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88화 (88/284)

88화

25. 반역자들(3)

왕의 비답은, 이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상들이 황공무지로소이다를 외치며

달려와 엎드리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서상 회장 정시준은 격노했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가 소집된 선화당에서도 그

격노를 숨기지 않았다.

인민대회 때의 각종 위원회는 서상 소속이라, 장사치가 선화당에 감히 발 들

여놓기는 정서상 어려웠다. 그러나 정치국은 다르다.

정치국은 근문소의 의사결정기구요, 근문소는 반관반민 기관이다. 근문소는

수령이 희한하게도 갑자기 많이 부재하게 된 평안도의 관청을 임시로 대리한

다는 표어를 걸고 있으므로 선화당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감사의 자리를 차고앉은 시준은 그 위치에 대해 정치적 쾌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억울하게 휘말린 무고한 사람들을 꼭 다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홍득주 일가만 풀어주면, 김조순의 동맹인 시준의 입장상 왕의 정권 탈환 지

원까지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왕이 목숨은 잃지 않도록 주선해 줄 수 있었다.

시준 자신은 적당히 왕에게 눌린 척하면서, 이제 서울 오죽당 없이는 사업이

상당히 어렵게 된 김조순에게 호소하면 그 정도 타협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공의 생각은 시준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이공은 애초에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시준이 김조순

과의 마찰을 각오하고 내민 손은 이공에게 있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공의 입장에서 자신이 빼앗긴 것은 한양도성뿐이다. 옥새와 왕실, 종묘의

위패가 그의 손에 있는 한 이 나라는 아직 이공의 나라다. 이 시대로서는 웃

기는 소리라고 치부하기도 힘들었다.

평준위원회 위원장 김창시도 왕의 뻔뻔함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글 읽은 선비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조선에서 왕을 상대로 시

준처럼 노기를 터뜨릴 수는 없었다. 그건 전제 군주제 외에 다른 정치 체제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서 주상 전하와 호종하는 군세를 먹일 양곡을 배비해야 하겠소이다. 국문

을 한다고는 하시는데…… 우리들이 잘 말씀드려 이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의

일을 상께서 떠올리시길 바라야지요.”

왕이 평안도를 모른 척하기는 힘들다. 김유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홍득주는

이순신처럼 왕의 체면용 국문 한 번 하고 살짝만 어루만진 다음 풀려날 가능

성도 적지 않다. 김창시의 말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성이란 물건에 큰 가치를 두지 않던 의주파 일부 인사라던가,

특히 왕에게 불만이 많은 ‘정감록파’는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발언한 것은 의주파의 양대 기둥인 임상옥이나 차형기도 아니요, 정감

록파의 초강경파인 이제초(정치국 위원이 아니라 말석에 있기는 했다)도 아니

었다.

사람들은 여태까지 없던 사람처럼 정치국에 출석 도장이나 찍던 검사위원장

조제프 푸셰가 손을 드는 것을 보고 긴장감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엄격한 회의체의 예법은 평안도 장사치들에게는 영 몸에 안 맞는 옷 같은 물

건이다. 이 무뢰배 집단에게 이 정도로 정치 예절을 습득시킨 것은 반 정도가

푸셰의 공이었다.

그가 손을 드는 동작은 우아했고 타이밍은 완벽했다. 그래서 막 흥분하여 떠

들려던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제프 푸셰는 여태까지 정치국에서 별달리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전설적

인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흉내 내어 서상 예결산 보고서의

발간 준비를 지휘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내부의 비리 사범을 색출하는 등 검

사위원회의 직무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것은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복공의 벼슬이 높다 하지만 그는 외국인이다.

조선과는 조금 성질이 다르긴 하여도, 루이 치세 당시 그가 등용한 여러 외국

인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많았음을 푸셰는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푸셰는 이 급박한 상황에 발언을 요청하고 있었다.

시준은 말이 적을수록 말 한마디의 가치는 높아진다는 통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서로 눈치나 볼 뿐 푸셰를 막지 못했다.

시준은 사실상 의장의 자격으로 물었다.

“오트란토 공,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여기서는 위원이라 불러주게.”

“실례했소이다. 서도상고총협동회 검사위원회 위원장이며 근문소 정치국 위원

이신 조제프 푸셰. 발언을 허락합니다.”

푸셰는 정치국 위원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는 이제 능숙해진 조선말로

입을 열었다.

“외인으로서 과분한 직무를 맡은 차에 다시 참견드리기가 민망스럽소이다. 그

러나 머나먼 외국 사람인 나조차 이번의 일에는 의로운 분노[義憤]를 참지 못

하여 감히 한마디 보태게 되었소. 내가 여러 존경하는 위원 동지들께 묻겠소.

대체 우리가 무얼 잘못하였소?”

정치국 위원들은, 심지어 시준마저도 잘못한 거 꽤 많지 않나 생각했다.

특히 푸셰는 왕이 나가사키 가라고 전선까지 내주었더니 그걸 그대로 먹고 장

자도로 튀어 버린 사람이다. 잘못 중에서도 엄청나게 큰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연설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 특유의 확신으로 가

득 차 있었다.

“동지들! 우리는 오로지 애민애국의 정신으로 뭉쳐, 혹독한 겨울 동안 이 땅

(평안도)의 인민들을 먹여 살렸소. 쌀과 옷감을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옮

기거나 때로는 사들여 균등하게 인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없

게 하였습니다. 본 위원은 여기에서 우리가 조선국 지방정부나 군, 치안 당국

의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묻고 싶소.”

푸셰만큼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제초가 터치듯이 말했다.

“그런 건 하나도 없지! 암. 나라가 인민을 내팽개쳤으니 어찌 우리가 나서지

않을 수 있었겠소? 물론 회장이 장자도에서 기치를 높이 들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미 정감록파 사이에서는 이론이 완성된 상태였다. 해도정출이라. 진인은 바

다의 섬에서 나온다. 장자도에서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시준이야말로 예언서가

지목하는 구세주인 것이 분명했다.

허나, 갑자기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제정일치 국가를 만들 생각이 없었던 시

준은 정감록파를 껄끄러워하는 축이었다. 시준은 엄밀히는 여기에서 발언 자

격이 없는 이제초에게 주의를 주려 했다.

그러나 푸셰는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말로써 시준의 행동을 막았다.

“방금 말씀은 정당한 것이오. 곡식은 수확한 농부의 것. 이문은 거래한 상인

의 것. 그리고 선행은 베푼 자의 복락이 되는 것입니다.

외국인의 과격한 발언을 용서하신다면, 본 위원이 담대하게 묻겠소. 어찌하여

조선국에서는 단지 선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강도처럼 들

어와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오?

왜 만민을 위해 봉사한 죄밖에 없는 우리가 부당한 폭력에 굴종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것이 이 ‘동쪽의 예의 바른 나라[東方禮儀之國]’의 풍속입니까?”

시준은 푸셰의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정치국 위원이자 검사위원회 부위원장

백윤구를 급히 쳐다보았다. 전통 있는 무가의 자손 백윤구가 저런 발언을 용

서할 리 없다.

하지만 백윤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집어 들 뿐이었다. 시준의 현실

에 대한 믿음은 이공이 선조를 본받았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산산이 부서졌다.

시준은 푸셰가 이미 백윤구를, 그리고 정치국 위원 상당수를 설득한 다음 이

자리에 참석했음을 직감했다.

‘무서운 놈이다!’

시준은 ‘나폴레옹의 유일한 명대신’ 조제프 푸셰에 대한 외경심과 경계심을

더욱 키웠다.

그리고 시준은 푸셰가 어떻게 다른 위원을, 특히 강대한 평준위원회를 설득했

는지도 짐작할 만했다.

왕과 왕이 호언하는 오천 군세가 평양에 들어오면, 서상 대부분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다. 먹을 게 없어 백성들의 씨감자와 쌀을 약탈해 가며 북상했던

왕이 무슨 대가를 내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시준 또한 한 사람의 상인으로서는 걱정되는 일이었다. 공명첩을 한 번만 더

받으면 그걸 왕의 면상에 집어 던질지도 몰랐다.

허나 지유와 홍득주 일가를 구해야 했기에 돈 문제는 뒤로 미뤄 놨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돈 문제가 우선이다. 그들은 홍득주 일가가 죽는다 하

더라도 도의적인 상심 이상은 별로 할 게 없다.

다만 다른 상인들 역시 왕의 이름에는 짓눌릴 수밖에 없던 조선 사람이기에

지금까지는 함부로 반대를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제프 푸셰는 그들의 장부에서 충(忠)이라는 부당한 빚을 지워 주었다.

상인에게 왕보다, 부모보다, 형제보다 우선인 ‘이문’을 잃는다는 소식은 평안

도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강박적 충심마저 버리게 했다.

푸셰의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인과 결탁하여 반란을 모의한 난쟁이 장, 아, 홍경래라는 자가

거기에 있소.”

홍경래의 이름이 나오자 위원들의 표정이 다채로워졌다.

임상옥처럼 홍경래가 절대 왕을 업고 들어와서는 안 되는 자도 있고, 기존에

홍경래가 반역하였다는 명분을 모아 건설된 것이 서상인 만큼 지금 홍경래가

왕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위원도 있었다.

푸셰는 그것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배신자의 생각은 같은 배신자가 가장

잘 안다.

“이자는 두 번 배반한 것이오. 한 번은 왕을 배반했고, 나중에는 또 왕에게

붙어 평안도 인민과 그의 의숙부, 그리고 그 자신마저 배반했지. 게다가 영국

인마저 속였소. 본인이 장담하건대 저 악착같은 사기꾼 영국인을 ‘배반’할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을 거요.”

그 배반을 잘 알고 있는 이제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홍경래는 정 진인의

도래만을 기다리며 고통스럽게 삶을 버텨내는 백성들을 기만하고 배신했다.

푸셰는 사람들의 적의가 왕을 불태우면서 동시에 홍경래에게도 옮겨붙을 시간

을 잠시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힘 있게 손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은 과거의 혁명투사 그 자체

였다.

“자랑스러운 동지들이여! 본 위원은 다시 묻겠소. 조선에 이와 같은 배반자가

다시 있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배신자를 총애하는 측근으로 거둔 조선 국왕께

서는 어떨까? 최근의 소문이 사실인지 본 위원은 꽤나 의심스러웠지만,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국왕께서 그분의 자식과 같은 신민을 버리고 여기까지 오

셨다는 것은 최근의 칙서(교지)로 명백해졌겠지요.”

동인도 회사조차 배신한 배반의 달인 홍경래를 거두어, 스스로 같은 급의 인

간이라는 의심을 피하지 못하게 된 국왕은 과연 그 의심을 증명했다.

왕은 수도와 국정을 내팽개치고 도망침으로써 인민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물론 푸셰가 그런 명징한 언명까지는 못 하였다. 외국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추론과 공감 능력을 가진 생물이며, 말이란 꼭 입 밖으로 내야

만 아는 것이 아니다. 능숙한 선동가는 직설적 선언이 아니라 군중 스스로 생

각을 불러일으키게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한다.

게다가 푸셰의 선동은 지금 여기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거의 끝났다고 말해야 할 단계였다.

프랑스군이 그저 성실히 훈련만 했을 리 만무하다. 프랑스군은 가는 곳마다

혁명을 전파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왕 모가지 잘라 봐서 아는데, 썩 나쁘지 않더라고.’

군 관계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평준위원회 구성원들의 경우 영국과 광범

위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은 국왕 참수의 원조 맛집이다.

‘원래 국왕은 세금의 영수증으로 자기 머리를 내놓아야 하는 법이라네.’

이래서 조선이 쇄국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황은 시준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경하고 심각했다.

아마 이제 푸셰가 그럴듯한 구호만 외치면 정치국 위원들은 모두 들고일어날

기세였다.

그러나 푸셰는 노련한 사람답게 물러날 때를 알았다. 이 나이 먹고 새삼 조선

의 생 쥐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본 위원의 오만한 발언을 사과드리며, 이다음은 제 부족한 학식을 채워 주는

좋은 친구이자 평안도 상인-시민 연합 길드(서도상고총협동회)를 위해 오랫동

안 봉사한 정시준 회장께서 말씀드릴 것이오.”

시준은 배신감에 찬 눈으로 푸셰를 바라보았다. 시준은 어떤 귀띔도 미리 듣

지 못했다.

푸셰로서는 시준이 자신에 필적할 만한 후대의 최고 협잡꾼이 될 거라는 믿음

을 가지고 시준을 지명한 것이지만, 그는 그냥 전직 공무원일 뿐이다. 이런

‘준비되지 않은 발언’은 공무원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러나 푸셰의 눈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았다. 시준은 이미 푸셰와 일전에 나

눈 대화로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수로 분기를 드러내었지

만 시준의 역할은 선봉에 써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이를테면, 싸움판에서 요란하게 콧방귀만 뀌며 옷자락이나 자꾸 사납게 펄럭

일 뿐 주먹을 내지르지는 않는 사람을 말리는 역할이다.

푸셰는 왕과 홍경래를 적으로 규정했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찬성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서상의 군세로 왕과 격돌하면 승패가 불확실하다.

일부 영국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왕이 끌고 온 것

은 조선군 중 유일하게 실제 전투가 가능한 부대. 바로 수도 방위군 병력이

다. 민병대로 정면 대결은 무리다.

무엇보다 저곳에는 군주가 있다. 왕은 다루기에 따라 십만의 병력에도 값한

다. 프랑스군도 차라리 도망치고 말지 조선인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준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어흠. 주상 전하의 근신(近臣)들이 실덕(失德)한 바가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

지마는, 지금 바로 군을 내어 근왕군과 맞선다는 것은 곧 역적이오이다. 방금

복 위원(푸셰)의 말씀은 잘 들었으나 본 위원의 생각으로는 너무 위태로운 일

이라 여겨집니다. 게다가 병화가 일어나면 억울한 사람들까지 살상될 것이니

더 말해 무엇하리오.”

시준은 조선 전통의 방식대로 혐의를 왕이 아니라 ‘근신’에게 돌려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왕과 홍경래는 싫었지만 당장 싸우기는 더 부담스럽다. 위원들은 정신을 차리

고 모두 시준의 높은 덕을 칭찬했다.

시준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주상 전하께서는 평양성에서 역적을 국문하실 것이라 하셨소. 먼저 대동강에

부교를 급히 놓아 나랏님의 행차를 맞아들이되, 속전을 모아 바쳐 구명을 빌

어 봅시다.

다만, 모두 아시다시피 홍경래가 겁박해 간 사람들은 모두 의주 사람이므로

여기에서는 다른 고을 위원께 폐를 끼칠 수 없소. 속전은 본 위원을 비롯해

홍 장주님께 신세 진 의주 사람들이 모아 볼 것이오. 어떻소?”

시준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자는 세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당연히 조제프 푸셰이며, 나머지 둘은 평준위원회 위원장 김창시와

부위원장 중 하나인 임상옥이었다.

시준은 평양성의 성문을 여는 게 아니라 대동강에 준비를 하자고 말했다. 왕

이 성에 들어오려면 시준이 암시한 거래, 즉 얌전히 돈 받고 국문은 흉내로만

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기 돈 안 나간다는 것을 알아들은 김창시와 신흥파는 얼른 찬성했다.

자기 돈이 나가는 의주파도 떨떠름하게나마 찬성했다. 어차피 홍득주만 돌아

오면 홍득주가 가진 네트워크를 부활시켜 장기적으로 얼마든지 손해를 벌충할

수 있다.

반대한 사람들은 당장 달려 나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감록파였

다. 그러나 정감록파는 정치국에서 그다지 서열이 높지 않았고, 다수파도 아

니었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 정확히는 누군가 하나를 홀대해

서 내분이 일어나는 상황이 싫었던 – 시준은 정감록파의 건의대로 일단 군대

는 준비하는 선에서 안건을 중재했다.

이공이 대동강에서 불과 이틀 거리를 남겨놨을 때, 평양성은 기이한 모순적

상태에 빠졌다.

왕이 수상한 짓을 하면 즉시 전투에 들어갈 태세를 갖춘 병사들과, 왕을 환영

하는 부교를 끌어대어 못질하는 조졸이며 인부들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시준은 자기가 겪어야 하는 모순이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

측불허의 사고들은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싶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과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

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에서 그것은 ‘그저’라는 표현으로 끝날 만큼 소박한 희망

이 아니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죽이고 타인의 안정을 파

괴해야 한다.

시준은 불현듯 조선에 오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야 마땅한 ‘관리자’는 ‘업보’

란 작용 반작용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준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잠깐 상념에 빠졌던 시준은 거기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지적 유희는 불명확한 사치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은 뼈저리게 확실하다. 시

준은 그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강철군주 이공이 항상 본받고 싶어 하는 프리드리히는 개를 일컬어 이렇게 말

했다.

‘개는 인간의 모든 고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결점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얼핏 보면 흔한 애견인의 말로 보이지만 이건 대부분의 인간이 개만도 못하다

는 프리드리히다운 냉소다.

그리고 이공 또한 진실로 동감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관과 신하들은

집 지키는 개보다 나은 점이 도대체 하나도 없었다.

“이 흉적이 끝내 다시 배반하였다는 말이냐! 당장 쫓아가지 않고 무얼 하고

있어!”

푸셰의 통찰은 정확했다. 홍경래는 태생부터 배반자였다. 그는 홍가장 식구와

자신의 병력까지 합쳐 약 오백의 인원을 데리고 그대로 군을 이탈했다.

이공의 군은 그간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게

다가 홍경래군의 꼴이라는 게 무기만 들었지 그냥 백성 무리였기 때문에 홍가

장 식구들을 그 속에 섞어 감추기도 어렵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조선군이라도 이게 정상적 원정이었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허나 근거지 없는 군대란 것은 산적과 다를 바 없는 법. 이공은 자신 그 자체

가 근거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군사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런 인식 차이를 메우려면 상당히 세심하고 치밀한 조직 관리가 필요하다.

한중에서 흩어지는 부하들 그러모으느라 속 썩였던 한고조 유방부터 시작해,

고대부터 불가피하게 떠돌다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던 군벌들이 한 번씩은

거쳤던 길이다.

그러나 이공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이제 금위영 장졸들의 수준은 도적 떼와 다를 게 없었으며 – 한 일이 약탈뿐

인데 당연하다 – 홍경래의 탈주가 보고된 것조차 사건에서 반나절이나 지난

후였다.

이공은 왜 당장 쫓아가지 않고 멍청히 자기에게 보고나 올리느냐는 간단한 꾸

짖음을 상당히 길고 복잡하게 구사했다.

하지만 금위영은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금위대장 박종경은

황송해하며 아뢰었다.

“도적들을 추포하는 일도 물론 중하나, 지금 남쪽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있기로 그 형세가 심히 괴이쩍어 감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나이다.”

“뭐라고?”

얘기를 들어보니 한 사오백 명쯤 되는 사람들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는데,

어수선하기는 하나 다들 손에 죽창일지라도 병장기를 들고 있으므로 왕을 보

호하려면 홍경래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이공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않았다는 말이냐? 혹시 근왕군에 합류하러 온 백

성들이 아닌가?”

박종경은 하필 왕에게 이런 보고를 해야 하는 자신을 저주했다.

“물론 신등이 수차례 파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

다. 필시 불측한 반도일 것이기로, 지금 신등은 엎드려 명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공은 대경하여 신하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신하들 중에서는 익숙한 얼굴

이 하나 없었다. 이공은 설마설마하며 자신을 끝까지 따르는 충신 박윤수에게

물었다.

“예조 참판(정약용)은 어디 있는가?”

관리들의 출석 정도는 미리 챙겨야 할 여러 하급 관원들이 따라오지 못하니

이런 기본적인 일에서 자꾸 불협화음이 벌어졌다.

박윤수도 좀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정약용의 소재를 알지 못한

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디 낙오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급히 찾아보겠습니다. 일단은 금위영이 보았

다는 적도를 상대하는 일이 급합니다.”

“군영에 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꼴로 무슨 군의를 하고 무슨 대책을 논한

단 말인가! 그게 지금 백관의 영수라는 자가 할 말인가!”

폭발한 젊은 왕을 달래느라 신하들은 심력을 상당히 소모했다. 그 사이 몇몇

신하들이 빠져나가 하인들을 닦달해 보기도 했다.

허나 그런다고 정약용이 뒷간 갔다가 늦었다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나타나는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한 시진 후, 이공은 홍경래군은 도망쳤고 정약용도 도망쳤다는 참담한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백성 무리가 감히 자신을 적대한다는 것도 인정해

야 했다.

이공은 자기가 대체 무얼 잘못했기에 사방에서 죽순 돋아나듯 반역자들이 생

겨나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말

1. 프리드리히는 사람을 비웃기 좋아했다고 하지요. 저 말의 원문은 "Hunde besitzen sämtliche edle Eigenschaften des Menschen, doch keine einzige ihrer schlechten." 입니다. 프리드리히는 근대 최초의 유명한 애견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어째 훗날의 무슨 총통이 생각나는군요.

2. 다시 언급될 것 같습니다만, 스위스 출신 은행가이며 프랑스 재무총감이었던 자크 네케르는 이 시점에선 죽었고(처형이 아니라 자연사했습니다), 루이 16세 치하 초기에 프랑스 왕국의 재무보고서를 발간하여 재정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개혁 대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그 전 재무총감 튀르고도 그렇지만, 이는 개혁 과정에서 왕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3. 지금 파트가 시즌 1(?)의 클라이맥스다 보니,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한데 얽히는 바람에 진행이 좀 느려졌군요. 오래잖아 결판이 날 겁니다. 다시 한 번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5. 반역자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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