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27. 붉은 깃발(2)
과거 아우스터리츠가 평안도 용천부 해안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을 때, 이공
은 그 배의 대포와 기기를 탐내어 강화도와 수원 화성의 방비에 아우스터리츠
의 장비를 들어다 쓰게 했다. 물론 그 지시는 대부분 이행되었다.
그러나 아우스터리츠는 선박보다는 건축물을 들이대어야 규모 면에서의 비교
가 가능할 대형 전함이다. 그것을 해체하는 일이 단시간에 끝날 리 없다.
결국 시준이 평안도를 평정하고 이공이 정부를 버리기 전까지도 아우스터리츠
의 ‘모든’ 자재를 깔끔하게 뜯어내지는 못했다.
무기류의 경우 그나마 최우선으로 들어내었지만, 아직 미처 처리하지 못한 대
포와 부품이 그간 협동회의 손에 들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푸셰의 지시가 떨어지자, 프랑스 수병들은 대포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 두었던
캔버스 천을 벗겨냈다.
아우스터리츠에 있던 18리브르 장포(Arme d‘épaule de 18 livres, 18파운더
롱 건을 말한다) 2문의 웅장한 자태가 백일하에 드러냈다.
육상용으로 개조 같은 짓은 꿈도 못 꿀 처지라 그냥 대동강가 모래톱에 ‘갖다
놓았다’는 말이 적당했다. 부속 시설은 없다시피 하여 통제된 정규 사격은 불
가능. 명중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도둑놈 심보다.
그러나 푸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병사들
을 돌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혁명! 그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기만적인 미사여구가 전혀 필요
없는 강철의 혁명 그 자체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군?”
비록 군함에 있을 때는 더 큰 주포 – 36리브르 카로네이드에 밀려 그다지 눈
에 띄지 않았지만 지금 평양성 앞에서는 무엇보다 시선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오히려 카로네이드였다면 이런 작전은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대동강이나
넘어갈지 의심스러운 카로네이드의 사거리로는 강 건너 저편에 있는 조선왕을
노릴 수 없다.
조제프 푸셰는 프랑스 군사를 돌격시켜 조선왕을 사로잡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작전은 적절하지 못했다.
우선 현실적인 문제로, 저쪽은 기병이 다수인데 비해 이쪽은 보병이 다수다.
아시아 군대가 기병이건 코끼리병이건 유럽식 군대와 상대가 될 리 없겠지만,
프랑스군이 도강하면 조선군은 당연히 본격적으로 도주할 텐데 아무리 프랑스
군이 정예라도 말보다 빠르기는 힘들다.
두 번째 문제는 그레테 자작이 지적했다.
“여기의 조선인이 아무리 ‘공화파’라고 한들, 과거 베르됭이나 툴롱의 광기
어린 학살을 외국군이 그들의 왕에게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선 사람들은 지금까지 푸셰의 음성적 선동과 시준의 양성적 영도에 훌륭하
게 따라주었다. 그러나 왕당파와 공화파 둘 다 해본 푸셰는 왕에 대한 전통적
이고 신앙적인 존경이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
을 잘 알았다.
외국군이 왕을 ‘직접’ 덮쳐서 돼지 도살하듯 찔러 죽인다면, 가장 열성적인
반왕파도 왕당파로 돌아서게끔 만들 수 있다.
혁명이란 게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프랑스 혁명군 역시 혁명 대부분의 시기
에서 식인과 고문, 시신 해체를 일삼던 살인귀 집단이었다.
푸셰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진격은 없을 걸세. 모든 장교와 병사들은 포격 후에도 제자
리를 지키게.”
“예? 아니, 우리의 포격에 왕이 죽는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리 생각하나?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참 묘하거든. 똑같은 살해라도 살해란
그 수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피부로 느껴지는 죄악은 거꾸로 적어지는 신비한
경향이 있어.”
시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미사일과 공중폭격으로 수천 명을 죽이고도 안전
한 정치인과 단 한 번의 살해로 평생 감옥에서 썩는 범죄자의 차이를 고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푸셰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정당한 왕을 찔러 살해한 피가 터지듯 흘러내려 손에 묻는다면, ‘과연 위대
한 해신(海神)의 바다 전부라 할지라도 내 손에서 그 피를 씻어낼 수 있을까
[Will all great Neptune’s ocean wash this blood clean from my hand]?’
그럴 수 없지. 그러나 천여 미터를 날아가는 이 포라면 이야기가 다르네. 농
담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피를 직접 묻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꽤 중요한
문제야.”
그레테 자작은 뭔가 반박할 수 없는 종류의 고약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잠
시 고민하던 그는 주저하며 다른 지적을 해 보았다.
“이 포의 위력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만, 이것으로 계속 움직이는 조선왕을 일
격에 맞추는 것은 무리입니다. 공격하지 않을 것이면 아예 침묵하고, 공격할
것이면 병사들을 보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이도 저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까 뭐라고 했나?”
“조선왕을 죽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나는 폭군의 운명을 끝내겠다고 말했네.”
그레테 자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체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병사들이 있어야 합니다만.”
“그렇지 않아. 나는 그의 명예와 체통을 살해할 생각이야. 맞추지는 못해도
돼. 오히려 그래야 하지. 맞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수’일세. 내가 핏자국
얘기를 괜히 한 건 아냐. 왕이 죽는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만이 관장하시는 재
해의 범주이지 우리의 야만적 살인 의도가 아닌 것일세. 알겠는가? 이것은 우
리가 꺼내 들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패라고 할 수 있네.”
애초에 왕당파 출신인 그레테 자작은 정당한 왕을 죽인다는 게 내키지 않았
다. 그는 다시 대꾸했다.
“가장 안전한 패는 여기서 침묵하고 있다가 적절한 보호를 받아 귀국하는 것
이 아닐까요?”
“하하. 내가 나가사키로 가지 않았던 게 불만인 모양이군. 하지만 기왕 귀국
하려면 실패한 표류자가 아니라 혁명의 전파자이자 외교 임무의 당당한 성공
자로서 귀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우리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야 하고.”
“저희의 입지가 그렇게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하께서도 회계감사직
을 맡지 않으셨습니까?”
돈 만지는 일을 천하게 보는 조선인들의 생각으로는 복공이 궂은일을 자초했
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지만, 유럽인의 관점에서 이것은 상당한 고위직이다.
그러나 푸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영국 함대가 평양 외항(삼화부)에 있네. 만약 여기서 왕을 그냥 고이
보내주면 이미 폭발력을 소진한 민병대는 새삼 추격해서 확전을 벌이기 어려워져.
혁명 시기의 교훈을 모르는가. 중요한 것은 이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
이야. 그런 방면에서 우리가 공을 세워 준다면, 정시준 또한 결정적인 시기에
우리를 영국에 넘긴다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렵겠지.”
실제로 아까부터 전장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는 붉은 깃발은 더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 근위대(금군)가 패배한 것은 확실하지만, 민병대 역시 많은 손
해를 입었으며 지금은 곳곳에서 오히려 근위대가 소규모 발악으로 민병대를
몰아붙이는 광경도 보였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니 정시준과 논의한 것이 아니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자기 입지 좁아지는 짓을 허락할 리 없잖나. 그러니
까 연인의 부상이 위중하여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는 이때 저질러서 기정사
실을 만들어야 해. 하하. 정말 젊은이다워서 귀엽군.”
그리고 푸셰는 이어지려는 그레테 자작의 말을 선수 쳐서 막았다.
“귀관과의 대화는 즐겁지만, 더 낭비할 시간이 없네. 왕이 도망가면 우리가
활약할 기회도 끝이야. 어서 군명을 이행하도록.”
그레테 자작도 더 이상 시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것은 군명이다. 그리고 그
는 아무 부랑자나 지휘관으로 앉히고 규율이란 찾아볼 수가 없는 혁명군이 아
니라 제국의 군인이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복종. 그것이 군인의 미덕이다. 그레테 자작은 지체 없이
발사를 명령했다.
포의 설치 자체는 시준도 허락한 일이기에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 단지
시준은 왕이 직접 올 줄은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안 이후에는 지유의 일 때
문에 거기까지 신경 쓸 새가 없었다.
푸셰는 하느님이 돕는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미소를 지었다.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틀어막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도 그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최적의 함선에서 숙련된 병사들이 다룰 경우 18파운드 함포는 5분에 2~3발 정
도를 사격할 수 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라 보긴 어려워서, 그레테 자작은 그 절반 정도의 연사력
을 예상했다. 한 발 정도만 떨어지면 5분 내로 다 흩어져 도망갈 테니 초탄이
전부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공의 입장에서는 이런 무도한 짓을 두 번이나 할 셈이었냐고 외치고
싶었다.
막 움직이기 시작하던 금위영 대열에 두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거대한 폭발
음과 함께 바람이 진동하고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뭐, 뭐냐! 이게 뭐야!”
“전하,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한 발은 왕 때문에 실어 온 여러 기물이 담긴 치중 수레를 산산이 박살 내고,
나머지 한 발은 이공에게서 불과 스무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명중하여
군관 세 명과 군마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피해는 대단하지 않다. 그래 봐야 18파운드짜리 쇳덩이
일 뿐이다. 하지만 금위영이 입은 정신적 피해는 아주 막대했다.
그리고 그것은 피해를 수습해야 할 지휘관인 이공이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내가 이미 이 경우의 병법을 서양인에게 들었다! 모두 엎드려! 엎드려서 튀
는 돌과 쇳조각을 피해라! 아, 아니지. 여기에서는 당장 일어나서 앞으로 달
려라! 저 무도한 놈들의 화포를 뒤집어엎고 포군을 격살해야 한다! 무엇을 하
느냐, 이놈들! 큰 포는 빨리 쏠 수가 없느니라!”
장수들은 왕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최대한
무례하지 않은 목소리로 진언했다.
“하교하신 대로 큰 포는 빨리 쏘기 힘드니, 지금 어서 포탄이 미치지 않는 곳
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소관들이 모시겠습니다.”
“네놈들이 어명을 무엇으로 아는 것이야. 내가 출진하기 전에 무어라고 말했
느냐. 여기서 죽지 않으면 네놈들이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 같으냐!”
“신등의 초개(草芥) 같은 목숨이야 무엇이 아깝겠습니까만, 어찌 감히 옥체를
상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공은 그러나 끝내 움직이지 않고 대동강으로 돌진하라고 외칠 뿐이었다. 그
리고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는 사이, 그레테 자작은 왜 조선왕이 안 도망가는
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2탄을 발사했다.
한 발은 멀찌감치 빗나갔지만, 한 발은 오히려 아까보다 이공에게서 더 가까
이에 떨어졌다. 초관 하나를 날려 버리고 땅에 격돌한 포환은 전공이 아쉽다
는 듯이 한 번 더 튕겨 올랐다.
다음 순간 그것은 이공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후려쳤다. 왕이 타는 말이라
고 해서 포환을 견뎌낼 재주가 있을 리 없다. 말다리가 여지없이 부러지자 이
공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어어억!”
“전하!”
장수들은 황급히 다가와 왕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까지도 도망가지 않은 것은
조선군 사상 유례가 드문 일로, 과연 금군이라 자칭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이미 낙마의 충격 때문에 혼절해 있었다. 경험 많은 장수
들은 왕이 더 이상 말을 타거나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다
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금군은 기절한 왕을 말에 싣고 비단을 찢어 기수에게 동여맸다. 세 번째 탄이
날아오기 전에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그 손길은 실로 빨랐다. 그러
는 동안 한 소대는 미끼 역할을 자처하며 북쪽으로 맹렬히 달려 나아갔다.
그레테 자작도 그 움직임에 유의하여 일단 사격을 멈추었다. 그래서 이공은
삼십여 명 정도 되는 금군의 보호를 받으며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공의 의도 –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려’ 했던 원래의 뜻은 사격
두 번 만에 산산이 박살 난 뒤였다. 나폴레옹의 명대신 조제프 푸셰는 이공의
자기 합리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독재자는 품위 있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럽게 도망쳐야 마땅했다.
조선국 예조 판서 박윤수는 이공의 임시 정부에서 사실상 의정부의 역할을 도
맡고 있었다. 왕이 출정한 사이 그가 본진에 남아 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
니었다. 그래서 그는 말도 안 되는 내전에 따라갔다가 대포나 맞는 불운을 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윤수는 자기가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전
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끌려 온 왕대비 김씨는 박윤수를 불러 꿇어앉혀 놓고 엄하
게 말했다.
“내가 아녀자로서 군국기무에 대해 아는 척하지는 않겠다. 뭘 모르는 사람처
럼 떠들어서 그대들이 내 말을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노라. 다
만 왕실의 어른으로서, 종통을 지키는 사명은 주상께서 아니 계신 지금 내가
전단해야 할 일이다.
원자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고 잠에 들지 못하여 이대로라면 열성조에게 망
극한 일도 없다고 장담하기 힘든데, 그대들은 수차례 내린 하교를 전혀 못 들
은 척하고 있으니 군주가 없는 틈에 찬역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왕이 없는 틈에, 지금까지는 피랍자에 가까웠던 내명부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왕대비 김씨는 수차례 가마를 남쪽으로 돌리라고 명했다. 원자가 더 이상 군
중에서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는 이유였다.
왕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하느냐며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김씨는 그럴 줄 알았
다는 표정으로 ‘그렇다면 황해도까지 내려가 제대로 된 관사에 묵어야 한다’
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신하들은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
았다.
박윤수가 선택한 전략은, 그냥 무시하고 왕의 귀환까지 버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사흘이 다 되도록 파발 하나 없었다. 결국 박윤수는 총대를 메고
대비 앞에 소환되어야 했다.
만약 왕비 김씨가 같은 말을 했다면 박윤수는 김씨를 티 안 나게 조롱하며 무
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역적 김조순의 딸이니까.
그러나 왕대비는 다르다. 그녀는 안동 김씨가 아닌 청풍 김씨이고, 정조의 부
인이며, 왕보다도 높은 사람이다.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왕대비 전하의 하교를 저희가 감히 기망하려는
것이 아니옵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대역적 김조순의 마수가 뻗칠까 우려되
어…….”
“김조순은 서울을 지키고 있을 뿐인데 황해도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박윤수는 엎드린 채 이를 빠득 갈았다. 황해 병마절도사 안숙은 비록 왕을 모
시겠다고 형식상 청하기는 했으나, 왕이 합류를 거절하자 순순히 임지에 남았다.
별로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쯤 김조순에게 회유되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안숙이 김조순에게 회유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찬
가지라는 것이다. 금군보다는 황해도 군세가 훨씬 많고, 보급의 의존을 생각
하면 왕은 안숙의 손에 들어가는 꼴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목숨 바쳐 따라온 자신들이 아니라 웬 엉뚱한 놈의 손에 정병이 쥐
어지는 셈이다. 박윤수 파벌의 조신들은 그 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왕대비 김씨 또한 그 모든 것을 알고 말하는 게 틀림없다. 김조순과
이미 같은 하늘을 일 수 없는 이공파(派) 신하들과는 다르게, 안숙에게로 실
권이 넘어가면 최소한 김조순과 타협할 여지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 타협에는, 이를테면 왕실 어른으로서 이병원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대신
여생의 안전을 보장받는다거나 하는 일이 포함된다.
홍경래와 정약용에 이어, 이제 모친에다가 부인까지 모조리 이공을 포기했다.
왕대비 김씨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중궁전과 내시, 궁인들만이라도 데리고 남쪽으로 가
겠다. 그대들이 신하 된 자로서 왕실을 이토록 업신여기니 어디 막을 테면 막
아 보라. 이 늙은이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나라도 계사를 힘써 지키다
죽어 구천에 계신 열성조를 떳떳이 뵙겠노라!”
이젠 협박이다. 박윤수는 명을 따르겠다며, 다만 말미를 좀 주십사 간청했으
나 그런 시간 벌이용 잔수작은 대비에게도 가소로운 것이었다.
박윤수에게는 대비를 가두어 천하의 역적으로 오명을 쓰거나, 아니면 대비를
보내고 나서 돌아온 왕에게 목을 길게 늘여 빼는 것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다.
결국 박윤수는 후자를 택했다. 박윤수의 유일한 승점은 왕이 총애하는 후궁
박씨를 그 행렬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만약 박씨까지 뺏겨 왕의 ‘여벌 후손’
을 완전히 없애고 인질을 새로 만든다면 박윤수는 왕이 돌아오자마자 정말 죽
는다.
박윤수는 이만하면 잘 막았다며 자신을 위로했다. 여인들을 태운 가마꾼이 가
는 걸음이라고 해 봐야 소걸음 이하. 왕이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다시 잡아 올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안 그래도 없는 병사 중 다시 반을 갈라 대비의 가마를 호위케
했다. 왕이 파발 하나만 보내면, 그들이 ‘정중히’ 대비를 도로 모셔올 것이
다. 그때의 행선지는 진중에 비하면 한없이 아늑한 평양성이 될 것이므로 대
비도 더 불평할 수는 없으리라.
결과적으로 반쪽이 난 이공 본영의 병사는 이제 백 명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대비의 가마를 호위하는 인원도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
을 의미했다.
이는 박윤수가 무시하고 있었던 어떤 집단에게 기묘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곡산 민란의 지도자 심낙화는 네 개로 늘어난 궤짝을 옆에 두고 동료들과 의
논했다.
“갔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났으며
또 사흘 뒤에는 한 무리가 이 남쪽으로 오고 있다 하는군.”
“토벌군인가!”
사람들이 수군대자 심낙화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아니, 무슨 가마를 호위하는 모양이야. 귀한 사람들이 어디 유막 생활을 오
래 배겨나겠는가. 지쳐서 서울로 돌아가려는 것이겠지.”
김조순의 일을 전혀 모르는 민간인들의 순박한 예측이었으나 의외로 핵심은
사실에 닿아 있었다. 심낙화는 열정적으로 손을 저었다.
“많아 보이지만 임금이 거기 있는 것도 아니요, 태반은 궁인과 내시들이고 병
졸은 백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하더군. 이제 우리 양곡도 다 떨어져 가니, 무
슨 수를 내긴 해야 하네. 거기에는 보나 마나 그…… 뭐라고 하나. 임금의 처자
식이 타고 있지 않겠는가. 이대로 들이쳐 그들을 모두 사로잡는 건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경기하듯 펄쩍 뛰어올랐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삼족이 멸해지고 고
을은 통째로 못이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심낙화는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제 엉겁결에 수령 얼굴이나
후려 패던 폭도는 거기에 없었다. 심낙화는 이미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어차피 이쪽으로 오는 이상 마주칠 수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가 이제 와서
길가에 절하며 가마를 그냥 보내 주면 나중에 사죄를 면하기라도 하겠는가?
북쪽으로 갔던 왕을 진인이 도술로 격퇴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우리
는 다 죽어. 그럴 때 왕의 처자가 우리 손에 있으면 말하기 편하겠지.”
지금까지 조선에 이런 무뢰한은 없었다. 대도 홍길동이나 임꺽정이를 앉혀 놓
고 물어봐도 고개를 저을 악행이다. 그러나 곡산 부민들은 자기 목숨 살길이
있다는 소식에 귀를 쫑긋했다.
촌민 하나가 주저하며 손을 들었다.
“그, 병졸이 백 명이라면 우리의 사분지 일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금군 아닌
가.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칠 텐데.”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큰소리치고 나선 길 아니야!
이제 와서 겁먹은 겐가?”
심낙화가 거세게 나무라자 촌민은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심낙화는 그런 동료들을 위로하듯이 계책을 내놓았다.
“내가 알기로 조총은 미리 화승에 불붙여두고 화약을 넣지 않으면 쏠 수가 없
네. 갑자기 쳐서 정신없게 만들면 총은 안 맞는다는 거야. 여기 포수 몇 명
있지? 좋아. 내가 책을 좀 읽었는데 옛날부터 매복계(埋伏計)라는 것을 쓰면
못 이기는 싸움이 없다고 하네. 우리가 며칠이나 여기 죽치고 있었으니 주변
길은 다 알지. 여기 풀숲에 숨어 있다가…….”
그저 억울하게 돈 뺏기고 죽기 싫어서 일어난 사람들의 봉기가 어느새 왕족
납치 모의로 발전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 곡산 부민들은 시준과도 비교
가 안 되는 급진적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작가의 말
1. 푸셰가 인용한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대사입니다. 왕을 살해한 뒤 손에 계속하여 그의 피가 묻어 있는 환상과 절망에 시달리며 외친 말이죠. 그래서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로 표현되었습니다. 넵튠은 이 경우 해왕성이 아니라(셰익스피어 시대에는 당연히 해왕성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거대한 대양을 말합니다.
여담으로, 요즘 영미권 어느 화장실에 붙어 있는 '손을 씻을 때는 정당한 왕의 피가 묻은 손을 씻듯 하라'는 유머성 권고문이 인터넷에 돌았었죠. 독자분들도 코로나에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 왕실 사람들을 지칭할 때 '마마'라는 호칭이 사극에 많이 나오는데, 당대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말이고 입말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적어도 실록에서는, 그러니까 정부 공식 기록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실록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표현인 '왕대비 전하'를 채용했습니다.
28. 기호지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