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78화 (78/284)

78화

23. 열국(列國)은 진창에 발을 빠치고(2)

많은 한국인은 조심스럽게 김치를 먹어 보는 외국인을 주시하며 두근두근하지

만, 딱히 놀라운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김치가 특별히 독창적인 음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채를 절여 발효시키는 지

식 정도야 오히려 없는 문화권이 드물다.

이번에도 김치가 영국인에게 이세계적 놀라움을 선사한 것은 아니다(그 정도

로 낯설었다면 아예 입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인들이 자우어크라우트로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것은 영국 해군도 알고 있었으므로 선원들은 감사하며

김치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김치와는 별개로, 로드 암허스트는 이 대함대에 공급할 식량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 협동회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심지어 조선 정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 고관이 따로 영지나 사업을 맡는 것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영국이었기에,

암허스트는 시준이 ‘자신 휘하의 유통망’을 움직여 음식을 공급한다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로드 암허스트는 식료품의 대가로 6파운드 야포 8문을 제공했다. 물경 400정

에 달하는 브라운 배스 머스킷과 탄환도 함께였다.

육상 병기가 필요했던 시준과, 육지에서 싸우는 것은 인도에서 추가 증원이

오기 전까지 어려웠던 영국군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졌다. 암허스트 역시 당

장 쓸데도 없는 육전용 장비를 당장 긴급한 음식으로 바꾸는 데에 불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시준이 특히 주목한 것은 12파운드 콩그리브(Congreve) 로켓이었다.

인도에서 영감을 얻어, 1805년 볼로뉴에서 유럽 데뷔전을 화려하게 치른 콩그

리브 로켓은 영국군이 애용하는 화력 투사 수단이다. 이 시기의 밀집 보병 전

술에서 이 무기는 대단히 유용했다.

전술 개념이나 작동 방식이 신기전(神機箭)과 유사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익숙

하면서도, 신기전과 달리 근대전에 사용 가능한 고화력을 갖추었다는 여러 장

점이 있었다.

“이것도 꼭 받고 싶은데…….”

하지만 이건 영국 기준에서도 최신 무기다. 로드 암허스트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병기를 이렇게 한꺼번에 내어주면 의심받을 수도 있고, 우리

도 자위 수단이 마땅치 않게 되오.”

“의심은 개의치 않는다고 하셨지 않소? 어차피 홍경래…… 당신들은 난쟁이 존

이라 부르던가. 그자에게 넘기기로 한 무기가 있었으니 동인도 회사의 장부에

는 좀 융통성을 부릴 자리가 남아 있겠지.”

홍경래의 이름이 나오자 로드 암허스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조선에서 난쟁이 존의 위치는 어떻게 되오?”

“나도 정확히 모릅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오. 그가 왕

의 친위대를 자처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 평안도에서는 그 말이 전혀 신뢰받

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

그다음, 시준은 완전히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을 위해 조언하자면, 나 같으면 자신을 한 번 속인 자들은 믿

지 않을 것 같소.”

명시적인 선언이나 약속, 직설적 대화보다 비언어적인 제스처와 우회적 암시

를 더 신뢰하도록 훈련받은 귀족적 정치가 로드 암허스트는 여기에서 시준의

의도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조선왕이 진정 영국과 동맹할 의지가 있다면야 굳이 사병

을 먼저 서둘러 기르고 수도로 진공시킬 이유가 없다. 그건 영국군이 해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다음 영국 군사고문을 써서 병사

를 기르는 게 정석이야.’

푸셰는 이공이 외국군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할 리 없다고 말했다. 민중이 왕

을 외면할 위험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물론 그것은 정론이다.

하지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졌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이다. 당장 주변의 귀족 관료들에 의해 정권이 탈

취당할 판인데 노예들 눈치나 보고 있게 생겼는가?

그 상황에서 왕은 영국군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말 한마디만 하면 크게 명분

을 얻은 로드 암허스트가 즉각 병사를 내렸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전

오랫동안, 조선왕은 시준이 말한 대로 마치 지역 반군인 것처럼 영국을 속여

무기를 수입했다.

시준은 분명히 ‘속인 자(deceiver)’가 아니라 ‘속인 자들(deceivers)’이라고

말했다. 로드 암허스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조선왕과 난쟁이 존은 친영파가 아니야.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저 조제프 푸셰가 조종한 일일 수밖에 없지!’

그리고 이런 말을 해 준 시준 역시 조선왕의 편은 아닐 것이다. 암허스트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표류한’ 우리에 대해 대응책을 결정한 건 조선 정부가 아니라 당신이

었군.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소? 난쟁이 존의 일은 몰라도, 당신의 위

치는 얘기해 줄 수 있겠지?”

물론 시준은 이 몸이 바로 대청국 소신교위이며 조선국 동지중추원사라는 소

리는 하지 않았다. 솔직히 둘 다 농담거리밖에 안 되는 벼슬인 데다 암허스트

는 그걸 물은 게 아니었다.

시준은 마주 웃어 주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친구요.”

홍경래군의 자부심과 다르게, 그들이 무슨 조선군의 방어선을 가차 없이 분쇄

해 가며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의의 진격을 수행 중인 것은 아니었다.

숫자로 보자면 사행보다 그리 월등히 많지도 않은 홍경래군은 평안 감사를 포

함한 일부 수령이나 병영에만 소란을 일으켰을 뿐, 그 외에는 일반적인 대규

모 여행객이 받는 주목 정도만 받고 있었다.

오히려 각지의 수령이나 민가에 폐가 더 되는 것은 홍경래와 달리 뭘 뜯어내

는 데 있어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진하사 쪽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진하사

는 별다른 문제 없이 홍경래군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 꾸준히 남하하고 있었다.

홍경래 역시 자기들과 같은 경로에 진하사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합

류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관리들의 휘하에 들어가 자기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왕군을 자처하는 이상 쟁쟁한 고관들이 즐비한 진하사는 부담스러웠다. 거

기에 홍득주와 친한 정약용까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물론 아주 모른 척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들은 근왕군이니까. 그래서 홍

경래는 자신들의 대의를 설파하는 격문과 함께 형식적인 ‘호위 제안’을 보냈다.

그리고 정사 남공철은 고심 끝에 그것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저들이 말하는 바는 매우 놀랍고 두려우나, 어차피 우리는 경사로 가는 길이

고 무슨 군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저들의 거병이 왕명이라 하여도 우리가 돌

아가 군왕께 아뢰는 것 역시 왕명이다. 위로 삼사관부터 아래로 노복까지 한

사람도 경거망동하거나 각자의 소임에 태만하지 말렷다.”

진하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상놈들은 자신들이 말[馬] 없다는 사실을 위에

서 까먹은 게 아닌가 하고 욕설을 뿌리며 헉헉댔다.

북경에서 공 세운 장복이나 칠복이 등 몇 명 정도는 끝내 탈락했다. 허나 어

차피 부사 정약용의 수행원도 진작 떨어져 나갔고 여기는 조선이라 큰 문제는

안 되었다.

홍경래가 행주산성을 지나 고양군에 적당히 진을 쳤을 때쯤 – 들어가도 되는

지 주인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 진하사는 청나라 일 같은 건 다 잊어

버리고 지금 조선 상황에 대한 불안을 품은 채 서울에 들어섰다.

남공철과 정약용은 사행길 두어 달 사이에 조정이 한바탕 사화라도 겪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던 조신들은 대부분 위치를 바꾸거나, 사직해서 떠났거나, 그도 아

니면 의금부에 갇혀 있었다. 며칠 뒤, 진하사 결과 정리를 위해 회동한 병조

판서 남공철과 예조 참판 정약용은 각자의 담당 부서가 올해 안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첩(移牒)된 관문이며 기록한 문건과 고거(考據, 참고하여 근거 삼음)할 장

부까지 하나도 맞는 게 없소. 태반은 관헌들의 사직과 이직 탓이지만, 그 경

우에도 그간 해온 일의 허실을 살펴 해유문자(解由文字, 업무가 해제되고 인

수인계가 끝났다는 증명)가 있어야만 떠날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

리 질서가 다 망가질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오.”

남공철보다 조금 더 많은 사항을 알고 있는 정약용은 앞뒤를 대충 알 만했다.

이서구조차 손을 못 댔을 지경이라면 김조순 일파의 의도적인 태업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원인은 왕이 정부 조직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권력자 몇 명만 갈아

치우면 자기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혈통으로 주어지는 권력을 받는 조선의 왕이나 거기에 더해 하느님도 숟가락

얹는 유럽의 왕들은 가끔 잊어버리지만, 권력은 본래 권력자의 몸에 총기처럼

깃들어 있는 게 아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자체가 권력이다.

이 상황은 정약용의 마음속에 한 점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원래대로라면 김조

순은 그 역심을 드러내자마자 당장 처단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홍경래 근왕군의 서울 접근에도 불구하고, 왕의 편으로 돌아선 노론

신하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백탑파는 차마 김조순의 명을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못하지만 대신 왕에게도

붙지 않은 채 무너지는 정부를 지탱하는 중이었다. 정약용은 두어 달 사이 20

년은 늙은 것 같은 친우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지금의 상감은 지재가 모자라실 뿐 걸주와 같은 폭군도 아니요, 아직은 선비

들을 떼로 죽이거나 병화를 일으킨 바도 없다. 서양국과 교우하려 한 탓인가?

하지만 그건 중국이나 일본 역시 하고 있는 데다 김조순 또한 청과 내통하려

한 죄가 없지 않아. 그렇다면 왜?’

물론 정약용은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정하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이미 천명이 왕을 떠났다. 이 말을 현대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하면, 사

대부들이 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왕에게 드러나는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왕이 먼저 사대부를 불

신하고, 그 불신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외국인을 신임하여 가까이 두

는 등 조직 관리의 기본적인 철칙을 어겨서이다.

불공정하고 때로 부당하더라도, 내부인은 외부인보다 항상 우대해 줘야 한다.

하지만 왕은 뒤늦게라도 실수를 교정하는 대신 가장 극단적인 수단인 총칼을

동원하여 반대자를 숙청하려 했다.

정약용은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권력은 하늘이 왕에게 부여하는 것이

다. 그러나 고전 어디에도 지금 이공의 실책이 천명이 거두어질 만한 일이라

고 하고 있지 않았다. 맹자의 설에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조선은 사대부와 인민들이 왕에게 권력을 빼앗으려 하는 형국. 인간의

기준에 의한 인간들의 싸움이다.

그리고 이것은 권력이 사실 신이나 군주가 아니라 신민에게서 나온다는, 유학

자들 역시 모두 알고 있었지만 수천 년간 모른 척해 온 사실을 강하게 암시했다.

“일단 어떻게든 주상 전하를 면대하여 작금의 처지를 아뢰고 용단을 받아야겠

소. 이대로는 아무것도…… 이보시오, 참판 영감. 지금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

해 있소?”

남공철의 말을 거의 안 듣고 있었던 정약용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래야지요. 이 사람도 마땅히 대감을 따르겠소이다.”

현 조정에서 남공철과 정약용이 김조순파라고는 하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왕

의 설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몽군주 이공은 남에게 가르침 받는 건 싫어해도 남에게 가르치는 것

을 사양할 자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두 신하는 거의 한 시진 동안 김조순의

악덕에 대한 성토를 들어야 했다.

남공철은 점잖게 말했다.

“하교를 받잡고 나니 실로 망극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군주가

친재하는 것은 만기요, 가슴에 우환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 식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선 안의 일을 정돈하고 나서야 밖의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개싸움에 우린 끼어들기 싫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말하기도 지친 이공 역

시 일 좀 하자는 신하들의 제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만 노리던 정약용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조에서 가장 급한 일은, 일본국에 보내는 통신사입니다. 명년 정이월에 보

내기로 약조했었는데 지금이 벌써 동짓달입니다. 소신이 살피니 아무런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아 도저히 기일을 맞출 수 없으므로, 급히 한 사람을 파견하

여 사정을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료됩니다.”

남공철은 이공이 ‘아 맞다!’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더 말도 하기 싫어

졌다. 꼴을 보아하니 예조 판서 박윤수도 급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왕에

게 아뢰지 않은 모양이다. 불불이 사람 보내며 애만 태우고 있을 대마도주나

막부 가로(家老)들이 다 불쌍할 지경이었다.

외교가 다 그렇지만, 진하사를 황제 생일 지나고 보내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

지로 통신사 또한 날짜를 미루면 큰 문제가 생긴다.

도쿠가와[德川] 막부에 오랫동안 눌려 있던 번국들은 조선이 막부를 버렸다

며, 이제야말로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원수를 갚을 때라는 둥 자기 좋을 대로

떠들어댈 것이다.

그리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는 뭐 섭섭

하게 한 것도 없는데 굳이 이런 노골적인 방식으로 시비를 거는 조선에 대해

불만을 품을 게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이에나리가 막부의 전성기를 연 쇼군임을 감안할 때 이는 자해 행위에

가깝다.

설마 통신사 안 보냈다고 전쟁까지야 하겠느냐마는, 북경의 반란을 보고 온

정약용은 일본이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청이 신속히 지켜주리라는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이공 역시 이 일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의 초절한 두뇌는 이 와중

에도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든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보자는 방향으로 돌

아갔다.

“예조 참판이 일전에 말하기를 장기(나가사키)에 서양국 사람들이 있다고 하

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대로 화란국과만 교유하는데, 장기에 섬(데지마)

을 만들어 놓고 마치 우리나라의 왜관(倭館)과 같은 제도를 두어 함부로 사람

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며 무역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에도로 사신 보내라는 정약용

의 암시는 무시당했다.

“우리가 갑자기 통신사를 늦추겠다고 하면 저들은 크게 의심할 것이다. 말로

달래어서는 전연 듣지 않고 오직 칼날을 보여주어야만 숙이는 것이 저 야만한

왜인의 습속이라. 무릇 도리와 함께 위엄을 갖추는 일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남공철과 정약용은 동시에 ‘우리가 칼이 어디 있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왕이 못 본 게 다행이었다.

이공은 이번에도 신하들에게 자신의 신산귀모를 하달해 주었다.

“참판이 말한 일은 왜관과 대마도를 거쳐 서계를 내리되, 한편으로 장기에 지

중추원사 복공(푸셰)을 장기에 배로 파견하라. 첫째로는 우리가 서양국과 연

결되어 있음을 일본국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둘째로는 이역만리에서 오래 고

생하는 불랑국 사람들이 귀향할 길을 찾게 하려는 나의 헤아림이다.”

현재의 조제프 푸셰는 확실히 조언자의 역할 말고는 할 게 없다. 아우스터리

츠를 비롯한 함대는 모조리 끝장났고, 조선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어디 프랑

스의 원군을 불러올 데도 없으니까.

이공도 써먹으려는 노력은 했다. 아우스터리츠에 탔던 많은 수병이 병조나 군

기시(軍器寺)에 소속되어 뭐든 간에 아무튼 만들어 보라는 앞뒤 없는 강요를

당한 지도 오래되었다. 실제로 강화도와 수원 화성에 아우스터리츠의 함포를

설치하는 등 일부 성과도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프랑스 인민들이었다. 그들은 급료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

하며 툭하면 파업을 벌였고, 고관들은 저 오랑캐들을 몽둥이로 교정해도 되는

지 물어와 이공을 난처하게 했다.

그래서 이공은 그들을 다른 데 쓰기로 했다. 귀찮은 프랑스인과 이제 뽑아낼

거 다 뽑아낸 푸셰를 베트남이나 프랑스로 돌려보내, 조선왕의 개항 의지를

알리고 영국에 이어 프랑스까지 끌어들이려는 속셈이다.

나라가 많아질수록 그들이 서로 견제하여 함부로 딴짓을 하지 못하리라는 발

상은 이공다운 것이었다. 영국인을 통해 최강 베트남 해군의 이야기를 들은

이공은 이 항해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또한, 저들을 깨끗이 치워버린다면 외국인을 끌어들였느니 어쩌니 쑥덕대는

삼남의 선비들도 일부 자기편으로 회유할 수 있겠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조정의 형편상 믿고 보낼 사람이 정약용밖에 없는데, 이공은 자

신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심복 정약용을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약용도 이공의 마음속을 짐작했다. 허나 반대하기가 힘든 게, 왕이 표면적

으로 한 말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인이 고향 가는 길에 나가사키 들르라는 것뿐

이다.

게다가 신경 날카로워진 왕을 자극하면 홍경래 손아귀에 있는 홍 장주 가족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모르는 남공철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지금부터라도 서

둘러 준비하면 조금 조촐하고 사고도 생기겠지만 어쨌든 가능하다. 진하사도

벼락치기로 했는데 새삼 통신사는 못 할 게 뭐냐.’ 는 취지로 왕을 힘써 말렸

지만 이공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공과 정약용, 남공철은 셋 다 간과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명을 전해 들은 조제프 푸셰는 그 문제를 알고 있었기에 잠깐 얼굴빛이 바

뀌었다. 네덜란드는 오래전부터 프랑스의 괴뢰국이었고, 그래서 푸셰 또한 나

가사키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이 무식한 놈들이!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인 외에 어떤 외국인도 발을 디딜

수 없어! 하물며 가톨릭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인은 아마 배를 대기도 전에 대

포 맞고 침몰당할 거다! 거기 들어가는 데 성공한 유럽인은 2년 전 더 큰 대

포 들고 돼지 약탈하러 간 영국 놈들밖에 없다고!’

그런 항변은 푸셰의 목구멍에서 멈추었다. 이공처럼 푸셰도 이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써먹을 방법이 곧 생각났기 때문이다.

푸셰로서도 연기 나는 집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 그 역시 근간의 조선 조

정을 보고 학을 떼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수없는 정부 전복을 겪었고, 때로는 자신이 주도하기도 했던 만큼

푸셰는 지금의 조선 정부가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푸셰는 그간의 반복 운동으로 상당히 발달한 다리 소근육을 적극 사용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진짜 조선 사람 같았다.

“조선 국왕 폐하의 자비와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어 이 사람은 감

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인류라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가지지요. 마땅히 즉시 명을 따를 뿐입니다. 어찌 지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푸셰는 반년만 더 있었으면 말라 죽을 것 같았던 그레테 자작 외 아직까지 살

아남은 수병 이삼백 명을 소집했다. 위엄을 보여야 하므로 조선에서는 왕의

특명으로 대병선을 내주었다.

이공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조선 병선이 아무리 커 봐야 서양국 상대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데다, 푸셰로부터 받은 가르침 때문에 ‘군함이 남의 나라 항

구에 정박한다’는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노론 시파의 입장에서도 꼴 보기 싫은 서양 오랑캐를 내쫓는 것은 반가웠다.

국방 따위는 이미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왕이 제 것 제가 망가뜨리겠다는

데 비싼 밥 먹고 반론하느라 헛심 쓸 이유가 없다.

그래서 푸셰는 도성의 난장판에도 불구하고 별 무리 없이 조선 배를 탈 수 있

었다.

이들을 인솔하는 사람은 원 역사에서도 통신사의 부사로 갔었던 예문관 응교

(應敎) 이면구(李勉求)였다.

그래도 조선 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공이 대충 죽어도 될 것 같은 신하를

지명한 것이다.

원래 사신행이란 게 인기가 없고, 서양인을 데려다주고 병선을 회수해 오는

임무라면 명분조차 없다. 원 역사에서도 일어났던 일이지만 지금도 7, 8명에

달하는 신하가 자기 죄와 용렬함을 열거하며 사신행을 사양했다.

그러나 왕이 홍경래군의 도성 입경을 약간 늦출 수 있다는 암시를 보이자 김

조순의 양보로 한 명이 총대를 메게 되었다.

청요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도 현재 김조순의 계파였다.

그리고 배에는 이면구의 수행원 몇 명과 노 젓는 격군 이외에는 조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데 쓸 병사가 있으면 서로의 권력 투쟁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 수병 200여 명과 함께 배에 나눠 탄 조제프 푸셰는 그것이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1. 조선 왕과 도쿠가와 막부 쇼군(일본국왕)은 둘 다 중국에서 왕으로 책봉받았으므로 순수하게 의전만 놓고 본다면 동급입니다. 단지 중국도 조선을 더 윗줄로 대우했고, 전통적으로 일본이 중국-조선-일본으로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라 일본에서도 국제 무대에서는 약간 위로 대우해 주기는 했죠.

그러나 일본 국내는 어디까지나 '조선왕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다'는 입장을 유지했으며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일본중조(일본이 중화의 조정이며, 중국이나 조선은 어디까지나 외조라는 입장)론 등 여러 가지 국학이 발전하면서 그런 자취도 희미해져 갑니다.

2. 이 시기 사신 보낼 때의 실록을 보면, 중국 일본 안 가리고 사신으로 지명됐던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무능해서 못하고 죄를 지어서 못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애타는 상소를 올리는 장면이 많이 보입니다. 먼길에 죽을 위험도 적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리를 비우기도 힘든 상황이 있을 수 있는 등 여러 사정이 있었겠죠. 하여튼 서로 안 가려고 난리쳤던 게 사신행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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