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26. 파국(3)
이 시점에서 시준이 왜 뛰쳐나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똑같이 망원경으로 전
체를 조망하고 있던 조제프 푸셰 혼자뿐이었다. 그는 날카롭게 웃었다.
“역설[paradoxe], 역설! 혁명은 더할 나위 없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지
만, 대부분의 경우 그 시작은 자의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지. 어떻게 보면
이것보다 더 수동적인 행위도 없어! 인생,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프랑스어로 중얼거린 그의 말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그레테 자작을 포함하
여 아무도 듣지 못했다.
푸셰는 그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는 대신 옆에 있는 무력위원장 차형기
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시준이 죽을 텐데.”
정신이 번쩍 든 차형기는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 나갔다.
“네놈들은 지금 머저리처럼 서서 무얼 하느냐! 전부 뛰어나가! 야! 거기 등신
새끼야! 지금 총알 재고 있을 때냐! 일단 뛰어! 회장의 뒤를 따라라!”
이제초의 십승대가 먼저, 그리고 나머지 민병대들도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곧 부교가 제한 정원의 초과에 불평하듯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홍경래군 입장에서는 시준이 갑자기 군대 전부를 이끌고 돌격하는 꼴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홍총각은 조금 전 현장 지휘관다운 솜씨를 발휘했다. 기랑이 홍경래를 쏘자마
자 반사적으로 일제 사격을 명한 홍총각의 지시는 임기응변의 귀감이라 할 만
했다.
그러자마자 시준이 사람들을 헤치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추가 사격은 하지 못
했으나, 이미 반쯤 와해된 홍경래군은 시준의 일인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시준은 앞을 가로막았다
기보다는 갈 데가 없어서 거기 서 있는 홍경래군 한 명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
다. 그러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쏴 버렸다.
탕!
그놈이 쓰러지자 시준은 이제 재장전할 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권총을
내팽개쳤다. 그는 쓰러진 놈이 들고 있던 장창을 주워 휘둘렀다.
시준이 선택한 복지 혜택은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그의 안전제일주의
적 성향이 짙게 반영되어 있었다. 저개발국가나 분쟁지역에서도 그는 ‘안온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특전을 받았다.
21세기 기준으로도 세계는 폭력이 지배하는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넓
다. 시준의 강건한 심기체에는 문명의 혜택 없이 맨손, 혹은 간단한 도구로만
발휘할 수 있는 인류 호신술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
시준의 창은 최단 거리를 곧장 가로질렀다. 인중, 허벅지, 목을 찔린 홍경래
군이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무자비한 창질보다 판단력이 더 빨랐던 자들만
이 대동강에 몸을 던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밀지 마! 으아악!”
“저, 저리 비켜!”
여기에서 화려해 보이는 것은 시준의 팔과 창끝이었으나, 정말 큰 역할을 하
는 부분은 시준의 다리와 발이었다.
흔들리는 배다리 위에서, 군인은커녕 격투 전문가도 아닌 홍경래군은 균형을
잡는 것만도 벅찼다. 하지만 시준은 홀로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술에서 괜히 보법을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배다리 위를 평지 달
리듯 하는 시준은 곧 대동강을 건널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에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이공에게서 교위 직함 받은 최이륜
(崔爾崙)이 크게 성내며 나섰다.
“누군지 몰라도 어린놈이 방자하구나!”
최이륜도 원 역사에서는 양시위와 함께 홍경래군의 날개를 맡았을 만큼 용맹
한 사람이기는 하나, 지금 그가 발휘한 것은 창봉권술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
에서 수입한 권총을 들었다.
‘젠장!’
이미 권총을 버린 뒤라, 시준은 이를 악물고 창을 연달아 내찔렀다. 그러나
그것은 최이륜의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불운한 병사를 꿰뚫었을 뿐이었다.
방아쇠를 쥔 최이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한순간만 있으면 격철이
불꽃을 튀기고 그것은 총탄을 내쏘아 시준을 일격에 죽일 것이다.
그러나 진인 정시준이 300세의 수명을 여기서 마치는 일은 없었다.
탕!
최이륜의 뒤에 있던 부하들은, 왜 총소리가 났는데 자기편 대장이 거꾸러지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한 것은 시준 혼자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시준에 대한 오사나 흔들리는
발판 위에서의 어려운 장전 등의 요소를 전부 무시하고 정확한 사격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투 중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짓. 시준은 그제야 달
려 나올 때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던 기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랑의 어깨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화살에 부상 입은 사람은 지
유나 홍가장 식구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준은 조금 전, 다친 기랑을 한번 훔쳐보지도 않고 앞으로만 달렸다.
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과 상관없이 합리적으로 창을 내지르는 그의 머
릿속에서는 어깨를 스친 화살은 등에 맞은 화살보다 더 가벼운 부상이라는 논
리가 완성되었다.
시준 자신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논리였다.
김유근은 평양성에 있는 정시준이라는 녀석이 증오스러웠다. 연적(戀敵) -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 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저놈이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양부와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는구나!”
관군이 화살을 쏘자마자 평양성에서 도적들이 달려 나와 이쪽을 쳤다. 더 이
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김유근의 시야에서 보면 이건 완벽하기까지 한 금위
영과 평양 부민의 합동 공격이었다.
“하, 하아…….”
품 안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자 김유근은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북새통에서 김유근이 할 수 있는 것은 다친 지유를 안아 감싸는 것밖에 없
었다. 그에게는 시준과 같은 무용은커녕 응급처치에 관한 지식도 없었다.
처음에는 화살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화살에 손이 스치기만 해도 지유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뽑았
다면 지유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지도 모른다.
등에 화살 맞은 사람을 눕힐 수도 없어서, 지금은 엉성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은 김유근의 다리 위에 걸쳐진 듯한 자세였다.
“……!”
김유근은 지유가 입술을 달싹달싹 여닫는 것을 보고 귀를 기울였다. 사방에
비명이 가득차 있었지만 김유근에게 지유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김유근도 주위에서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만큼
흔한 이름이기도 했다. 김유근은 이름 한 번 진짜 상놈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유근은 다음 순간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깨달았다. 이젠 아무도
그를 아명으로 부르지 않아 여태까지 몰랐을 뿐이었다.
김유근은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평양성의 민병대
가 이제 없는 거나 다름없는 홍경래군을 무자비하게 분쇄하고 있었다.
김유근은 이 난전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는, 상당히 하기 힘든
선택을 했다. 그는 앉은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여기로 와! 여기다! 이 개 같은 새끼야. 네가 사내라면 당장에 여기로 달려
오라는 말이다!”
시준이 그 말을 들었는지는 불확실했다. 아무튼 김유근의 외침에 대답한 것은
시준이 아니었다. 김유근은 한 서른 발짝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여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짓밟으며 다가드는 금위영 마군을 보고 절망했다.
박종경과 금위영은 활을 쏘자마자 전력 질주로 돌입했다. 이 시점에서 홍경래
군 후미와 홍가장 식구들은 무질서하게 뒤섞여 버린 후였다.
지금 후미의 군세만을 돌려 금위영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고대의 명장이라도
불가능했다. 거기 있던 우군칙은 당연히 도주했고, 남아 있는 병사는 전투라
기보다 돌파의 대상이었다.
“이 역적놈들이 감히 주상 전하를 배반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선봉에 선 김광룡 등이 호기롭게 편곤과 칼을 내리찍었다. 절조 없는 대장 때
문에 정감록의 대의와 우국충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자기도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게 된 홍경래군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은 홍가장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위영은 애초에 그 둘을 구분
할 의사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벌써 대동강으로 몸을 날렸지만, 그 전에 다치거나 해서 못 움직이
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왕의 군대가 왕의 신민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군 즈음에서 따라오던 박종경은 홍경래에 버금갈 만한,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우선 목표를 발견하고 말고삐를 당겼다.
“이거, 역적의 씨가 아니신가.”
금위대장 박종경은 당연히 한성 최고의 명사 중 하나인 김유근의 얼굴을 알고
있다. 김유근은 지유를 조심스럽게 엎드리게 해 놓은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총포나 창칼은커녕 막대기 하나 가진 게 없고, 있다 해도 쓸 재주가 없었지만
김유근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금위대장을 마주 보았다.
“그래. 내가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이다. 임금이 나의 목에 천금을
걸었겠지. 나를 사로잡는 공을 네게 줄 테니, 억울한 인민들을 살상하지는 마라.”
어떤 면에서는 날 때부터 위에 있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이다. 그러나
박종경은 그런 김유근을 비웃었다.
“너 따위 역적이 지금 어디 감히 일군의 대장에게 흥정하며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냐. 남은 자가 무고한 양민인지 천벌 받을 역적인지는 네놈이 아니라 주
상 전하께서 처결하신다. 나는 앞을 가로막는 자 누구든지 처단하라는 어명을
받고 온 몸. 그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너희는 저놈과 저 밑의 계집아이
까지 전부 묶어서 끌고 가!”
“뭐라고!”
묶어서 끌고 갔다가는 맹세컨대 지유는 살아남지 못한다. 김유근은 자기가 무
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박종경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남과 주먹다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양반가 자제라지만 김유근은 그 순간 그야
말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하지만 지금은 설사 김유근이 시준이라고 해도 이기기가 어렵다. 상대는 노련
한 무장이며, 옆에 군사들까지 있는 데다 무엇보다 말을 타고 있다.
명색이 대장인만큼 박종경의 군마는 다른 군관들처럼 장사꾼에게 전세 낸 게
아니다. 그 자신의 것으로서 잘 훈련된 군마였다.
장수가 상대할 것도 없이 말이 김유근을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아무리 자그마
한 조선 말이라지만 그 체중에서 나오는 운동에너지는 인간의 돌진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
김유근은 다시 엉거주춤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박종경이 노
하여 칼을 뽑았다.
“이놈이 미쳤나!”
박종경이 휘두른 칼은 김유근의 목에서부터 가슴께가지 깊은 상처를 남겼다.
김유근은 옷을 피로 물들이며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쓰러졌다. 박종경은 말 위
에서 침을 뱉었다.
“격살물론이라지만 저자는 살려야 한다. 끌고 가서 싸매 둬라. 살갗 좀 베인
것 가지고 엄살 부리거든 좀 따끔하게 다스려도 된다.”
“저 계집애는 어떻게 할깝쇼? 저놈이 아마 역적질하는 와중에 첩이라도 들인
모양인데요.”
박종경은 부하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싶었다. 박종경의 머리에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그다지 중요한 인사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아무리 봐도 그냥 상한의 여자다. 박종경은 자기 선에서 처리해도 되는
신분이라고 판단했다.
“같이 끌고 가. 김유근 저자만 잘 처치해 놓으면 저건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처럼 무도한 일을 성취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유
근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막 김유근과 지유를 향해 다가가려던 교
련관(敎鍊官) 하나가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영감. 저쪽에서 누가 오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시작하자마자 홍경래군의 앞뒤가 전부 붕괴했다. 따라서 양상은 오
래전에 전투가 아니라 산발적 학살로 바뀌었다.
금위영 군사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사람들을 두드려 잡거나 죽이고 있었다. 선
봉을 맡은 김광룡은 부교 쪽으로 나아갔으나, 기병이 쉽게 뛰어오를 만한 곳
이 아니라 아직 대동강을 건너지는 못했다.
그리고 홍경래군을 돌파한 시준은 오죽당의 정예를 이끈 채 그들을 지나쳤다.
이미 시준의 창은 수도 없는 인간을 쑤셔댄 끝에 슴베 부분이 부러져서 그냥
막대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적도 더 없었거니와, 새 무기를 마련하
겠다는 한가한 생각 따위는 할 틈이 없었다.
금위영 별장 김광룡 또한 시준을 막지 않았다. 시준의 활약을 그도 똑똑히 보
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시준을 뒤따라 줄줄이 몰려오는 군대가 자기 휘하보다
많아 보여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시준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홍득주네 집 찬모였던 족고만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창에 찔려 엎어진 채 생기 없는 눈을 반
쯤 뜨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곧 시준과 같이 전장을 헤매던 홍총각이 홍득주를 찾아냈다. 그는 평소 자랑
하는 힘으로 홍득주를 쌀가마니처럼 들쳐업고 달려왔다.
“장주님은 아직 숨이 붙어 계시오! 혼절하셨을 뿐이니 얼른 뒤로 실어 가야
하오이다!”
시준은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 홍득주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뒤에야 사람 몇 명을 붙여 홍득주를 후송하라는 지시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쳤기 때문에 전장의 범위는 인원수에 비해서 꽤 넓었
다. 시준은 무서운 집중력으로 아까 망원경에 비쳤던 곳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시준이 김유근의 모습을 포착했을 때와 김유근이 박종경에게 달려들며
고함을 질렀을 때는 거의 동시였다.
시준은 김유근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지유를, 그리고 김유근이 칼에 베여
쓰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시준은 자신의 관자놀이에서 커다란 맥박 같은 것이 한 번, 둔하게 울리는 느
낌을 받았다.
시준은 손톱 때문에 피가 배어 나오는 주먹을 다시 꽉 쥐고 외쳤다.
“오죽당은 날 따라와! 당주 대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뿔뿔이 흩어
져서 사람들을 구해내게 하시오!”
“알겠소이다. 회장!”
다른 일로 바빠 실제로 지휘하지 못했을 뿐, 오죽당의 원래 주인은 시준이다.
홍총각은 두말없이 물러가 후방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남은 당원들의
선봉에 선 자는 시준을 존경하는 소대장 김개동이었다.
그뿐만은 아니었다. 평양 민병대는 오죽당만이 공을 세우도록 놔두지 않았다.
용케도 십승대 무리 오십여 명을 이끌고 부랴부랴 달려온 이제초가 회장을 가
로막았다.
“진인, 아니 회장의 뜻은 이 사람만이 벌써 알았소이다! 바라건대 우리를 앞
장세워 주시오!”
시준은 놀라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달려오기만 했는데, 왕과 조정에 유감이 많은 이제초라면 지금의 시준과는 동
감할 만도 했다.
이미 시준은 더 이상 왕과 같이 놀아줄 생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선 수준에서는 잘 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민병대 병력을 이끌고
전혀 경계하지 않는 ‘적군’의 핵심부까지 파고든 지금은, 저 패왕 나폴레옹마
저도 바라마지 않을 최고의 상황이다.
그때쯤 해서 시준을 따라잡은 기랑 또한 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시준은 고
개를 저었다.
“넌 다쳤으니 움직이지 마라. 지금 바로 가서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고 뜨거
운 물에 삶은 면포를 동여 매야 한다.”
세균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기랑은 뜨악한 표정으로 시준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요란스러운 핑계까지 꾸며대며 나를 보내려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시준은 여태까지 기랑의 고집을 못 이기는 척하며 받아 주던 모든 태
도를 단호히 버리고 강하게 말했다.
“가라!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까는 대단했다마는, 요행을 계속 바랄
수는 없어. 다친 어깨가 한 치 떨리면 총알은 몇 뼘이 빗나가니 너는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다. 어서!”
시준은 그렇게 말하고 곧 달려갔다. 기랑은 그 모습을 보다가 걸음을 떼려 했
지만 더 가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아파서였다. 그러나 아픈 곳은 어깨의 상처는 아니었다.
조선에서 대대(大隊)라고 하면 통상 50명의 부대를 말한다. 지금 박종경의 주
위에 있는 군관과 병사들이 그 정도였다. 나머지는 사방에 분산되어 홍경래군
잔당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박종경의 경계가 게을렀다고는 할 수 없다. ‘전투’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평양부 민병이 적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당장 그들
은 홍경래군을 부교에서 막아섰고, 다리에 올라섰던 적도의 잔당을 흩어 버렸
다. 간단히 말하면 아군인 것이다.
사실 적군과 아군의 관계는 단순하고 알기 쉽다. 한쪽이 이길 때까지 죽고 죽
이면 그걸로 끝이다.
허나 아군끼리의 관계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래서 지금 여기를 향해 전력으
로 달려오는 시준의 모습은 박종경에게 조금 다르게 비쳤다.
“시준이라는 자가 듣던 대로 공명심이 있구나. 아무래도 가장 큰 역적이 있는
곳을 알아보고 찾아와 공을 주장하려는 모양이다. 주상 전하께서 바로 저 뒤
에 있으니 안달이 날 만도 하지.”
“태반이 패랭이나 쓴 불상놈들이군요. 어찌할까요? 총이라도 쏴서 쫓아 버리
오리까?”
“그럴 것까지야 있겠느냐. 내가 위엄 있게 꾸짖어 저들로 하여금 분수를 알게
하겠다. 그러지 않아도 홍 아무개라 하는 역도가 달아나 심부름할 자들이 없
었는데, 그 정도 공이면 상한들에게 적합할 게다.”
대장과 군관의 흥이 맞아떨어지는 대화의 끝은 한바탕 웃음소리였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질서이며 상하의 분수이다. 이제 헐떡대며 달
려오는 저놈들이 앞에 멈춰서서, 멍청히 숨을 몰아쉬다가 뭔가 한마디 주둥이
를 놀리려 할 때 벽력처럼 꾸짖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박종경은 맨 앞에서 뛰어오는 시준이 들고 있는
막대기를 내미는 것을 보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친 나머지 저걸 땅에 짚
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실제로 시준은 그것을 땅에 콱 찍었다. 그러나 지쳤다고 보기에는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시준은 그 막대기에 몸을 기대거나 하지 않았다. 시준은 그것을 두 손
으로 잡은 채 훌쩍 뛰었다. 주위의 군관들은 저놈이 상놈이라더니 땅재주 넘
는 재인이라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거의 열 보를 날아간 시준의 자세는 조선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허공에 뜬 두 다리는 한데 모아 옆으로 쭉 뻗고, 팽팽히 당겨진 몸은 강인한
두 팔에 의해 창대에 매달려 있었다.
시준은 그 장력이 최대치에 달한 순간 손을 놓았다.
그러자, 말 위에 있던 고귀한 종2품 금위대장 박종경의 얼굴 한가운데에 상놈
의 두 발뒤꿈치가 세차게 틀어박혔다.
작가의 말
1. 대대가 50명이라고 하는 것은 세종~세조 당시 오위진법 상의 규정으로, 후기 조선군의 공식 체제는 이와 다릅니다만 관성적으로 서술된 표현입니다.
2. 그동안 시준이가 당하고만 살아서 갑갑하셨던 분들은 체증 다 내리시고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하.. 광복절 월요일에도 연재는 됩니다. 시준이 시전한 것은 묘사된 대로 장대멀리뛰기 플라잉 드롭킥이 맞습니다.
27. 붉은 깃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