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93화 (93/284)

93화

27. 붉은 깃발(1)

금위대장 박종경은 칼이고 말고삐고 다 놓치고 말에서 떨어졌다.

코가 정통으로 으스러지고 앞니가 다 박살 난 것은 물론, 떨어지면서 허리까

지 다치는 바람에 반격은커녕 고함조차 지를 수 없었다.

시준은 정말 곡예하는 재주꾼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땅을 굴러 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벗어났다.

공중에서 우아하게 몸을 뒤집어 빈 말안장에 내려앉는 만화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지금 놀라서 날뛰고 있는 박종경의 말에게 살해당할 테니까.

사실 막대기도 충분히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 시준이 말 위에 있는 박종경을

막대기로 찌르거나 하지 않고 굳이 플라잉 드롭킥 같은 프로레슬링에서나 나

올 법한 기술을 전장에서 발휘한 까닭은, 사실 프로레슬링의 목적과 일치했다.

시준의 ‘초식’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죽당원들은 돌아가

서 ‘진인이 도술로 공중에 떠서 허공을 밟으며 날아가 적장을 격살했다’고 떠

들어댈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그런데 당원들은 몰라도 지금 금위영 군사들은 거기 이목이 쏠리면 안 된다.

적은 시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시준이 노린 바였다.

이제초는 군관들이 멍하니 있는 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쑤셔 버려!”

이 십승대 인원들은 모두 계속된 착취에 지쳐 정감록 신앙에 깊이 감화된 자

들이다. 융복이며 환도 따위는 이들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증오와 살해욕만을 부른다는 의미다.

김개동의 오죽당원이 지유와 김유근을 둘러싸 보호하는 동안, 십승대 대원들

은 모두 칼이며 철퇴를 들고 관군에게 서슴없이 달려들었다.

“이, 이 상놈들이 미쳤느냐! 으어억!”

“양반놈의 뱃구레도 칼날 술술 잘 들어가는구만 그래. 거 씨발놈이 아주 끝까

지 쌍놈 쌍놈 지랄일세. 듣는 쌍놈 기분 개좆같잖아.”

평안도 민병대를 자기 심부름꾼 후보에서 죽고 죽여야 할 적으로 바꾸는 데에

는 노련한 군관들이라 할지라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인간관계 재설정이 발생시킨 그 간극을 쇠붙이가 잔인하게 파고들자, 대부분

의 관군은 저항도 못 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기습에 막싸움 같은 분위기라서 장절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주목하는 사람조

차 많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박종경은 준열하게 역적을 꾸짖지 못했고 민병

대원들 중에서도 새삼 혁명의 대의로 목에 핏대를 세우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준의 드롭킥에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의미가 있었다.

평안도 민병대가 드디어 직접적으로 왕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사방에서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졌지만 시준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더 참

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시준은 지유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시준은 그녀의 등에서 나무처럼 돋아난 화살을 향해 손을 뻗다가 간신히 자신

을 억제했다. 시준은 귀를 기울여 지유의 입과 코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

었다.

‘숨소리가 이상하다!’

봄마다 지독한 알레르기성 천식에 시달리던 동료가 기침 끝에 내던 숨소리와

비슷했다.

시준은 주머니칼로 지유의 옷을 조심스럽게 탔다. 짧은 대우전은 화살촉이 보

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가 있었다. 시준은 절망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어쩌지? 어쨌든 당장 깨끗한 곳으로 날라서……. 수술?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사가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제쳐놓고라도, 일단 시준은 의사

가 아니다.

절대 함부로 시도할 수 없다. 죽든 외팔이가 되든 상관없었던 양시위 때하고

는 차원이 다르다.

숨소리나 화살의 모양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촉이 허파까지 침범했을 수도 있

다. 공황 상태에서 허우적대던 시준은 간신히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

는 집단을 떠올렸다.

‘프랑스군! 그래. 분명히 군의가 있었다!’

해군 수병 집단에 군의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물론 19세기 초의 의학

이란 게 현대의 눈으로 보면 주술인지 의술인지 분간이 안 가기는 하지만, 시

준이 옆에서 치명적인 사항 – 손을 안 씻는다던가, 커피 저을 때 썼던 수술칼

로 사람을 짼다던가 – 만 막아 주면 될 것도 같았다.

시준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괴할 만큼 또렷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오죽당주로서의 명령이다. 이곳의 지휘는 소대장에게 맡기겠네.”

“예. 회장. 어떻게 하면 되오리까?”

김개동은 김유근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회장을 보고 좀 의아했지만, 알아서

챙기라는 뜻으로 지레짐작하고 몇 명을 시켜 김유근을 부축하게 했다. 정약용

이 평한 대로 그는 유능한 장교였다.

시준의 입술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건조한 말이 새어 나왔다.

“왕은 지금 평양 부민을 가리지 않고 죽일 심산이다.”

현대적 어휘로 표현할 능력은 없지만, 그것이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꾸며낸

냉정함이라는 것은 김개동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준은 마음 가는 대로 명령할 수도 있었다. 관군을 전부 부모도 못 알아보게

난도질하고, 창자를 꺼내서 목을 매달며, 대가리를 장창의 수만큼 끝에 꽂아

까마귀와 까치에게 성대히 대접하라고.

저 뒤의 왕을 천민처럼 머리는 봉두난발이 되고 옷은 다 해질 정도로 짓밟아

서 끌고 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성공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시준의 휘하 군대는 그 명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

다. 정치국 회의에서부터 시준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준은 분노에 휩싸여 장렬히 돌진하고 산화하는 비극적 영웅에는 취

향이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지금 관군을 난도질하고 있는 십승대원처럼

자발적인 참여자가 필요했다.

뜨거운 분노는 차가운 이성으로 담금질 되었다. 시준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날

카로운 창끝으로 벼려졌다. 시준은 되물었다.

“소대장 동지. 왕의 칼에 죽겠는가, 아니면 왕을 찔러 죽이겠는가? 그대는 지

금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김개동은 이를 드러내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지요. 소인에게 일임하신다 하시니, 바로 군기(軍旗)를 올

리겠소이다.”

그들이 가진 깃발은 왕의 군대와 마주쳤을 때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백기뿐이었다. 시준은 그것을 어떻게 군기로 쓴다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일

임했기’ 때문이다.

시준은 지금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머지는 누구한테든지 위임하면

되었다. 협동회는 독재정부가 아니며, 어떤 자라도 협동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

시준은 지유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십여 명의 호위와 함께 뒤로 걸음을

옮겼다. 지유의 상처가 악화되어서는 안 되니 달릴 수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김광룡은 본대 쪽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부교에 꾸물꾸물 몰려 있는 ‘천한 것’들, 그러니까 평안도 민병대를 내쫓고

대동강에 빠진 홍경래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준은 주의가 다른

데 쏠린 김광룡의 옆을 다시 한번 태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주가 무사히 부교로 돌아갔을 때, 이제초와 김개동은 시준이 두고

간 창대에 큰 백기를 묶어 우뚝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하얗지 않았다.

지금은 모가지가 없어진 금위대장과 여러 군관의 피로 흠뻑 젖어, 마치 타오

르는 듯한 적기(赤旗)였다.

붉은 깃발이 군호에 쓰인 이유는 특정한 사상과는 전혀 관계없다. 혁명기의

프랑스인이 그러했듯, 그저 눈에 잘 띄고 무엇보다 만들기 쉬웠기 때문이다.

차형기는 민병대의 깃발로 검은색을 원했으나, 다른 위원들은 검은색을 상징

으로 삼는 오죽당의 지분이 너무 과해지는 것이 마땅찮았다. 결국 차형기 또

한 압도적인 표차로 지지된 붉은색에 찬성해야 했다.

게다가 붉은색은 인간의 감정을 흥분시킨다. 그 붉은색이 바로 그 흥분의 고

대적 연원, 인간의 피라면 더욱 그렇다.

무력위원회 위원장 차형기는 이 시점에서 배다리까지 나와 있었다. 마침 들어

오는 홍득주며 시준, 지유, 그리고 김유근 등을 부드럽게 뒤로 넘길 수 있었

던 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

그 차형기에게 홍총각이 와서 급히 알렸다.

“위원장, 지금 적기가 올라왔소이다!”

“과연 회장의 말씀대로군!”

차형기는 홍총각에게 망원경을 받아 들어 직접 보았다. 시준이 지유를 데리고

지나가면서 말한 대로 뭔가를 뚝뚝 떨어뜨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김개동이나 이제초는 금위대장 박종경이 있던 지휘부 쪽의 군사밖에 다스릴

수 없다. 지금 배다리 근처에 몰려 있는 나머지 수백 명의 민병대를 통괄하려

면 차형기가 있어야 한다.

홍경래군이 사라져 버린 지금, 새삼 군을 통괄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그것

은 지금부터 한 가지 큰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형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 저 깃발을 보아라!”

그는 이제 장사치들의 음습한 목적에 따라 야밤에 누구 뒤통수 내리치거나 애

먼 사람 끌고 가 두들겨 패던 깡패가 아니다.

왕이 내팽개친 평안도 인민을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지지받는 자랑스러운 근

문소 정치국, 그리고 그 명령을 받는 무력위원회의 위원장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지금 평안도 사람 전체의 말이었다. 차형기는 자기도 모르

는 사이 ‘정당한 권력’의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역사의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선 사람들은 시준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정치적 인간’이 되어갔다. 회장 정시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다.

푸셰의 말처럼 질료는 그 안에 형상을 내재하고 있다.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

미개인이란 없다. 정치는 귀족들의 속임수와 달리 고귀한 혈통이나 준수한 교

육을 자격으로 갖춰야 하는 전문적 노동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전통

인 모듬살이의 총체이므로.

차형기는 다시 외쳤다.

“모두 저 깃발을 보아라! 저 붉은 깃발이 보이느냐! 관군이 회장을 쳤다! 배

신하여 협동회를 들이쳤다는 말이다!”

차형기도 이쯤 되면 거짓 선동에 꽤 능숙해졌다. 과연 모든 민병대원이 술렁

였다. 차형기는 과거 시준이 모아 왔던 금점 노동자들에게 연설했을 때를 상

기하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이 회장이 내어주는 밥을 먹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저곳에

동지들이 있다! 관군이 무어가 대수냐, 네놈들 중 관군이 뭘 도와준 적 있다

는 놈은 한번 나서 보아라!

없겠지? 없는 게 당연하지! 저놈들은 왜놈이나 되놈 앞에서는 항상 도망치면

서, 백성들 앞에서만 용감했다! 싸우는 재주는 없고 빼앗는 재주만 있었지!

나중에 슬쩍 들어와서 우리 먹을 밥이나 훔쳐 가려는 관군에게 회장과 동지들

이 죽도록 내버려 둘 참이냐!”

회장은 방금 저 배다리를 지나 후퇴했다. 그건 차형기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

는 사람 전부가 안다. 그러나 아까부터 계속된 전장의 흥분, 그리고 붉은 깃

발, 거기에 더해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차형기의 고함은 현실마저 변경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장이 관군 안에 고립되어, 비겁한 배신자 관군의 공격 때문

에 위기에 처했다고 믿게 되었다. 이미 평양에 파다한 소문대로, 배반의 명수

홍경래를 측근 삼은 국왕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이제 저 멀리서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있는 어기(御旗)는 존경의 목적지가 아

니라 증오의 목적지가 되었다.

차형기는 정치국 회의 때 쓰던 말로 힘있게 외쳤다.

“평안도 인민과 정치국에게 위임받은 무력위원회의 이름으로! 저 영변부 때처

럼 동지들을 구해야 한다! 관군이라는 이름만 쓴 저 도적 떼를 전부 죽여라!”

평안도 민병대가 조선군만큼 전통이 있지는 않다. 차형기의 지시는 일사불란

한 깃발과 음악으로 바뀌어 퍼져 나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 민병대는 부교 주위에 꽤 밀도 높게 모여 있었으며, 인간의 감정

은 때로 어떤 신호보다도 빠르다. 그것은 음파처럼 민병대원을 휩쓸었다.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백성이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에 불쾌해진 김광

룡은 차형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기 시야를 덮

치는 솥뚜껑만 한 손에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헉!”

김광룡이 뭐라고 꾸짖기도 전에, 홍총각은 김광룡의 양 볼을 한 손으로 움켜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김광룡의 다리 사이에 나머지 한 팔을 쑥 집어넣

고 용을 썼다.

그러자 놀랍게도 건장한 군관이 허공에 어린아이처럼 떠서 버둥거리게 되었

다. 홍총각은 금위영 별장을 전혀 망설임 없이 부교에 메쳐 버렸다.

꽝!

무서운 힘 때문에 김광룡의 머리는 아예 판자를 뚫고 들어갔다. 사람이 산 채

로 거꾸로 처박혀 팔다리만 떠는 그 광경은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더욱 무

시무시했다. 금위영은 몇 초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유일의 정예군. 곧 몇몇 용감한 군관이 삼척검이나 왜도

(倭刀)를 뽑아 들었다. 그대로 바보처럼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이냐!”

“저 역적을 죽여라!”

하지만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들이 칼을 뽑는 순간, 그

때만 기다리던 차형기가 위엄 있게 손을 내렸다.

“방포하라! 말 탄 놈은 말 대가리를 노려!”

영국제 브라운 배스 머스킷과 조선 조총이 일제히 폭음을 울렸다.

이 시대에서 총병의 위치는 보병이라기보다는 포병에 가깝게 이해해야 한다.

포병에게 방열과 관측이 필요하듯이, 상당한 시간이 없으면 쏠 수 없는 것이

총이다.

금위영 군사들이 당장 쓸 수 있는 활이나 창칼을 꺼낸 것도 당연했다. 그들에

게는 계몽군주 이공이 백성들 굶겨 죽여가며 지급한 플린트락 머스킷을 쓸 시

간이 없었다.

반대로 평안도 민병대는 처음에야 무작정 달려 나왔지만 지금은 사격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여태까지도 멍청히 총 들고 서 있기만 하기에는

그들이 이제까지 받은 프랑스군 전통의 얼차려 ‘엉덩이 걷어차기’가 너무나

강렬했다.

이 거리에서 머스킷의 낮은 명중률을 논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금위영

군사들은 삽시간에 피를 뿌리며 전멸했다.

평안도 민병대에게 금군과 같은 군율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율 모자란 폭도가 정규군보다 나은 점이 단 한 가지 있는데, 분위기

만 타면 때때로 정규군보다 더한 폭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 지역 출신 부대의 통일적 지휘 체계가 미비하다는 무력위원회의 단

점은 이러한 기습 난전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민병대원은 원래가 다들 부모 가슴 치게 하는 불효자에 고을의 골칫거리였던

깡패 출신이 대부분이다. 좀 멀리 있어서 차형기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할지라

도 그들은 ‘눈치’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처신’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금위영 관군은 살아 있는 맹수를 마주

한 듯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평안도 민병대는 그 어떤 징조도, 북이나 깃발 혹은 징 소리도 울리지 않은

채 갑자기 습격했다. 지휘부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적의 의도도 짐작할 수

없었다.

또한 지휘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사항은 아군 쪽에도 작용했다. 그들은

대체 금위대장은 무얼 하고 있는지 비난하며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후군에서 백여 명 정도를 데리고 있던 이공 역시 죽어가는 금군과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금위대장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이공의 미천한 전술안에도 상황은 다 보였다(망원경이 큰 몫을 했다). 저 미

친 평안도 놈들이 갑자기 관군을 습격하고 있었다.

이공은 급히 인질을 떠올렸으나, 바로 그 인질을 습격한 게 관군이라는 사실

까지 같이 떠오르자 힘겹게 상황을 꿰어맞출 수 있었다.

이공은 세상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신음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군주에게 반기를 든다는…… 말이냐!”

이공이 예상한 최악의 상황은 난전 중 홍득주가 죽어 시준이 자기에게 다소

불편한 태도를 내비치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자신의 능란한 정치술을 발휘하

여 홍경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위엄과 온정으로 잘 달래어 포섭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정치술보다는 생존술이 더 시급해 보였다.

백성이 군을 휘몰아 왕에게 돌진한다는 이 전무후무한 상황 앞에서, 이공은

문득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그는 지금 백여 명밖에 안 되는 군세와 함께 저 광기의 무리를 마주하고 있다.

도망친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이공이 아무리 군사에 무지해도 조선

군의 전적은 잘 알고 있다. 그가 지금 도주의 낌새라도 보이는 순간, 금군이

고 뭐고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공은 힘겹게 명령을 꺼냈다.

“장수된 자가 실기하여 그릇된 일을 행하였구나. 본영(本營)으로 돌아가서 태

세를 가다듬는다! 대오를 흐트러뜨리는 자는 참할 것이다!”

이공은 장졸들이 ‘도망친다’와 ‘돌아간다’는 단어 사이의 사실상의 유사성을

깨닫기 전에 참수를 언급하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굳이 그런 것에 겁먹은 건 아니지만 – 조선군은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죽

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 본영이라는 말은 장수들에게 본진이 있음을

상기하게 했다. 거기에는 보군 약간이나마 군사가 남아 있다.

게다가 일부 기억력 좋은 사람들은 아직 황해도 병마절도사의 군세가 더 남쪽

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물러나 ‘태세를 가다듬는다’면 다시

한번 해볼 만했다. 곧 금위영 잔존 병력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조제프 푸셰는 이때 그레테 자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포병대에 와 있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푸셰는 그 자세 그대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한 구절을 흥얼

거렸다.

“Tremblez, tyrans et vous perfides! L‘opprobre de tous les partis[떨지어

다. 너 비겁한 독재자여, 모든 정당의 수치들이여]!”

공화파보다는 왕당파라 할 수 있는 그레테 자작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

러나 그가 아니라도, 이 제정 시대에서조차 혁명에 경도된 프랑스인은 여전히

많았다.

곧 주위에서 장교와 병사들이 나직하게 화답했다.

“Tremblez! vos projets parricides, Vont enfin recevoir leurs prix[떨지어

다. 너희의 패륜 배덕한 수작은 마침내 대가를 치르리니]!”

꼭 사상적 동기에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인에게는 고향의 노래였으며,

아련한 향수였다. 그들은 외국에 너무 오래 있었다.

병사들이 그 구절을 한 번 더 반복할 때까지 기다린 푸셰는 망원경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좋다, 제군. 이제 때가 왔다. 조선 인민 자치회(근문소)의 위원으로서가 아

니라 프랑스 원정함대의 총지휘관으로서 오트란토 공 조제프 푸셰가 말한다.”

그레테 자작이 부동자세를 취하자 푸셰는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정시준은 들어갔는가?”

“예. 명령대로 군의들을 딸려 주었습니다.”

“좋다.”

푸셰는 병사들 앞을 오락가락하며 말했다.

“그간 외국에서 고생이 많았다. 본관은 여러분을 마카오에서 구걸하고 있는

포르투갈 놈들 꼴로 만들지 않도록 부단하게 노력해 왔다. 여태까지 낯선 신

병들 엉덩이 걷어차면서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이야말로 상

황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우리의 입장을 역전시킬 때다.”

프랑스군은 모두 눈을 빛내며 푸셰를 쳐다보았다. 조제프 푸셰는 프랑스인이

라면 거절할 리가 없는 달콤한 선언을 속삭였다.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정의를 배반한 폭군의 운명은 오늘 우리가 끝낸다.”

작가의 말

1.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의사들이 손이나 의료도구를 전혀 씻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입니다. 최초로 의료 위생을 주장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아직 안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과학이 아니라 주술에 의지한다며 배척받고 경멸 속에서 죽었지요. 수술에 썼던 도구로 (자기 마실) 커피나 술을 젓다가 그걸 다시 수술에 썼다는 것도 과장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2. 작중에서도 한번 나온 것 같지만 조선은 무기의 채용에 대해서 유연했습니다. 작중에 금군이 왜도를 뽑았다는 대목이 있는데 조선은 실제로 조총을 알자마자 대단히 빨리 도입하려고 노력했으며 일본도 역시 그 예리함을 높이 쳐서 군중의 상등품 무기로 많이 사오거나 비축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언급될 것 같은데, 조선은 군사나 과학기술에 무슨 원수가 져서 천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죠. 대표적으로 수학을 보자면, 조선이나 동아시아는 수학과 과학이 철저하게 실용적으로'만' 발달했기에 실용 용도, 그러니까 관료제하의 통치 보조 이상으로 발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27. 붉은 깃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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