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91화 (91/284)

91화

26. 파국(2)

홍총각이라고 하면 의주 폭력단의 선봉이자 중국인 학살 사건의 주범. 홍경래

군 중 그 높은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드물었다. 많은 병사들이 주춤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홍경래가 악을 썼다.

“미쳤는가! 지금 뒤에서 금위영 군사가 쫓아오고 있다! 급히 건너고 배다리를

치우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말이다!”

“죽는 건 네놈들이지. 너 같은 역적과 우리를 같이 엮지 마라.”

“우리가 죽으면 이자들은 살 것 같은가!”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당장 장주님부터 먼저 보내면 간단하지. 왜,

아니면 다른 뜻이라도 품고 있느냐?”

홍가장 식구 중 일부가 홍총각을 알아보고 애타게 손을 휘둘렀다. 홍총각도

그것을 물론 보았으나 초조함을 꾹 참고 허세를 부렸다. 밥 먹고 하는 짓이

배신뿐인 저 홍경래 놈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준 또한, 당장 달려 나가고 싶은 발을 힘껏 억

눌러 단속했다. 시준의 입에 물린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 서 있던 병력은 약 600여 명. 무력위원회가 지금 평양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전 군세였다. 아직 조선인은 하기 힘든 초정밀 포격을 성공시키

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레테 자작 역시 나와 있었다.

시준은 이제 자기 손가락 첫 마디를 먹어 치울 것 같았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손가락을 타고 떨어졌다.

옆에서 기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그냥 다 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시준은 초조함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기랑은 그런 시준을 한참 보다가 고

개를 돌렸다.

그때 같이 있던 정약용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지금 어디까지나 근왕군의

행군에서 불가피하게 낙오된 처지의 관원이 되어, 의주 근문소에 이름 올렸던

향사 자격으로 여기 와 있었다.

정약용이 시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저편에서 먼지구름이 높게 이는 것을 보건대 필시 마군이다. 금위영이겠지.

그대로 홍경래를 받아주면 우리는 다 역적. 홍가장 사람들을 구해낸다 하더라

도 어차피 정법(正法)을 피할 수 없을 게야. 게다가 지금 홍경래 무리가 앞에

있고 부로인이 뒤에 있는 형세이니, 금위영 군사들이 들이쳤을 때 가장 먼저

죽는 것은 백성들이 된다.”

기랑도 그제야 깨달았다.

홍경래의 무리를 그냥 들이면, 홍경래의 의도는 완전히 성공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통째로 시준에게 건네주어 왕에게 불가피하게 적대하도록 만든다

는 홍경래의 자기 파멸적 동맹 구상이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홍가장 식구들을 앞으로 보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

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홍경래군을 들이닥칠 마군에 대한 방패로 쓰기 위해

서다.

그렇게 되면 싸운 건 홍경래군과 관군이 되고 왕과 시준은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마주하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래야 최종적으로 홍 장주와 지유가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홍경래라고 모를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경래는 계속 홍총각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의도야 뻔했다. 어차피 포

로들을 뒤에 둬서 당장 자기는 안 죽을 것이니, 누가 이길 것인지 배짱을 겨

뤄보자는 수작이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하고 치킨 레이스를 하자는 거냐?’

건실한 공무원이었던 시준은 그런 어리석은 짓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준은 손가락에서 입을 뗐다. 그러고는 기랑에게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금위영이 온다! 기랑아. 지금 달려서 오죽당 사람들과 합류해

라. 그리고 관군이 조금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 같을 때는…….”

“홍경래, 죽여?”

정약용은 시준이 망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준은 전혀 지체 없이 토

해내듯 외쳤다.

“죽여! 단발에!”

기랑은 두말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기랑이 총 메느라 묶어 놓은 끈을 잡아당

겨 풀자, 정약용은 옆에서 황급히 말렸다.

“자, 잠깐 기다려라. 기랑아. 그러면 눈 뒤집힌 부하 놈들이 장주님과 식구들

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뒤에서 관군이 들이닥치고 있는데 그런 한가한 짓을 할 여유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이 정론이기는 하다. 이대로 어영부영하다가 육박한 기마대에 의해 식구

들이 당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분풀이로 홍경래군을 들이쳐 다 죽여

보아야 무익한 짓이다.

홍 장주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 홍경래가 죽는다면 즉시 가족들을 이끌어

이쪽으로 달려올 수 있으리라. 확실히 시준의 방법은 가장 실패율이 낮은 도

박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질려 버릴 것 같았다. 저기에 가족이 있는 인간은 할 수 없

는 생각이다. 시준은 지금 범인을 초월한 이성으로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땅한 대안도 내놓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의 도덕적 안심을 위해 계

속해서 시준을 말렸다가는 아마 회장이 미쳐 버리는 꼴을 보아야만 할 터이다.

다행히 기랑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른다는 말이 아니

다. 기랑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잘 시준을 이해했기에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

이지 않았다.

기랑은 등에 멘 머스킷을 내려 한 바퀴 돌린 다음 탄환을 재었다. 정약용은

기랑이 못 본 사이 꽤 자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랑이 나직하게 말했다.

“관군, 오백 보 뒤까지 왔다. 갈게.”

그녀는 물에 떠서 뒤뚱거리는 부교 위를 능숙하게 달려갔다. 시준은 그 뒷모

습을 보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홍득주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믿고 있었던 바가

무너진 것에 대한 공포였다.

“방금 평양성에서 포를 놓은 게 아닌가? 시준이 우리를 버린 것인가!”

홍총각이 홍경래와 하고 있는 말싸움이 들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홍득

주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유가 재빠르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우리를 죽일 양이었다면 왜 대포를 한 발만 쏘았겠습니까?

대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병사들이 곧바로 들이쳤어야 합니다.”

“그, 그야 그렇다만, 그러면 우리를 빨리 들여보내면 될 일이지 왜 저렇게…….”

지유도 그 의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시준의 의도를 좋게 해석해

서 친절히 설명해 줄 정약용 같은 사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미에서 시

시각각 커지는 금군을 눈에 아로새기던 식구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평양성에만 가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차라리 나가서 엎드려 죄를 비는 게 어떻겠소이까?”

“아니, 강을 따라 옆으로 도망쳐야 하오!”

“말보다 빠를 수는 없어! 시준이 우리를 내치기로 하였다면 곧 잡혀 죽을 거야!”

“그럼 지금 당장 죽을 거냐!”

역시 대부분의 행동은 단 일각이라도 오래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사

람들은 대동강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강을 따라 달렸다.

계몽군주 이공은 그의 통치 중 몇몇 부분에서 개혁의 성과를 이루었다. 대부

분 나라 살림에 보탬이 안 되는 데다 시간도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을 뿐 이공

은 열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중 두 개만 꼽자면 단연 경찰과 군대였다. 수경포도청은 김조순의 소탕 작

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지하로 잠적하여 ‘역적’에게 대항하고 있었으며,

서양인과 교류한 성과 역시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이공은 그 성과 중 하나인 영길리 망원경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역시 나의 충신인 정시준이 저 역도를 가로막고 있구나. 실로 장판파의 장익

덕이 부럽지 않은 자로다. 내가 나중에 시준을 근시로 삼게 되면 저자는 마땅

히 장신(將臣)의 반열에 올려야 하겠다.”

상놈을 묘당에 들게 하다니 태조 이후 사백 년간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는 박종경은 아무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방면에서 금군의 위상을 회복할 만한 제안을 했다.

“형세를 보아하니 홍경래의 도당은 앞쪽에서 시준이 막고 있고, 뒤에는 부로

인들이 있습니다. 마침 잘 되었으니 모두 들이쳐 사로잡을까요?”

사실 들이칠 필요까지는 없다. 금군이 넓게 퍼져 에워싸기만 해도 모두 항복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박종경은 그렇게 되면 제일의 공이 시준에게 돌아

갈 것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공 역시 그러한 결말은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주기에 조금 모자란다

고 생각했다.

공은 꼭 아랫사람만 탐하는 것이 아니다. 이공 또한 시준이 다 해 놓은 밥에

숟가락만 얹어 평양성에 입성하면 자기 꼴이 우습게 되리라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금군이 돌격하면 반드시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인질은 죽게

되면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래서 이공은 고민에 빠졌다. 그 옆에서 박종경이 왕을 부추겼다.

“지금의 사세를 보면 시준은 틀림없이 군주의 은혜에 감읍하여, 평양 부민을

휘몰아 저 악적 홍경래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춰졌사오나,

다만 적도를 깨뜨리라는 한 소리 우레 같은 호령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이공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인생은 쓰라린 배신으로 점철되었다. 선왕의 유고 따위는 내다 버린 노

론의 대신들은 항상 자신을 업신여겼고, 그 필두에 자리한 김조순은 끝내 흉

심을 드러내어 이 나라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역적이 되었다.

이공이 기껏 파격적 은혜를 베푼 홍경래마저 배신했으며 귀양과 폐족에서 일

으켜 세워 준 정약용마저 도망쳤다. 설상가상으로 저 뒤쪽에는 황해도에서 온

것 같은 민초의 무리가 감히 왕을 모욕하고 있다.

이공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했을 뿐이다. 이유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신민들이 군주의 빛나는 영도에 잘

따라주기만 하였다면 틀림없이 이룰 수 있었던 사업이었다.

믿었던 모든 것에 배신당했다. 이제는 부인조차 믿을 수 없었다. 김조순의 너

무나 빠른 대응에 왕비 김씨가 소식을 흘렸음을 알아챈 이공은 몇 차례나 왕

비를 죽이려 했지만 신하들의 목숨 건 만류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오직 그들만이, 국초부터 천대받던 평안도의 백성들

만이 왕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시준의 공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질 따위에 집착했던 자신

이 어리석었다.

설사 자기 때문에 인질이 다 죽는다 한들, 만고충신 정시준이라면 정당한 왕

앞에 마땅한 인륜인 충의를 바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지금 가족조차 아랑

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반란군을 가로막은 것이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김유근 및 김조순과 연결하여 앞으로 화근이 될 가능성이

있는 홍득주의 식솔을 많이 남겨 둘 이유는 없다.

이공은 망원경을 힘껏 쥐었다.

“그렇다. 그대의 말이 옳다. 현인끼리는 거문고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통하는

법[知音, 『열자(列子)』]. 시준의 저 강고한 충의를 어찌 내가 알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다만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는 것은 인군의 할 바가 아니요, 시준에게도 아버

지를 죽게 했다는 오명을 쓰게 할 수 없다. 홍득주는 반드시 사로잡아라. 그

리고 만약 그 밖의 누구든지 역도 홍경래를 위해 관군을 막아서거든 격살물론

(擊殺勿論, 죽여도 죄를 묻지 않음)이다.”

홍득주 빼고는 다 죽이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조선에는 연인이라는 관념이 현

대에 비해 희박했고, 시준은 미혼이라고 들었으므로 이공이 그 외의 사람에게

신경 쓸 여지는 없었다.

이공이 호령했다.

“내가 몸소 앞장서 말을 달려 나가고 싶으나, 여러 장수의 지극한 상언처럼

군주의 임무는 일개 편장의 용맹을 뽐내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지켜보겠

다. 전군은 어명을 받들어 나의 뜻을 이 평양성에 떨치라!”

“예, 전하.”

이공은 자기가 출격의 호령을 내렸는데 왜 박종경밖에 대답하지 않는지 잠시

의아하게 여겼다.

바로 이래서 이공의 출진을 장수들이 반대한 것이다. 조선군은 입으로 하는

명령에는 절대 따르지 않으며, 이것은 군사 실무의 기초 중 기초다.

물론 원칙이 그랬다는 거고 실제로는 당연히 그렇게 돌아갈 리 만무하다. 20

세기 현대 한국군도 ‘간부다.’ 한 마디에 무너지는데 대부분의 조선군에게는

너무 과도한 기대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군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자존심, 바로 금군이다. 이공은

지금 오히려 엄정한 군기에 기뻐해야 할 상황이다.

박종경의 지시에 의해 신속하게 고초기(高招旗, 병사의 대열을 지시하는 깃

발) 네 개가 올라가자 금위영 군사들은 4열 종대를 이루어 전력 질주했다.

대장을 옆에서 호위하고 있던 별장(別將) 김광룡(金光龍)이 외쳤다.

“영감! 이제 슬슬 때가 되었소이다. 군사들로 하여금 내려서 총을 재게 하오

리까?”

앞에 강과 부교를 두고 있는 지형상, 지금 기세를 뽐내는 수백의 군마는 전장

에 접근하는 수단 이외의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공의 군사 개혁은 금군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래서 금위영 군사 중

적지 않은 수는 서양 기술이 반영된 플린트락 머스킷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이공이 보기에 좋았을 뿐, 사실 전장식 활강 머스킷은 별로 기

병에게 어울리는 무기가 아니다. 지금처럼 기동성이 강조되는 전술 상황이라

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박종경은 총에 탄환을 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니, 저런 무리를 상대하는 데에 총포까지 필요치는 않다. 그대로 말에서

내리지 말고 동개궁과 대우전(大羽箭)을 준비하라.”

19세기 조선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활은 유효한 전쟁 무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조선에서도 무과 볼 때나 쓰는 물건이 되어, 이미 영정조 시대부터 각

지 관사는 화살 깃도 없는 무늬만 화살을 갖춰 놓은 지 오래일 정도였다.

물론 활은 실전에서 총보다 나은 점이 거의 하나도 없지만, 아직은 큰 장점

하나가 남아 있다.

머스킷과 다르게 활은 말 위에서도, 숙련되었다면 심지어 달리면서도 장전하

고 쏠 수 있다.

금군은 왕의 습사에 따라가 화살을 쏘는 일이 잦고, 애초에 시험 과목이 활쏘

기라서 모두 기사(騎射)에 정통했다. 애기살 같은 물건이 아니고서야 기마 궁

술은 무사의 기본 소양이다.

그래서 김광룡의 물음은 왜 뜬금없이 활이냐는 것은 아니었다.

“활을 쏜다면, 피아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겠소이까?”

그러나 박종경은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은 신경 쓸 것 없다. 정시준이라는 장사치가 제법 임금의 총애를 받는

모양인데, 건방진 평안도 상놈이 공을 주장하는 꼴을 어찌 두고 보겠는가? 아

마 평양성에서도 곧 군사가 나올 터. 우리가 먼저 기를 죽여 놓아야지. 효시

(嚆矢)를 쏘는 자, 바로 선봉이 아니겠느냐?”

김광룡도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명하시는 바를 잘 알았습니다만, 여기 있는 군관들은 태반이 몰기(沒技,

무과의 활쏘기에서 만점을 받는 것)한 자들. 빗나가게 쏘는 것이 오히려 어려

우니 많이 사로잡지 못했다고 하여 책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하! 바로 그런 기개가 있어야 금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지체

없이 명을 시행하라!”

“예, 영감!”

시준은 금군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활을 들었을 때, 시준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관군은 포위하거나 항복을 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은 이미 홍경래군과

홍가장 식구들을 적군으로 규정했다.

시준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태까지 주변 사람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성량

의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시준보다 눈이 좋고, 더 앞서 나가 있던 기랑 또한 솟구치는 대우전 수백 발

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홍경래를 조준하고 있던 총의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기랑이 가지고 있는 것도 라이플일 뿐 플린트락인 것은 같다. 부싯돌이 철편

에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그 불꽃이 화약에 옮겨붙는 데에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들었다.

그리고 그사이, 수많은 화살 중 가장 먼저 도달한 화살 하나가 기랑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피부를 찢어 놓았다.

탕!

흔들린 총열에서 발사된 탄환은 원래 조준했던 가슴에서 빗나가 어깨로 날아

갔다. 홍경래의 몸이 배다리를 불과 세 걸음 앞두고 크게 춤추듯 흔들렸다.

그러나 홍경래의 부하들은 그 무도함에 대해 화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조선이 자랑하는, 아니,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자랑했던 기병대 일제 사

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과, 관군이 활을 쐈다!”

김광룡의 허풍과는 다르게, 지금의 사격은 조준 직사가 아니어서 명중률은 낮

았다.

그러나 치명성까지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화살의 숫자가 워낙 많았

다. 여기저기에서 피에 젖은 비명이 터졌다.

“아……!”

지유는 무언가 등을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독하고도 둔중한 고

통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발을 내딛으려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와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앞

서나간 팔이 허우적대며 허공을 긁었다.

떨어지는 유시에 등을 맞은 지유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까이에서 눈으로 본 김유근과 멀리서 망원경으로 본 시준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찼다.

작가의 말

1. 전장은 매우 시끄럽고 오해나 책임 소재가 복잡하기 때문에, 조선군만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군대에서 구두 명령은 정식이 아니었습니다. 조선군의 저 규칙은 '병학지남'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로서, 인용하자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도, 천상의 신이 명령한다 하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지 말고 깃발만 쳐다보고 북과 징 소리만 들어라' 라고 합니다.

작중 나온 고초기를 포함해서, 판소리 '적벽가' 에서도 후기 조선군의 군율과 규칙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당시 중국군의 방식은 고증도 못 하고 그래봐야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 적벽대전에서 묘사되는 군대는 사실 후기 조선군입니다. 그래서 적벽가가 군사사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가 되고 있죠.

2. 군기의 비축은 각 관청의 의무였지만, 영정조 시대에는 화살깃 없이 그냥 대나무 작대기만 창고에 쌓아 놓고 가라로 보고했다가 처벌받은 기록이 몇 번이나 있습니다. 고질적인 태만 문제도 있겠습니다마는 이미 이때 일선에서는 별로 가치없는 물건으로 여겼다는 얘기죠.

흔히 활이 총보다 사거리는 길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극초기 머스킷과 편전 같은 극단적 비교가 아니면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1808년 순조에게 군사를 강했던 서영보 또한 태초부터 궁시가 있었으므로 규칙으로 활을 쓸 뿐 총에는 비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으며,  '멀리 있으면 총포를 쏘고 가까이 있으면 비로소 편전을 쏜다' 고 했습니다. 실전의 유효사거리는 이때 조정의 선비들조차도 총을 더 우월하게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실록의 기록을 참고할 때 숙종조 이후부터로 보입니다. 숙종 대까지만 해도 이이명 등이 궁노의 법을 논하며 편전을 만들거나 하는 기록이 있는데, 영정조 시대부터는 편전도 무과 관련 기록에서나 등장하지요. 이후 동학 농민군 등의 사례로 볼 때 이때 조선에서 활이 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국가의 실전 군용 무기로는 거의 퇴출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 김광룡의 원래 직위는 교련관입니다. 홍경래군에서 지금 반시체가 된 김사룡과는 관련없는 인물로 실제 훈련도감 군관입니다. 작중에서는 좀 더 승진하여;; 별장으로 변경되어 나왔습니다.

4. 지유는 죽은 게 아닙니다. 자세한 전개는 다음화에서!

26. 파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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