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87화 (87/284)

87화

25. 반역자들(2)

송상과 동맹을 맺을 때 생각했듯이, 시준도 조선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데

에 있어 삼남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여력과, 무엇보다 시간의 한계로 시준은 삼남에 이렇다 할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준이 진하사로 청에 갔다 온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는 지금

평안도를 수습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 그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현 조선의 사실상

최고 권력자인 김조순이다.

여기에서 최고 권력자라는 말은, 김조순이 빈 서울을 차지해 왕 대신 떵떵거

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무가 없어진 들판에서 그나마 가장 키 큰 억새풀 끄

트머리 정도 된다는 의미다.

보통은 바람에 꺾이는 나무가 이번엔 스스로 뿌리 들고 떠나 버린 사상 초유

의 사태라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권력 공백기와 비슷하다.

이병원을 추대했다고 한들 지금은 함부로 왕을 칭할 수가 없었다. 승인할 대

비도, 옥새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국내의 어떤 사람이나 물건보다 더 권위가 높은 쪽이 있기는 하다.

현재 박윤수 등 ‘간신들’이 임금의 눈을 흐려 서양을 끌어들이고 중국을 배반

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청에 이 소식을 전하면 긍정적으로 검토

해 줄 가능성이 높다.

이강회가 그에 관해 건의했다.

“임금…… 아차, 폐주(廢主)의 군이 모든 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닙니다. 사행로

큰길은 좀 위험하겠지만, 다른 샛길로 시준에게 글 한 통 전하면 중국에 상주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면 청군이 평안도에 건너오겠지. 내가 자네 사형이라면 파발을 죽이고

입 씻을 걸세.”

이강회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시준은 그런 놈이었다.

“허허. 영돈녕부사께서도 이제 입담이 꽤나 천해지셨소이다.”

“천해질 수밖에. 지금의 사세는 귀천이 거꾸로 되고 천지가 뒤집히는 때 아닌

가. 이태 전만 같았어도 장사치가 내 앞에서 그따위로 입을 나불댔다가는 당

장 혀를 뽑아 놓았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이강회와 박득출은 넓은 의미로 보았을 때 한

성부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경강 상인들은 조정과 수도권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활동하는 상인이다. 조정

이 상인 없으면 곤란한 만큼 상인도 조정이 없으면 곤란하다.

이때 왕이 사라져 버려 대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있는 것은 김조순이다.

그런데 김조순은 이 과정에서 사족과 왕족에 대한 관리에만 심혈을 기울였지

상인의 존재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상인까지 포섭하러 나선다는 것은 김조순의 신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생각이

다. 김조순은 당연하기까지 한 역할 분담으로 그 일을 이강회와 박득출에게

맡겼다.

그리고 둘은 충실히 일했다.

‘전(全)씨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와 봤더니 역시 난장판이구먼.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네. 자네들은 하던 대로 곡식과 땔감을 아문에 대면 돼.

뭐? 너희를 어떻게 믿느냐고? 이 사람. 지금 영안부원군 댁에서 상여 들고 나

간 게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강씨, 왜 그리 죽상이야. 저번에 몇 대 맞은 것 때문에 그래? 사내가 그렇게

꽁해서야. 자, 이거 오죽당 흑패일세. 이거만 가지고 있으면 순라꾼이고 포도

군관이고 문제가 없지.

누가 물정 모르고 야료를 부리거든 영안부원군의 성함을 대게. 진짜 자네에게

만 특별히 해 주는 거야. 일전의 그건 잊고 잘 지내보세.’

그렇게 김조순과 경강 상인들 사이에 자신들을 끼워 넣은 시준 오죽당 서울지

부는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서울 상계를 간접 장악할 수 있었다. 시준이 송

상과 동맹을 맺으면서 송상과 연결된 경상에도 호의적인 인상을 주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휘하 군대를 사실상 오죽당이 먹여 살리고 있다는 환장할 상황을 김조순이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그러한 독점 체제를 타파해서 건방진 장사치들을 찍어누르고, 더하여 사족들

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삼남에 대한 조치는 시급한 것이었다.

김조순은 시뻐하는 표정으로 붓을 내려놓았다.

“자네들의 공을 잊지는 않겠지만, 시준이 평양에서 한 인민대회인지 무엇인지

에 부화뇌동하면 좋은 꼴 못 볼 걸세. 사백 년을 이어 내려온 반상의 법도는

단 넉 달 만에 뒤집힐 수는 없는 법이야.”

“시준도 불측한 마음을 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정은 없고 수령은 의심스

러운데 그러면 백성들이 알아서 먹고 살아야지 어찌하오리까. 그리고 비록 동

서반(東西班) 직임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사람도 사족의 자손이오이다.”

“아, 그런가? 요즘은 너무 장사꾼 같아 보여서 말일세.”

김조순의 이죽거림에도 이강회는 김조순이 원하는 대로 격분하지는 않았다.

바로 저것이 이제 신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김조순은 서신에

다시 눈을 돌렸다.

지금이야 장사치들이 위세를 부리지만, 결국 이 나라는 자신의 – 장동 김문의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리라.

장동 김문의 세는 간판만이 아니다. 장동 김문은 이 시점부터 정부 요직에 많

이 진출하여 있었다.

외침도 아닌데 왕이 도망가 버린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단속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명의 동렬 형제가 해 준 역할이 컸다. 예를 들어 의정부 우참

찬(右參贊) 김문순(金文淳)의 무게감은 백지처럼 팔랑대는 조정을 내리누르는

문진(文鎭)이 되었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를 책임지고 있는 전라 감사 김희순

(金羲淳)이 있었다. 삼남의 인맥이라면 시준보다 김조순이 우월한 것도 당연하다.

김희순은 경종조 때, 장인 이이명(李頤命)을 위해 감히 왕의 사사(賜死) 명령

에 대항하여 의금부의 공문을 빼앗고 역졸을 가두어버린 용자 중의 용자 김시

발(金時發)의 자손이다.

왕은 자기가 평안도에서 세를 회복하면 여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삼남은

알아서 복종하리라 여기고 있겠지만, 김조순의 생각에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조선의 인민들은 왕에 대해서 유럽인이 신에 대해 아는 정도밖에 모른다. 김

시발의 사례에서 보듯이 군주는 어디까지나 사대부의 양해하에 나라를 다스리

는 것이다.

김조순의 서한은 호남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제2의 홍경래를 방지하며, 훈

련도감의 재원인 호남의 세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등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다만 지금 경상 감사를 하고 있는 김회연은 당장 섣불리 회유하려 들 수는 없

을 것 같았다.

원 역사와 달리 정약용 때문에 예조 참의는 못했으나 군병과 재용에 있어 이

론적, 실무적 경험이 풍부하며 통찰 있는 사람이다.

그가 안동 김씨가 아니라 청풍 김씨라서 가문상의 인연이 없기도 했는데, 그

보다는 김회연이 만만찮은 인물이라는 원인이 더 컸다. 경상도 쪽은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거기까지 고민을 진행시킨 김조순의 귀에, 아직 물러가지 않은 이강회의 목소

리가 들렸다.

“제가 시준에게 서한을 보내시라 권해드린 것은 영식(令息)의 안위 때문도 있

습니다.”

왕비 김씨와 김유근. 왕에게 잡혀 있는 두 아들딸을 생각하자 김조순은 하마

터면 서신을 우그러뜨릴 뻔했다.

연인과 양부를 구출하려는 시준과는 또 다르다. 정인이나 의붓아비에 대한 정

이 아무리 깊다 한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정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조순은 요 며칠간의 지옥 같은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얘기

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자신은 나무가 될 수 없다. 억새풀은 약간만 힘을 줘도 끊어진다. 만약 김조

순이 조금이라도 자식에게 주의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단숨에 신뢰를 잃어버

리고 아직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새 조정은 붕괴한다.

김조순이 냉혈한이라 하지만 시준 역시 감성 넘치는 성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김조순은 시준보다 정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시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

아 왔고 짊어졌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조순은 토혈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속이 조용히 끊어지는 것

처럼 말했다.

“그 둘은 폐주에게 있지, 시준에게 있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언사를

주의하지 않으면 당장에 쳐죽이겠다.”

이강회 역시 더 김조순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과의 말도,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읍하고 물러 나왔다.

홍경래군이 잡아 온 포로들은 한 무리로 뭉쳐 다니는 피난민 꼴을 한 채 감시

받고 있었다.

왕은 이들을 엄중히 지킬 것을 주문하였으나, 조선인에게 포로에 대한 엄중한

교대제 감시 같은 것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일단 조선군이 무슨 포로 같은 걸 다뤄 본 경험 자체가 별로 없다. 전쟁에서

이겨야 포로를 잡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명색이 벼슬아치인 금위영 군관들이 졸음 참아 가며 지저분한 백성들

경비 서는 짓도 체면상 못 할 일이다. 금군이 지킬 가치가 있는 대상은 왕뿐

이다. 그들이 일껏 옥리(獄吏) 노릇이나 하러 취재며 무과 본 것이 아니다.

홍경래도 동의했다. 홍경래 역시 그들의 유일한 가치인 ‘역적의 추포자’ 칭호

를 포기하기 싫었다. 이 포로들은 자기 손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홍경래군이 여전히 김유근과 홍가장 식구들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홍경래군의 안 그래도 없는 군율은 김사룡 건 때문에 현재 더 해체되

어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김유근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속삭일 여유

도 얻을 수 있었다.

“저 흉적들이 우리를 아직 죽이지 못하는 것은 세가 그렇게 확고하지 못하다

는 증좌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예전에 참살했겠지. 내 부친이신 영안부원군

께서 반드시 살길을 마련해 놓으셨을 테니 참고 견디면 된다.”

김유근은 함거 안에서 묶인 채로 비장하게 말했다.

김사룡이 반 시체가 되자 뿔난 홍경래군 장병들이 분풀이로 그를 두들겨 패는

바람에 얼굴이 부어서 발음은 좀 일그러졌지만 기세 하나는 확실히 비장했다.

아버지가 던진 돌덩이를 머리에 맞고도 견뎌낸 불굴의 사나이 김유근에게 그

런 솜주먹 따윈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묶인 채 앉아 있는 홍가장 식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하자 유구무언(在下

者有口無言)이라. 힘없는 놈은 입도 닥치라는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을 의주

사람들은 잘 지키는 쪽이었다.

그러나 김유근은 워낙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지라, 그런 전통을 체화하지 못

한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우리에게 손대면 그건 저 양추(洋醜)와 손잡고 대국에 항거하겠다는 뜻. 중

국에서 좌시할 리 없지. 임금은 지금 덫으로 걸어 들어가는 까투리와 다를 게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때가 온다!”

김유근에게는 홍경래와 미친 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케 한다는 대의가 있었다.

그런 대의 아래에서 겪은 요 한 계절의 동고동락은 자신과 홍가장 식구들 사

이에 신분을 초월한 연대감을 창조했을 거라고 김유근은 믿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힘들고 지친 포로들을 꺾이지 않는 절의로 밝게 이끄는 자

신을 지유가 재평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김유근은 자신을 돌아보는 지유의 표정에 의아해했다. 저것은 존경과

사랑이 담긴 얼굴이 아니었다.

“조용히 하시오. 애초에 이 사달을 만든 게 누군데? 그네들이 우리를 선물처

럼 주고받고 하는 동안 이 도적들이 잘도 가만히 있겠네. 조금이라도 수틀리

면 분풀이로 우리를 다 죽일걸? 공자(公子)인지 고자인지 쓸데없이 조잘대서

화를 부르지 말고 가만히나 있으라는 말이야!”

김유근은 정신적으로 뺨을 맞은 표정을 지었다. 지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홍

경래군의 어떤 매질보다 잔인하게 김유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김유근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김유근은 그저 슬

퍼하며 눈을 감았다(그래서 지유에게 동조하며 자신을 조롱하는 홍가장 식구

들의 시선도 못 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고생이 심해서 투정이 났구나. 하긴, 고난을 참고 대의를 이

루는 큰 뜻을 상민의 아녀자가 어찌 다 감당하겠는가? 내가 나중에 잘 달래어

다스려서 가정이 화합하고 사대부의 집안에 걸맞도록 이끌어야 하겠다.’

그러고 있는 김유근의 앞에 한 남자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김유근의

관대함은 지유에게만 발휘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눈을 확 불태웠다.

“너 이 도적놈이 또 무슨 할 말이 있어 왔느냐?”

“가장 큰 도적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오.”

홍경래는 조롱의 쾌감보다 우울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김유근

에게는 볼일이 없는지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가 멈춘 곳은 홍득주의 앞이었다.

홍득주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조카가 특히 청할 일이 있어 왔소이다.”

“아무리 불상놈들이라도 조카가 숙부를 잡아 묶는 예가 있는가. 네가 나를 버

렸으니 나도 네게 줄 게 없다.”

홍경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시준과 연통하시는 것을 내 압니다. 여태 우리 장수들에게 주어 쌀 얻은 돈

이 어디서 났겠소.”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지유뿐이었다. 홍득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경

래는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이었다.

“줄을 풀어 드리고 깨끗한 옷과 밥도 주어 식구들을 안심시키겠습니다. 시준

의 간자(間者)가 누구인지 내 모르나, 이제는 찾을 마음도 없소이다. 시준에

게 소식을 전하시지요. 곧 주상 전하께서 평안도로 건너가실 것이라고.”

“그거야 시준이라면 당연히 알 테니, 설마 진짜 그 일 알리라 하는 건 아니겠

지. 네 모가지 안 떨어지게 잘 봐달라는 건가? 허허! 과연 반역자라. 왜, 평

서대원수에게 나누는 군공이 좀 섭섭했나 보지? 나도 똑똑하지 못하여 네 손

에 떨어졌다마는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홍경래는 잠시 동안 홍득주를 쳐죽이려는 부하들을 말려야 했다. 허나 홍득주

는 태연하게 말했다.

“일없네. 내일이라도 목 날아갈지 모르는 역적의 도당이 이제 와서 밥 한 술

더 뜨겠다고 그런 구차한 약속을 하겠는가.”

“제가 잘 아뢰면 임금께서도 굽어살펴 주실 것이오이다.”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 말에 남이 설득될 리가 없다. 홍득주는 본격적으로 빈

정대었다.

“웃기는 소리. 조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내가 잘 모른다만, 늙은이라고 깔보는

게 우심하구나. 나 용만의 홍득주다. 네깟 놈의 속도 모를 듯 성싶더냐? 네

말을 임금이 새겨들었다면야 여기에서 아쉬운 소리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러면서 김사룡이 갇힌 곳을 돌아보는 홍득주의 시선은 묶인 홍득주가 저지

를 수 있는 거의 최대의 폭력이었다.

“저자의 신세도 그렇고, 급하게 목숨줄 찾는 꼴을 보아하니 네놈 처지도 뻔

해. 어디 한번 같이 대동강 바닥에서 진흙이나 씹어보자고. 의를 잃은 숙질

(叔姪)의 말로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경계가 될 테지.”

홍경래는 칼에 찔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 뒤 침통한 목소

리가 잇새에서 새어 나왔다.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른께서는 임금이 평안도만 들

어가면 그대로 시준의 도움을 얻어 풀려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 본데, 그

렇게 얼렁뚱땅 일이 지나갈 리가 없습니다.

어른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시준의 힘은 지금 서도의 방백, 인민 중의 수령이

나 다름없소이다. 사람 의심하기 좋아하는 왕은 시준이 완전히 권세를 잃을

때까지 어른을 풀어주지 않을 겝니다.”

지유는 잘 안 들리는 홍경래의 목소리를 담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이미 홍경

래가 하는 말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부정할 준비가 된 홍득주는 여전히 왼고개

를 꼬았다.

“이 나라의 임금이 설마 자네보다 신의가 없지는 않을 터. 나는 시준을 믿겠다.”

“임금은 충성에 대해 보답하는 분이 아니오. 임금의 총애하는 신하로서 여기

까지 따라온 사람 중 하나인 예조 참판도 그 형이 아직까지 흑산도에 있지 않

소이까?”

정약전은 국법에 따른 죄인이지 않느냐는 반박은 소용이 없다. 홍득주도 국법

에 따른 죄인이니까.

“결국 떡고물이 부족했다는 겐가.”

“제 욕은 얼마든지 하셔도 좋소이다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만 알아주십시

오. 대동강을 건너면 정말 저도 이제 어른을 돕지 못합니다.”

“네 말은 이치에 닿지 않아. 임금이 사람을 못 믿고 보답에 인색하여 시준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는데, 네 말은 어찌 듣는다는 거냐? 시준도 못 하는

것을 네놈이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예.”

“어떻게?”

홍경래는 고개를 숙여 가만히 속삭였다.

“시준은 평양성에 있고, 저는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홍득주는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그는 홍경래가 어명대로 홍가장

가족들의 밧줄을 풀어 주고 죽을 쑤어 나누어주는 동안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홍경래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는 홍가장 식구들을 근왕군에게서 몰래 탈출시

켜 주겠다는 소리다. 실제로 지금 시준은 뭔가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

확실히 홍경래가 할 법한 도박인 것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같이 탈출할 홍경

래는 ‘순전히 그 자신의 힘으로’ 홍가장 식구들을 시준에게 돌려주게 된다.

사실 왕의 겁박 때문에 홍득주를 납치했을 뿐이라는 홍경래의 혀놀림은 시준

도 어쩔 수 없이 믿는 척해야 할 것이다. 분노하여 뒤쫓아 올 왕을 막으려면

내분을 일으킬 수야 없으니까.

그리고 잠시 더 생각해 본 홍득주는 홍경래가 한꺼풀 더 뒤에 숨긴 의미도 짐

작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만약 당신이 거절하면, 어차피 시준이 날 죽일 텐데 내가

못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나는 당신과 딸린 식구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도망

치겠다. 그 죄는 물론 왕에게 뒤집어씌워서 평양성에 선물할 것이다.’

소름 끼치는 협박이었다. 지금 왕이 널리 얻는 인심으로 보았을 때 평안도 사

람들은 왕이 그런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홍득주는 홍경래가 식전에 기운을 다스리라며 압경주(壓驚酒, 마음을 진정시

키기 위해 먹는 술)랍시고 한 병 놓아준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열을 세었을 무렵, 홍득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네 말대로 하지.”

“현명한 판단이올시다.”

홍경래는 빙긋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땅에 줄줄 쏟아 버렸다.

확실히 홍경래의 각오는 장난이 아니었다. 홍득주의 대답이 일각만 늦었으면

먼저 홍득주, 그리고 일가가 전부 죽었을 것이다.

뻐근한 팔다리를 주무르던 지유는 그것을 보고 흠칫했다. 그러고는 다시 이를

앙다물었다.

이월도 거의 반나마 지났을 무렵, 조선의 정당한 왕 이공이 각지의 병사를 규

합하여 저 역적 김조순을 타도할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도 대충 윤곽이 보였다.

이공은 사흘 뒤 이 영광된 행렬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계를 넘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황해 병사 안숙이 합류하겠다고 하였지만, 이공이 신묘한 계략을 궁구해 보건

대 어차피 평안도 병력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이니 괜히 속도를 늦출 필요

는 없었다.

이공은 김조순을 막을 후방의 방패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예의상

합류 상주 보냈던 안숙은 이따위 군대로 왕 앞에 서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그

대로 황해도에 머물렀다.

황해도의 민심 자체가 수상해서 자리 비우기도 껄끄러웠다. 서울과 고양을 비

롯해 개성(송상은 이미 짐 싸서 도망쳤다), 봉산(鳳山), 황주(黃州) 등 지나

오는 고을에 있는 백성들은 호란 때보다 더한 약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강철군주 이공에게 그것쯤이야 큰일을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었다.

이공은 이쯤이면 시준을 충분히 안달 나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사

람을 조종하는 자신의 솜씨에 흡족해하며 영을 내렸다.

“상소에 비답을 내려 줄 때가 왔다. 승지(承旨)들은 들어와 영을 받들라.”

작가의 말

1. 이이명은 익히 아시는 '노론4대신'의 하나로 목호룡의 난 때문에 사사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별 관계는 없는 일이지만 이이명은 포르투갈, 독일 사람들과 북경에서 담론하며 서양 학문을 조선에 수입하려 했던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이건 그가 탄핵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사위 김시발 역시 당대에도 '벌열'이라 지칭되었는데, 실제로 그만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소환되어 국문-유배 코스만 거치고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당대에 이미 경종이 왕으로 보이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후에 영조 즉위 이후까지도 김시발에 대한 논죄는 계속됩니다마는, 이이명이 자신을 왕위에 세워 준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특별히 김시발을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25. 반역자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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