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23. 열국(列國)은 진창에 발을 빠치고(5)
조선 조정이 진흙탕 속에 빠져들어 가는 동안, 거기에 한 발 디뎠던 주변 열
국 역시 비슷한 꼴을 겪게 되었다.
청은 하나를 해결하면 두 개가 튀어나오는 반란 진압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북경의 반란을 조선과 러시아 사신들이 진압해 버린 일
은, 무사히 도망간 임청의 선전선동에 힘입어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렀다.
“우리가 막 자금성을 깨뜨리고 만족의 황자를 잡아 죽이려던 그때, 궁지에 몰
린 녀석들이 부적을 태워 양귀(洋鬼)와 고려귀(高麗鬼)를 불러냈지 뭔가. 야
만족이 다 그렇지만 저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나 올돌골(兀突骨)같이 사납
고 흉악한 놈들이지!”
“아라사 놈들은 산발을 한 채 총을 함부로 쏘아 동포를 마구 죽이고, 고려 놈
들은 진주(이문성)를 속여 따르는 척하다가 비겁하게 뒤에서 목을 쳤다 하네!
거 왜 동이(東夷)질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말 성공할 뻔했다니까. 놈들은 외국군을 끌어들여 간신히 문패만 지켰고,
황자는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어. 누가 오랑캐 아니랄까 봐 사방 오랑캐와 붙
어먹어 백성들을 살상한 죄 용서할 수 없지! 이제 오랑캐 놈들은 다 돌아갔으
니 두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반란을 부추기려면 청 황실을 깎아내려야 했고, 그만큼 조선과 러시아가 고평
가되어야 했다. 정약용이 분명히 그런 거 없다고 공언했던 청구검법 비급이
북경에서 은밀히 돌고 있는 현 상황은 그런 소문을 뒷받침했다.
북경의 정예군 금려팔기는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당시 임청
반란군의 진짜 주력인 2천 군대를 정면에서 격파한 것은 러시아나 조선인이
아니라 그들이다.
조직폭력배와 국가의 무수한 공통점 중 하나는 깔보이면 장사 접어야 한다는
점이다. ‘뭐지? 저거 사실 반편이였나?’로 시작되는 가지각색 반란이 청조를
타격했다.
금려팔기 만주병의 우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이 시대에는 원래 전쟁보다 무
협 컨텐츠가 더 먹어 주기는 한다.
군대끼리 부딪쳐서 밀고 당기다 흩어졌다는 재미없는 얘기보다는, 눈에서 불
을 뿜는 망아지만한 지옥견으로 사람을 찢어발기는 아라사인과 청구검법의 극
의를 발휘하여 모가지를 추수하는 고려놈들 쪽이 더 취향에 맞았다.
또한 이는 각지의 반란군에게 명분을 주었다. 청 황실은 외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청과 전쟁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무시되었다.
곧 진부하지만 그래서 항상 효과적인 소문이 퍼져나갔다.
“관리들이 아라사인과 고려인을 앞세워 하남을 휩쓸었는데, 반란군을 찾아낸
답시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인들을 끌어다 겁간하며 아이는 죄다 잡아먹었다고
하네!”
“그 야만족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중국 내륙 쪽 사람들은 외국인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게다가 직례나 요동
사람들이라고 딱히 객관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대부분 어떤 이론이 사실이어서 믿는다기보다는 믿고 싶어서 믿는다.
북경 부근의 민초들 역시 조선인들이 여태 훔쳐간 물건이나 백성 두들겨 패고
달아난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분풀이할 외국인이 없었다. 영국 상인들은 쫓겨나갔고,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은 브라질로 튀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본국의 지원이 끊긴 채, 심지어 전직 대사관 직원마저 구
걸을 해야 하는 판이었다. 옛날 부찰복장안이 그러했듯 중국인들도 포르투갈
사람들은 좀 불쌍해서 손을 못 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 중국에 남은 외국인은 프랑스인 정도였다. 북경은 그나마
명색이 황도이니만큼 신부들이 보호되었지만, 마카오의 외방전교회는 그냥 가
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사교도를 죽여라!”
“사제를 끌어내라!”
사람들이 죽창과 돌을 던지며 몰려들었다. 심지어 여기는 일부 관군까지 합세
했다. 당연히 프랑스인에게 뭐 털 거 없나 해서였다.
그라몽 신부가 용감하게 사람들을 설득하러 나섰다가 그대로 돌 맞아 죽은 이
후로 외방전교회는 재빨리 살길을 모색했다.
광저우의 충직한 신자들이 자신의 목숨으로 폭도들을 막아서는 동안, 신부들
은 허둥지둥 밀항선을 타고 마카오를 떠났다. 그 대부분은 프랑스의 오랜 우
방인 베트남을 향했다.
여기에 러시아까지 끼어들었다. 북경에서 시준이 했던 의심은 타당했다. 현재
극동에 투사할 병력이 없는 러시아는 빛나는 부동항의 미래를 위해 중국을 좀
망가뜨려 놓고 싶었다.
황제의 특사 레온티 베니그센은 몽고 48부를 성공적으로 부추겼다. 그들의 전
통놀이인 살인과 약탈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몽골 사람들은, 마침 청이 혼
란한 틈을 타 민족문화의 회복을 주장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경제는 선황이 평생에 걸쳐 이룩했던 십전노인의 칭호를 단 3개월 만에 획
득할 판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나비의 날갯짓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컸다. 지금까지 고고
한 신국(神國)을 자처했던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서도 약간의 와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를 쥔 도쿠가와 막부는 휘하 봉건 가문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종속시키
고, 막대한 자치권을 주는 척하며 각종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통제했다.
그 와중 가장 서럽게 차별받는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끝까지 도쿠가와에
적대한 가문들이었다. 도자마[外様]라고 불리는 이 영지들은 일종의 동요계층
취급을 받아 항상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중국이나 조선이었다면, 반역자의 영지는 화끈하게 일가 전원을 몰살시키고
저택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며 백성들은 죄다 강제 이주시키면 그만이다. 사람
이 없으면 말썽도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여러 역사적,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그러기가 어려웠다. 따
라서 도자마 번은 축소된 세력이나마 열심히 키우면서, 막부에 대해 300년 가
까이 원한을 쌓을 수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가독이 서군 총대장을 맡았던 조슈[長州]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가경 16년(1811년) 새해가 밝아왔을 때, 이 하기[萩] 성(현대의 야마구치현
북쪽)에서 엄숙하게 이루어지는 새해 의식은 그것을 증명한다.
일본에 예를 가르쳤다는 조선은 지금 시늉뿐인 조하(朝賀)조차 도저히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도(道)란 과연 어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아직 일본은 태평성대. 얼마 전 형이 죽어 입적(入籍)으로 가독을 상속
받은 10대 번주 모리 나리히로(毛利斉熙)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인 일문가로
(一門家老) 모리 후사아키[毛利房顕]의 문안을 받았다.
후사아키가 책임을 맡은 미기타[右田] 모리 가(家)는 오랫동안 조슈 번의 충
직한 봉신이었다. 후사아키 역시 불과 5년 전에 갑작스레 승계한 처지라 아직
노련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 어렵잖은 의식의 첫 마디는 쉽게
꺼낼 수 있었다.
“주군, 올해라면 어떨지요[殿樣, 今年はいかがいたしましょうか]?”
200여 년간 조슈 번이 칼을 갈아 오며 매해 설날마다 반복한 말. ‘올해에는
저 도쿠가와를 토벌할 수 있겠느냐’라는 뜻이다.
와신상담이라 하지만 오왕 부차도 이리 오래 장작 위에 누웠으면 악성 허리디
스크를 일으켰을 터요, 월왕 구천도 이 정도 쓸개를 핥았으면 부작용 때문에
간이 다 너덜너덜해졌을 세월이다.
허나 감정은 사실만큼 오래 기억되지 못하는 법. 그래서 후사아키의 말에는
그 원한이 실려 있는 생생함보다 주문을 노래하는 듯한 외경심이 더 담겨 있었다.
나리히로 또한 역대 번주들이 으레 하던 대로, 그리고 자신도 작년까지 하던
대로 대답했다.
“아직 시기상조다[時期尚早じゃ].”
후사아키는 올해도 의식이 무사히 끝났음에 만족하고 편안하게 문안하며 가신
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리히로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말을 통해 후사아키를, 그리고 이 의
식을 강제로 현실에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10년 뒤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후사아키는 “예?”라고 되묻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버렸다. 나리히로는 가
로의 무례함을 탓하는 대신 자신의 말에 대해 설명했다.
“조선에서 원래 정월, 아니면 이월에 왔어야 할 통신사를 연기하기로 하였다
한다. 대마도 쪽에 연통을 넣어 보니 아무래도 봄 안에는 어려울 모양이야.
소문에 듣기로는 조선에 서양인이 많이 들어왔다 하던데, 그것과 관계가 없지
는 않을 터.”
나리히로는 평소 외국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원 역사에서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슈 번의 개혁을 적극 추진한 번주이며, 이는 조슈 번이 메이지 이
신[明治維新]의 주역을 자처하는 기틀이 된다.
그러한 번주의 성향과, 아까의 충격적인 말을 곱씹어 보던 후사아키는 한 가
지 결론을 도출했다.
“조선이 서양과 손잡고 막부와 연을 끊기로 하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모르지. 내가 조선왕이라면 이 기근 중에 그런 모험을 할 것 같지는 않
은데. 만약 조선왕이 저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 다케다 신겐]처럼 난폭하며
신의를 도구로만 보는 자라면, 서양국을 끌어들여 이웃 나라를 친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겠지만…….”
“조선이 왜 그런 병화를 일으킨다는 말씀입니까?”
“분로쿠·게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 임진왜란]에서 왕이 도망쳐야 했던 치욕
이 있지 않았나. 조선의 선대왕(정조) 역시 대포로도 뚫을 수 없는 튼튼한 거
성을 기내에 쌓았다 하더군. 그 옛날, 어깨높이밖에 안 되는 성벽으로 전국
영주들의 군세를 막아야 했던 교훈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지.”
후사아키는 설마 200년이 넘은 일로 뜬금없이 그러겠느냐는 말은 하지 못했
다. 당장 그들 역시 200년이 넘은 일로 원한을 되새기고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막부보다는 오히려 조슈 번과 관련된 일이다. 분로쿠의 역은
도요토미 가문이 일으킨 일이고 그때 서군이었던 자들이 지금의 도자마 번이
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개념은 이제 막 국학자며 난학자들에 의해 체계를 잡아가는 중
이다. 전통적인 일본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따지면 막부는 당당할 수 있다.
조선을 침공한 것은 도쿠가와가 아니라 도요토미이며, 도쿠가와는 오히려 조
선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주었다.
그러나 조슈 번은 어디까지나 도쿠가와의 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리히로는 차를 들어 한 잔 마셨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가장 신뢰하는 같은 집안사람[一門]인 자네가 조선에
한번 가 주었으면 하네. 조선말은 할 줄 알지?”
류큐[琉球]를 속국 삼은 사쓰마[薩摩]의 경우처럼 일본의 번국은 사실상 각자
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가지고 있다.
허나 조선이 상대라면 얘기가 다르다. 도자마 번이 조선과 독자적으로 교통했
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했다가는 가장 온건한 처분이 영지 몰수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공식 사절이 아니라 첩자로 다녀오라는 뜻이다. 여러 차례의 외
침 때문에 외국인을 편집증적으로 경계하는 원래의 조선이라면 어렵겠지만 지
금은 사정이 다르다.
서양과 조선이 교통하고 있다면 분명 항구를 열었을 터요, 그 항구를 통해 중
국인이나 조선 선원인 척하고 잠입하면 된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일본 전통의
방법인 승려 분장도 있다.
그렇다 해도 상당히 위험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일본과 조선의 오랜 평화 때
문에 양국의 간첩선은 사실상 전인미답의 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좀 성급하다. 조선은 통신사를 ‘연기’한다고 했지 ‘취소’한다
고는 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일본에 올 통신사 일행을 잘 구워삶아 소
식을 얻어듣는 쪽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조선의 선비라면 그런저런 이유를 들어 만류하거나 반대했을 것이다. 망나니
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목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옳은 말을 하는 게 충신이니까.
그러나 후사아키는 반박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일본의 충(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주군보다 옳은 것은 없으며, 그런 게 존재하는 순간 저 끔찍한 전국
시대의 하극상이 반복될 뿐이다. 절대복종만이 충성이다.
그래서 후사아키는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새해가 되자, 평양에 있던 시준 역시 그간의 성과를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준
비했다.
홍경래군은 고양에서 약 스무 날 정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력위원회의 위원들
은 아마 왕이 신하들을 설득하지 못해 홍경래가 꾸물대는 것이라고 관측했다.
시준은 그 분석을 이해했으나 동의하지는 않았다. 김조순과 직접 연결된 시준
은 진정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조순이 훈련도감 군대로 버텨 주는 동안 내가 뒤를 치는 게 가장 좋다. 하
지만 우선 장주님과 지유를 구출해야 하니 최후의 최후까지 그들과 같은 편인
척을 해야겠지. 물론 무시할 수 없는 같은 편으로서 말이야.’
그러려면 조직을 겉보기에 강성하도록 키움과 동시에, 그것을 널리 알려야 했
다. 물론 시준의 사조직으로서 알려지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일. 어디까지나
민간의 자발적 생존 기구로 선전하되 근왕의 대의를 강조해야 한다.
조제프 푸셰는 그의 말대로 시준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어쨌든 시준
은 당대 최고의 혁명가를 영입한 것이다.
프리메이슨(franc-maçonnerie)의 일원으로서 혁명 전 철학당(哲學黨)의 사상
을 계승하는 사람 중 하나인 조제프 푸셰는 그 높은 학식과 노련한 정치 경험
으로 시준을 보좌했다.
또한 푸셰는 자신의 휘하 프랑스군을 오죽당의 군사 고문으로 제공했다. 이들
은 영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선 배를 타고 비밀스럽게 평양으로 입성하여
무력위원회의 육군 전력을 훈련시키는 중이다.
시준 역시 이미 첫 번째 대가를 지불했다. 북경에 있을 때 친해 둔 지친왕 면
녕의 세력 및 북경 선비들과의 연락선을 활용하여, 푸셰는 드디어 고립에서
완전히 벗어나 북경의 외방전교회 신부들과 간접 접촉할 수 있었다.
시준은 푸셰가 그다음으로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도 생각해 두었다. 프랑스와
의 동맹, 푸셰 자신에 대한 직위 보장 등 여러 가지 생각나는 건 있었지만 푸
셰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푸셰는 어째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이 급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저
프랑스인다운 열정으로 혁명국가 건설에 임할 뿐이었다.
그가 최고의 배신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는 – 당장 이공도 배신했다 – 시준
은 그가 여기에 나폴레옹의 괴뢰국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푸셰는 아직까지 그런 징후를 보여주지 않았다.
푸셰는 시준이 만들어 놓은 민간 소조직을 활용해 쉴 새 없는 사상교육 행사
를 열 것을 제안했다.
“자네 말이 맞네. 당분간은 왕의 충신인 것으로 선전하는 게 좋아. 그리고 자
네 자신마저 그렇게 믿어야 해. 혁명의 불꽃은 어디까지나 민중들이 자발적으
로 발현하는 걸세. 괜히 타의적으로 주입시키려 들었다가는 역효과가 나지.”
“이 행사들은 충분히 타의적으로 보일 것 같은데요.”
겨울이라 사람들이 한가한 틈에, 협동회의 돈을 풀어 표시 안 나게 군사 시설
을 설치한다. 그리고 그런 공사를 하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인다.
일찍이 의주에서 흥성했던 야학 동문, 통주와 이정을 비롯한 동리 인민위원회
(人民委員會)의 위원들, 임상옥의 청바지 제조시설에서 출발한 부녀회(婦女
會) 조직까지 세 겹 네 겹 촘촘하게 싸인 평안도의 민간 조직은 그런 동원을
정부보다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그때 음악과 깃발, 현수막이며 전단지를 동원해서 돈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
연설회나 합동 궐기대회를 개최한다. 시준은 갈수록 어느 공화국이 되어가는
평안도의 상황이 영 마뜩잖았다.
하지만 조제프 푸셰에게는 자신의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강연이나 교육이 아냐. 신사들의 연설과 토론, 호응하는 군중, 그리고
어느새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가득 찬 민중의 대회지.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다시 확인하자면, 이런 행사는 인민 자신들에게 자기가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에 매우 유용해.”
공산주의와 볼테르 철학, 그리고 플라톤에게 영향받은 정통 왕당파 이론이 합
쳐진 그의 사상은 매우 모순적이었지만 그래서 현실에서 쓸모가 많았다. 현실
도 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민중의 편에 서면서도, 자신이 민중을 조종하고 있다는 끈은 놓지 않는 이러
한 행보가 대표적이었다. 푸셰가 공감하는 인민의 대의라는 것은 바로 그 자
신이 불 지핀 것뿐이었다.
“환상이라니, 냉소적이시군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도 민
중의 하나예요.”
“하하. 역시. 과연 모범적이야. 그렇게 하는 걸세. 이렇게 인민들은 스스로를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 만들게 되는 거야. 질료[matière]는 그 안에 이미 형상
[forme]의 가능성을 내재하지. 농부는 씨앗을 크고 실하게 키울 수 있지만 보
리를 심어 놓고 밀이 되도록 할 수는 없어. 자네가 주의할 것은 자네가 민중
의 열의를 자네의 열의와 일치시키는 시점, 그리고 방식일세.”
이러한 자기 주도적 방식을 통해 평안도 인민들은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할 것
이다. 그 사업을 시준이 성공적으로 이끌수록 그러한 인식은 강해진다.
그리고 이미 사대부의 지지도, 보편 상식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왕을 맞이했
을 때, 거들먹대는 왕과 근시들 앞에 어쩔 수 없이 굽실대는 서도상고총협동
회 회장을 보게 된 평안도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의문을 떠올린다.
‘너 뭐라도 돼?’
그때 시준은 왕의 권위에 억지로 억눌려 그간의 성과와 명예를 빼앗기는 피해
자를 연기하면 된다. 폭발한 민중들은 시준과 협동회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시준이 눈물을 흘리며 나설 때는 바로 그 시점이다. 왕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
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그가 무죄라면 인민이 유죄[S‘il
est innocent, le peuple est coupable]가 될 때다.
그것을 위해, 조제프 푸셰는 자신이 서울에서 얻은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왕
을 공경하는 척하면서 비난의 틈을 마구 주는 연설 초안을 써 왔다. 처음에는
표시가 안 나지만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파고들 수 있는 훌륭한 글이었다.
“나는 이제 늙어서 그런 열정적인 역할은 사양이야. 허나 분명 자네 휘하에도
혁명의 대천사(Archange de la Revolution, 루이 16세의 처형을 제안했던 루
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Louis Antoine Léon de Saint-Just)를 말한다)가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걸세.”
“각하. 저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가족들을 돌려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만
약 왕이 그것에 대해 순조롭게 협상한다면,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국왕에게
손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아요.”
푸셰는 씩 웃었다.
“그거야 혁명정부의 위원들도 마찬가지였지. 파리에서도 처음부터 왕을 죽이
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러나 끝내 루이의 목은 잘리고 말았네. 두고
볼 일.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시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요, 일단 우리는 살아남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겁니다. 각하께서도 몸조
심하시죠. 각하께서는 영국군이건 조선군이건 어느 곳에 들켜도 목숨이 위험
하니까.”
그 말대로다. 아직 시준의 세력은 극초기 단계다. 이 모든 작업은 이제 시작
일 뿐이었다. 벌써부터 단두대 디자인 같은 짓을 할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홍경래와의 협상을 트기
위해 시준은 협동회의 위세를 만방에 떨칠 행사를 기획할 필요가 있었다.
시준이 아는 범위 내에서 이런 일을 가장 잘 하는 건 또 ‘그 나라’였다. 시준
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전생의 지식을 동원했다.
가경 16년 정월 보름을 기해, 명절을 맞아 널리 진휼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테니 할 말 있는 자들은 와서 하라는 취지의 큰 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여러 갑론을박 끝에 평양인민대회(平壤人民大會)라고 명명되었다.
시준은 인민이라는 글자를 빼 보려고 노력했으나 그게 아니면 다른 정부조직
을 꾸려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받는다는 김창시의 반론이 이겼다.
하여튼 인민 두 글자만 내세우면 다 된다는 인민만능주의가 이미 협동회와 정
치국에 만연했다. 시준 역시 ‘그래. 당대회가 아닌 게 어디냐.’ 하는 심정으
로 승인했다.
말이야 인민대회지만 사실상은 근문소와 협동회, 그리고 그들과 친하거나 친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 행사라 매우 신속하게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곧 평안도 제일의 대도시 평양에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활력이 넘
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1. 다케다 신겐만 그런 건 아니고, 전국시대의 영주들은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막 끊고 뒤통수치는 짓을 자주 하긴 했습니다.
2. 철학당이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볼테르의 사상을 계승한 일련의 집단을 말합니다. 국왕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를 부정하고, 플라톤적이고 합리적인 정치를 주장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이들과 많은 신경전을 벌여야 했죠. 대표적인 인사로 루이 즉위 초기의 재무대신 튀르고가 있습니다.
3. 사실 푸셰의 말에서는 주체와 타자 개념이 들어가면 더 어울렸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아직 헤겔이 자신의 학문을 모두 완성하지 못한 관계로(작중 시대에 생존해 있습니다. 서른 남짓 되었겠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어딘가에서 세계를 조종하는 음모론 조직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엘리트가 많이 가입되어 있는 양지의 사교 집단이었습니다. 당장 루이 16세의 사촌인 루이-필리프 오를레앙은 프랑스 프리메이슨단의 수장이었지요.
4. '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다.' 라고 알려져 있는 말의 원문은 작중 언급된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이었던 생 쥐스트의 연설입니다.
5. 일전 작가의 말에도 언급했지만 북한에서는(중국도) 당과 국가를 형식상으로(만) 엄밀히 구분하기 때문에, 보통 '인민'이 들어가면 정부 일이고 '당'이 들어가면 (당연히) 당의 일입니다. 중국도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대)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있으며, 북한의 경우 조선노동당 당대회(당)가 있고 최고인민회의(정부)가 있지요.
공산국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의전과 형식'을 결코 어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아는 해당 분야의 사람들은 용어의 변화를 통해 정세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폐쇄적인 공산국가가 외부에 무언가를 알리고 싶지만 공표하기는 뭣할 때 쓰는 방식이기도 하죠.
24. 평양 인민대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