝다. 당국의 눈에 띄어 토벌을 결심하기에는 어려운 규모다.

게다가 모든 사교도 반란군이 천리교처럼 무기 공창(工廠)까지 지어 놓고 뱃심 좋게 반란 일으킬 수야 없는 노릇. 지금 영국이 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상 중국인들이 ‘북경에서 위명을 떨쳤다는 서양총’을 사려면 조선과 접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만이 아니라 반란군이 일으킨 치안 공백 때문에 발생한 여러 무법 집단까지 설쳐서, 청의 고객들은 총 모양의 몽둥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판국이다.

그래서 평준위원회의 대청 무역을 맡은 임상옥도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시준을 드디어 만난 임상옥은 기랑에게 맞아서 부은 얼굴로 침을 튀겼다.

“그래서 이번에도 총 갖다 주고 쌀 얻어 오려는데, 그놈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뭔가.”

“이상한 소리요?”

“그래. 성경부(심양)에서 무슨 사정을 묻는답시고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낸다 하네! 아무래도 중국에서 낌새를 챈 것 같아.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낌새란 밀수출의 낌새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거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을 테니까. 임상옥이 말하는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혁명’의 낌새다.

실제로 청은 홍경래의 난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조선 정부에 여러 조언도 하였으며 (주로 조선군의 파멸적 역량에 대한 불평이었다) 난이 끝난 다음에는 유민이 압록강을 건너 밀려들지 못하도록 소부대를 전진시켜 주둔했다.

역사보다 훨씬 광범위한 사교도 반란 때문에 정신없다 하여도 제국 전체가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우왕좌왕할 리는 없다. 청의 성지, 만주를 보위하는 성경 장군 화녕(和寧, 허닝)은 조선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난리 소식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시준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궐련을 물었다. 이건 어설픈 위조나 둘러대기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짜 왕이나 옥새를 갖고 있지 않고서야…….

‘잠깐, 그런데 나한테는 진짜 왕과 옥새가 있잖아?’

사실 왕은 필요 없다. 어차피 이공은 지금 통증과 실혈 때문에 의식도 없는데다 외교문서를 왕이 쓰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필요한 것은 실제로 그런 것을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는 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해서, 대개 자문이라 함은 자구(字句)가 체식(體式, 격식)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무탈한 내용으로 한 장 써서 옥새를 받아 성경에 보내려 합니다.”

전직 예조 참판으로 그런 문서 만드는 게 전문인 정약용은 아연한 표정으로 시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녕 두려운 것이 없구나. 차후 이 일로 인해 중국 병사가 평안도에 들어오게 되면 어찌하려 하느냐?”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빨리 들어올 것입니다. 뒷일은 제게 생각이 있으니, 지금은 아주 잠시만 그들을 안심시켜 놓으면 됩니다.”

“뒷일이라니?”

“사정이 급하므로 그건 좀 나중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잘만 하면, 이 일을 하는 와중 흑산도에 있는 가백(家伯, 정약전)께도 손을 좀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네가 지금 귀양 죄인을 사사로이 어찌해 보겠다고 말한 것이냐?”

시준은 정약용을 위해 준비해 온 유혹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이제 자칭 왕이라고 하는 자는 일개 봉두난발의 서민이 되어 투옥되어 있는 데, 죄인이 전단한 옥사(獄事)에 무슨 신상필벌의 엄정함이 있겠습니까?

저의 계략에서는 청국과 영길리국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영길리국의 배라면 흑산도까지 가기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써 주는 글이 없으면 그에 필요한 잠시의 틈을 벌지 못해 모두 허사가 될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부디 두 번 생각해 주십시오.”

결국 정약용은 형을 구해내려는 우애의 마음 때문에 악마의 거래에 응하고 말았다.

그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붓을 들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법. 거짓말은 처음부터 지어내는 것보다 사실이 좀 들어간 게 좋지. 근래 역비(逆匪)가 날뛰므로 왕이 평양에 친정하여 초멸(剿滅)하였다고 하자. 그간의 관례로 보아 자문이 오거든 열흘쯤 있다가 회신을 주면 될 거다.”

“과연 선생님이십니다. 아무도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정약용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급 자문지에 글을 쓰다가, 문득 옆에 놓인 옥새를 바라보았다. 무슨 막도장처럼 시준이 들고 온 존엄한 옥새는 물론 노획품이었다.

이미 전제 군주제에서 좀 멀어진 정약용도 별 거부감 없이 그것을 들어 아무 종이에 찍어 보았다. 그러던 정약용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어디서 얻었느냐?”

시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비의 좌우 근시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정약용은 도장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단언하듯 말했다.

“가짜다. 아마 이럴 때를 대비해 갖고 있었던 것 같구나. 글은 내가 초해 둘테니 이것부터 처리해야만 하겠다. 성경부에서 가짜 옥새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어.”

성경부를 일개 지방정부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직제상 조선 정부와 동급이며, 국경을 넘어온 월경민부터 황제에게 아뢰는 문안사까지 조선-청의 외교실무는 전부 성경부에서 일차 처리한다.

시준은 놀라서 머리칼이 다 곤두설 지경이었다. 설마 이것들이 그 지경에 처해서까지 이런 손장난을 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신분이 귀해 뭔 짓을 해도 목숨이 위협당할 일은 딱히 없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시준은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

대비와 왕비는 특별히 적대 행동을 한 것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감옥에 처박히거나 다리가 잘리는 신세는 면했다. 시준으로서도 김조순 앞에 괜히 부채를 더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평양성의 어느 민가에 심부름꾼 하나 없이 유폐된 채 손수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던 ? 영 익숙하지 않아 둘이서 해야 했다 ? 왕비와 대비는 혼절할 것 같았다.

수염은 없지만 분명히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는 자가 등에 긴 총을 메고, 허리에는 장검을 매단 채 성큼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 아무리 왕실이 영락했다 한들,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느냐! 여염집이라해도 여인들만 있는 곳에 사내가 이토록 스스럼없이 발을 들이미는 경우는 없다! 너는 대관절 무엇 하는 놈이냐!”

기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손을 내밀었다.

“옥새 내놔.”

‘옥새’라는 단어가 들어간 대화 중 저토록 짧은 말을 처음 들어보았기에, 대비와 왕비는 조금 후에야 기랑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왕비는 털썩 주저앉아 뒤로 물러났다. 일국의 국모 체통에도 불구하고 손에 지저분한 잿가루가 묻었다.

“뭐, 뭐, 뭐라고?”

“저번에 준 거, 가짜였잖아. 손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진짜 내놔.”

그녀는 시선을 천장에 둔 채로 손을 내밀어 쥐었다 폈다 했다. 마치 옆집에 맡겨 둔 새끼줄 찾으러 온 듯한 태도였다.

대비는 단단히 각오하고 왕실의 절개를 보였다.

“이, 이 불상놈들이 무도하기가 한도 끝도 없기는……. 옥새가 무슨 화로나 그릇 따위인 줄 아느냐! 옹이구멍 같은 눈깔로 용케 알아보았다마는,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내어줄 수 없느니라!”

“진짜? 죽어도?”

기랑은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이 칼을 뽑았다. 무력위원회가 노획해서 가지고 있던 환도였다.

시퍼런 칼빛이 눈을 찔렀다. 결국 왕비가 후다닥 달려 들어가서 옥새를 가져왔다. 역시 젊은 사람 쪽 판단이 조금 더 유연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기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옷 한 벌하고 먹을 거만 빼놓고 다 가져와. 안 내놓으면 대신 대가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늘이 열린 이래 이토록 흉참한 악적은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왕망이나 동탁도 황제 면전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대비와 왕비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시준의 지시를 받은 기랑은 옥새뿐만 아니라 내명부의 수장이 가진 각종 부절과 인장을 모조리 뒤져 뺏어왔다. 같이 나오는 금은 패물은 전부 가져도 된다는 시준의 허락이 기랑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음은 물론이다.

대비는 통곡하였으나 그렇다고 달려들어서 옥새를 빼앗으려 들지는 않았다.

기랑이 정말 주저 없이 자기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삼강(三綱)이 무너졌음을 한탄하는 호곡(號哭) 정도면 할 도리 다한 셈이다.

시준은 정약용에게 이번엔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일’을 재개했다.

돌이킬 수 없게 된 군주와의 관계. 여전히 모래성 같은 상태인 평안도. 가장 위협적인 김조순까지 처리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청이니 뭐니 하는 외풍(外風)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을 새가 없었다.

그 바람을 멈출 수 없다면,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시준은 가짜 외교문서가 완성되자마자 그것을 들고 오랜만에 의주로 달려갔다.

작가의 말

1.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 시대에서 외교 문서의 '워딩'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때는 또 쓰면 안 되는 글자가 많았고(단지 기휘만은 아닙니다) 컴퓨터가 있는 세상도 아니라서 조정에서 엄밀히 검수를 거친 외교 문서도 종종 실수하는 일이 있었죠.

한 가지 소개하자면, 정조 즉위 초 홍상범의 국왕 시해 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청에 보고할 때, 저군(儲君, 세자) 또는 국왕 사위(國王嗣位, 국왕의 지위를 잇다)라는 말 때문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죠. 원래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건데 결재라인 과시하고 싶은 상사병이 도진 건지 건륭제가 '체식(격식)에 맞지 않는 말을 썼는데 잘 몰라서 그런 거 같으니 다시 봐라' 는 폭탄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었느냐면... 원래 저군은 세자라는 뜻도 있지만 태자라는 뜻도 있고, '사위'의 경우 조선의 왕위는 원칙적으로 중국이 승계 명령을 내려 승계하는 것인데도 마치 자기가 스스로 왕위를 승계한다는 듯한 인상 때문에 '해당 본국에서는 쓰는 것을 금지하지 않지만 위에 아뢸 때는 쓰면 안 되는(당시 왜 황제가 꼬장부리는지 열심히 추측한 청 예부의 판단입니다)' 말이었습니다.

조공-책봉 질서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서구식 '속국'과 '사실상의 독립국' 둘 모두에 들어맞지 않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런 점입니다. 현대 국제관계와는 핀트 자체가 다른, 빡빡하고 괴상한 제한 사항이 많았어요.

당시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면, 북경 갔던 신하들은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수습해 보려고 통사정을 하고(청에 보냈던 상주문 전체를 뒤져다가 '아 전에도 이 말 썼을땐 뭐라고 안 했잖아요!' 라고 우깁니다) 청 예부에서도 이미 황제가 지적했는데 똥물 뒤집어쓰기 싫으니 '너네 왕한테 보고하고 고쳐오든지 해라.

우린 못한다.' 라고 뻗대고 하다가 겨우 채제공 같은 짬 되는 학자들이 나서서 (당시 신참 왕이었던 정조랑) 머리 맞대고 반성문 써 올려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중에서도 정약용 정도가 아니면 손도 못 댈 물건인 것이죠.

2. 환도라는 명칭은 사실 '소총'이나 '대포'와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에는 군대에서 쓰는 칼이면, 아니, 사실상 그냥 장검이면 다 환도라고 불렀습니다. 용도에 따라 다르게 부른 명칭은 있었습니다만 그건 제법이나 형태상 기준을 둔 분류는 아니었지요. 조선만이 아니라, 뭔 소드니 뭔 스틸레토니 하는 서양검의 자세한 분류도 거지반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실 그렇게 세세하게 분류할 필요성이 적었지요. 사람만 벨 수 있으면 그만인 물건인데다 칼 하나를 그렇게 오래 쓰던 시대도 아니었고...

3. 조선 시대에 내명부에서 가짜 옥새를 상비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옥새는 1종류가 아니며, 상황에 따라 찍는 여러 가지 도장이 있긴 합니다) 대비의 옥새 밑장빼기는 작중 창작으로, 내명부는 난장판으로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만약을 대비한 겁니다.

29. 바람은 남쪽으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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