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23. 열국(列國)은 진창에 발을 빠치고(4)
현재 조선 국왕 이공에게 있어 최우선 과제는 홍경래군의 입경이었다.
어차피 훈련도감이 무섭기도 했지만, 나가사키에 배를 보내는 건으로 또 입경
을 늦추는 바람에 때는 동짓달도 지나 섣달이 되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홍경래군은 그대로 다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이공은 자신의 얼마 안 남은 영향력을 모두 동원하여 홍경래군에게 물자를 공
급하는 중이었다. 그 물자는 홍경래군을 일단은 안심시킴과 동시에, 홍가장
식구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준은 부지런히 홍경래군의 상황을 탐지함과 동시에 홍득주에게 쌈짓돈을 보
냈다. 사람이 부족한 데다 명분도 떳떳하다 보니 오겠다는 놈은 어중이떠중이
다 받는 상황이라 첩자의 잠입은 매우 쉬웠다. 그리고 홍득주는 그 돈으로 식
구들을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게 유지할 수 있었다.
김사룡 등 홍경래군 간부들은 당장 돌입을 주장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홍
경래는 그런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고난의 행군 동안 많이 퇴색된 자부심을 새
로 덧칠해 줌으로써 설득했다.
“우리는 마치 불씨와 같다. 던져지면 화약 상자가 크게 터질 것이야. 우리가
바로 이 난세의 향방을 가르는 키이고 노잡이이니, 주상 전하의 어명이 따로
내려올 때까지 각별히 행실을 주의하라.”
이제는 홍경래 역시 도성의 상황을 대강 파악한 뒤였다.
당연하지만 지금 수도의 거의 모든 유력자는 홍경래군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그들의 군세 자체는 보잘것없지만, 먼 지방에서 왕을 위해 봉기
했다는 근왕군의 명분은 가볍게 볼 수 없다.
물론 지금 조정이 왕에게 대놓고 반기를 든 것은 아니고, 사대문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왕은 언제든지 지금 고양군에 있는 홍경래군에게 서울로
들어오라고 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훈련도감이 반드시 거병한다.
홍경래군에게 내리는 왕의 명은 절대 비밀이 될 수 없다. 이공이 직접 편지
들고 걸어 나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리고 홍경래군이 설사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한들 고양에서 서울까지의 거
리를 경희궁에서 창덕궁까지보다 더 빨리 달려올 수는 없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김조순 입장에서는 일을 빨리 매듭지을수록 좋다는 의
미였다.
그러나 인질이 걱정되어 닭 천천히 삶으라고 한 시준의 말도 있고, 당장 궁궐
을 때려 엎자는 과격한 생각까지는 하기 힘들었던 김조순 역시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지금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은 예조 참판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왕에게 비밀히 아뢰었다.
“지금 홍경래가 잡고 있는 사람 중에는 역적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처럼 패역
한 죄인도 있지만, 의주의 유학(幼學) 홍득주처럼 난리에 휘말려 억울하게 끌
려온 자도 있습니다. 서도 사람들이 고고하게 충성을 바치는 바가 갸륵한데,
사람을 함부로 학대하면 인심을 잃을까 두려우니 죄를 가려내어 무고한 사람
은 풀어주게 하소서.”
말한 사람이 정약용이라, 그가 ‘서도의 인심’ 운운하는 부분에서 그의 제자
정시준을 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왕도 알아들었다.
이공은 시준이 비록 노복이라 하나 사행길에서 멋대로 탈락했다는 것을 기억
해 내었다. 두 가지 사실이 결합하자 이공의 머릿속에서는 별 가치도 없는 의
주 포로들을 잘 써먹을 기막힌 방안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 의주 유학 홍득주는 정시준이 아버지로 모시는 자라 하였지. 그
런데 그자는 어찌하여 군왕 앞에 달려와 무릎 꿇고 죄를 빌어 한편으로 충의
를 보이고 한편으로 효행을 실천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시준이 와서 돈과 사람을 바치면 포로를 풀어주겠다는 소리다. 정약용은 진실
로 기가 막혔다.
정약용은 지금 네가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
다. 아주 직설적으로.
“병판(남공철)의 말에 의하면 훈국은 병조의 소환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으
며, 어영청과 총융청, 수어청은 도성 밖에 있어 급히 부르기 어렵습니다. 지
금은 한시라도 빨리 사대부와 백성의 놀라고 두려움을 가라앉히셔야 합니다.”
오군영 중 3개가 무력화된 셈이다. 막말로 지금 당장 김조순이 너 죽고 나 죽
자며 훈련도감 군대를 몰아 쳐들어오면 사실상 금군과 금위영만으로 맞서 싸
워야 한다.
무예청(武藝廳)이며 선전관까지 죄다 끌어모으면 훈련도감과 숫자로 맞서 볼
만하겠지만, 지금 여기에는 중대한 취약점이 있다.
바로 왕이다.
“많은 사람이 뒤엉켜 싸우는 혼란 중에 지존의 옥체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지금 도성은 손만 대면 터질 것 같은[一觸卽發] 형세입니다. 어찌 시급하게
덕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조순의 경우 설사 그가 죽는다 하더라도 노론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시수, 김재찬 등 쟁쟁한 대신들이 아직 남아 있으며 혈연과 학연으로 끈끈
하게 연결된 그 기득권은 하루아침에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지지세력을 모으지 못한 왕은 죽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는
날엔 그대로 끝장이다.
왕이 아직 삼남 근왕병을 못 불러오는 이유는 시준의 방해 때문만은 아니었
다. 일단 기호(畿湖) 사림이 노론의 영향권이라 공충도(公忠道, 충청도)부터
도통 왕명이 먹히지 않았다.
영남과 호남도 마찬가지다. 그쪽에 인맥이 있는 남인과 북인 잔존세력 모두
지금 왕에 대해 유감이 많았다. 왕이 백탑파를 등용했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은 노론의 태업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게다가 사람은 보통 은혜보다는 원한을 더 잘 기억한다. 당파에 밀렸다고는
하지만 남인과, 특히 북인을 완전히 숙청한 것은 지금 왕의 선조들이다.
결정적으로 가장 최근의 남부 근왕병이 이룩한 업적이 쌍령(雙嶺)의 장절한
전투이다 보니 설사 뜻있는 선비가 있다 한들 모병도 쉽지 않았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 있어도 시원찮을 조선군은 지금 거의 공
중분해 상태였다.
정약용의 필사적인 설득에 이공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대단
한 진일보다. 병을 치료하려면 일단 진료를 통해 질병을 인지해야 하고, 난관
을 타개하는 첫걸음은 자신이 난관에 처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런데 이공의 문제는 두 번째 걸음을 좀 이상하게 디뎠다는 것이었다. 고민
하던 이공은 정약용에게 은근히 말했다.
“참판은 제자 시준과 은밀히 통하는 길이 있는가?”
지금은 제자가 아니지만 정약용은 이제 이공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패
는 나중에 꺼내기로 했다.
“아닙니다. 지금 서도가 소란스럽고 백성이 놀라 도적이 창궐하고 있는바, 길
이 끊겨 이제껏 서신 한 장 서로 오가지 못했습니다.”
정약용에게는 그 말이 진실이었다. 시준은 평양 북쪽으로 강력한 봉쇄망을 펼
쳐 놓고 정약용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왕의 신하인 이상 어설
픈 연계는 역이용당할 우려가 있어서이다. 이런 면에서는 김조순이 오히려 믿
을 만했다.
“죄를 묻지 않을 터이니 있는 그대로 아뢰어도 좋다.”
시준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딱히 스승과 옛 제자가 연통하는 게 죄일
건 무엇인가. 정약용은 답답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이 어찌 감히 기군망상을 하겠습니까? 소신은 진실로 시준이 지금 살아 있
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처럼 남 속이기 좋아하는 줄 알았던 이공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생각에는 이미 정약용이 시준과 맺어져 있는 게 분명한
데 왜 얘기를 안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공은 직접 명령하는 대신 간접적인 방식으로 정약용을 조종하기로 했다.
“경의 간언은 내가 잘 들었다. 바야흐로 충과 의가 모두 서북에 있으니, 나도
옛날의 고루한 군주들처럼 구중궁궐에서 황망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적실
한 일을 하겠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
정약용은 자기가 제발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무례하게도 왕에게 되물었다.
“소신이 미욱하여 천의를 감히 잘못 헤아렸다면 벌해 주시옵소서. 전하께서는
설마…….”
이공은 날카롭게 웃었다. 그는 신하들이 자신의 기습적 예지에 당황하는 모습
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있는가? 지금의 사세는 어리석은 더벅머리 선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바로 열국 쟁패의 때이거니와, 이럴 때는 저 춘추전
국의 군주들처럼 결단이 신속하고 거행이 빨라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내가
하려는 일은 이미 열성조께서도 국난을 당하셨을 때 가납하셨던 바이니 옛것
을 본받는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조선 왕실이 국난을 당했을 때 쓰는 간판 필살기가 이공의 손에서 펼쳐졌다.
“금위영과 금군, 그리고 서도 근왕군을 이끌고 충의의 고장 서도로 향할 것이
다. 말이 새어나갈까 두려우니 액정서와 환관들, 그리고 내명부에만 일러 속
히 짐을 꾸리도록 하라. 홍경래가 데리고 있다는 백성들 역시 내가 친히 고향
으로 돌려보내 주리라. 여의치 않다면 나는 걸어도 상관없다. 이것이 바로 솔
선하는 군주의 도이다.”
정약용의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공이 별 관심 두지 않는 내명부를 챙기기로 한 것은, 왕비가 김조순의 딸이
기 때문이었다. 이공은 김조순의 아들과 딸을 모두 인질로 잡는다면 자기가
어디 있든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 이점은 바로 약점으로도 작용했다.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 해도 일
국의 왕비쯤 되면 주변 상황에 생각 없이 쓸려가지 않을 만한 세력은 있다.
당연하게도 왕비 김씨는 믿는 상궁이며 나인, 그 친척과 친구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김조순에게 이 일을 전했다.
물론 들키면 폐위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만, 궁 밖으로 끌려 나가 어디에서 객
사할지 모르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김조순은 대노했다. 시준이라면 그도 상여에 실려 도망친 주제에 누가 누굴
뭐라고 하느냐고 비웃겠으나 그건 그야말로 현대인의 생각이다.
김조순은 신민이고 이공은 왕이다. 이 둘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신분이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진중한 차원이다. 개가 모르는 사람을 핥으면 귀엽게 봐주
지만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핥으면 코뼈가 으스러질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일국의 제왕이 치욕을 몰라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김조순을 더욱 노하게 한 것은 왕의 도망치는 방식이었다.
지금 내명부의 첩보에 따르면 왕이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관청인 액정서에서
왕이 입을 내시의 상복(常服)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조순은 고금 어느 사서에 환관으로 변장하고 도망친 제왕이 있었는지 생각
하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부원군 체면에 왕 이 새끼 진짜 내시나 되어버리라는 저주를 퍼붓기는 좀 뭐
했지만 김조순은 정말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김조순과 같이 있던 이강회는 그런 무익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
다. 대신 그는 낮고 힘 있는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또 그 소리인가!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야. 때를 기다려 봐야…….”
당장 군사를 휘몰아 창덕궁을 치자는 생각은 김조순도 해 봤다. 하지만 여러
모로 준비가 미비했다.
훈련도감과 금위영의 막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왕을 영영 놓쳐 버리면 죽도 밥
도 되지 않는다. 왕비 김씨가 시준에게 의탁하자는 왕의 의도를 알지는 못했
기에 –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조순의 초조와 불안은 더 커졌다.
“아니오. 그 얘기가 아니올시다. 만약 제가 주상 전하의 근시(近侍)라면, 눈
을 돌리기 위해서 지금 바로 일을 시작하시라 주청했을 것입니다.”
김조순은 그 ‘시작’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왕은 높은 확률로
훈련도감 본영을 선제 공격할 것이다.
이강회는 궐련을 질겅질겅 씹었다.
“아마 주상 전하께서 이어하시는 바로 그때 들이칠 터.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
로 신하가 군주를 먼저 치는 것은 명분이 없지요. 그러나 멍하니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어의 때를 늦추며 형세를 보는 수밖에요.”
“때를 늦추다니, 어떻게?”
어차피 왕이 무슨 재주를 부리든 이어에 소요되는 여러 물건, 식량과 땔감 및
옷이며 생필품들을 갖추려면 새로 사들이는 게 없을 수는 없다. 이강회는 서
울 상인들을 움직여 태업을 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강회의 설명을 들은 김조순은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했다. 호랑이가
들이닥치는데 장지문 하나 닫아 놓고 안심하는 수준인 것을 스스로도 알았으
나, 그 다음 생각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 장지문은 필요했다.
“서북이라면 필시 홍경래의 무리에게 의탁하려는 것이야. 자네 사형에게서는
소식이 없는가?”
“소식은 없지만…….”
이강회는 궐련에 불을 붙였다. 담뱃대는 아니라고 하나 김조순은 이자가 감히
어른 앞에서 담배질을 하는 모습이 영 마뜩찮았다.
“돌아가는 일은 대강 알만 하오이다. 대감께서는 이 본영만 잘 지키십시오.
주상 전하께서 정말 출성(出城)하신다면, 그 뒤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
“설마 전하께서 고양 벌판에 병사들과 기숙하시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서
북으로 간다면 뒷일은 뻔하지 않겠소이까?”
김조순은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평양! 아니, 그런데 만약 그러다가 자네 사형이 마음을 바꾸어, 주상 전하나
홍경래와 합세해 버리면 어찌하는가. 일가도 어차피 홍경래군에 있다면서. 전
하께서 그들을 돌려준다면…….”
이강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김조순은 노기를 숨기지 못한 채 그 모
습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웃던 이강회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우리 사형…… 아니, 이제 옛 사형이라 해야 하나. 시준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
이 아닙니다. 도적이 옷을 훔쳐갔다면 집안의 모든 옷을 이자 쳐서 받고, 용
서해주겠다 하고 으슥한 곳으로 꾀어 죽인 다음 집안의 모든 재물을 들어내
가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의주 사람 정 모(鄭某)가 너그럽게 도둑을 방면하였
다 칭송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은원(恩怨) 모두를 열 배로 갚아 주는
신의의 군자이니 걱정하실 것 없소이다.”
김조순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이 악독한 제자들을 키운 정약용을 속히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조제프 푸셰가 장자도에 머문 채 시준을 불러오라 한 것은 오만함의 발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푸셰는 유럽인 수백 명이 조선 영토를 가로질러 행군할 경우 조선인들이 받을
충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조선 관리를 포로로 잡고 있다면
그 충격은 분노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영국에 이어 프랑스 때문에 또 장자도에 와야 했던 – 이번엔 아예 김
치도 가져왔지만 푸셰 일행의 경우 그런 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 시준은 의심
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조선 정부에 정면으로 적대하시려는 겁니까?”
푸셰는 유쾌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하하! 그래. 자네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간과할 수 없는 중상이군요. 저는 왕의 충신입니다.”
“거짓말하지 말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연하게 후려치는 푸셰의 면박에, 시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왈칵 화를 냈다.
“이거 보세요. 최소한 왜 거짓말인지는 얘기를 하는 게 도리 아닙니까? 그렇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어라. 나는 자네가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왜기는 왜야. 자네는 내게 잡혀
있는 포로의 안위에 대해서도, 이곳에 온 목적도 전혀 묻지 않았어. 자네가
만약 정말 충신이라면 나한테 처음 던지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칼날이었어야 해.”
푸셰는 여유로운 태도로 치킨을 뜯었다.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 잘 먹던 푸셰
에게 김치는 필요 없었지만 시준의 치킨은 도성에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네가 처음 한 질문은 조선 정부에 대한 나의 태도, 그러니까 자네
와 한편이 될 것이냐는 물음이었잖나? 그런 자네가 어떻게 왕의 충실한 백성
이 될 수 있겠나?”
시준은 더 부정해 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나가는 편이
더 빠르게 얘기가 끝날 것 같았다.
시준 역시 푸셰에게 얻고 싶은 게 있었다.
“좋습니다. 내 실수를 인정하지요. 하지만 그건 지금의 일이고, 각하께서는
아마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내 뜻을 서울에서 짐작한 근거는 뭐지요?”
“먼저 자네가 스승과 함께 서울에 오지 않았다는 게 컸지. 어디, 자네 그리스
철학을 좀 아나? 귀류법(歸謬法)을 써 볼까? 자네가 왕의 편일 경우 자네는
수도에 들어왔어야 해. 어리석은 자들은 자네가 뒤에서 ‘근위대’를 돕지 않겠
느냐고 할 수도 있고 자네 역시 그것을 이용할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친위 쿠
데타가 목적이라면 당연히 유력자가 수도에 있는 게 제일 효과적이야. 그렇지
않았다는 건 자네에게 딴마음이 있었다는 증거일세.”
시준은 긴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푸셰를 당장 쳐 죽이기에는 주변의 프랑스
병사가 너무 많았다.
“또한 왕의 근위대가 상당한 혼란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 두 번째
근거지. 조선의 서신 관리는 대단히 우수한 편이고 귀족들도 프랑스에 비해
언사를 너무나 주의하여 알기는 어려웠다만 대강 짐작은 가능해.”
실제로 처형당한 왕 루이가 만인의 축복 속에 즉위와 결혼식을 거행했을 무
렵, 파리에 머무르던 대사와 귀족들은 왕이 발기부전이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써갈겨 편지를 보내곤 했다. 파리의 서신 검열관이 다 본다는 걸 알면서도 그
랬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연히 입에 담지도 못할 죄였다. 영락제에게 비슷한 소릴 했
던(이건 면전에서 그랬다) 무명의 용자라거나 조선 경종이 자식 없어 왕세제
를 임명해야 했던 이유를 너무 솔직하게 말한 이건명(李建命) 같은 경우 하나
같이 곱게 죽지 못했다.
이런 거야 극단적인 경우지만, 동아시아 전제 군주는 그저 인간 중 귀하신 분
정도가 아니라는 한 예다. 전제 군주는 말 그대로 정신까지 전제했다.
그래서 천하의 푸셰마저도 처음에는 조선에서 첩보를 수집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그 재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수경포도청이 본
격 창설되었을 때쯤에는 푸셰도 조선식 은유와 숨겨진 뜻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난쟁이 장(Jean le nain)’이라 부르는 자의 근위대는 분명히 조
직적인 후방 방해를 받고 있었어. 하필 성인(聖人)의 이름을 그따위 토호 깡
패에게 붙이다니, 영국 놈들의 신성 모독에 주님께서 꼭 천벌 내리시기를. 아
무튼, 그 방해를 조선의 지방관과 주둔군 사령관들이 했을까? 그럴 리 없지.
그러느니 정면에서 그 근위대를 때려 부수는 게 훨씬 빠르니까. 결국 자네밖
에 없다는 말이야.”
시준은 뜨끔했다. 푸셰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교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디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지. 자네는 나와 같은 부류야. 부정하지 말게. 우
리는 마음이 잘 맞을 걸세.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내가 자네 사업을 도울 수
있네.”
“내 사업이 뭔지 안다는 투로군요. 말해두는데, 내가 할 일이 반란이라고 단
정하는 것은…….”
푸셰는 미소를 풀지 않은 채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뜯
지는 않았다. 그는 닭다리를 시준에게 내밀었다.
“Non, c‘est une révolution[아니, 이건 혁명이지].”
작가의 말
1. 오군영만이 조선 중앙군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비상시 금군으로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은 여러 가지 있기는 했죠. 작중 언급된 무예청, 그리고 순조 초기에 폐지된(그래서 안 나온) 호위청, 또 내시와 선전관도 높은 수준의 단련과 무술을 요구받았습니다. 좋게 보면 상무 정신이고, 나쁘게 보면 군대와 관리의 구분이 미비했다는 얘기죠.
2. 금위영의 전체 인원은 약 2~3천 명 정도입니다. 작중 언급된 숫자는 그 중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주력군의 숫자입니다.
3. 푸셰가 말한 '성인의 이름'이라는 건, 실제로 '난쟁이 요한'이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집트 콥트 교회의 성인이라... 푸셰의 말은 그냥 영국인들에게 시비 걸어 보고 싶었던 마음의 발로입니다. 하하.
4. 마지막의 Non, c'est une révolution은 프랑스 혁명 때(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후) 루이가 "폭동인가?" 하고 물으니 옆에 있던 사람(이 사람이 누군지는 기록이나 전승마다 다릅니다)이 "아니오. 혁명입니다. 폐하." 라고 했다는 것에서 유래하죠. 하지만 이 일이 진짜 있었는지는 여러가지로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23. 열국(列國)은 진창에 발을 빠치고(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