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29. 바람은 남쪽으로(1)
대비의 가마를 ‘호위’한다는 명목의 금군 백 명은, 사실 그 역할로 볼 때 근위대라기보다는 간수에 가까웠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 도착하면 즉시 가마를 북으로 ‘다시 모실’ 예정이었다.
대비나 왕비가 남으로 김조순 및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전령 같은 것은 모두 차단되었다.
대비 김씨는 공손하게 “하교를 내려 주시면 신이 마땅히 즉시 모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아뢰는 파총(把摠) 윤지겸(尹之謙)을 보고 주먹을 떨었다.
‘괘씸한!’
어쨌든 황해도에만 도착하면 이들을 흩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금군 역시 당연히 그것을 알았다. 윤지겸은 휘하 장졸들을 단단히 단속했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어차피 곧 주상 전하의 교지가 내려오면 돌아가야 할 테니 벌써부터 서둘러 걷느라 힘 뺄 까닭은 없다. 다만 불온한 무리에는 항시 주의하도록.”
‘불온한 무리’가 누굴 말하는지 모르는 자는 금군의 자격이 없다. 병사는 없다 하더라도 내시들은 거의 대부분이 수준 높은 무예를 몸에 익힌 자들이라 안심할 수 없었다. 숫자가 분산되면 궁지에 몰린 대비가 은밀히 명해 금군을 습격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윤지겸은 행군의 기본인 척후조차 포기했다. 자연스럽게 행렬은 거북이와 자웅을 겨룰 만한 속도가 되었다.
길가에 숨어 있던 ? 솔직히 척후병 몇 명만 내보냈어도 금방 들킬 법한 어설픈 위장이었다 ? 곡산부의 솜씨 모자란 포수들이 군교들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사정에 기인한다.
탕!
심낙화는 여기에서 또 한 번 병법의 묘리를 발휘하였다. 말 탄 자와 갑옷이 화려한 자를 먼저 쏘아 맞추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지시는 매우 적확했는데, 지휘관 서너 명이 연달아 쓰러지자 군사들은 순식간에 당황했다.
“뭐, 뭐야!”
“총이다! 누가 총을 놨어!”
그 순간 심낙화가 용맹스럽게 떨쳐 일어났다. 머리에 붙였던 나뭇가지를 서둘러 떼어낸 심낙화는 그들이 마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악기인 꽹과리를 거세게 두들겼다.
“모조리 사로잡아라!”
“우와아아!”
곡산 부민들은 각자 손에 아무거나 쥐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금군 또한 긴장해서 창칼을 내밀었다.
그리고 양측의 대치는 그대로 정체되었다.
금군은 죄수 취급받는 대비와 왕비를 위해 굳이 목숨 걸고 싶지 않았고, 곡산부민들은 시퍼런 창칼을 보자 더 나아갈 의욕을 상실했다. 양측은 서로를 향해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안면 근육의 강건함을 과시하는 것으로 전투 행동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 조선 왕조 사백 년 동안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했다. 하긴 요새 유례없는 일이 워낙 자주 있기는 했다.
왕비 김씨가 원자를 안고 가마에서 내린 것이다.
금군과 백성 모두 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충격 속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모친이 나신으로 길거리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현대인도 비슷한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씨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몸서리쳤다. 귀한 집 여식이었던 그녀의 생애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과 마주 보는 일조차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김조순의 딸이다. 그리고 원 역사대로라면 이공 이후 헌종·철종 2대에 걸쳐 격동기 조선을 지배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두 번이나 드리워졌던 그녀의 발[簾] 아래에서 통치되었다.
그런 만큼 김씨가 여느 아녀자와 같을 리는 없다. 그녀는 야만스러운 봉두난 발에다가 맨발 차림의 ? 그런 흉악하고 더러운 모양새는 생전 본 적이 없다 ?
도깨비 같은 자들을 보고 겁먹은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이 나라의 국모(國母)가 여기 있다. 모두 흉측한 짓을 멈추지 못할까!”
곡산 부민들은 멈칫멈칫하며 그들의 대장을 돌아보았다. 심낙화는 최후의 용기를 끌어모아 악을 썼다.
“이제 와서 말 한마디에 무릎 꿇고 모두 효수될 참이냐! 뭐해! 들이쳐라!”
그 말도 옳은 말이었기에 부민들은 다시 몇 걸음을 더 떼었다. 금군은 당장 저놈들을 찔러야 할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낸 왕비를 보호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김씨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인생 최대의 결심을 했다. 김씨는 몇 걸음을 더 걸어 금군 사이를 빠져나갔다.
현대처럼 금군이 몸으로 막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왕비의 몸에 감히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 김씨의 걸음은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곡산 부민 앞에 몸을 드러낸 김씨는, 안고 있던 원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이 나라 임금의 장자가 있다! 너희가 위로 3대까지 무덤이 칼로 열리고 관이 뻐개어지고 싶으냐? 아니면 삼족 모두가 종묘 영령의 노함을 입어 급살을 맞고 싶으냐? 왕대비 전하와 중궁전의 가마를 가로막아 겁박하려 들다니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악적이 어디 있었다는 말이냐!”
이제 말이나 간신히 할 나이지만, 원자는 아기 특유의 비언어적 예민함으로 이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원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어미의 손에서 몸을 뒤틀었다.
역시 어머니 특유의 교감으로 그것을 알아챈 김씨는 혹시 원자가 울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이 팽팽한 대치 와중 조금이라도 위엄이 손상되면 다 죽을 수도 있다.
곡산 부민들은 김씨가 쏟아놓는 꾸짖음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씨가 내미는 아기가 누구인지는 모두 깨달았다. 심낙화는 썰물처럼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을 보고 기가 막혔다.
‘내가 나서야 해.’
심낙화는 군관 오재민에게 빼앗았던 검을 몽둥이처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곡산 부사에게 휘말리려던 부민들을 다잡았을 때처럼, 그가 나서서 저 ‘임금의 처’를 후려치고 기세를 올려야 한다.
마침 김씨가 앞으로 나온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였다. 심낙화는 손에 힘을 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때 김씨가 다시 외쳤다.
“금군은 무얼 하느냐. 무사 된 자로서 주인이 치욕을 당하는데 용맹을 떨치지 않고 숨어 버린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당장 저 역적들을 토멸하라!”
파총 윤지겸은 좀 뒤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아무리 왕비와 왕대비를 존중하지 않는다 해도 그 말은 정론이다. 금위영 군사가 저 어중이떠중이 백성들에게 밀려 위축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을 매달고 죽어야 할 수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지겸이 직접 칼춤 추며 적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조선 장수가 용맹을 떨치는 방식은 그런 게 아니다.
윤지겸은 곡산 부민 중 아까 고함쳤던 자를 노리고 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금군의 화살은 백발백중. 왕비 김씨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심낙화는 단숨에 가슴이 꿰뚫려 나가떨어졌다.
“역도를 쳐라!”
그때쯤에는 금군 중에서도 몰래 총을 다시 잰 사람들이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몇몇 용감한 병사가 창을 내찌르자 백성 무리에 불과한 곡산 부민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으, 으아아악!”
“도망쳐!”
“미, 밀지 마라!”
그들이 당장 흩어지지 못한 것은, 매복 때문에 길 자체가 좁았기 때문이었다.
숫자로 우월하니 그냥 밀고 들기만 하면 왕대비와 왕비라는 약점이 있는 금군은 불리할 것이건만 아무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대로 기세가 오른 금군은 쏘고 찌르고 베며 마구 날뛰었다. 내명부를 탈취해 협상에서 우위에 서겠다는 곡산 부민의 장대한 계획이 허무하게 다 끝나버릴 위기였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그들의 작은 혁명이 끝날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이상을 감지한 것은 궁녀들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 다시 오르려 하던 왕비 김씨였다. 그녀는 감각이라기보다 예감으로써 무언가를 ‘듣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다음 순간 확신이 되었다.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는 수십 기의 기마가 이곳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저, 저건 무엇이란 말이냐?”
물정 모르는 궁녀 하나가 기쁜 듯이 말했다.
“기사(騎士)들이 저렇게 많다면 관군이 아니겠습니까? 주상 전하께서 원군을 보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어떤 자인지 잘 알았던 김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군이 아니다. 오히려 포도군(捕盜軍)이라고 해야 걸맞다.
자신은 저 군세에 의해 다시 끌려갈 것이요, 이번에는 왕비의 지위가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잠시 후 김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군세를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녀가 보았던 어떤 행차에서도 저렇게 시뻘건 깃발을 쓰지는 않았다.
무력위원회 혁명군 기마대가 금군의 뒤를 비스듬히 찔러 들어오고, 그 선두에선 매경은이 편곤으로 파총 윤지겸의 머리를 박살 내는 순간 원자는 요란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준이 나섰을 때는 전투가 거의 끝났을 무렵이었다.
잠깐 반짝했던 금군의 기세는 다시 급속도로 꺼져갔다. 지형을 논할 필요가 없다. 양옆에 적을 둔 불리함도 논할 필요가 없다. 백 명 남짓의 보병은 50기에 가까운 기병을 이길 수 없다.
분위기 빼면 시체인 곡산 민병대 또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관군을 밀어붙였다. 불에 구워 끝이 갈라지지 않게 한 목창이 배를 파고들고 쇠스랑이 어깨를 찍어댔다.
내시들이 권법을 발휘하여 끝까지 항전했지만 아무래도 도검불침의 경지에 다다른 자는 없어 보였다. 왕비와 왕대비는 기절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춤추는 병장기와 흩뿌려지는 비명을 지켜보아야 했다.
간부들과 함께 기병대에 합류하여 따라와, 전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시준은 금군이 봇물 터지듯 무기를 버리고 엎드리기 시작하자 곧 손을 들었다.
“혁명군, 싸움을 그쳐라! 우리가 이겼다!”
시준의 영이 떨어지자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죽을 자는 죽고, 살아남은 자는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예외가 된 대상은 왕대비와 왕비, 원자, 그리고 그들을 모시는 몇 명의 측근뿐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그런 예외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시준이 아직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는 왕당파의 잠재적 반발을 무릅쓰고 이공에게 막나간 이유는, 이공을 잘 대접하면 김조순이 분조(分朝)를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한번 고삐가 풀린 민주공화국 국민의 정신은 그런 ‘배알 꼴리는’ 행위를 참을 수 없었다.
‘지유는 배곯고 발 부르튼 채 도망치다가 너희들에게 화살을 맞아야 했다. 너희라고 비단옷 걸친 채 가마에 타서 기름진 음식 처먹을 수 있을 줄 아느냐?’
패배란 그런 것이다. 비참하고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거기에 명예나 품위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승자의 것이니까.
원 역사의 조선 왕가는 나라를 송두리째 잃는 패배 뒤에도 죽을 때까지 편하게 잘 먹고 잘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들은 졌다고 팔자 좋은 탄식이나 하고 있을 수 없다. 그 이상의 것을 지불해야만 했다.
지금 보병들에게 후송되고 있는 이공은 ‘치료’를 위해 도미니크에게 넘겨질 것이다. 도미니크의 눈에 이공의 골절상은 즉시 절단 수술을 감행해야 할 중 상임이 분명했다.
‘네놈들이 지금 지존의 옥체에 칼을 대려 하느냐! 그, 그 도끼는 무엇이며 톱은 뭐냐! 그 흉측한 물건들은 왜 들고 있냐는 말이야!’
‘그냥 이거 먹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요. 1분 안에 처리해 드리지. 얘들아, 환자가 밀려 있으니 빨리 붙잡아라!’
‘저리 치우지 못할까! 으읍! 으어억!’
물론 시준이 왕대비와 왕비의 다리몽둥이도 똑같이 분질러 놓겠다는 생각까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시준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다. 저 건방진 가마에서 끌어내려 걷게 하려면 다리가 필요해서다.
“가마의 문과 천장을 뜯어내고 안에 있는 사람은 끌어내라. 그리고 가마는 부상자를 나르는 데 쓰도록 하여라.”
왕비 김씨가 아득한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필살기를 썼다. 그녀는 원자를 내밀며 소리 높여 말했다.
“너희가 어떤 도적이기에 눈에 이토록 뵈는 게 없느냐? 보아라. 원자이다! 이 나라 지존의 계사를 이을 장자…….”
그러나 그건 곡산 부민에게나 통했지 시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준은 벽력처럼 소리 질러 김씨의 입을 막았다.
“전위대장!”
“예, 회장.”
홍총각이 대답하자 시준은 손가락으로 왕비 김씨와 원자, 그리고 왕대비가 탄가마를 번갈아 가리켰다.
“여기의 ‘부녀자와 아이들’ 또한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하시오. 나는 저쪽 민병들과 이야기를 좀 해보겠소.”
“알겠소이다.”
굳이 왕비에게서 아이를 빼앗지는 않았으나, 혁명군은 그 외의 모든 것을 박탈했다. 왕비와 왕대비는 마치 홍경래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던 홍가장 식구들처럼 자기 발로 포로들과 함께 걸어야 했다. 예외는 진짜 환자에다 노인으로 정말 억울하게 끌려온 죄밖에 없는 혜경궁 홍씨 정도였다.
가경 16년(1811년) 이월 스무나흗날, 조선국 23대 국왕 이공과 그 일가족은 서도상고총협동회의 손에 모조리 떨어졌다.
시준이 있는 북방에는 아직 칼바람이 강성하다 하지만, 저 멀리 남도(南島)에는 이미 훈풍이 불어올 계절이다. 이 흑산도 모래미[沙里]에도 봄을 알리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촌서당(沙邨書堂)’이라 적힌 편액 앞으로 드리운 풍경이 그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누가 보아도 점잖은 훈장이 앉아 있을 것 같은 글방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 들어선 것은 문리(文理)와는 영 거리가 있어 보이는 생선 장수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삼태기에 꿈틀거리는 생선을 가득 담은 채 들어선 중년의 사내는 안을 휘둘러보았다.
만나기로 한 집주인이 없는 것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시계도 없고 전화도 없는 이 시대,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에서 정확하게 만나는 일은 오히려 요행이다.
과연 그가 제집처럼 툇마루에 걸터앉아 생선이며 칼, 도마를 꺼내놓자마자 주인이 돌아왔다.
“이런, 천초(天初) 자네가 진짜로 왔군. 어제는 날씨가 궂어서 배를 띄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눈이 크고 하관이 쏙 빠져 꽤 빈한해 보이는 상이어서 험한 일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바지저고리에 묻은 흙이나 지고 있는 지게에는 장시간의 노동만이 빚어낼 수 있는 품위 있는 풍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생선 장수는 냉큼 일어나서 예를 차렸다.
“선생님께 물 좋은 놈들을 대접하기로 약속했는데 어떻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비바람에 여간 익숙해야지요. 이 정도쯤은 그때에 비하면 가랑비나다름없지 뭡니까.”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그냥 그런 생선 장수로 보이는 이 사람은 하늘 아래 다시없는 일을 겪었다 하여 붙인 천초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자였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겪기 힘든 표류를 두 번이나 겪어서, 류큐와 스페인령필리핀까지 떠내려갔다가 무사 생환하여 조정에서 대부(大夫) 품계까지 받은 문순득(文順得)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 문순득에게 표류의 자세한 전차를 전해 들어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한 사람이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손암 정약전이다. 일개 늙은 농부 꼴인 이 품새로야 도저히 그리 보이지 않았지만 정약용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공언한 또 하나의 천재다.
“허허. 하기야 자네 앞에서 풍랑을 불평할 수 있는 자 누가 있겠는가. 앉지.
오, 이거 참 큼지막한 홍어로군.”
“육지의 거만하기만 한 어물전 놈들이야 말만 잘 하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가 하품(下品)을 좋다고 가져가지만, 어디 선생님의 눈을 속일 수가 있나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문순득은 평소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정약전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곧 담백하게 재료의 품질로만 승부하는 호쾌한 어부식 요리가 완성되었다. 정약전도 주인의 예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귀양살이 죄인 처지에 귀한 물건인 탁주 한 병을 내어놓았다.
그렇게 훈훈한 잔칫상이 완성되었다. 문순득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저를 부르신 연유는 무엇입니까? 아, 물론 선생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건너오겠지만요.”
“그래. 편지에는 굳이 쓰지 않았지만 자네 재주를 좀 빌리기 위해서일세. 기왕 먹을 것 차렸으니 지금 여기로 오라고 해야겠군.”
정약전은 생각났다는 듯이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동네 학동을 소리쳐 부르더니 생선 살 한 점을 입에 쏙 넣어 주며 얼렀다.
“너 가서 얼마 전에 떠내려온 그 외국인 품팔이꾼 좀 데려오너라.”
“예에. 선생님. 헤헤, 그런데 저어, 그것참 맛있네요.”
결국 학동은 도다리 한 젓가락에 나물까지 추가로 얻어먹고 나서야 쪼르르 달려나갔다. 문순득은 대충 알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주에 있던 여송(呂宋, 루손, 즉 필리핀) 사람들 같은 자가 또 표류한 모양이군요.”
10년 전, 조선에 표류한 필리핀 사람들은 도대체 말 통하는 자가 없어 9년이나 제주도에서 이국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중국에 보내 봐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돌려보내는 등 고생이 막심했다.
그 사이 필리핀에 떠내려갔다가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익히고 살아 돌아온 문순득이 없었다면 그냥 조선에 뼈를 묻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바로 다음 해, 가경제 만수절부터 시작해서 조선 정부가 사실상 붕괴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천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약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여러 이국 사정에 능통한 자네를 부른 것일세. 입성은 왜인 같기는 한데, 나도 왜어는 한두 마디 한다마는 도무지 통하지 않더군. 글을 써주어도 왼고개를 꼬니 무슨 수가 있어야지. 걱실걱실하게 일은 잘 하고 싹싹하니 눈치도 빨라서 동네 밭 갈고 나무해 주면서 그럭저럭 살기는 하는데…….”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밀수선으로 평양에 가는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다 흑산도에 좌초되어 팔자에도 없는 머슴질 하고 있는 자는 바로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가 보낸 첩자 모리 후사아키였으니 말이다. 간첩질도 참 쉽지가 않다.
후사아키가 황망하여 몇 마디 한 조슈 사투리는 솔직히 일본 사람도 얼른 알아듣기 어렵다. 목적을 들키면 안 되는 후사아키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무지렁이인 척하고 때를 기다리며 품팔이로 먹고사는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문순득은 풍부한 국제 경험을 활용하여 날카로운 통찰을 발휘했다.
“호오. 풍속이 왜인과 비슷한데 왜말을 할 줄 모른다면 유구국 사람일지도 모르겠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그런데 왜 조정에 알리지 않은 것이오이까? 유구국이라면야 조정에도 통할만한 사람이 있을 텐데요.”
생각할수록 이상한 게,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외국인 이야기를 일절 쓰지 않았다. 정약전은 잠깐 멈칫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사세는 이 원악지(遠惡地)에 유배된 나에게도 들려오더군. 삼가서 나쁠 것은 없지. 구휼 때문에 바쁜 관에다가 유배 죄인의 신분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야 있겠는가.”
문순득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약전은 최근 간간이 배 타고 오가는 벗들에게 전해 들은 육지의 소식에 대해 문순득에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얘기는 모두 심상찮은 것들뿐이었다. 나라에 드나드는 서양인, 평안도의 불온한 움직임, 그리고 왕이 거세하고 도성을 버린 채 도망쳤다는 믿기 힘든 소문까지. 물론 감사와 수령들은 그런 유언비어를 엄히 단속했지만, 원래 사람 입이라는 게 막기 힘든 법이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난데없이 흑산도에 표착한 이 ‘유구 사람’은 거기에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정약전은 그 기괴망측한 소문 사이에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듣자 하니 그자는 자기 동생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라 했다.
‘정 진인이라.’
모리 후사아키가 쭈뼛대며 사립문에 들어섰을 때, 사촌서당 안에도 다시 바닷바람이 불어 풍경을 흔들었다.
작가의 말
1. 사촌서당의 편액 중 '촌'자는, 뜻과 음은 같습니다만 村이 아니라 邨입니다. '흑산도에서 쓴 물고기 책'인 자산어보(현산어보)가 흑산어보가 아니라 뜻이 같은 한자인 자(玆, 검다)나 현(玄)으로 쓰는 것과 같은 일종의 레토릭입니다. 정약전은 흑산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하죠.
이 편액은 정약용이 강진에서 보내 준 것인데, 정확히 '언제' 보내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작중에서는 서울로 오기 전에 보냈던 것으로 처리하였습니다.
2. 모두의 마음속에서 잊혀졌을 조슈 번의 모리 후사아키 나왔습니다. '열국은 진창에 발을 빠치고' 파트에서 나왔던 것 기억하시나요?
하하... 사실 이때 공적인 선단을 쓸 수 없는 밀수선 한 척으로 일본에서 평양까지 오겠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기는 합니다. 당장 문순득도 표류했으니까요. 후사아키가 평안도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영국인이 그곳에 개항했기 때문입니다.
29. 바람은 남쪽으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