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95화 (95/284)

95화

28. 기호지세(1)

대프랑스 제국 남작 도미니크-장 라레(Dominique-Jean Larrey)는 본래 선의

(船醫)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진료하고 실력을 쌓은 이 원숙한 의사는 나폴

레옹 대육군의 의료 책임자로서 봉사했다. 방대한 저술과 그를 뒷받침하는 경

험으로 파스퇴르 이전의 유럽 의학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성실함을 갖추었으면서도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까지

가기를 자청할 정도의 의리가 있을 뿐 아니라, 전쟁 상황에서 부상병의 보호

에 대한 규범을 최초로 제창할 만큼의 인격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미니크의 진정한 가치는 학문이나 도덕에 있지 않았다.

“수술! 수술! 환자는 어디 있나!”

도미니크는 환자를 눕혀 놓은 방에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쾅 들어섰다. 시준

은 하마터면 그 의사의 턱을 날려 버릴 뻔했다.

시준이 참은 것은 도미니크의 웅후장대한 체격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했다간

시준 혼자서 두 명을 수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시준은 믿기 힘들었지만 프랑스군이 말하기로 분명 저자는 프

랑스 대육군의 의무총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저자보다 뛰어난 의

사는 없다는 뜻이다.

‘왜 육군 의무총감이 조선까지 온 거야?’

나폴레옹이 신뢰하면서도 당장 전쟁과 큰 관계는 없는 – 그의 지식 자체는 다

른 의사들도 안다 – 사람을 의사 핑계로 딸려 보내 푸셰를 감시하려 했다는

사실은, 시준이 황망한 상태가 아니라도 추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그저 호통을 쳤다.

“일단 손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시오!”

“아시아의 주술인가? 그런 짓을 할 시간이 없네. 24시간 안에 수술을 하지 않

으면 환부에서 독기가 빠르게 퍼지기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지! 당장 잘라야

한다! 내게 맡기게. 보르디노에서 홀로 200명의 수술을 연속 집도한 내가 금

방 해결해 주겠네!”

도미니크는 그렇게 말하며 홍총각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우람한 팔뚝을

과시했다. 과연 최단기록 17초의 명예에 빛나는 유럽 최속의 사지 절단 전문

가다웠다.

그러나 시준은 으르렁대며 도미니크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주위의 프랑

스인들이 놀라는 것 따위는 지금 시준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바로 그 독기가 네놈의 손과 옷에 묻어 있어서 그렇다는 거 아니야. 조선에

온 지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아직도 『동방 박사의 신비한 거울(동의보감)』

을 읽어보지 않았는가! 주술이 아니라 의학이다. 당장 깨끗한 차림으로 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환자는 재워 뒀으니 꼼꼼하게 씻어!”

암허스트 때처럼, 이자가 동의보감을 봤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고 친 허풍

이었다.

다행히 도미니크는 더 반항하지 않았다.

“오, 그래, 그래(d‘accord). 진정하게. 확실히 이 마취법은 의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군. 좋아.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지. 대신 나중에

그 무슨 거울인지 하는 책은 꼭 한 권 나눠주게.”

인류애 가득한 의사인 도미니크의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싸움 하다가 치료 시

기를 놓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으나 어쨌든 타협은 되었다.

그 사이 소질개가 깨끗이 삶아서 가져온 급조 마스크며 붕대도 도미니크는 선

선히 받아들였다. 조수 역할을 자처한 시준은 마지막으로 의료 드라마에서 본

대사를 쥐어짜 경고 겸 각인시켰다.

“수술 방식을 설명하겠소. 환자는 화살을 등 오른편에 맞았소. 과도하게 살과

내장에 손대었다간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오. 최소한의 절개와 소독으로 끝내

도록 합시다.”

도미니크도 이제 시준이 의학에 문외한이 아니라는 착각을 완성한 상태였다.

모르핀을 쓰는 수술법은 도미니크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을 정도이니 마냥

착각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대프랑스 제국 육군 의무총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몸부림치지는 않아서 좋군. 칼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을 테니 신중하

게 진행하지. 됐지? 그럼 시작하겠네.”

정약용은 왼손으로 종이 뭉치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붓두껍을 입에 문 채

오른손으로 붓을 빼내었다. 무사가 검을 뽑는 것 같은 비장한 동작이었다.

“잘 들어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줄은 부대의 이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진 줄은 물목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가로세로 첫 번째 이 칸에는 오죽당

이 노획한 총의 숫자요. 여기 이 칸에는 십승대가 가져온 북의 숫자다! 칸에

는 수만을 적는 것이다! 이쪽 종이도 요체는 같으나 여기에는 다치고 죽은 사

람과 그 고향을 각각 적는다! 여기는……!”

정약용이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이유는, 우두머리가 부재한 상황의 단점이

드디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투는 이겼다. 금위영은 패퇴했고 사람들은 적기를 흔들며 승리의 함

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정약용이 보기에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했다.

이제 물러날 곳이 없는 왕은 황해도와 함경도 속오군을 움직이려 들지도 모른

다. 지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재빠르게 군세를 다시 정돈해야 한다.

그런데 ‘군세를 정돈’한다는 간단한 표현에는 혹독한 수준의 실무적 노력이

들어간다.

전쟁 결과를 정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정약용이 해야 할 일은 단순

한 논공행상 차원이 아니었다.

‘그 정치국인지 무엇인지를 빨리 개최해 후일을 의논해야 한다. 그러려면 실

정(實情)을 살펴 아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야.’

현재를 이야기하려면 옛일을 헤아려야 하며, 미래를 논의하려면 현재를 파악

해야 한다. 전과(戰果)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후의 대책을 의

논하는 정치국 회의를 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빨리 그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

약용이다.

서상의 서리들에게 재주가 모자라다는 말은 아니다. 정치국 서기 김희용을 비

롯해 서상의 많은 서리들이 만상식 행정업무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도 ‘왜’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

업무는 대개 시준의 지휘하에 행했기 때문이다.

현장의 실무진은 흔히 ‘책상물림’이라고 하는 기획자와 관리자를 비웃는 경향

이 있지만, 그들이 따로 좋은 책상 차지하고 더 많은 월급 받는 데에는 이유

가 있다.

그리고 ‘책상물림’으로 말하자면, 이 조선에서 정약용보다 그 궁극에 다가간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인인 정약용보다는 내부인이면서도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 – 예를 들어 조제프 푸셰 같은 사람이 나서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푸셰는 자기가 검사위원회 위원장일 뿐이라며 그 일을 사양했다.

“감사의 직책이 행정을 견제할 수 있는 이치는, 바로 집행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오. 만약 검사위원회가 나선다면 힘을 나누는[權力分立] 원칙이 희미해

질 거요.”

물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였지만, 조제프 푸셰는 검사위원회의 한계를 반박

하기 힘든 정론으로써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이 검사위원회 위

원들인 백윤구와 희만당 제자들도 나서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정약용은 제자들의 배신에 분개하며 혼자서 뛰어야 했다.

물론 그 혼자로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정조가 괜히 정약용을 갑질하며 부려먹

은 것은 아니다. 시준이 21세기의 공무원이라면, 정약용은 19세기의 공무원이

었다.

정약용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오던 사람 같았다. 전장 정리를 명목상

총괄해야 하지만 지식이 모자란 무력위원회 위원장 차형기가 질투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래서 차형기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아, 이거 뭔지 아오. 회장께서 만상 서장관 시절 하던 일인데.”

“이건 선대왕 시절 내가 어전에 품의한 법식이오! 시준, 아니, 회장은 내 제

자였다는 것을 알겠지? 어서 시행하도록 하시오!”

표로 물목을 정리하는 방식은 만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스프레드시트

라도 합계나 겨우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법 주문 같은 매크로를 남겨두

어 대대손손 사무실의 신비한 고대유산(소실되면 재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으로 창조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조선 스프레드시트의 원조 정약용의 솜씨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했다.

곧 끌고 온 군마가 정렬되고, 빼앗아온 총이 쌓이며, 거둬 온 수급도 한곳에

고이 모셔졌다. 금군 포로 또한 홑옷만 남기고 전부 벗긴 채 무릎 꿇렸다.

“좋아. 대강 모인 것 같구나. 사로잡은 군관과 병졸이 예순한 명, 참살한 적

은 일흔여섯 명, 노획한 총포는 합계 여든여덟 자루! 그래도 꽤 많이 도망간

모양이야. 평양 부민도 마흔 명이 넘게 죽고 다쳤으니 나중에 위로와 구휼을

잊지 말아야 하네.”

이 외부인이 이렇게 날뛰는데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정약용의

위치를 짐작한 이제초가 좀 주저하며 나섰다.

“거, 선생. 우리는 붉은 군기를 처음으로 세우고 금위대장의 목을 베었는데,

그걸 졸개와 같이 헤아리면 어디 온당한 일이겠소?”

“그건 걱정 마시오. 이 그림만 가지고는 얘기가 안 되지. 문서가 있어야 하는

데, 거기에 틀림없이 기록해 놓겠소. 대장을 참하고 기세를 드높인 공은 고대

부터의 예법에 따라 제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정약용은 주위 사람의 이상한 표정을 보고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회장이 여는 그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말이오. 내 생각

이 그렇다는 말이외다.”

“역시 배우신 분이라 언행이 점잖은갑소. 우리도 안심하게 되었소이다.”

정약용은 자기를 견제하는 여러 ‘위원’들을 보면서 느낀 묘한 기분을 기억해

두었다. 이것은 그가 익숙한 조정의 정쟁과는 달랐다.

이 위원들이 유달리 고결한 인성과 공평한 성격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사

람 사는 곳은 어차피 다 비슷하다. 정약용이 얼른 보기에도 서상에는 몇 가지

의 파벌과 경쟁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러한 경쟁이 항상 다른 무언가의 이름을 빌려 발휘되었

다. 그것은 왕이기도 하고, 종묘사직이기도 하며, 주자와 공맹이며 십철(十

哲), 또는 그들이 말한 도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이제초가 그러하듯

이, 이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논했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들의 학문이 엷고 성품이 졸렬하기 때문인가? 아니, 그것은 아니다. 그렇

다면 시준과 ’정치국‘에 그만한 존경을 표할 리가 없어. 그보다는…….’

이들이 지금의 일을 스스로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시준이 정약용에게 공언했듯 또 다른 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원들

이 서상의 일을 다루는 방식은 고을 농사에서 품앗이를 다루는 방식과 비슷했

다. 이제초의 문제제기 역시 우리 집이 어제 더 많은 장정을 내어 모내기 돕

지 않았느냐는 식에 가까웠다.

정약용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시준이 옛날 성문종합

영어를 강할 때 말해 준 불랑국의 사적이 뒤섞였다.

‘스스로의 것…… 인민 스스로의 것…… 왕이 아닌 인민이 주인[民主]이라…….’

정약용이 잡힐 듯 말 듯한 사유의 단초를 더듬는 동안, 정약용이 아까 일을

시작하기 전 빈틈없이 조치해 두었던 결과가 돌아왔다.

저편에서 여남은 명쯤 되는 무리가 소달구지를 끌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그녀와 같은 사냥꾼 출신들과 함께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갔던 기랑이었다.

정약용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랑에게 다가왔다. 기랑의 어깨에 감긴 붕

대 위로는 아직도 핏자국이 비쳤다.

“허어. 아니, 기랑아. 너는 쉬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라고 하였지 않느냐.”

기랑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수레에서 소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수

레에 실린 것을 본 정약용은 안타깝게도 기랑을 더 걱정해 줄 여유가 사라졌다.

“……홍경래!”

달구지에 실린 것은 푹 젖어서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홍경래였다.

정약용의 목메이는 고함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수레 주위는 금세 시끌벅

적해졌다.

놀랍게도 홍경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상박이 관통당해서 명줄이 얼마나 갈지

는 몰라도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무는 꼴을 보아하니 죽지 않은 건 확실했다.

홍경래에게 원한이 많은 이제초가 씩씩대며 나섰다.

“이놈의 피로 마땅히 군기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겠소!”

이제초는 깃발 제조자로서의 자기 명성을 더 확고하게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

다. 정약용이 그를 힘써 말렸다.

“죽었다면 모르되, 살아 있으면 다 쓸 데가 있소. 하다못해 조정의 계책을 캐

내기 위해서라도 살려 두어야 하오. 회장이 다시 나오면 의논하고 나서 참해

도 늦지 않소이다.”

그렇게 이제초를 멈추어 놓은 정약용은 기랑을 돌아보았다.

“시준이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의자(醫者)들과 함께 있을 테

니, 수레를 그대로 가지고 거기로 가는 게 좋겠다. 하는 김에 네 상처도 다시

봐 달라고 하고 홍경래 또한 마비산을 쓰든 팔을 자르든 살려둬야겠지. 그렇

게 해 주겠느냐? 시준이 지금은 정신이 없다 해도 나중에는 필히 너를 상찬할

것이다.”

정약용은 시준과 함께 기랑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단 두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책문에서 굳이 시준에게 기랑을 딸려 보내려던 일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그때는 시준이나 기랑 본인도 몰랐던 감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기랑과 홍

경래를 한꺼번에 시준에게 보내려 했다. 정약용의 천재적인 두뇌는 사서오경

에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정약용 자신마저도 매끄럽다고 감탄할 만한 조치였기에, 기랑이 단호

하게 고개를 젓자 정약용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기랑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평소에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기랑의 사람

됨은 이미 서상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아무도 그 무례를 탓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좀 달랐지만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은 멀어지는 기랑의 뒷모

습을 보며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공책을 꺼내 기랑이 적의 두령 홍경래를 쏘아 맞추고 또 사로잡아 왔음

을 기록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기랑 대신 달구지를 끌어 평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꼭 홍경래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실무적인 일은 거의 틀을 잡았으

니, 외부인은 퇴장해 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정약용은 전투 말미에 어기가

있는 곳에 대포를 쏴 버린 조제프 푸셰에게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옛 제자이자 이곳의 강대한 권력자에게 싫은 소리 할 준비

를 해야 했다.

도미니크는 설탕과 꿀로 상처를 마무리하고 붕대로 감쌌다. 시준은 몇 차례나

그 짓을 중단시키고 싶었으나 고대부터 사용된 이 소독제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다른 수단이 없는 비상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살

균 수단이다.

시준은 지유를 서둘러 깨끗한 옆방으로 옮겨놓은 뒤, 여러 약재를 챙기고 도

미니크에게 수술 과정을 다시 상세히 들으러 돌아왔다.

물론 옆에서 보기는 했지만,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응하려면

치료의 전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있었

다. 시준은 의사들이 왜 차트를 쓰는지 조선 시대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설명은 도미니크가 뜨거운 커피를 석 잔째 비울 때쯤 끝났다.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말했다.

“뭐, 대강 이 정도일세. 환자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까, 크게 운이 나쁘지 않

는 이상 죽지는 않을 거야.”

“……고생하셨소이다.”

“나도 여러 가지 배웠군. 지금 끓이고 있는 저건 버드나무 껍질이지? 과연 열

을 내리는 데에 탁효가 있지.”

시준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대신 도미니크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

던 화살촉, 지유의 몸에 박혔던 그 쇳조각을 집어 들었다.

“예. 나머지 간호는 제가 할 테니 쉬시지요.”

“하하! 나를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 고작 한 명의 수술이 끝났다고 지쳐 드러

누울 내가 아니지. 방금의 전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을 텐데, 나의 의무

는……. 응? 마침 하나 더 오는군!”

정약용이 뒤에 들것을 딸린 채 들어서고 있었다. 시준은 지친 와중에도 환자

를 보고 약간 놀랐다.

“홍경래? 살아 있었군요! 그런데 왜 선생님께서 몸소…….”

정약용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는 간단한 지시사항과 함께 홍경래를 도미

니크에게 넘겼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시점에서 홍경래에 대한 관심을 끊

었다.

정약용은 수술실을 한 바퀴 돌아보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처리를 하느라 분주하구나. 홍 장주 댁 딸이 맞은 화살은

무사히 뽑았느냐?”

시준은 손에 쥔 화살촉을 움켜쥐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예. 당장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다행이로다. 참으로 다행이야. 그렇다면 나가서 얘기 좀 하자꾸나.”

시준은 거부감을 느꼈다. 지금 그는 다른 일에 관심이 없었다. 시준의 표정을

본 정약용이 달래듯이 말했다.

“네가 나서서 이끌어 주어야 할 일이 많아. 네 재주가 방기(方技, 의술)에도

있음을 내 모르진 않으나, 그것은 여기의 의자들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보아

야 할 때다.”

“여러 위원이며 서리들은 충분히 영민한 사람들입니다.”

정약용은 네 애인 목숨만 중하고 다른 사람 목숨은 하찮으냐는 말은 하지 않

았다. 쓸데없는 싸움만 일으킬 뿐이다.

“내가 이미 보고 왔으니 그 말도 충분히 알겠다. 허나 네가 없으면 그 영민함

은 반도 채 빛나지 못할 게다. 우장(愚將) 밑의 강병보다 용장 밑의 약졸이

백번 나은 법. 어찌하여 그 이치를 모르느냐? 이제 형세는 호랑이 등에 탄 것

과 같으니, 좋은 기수가 반드시 있어야 하느니라.”

“그 정도는 아닙니다. 평양 부민은 이미 예전부터 임금이 자기들을 친다면 맞

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위급하기는 하나, 우왕좌왕할 만한 것

도 아닙니다.”

시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전 정치국 회의 때부터 이미 이 사태는 최악의 경

우 중 하나로서 상정되어 있었다.

평준위원회는 압록강을 따라 말 잘하고 걸음 잘 걷는 보부상들을 보내어 함경

도 유지들을 회유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을 것이요, 무력위원회는 이 봄철

보릿고개에 거절할 수 없는 곡식 자루를 내걸어 다시 대규모의 민병대를 소환

할 것이다.

패배한 왕은 김조순에게 유폐되었다가 전조의 왕 누구처럼 허리가 접히든지,

아니면 시준에게 얌전히 항복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준도 지금은 그들에게 정리를 맡긴 채 지유의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이어지는 다음 말은 그렇게 흘려 넘길 것이 아니었다.

“복공이 불랑국 군대를 써서 어가에 대포를 쐈다. 용안을 아는 자가 없으니

내가 서둘러 가 보긴 하겠다만, 어쩌면 주상 전하도 해를 입으셨을지 모른다.”

시준은 그제야 손에서 뜨끔한 열감을 느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화살촉에

다친 손아귀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시준은 결국 정약용과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을 닫는 시준의 뒤로 도미니크의

고함과 우당탕거리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는 홍경래의 참혹한 비

명이 들렸다.

놀라움이나 동정심보다는 우울함이 시준의 마음에 드리워졌다. 앞으로는 저런

소리를 많이 듣게 될 것 같았다.

작가의 말

1. 도미니크-장 라레에 대한 것은(이름만 표기하려면 '도미니크장'이 맞지만 작중에서는 어감상 저렇게 표기하였습니다) 체격과 성격만 빼놓고 모두 사실입니다.

그는 신속한 절단수술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틀리지 않은 처방이었습니다. 팔 하나 자르는 데 최단 17초에 끝낸 기록도 실제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의 의학적 명성이 어찌나 높았던지, 나중에 전쟁에 이기고 그를 체포한 프로이센의 장군 블뤼허조차도 결국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작중에서는 의무총감(1805년)인 건 맞으나, 제국 남작(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은 원래 역사대로라면 조선에 오지 않고 유럽에 있었어야 받을 작위였기에 남작 직위는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2. 설탕, 혹은 설탕물은 나폴레옹 전쟁기 유럽에서 여전히 총상 치료에 널리 사용된 수단이었습니다. 아직은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살균 효과가 있는 설탕이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3. 허리 접힌 고려의 왕이란 의종을 말합니다.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그 왕 맞습니다. 당시 이의민은 의종을 말 그대로 착착 접어서;; 죽인 뒤 가마솥에 넣어 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28. 기호지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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