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84화 (84/284)

84화

24. 평양 인민대회(3)

기랑이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했다. 기랑은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아직

남은 장초를 능숙하게 잘라내고 옆에 놓았다.

“너는?”

“뭐?”

“너도 지금 안 늦었어. 지금 협동회나 군병 같은 것 흩어 버리고 고향 가서

점방 하거나 땅 사 갖고 농사지으며 살 수도 있어. 그러면 이런 고민 안 해도

돼.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해?”

중의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도 아닌 기랑에게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던

시준의 눈가가 떨렸다.

“너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나는 장주님과 지유를 구해야……!”

“왜?”

시준은 두 번째로 ‘뭐?’라고 묻지는 않았다. 너무 멍청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준은 노여움을 담아 기랑을 건너다보았다.

“왜 구해야 하는데? 돈 받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라면서. 은혜를 갚으려고? 그

러려면 차라리 이런 일을 하기 전에 가진 돈 전부 싸 들고 홍경래에게 가서

사람들을 사 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지금 네가 이렇게 모아 놓은 사람들을

몰아쳐 관군이나 홍경래와 싸우면, 끌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텐데.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그 지적은 가혹한 것이었다. 홍경래가 그런 거래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는

반박은 무의미하다. 싸워서 이기는 것도 가능성 낮기는 매한가지니까.

기랑과 시준의 나이는 같다. 시준이 경험하고 성장하는 만큼 기랑 또한 마찬

가지다. 기랑은 이제 예전처럼 질문이라고는 ‘죽일까?’밖에 안 하는 단순무식

총잡이가 아니었다. 시준은 어떤 대답도 떠올릴 수 없었다.

시준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지유 때문이지? 지유를 끌고 간 홍경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토막 쳐 버리고

싶지? 데리고 와서 혼인한 뒤에는 그 어느 누구라도, 왕이라도 그런 짓을 하

지 못하게 네 위세를 보이고 고향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 놓고 싶지? 그래서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싸우기로 한 거지?”

“그런 게…….”

“나도 그래.”

기랑은 그러면서 시준에게로 몸을 숙였다. 시준은 기랑이 한 말의 의미에 대

해 생각해 보기도 전에 눈앞이 핑 돌았다. 색채도, 향기도, 촉감도 아닌 기이

한 감각이 시준에게 침투했다.

‘내가 담배를 잘못 갖고 왔나? 내가 지금까지 피우던 게 설마 대마였나?’

물론 아니다. 시준의 뇌를 돌고 있는 것은 그냥 평범한 니코틴이다. 하지만

인류가 발명한 어떤 마약도 그 뇌가 스스로 분비하는 것들에 비하면 하찮을

뿐이다.

“네가 지유 때문에 여기 있는 것처럼 나도 너 때문에 여기에 있어.”

기랑은 한 손을 들어 시준의 옆얼굴을 감쌌다.

사고 능력을 거의 상실한 시준은 담배 냄새에 뒤이어 비누향이 훅 끼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건 영국 비누다.’ 이 상황에서 건설적이지 못하기

로는 우주 최강급의 한심한 생각이었다.

기랑은 시준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남자로 살아도 좋을 줄 알았어. 그러면 네가 혼인하고 살아도 계

속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지유가 없어졌어. 나도 같은 고을 한 동

무니까 걱정했지. 처음에는 그래서 도우려 했던 거야. 그런데…… 지유를 찾으

려고 돈도 버리고 왕명도 어기고 가려는 너를 보고, 내가 정말 걱정했던 게

누구였는지 알았어.”

기랑은 나머지 한 손도 들어 시준의 반대편 뺨에 얹었다. 시준은 그 손이 매

우 차갑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그렇다면 자기 얼굴이 지금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부끄러워하며 몸서리쳤다.

기랑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입술이 매우 느리게 보였다.

“나는 잘 모르겠어.”

시준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든지 간에.

“내가 바라는 게 뭐냐고?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그냥 네 옆에 있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는데, 네가 조금 전에 물어보니까 나도 잘 모르게 되었어. 하지

만…… 네가 날 믿지 못하는 건 싫어.”

시준은 아까의 물음을 격하게 후회했다. 아무리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고 한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기랑은 시준의 얼굴을 쥐고 몰아붙이는 모습이었지만, 시

준이 보기에 기랑은 무언가 절박해 보였다.

기랑의 목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표(信標)가 필요해?”

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랑의 두 손은 그리 강한 힘이 실려 있지 않은데도 시준의 목 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시준은 어떤 말도, 고갯짓도 할 수 없었다.

기랑은 시준의 얼굴을 놔주었다. 하지만 시준이 풀려난 건 아니었다. 다음 순

간, 기랑은 시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리에서 힘을 뺐다.

시준이 조선 사람과 다르게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

이다. 기랑은 시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여기까지는…… 지유랑 너…… 봤어. 이다음은…… 몰라.”

어눌해진 기랑의 말투는 이전, 시준을 처음 만났던 그때와 비슷했다.

시준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규모의 심상이 줄달음질 쳤다. 광인의 꿈에서나 나

올 법한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정신없이 교차했다. 시준은 애매하게 들어 올

린 두 손을 어쩌지도 못하고 가늘게 떨었다.

시준은 맹세할 수 있었다. 시준이 의주를 장악하며 영국인과 무역을 트고 평

양을 털어 평안도를 주름잡았던 그 모든 일에서 벌어졌던 난관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위험했다.

그래도 이것이 시준의 끝은 아니었다. 심각한 위험에서 극적인 원군으로 기사

회생하는, 역사의 많은 위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시준에게도 일어났다.

이 야밤에 있을 리 없는 바깥의 소란은 굳어 있던 시간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준은 공포인지, 아니면 안도인지 알 수 없는 감각으로 그 균열을 황

급히 열어젖혔다.

“누가 왔나 봐.”

시준은 자기가 온 힘을 써서 기랑을 떼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랑은 그

렇게 완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시준이 싸워야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기랑은 그저 일전, 압록강에서 시준에게 업어달라 부탁하던 그때의 표정을 짓

고 있을 뿐이었다. 시준은 외면하기 힘든 그 얼굴을 향해 서둘러 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렇게 묻지 않을게. 함께 지유와 사람들을 구하자.”

시준은 필사적으로 기랑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지금 시끄럽게 떠들며 시준

의 거처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의 소란 때문에 초조해졌는지, 아니면 기랑에

게 동요가 없는 것인지 시준은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시준은 초조함 때문에 다시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나는 네가 끝까지 내 옆에 있을 것을 결단코 믿는다. 절대 의심하지 않아.”

“……응.”

그리고 무력위원회 후보위원이며 오죽당주 대리 홍총각이 쳐들어오듯이 들어

서서 급한 소식을 말했을 때도, 솔직히 시준은 태연하게 책상 옆에 서 있는

기랑이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까만 걱정했다.

“회장. 큰일이 났소이다. 지금 가산 쪽 간부와 사용인들이 영변부 관아에 잡

혀 들어갔소! 돌려받고 싶으면 회장이 와서 인사드리고 발명(변명)하라는 서

신이오!”

부사 오연상의 준엄한 서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사치들이 무슨무슨 회인지

무엇인지를 제멋대로 만들어 고을의 정사에 간여하고, 또 사사로이 장정을 모

아 사병(私兵)을 꾸리므로 그 뜻이 적지 않게 의심스럽다는 얘기였다.

아까 일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세 번이나 서신을 읽어내린 시준은, 조금 후에

야 다시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는 오연상의 평가를 조금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걸로 내가 넘어가서 예물 갖추고 찾아갈 거라 생각한 걸까?’

오연상의 흉중이야 뻔하다. 시준이 만약 정말 부하들을 풀어달라 사정하러 찾

아가면 냉큼 잡아 가두고 인민대회와 서상을 해체시킬 생각이다.

물론 이것은 오연상이 서상의 병력 규모를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

다. 정공법으로는 절대 안 되리라고 판단하고 짜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계략이다.

그러나 시준은 혹시 영변 부사가 – 조선에선 시준 역시 먹어보지 못한 – 회를

좋아하지 않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정말 날로 먹으려는 속셈이군.”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새어 나온 난폭한 어투는 시준 자신의 귀로 다시 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시준이 그 정신을 완전히 다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지유를 구하는 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성공할

지 말지 불투명한 판에, 부사를 족쳤을 때의 정치적 부담이니 가까운 사람을

역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느니 하는 배부른 고민은 말 그대로 사치다.

시준은 납치되었다는 이희저의 부하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름도 모른

다. 허나 그것은 아까 기랑의 말과 맞물려서 지유의 납치와 거의 비슷한 정도

의 분노를 유발했다.

기랑의 말을 인정한다면, 이들에 대한 납치는 지유에 대한 납치와 당위적으로

같다.

시준은 지금까지의 정책을 180도 선회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는 되도록 재

물로 타협하거나 그도 안 되면 향임 손을 빌려 차도살인하는 정도였으나, 이

제 그런 미적지근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대체로 뭐든 옛것이 최고다. 의주에서 하던 대로 하면 문제없다. 매수할 수

있는 녀석은 매수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예 어둠 속에 묻어 버려 귀찮은 뒷일

을 없이 한다. 역시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의 방식을 사용했어야 했는데 생각

이 짧았다.

시준은 기랑에게 건네받은 아까 그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닿자

부사의 서신은 순식간에 검은 재로 화해 사라졌다.

기랑이 들어왔을 때는 조선 기준으로 전날 밤보다 다음 날 아침에 가까운 때

라서, 평양에 있던 무력위원회 구성원과 오죽당을 비롯한 몇 개 민병대가 다

모였을 때쯤에는 이미 해가 부옇게 밝아 왔다.

군대 담당들만 있는 건 아니고 자기 휘하 사람들이 잡혀가서 초조해진 평준위

원회 부위원장 이희저 또한 거기에 있었다. 시준은 그 모든 사람 앞에 섰다.

그는 선언하기 전 어디까지나 무력위원장 차형기가 지금 공석이므로 자기가

자리에 있는 자로서 즉응(卽應)한다 밝혀 두었으나,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사

람 중 그 말에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민대회에서 밝혔듯이, 평안도 백성을 어루만지는 서상의 사업에 동참하는

자는 등짐 지는 노비라고 해도 모두 우리 동지(同志, comrade)요. 선비는 자

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 『전국책(戰國策)』] 하였고

동지라는 것은 곧 뜻을 같이하는 자이니 이보다 서로를 알아주는 자들이 없

소. 그렇다면 우리가 동지를 위해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준으로서는 조선 사람들을 봉건주의와 점진적으로 결별시키기 위한 의도적

인 단어 선택이었다. 다만 민병대원들이 그런 깊은 의도까지 헤아릴 수는 없었다.

과연 유명한 희만 정약용 선생의 제자라 그런지 뭔가 말이 유식해 보였다고

여겼을 뿐이다. 병사들은 모두 손에 든 것을 높이 들어 흔들며 외쳤다.

“아니오이다!”

“불의한 자로서 원수가 되면 대낮 시장통이라도 한칼에 베어 버리고, 밥 한

끼 먹여준 은혜를 위해 자기 얼굴 가죽을 벗겨내는 것이 협의(俠義)올시다.

협객이 관부를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스승님께 힘써 배운 학문 어디에

도 없었소.”

시준이 성현의 학문을 힘써 익혔느냐고 정약용에게 물으면 그조차도 조금 주

저하겠지만, 협객 – 그러니까 깡패 출신인 이 자리 사람들은 희만 선생마저

자신들과 같은 부류였다는 기쁜 소식에 깊이 공감했다.

시준은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거친 평안도 사람의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 서도 사람들이 기자 이후 사천 년간 스스로의 두 팔뚝만 믿고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었고, 흉년에도 저들 챙기기에만 바쁜

관부 대신 종횡무진한 지 오래요. 이제 와서 젠체하며 거드럭대는 저자들에게

금은과 미포를 바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 하오이다!”

여느 군대 같으면 당장 달려 나가도 모자라지 않을 기세가 완성되었다. 그러

나 시준은 왕이 아니었기에,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시준은 한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지금 여기에 평준위원회의 김 위원장(김창시)과 부위원장인 이 장주(이희저)

께서 계시고, 무력위원회 위원인 나 정시준이 있소. 정치국 위원이 셋 있으니

우리 회(會) 규약(規約)에 따라 긴급한 일을 결정할 수 있소이다. 정치국의

이름으로 출병(出兵)을 명하는 것에 두 위원은 동의하시오?”

이희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일인데 당연했다. 김창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이 분위기에서 당당히 반대를 외칠 사람이었으면 애

초에 시준에게 포섭되지도 않았다.

결국 김창시도 찬성하자, 서도상고총협동회 무력위원회는 근문소 정치국의 긴

급 승인에 따라 창설 이후 최초의 군사 행동을 결의했다.

오연상은 분명 군재 있는 자였으나, 바로 그랬기 때문에 무력위원회를 숫자

외의 분야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국가 정규군조차도 조금만 놀래키면 거미 새끼처럼 흩어지는 나라에서 자란

오연상에게 ‘군대의 수준’이란 것은 그 정도였다.

민병대 어중이떠중이들은 그보다도 못한 게 당연했다. 나무랄 수도 없는 판단

이다. 그래서 오연상은 새벽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선비답게 여유 있는 장구

지계를 계획할 수도 있었다.

“그 정시준이라는 자는 교활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하니, 아마 얌전히 오지는

않겠지. 감히 심부름꾼을 보낸다면야 잡아 놓고 다시 부르면 그만이고, 만약

오지 않는다면 태천, 안주, 개천의 군을 모두 모아 번개같이 몰아서 평양에

들어간다. 지금 조정이 어수선하고 사방에 난신적자가 가득하므로 우리밖에

나설 자가 없느니라.”

사실 그건 영변을 둘러싼 이웃 고을인 태천과 안주, 개천의 수령이 오연상에

게 동의할 때 가능한 계획이다. 그러나 오연상은 그들이 만약 협조하지 않으

면 똑같이 난신적자, 그러니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워 주리라 결심한 상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군관 황유청(黃有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상은 옛날부터 영길리국과 통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망극한 마음을 먹어,

영길리의 군사를 빌려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성상의 신묘한 지혜일세. 저들끼리 몰래몰래 장사한다면 영길리

국이 만상의 편을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성상께오서 통무아문을 설비하시고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영길리 사람이라 한들 왜 나라의 떳떳한 대의를

놔두고 흉적(凶賊)에게 손을 보태겠는가?”

사실 영국은 나라의 떳떳한 대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흉적에게 손을 기꺼이

빌려주는 나라지만, 아무래도 서양 문물에 어두운 오연상은 실수를 범하고 말

았다.

잠시 후 나갔다 온 황유청이 보고했다. 서상의 무리들이 영변부 관아 밖 삼

(三) 리쯤 되는 곳까지 왔는데, 이런저런 수레를 끌고 있었으며 앞에 있는 것

은 분명히 회장 정시준이라는 말이었다.

오연상은 매우 기뻐했다.

“좋다! 그 어리석은 반도가 여기 들어오기만 하면 내 엄정히 형문하여 그 흉

한 속셈을 낱낱이 까발릴 것이야. 모두 위엄을 보일 수 있게 병사를 모아라!”

황유청은 명을 받들고 서둘러 나갔다. 3리라면 수레를 끌고 왔다 하더라도 그

리 멀지 않은 거리다.

그리고 오연상이 자기 말대로 ‘위엄을 보이기’ 위해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막

동헌으로 나섰을 때, 방금까지 그가 있던 관소 지붕이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먼지가 솟구쳤다.

시준은 영국에서 수입한 망원경을 눈에서 떼었다.

“맞았소이다.”

홍총각 휘하의 오죽당원들이 환호를 올렸다. 홍총각이 아직 군기 부족한 부하

들을 사납게 다그치며 아까 쐈던 대로 다시 쏠 것을 지시했다.

영국이 자랑하는 6파운드 포 여덟 문이 불꽃을 토했다. 포환은 1,500야드의

거리를 날아가 영변부 관아를 무자비하게 타격했다. 얼마 전 김치 값으로 얻

어왔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망원경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꼴은 마치 눈으로 보는 듯했다.

평양에서 여기까지 오는 사흘 동안 합류한 무력위원장 차형기가 조소했다.

“내가 졌군. 영변 부사는 재주 있기로 이름난 자였는데 이렇게 바보 같을 줄

은 몰랐어. 약산성에 들어가든가, 그것도 아니면 병사를 빨리 모아 마주쳐 나

왔어야지.”

그러나 시준은 오연상이 그럴 수 없을 거라 예측했고, 결국 시준이 내기에서

이겼다. 수령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은 건방진 장사치들을 혼내주고 단속하

는 정도지 전쟁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오연상은 척후를 촘촘히 깔아두지 않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결국

무력위원회는 어처구니없게도 세월아 네월아 하며 당당히 영국 대포를 끌고

와 관아에 쏴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오연상은 자기가 공격할 것만 생각했지 수비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

다. 만약 오연상이 차형기의 말대로 했다면, 청군을 대비해 배치된 그 성채를

무력위원회가 함락시키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당연하지만 황유청은 시준에게 매수된 사람 중 하나였다. 거짓 보고 후에 오

연상이 잡고 있는 인질을 풀어준 다음 달아나기만 하면 그는 평생 놀고먹을

액수의 금은을 얻을 수 있었다.

이희저가 신뢰하는 부하들인 만큼 인질은 알아서 평양이나 가산으로 복귀할

것이다. 시준은 이제 인질의 안위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재차 사격을 명

령했다.

꽝! 꽈광!

영변부 관아의 이속이나 하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비명과 함

께 뛰쳐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참변이었다.

물론 영변부 관아도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것은 아니다. 오연상이 칼을

갈고 있었던 만큼, 원래 여기에도 기백을 헤아리는 군세가 있었다.

하지만 시준에게 매수당한 군관들은 돈 받았으면 일 끝까지 완수하는 프로의

자세를 보였다.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방화범의 불꽃과 어지러운 고함이 사람

들을 미치게 했다.

그리고 그 위로 끼얹어지는 포격은 도대체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상황

에서 영변부 군졸들은 지금 같은 개수의 허수아비만큼도 가치가 없었다.

시준의 망원경에 비치는 영변부 관아는 마치 둑 터진 압록강 같았다.

세 번째 탄을 발사하려다가 떨어뜨리고 야포 위에 엎어진 젊은이 하나의 엉덩

이를 홍총각이 걷어찼을 때,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시점을 가늠하던 시준은 곧

결심했다.

그는 뒤돌아서서 칠팔십 명쯤 되는 오죽당 당원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기랑이 거기에서 심상한 태도로 머스킷을 멘 채 서 있었다. 시준은 침을 삼킨

다음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지금 근문소 정치국과 무력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위원 정시준의 명령

이다.”

오죽당원들은 왜 뻔한 말을 반복하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그 이유를 아는 기

랑의 얼굴에만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시준은 그것을 못 본

척하고 이어서 말했다.

“이제 잡힌 동지들을 구한다. 그러므로 여기 있는 동지들은 괜히 큰 싸움을

벌여 용맹을 뽐내거나 사람을 함부로 다치게 해 원한을 살 필요가 없다. 지금

영변 부사는 놀랍고 두려워 반드시 관소에서 나와 도망칠 것인데, 그를 호종

하는 관군에게는 총을 요란하게 놓아 지체시켜라. 그러면 뒤는 포수 기랑과

선포수(善砲手, 저격수)들이 맡는다.”

시준의 말대로였다. 관아 안으로 포탄이 쏟아지니 오연상이 아무리 준재라도

견뎌낼 재간이 없다. 오연상은 그나마 남은 군졸 삼십여 명과 함께 그대로 뛰

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평판에 영 맞지 않는 무계획적 행동이었다.

생애 최고의 속도로 달리던 그들은 곧 갑자기 멈추어 버린 앞사람의 등에 코

를 부딪쳐서 자빠지거나 땅을 굴러야 했다.

“저, 저놈들은 무엇인가!”

검은 옷의 기괴한 군세는 정통 프랑스식 대열을 이룬 채, 아직 프랑스 사람들

도 모르는 역동적 기세[élan vital]를 발휘하여 총을 쏘아댔다. 시준도 놀랄

정도의 격렬한 포화였다.

이 시대 전열보병의 전투에서는 공포와 함께 도덕적 양심이 많이 작용하여 의

외로 총을 격발하지 않는 병사가 많았다. 백 보도 안 되는 거리에서 총탄을

교환하는 일은 처형 집행관과 사형수의 기분을 동시에 맛보는 무시무시한 경

험이었을 테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시준 역시 오죽당원들이 기세와는 다르게 반이나 전투에 참여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시준의 오산이었다.

동지를 납치한 원수놈들을 상대로 망설이는 건 나약한 서양 오랑캐들이나 할

짓이었다. 오히려 그런 얼간이에게는 다리 사이의 그거 얼른 떼어 버리라며

조롱할 작자들이 평안도 사내들이다.

가장 발 빠르게 도망치던 군사들이 푹푹 쓰러지자 부사 오연상은 주춤주춤 뒤

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바로 그랬기에 기랑은 무리에서 잠깐 떨어진 오연상을 사선에 넣

을 수 있었다.

혼자서 무릎 꿇은 채 이질적인 러시아 머스킷을 내밀고 있던 기랑은 방아쇠를

당겼다. 시준에게 있어 그 탄환은 영변 부사, 나아가 안주를 중심으로 한 평

안도 중부 방어체계를 단번에 꿰뚫는 탄환이었지만 기랑은 저격수답게 그런

잡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랑의 몸이 반동 때문에 약간 뒤로 흔들렸다.

오연상이 곰 앞발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젖히며 나가떨어지는 그 순간

에도, 기랑의 머릿속에는 방금 자기 손에 죽은 전직 이조 참의의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1. 엘랑 비탈은 앙리 베르그손의 개념에서 탄생한 것으로, 베르그손이 19세기 중반에나 태어난 철학자인지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2. 군관 황유청은 실제 이때 영변부에 소속되어 있던 군관으로 홍경래의 난에서 공을 세웁니다. 훈련도감 출신 군관이라 꽤 유능했다는 평가죠. 작중 나온 것과 달리 비위 사실은 딱히 없습니다.

24. 평양 인민대회(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