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8. 기호지세(2)
결심한 일은 반드시 하고, 말한 일에는 책임을 진다. 그런 옛 제자의 성격을
아는 정약용이었기에 시준이 몸을 무겁게 일으키자 다시 재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시준과 함께 걸어 나가면서, 아버지로서 다시 한번 세심한 배려를
시도했다.
“환자를 구완하는 일은 내가 기랑이에게 부탁해 보겠다. 그러면 너도 안심할
수 있겠지?”
시준이 간호할 수 없다면 그 일은 다른 ‘여자’에게 맡겨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 특성상 시준이 아는 여자는 지유와 기랑을 제외하면 홍가장 식구들밖에
없고, 그들은 대부분 간호를 해 주기는커녕 간호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시준은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사과할 일도 있고요.”
“사과라니?”
시준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솟을대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랑아, 밖에 있지? 잠깐 나랑 같이 가자.”
정약용은 맹세코 들어오면서 기랑을 보지 못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랑은 거기에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문간에 기대
있던 기랑은 무표정하게 걸어와서 시준의 앞에 섰다.
“왜?”
“나를 다시 도와다오. 곧 돌아올 테니 선생님께서는 먼저 돌아가 주십시오.”
기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준은 마치 대답을 들은 것처럼 몸을 돌려
지유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정약용이 난처해하며 시준의 뒷모습과 기랑을 번갈아 쳐다보는 동안, 기랑도
입을 다문 채 시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귀 뒤에는 굵은 주름이 생겨나 있었다.
밀폐는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게 한옥이기도 하고, 시준이 환기와 위생에
신경 쓴 덕에 방 안은 상당히 쾌적했다.
지유는 짚과 깨끗한 면포로 만든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시준은 그런 지유
를 보며 말했다.
“아마 반나절 정도 있으면 깨어날 거야. 하루에 두어 번 돌아눕게 해 주고,
상처를 싸맨 면포는 매일 깨끗이 삶아서 갈아 주면 된다. 약 같은 건 내가 와
서 쓸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입을 뗀 시준은 건조하리만큼 직설적으로 여러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일어선 채 한참 그 말을 듣고 있던 기랑이 시준을 삐뚜름하게 쳐다보다가 문
득 물었다.
“끝이야?”
“네가 할 일은 끝이야.”
“알았어. 그럼 나가서 일 봐.”
기랑을 물끄러미 보던 시준이 작위적일 만큼 메마르게 말했다.
“내가 할 일은 아직 안 끝났어. 거기 앉아 봐.”
기랑은 도대체 뭘 할 건지 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
나 시준은 기랑마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는 지유의 침대 머리맡에서 술병과 흰 영길리포를 꺼내왔다. 붕대 어떻게
감는지 설명하기라도 할 것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기랑의 표정은 다음 순
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시준은 아무 예고도 없이, 여상한 손짓으로 기랑의 팔을 잡아챘다.
“!!”
기랑은 하마터면 시준을 찌를 뻔했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시준에게 잡힌 왼
팔에서 아릿한 통증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시준은 한마디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채 기랑의 옷을 끌어당겨 어깨를 드러내
었다. 자연스럽게 옷 위로 매여 있던 붕대도 떨어져 나갔다.
“남의 눈 피해서 옷 갈아입을 여유가 없었지? 일단 지금은 내가 해 줄게. 아
무리 작은 상처라도 깨끗하게 해 두지 않으면 독기가 침범하여 썩어들어 간
다. 서양국에는 장미 가시에 찔려서 죽은 문사(文士)도 있다고 하더구나.”
이 시대 기준에서 팔다리를 드러내는 일은 현대로 말하자면 가슴을 드러내는
일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상황이다.
기랑은 지유가 깰까 봐 소리도 못 지르고, 그저 팔에 힘을 줘서 시준을 뿌리
치려 했다. 그러나 완력은 기랑보다 시준이 더 강했다.
시준은 기랑의 팔을 단단히 잡은 채, 독한 술을 상처에 부었다. 술이라고는
해도 소주 같은 게 아니라 동인도 회사에서 수입한 주정(酒精)으로서 알코올
원액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만……. 아!”
기랑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는데도 시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에 몰두하듯이, 혹은 외면하듯이 상처를 닦아냈다.
그간 전투에 참여하고 대동강 부근을 헤맨 기랑의 팔은 꽤 더러워져 있었다.
아기 때부터 가지각색 예방주사를 맞는 현대인도 이 정도면 상처가 곪을 걱정
을 해야 한다.
기랑은 신음성을 참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에서 밀려오는 쓰라린 고통
과 지금 시준이 지저분해진 팔을 닦아주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어떤 것이 원인
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붕대를 싸맨 시준은 다시 기랑의 옷을 여며 주었다.
“미안하다. 아까 한창 싸울 때는 미처 마음을 쓰지 못했다.”
기랑은 시준의 손을 탁 쳐냈다. 그러고는 옷자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앞에 있는 시준이 아니면 듣지 못할 정도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치사한 놈.”
“미안해.”
“넌 치사한 놈이야. 구차스러운 자식이야.”
“…….”
“일부러, 내가 아무것도 못 하게, 여기에서…….”
시준은 기랑이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기랑이 갑자기 축객령을 내렸다.
“지유가 깰지도 몰라. 어서 나가라.”
시준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유를 잘 부탁한다.”
“나가.”
그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퉁명스러웠으나 역설적으로 그만큼의 신뢰가 담겨
있었다. 시준은 기랑이 지유를 잘 돌봐 줄 거라고 믿었다.
그녀가 가진 감정이 무엇이든, 그것 때문에 신의에 어긋난 일을 할 사람이었
다면 이미 아까 전 기랑은 본때 있게 울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장지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지유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걱정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굳이 분류하자면 조제프 푸셰는 시준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에
속했다.
정치국에서 조제프 푸셰의 무단 돌출 행동을 엄하게 규탄하려던 시준은 그 일
을 시작하기도 전 선화당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정치국 위원들은 존경하는 회장의 체면 때문에, 그리고 시준의 말이 어쨌건
정론이기 때문에 찬성한다는 태도를 취했을 뿐 실제로는 ‘불가피한 일’ 정도
로 인식하고 있었다.
시준은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미 협의가 끝났음을 알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권력에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하물며 이 사태의 원인이 지유를 돌
보느라 생긴 잠깐의 공백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후회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준은 김창시가 푸셰를 변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임금이 있는 곳에는 철기 백여 명이 모여 있었고, 피아가 뒤엉킨 난전에서
만약 그들이 돌진하였다면 결과는 알기 힘들었을 것이오. 모두가 부교 근처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복 위원(푸셰)만이 멀리 보고 포를 쏘아 그들을 쫓
아 버렸으니, 어찌 명장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정치적으로 시준과 가장 가까운 입장인 무력위원장 차형기가 떨떠름
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일격으로 임금이 죽었다면 우리는 시해자의 오
명을 쓰게 되오. 이렇게 위험한 일을 상의 한 번 없이 벌인 일은 논핵(論劾)
을 피하기 어렵소.”
지금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서 닥치는 대로 날뛰지 않는 이유는, 전장에 왕의
시체가 없음을 정약용이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준도 그 일은 정말 다
행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왕의 목을 거두지 못해 상당히 아쉬워하던 이제초가 – 이번에는 발언 기
회 얻고 – 대꾸했다.
“어차피 우리는 임금의 눈앞에서 관군에 부딪쳐 싸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기
왕 싸움을 시작했으면 대장을 처치하는 것이 왕도. 오늘 아침나절 부교에서
위원께서 외친 그 용맹한 기세는 다 어디로 가셨소이까?”
자기 얘기로 사람들이 핏대 세우는 와중에도 조제프 푸셰는 태연하게 찻잔을
들 뿐이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하다는 모순적 형용은 지금의 푸셰에게 딱 알
맞았다.
시준은 그런 푸셰의 모습에 주의하며, 더 논쟁이 격화되기 전에 손을 들었다.
이쯤 오니 시준 역시 푸셰의 의도를 알 만했다.
“검사위원장 조제프 푸셰의 처치가 병법에 비추어 리(理)에 합치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소. 그러나 군명은 옳아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군명이기 때
문에 따르는 것이요, 우리 근문소가 인민을 대표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보다 명철하고 영오(穎悟, 총명이 뛰어남)하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러기로 약
속하고 뽑혔기 때문이오. 그 성과가 좋다고 해서 법식을 마음대로 어기는 바
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외다.”
푸셰는 바로 그런 꾸짖음을 내려달라는 듯 잔잔한 표정으로 잔을 쳐다보고 있
을 뿐이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절차적 정당성의 피력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약
간 낯선 논리다. 시준의 말은 바로 법치주의의 기초를 쌓는 발언이었다.
시준은 말을 잇기 전에 한 번 차를 마시는 척하며 푸셰를 쳐다보았다. 그는
푸셰의 의도대로 ‘하지만’ 운운하며 변명까지 해 줘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별
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서도상고총협동회는 결코 프랑스군을 버릴 수 없다. 왕에게 대포
를 갈겨 개처럼 꼬리 말고 달아나게 한 지금은 더더욱.
결국 시준은 푸셰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적어도 절차적 정당성에 있어서 푸셰
는 완벽했다.
“하지만, 불랑국 군대는 무력위원회에 통속된 것이 아니라 불랑국 황제의 신
하이니 무력위원회의 군명을 따를 이유는 없소. 그러나 위원께서 어떠한 잘못
을 범했다고 탄핵할 수는 없다는 게 본 위원의 생각이오.”
규칙상으로도 하자가 없고 결과도 잘 나왔다. 푸셰는 이로써 정치적 부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이제는 시준이 거기에서 푸셰의 선물을 가져갈 차례다.
“그렇다고는 해도,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할 우리의 처지로서 보면 이렇게 아래
위의 아귀가 맞지 않고 옆으로 말이 통하지 않을 사단(事端)이 또 있어서는
아니 될 테지요. 따라서 본 위원은 이제 여러 정치국 위원들, 특히 무력위원
장 및 배석해 계신 다른 무력위원 여러분께 제안을 하려 하오.”
차형기와 홍총각, 그리고 이제초 등 민병대 장수들이 긴장하여 시준을 쳐다보
았다. 시준이 진지한 눈으로 그들을 마주 보며 말했다.
“영변과 대동강에서 보셨다시피, 여러 무력위원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출신과 뜻한 바가 달라서 자기 동네일이 아니면 싸우기가 어렵소이다.
술 달린 깃발을 휘(麾)라 하고 휘를 흔들어 진퇴를 정하므로 군사를 장수의
휘하(麾下)에 있다고 합니다. 무력위원회의 모든 장병을 하나의 휘하로 모아
군영(軍營)처럼 만들어야 하오.”
봉건 국가가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할 때처럼, 유력자가 가장 경계하는 바는
군사력을 빼앗기는 일이다. 유력자가 건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옛 고려 같은
나라의 경우 군사적 중앙집권이 아예 불가능할 때도 많다.
푸셰는 돌출 행동을 통해 프랑스군의 군공을 각인시키고, 더하여 프랑스와 가
장 상호 이해가 가능한 거래자인 시준에게 휘하의 유력자 군대를 통합해 가질
기회를 선물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무리하게 군사력을 독점하거나 확장하려다가 망한 군주나 지도
자는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지금 왕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시준은 일종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무슨 생각들 하시는지 알겠는데, 오죽당이나 십승대 등 여러 무리를 당장 다
폐하자는 게 아니오이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낸 위원들의 노고를 어찌 하루아
침에 없이 하겠소이까? 다만 협동회 의병(協同會 義兵)의 이름하에 군령을 무
력위원회 한 군데에서만 나오게 만들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다 흩어지는 일
을 막기 위해서요.
기존에 대원들을 다스리던 위원들은 그대로 장수가 될 것이오. 다만 위로 군
주 대신 무력위원회의 결정을 일사불란하게 따른다는 것만 다를 뿐이외다.”
시준이 기회 있을 때마다 툭툭 던지는 말에는 많은 함의가 있었다. 내년에 또
열기로 약속한 인민대회에서는 각지 위원과 위원장을 다시 선출한다.
위원이야 하던 녀석이 또 한다고 쳐도 위원장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군주가
공 있는 장수를 총애하듯이, 정치국과 평안도 인민들은 가장 많은 역할을 해
낸 무력위원을 위원장으로 지지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깃장을 놓는 것보다 차후에 권력 확대 방안을 꾀해 보는 게
현명했다. 현재 오죽당은 평안도에서 가장 서양 무기와 법식을 익숙히 한 군
대라서 대립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하지만 여기에서 맥없이 찬성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차후를 위해서라도 자
신들이 만만치 않다는 쐐기를 박아야 했다.
평준위원장 김창시가 발언했다. 최근 그가 시준에게 연전연승한 유일한 분야
인 명칭 관련이었다.
“기왕에 하나의 군영으로 만들 것이라면 의병이나 당이나 무슨 대라는 이름으
로 격을 낮출 필요는 없소. 옛날 국초에 수호군(守護軍, 지역 향토예비군)이
있었고 종이 씻는 자도 세초군(歲抄軍)이라 하며 역군(役軍)·잡물군(雜物軍)
역시 직접 총칼 들지 않아도 다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라 군이라 칭했소.
이제 알려지기 시작한 무력위원회의 이름까지 바꿀 필요는 없으나, 새로 만드
는 영(營)은 반드시…….”
시준은 제발 ‘그 이름’ 만은 안 나오길 바랐다. 지금 상황에서 시준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려면 김창시의 제안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창시의 인민제일주의는 시준의 강렬한 텔레파시에도 꺾이지 않았다.
“인민군(人民軍)이라 칭해 사기를 드높여야 하오이다. 하는 김에 지금까지처
럼 갈데없는 자들만 초모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과거 보아 군교와 장수
를 뽑듯이 학교에서 수재들을 추려 군관으로 입직시키는 편도 좋을 것 같소.
이 일은 학교위원회에서 힘을 써 주시면 될 것 같소만.”
‘아는 형님’ 연으로 모인 깡패들 말고 공적으로 사람을 모집하여 군의 사유화
를 방지하자는 뜻이었다. 시준 역시 그 말에는 찬성이었다.
다만 이름에는 이의가 있었다. 아무튼 그 이름은 싫었던 시준은 조심스럽게
말해 보았다.
“존경하는 김 위원(김창시)의 말씀이 매우 들을 만하나, 인민은 군왕과 사대
부 아래에 있는 것으로들 알고 있는지라 그 이름을 사람들이 즐거이 따를 것
같지는 않소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어야 인민 모두가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 잘 알려질 것이오.”
그때 꽤 의외의 사람이 나섰다. 검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정치국에 자리하
고 있는 시준의 동문 백윤구였다.
그가 명문 무가의 선비다운 점잖은 태도로 말을 시작했다.
“이번 일로 서상이 만들어지고 근문소와 정치국이 사람들을 어루만진 바가 매
우 크오. 이번에 임금이 자식 같은 신민을 쳐 없애려 한 일은 사백 년간 없었
던 재변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장황하게 서두를 늘어놓는 것이 뭔가 큼직한 말을 할 모양이었다. 시준은 긴
장하였지만 선비 계층인 백윤구는 김창시의 인민제일주의에 맞서 뭔가 보수적
인 안을 내어 제동을 걸어 줄 것 같아서 기대하며 쳐다보았다.
시준의 오산이었다. 시준은 일전의 정치국 회의에서 백윤구가 벌써 푸셰에게
설복되었음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준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백윤구는 이미
평안도 선비 사회를 대표하는 혁명 이론가였다.
“요즈음 학식 높은 검사위원장(조제프 푸셰)에게 얻어듣자 하니 서양에서는
이러한 일을 별이 바뀐다[révolution]고 이른다 하오이다. 하기야 열수와 오
성(列宿, 五星은 조정의 재상과 낭관에 대응하는 천문)이 뒤집히는 일이니 이
러한 이치는 중원과 동방이며 서양이 한가지로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고전에도 이러한 말이 있는데, 내가 이미 돌아오신 스승님(정약용)께 여쭈어
가르침을 받았소이다.”
그러면서 백윤구는 시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너도 알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시준은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옛날 그놈의 성문종합영어를 정약용에게 강했을
때가 떠올라서 소스라쳤다. 레볼뤼시옹(révolution)에 대응할 수 있는 한자어
는 현 시대 세계에서 시준밖에 모른다.
아니, 이제는 최소한 두 사람이 더 안다.
“잠깐……!”
“바야흐로 붉은 깃발을 올리고 폭군을 징치하는 이 장정의 시작에 있어, 웅대
한 이름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없소. 탕(湯, 탕왕)과 무(武, 무왕)가 명을
혁신한 일은 하늘에 따르고 사람에 응하는 것이라[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주역(周易)』]. 본 위원은 여러 위원들 앞에 혁명군(革命軍)의 깃발을 제안
하오.”
정약용은 정치국 위원도 아니고 서상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
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누구보다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정
약용이었다.
서상의 역사에 깊은 의미로 남을 ‘혁명군’이 결성된 정치국 회의가 끝난 뒤,
시준은 정약용과 따로 마련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제자를 속이시는 것이 매우 심하십니다. 백 사제(백윤구)는 선생님의 꼭두각
시나 다름없었지 않습니까.”
“너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지 않느냐.”
정약용이 빙긋 웃자 시준은 더 말도 못 하고 그냥 커피를 술처럼 털어 넣었다.
“선생님께서는 임금이 맹자의 설에 합당한 필부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그를
치는 것은 시(弑, 윗사람을 죽이다)가 아니라 주(誅, 처형하다)라고 할 수 있
겠습니까?”
정약용은 고개를 숙였다. 그 주제는 그 역시 이공의 막하에 있을 때 생각해
본 것이다.
“글쎄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마는, 평안도 인민의 눈으로 보자면 왕이
먼저 그들을 쳤으니 이것은 인(仁)을 잃은 것이요, 양민을 살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의(義)를 저버린 것이 아니겠느냐? 이들에게 잔적(殘賊)하다
는 말을 들을지언정 과연 그것이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님께서 믿으시는 바를 이야기해 주십시오.”
정약용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래. 그럴까.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
집어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순자(筍
子)』’는 말을 네가 기억하느냐.”
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전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
의 말은 시준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에 유용할 수도 있기에 기억해 두었던
구절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피지배자의 권력이 지배자보다 우월하다는 뻔한 얘기를 하려
고 그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시준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멍
하니 말했다.
“여기 온 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아까 물에 띄운 배 이야기를 했지. 배는 물이 없으면 뜰 수 없다. 물이 성내
면 뒤집혀 가라앉고 말지. 그런데 배가 없는 물은 어떨까? 배가 없다면, 물은
어떻게 될까?”
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야……. 딱히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배가 없다고 물이 개의할 일은 없
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그게 딱히 배가 사악해서는 아니지 않겠느냐. 아직 나도 결
단을 내리지는 못했다만 감히 말하자면…… 원래부터 물은 배를 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던 게다.”
정약용의 허핍한 대답을 듣자마자 시준은 전율을 느꼈다.
이 이상의 말은 정약용으로서는 할 수 없는 탈선이다. 그러나 시준은 조선 시
대 사람이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에 크게 놀
랐다.
시준의 겉모습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지만 살아온 세월로 말하자면 원숙
하다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시준은 사람이 평생 믿어온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이것은 논리적 근거와 상관없는
문제다.
보수적이고 고루한 것은 현대인인 시준 쪽이었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이, 여
러 위원회의 위원이나 정약용, 다른 의미로는 이공 같은 사람들이 시준보다
더 유연하고 진보적이었다.
시준은 그에 걸맞은 존경을 표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지금 당장 왕을
없애버릴까요?’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말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저의 투정이 심했습니다. 그러하시다면, 긴히 하시겠다는 말씀
은 무엇입니까?”
그게 정약용이 시준에게 따로 보기를 청한 이유였다. 정약용도 화들짝 놀라듯
이 깨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시준은 어째 정약용이 홍경래의 도주를 알
렸을 때가 생각나 긴장했다.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나도 정신이 없었다. 내가 나오면서 얼핏 들은 이야기
인데, 한 사오백 명쯤 되는 백성 무리가 근왕군의 뒤에 나타났었지. 아마 황
해도에서 온 것 같던데…… 그들이 어쩔 심산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
아보는 편이 좋겠구나.”
작가의 말
1. révolution은 원래 (지구의) 공전, (하늘이) 돌거나 뒤집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혁명이라는 뜻의 연원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