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24. 평양 인민대회(1)
평안 감영 선화당에 주인이 없다 하지만, 인민의 회의를 표방하면서 감사의
직처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평양 종각(鐘閣) 앞의 큰 대로가 있는 관전장(館前場)에서 평양인민대
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시장에 사람들 모이는 것이야 누구도 시비할 수 없으
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실제적인 이유는, 조선 사상 초유의 민중대회에 모이는 인간
의 규모가 너무 커서 조선의 건물 어디에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2천에 가까운 사람들이 관전장에 모였다. 정월보름이라 해도 이 많은 사람들
이 내뿜는 체온과 주변에 아낌없이 지펴 놓은 난로가 있어 별로 춥지는 않았
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를 대비해 수없는 기둥 위에 의주천으로 장막까지 쳐
놓았다.
대회에 모인 각지 유지들은 협동회가 아낌없이 과시하는 이 부유함에 눈을 크
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나무가 아닌 것 같은데, 정시준이 진인이라더니 무슨 도술을 부렸나?”
“내 듣기로 진인의 도술은 중국에서 부렸는데, 칼을 날려 도적의 목을 치는
쪽이라고 하네. 이건 그 뭐냐, 무슨 불타는 돌을 캐다 땐다던데?”
“아, 들어본 적 있네. 이것은 옛날에 나라에서 공 있는 신하들에게 내려 주던
이탄(泥炭)이 아닌가?”
석탄(石炭)은 조선에서도 제한적으로 썼다. 시준은 적정기술의 지식으로 효율
적인 난로를 만들 수 있었고, 야외라면 큰 위험도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동인도 회사가 실어다 준 물건이지만 이제 영국인들은
평안도 각지에 출장 다니며 탐광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준이 전생의 지식
을 쥐어짜 생각해낸 북한 지역 무연탄이 많이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름만 남은 통무아문이 영국인들을 제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준이 조정
과의 공적 연락을 끊어버려, 대동강 북쪽에는 사실상 조정의 영이 미치지 않
았다. 서울 친척들의 불안감 가득한 서신만 받고 있는 관리들은 진작 내빼거
나 근문소 정치국과 결탁한 지 오래였다.
시준은 주석단(主席壇) 가운데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휘 둘러보았다.
이 주석단은 ‘그 주석’이 아니라 주최자의 자리라는 뜻이다. 주객의 법도가
엄정한 조선인지라 누가 어떤 자리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도 신경전이 벌어졌
는데, 시준은 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북한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회장인 시준이 가운데에 앉는다. 그리고 공식적 2인자인 평준위원장 김
창시가 시준의 오른쪽에 앉는다. 다음으로는 무력위원장 차형기가 시준의 왼
쪽에 앉는다. 이상이 서열 1, 2, 3위다. 나머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 인민대회는 사민(四民) 모두의 대회로 자처하는 만큼 선비들도 자리했는
데, 글 배운 선비들이 장사치와 함께 자리하는 것은 치욕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장사치가 큰일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누가 참고 보겠는가. 시준은 근문소 정치
국에도 속해 있는 백윤구 등 지역 토호와 높은 향임들 몇 명을 뽑아 또 그럴
싸한 간판을 선사했다.
그렇게 선발된 ‘검사위원회(檢査委員會)’는 저 옆에 따로 긴 책상을 두고 앉
아 있다.
절대로 어떤 당의 회계검열을 하는 위원회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이름처럼
선비가 상인을 잘 가르치고 검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만 여기의 반은 백윤구처럼 희만당 제자들이라 사람들은 이를 시준이 대회
에 행사하는 영향력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제프 푸셰는 지중추원사의 자격으로 검사위원장이 되었다. 모든 선
비들이 그의 존경할 만한 관직에 걸맞은 그 자리를 양보했다.
삼화부에서 새로 거래 트고 항구 만들며 김치 항아리 실어 오느라 정신없는
영국 함대는 이 일을 꿈에도 모른다.
모든 사항을 확인한 시준이 마지막으로 아쉬워한 것은 한 가지였다.
‘마이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정도 수가 모여 있으면 뒤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준은 불필요
한 갈망을 접고 앞의 깔때기를 붙잡았다.
전성관(傳聲管)을 응용해 기둥 사이사이로 걸쳐 놓은 급조 대나무 파이프에서
시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서도의 부로 자제와 사농공상의 사민, 그리고 바깥에서 오신 여러 명망
높은 객들에게 인사 먼저 올립니다. 지금 여기에서 감히 일좌를 차지하고 앉
아 있는 사람은 서도상고총협동회 회장 정시준입니다.”
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절했다. 미리 잠입시켜 놓은 바람잡이
들이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굴렀다.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준은 연이어
서 주석단에 앉아 있는 협동회 간부들을 소개했다.
조선에서 박수의 뉘앙스는 현대와 조금 달라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분위기에 잘 휩쓸렸다.
좌중이 어느 정도 흥분했다고 판단하자 시준은 손을 들었다. 갈채가 잦아들고
다시 조용해졌다. 서리를 맡은 김희용이 나와서 말했다.
“회장의 모두연설(冒頭演說)이 있겠으니 정숙해 주시오!”
이미 정숙한 상황이었기에 그 말은 시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시준은 원고를
한 번 힐끗 보고 앞을 쳐다보았다.
“지난 이태 동안 북으로 회령부터 남으로 강진까지 큰 흉년이 나라에 있었소
이다.”
‘요즘 경제가 많이 안 좋았습니다.’ 라는 말에서 21세기 사람들이 느낄 법한
감성을 모인 자들도 느꼈다. 뭔가 국왕과 조정이 자꾸 삽질을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물론 시준이 의도한 바였다. 그 의도를 완성시키기 위해 시준은 국왕과 조정
을 거꾸로 찬양했다.
“하지만 성상의 지극하신 은혜와 조정 관부의 가르침이 맞아떨어져, 저 현종
조(顯宗朝)의 대란(경신대기근)처럼 사람이 수도 없이 굶어 죽거나 외적이 침
입하는 사태가 없었으니 실로 하늘이 우리나라 성조를 도우심이 컸습니다. 이
에 우리 비천한 장사꾼들 또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을 수 없으니, 미약
한 돈이나마 내어서 서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굶주리는 자에게 죽을 주고 헐벗
은 자에게 옷을 주어 왔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야, 잠깐. 조정은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라는
의심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시준은 서로 수군대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과 푸
셰의 의도가 먹혀들어 갔음을 확신했다.
“서울 조정에서 국가의 대업에 매진하시니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만 사람은 열흘만 안 먹어도 죽어버리는 법. 어찌 우리도 나름대로 지혜를 짜
내지 않을 수 있으리까. 다행히 겨울은 무사히 넘겼으나, 올해도 정월부터 벼
락이 쳐서 가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여러 공경하옵는 부로들을 모시
고 높은 지혜를 배우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대부는
사대부대로, 하민은 하민대로 도리를 다하는 예이니 모두 명심하여 주시기 바
랍니다.”
겉으로 보이는 말이야 우리는 선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겸손한 표현
이었지만, 사정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나라가 손 놓고 있으니 우리가 알아서 하
겠다는 얘기였다.
시준의 연설은 거기서 끝났다. 사실 대회 전 조제프 푸셰는 프랑스인다운 장
문의 열정적 연설을 제안했지만, 시준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원고 다 읽을 때쯤엔 아마 사람들 반이 자고 있을 겁니다.’
이 시대에서 긴 연설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텍스트의 독해나 청해
는 훈련, 특히 공립교육으로 길러지는 능력이며 여기 모여 있는 사람 대부분
이 ‘아직은’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간단히 말을 맺었다.
“그럼, 주상 전하와 종묘사직 앞에 감읍하며 평양 인민대회의 개회를 감히 이
사람이 선언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주상 전하와 종묘사직보다 시준에게 갈채를 보냈다. 심지어 송상에
서 파견한 사람들도 그 분위기에 동조하고 말았다.
시준은 김창시에게 깔때기를 양보했다. 평준위원회 위원장 김창시는 지난겨울
동안 서도상고총협동회가 평안도 전역에 날라 댄 곡식이며 옷감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유통에 도움을 준 참석자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
기 모인 사람들은 그저 서상 일당의 이야기를 듣는 자가 아니라 그 사업에 함
께하며 백성을 구원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민(民)이라 함은 무엇인가. 갑골문을 분석한 현대의 학설에 따르면 그것은 눈
[目]에 상처를 내어 멀게 한 사람을 뜻하는 글자다. 눈을 멀게 했다 함은 제
물로 쓴다는 뜻이다. 원래 은나라가 메소아메리카조차 인본주의적 문명으로
보이게 할 정도의 막장이기는 했다.
이 분석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대에서 그렇게 분석될 만한 취급을
민이 받아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먹잇감이고, 제물이며, 노동력이고 재산이었지 한 번도 주체가 아니었
다. 하지만 지금 평양의 백성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막연한 상상이었다. 허나 인민대회는 그것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주었다. 만상의 장부는 심부름하는 일꾼 하나조차 놓치지 않았고 김창시는 그
모두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아직 사업 개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가능한 짓이
기는 했다).
그러한 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했다.
‘너희들은 위대한 역사의 기수들이다.’
사람들은 수천 년간 내면에 잠들어 있던 정치혼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래서 김창시의 보고회가 끝나고 열린 분과(分科)별 회의에도 열정적으로 참여
했다.
덕대와 광부들은 갱사분과(坑舍分科)에, 요사이 만상에게 좀 눌리기는 했지만
역시 전통 있는 평양 유상(柳商)을 포함한 대상부고들은 평준분과(平準分科)
에, 영길리인과 장사하던 자들은 통무분과(通務分科)에 각각 흩어졌다.
뭐라도 해야 명함 값할 처지라 초조해진 검사위원회의 엄정한 포고대로, 이들
은 선화당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허나 감영의 여러 건물을 마치 제집처럼 차
고 앉아 떠들어 대는 것까지 검사위원회가 막을 수는 없었다.
꼭 돈 버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시준을 돕던 야학 학생들은 학교분과(學校
分科)에 참여하여 희만당 제자들의 야학 확대 방안을 들었고, 장사나 수공업
에 어둡지만 어쨌든 말 좀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분야인 농상분과(農桑分科)도 열었다.
명목은 이 다양한 분과에서 나온 의견을 접수하여 서상의 사업에 반영하는 것
이다. 그러나 여기 참석한 사람들 중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같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쌓고 협조 체계를 만들어 더 큰
이득을 노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시준도 그러라고 판 깔아 준 것이고 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관청 예산에서 세금으로 회식 좀 거하게 해 보고 싶은데
마땅히 댈 명분이 없을 때 단골 멘트로 등장하는 ‘네트워크 구축’이 바로 이
것이다.
당연히 술과 음식이 있어야 한다. 곧 이 평안 감영은 거대한 잔치판이 되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치킨 내놓으라는 기랑이나 푸셰에게 시달리던 시준은 손
재주 좋은 소질개에게 이 비법을 전수함으로써 해방되었다. 곧 사람들은 과연
정 진인이 맛에도 도통하다며 희희낙락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바빴기 때문에, 한쪽에서 비밀스럽게 열린 무력분과(武力分
科) 회의에는 딱히 관심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이곳의 위원장은 차형기다. 그리고 위원장이 아닌 시준 역시 이 무력위원회에
서는 위원이었다. 시준은 그가 스스로 설립한 오죽당의 당주였는데, 오죽당이
평안도 민병대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준으로서도 무력위원회의 활동은 제일의 관심사였다. 그가 가진 군사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시준에게 최우선 과제인 홍가장 식구 구출
이 좌우된다.
그리고 시준도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의주에서 장주님의 인덕이 높으니, 우리가 장주님을 돌아가시게 하였다는 이
야기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홍경래가 장주님을 핍박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사람이 와서 이른 바로는 아직 해를 입지는 않으셨다 합니다. 서울의 사세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야 하오이다.”
서울의 사세란 곧 왕이 도성에서 튀어버린다는 상황을 의미했다. 김조순은 이
를 지급(至急)으로 전했다.
설마 왕이 그럴 줄은 모르고 삼남 봉쇄 계획을 느긋하게 세웠던 시준은 큰 충
격을 느꼈다. 조선인으로 다져진 현실 감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짜 조선인인 무력위원회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경래는 평안도 사람과 원수를 지고 있소.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 그들을 데
리고 들어온다면 민폐가 심할 거요.”
차형기가 최대한 돌려서 말했지만, 평안도가 왕을, 그것도 홍경래를 달고 들
어오는 왕을 환영할 리 없다는 말이었다.
홍경래의 변심에 가장 매섭게 항의하여 탈주했던 자이며 이제는 시준에게 합
류해 있던 토관 무장 이제초가 나섰다.
개천군(价川郡)의 민병대인 십승대(十勝隊)를 이끄는 이제초는 부대 이름대로
정감록 신앙에 깊이 감화된 자였으며 시준 정 진인설을 진짜로 믿는 몇 안 되
는 위원이기도 했다.
이제초가 과격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보기에, 임금은 서북으로 가서 임진강에서 강화도로 파천하려는
심산이오.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불과 500명의 군사만 믿고 평안도로 어슬
렁어슬렁 기어들어 올 리가 있겠소이까?”
분석 자체는 나쁘지 않다. 강화도는 원래 그런 용도의 섬이니까. 그러나 반역
이나 다름없는 막말을 지적하는 무력위원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시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시준은 이제 슬슬 공개할 때라고 판단하고 한숨처럼 말했다.
“본 위원이 두 가지 정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선 서울에 내응하는 자
들이 이르기로, 주상 전하께서는 정말로 평안도로 오실 생각입니다.”
서울에서 왕과 간접 접촉해 본 시준이라면 이해할 일이었다. 지금 왕의 파멸
적인 자기 객관화 능력으로 보았을 때, 홍가장 인질과 서울에서 시준에게 내
렸던 은혜라는 두 가지 무기를 자기가 쥐고 있다 확신하고도 남았다.
이제초는 대놓고 혀를 찼고, 차형기는 그 내응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평안도
도내의 세력만을 쥐고 있는 위원들과 다르게 서울은 시준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 다른 위원들은 김조순의 역할을 알 길이 없었다.
시준은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500명이 아닙니다. 가장 많을 경우지만, 금위영 군사 2천과 무예청
및 선전청의 호종관들, 그리고 홍경래의 군까지 더하면 4천에 가까운 대군세
가 될 수도 있소이다.”
“그, 그러면 서울이 비게 되잖소? 그리한다면 당연히…….”
당연히 김조순은 서울에 남아 있을 왕족 아무 놈이나 잡아서 새 정부를 세울
명분을 얻게 된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왕에게 종묘사직을 받들 자격은 없다.
지방도 생각보다 쉽게 안정시킬 수 있을 터. 지금 조정 관료들이 찬성한다는
얘기는 곧 기호 사림 전체가 찬성한다는 얘기다. 안동 김문이나 정약용을 동
원하면 영호남에서도 해볼 만하다.
노론에 의해 추대된 왕은 훈련도감과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물론 각 지방
속오군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함경도 속오군은 조선군 중 알아주는 강군이
다. 무력위원들의 머리에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왕이 평안도에 눌러앉으면 신정부에 의한 평안도 대토벌이 일어난다!’
차형기가 벌떡 일어섰다.
“이런 제기랄, 나는 죽어도…… 아니, 본 위원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차라
리 굿판 벌여 역신(疫神)을 문간에 들이고 말지, 나라에 임금이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오는 강아지 한 마리도 대동강을 넘게 하여서는 아니 되오!”
“존경하는 위원장님. 그것은 아직 성급히 논의할 일이 아니오이다. 일단 앉아
주십시오. 목소리도 좀 낮추시고.”
형식은 위원이 위원장에게 청유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심지어 차형기마저 그것을 명령으로 인식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시준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김조순의 이름을 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이기
도 했지만, 그보다는 무력위원들이 더 흥분할까 봐 시준은 빠르게 말했다.
“아직 평안도에는 왕명을 받드는 수령들이 멀쩡히 있소. 그리고 관군 역시 마
찬가지지. 무력위원회의 군세가 정예하다 해도 열 손이 한 손을 당하지는 못
하는 법이외다. 설사 주상 전하께서 당장 도성을 나서신다고 하더라도 여기까
지 그 큰 무리를 끌고 오려면 시간이 있소. 그사이에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하오.”
“무슨 준비 말씀이시오?”
“주상 전하의 4천 군세는 물론, 함경도 속오군마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준비
요. 힘 있는 자는 아무도 깔볼 수 없소.”
무력위원들의 출신이 출신이니만큼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상식적으로도
왕의 4천 군세를 못 들어오게 막으려면 이쪽은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일이 많이 꼬여 신정부가 탄생한다고 해도, 평안도가 그 정도의 힘을 가졌다
는 것을 서울에서 알게 되면 대규모 내전을 일으키기보다 회유하려 들 터이다.
함경도 땅의 3할을 가진 대토호이자 대규모 사병의 주인이었던 이성계를 고려
에서 진압하기보다 왜구 및 홍건적 토벌에 잘 써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 시점에서 몇몇 무력위원들은 수상한 시선을 교환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
면 ‘이봐, 태조가 왜구를 토벌한 다음에는 뭘 했더라?’에 해당하는 눈짓이 위
원회를 정신없이 오갔다.
침묵을 깬 것은 정 진인의 희망을 시준에게 걸던 이제초였다. 그가 사뭇 달라
진 태도로 조심스럽게 ‘준비’의 방안을 물었다.
위원들 역시 생각에 잠겼으나, 시준은 이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시준에게
있어 이 무력위원회는 그 세부적인 방침을 하달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우선, 이 평안도를 우리가 온전히 가져야 합니다.”
이공은 수도를 비우는 것에 대한 부담은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자기가 곧 국가이며, 자기가 있는 곳이 곧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공 역시 제왕학과 고대의 사서를 모두 공부한 사람이다.
그 또한 자신이 없는 틈에 김조순이 왕족 중 하나를 옹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고려했다.
그러나 한성부에 살고 있는 이씨 왕가 후손들을 죄다 잡아가는 것은 현실적으
로 불가능했다. 훈련도감의 방해는 둘째치고 만약 그런 요란한 짓을 벌이면
왕의 파천이 전국에 짜하게 알려져 버린다.
정월 보름, 평양에서 인민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이공도 결단을 내렸다.
핵심적인 것들만 들고 튀어야 했다. 그리고 고사를 참고했을 때, 왕위 찬탈에
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옥새라던가, 옥새가 없을 경우 옥새를 내어주거나 혹은 옥새에 준
하는 승인을 내려줄 수 있는 왕실 어른이 그런 준비물이다. 종묘의 위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공은 내명부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왕대비 김씨는 갑자기
갑옷을 입고 걸어들어오는 금위영 군사들 때문에 혼절할 뻔했다.
“너, 너희가 어떤 무리이기에 이다지도 무도하다는 말이냐?”
원래 훈련대장이었어야 하나, 김조순이 훈련도감의 장악을 놓지 않은 데다 박
윤수가 대표하는 반남 박씨의 일족이라 이공이 대신 금위대장으로 뽑은 박종
경(朴宗慶)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전을 범한 죄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상 전하의 어명이오
이다. 적도가 바로 궁궐 문 앞까지 육박하였으니, 어서 상궁들에게 일러 채비
하셔야 합니다.”
채비야 오래전에 했다. 적도가 궁궐 문 앞 어쩌고 하는 말도 다 헛소리라는
사실 역시 알았다.
단지 왕이 직접 찾아와 이러한 고난을 겪게 하는 것에 대해 눈물로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무부를 보내 강압하는 초유의 사태에 놀랐을 뿐이다.
왕대비 김씨는 이 나라에서 뭔가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20만 한성부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을 모실 금위영 주력군 700기를 제외한 나머지 천여 기가 훈련도감을 급습
하고, 이제 눈치 볼 것 없는 왕이 총융, 어영, 수어의 3청을 소환하는 파발이
도성 밖을 내달렸다.
반정도 아니다. 역적의 토멸도 아니다. 규모로는 조선이 이괄의 난 이후로 2
세기 만에 겪어 보는 본격적 내란이요, 그리고 명분이 비등하기로는 국초 태
조 이성계가 사실상 일으켰던 조사의(趙思義)의 난 이외에는 없었던 ‘내전’이
었다.
어차피 정월 대보름 축하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한
성부민들은 성 곳곳에서 들리는 총소리와 칼 부딪는 소리며 피 끓는 비명, 그
리고 못 보기가 어려울 만큼 여러 곳에 죽어 넘어져 있는 시체 속에서 끔찍한
정월을 맞이했다.
작가의 말
1. 주석단은 그 주석과 한자는 같습니다만... 북한에서도 행사 시에 앞에 앉아 있는 주 연단을 일컫는 말로 씁니다.
또한, 현재 조선노동당의 당 중앙검사위원회는 기존 검열위원회(당 기율 관리)와 검사위원회(당의 재정감사)가 합쳐진 것으로(21년 당 8차대회에서 처음 구성)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현재 정상학)은 당 정치국에서 가장 높은 상무위원(높은 위원이 아니라 항상 집무하는 위원이라는 뜻입니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상무위원에 김정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최고위직이죠.
분과별 회의 또한 당대회나 당 전원회의 등에서 2일차쯤부터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뭐 경공업분과라거나, 군수공업분과라거나... 작중 나온 이름은 조선 시대에 쓰였던 어휘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북한의 방식이고 작중 나온 대로 결단코 시준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2. 이제초가 개천 출신인 것은 맞으나, 십승대는 가공의 민병대입니다. 정감록의 십승지에서 따온 것이죠.
3. 태조 이성계는 사실상 조사의의 난을 후원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입니다. 그, 뭐 여러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만... 실제적인 사유를 말하자면 그 동네에 군대를 지탱할 만한 부자가 이성계뿐이었습니다.
24. 평양 인민대회(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