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83화 (83/284)

83화

24. 평양 인민대회(2)

홍경래는 지금 시앗 본 정실의 기분을 격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홍경래군에게 남북에서 도착한 두 소식은, 긍정적으로 보면 일단 고무적인 소

식이었다.

북쪽에서는 인민대회인지 뭔지가 열려 홍경래가 통제할 수 있는 인사인 시준

이 권세를 잡았으며, 남쪽에서는 왕이 오로지 홍경래의 근왕병에 의지한 채

도성을 탈출했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오군영은 이제 왕의 명령에 따라 서울을 들이칠 터요, 김

조순이 스러지면 홍경래가 왕을 모시고 당당히 환궁할 수 있다.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아직도 미륵세계 실현에 매

진하는 저 호걸 임청과 같이 원래 반란군은 반드시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그

렇지 않으면 반란 따윈 꿈도 못 꿀 테니까.

그런데 홍경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반란군이 아니고 근왕군이기 때문

이다. 우군칙이 그 점을 지적했다.

“임금이 데리고 나오는 군세는 우리보다 많을 수도 있네. 그러면 무엇으로 나

중에 충의를 주장하겠는가?”

금위영에는 오히려 군졸급이 별로 없다. 왕이 인솔하는 금군의 핵심 주력은

거의 전원 군관, 그러니까 벼슬아치다. 게다가 주요 조신과 내명부 왕실 식구

들까지 하면, 홍경래군 따위는 거기에서 발이나 닦으면 영광이다.

그렇다고 평안도에 들어가면 홍경래가 시준을 이용해 지역의 지지를 얻어 왕

을 통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평안도에는 홍경래의 생간에 천금이라도 기꺼이 지불할 자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평준위원회 부위원장 임상옥 같은 자가 그렇다.

다시 말해 홍경래는 지금, 병력의 우세는 왕에게 빼앗기고 여론 – 다시 말해

돈 – 의 우세는 시준에게 빼앗길 위기였다. 왕과 시준이 붙어먹으면 홍경래는

정말로 첩실에게 방 빼앗긴 본부인 신세가 되어야 한다.

홍경래는 이를 악물었다. 왕 하나 믿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풍찬노숙(風餐露

宿) 마다하지 않고 걸어왔다. 왕에게 큰 장애가 될 평안 감사를 대담하게 해

치워 정치적 부담도 덜어주었다.

그런데 왕은 홍경래군을 푸대접할 심산처럼 보이니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경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왕도 갖고 있지 못하고, 시준도 갖고 있

지 못한 것을 떠올려야 했다. 최소한 왕이 군을 끌고 고양에 당도하기 전까지

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왕이 하루빨리 눈앞에 나타나길 바랐는데, 이제는 제발 좀 천천히

왔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다행히 홍경래의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는 머지않아 원하던 것을 떠

올렸다.

지금까지 홍경래군 간부들이 소소한 정리로 나눠 주는 쌀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자, 홍득주는 김사룡에게 매달렸다.

“아니, 왜 갑자기 안 된다는 건가? 생사람 다 굶어 죽으라는 것인가!”

“생사람이라? 역적의 앞잡이가 말은 잘하는군.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군량을

헐어 축내던 반적들은 모두 목을 베었소. 어쩐지 다들 주린 데도 이 겨울에

살이 피둥피둥 올라 있다 했지. 지금 당장 내가 장주의 목을 베지 않는 것은,

우리 대원수가 옛날 정리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역적은 마땅히 곧 오실 나랏

님의 처결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외다!”

홍득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 역시 홍경래군이 도성으로 들어갈 줄 알았지,

왕이 도성 밖으로 나올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준의 서신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홍가장 식구들은 전장의 소란

을 틈타 – 설마 공성전 하면서 포로들을 데리고 가진 않을 테니 – 빠져나갈

생각으로 조용히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늦었다. 굶주린 홍가장 식구들이 이판사판으로 나오리라는 것쯤

이야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요, 홍경래는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이 패를

절대 뺏길 수 없었다.

그래서 김사룡은 아예 홍가장 사람들을 묶어 버렸다. 부녀자도 예외 없어서

지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유근이 반한 지유의 미모는 좀 지치고 더러워졌다 한들 그리 쇠하는

것이 아니었고, 홍경래군이 군율 엄정한 정예라고 말하기도 힘들어서 곧 무뢰

배들이 나왔다.

“저, 장군 나리. 듣자 하니 나랏님이 오신다던데 어차피 역적이 좀 역적답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리 깨끗한 입성에 하얀 낯짝을 하고 있으면 나랏

님이 보시고 노하실 것이외다. 우리가 무슨 상전처럼 떠받든 줄 아실 테니 말

이오이다.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헤헤…….”

호칭도 엉망이고 논리는 더 엉망이며 도출되는 결론은 파멸적이었다. 김사룡

도 수준이 그리 다르지 않아서,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눈감아줄까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의주에 많이 드나들어 홍가장 식구의 관계를 대충 아는 우군칙이 말리지 않았

으면 아마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나랏님의 결단이 있어야만 역적이 되는 것일세. 만약 저들이 무고한 양민으

로 처결된다면 어찌하려는가? 이제 나랏님 모시고 북으로 올라가야 할지도 모

르는데,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온 의주 사람들이 다 들고일어나는 꼴을 보고

싶은가! 사룡이 자네도 자네지. 포로라 할지라도 군병이 죄다 함부로 겁간하

느라 들떠서 바지 까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아예 군직을 놓게!”

홍경래군 2인자인 우군칙의 말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도 정론이

라 김사룡도 치욕스러운 기분으로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임금의 명만 떨어지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리라는 우군칙의 장담에

결국 무뢰배들은 침을 뱉고 툴툴대며 흩어졌다.

여기에서 시준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우군칙의 마지막 자제력이었다. 홍

경래가 시준을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실제로는 홍경래가 시준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실제로 홍경래의 생각은 옳았다. 시준은 홍경래가 외경심을 느끼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인민대회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민중의 바람직한 힘을 결집시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의심되기는 하지만, 각 고을의 수령

과 관부는 머저리 집단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혹을 느낀 것은 평양과 가까운 영유현(永柔縣, 현재의 평원군)의

현령 정동만(鄭東晩)이었다.

“인민대회라는 것은 대관절 무엇인가? 어느 경전에 민(民)이 모여서 저들끼리

무언가를 논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흉년이라 민심도 소란한데 반드시 좋은 일

이 아닐 터이다. 이는 곧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무리가 아닌가!”

정동만은 향임들에게 지시하여 관군을 소집하고, 평양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월권이라 해도 평양 감사가 없으니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평안

도의 충의지사는 정동만이었다.

그리고 향임들은 진절머리를 냈다. 19세기나 21세기나 상관 중에서 골치 아픈

부류 중 하나가 뭐에 꽂히면 남의 말 안 듣는 종자들이다. 향임들은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왜 잘 있다가 갑자기 발광이야? 한 달 전 난리 안 나게 막아 준 게 바로 서

상의 쌀과 감자 아닌가!”

“지금 서울이 하수상하니 뭔가 건수 잡아 최(最, 고과의 상위 평가) 얻어 보

려는 게지.”

“어이, 조(趙) 나장. 자네 그 대회 갔다 왔다고 했지? 어떻던가?”

“감영 좌우를 지키고 있는 장정들이 적어도 수백은 되어 보였소. 모두 양총

(洋銃)이나 조총을 들고 있고 칼과 창이 시퍼런데 누구나 그 앞에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거북이처럼 하여 황급히 지나가더이다.”

“그렇고말고! 아니. 지금 창고에 활줄은 다 풀리고 화살은 있지도 않은데, 어

디서 군을 가져오라는 거야?”

“무기고 뭐고 사람 기백 명을 모아놨다가는 먹일 밥도 없네. 아니, 그 전에

부르면 오기나 할까? 아마 그 대회 ‘장정’ 중에 우리 영유현 병졸도 한 여남

은 명은 될걸?”

결국 수령이 협동회와 근문소를 상대로 최후에 쓸 수 있는 도구는 관군이다.

시준은 무력위원회에서 제시했던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아껴 두었던 자신의

개인 현금을 살포하여 군대를 옥죄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원래 지휘관이 병사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체

제를 자랑했다. 명령 계통이 여러 군데다 보니 전쟁 때는 총탄과 화살보다 공

문이 더 많이 날아다닌다. 신속한 진군과 후퇴는 꿈도 못 꾸고 내부에서의 충

돌 역시 빈번했다.

시준에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조선군을 개혁하라면 눈앞이 캄캄했겠지만 조

선군을 박살 내기는 너무나 쉬웠다.

향임을 시켜 지방군의 여러 수입원을 방해하거나, 군관을 매수하여 군량을 빼

돌리자 군대는 며칠도 안 가 굶주렸다.

조선의 행정체계로 이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몇 놈을 불러다가 매우 쳐야

하는데, 수령이 아무리 작심해도 향임들이 장부 깨끗하게 만져서 넘겨주는 데

야 별도리가 없었다. 선비가 창고 들어가서 쌀섬 셀 것도 아니지 않는가.

병사는 아예 대놓고 빼내어 왔다. 쌀 한 말로 안 넘어오는 녀석은 두 말을 안

겨 주면 넘어온다. 평안도 관군 중 적잖은 수가 삽시간에 오죽당원을 겸했다.

조선 특성상 병사는 소집에만 응하면 되는지라 부업으로 오죽당 가서 힘 좀

쓰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인간은 없었다.

그리고 나라와 무력위원회에서 동시에 소집령이 떨어지면, 그들이 어디를 선

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나 조선 지방군은 원래 이렇게 막장이었기 때문에 좀 더 막장이 된다 한

들 별로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파멸적인 보급이나 있지도 않은 무기, 엉망진

창인 군적 따위는 수령들에게 있어 변명이 못 된다. 그 상태가 ‘정상적인’ 조

선군이니까.

정동만 역시 항상 듣던 소리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관군의 위엄

을 보여 인민대회를 토벌할 기세였다.

“너희가 병법을 읽지 못하였느냐. 헤아려야 할 다섯 가지 일[五事] 중 첫째는

도리요, 두 번째는 하늘이다[一曰道 二曰天, 『손자병법(孫子兵法)』]. 그것

이 모두 우리에게 있는데 무슨 궁시가 모자라니 곡식이 없니 같은 태만한 소

리들을 하고 있느냐. 나라의 관군은 무기가 없으면 맨주먹으로라도 의기를 떨

치는 법이다!”

정동만의 생각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대한민국 육군 부대가 자기 부친 나이보다는 좀 어린 수통이나 물 안 들어가

는 전투화 같은 거 없이는 진격 못 한다고 뻗댄다면 어떻겠는가?

21세기 국방부는 그 순간 19세기 영유현령과 시대를 초월한 의견 일치를 보일

것이다. 결국 이럴 때 위에서 보낼 것은 선진병영이 아니라 헌병대다.

정동만 역시 향임들이 자꾸 미적거리면 서울이나 이웃 고을, 심지어 함경도에

연락해서 너희들부터 쓸어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향임들은 항상 하던 대로 자기 사재에서 돈을 내어 사람

을 모아야 한다.

후기 조선 지방군이 사실상 중앙으로부터의 동원 능력을 상실하였음에도, 난

리 나면 어쨌건 군대 비슷한 것을 모아 왔던 이유는 아랫것들의 이런 눈물 나

는 멸사봉공 덕분이었다.

사실 이런 사유재산 침해가 홍경래의 난에서 향임이 동조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향임들은 당연히 불만에 가득 찼다. 게다가 지금 그 향임들에게는 걸

리는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호장은 영유현과 협동회의 일종의 연락책인 조 나장에게 다시 물었다.

“정치국에서는 뭐라던가?”

이미 그들은 정동만의 역점 추진 사업을 시준에게 보고한 뒤였다. 영유현에서

평양부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조 나장은 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들어온 말을 읊었다.

“근래에 삼화부에서 난리가 나서 수령이 횡사했다는데, 우리 현령도 그렇게

엄한 사람 의심하며 열을 내다가 기혈이 거꾸로 치솟지 않을지 걱정된다고 합

디다. 굶거나 곤란한 사람이 나오면 언제든지 근문소가 도와주겠다 하던데요.”

삼화부사 김영의 사례는 이제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사고 쳐 놓고 근문소에 달려가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각지 고을 농민들이 이

방법을 절찬리 써먹은 결과, 현재 이 평안도에서 수령의 주화입마 사태가 무

슨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수령 모두가 김조순처럼 무협지를 좋아한 게 아니어서 운기조식의 묘법을 발

휘하기 힘들었다.

다만, 의주 부윤 조흥진이라던가 용천 부사 허명, 철산 부사 이장겸(李章謙),

선천 부사 김익순(金益淳) 같이 원래 똑똑하거나 아니면 항복이 특기인 사람

들은 일찌감치 시준에게 협력해서 기혈을 바르게 유지할 수 있었다.

눈치라면 조선에서 제일가는 계층인 향임들은 정치국에서 뭐라고 말했는지 금

방 눈치챘다. 호장이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흠. 지금 조정에서 영이 내려오지 않는 건 제군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요

사이 이 사람이 얻어듣자 하니 그게 잠깐의 일이 아닌 것 같네.”

이공은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려 많은 부분을 희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것

이 내시 옷으로 갈아입고 추하게 벌인 도주가 아니라 몸소 군의 앞장을 서서

근왕병을 결집하는 위대한 원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될 리 없다. 정보 조작도 최소한 일부는 말이 되어야 하는 거지,

천하의 조제프 푸셰마저도 그런 짓은 난감했다.

이미 시준은 지금 도성이 평안도에 신경 쓸 틈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다 퍼

뜨린 뒤였다. 인민대회는 그런 소문의 집결지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해 주었다.

어떤 의미에선 전신보다도 빠른 통신 수단인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가 평안도 전역을 휩쓸었다. 향임들은 이제 조정도 없는데 왜 자기들이 조정

에서 내려온 사람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암암리에 퍼지는 ‘그 얘기’를 알고 있다. 소문 중에는 향임

들이 듣기에도 좀 뭣한 것도 많아 – 예를 들면 왕이 스스로를 거세하고 도망

쳤다던가 –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 소문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 자는 없었다. 대신 향임들은

행동에 들어갔다.

행동 빠른 자 하나가 의주에서 그 귀하다는 마비산을 가지고 왔다. 얼마를 써

야 할지 몰라 그 비싼 모르핀을 탕약에 콸콸 부어댔지만 어쨌든 효과는 확실했다.

정동만은 누운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한 일

이었다.

“허어,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비바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침저녁으로 화

와 복이 갈마든다[天有不測風雨 人有朝夕禍福, 『명심보감』]더니 어찌 정정

하시던 분이 이럴 수가.”

“약이며 밥상에 젓가락을 찔러 보아도 전연 이상한 점이 없었는데 놀라운 일

이오.”

“아무튼 일이 이리된 거 어찌하겠는가. 요사이 너무 성을 내셔서 기혈이 막히

신 모양인데, 어서 장사 치르고 평양에 사람 보내지.”

조선 지방관은 가족을 임지에 데려갈 수 없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제한되어

있어서, 향임 전원이 작당할 경우 막을 방도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단이 조선 왕조 내내 쓰이지 않은 것은 어차피 사람

입을 통해 새어나가기 때문인데, 지금은 새어나가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근문소가 다 막아줄 테니까 말이다.

과연 얼마 안 있어서 정치국에서는 수령의 때 이른 죽음에 탄식하며 현민들을

위로한다는 정중한 답신이 왔다.

그리고 서신만 온 것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도적을 막기 위해, 다시 말해 향

임들에게 무슨 수령을 독살했느니 같은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놈

들을 두드려잡기 위해 군대도 같이 도착했다.

평안도에서 날로 이름을 떨쳐가는 호걸 홍총각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식으로

속성 훈련된 시준 직속의 최정예 부대 100명이었다.

평안도 수령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독살당하고만 있던 건 물론 아니다.

가장 골치 아픈 곳인 영변 대도호부(大都護府)는 시준으로서도 머리를 좀 감

싸쥐어야 했다.

영변에 대도호부가 괜히 설치된 것은 아니다. 영변은 북쪽에서 평양으로 내려

오는 길목이다. 이곳을 장악하지 않고선 시준의 본거지인 의주나 용천과 평양

의 원활한 연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바로 그래서 조선은 여기에 옛날부터 대도호부를 두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또한 이 영변 대도호부에 근무한다.

병마절도사와, 병마절도사가 겸하는 대도호부사는 이공의 삽질 덕에 공석이라

다행이지만 영변 부사가 공석인 건 아니었다. 지금 영변 부사는 원 역사에서

홍경래의 난의 영웅 오연상(吳淵常)이다.

이조 참의까지 했던 인물인 데다 군재에도 능해 당시 잠입해 있던 홍경래군의

간자를 잡아내고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태천군을 탈환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니까, 적어도 전생의 시준보다는 훨씬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오연상은 평안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단속군

(團束軍)이나마 끌어모으는 모양이었다. 있지도 않은 군대로 까불다가 영면에

든 정동만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푸셰의 프랑스군이나 인민위원회 휘하의 군대는 아직 굳이 전투를 치르게 하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영변 대도호부 전체에 대한 금융 공격을 계획

했다.

오연상이야 준걸이라 할지라도 그 아랫사람들까지 전부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시준은 며칠 만에 영변, 그러니까 무산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료를 펼쳐 놓고 야밤까지 끙끙대던 시준은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일전 지유가 납치되고 피운 뒤로 전생의 버릇이 되살아났다. 유학 시절의 흑

역사가 있어 대마까지는 손 안 댔지만 일껏 새로 얻은 허파가 다시 더럽혀지

고 있었다.

그리고 시준의 뒤에서 손이 하나 뻗어 나와 그 담배를 부드럽게 낚아채 갔다.

시준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한숨을 쉬었다. 애용하는 러시아

머스킷을 등에 멘 기랑이 거기에 서 있었다.

“뭐야, 기랑이냐? 기척 좀 내고 들어올 것이지.”

기랑은 시준의 담배를 입에 문 채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준은 그 표정에

서 기랑이 이미 헛기침도 해 보고 옷 스치는 소리도 내 보고 별짓을 다 해 봤

음을 알아챘다.

“미안하다. 내가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서상의 회장 정시준은 그에 걸맞은 경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기랑이 무기

까지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기랑이 오래전부터 시준의 최측근 호위병

으로 암암리에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시준은 인민대회 당시부터 기랑을 부녀회 같은 곳에 보내 다른 직업을

찾게 해 주려 했다.

지금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는 서상의 형편상 여자들도 모여 의주바지를 만들

거나 하는 식으로 살림을 보태고 있었다. 임상옥과 친한 시준의 연줄이면 기

랑 한 사람의 세탁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랑은 그것을 거부했다. 어차피 얘 상대로 설득이 안 통한다는 것을

시준도 알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답게,

주위에서 회장이 비역질에 취미 있다고 쑥덕대는 환장할 상황도 내버려 두었다.

기랑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기밀 자료를 훔쳐보려고 했다기보다 그저 시

준에게 더 가까이 와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시준은 혹시 기랑에게 무슨 수가

있나 싶어서 자료를 보여주었다.

기랑이 군 지휘관의 자질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어도 기랑은 명석한 포수이며

무엇보다 시준이 가장 신뢰하는 친우였다.

하층민을 대상으로 수집한 만큼 자료가 대개 언서라서 기랑도 읽을 수 있었

다. 시준은 한탄하듯 말했다.

“여기만 손에 넣으면 평안도 마흔두 고을 어디에서든 뒤통수 맞을 걱정을 안

할 텐데 큰일이야. 인정도 써 보고 협박도 해 보고 별짓을 다 했는데 이건 향

임만 어찌해서는 안 되겠어. 아무래도 약산성(藥山城, 영변대도호부의 본성)

의 군대까지 조금 빼 왔나봐.”

기랑은 주위를 좀 둘러보더니, 시준 앞에서만 쓰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산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호랑이와 표범이지만, 가장 무서운 건 그게 아니다.

담비야.”

시준도 이제는 알고 있다. 이 시대 평안도 산골의 담비는 다큐멘터리에나 나

오는 귀여운 포식자가 아니다. 그 재빠른 움직임과 교활한 영악함으로 사냥꾼

과 산촌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요물이다.

호랑이도 성난 황소 앞에서는 물러나건만, 담비는 저보다 몇 배나 큰 노루와

고라니, 멧돼지도 거리낌 없이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비결은 가족 단위로 이

루어지는 정교한 합동 공격이다.

“아비가 먼저 사냥감을 보고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눈을 흐트러뜨리면

어미와 자식들이 눈이며 사타구니를 물고 매달리지. 그리고 짐승이 놀라 쓰러

지거나 했을 때 아비가 달려들어 목을 무는 거야. 그래서 능숙한 포수는 단발

에 아비를 쏘아 넘겨. 그러면 나머지는 흩어져 버리게 돼.”

현대 동물학자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지만 기랑은 확신에 찬 태도

로 말했다. 시준이 언뜻 그 의미를 알아듣고 물었다.

“부사 오연상 한 사람만 없애면 된다는 건가? 물론 옳아. 하지만 그것도 부하

들이 우리 뜻을 따라 줘야 말이지. 이거 방법이 없…….”

“내가 죽일까?”

시준은 말을 멈추고 기랑을 쳐다보았다. 기랑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랑의 장거리 사격은 지금 프랑스 육군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만큼

의 고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준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왜?”

기랑도 언젠가 했던 대답을 반복했다.

“너를 도와주기로 약속했어.”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오연상은 한 고을의 수령이고 당상관까지 한 고

관이야. 오연상을 죽이면 너는 정말 어떻게 변명도 할 수 없는 역적이 돼.”

게다가 기랑의 경우 잡히면 더 큰 고통을 받으리라는 말은 시준이 하지 않았

다. 기랑도 알고 있는 불쾌한 소리를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때 너는 그저 네가 나를 돕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잘 생각해 본 거 맞아?

내가 너에게 무엇이기에? 난 네게 무얼 줄 수 있지? 돈이 아닌 건 알아. 저번

에 들었으니까. 나는 너를 믿지만, 앞으로도 그러려면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인

지 알아야 해.”

어떤 사람을 믿으려면 그의 행동이 예상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

리고 사람을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욕망을 아는 것이다.

기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시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작가의 말

1. 흔히 은젓가락을 찌르는 것으로 독을 판별한다 하는데, 이 시대에 주로 독으로 사용된 것은 황화비소(순수비소를 추출할 화학이 없었음)이고 황과 은젓가락이 닿으면 변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르핀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2. 혼동이 있을까봐... 영변(무산) 대도호부사는 일종의 수비 관직이며,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이 관직을 고종 시대 이전까지 겸했습니다. 영변과 그 주변 일대의 읍성을 수비하며 바로 옆 안주성의 대규모 조선군까지 관할할 수 있는 강력한 직책이죠. 작중에서는 비었지만...;;; 영변 부사는 행정직 수령이고, 이때의 영변 부사가 오연상이었던 것도, 작중 서술된 군공이 있었던 것도 맞습니다.

3. 연세 지긋하신 분들도 이제는 거의 보지 못했겠지만, 한 60년대까지만 해도 산에서 나무하다 담비 보고 혼이 빠져 정신 나갔다는 경험담들이 전해져 내려오지요. 현재 남한에서도 상위 포식자입니다. 담비가 협동 사냥을 하는 건 맞는데, 기랑이 말한 역할 분담은 전문적이고 정확한 생태지식이 아닌 그냥 전승지식입니다.

4. 오해가 있을까봐 밝히자면 한국군은 2010년대 전체에 걸쳐 여러가지 개선을 통해 수통과 방탄복을 비롯한 개인장구를 분명히 대부분 교체했습니다. 적어도 전방부대에서는 노르망디 수통은 옛날 얘기죠. 그러나 국감 등 공식적으로도 수차례 지적되었듯이 실제로 병사에게 보급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비역 중에는 아마 신장구를 직접 사용하신 분도 있고, 그런 거 전혀 못 본 분도 있을 겁니다. 작중의 언급은 조선군 중에서도 열악한 지방군을 대상으로 한 언급입니다. 한국군으로 말하자면 후방부대라고 할 수 있죠.

조선군 역시 무장이 충실한 부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부대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나마 대부분은 그럭저럭 싸울 만한 한국군과 다르게 조선군은 극히 일부만 제대로 장비가 있었고, 심지어 5군영 중 하나라는 총융청조차 행사 때마다 무기와 옷을 돌려쓰는;; 폐단이 그 시대에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5. 이명겸과 김익순은 모두 홍경래의 난 당시에 순간의 판단으로 빠른 항복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다 처형당합니다.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바로 이 사람이죠.

6. 약산성은 실제로 영변대도호부와 안주성 방어라인의 중요 거점이었는데, 약산이 어디냐면 지금 생각하시는 거기 맞습니다. 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가시는 걸음마다 뿌리는 거기요.

24. 평양 인민대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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